3) 뜬봉샘
장수읍 수분마을에 뜬봉샘생태공원이 있다. 뜬봉샘은 금강의 발원지이며, 전설이 있다. 이성계는 나라를 얻기 위해 전국 영산의 산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으려고 신무산 중턱에 단을 쌓고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백일째 되는 날 새벽, 단에서 조금 떨어진 골짜기에서 무지개가 떠오르더니 그 무지개를 타고 오색찬란한 봉황이 하늘로 너울너울 떠나가는 것이었다. 봉황이 떠나가는 공중에서 “새 나라를 열라”는 하늘의 계시를 듣고 태조 이성계는 단 옆에 상이암(上耳庵)을 짓고 이 곳의 샘물로 제수를 만들어 천제를 모셨다고 한다. 봉황이 떠올랐다고 해서 샘의 이름을 뜬봉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4) 합미성 또는 할미성
장수군에서 가장 높은 팔공산 위에 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합미성(合米城)이라고도 하고, 할미성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합미성은 조선군의 군량미를 비축하던 산성이었다. 왜병이 쳐들어오자 군량미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산성을 불 질러 모두 태워버렸다. 그래서 합미성 주변을 파면 임진왜란 당시 타다 남은 쌀이 지금도 나온다고 한다.
팔공산 아래 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여 남편은 군사로 뽑혀 전쟁터로 나갔다. 전쟁에 나간 남편은 수십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은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며 날마다 팔공산에 오르며 돌을 하나씩 쌓고 또 쌓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합미성이라고 한다.
팔공산 밑에 한 늙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이 부부가 내기를 하였다. 할머니는 돌로 성을 쌓는 것이고, 할아버지는 서울까지 다녀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하루 만에 성을 다 쌓았고, 할아버지도 하루 사이에 서울까지 다녀왔지만 할머니보다는 늦어 내기에서 졌다. 무엇을 걸고 내기를 했는지 전해지지는 않지만 당시 내기에서 이긴 할머니가 성을 쌓았다고 하여 팔공산에 있는 산성을 할미성으로 불렀다고 한다.
=> 남성은 멀리까지 가고, 여성은 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으로 짝을 맞추고, 여성이 뛰어난 증거가 남아 있다고 한다.
5) 주대룡과 주논개
(1) 주논개의 아버지 주대룡
옛날 주촌 마을에는 살던 주대룡(朱大龍)은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장사였다. 장안산 높은 봉우리까지 올라가 30리나 떨어진 퉁퉁 바위에 뛰어내렸다. 퉁퉁바위 위에는 말굽 자국 네 개가 있는데, 주대룡이 말을 타고 가서 뛰어내려 생긴 자국이라고 한다.
장수현감은 주대룡을 그냥 두었다가는 나라에 큰 화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 포졸들을 풀어서 주대룡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워낙 날래서 잡을 수가 없었다. 매일 포졸들이 주대룡의 집으로 오자, 주대룡은 자기 때문에 집안사람들이 제대로 살 수 없고 또 어떤 화가 미칠지 몰라서. 일부러 포졸들에게 잡혀 주었다. 포졸들이 주대룡을 죽이려고 칼과 창 그리고 철퇴 등으로 베고 찌르고 했으나 상처 하나 생기지 않고, 꿈적도 하지 않았다.
주대룡이 자진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해도 끼친바 없고 끼칠 사람도 아닌데 왜 이렇게 죽이려고 하는가? 내가 산 것이 걱정된다면 내가 죽겠다마는, 청을 한 가지 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청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자기 시체를 주촌(朱村)에다 묻어달라고 했다. 주대룡은 버드나무 가지로 자신의 겨드랑이 밑을 세 번 때리라고 했다. 그렇게 하니, 칼로 찔러도 끔적하지 않던 주대룡이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주대룡이가 죽자 장수현감은 기뻐하다가 주촌에 묻어달라는 청을 잊어버리고 딴 곳에다가 묻었다. 주대룡이 묻힌 곳에는 오늘날까지도 풀이 자라지 않아 벌건 뫼로 남아 있다. 주대룡이 죽은 뒤 태어난 딸이 바로 주논개이다. 논개가 목숨을 버리면서 왜장을 죽여 나라에 충성한 것을 보고, 사람들은 주대룡의 넋이 여자로 환생해 행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2) 주논개의 오라버니 주대룡
주촌 마을에 살던 주씨 집안에서 첫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은 용호상박(龍虎相搏)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윗목으로 서너 걸음 걸어가서 사방을 응시하는 모양이 범상치가 않았다. 이를 본 부인은 겁에 질려 남편에게 알렸고, 남편은 이러한 사실을 감추고 아이의 이름을 대룡(大龍)이라고 지었다.
아이의 용모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주씨 부부는 이러한 사실이 관아까지 알려지면 나라를 망칠 역적이 태어났다고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까 두려워 걱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걱정이 커지면서 주씨 부부는 해결 방안을 며칠 동안 궁리하다가 더 큰 화를 입기 전에 아이를 죽일 결심을 하게 되었다. 주씨는 아이가 잠들었을 때 다듬돌로 눌러서 죽인 후에 마을 근처 소(沼)에 아이를 던졌다.
주씨가 아이를 던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산 너머 하늘이 밝아지더니 날개 달린 용마가 으르렁대며 주씨 집 상공으로 날아와 한 바퀴를 빙 돈 후 아이를 던진 소(沼)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 주씨는 “'큰 죄를 지었구나!”라고 한탄하며 후회했으나 이미 아이가 죽은 뒤였다.
주씨 부부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몇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어느 날 밤 주씨가 잠을 자는데, 홍안백발(紅顔白髮)한 노인이 꿈속에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너의 조상인데 나의 집이 장군대좌(將軍大座)라서 그 기운으로 대호군(大護軍)을 낳게 하여 얼마 안가서 불어 닥칠 나라의 환란을 평정케 하려고 용상(龍像)의 장수를 보냈더니 네가 무지몽매해서 큰 인물을 잃었구나! 원통하다! 그러나 나의 기운이 남았으니 이번만은 우(愚)를 범하지 말고 고이 기르면 사고로 가문과 조상을 빛내고 나라에 보답할 것이며 미천한 이름으로 귀함이 하늘을 찌를 것이니라.”
그 꿈을 꾼 후 얼마 있다가 부인에게 태기가 있었고, 열 달이 지난 갑술년 갑술월 갑술시에 딸이 태어났다. 주씨는 전에 조상이 나왔던 꿈과 사갑술(四甲戌)이 모두 범상치 않다 생각하여 '술(戌)'의 의미인 '개'자와 '낳다'의 지역 방언인 '논(놓다)'자를 합하여 딸의 이름을 논개(論介)라고 지었다. 후에 주논개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남강(南江)가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해 살신성충(殺身成忠)한 여장수로 알려졌다. 만일 주논개의 오빠인 주대룡이 살았었다면 임진왜란 초전에 승리했을 것이므로 안타깝다.
=> 주대룡과 주논개는 부녀라고고 하고 오누이라고도 했다. 어느 쪽이든지, 천하장사 주대룡이 억울하게 죽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고 주논개가 나섰다고 앞뒤를 연결시켜 말했다.
*<뜬봉샘생태공원>
*<논개사당>
*<논개초상>
*<논개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