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 경순왕릉(漣川 敬順王陵)>
경주를 벗어난 신라왕릉은 처음이다. 아니 경순왕릉이 아니면 경주 왕릉 아인 신라왕릉은 없지 않은가. 크기가 경주의 왕릉보다 작다. 아마도 고려 왕릉 제작 기법에 따른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왕릉을 옆과 뒤로 두르고 있는 낮은 담장인 곡장은 고려 시대의 방식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조선왕릉과도 별 차이가 없다. 조선왕릉이 고려왕릉 제작기법을 따랐으니 그럴법도 하다. 경순왕릉을 보니 신라에서 고려로 또 조선으로 이어지는 문화의 전통 가지를 또 하나 확인하는 듯하다.
경주왕릉은 크지만 경순왕릉, 조선왕릉이 다 같이 별로 크지 않다. 점점 작아지고 낮아지는 왕릉, 그만큼 백성의 눈높이로 내려온 한국 왕조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백성과의 대등의식을 죽은 후에도 보여주는 왕들의 배려가 백성의 신뢰를 얻어 왕조의 수명을 길게 했고, 왕조 간에도 평화적 교체가 가능하게 했던 동인이 아니었나 한다.
누구의 피도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애가 여기서도 다시 확인된다. 경순왕이 그 와중에서 투항하여 싸움을 줄이고 백성 목숨을 보존케 한 것은 그의 낮은 분묘의 모습과도 연계된다. 그 왕을 고려왕조에서는 그를 정승공에 봉하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편히 수명대로 살게 배려했다. 고려의 여러 왕이 다섯 번이나 바뀌는 동안에도 생존하여 경순왕은 천수를 다하도록(978년, 경종 3)오래 살았다. 왜 후백제의 견훤이 아닌 고려의 왕건으로 왕조가 바뀌었는지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경순왕의 이러한 슬기와 애민정신을 칭송하는 경우는 별로 본 적이 없다. 패권주의만 높이는 차등의 사고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겸허하게 돌아볼 일이다.
경순왕릉 바로 옆은 휴전선, 민간인 통제선이다. 죽어서도 최전방에서 전쟁이 나지 않도록 평화를 지키는 거 같다.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방문일 : 2021.9.12.
*경순왕릉 소개
경순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927년에 왕이 되어 935년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년간 재위하였으며 978년(경종 3)에 죽었다.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 조선시대에 찾게 되었다고 하며,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무덤의 외형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둘레에는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돌렸고 능 주위로는 곡장(曲墻)이 돌려져 있다.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 있는 비문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능 앞에 있는 기타 석물로는 네 면에 사각 화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長明燈)과 함께 그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望柱石)이 하나씩 서 있다. 신라왕릉의 경우 곡장이 마련된 것이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왕릉에 비로소 곡장을 마련하고 있어 묘비에서와 같이 경순왕이 죽자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릉의 주변에는 1986년에 건립된 재실과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이 서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왕릉. 안으로는 접근이 불가하다.
경순왕선도비각
선도비각. 비문은 마모되어 읽을 수 없으나 경순왕릉임은 알 수 있다고 한다.
입구 쪽에서 바라본 왕릉. 앞쪽으로는 재실과 비각이 보인다.
*경순왕릉 입구
*경순왕 넷째아들 대안군 김은열(金殷說)과 7세손 태사공의 묘소와 영단
경순왕릉에 이르기 전에 오른쪽에 있다.
대안군은 왕건의 딸 낙랑공주의 후사이다. 그의 손자 김심언(金審言)은 영광김씨의 시조이다. 7세손 태사공은 전과목 장원 급제한 인재로 고려 예종기에 정일품 벼슬을 한 인물이다. 경순왕의 후손이 고려조에서 잘 안착하고 요직에서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경순왕 후손들이 고려조에 무리없이 잘 적응해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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