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당 김은호의 충무공 영정
광복의 기쁨을 만끽해보러 올라온 서울은 나에게 쓴 웃음을 안겨주었다.
미술계의 간부자리 문제가 아니라、하는 짓들이 모두 불쾌했다.
모든 화가와 미술학도가 이의없이 참가한「선전」에서 특선、추천작가、심사위원 된 것이「친일파」라는 누명으로 바뀔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일이다. 나는 아직까지 반일사상의 행동표시로「선전」출품을 거부한 화가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기미독립만세 때「독립신문」을 뿌리다가 왜경에게 붙잡혀 1년동안 옥고까지 치른 내가「선전」에 특선해서 창덕궁상、총독상을 받고 추천작가가 되고 심사에 참여한게 무슨 죄라고 해방이 되니「친일파」로 몬단 말인가. 그러나 때가 때인만큼 불평하거나 항변할 계제가 못되었다. 다만 그런 풍토가 미웠을 뿐이다.
45년 10월 21일 서울에서 다시 안성에 돌아와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나는 속으로 애타게 바라던 아들을 보았다. 내 나이 54세에 3대독자 成源성원이를 얻은 것이다. 나의 마음은 무엇보다 기뻤다. 만년의 독자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서울 권농동집을 팔았다. 이때 집 판 돈으로 3년후 서울에 올 때까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편안히 살 수 있었다. 안성에서 사는 동안 나는 와룡동집은 안채를 친구에게、사랑채는 남에게 전세를 놓았다. 내왕하면서 쓸 하나를 비워놓고 서울에 오면 그 방에서 지냈다.
45년 12월 어느날이었다. 마침 서울에 올라와 있는데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멀리 전남 순천에서 올라왔다는 지방 유지들이었다. 인솔하고 온 사람은 반갑게도 전에 이묵회 회원이었던 金良洙김양수씨였다. 김양수씨는 신익희、최두선씨와 함께 조도전대학을 나온 분으로 국회의원、원자력원장 등을 역임한 명사다. 나는 김씨를 보고 너무 반가와『아니 이게 누구야 金선생 아냐』하고 소리쳤다.
『일본놈들도 쫓겨가고 조선이 독립된 마당에 이당선생이 안녕히 계신가 하고 문안드리러 왔습니다. 그래 요즘 사는 형편이 어떠세요?』
이렇게 인사를 주고 받은 후、김씨는 같이온 순천유지를 차례로 소개했다. 『순천에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사당이 있는거 아시죠? 충무사 말입니다. 수년전에 순천의 유지들이 돈을 거두어 사당을 새로 짓고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지금까지 충무공의 영정을 모시지 못하고 있어요. 이제 나라도 독립이 되고 했으니 충무공의 성혼을 담은 영정을 모시자는 발기가 나왔습니다. 』
『그러니까 나더러 충무공 영정을 그려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지금 조선 안에 이당선생 말고 충무공어른의 영정을 신기있게 그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한때 나에게 문인화(사군자)를 배웠던 김양수씨는 내가 21세에 벌써 어용화사가 되어 고종、순종의 어진을 모신 일이며 수많은 문사들의 초상화 그린 일까지 샅샅이 알고 있었다.
조국의 해방을 맞고 나서 최초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다름 아닌 민족의 성웅 충무공의 영정이 되나보다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다른 분이 아니고 충무공이라니 나도 한번 심혈을 기울이고 싶소. 그러나 여기엔 조건이 있습니다. 충무공은 역사의 인물이며 임진란 때의 성장입니다. 그러한 충무공의 위인상을 적당히 아무렇게나 상상하여 그릴 순 없는 일이 아닙니까. 나로선 그 방면의 학자들이 문헌기록을 찾아 그분의 모습을 지시해주고 어떻게 그려야 한다는 합의가 없이는 함부로 그릴 수가 없는 일입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순천유지들은 당황했다. 그러자 김양수씨가『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전에 춘향초상을 그릴 때도 나 혼자 생각해서 적당히 그린 게 아닙니다. 그 방면에 연구가 깊은 학자와 사계의 권위자에게 의견을 들었지요. 이번에도 충무공을 잘 아는 학자、권위자에게 어떤 용모였는지、체구는 어떠했는지 문헌에서 찾아달라고 해야 합니다. 고증자료를 모으기 위한 전문인사들의 후원회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분들의 권위있고 통일된 의견에 따라 기술을 제공할 뿐입니다. 』
순천유지들은 내 말대로 고증위원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 김양수씨만은 서울에 남아 충무공연구가와 역사학자를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충무공영정 제막
45년 12월에 김양수씨와 순천유지들에게 위탁받은 충무공영정은 「충무공 기념사업회」가 정식으로 발족하면서 착수하게 되었다. 기념사업회는 순천의 충무사뿐 아니라 통영의 제승당에도 충무공의 영정을 모시기로 결정했다. 나는 기념사업회의 편찬위원회가 문헌에서 뽑아준 고증자료에 입각하여 충무공상 얼굴 모습의 윤곽을 잡았다.
편찬위원회의 고증자료 제공자는 변영만、정인보、이중화、황의돈、이은상、이병도、박종화 등이었다. 위원들은 조선「호텔」에서 자주 회합을 갖고 고증자료를 서로 검토했다. 여기서 각자가 제출한 연구자료를 모아 책을 매니 상당한 부피의 큰 책이 되었다. 이때 친일파로 몰려 두문불출하던 육당도 공식석상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우 최두선과 친구인 김양수가 찾아가 부탁하는 바람에 그가 찾아낸 자료를 보내주었다. 이 고증자료는 영정을 그리는 바탕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서애 유성룡의『징비록』속에 나오는 이순신장군의 용모와 성품을 나타낸「寡言笑容貌雅飭 如修謹之士 中有膽氣 과언소용모아칙 여수근지사 중유담기」라는 대목은 큰 도움이 되었다.
노산 이은상은『이충무공전서』를 펴내면서 나의 영정도판을 이렇게 해설했다.
『기록상으로 보아서는 일찍 저 통영 鑿梁廟반량포 안에 공의 상을 모시고 제사지냈다는 것이 있으나 전연 그 뒷소식을 알길 없고、또 왜정시대에 여수 충민사에 화상을 모신 일이 있으나 그 내력과 뒷소식도 역시 알길이 없고、또 1932년 현충사 복구를 위한 거족적 운동이 일어났을 때 청전 이상범화백이 그린 일이 있으나 미처 고증이 부족하였으므로 해방후 1949년에 충무공기념사업회 편찬위원 여러분의 고증 아래 김화백이 두벌을 그려 모대좌상은 순천 충무사에 모시고、무장입상은 통영 제승당에 모셨는데 무엇보다도 그 용모에 대해서는 충무공과 가장 친한 당시 영의정 유성룡의「징비록」중에 「공은 과묵하여 마치 수양 근신하는 선비와 같다」(容貌雅飭如修謹之士용모아칙 여수근지사)라는 귀절을 근거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공의 용모를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고 썼다.
그러나『징비록』의 「과묵한 얼굴」「근신하는 선비같다」는 귀절도 사실 초상화로 특징짓기에는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인 표현이었다. 무기보다 오히려 문기가 넘치는 용모였다는 점은 중요한 참고가 되었지만 눈매、수염、골격 등은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충무공기념사업회에선 나에게 다음과 같이 그 영정의 방향을 제시했다.
① 동·서의 위인초상을 참고할 것 ② 충무공 후손의 골격을 참고할 것 ③ 筏橋本벌교본을 참고할 것 등이었다. 벌교본이란 충무공을 늘 따라다니던 한 중(僧)이 서투른 솜씨지만 공의 특징을 잘 살려 그린 충무공의 화상이었다고 전해지던 것으로 전남 벌교에 보존되어 있었다.
이 진본은 왜정때 일본사람이 없애버리고 다만 이중화가 그 사진 한 장을 구해 가지고 있었다.
그림 수법은 보잘 것이 없었지만 얼굴과 수염의 구체적인 표현은 귀중한 자료였다. 나는 마침내 충무공상의 용모에 결론을 내렸다. 선비같되 담기를 느낄 수 있는 뛰어난 위인상이라야 한다. 세부 묘사에선 이중화의 벌교본 사진을 참고한다. 의복은 충무공시대의 다른 화상에서 취한다는 3대원칙을세우고 제작에 착수했다. 심혈을 기울여 그린 충무공영정은 50년 봄에 완성을 보았다. 순천 충무사에 보낼 모대본과 통영 제승당에 보낼 무장본을 함께 완성시켰다.
내 그림이 기념사업회 심사위원회에서 완벽한 작품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충무공상으로 공인을 받기 위해 문교부、공보부에 청원、인증을 얻었다.
모대본은 순천으로 보내져 승주군해룡면신성리 충무사에 봉안되었다. 한산도 제승당에 갈 무장본은 충무공 탄신 4백5주년이 되던 50년 4월 24일 중앙국립극장(전 태평로 국회의사당) 3층 강당에서 영정 제막식을 가졌다. 신익희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조병옥、안재홍、유동열、정인보、설의식 등 여러인사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기념사업회를 대표한 이은상은 나의 충무공영정이 공인본으로 되었다고 보고했다.
홍포에 싸여 식단 위로 옮겨졌던 영정은 신국회의장에 의해 제막되었다. 제막식을 마치고 1주일 후인 5월 2일에 충무공 입상무장본은 제승당에 모시기 위해 서울역에서 특별열차에 실려 떠났다. 봉안사로는 이중화、김익건、설의식과 그림을 그린 내가 따라갔다. 제관으로 국방장관을 대리하여 차관이 동행했다. 진해에 도착한 영정과 일행은 특별대기중이던 군함 雩南號우남호를 타고 이순신장군이 왜군을 무찔렀던 옥포、당포를 돌아 한산도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