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도라도 [El Dorado] 피로 물든 전설의 황금향
엘도라도[Eldorado]는 스페인어로 '금가루를 칠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원래는 보고타 가까이 있는 인디언 마을의 전설적인 통치자였다. 축제 때 벌거벗은 몸에 황금가루를 칠하고 의식이 끝나면 구아타비타 호수에 뛰어들어 가루를 씻어냈다고 하며, 신하들은 보석과 금으로 만든 물건들을 호수에 던졌다고 한다.
페루와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1530년 이전에 이 이야기를 전해들었고, 그 중에는 오마과라는 도시에서 엘도라도를 직접 만났다는 사람도 있었다. 1538년 '금가루를 칠한 사람'을 찾기 위해 페루에서 출발한 스페인인들과 베네수엘라에서 출발한 독일인들은 보고타 고지대에서 만났으나 아무 흔적도 찾지 못했다. 이후 그 지역은 스페인인의 통치를 받았다. 그를 찾는 작업이 오리노코·아마존 강 유역에까지 이르게 되면서 엘도라도는 마노아와 오마과라는 도시와 더불어 완전히 전설적인 황금의 도시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16세기, 갓 발견된 신대륙을 향하여 많은 남자들이 바다를 건넜다. 그들을 흥분시킨 것은 황금으로 만든 집에 살며 온몸에 사금을 칠한 인간에 대한 전설이었다. 남자들의 욕망은 절정에 달해 대지에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러나 황금향은 욕망의 깊이에 반비례하는 것처럼 지금껏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그 부족의 정식 명칭은 마노아라고 한다. 오리노코강1)지류의 수원에 있는 거대한 호수 기슭에 도시가 세워져 있다.
그 도시 사람들은 건물에서부터 무기, 가구, 의복, 그리고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또한 지붕이나 도로에 깔린 돌 등 모든 것에 태양처럼 빛나는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호수 기슭에 퇴적되는 무수한 사금을 써서 이러한 것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황금이 그다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먹을 것이나 마실 것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주민들의 신앙에서는 황금이 커다란 역할을 한다. 특별히 매년 한 번씩 치르는 중요한 의식에 황금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황금으로 만든 둥그런 집에 사는 '태양의 아들', 즉 부족의 왕은 호수 기슭에서 그 의식을 행한다. 그는 전라(全裸)의 몸에 기름을 바르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빈틈없이 황금 가루를 바른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등장한다.
황금으로 만든 반지, 팔찌, 목걸이, 왕관으로 몸을 치장한 '태양의 아들'에게 사람들은 더 많은 황금과 보석을 헌납하기 때문에 그의 발치에는 황금과 보석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시종들을 거느린 그는 뿔피리와 북의 연주를 들으며 뗏목을 타고 호수를 지나간다. 뗏목에는 황금으로 만든 여러 가지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호수 중앙에 도착하면 그는 그 황금 헌납품들을 아무런 미련 없이 모두 호수 안으로 던져 넣는다. 이것은 호수에 사는 악마에게 드리는 제물이다. 이렇게 해서 의식이 끝나고 왕은 사람들의 환희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호숫가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도시를 찾는 자는 정중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과일 샐러드와 앵무새 스튜, 벌새 구이 등이 대표적인 요리다. 길가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황금이나 보석은 줍지 않는 편이 좋다. 주민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중에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피사로의 부관이었던 남자가 전했다는 체험담이다. 남자의 이름은 오레야나라고 한다. 그는 피사로의 지시로 부대를 이끌고 페루를 출발했지만 산속에서 부하들을 내팽개치고 단독 행동을 했다. 결국 그는 무사히 대서양 쪽으로 나올 수가 있었지만 그 도중에 만난 것이 이 도시, 즉 '황금향(黃金鄕)'이었다. 엘도라도라는 명칭의 유래는 그가 말한 '황금의 사람' 또는 '황금왕'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가 이 땅의 부를 조국인 스페인으로 가지고 돌아간 것은 아니다. 귀로에 기아나 부근의 큰 강에서 용맹스러운 '아마존 여족(女族)'을 만나 습격을 받아 탈출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물론 이 아마존족이라는 것은 그의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 '황금향' 외에도 막대한 양의 황금에 얽힌 수많은 소문들이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 나돌았다. 그 대부분은 원주민이 소문낸 것이었다. 그들은 이런 화제에 스페인 사람들이 흥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Los Masis San Juanito HD1
(로스 마시스 산후아니토 H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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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오산(誤算)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라는 제노바 사람이 이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무대를 1492년의 스페인으로 돌리자. 이해에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인들은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왜냐하면 8세기 초반에 스페인에 상륙한 아랍인들이 겨우 7년 만에 이 땅을 정복한 뒤, 그 이래로 주인처럼 군림하고 있었는데 기독교인들의 끈질긴 반격 끝에 간신히 탈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7백 년에 걸친 굴욕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이슬람교도의 마지막 요새였던 그라나다는 그해 1월에 항복했고, 알람브라 궁전에 십자가와 왕의 깃발이 펄럭이게 되었다.
열광하는 기독교인들의 세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귀족이나 병사들은 특히 '성전(聖戰)'에서 이긴 용사로서 레콘키스타도레(영토 회복자)의 이름에 취했다. 그런데 스페인 왕실은 그저 손을 놓고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의 비용은 엄청났고 이슬람교도에게 빼앗은 전리품이 생각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왕실과 귀족 사이에는, 말하자면 계약관계가 있어서 전쟁에서 얻은 영토의 대부분은 귀족들 차지가 되었다. 왕실은 재정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수년간에 걸쳐서 재정 지원자를 찾고 있었던 콜럼버스에게는 이것이 기회였다. 그는 왕실을 향해 원정으로 얻을 수 있을 막대한 부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왕실은 이 '도박'에 내기를 걸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콜럼버스가 목적지로 생각했던 곳은 마르코 폴로가 기록했던 '지팡그'였다. 지붕까지 황금이 깔려 있다는 전설의 '황금의 섬'이었다. 만일 이 섬을 발견할 수 없어도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후추는 식품 보존제였으며 약품이나 향미료로서 황금에 비길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이렇게 해서 페르난도와 이사벨 두 왕의 지지를 얻어 출항하였다. 그리고 그해 말에는 에스파뇰라 섬에 상륙할 수 있었다. 신대륙의 '발견'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그런데 각지를 탐색하는 콜럼버스의 마음에 곤혹스러움이 생겼다. 목표로 한 황금은 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밑돌았던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노예무역의 가능성에 대해 왕실에 타진해보았다. 그의 항해를 지지한 이사벨 여왕은 이 제의를 거부했다. 오히려 신대륙의 영토에 대한 관심 때문에 당초에 콜럼버스와 약속해놓았던 영토권을 점차 왕실 소유로 삼았다. 콜럼버스는 네 번에 걸친 항해 중에 끊임없이 환상 속의 지팡그를 찾았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실의 속에서 죽어갔다.
신대륙을 향해 제2, 제3의 콜럼버스들이 떠났다. 먹을 것이 없어 떠난 자, 무뢰한, 도둑, 군인, 광신자······. 대개가 일확천금을 꿈꾸는 남자들이었다. 1500년 무렵에는 카리브해 연안에 스페인의 거점이 하나둘씩 생겨서 이런 남자들이 서성거리게 되었다. 황금향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들이 난무했던 곳도 바로 이런 장소들이었다. 마침내 남자들 중에서 리더가 나타나서 대열을 짜고는 오지로 출발했다.
K'ala Marka - He Venido
(칼라 마르카 - 내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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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제국의 정복
신대륙의 원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의 땅이 '발견'되어 드러나는 것 자체가 막대한 폐해였다. 원주민들은 쇠로 된 무기도 몰랐고 말도 처음 보는 동물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을 쫓아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극히 소수의 백인들 앞에서 그들은 굴욕적인 복종을 강요당했다.
백인들과 만났다는 것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수의 죽음이 속출했다. 예를 들면 1492년에 콜럼버스가 에스파뇰라 섬에 왔을 때 섬 주민은 3백~4백 만 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겨우 30년이 지나는 동안에 주민의 수는 200명으로 줄어들었다. 저항하는 사람은 죽음을 당했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강제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백인은 전염병까지 섬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 결과 나타난 수치였다.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대학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미 각지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다반사였다. 여기서 악명 높은 한 스페인 사람을 통해서 그 실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남자의 이름은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1475년경~1541)이고 '황금 제국'으로 알려진 잉카의 정복자다. 잉카 제국의 영토는 지금의 콜롬비아, 페루, 에콰도르에 걸쳐 있었다.
그런데 '돼지치기'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피사로는 가난하게 태어났으나 신대륙으로 가서 입신출세한 사람이다. 그는 헤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1485~1547)의 아스텍 왕국정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것을 결심했다.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은 아스텍을 능가하는 황금 제국의 정복이었다.
1531년 1월, 그는 모집해둔 180명의 용병들과 서른일곱 마리의 말을 끌고 파나마를 출항하여 잉카 제국 북단의 도시인 툼베스(Tumbes: 페루 북서부)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페루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황제 아타우알파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황제는 피사로의 면회 요청을 받아들여 7천 명의 부대를 이끌고 회견장소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스페인 신부가 십자가와 성서를 손에 쥐고 피사로의 숙사로 방문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황제는 이를 거부했다.
"기독교도들이 빼앗아간 것들을 되찾을 때까지는 이곳에서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
그렇게 말하고는 신부가 내밀었던 성서를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포가 불을 뿜었고 숨어 있던 스페인 병사들이 잉카군을 덮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잉카군은 괴멸하였고 황제 자신은 돌로 된 방에 유폐되었다. 황제는 피사로와 석방을 위한 교섭을 했고 피사로도 이를 인정했다. 석방 조건은 황제가 있는 방을 가득 채울 정도의 황금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각지로부터 황금 신상이나 장식품, 의자, 방패, 술잔 등이 모여서 순식간에 방은 황금으로 가득 찼다. 그 중량은 순금 6.1톤, 순은 60톤이었다고 한다. 스페인 정복자에게 순박한 원주민을 속이는 일은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었다.
피사로의 생각대로 사태는 진전되어 황제는 석방되지 못하고 처형되었다. 처형 전에 피사로는 황제를 개종시켜 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주었다고 한다. 그 후 피사로는 페루 제독의 칭호를 가지고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제압하여 더욱 많은 금은을 입수한 다음 새롭게 리마를 수도로 제정했다.
욕망에는 끝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이 신대륙에 유포된 황금 전설이 보다 막대한 것이었던가? 상당한 양의 금과 은을 손에 넣은 스페인 사람들은 그 결과에 만족하지 못해 황금 찾기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결국은 동료들끼리의 싸움으로 인해 암살당한 피사로였지만, 그가 남다른 욕망을 에너지로 하여 끝없이 찾아다녔던 저 환상의 '황금향'은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황금향' 전설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잇달아 극적인 영향을 주었고 위정자는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페루 제독이었던 루이스 우르타드 데 멘도사(L. W. de Mendoza)는 페루의 무정부상태를 이 전설로 완화시켰다. 당시 페루에는 많은 낭인들이 모여 있었고, 거기에다 원주민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멘도사는 '엘도라도 탐색대(探索隊)'를 조직하고 격려했다. 1560년의 일이었다.
물론 실제로 황금향을 발견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대개의 탐색대는 많은 대원들을 잃었고 채워진 것은 피로와 실망감뿐이었다. 그들의 탐색은 조국 스페인 왕실의 영토를 확대시켰을 뿐이었다.
Alborada - Ponchito (San Juanito Tradicional de Ecuador, 2013)
(알보라다 - 폰치토 (에콰도르의 전통 산 후아니토,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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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향에 발을 들여놓은 남자
현재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해서 추측해보면 많은 탐험들 중에서 황금향에 가장 가깝게 간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곤잘로 히메네스 데 케사다(Gonzalo Jiménez de Queasada: 1495~1579)라고 한다. 그라나다 출신인 그는 피사로가 취득한 잉카의 황금이 세비야의 도시에 들어온 지 2년 후에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1536년 2월, 620명의 보병과 85기의 기병, 그리고 인디오 하역 인부 2백 명, 합계 9백 명의 대부대로 산타마르타를 출발해서 마그달레나 강을 남하하여 보고타 고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소금의 산 이 있다는 원주민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만을 믿고 떠난 여행이었다. 소금은 원주민에게 귀중한 물건이었고, 소금과 황금은 서로 교환되었다. 즉 '소금이 있는 곳에 황금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년 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일행은 겨우 166명으로 줄어 있었다. 가슴까지 흙탕물이 차오르는 곳에서 행군하며 큰 뱀이나 악어, 나아가서는 인디오의 공격, 기아, 말라리아 등의 공격을 받은 결과였다. 어찌 되었든 케사다 일행은 현재의 보고타(Bogota: 후에 케사다가 건설한 콜롬비아의 수도) 부근에 도착했다. 이 근방은 치브차족의 지배 지역이었다. 당시 그들의 인구는 대략 3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케사다의 군인들은 약탈을 계속하면서 북상했다. 황금과 함께 원주민이 '녹색의 작은 돌'이라고 부르는 에메랄드가 대원들을 흥분에 들뜨게 했다.
치브차족의 대추장은 에메랄드를 박은 황금 가마에 올라타고 전장에 등장했다. 입술, 코, 귀, 허벅지 등 온몸에 황금 장식품이 번쩍이고 있었다. 부적으로 꺼내온 전(前) 대추장의 미라 또한 전신이 눈부실 정도로 많은 황금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눈구멍과 배꼽에는 달걀 크기의 에메랄드가 박혀 있었다. 그들의 깃발까지도 황금 판을 얇게 펴서 만든 것이었다.
전투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끝났다. 전쟁에 노련한 스페인 사람들 앞에서 치브차족의 공격은 아이들 싸움처럼 보였다. 전승자들은 정신없이 황금약탈을 자행했다. 그들은 전리품을 도시 한 귀퉁이에 쌓아올렸다. 방대한 양의 황금과 에메랄드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말에 올라탄 케사다 대장의 모습까지 감출 정도였다고 한다.
케사다는 이렇게 많은 보물을 눈앞에 두고도 만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공략해온 도시들은 모두가 흙으로 만든 건물이 늘어서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케사다가 전해들은 '황금향'에서는 도로와 건물들까지 모두가 황금으로 빛나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케사다에게는 '황금향'의 발견이야말로 최대의 관심사였지, 황금이나 에메랄드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황금향' 전설에 마음을 빼앗긴 인간의 집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체포한 원주민들을 철저하게 신문하여 진짜 황금향의 소재지를 찾으려 했다.
Los Incas - Urubamba (Musica Andina)
(잉카 족 - 우루밤바, 안데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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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원주민의 말이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그곳에서 2, 3일 정도 걸리는 곳에 구아타비타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황금의 사람' 의식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구아타비타 호수는 해발 2,700미터의 사화산(死火山) 화구에 생긴 호수였다. 그러나 케사다 일행이 찾아갔을 때 그곳에는 몇 채의 작은 오두막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호수에 얽힌 전설이 그들의 흥미를 끌었다.
어느 때인가 한 추장이 아내의 애인을 발견해서 죽여버렸다. 그리고 아내에게 애인의 시신을 억지로 먹게 했다. 아내는 이 잔혹한 행위 때문에 미쳐서 딸을 안은 채 구아타비타 호수에 몸을 던져버렸다. 그 이래로 아내와 딸은 호수 밑바닥에 사는 큰 뱀과 살게 되었다고 한다. 아내의 죽음을 슬퍼한 추장은 해마다 한 번씩 호수의 영을 위로하기 위해 제물을 던져 넣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송진을 온몸에 바르고 금가루가 뿌려진 바닥 위를 뒹군다. 그러면 그의 모습은 황금의 동상보다도 아름답게 빛났다고 한다. 그는 호수 한가운데까지 금박이 입혀진 뗏목을 타고 나아가서 제물을 던져넣은 다음 호수에 뛰어들었다. 추장이 마치 황금의 물고기처럼 수면으로 떠오르면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다고 한다. 호수에 사는 신비한 여성의 가호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치브차족에게 호수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이 구아타비타 호수는 많은 인디오들의 신앙 중심지로서 해마다 많은 순례자들이 이 호수를 찾아와서 제물로 황금이나 에메랄드 물건들을 물속에 던지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만일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호수 밑바닥에는 황금이나 에메랄드 같은 제물이 쌓여 있어서 수중 황금 도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 스페인 사람들을 충동질했다.
케사다 자신은 실행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의 조카인 에르난 데 케사다는 인해 전술로 호수의 물을 전부 퍼내는 엄청난 일에 착수했다. 실제로 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인디오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물이 없어진 호수 밑바닥에서는 작은 황금상이 몇 개 출토되었을 뿐이었다. 호수 밑바닥은 부드러운 진흙이 퇴적되어 마치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늪과 같았다. 황금처럼 무거운 물건은 진흙 깊숙이 가라앉아버렸을 것임이 분명했다.
Reportaje al Peru (Alpamayo) - parte 5 (Full HD 1080p)
(페루(알파마요)에 보고 하다 - 5부 (풀 HD 10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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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마요 Alpamayo
남미에는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안데스산맥과 알파마요산 그리고 티티카카호수이다. 안데스(Andes)산맥은 7000Km로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이고, 알파마요산은(Alpamayo) 세계에서 가장아름다운 산으로 선정됐고 티티카카호수(Titicaca Lake)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이다. 이 가운데 남아메리카 페루의 안데스산맥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알파마요(Alpamayo) 산은 1966년 독일잡지 알피니스무스(Alpinismus)가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산으로 선정하였다. 일반적으로 세계 5대 미봉을 꼽으라고 한다면 1. 쿰부히말라야의 야마다블람 2. 안나푸르나의 마차푸차레 3. 스위스 체르맛의 마테호른 4. 아르헨티나와 칠레 국경의 피츠로이 5. 페루 알파마요 일 것이다.
페루 안데스산맥의 일부인 코르디예라 블랑카(Cordillera Blanca)에서 가장 눈에 띄는 봉우리로서 높이는 5947m이다. 약 50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코르디예라 블랑카의 최북단 봉우리 가운데 하나로서 거의 완벽한 피라미드 형태로 가파른 얼음 봉우리이다. 1966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 산은 매우 숙련된 아주 극소수의 등반가만이 강행할 수 있는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 자리하고 있으며 만년설의 피라밋 형태의 봉우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빼앗고도 남는다. 알파마요산의 높이는 5,947m로 고봉 중에서도 그리 높지 않은 편이나 1957년에야 독일 하우저 팀에 의해 첫 등정에 성공했다.
산 이름은 안데스 산지에 거주하던 케추아족(Quechua) 언어로 '흙'을 뜻하는 '알파(Allpa)'와 '강' 또는 '진흙강'을 뜻하는 '마유(Mayu)'가 합쳐진 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알파마요 지역을 트레킹하는 방법으로는 3-4일 정도 소요되는 산타크루즈 트렉킹 코스 일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알파마요를 제대로 보고 싶다면 험난하고 힘든코스이지만 보다 스펙타클한 풍광을 볼 수 있는 Alpamayo Circuit(140km)로 대략 10-12일 일정이다.
Music of The Andes
(안데스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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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amayo - Magic Flutes & Music From The Andes
(알파마요 - 안데스 산맥의 마술 피리와 음악)
남미의 잉카 문명은 비극 속에 막을 내렸지만, 그 전통적 요소들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그 대표 주자중 하나가 알파마요 그룹이다. 그들이 연주하는 케츄아와 아이마라의 음악은 다양한 목관악기와 리듬악기로 특징지어지는데, 그들의 음악은 단순하면서 추상적이다. 음악으로 안데스 산맥의 바람과 고원의 광활한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남미 인디언들의 삶의 기쁨이 반영되고 영감이 담긴 음악들이다.
01. Vamos Longuita
02. Doloroso 3. La Bocina
04. Corazon - Corazon
05. Amazonas
06. Tamia Usia
07. Jatun Yurak
08. Papel De Plata
09. Vals Para Baltazar
10. Mallku
11. No Vuelvo Amar
12. Quito De Ensuenos
13. Es Para Ti
14. Pachacamac
15. Lagunerito
Música Instrumental Andina - Alpamayo * La Bocina
(안데스 기악 - 알파마요 *더 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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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Manoa)의 미스터리
페루로 와서 잉카군과 대접전을 벌인 끝에 패해 쫓겨간 창카족의 수도가 마노아였고 그 도시가 황금도시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영국의 육군 대령이자 탐험가인 코로넬 퍼시 포셋은 1925년 잃어버린 옛 도시를 찾으러 아마존 밀림으로 들어갔고 그의 실종은 20세기 탐험 사상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는다. 포셋은 탐험을 시작하기 전 여러 사전 조사를 하였는데 그 중 ‘알바레스의 브라질 탐험’, ‘옛 도시의 유적에 관한 보고서’등의 책을 발견하고 아마존 깊숙한 곳에 잃어버린 도시와 문명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역사적으로 전자는 1516년에 포르투갈의 알바레스가 겪은 실제 이야기이며, 후자는 1743년 포르투갈의 프란시스코가 알바레스의 손자인 디아스가 발견한 금광을 찾으러 브라질에 건너온 이야기이다. 포셋은 아마존 밀림에 사는 인디언들조차 더 이상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 지점에서 그들을 돌려보내면서 그들 편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것이 그의 마지막 서신이 되고 말았다. 그 편지의 내용인즉, ‘나는 지금 남위 11도 43분, 서경 54도 53분을 지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별 탈 없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느 탐험보다도 큰 사명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기어코 옛 도시를 찾고 돌아가겠습니다. 기쁜 소식을 기대하십시오. 1925년 5월25일 포셋.’이라고 되어 있었다.
Música Instrumental Andina - Alpamayo *Mashua
(안데스 기악 - 알파강 *마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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