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성경을 생활과 경제로 풀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처음 들으시면 생소한 면이 있겠지만, 읽어주시면 고맙겠고, 공감을 하시면 "퍼나르기 100명"으로 동역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생활과 경제는 현실 생활에서 바로 받을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농업 비유와 희년법의 복음적 적용(희년 천국의 실현) 1
세 가지 농업 비유와 비유 풀이의 개요
<볍씨 이야기>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막 4:2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가르침으로 사용한 비유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볍씨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씨앗을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와 죽음에서 다시 사는 부활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러함의 자손들에 대해서도 "씨(히,제라)"라고 하여, 그 씨가 앞으로 땅의 티끌처럼 수가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창 13:15,16). 아브라함의 후손이 장차 한 나라를 이루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을 것이고, 신약시대는 모든 인류가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벼는 논에서 자라서 우리가 먹을 쌀, 곧 양식을 내는 식물입니다. 벼의 낟알은 겉껍질을 벋기면 현미가 나옵니다. 벼의 낟알은 껍질과 알갱이(씨젖, 배젖), 그리고 씨눈(배아)이 있습니다. 벼에서 껍질을 제외하면 알갱이가 97%, 씨눈은 3%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3%의 씨눈에서 벼가 되는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씨눈은 알갱이에 비하여 3%로 매우 작지만, 그 3% 씨눈에 생명이 들어있고, 그 생명에 벼(쌀)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근본 성질이 들어있습니다. 이 근본 성질을 생물학에서는 유전인자나 DNA라고 합니다.
벼의 알갱이에 붙어있는 씨눈이 자라서 다시 벼가 되고, 쌀이 되어 사람과 동물, 그리고 뭇 생명체를 먹여 살립니다. 그런데 씨는 알갱이가 가진 영양분을 취해서 싹을 내고 자랍니다. 싹은 뿌리를 낼 때까지 알갱이에 있는 영양소를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씨눈에서 떡잎이 나고, 뿌리가 나면, 뿌리는 알갱이에서 땅(흙)으로 옮겨 영양소를 취합니다. 그래서 잎과 뿌리는 땅이 주는 공기와 햇볕, 그리고 온갖 영양을 취하여 자라고 열매를 냅니다.
그런데 볍씨에서 알갱이는 자기 몸에서 싹이 나면, 자기 몸(알갱이)을 희생하여 싹이 자라도록 영양을 공급하고, 죽습니다(사라집니다). 그다음 볍씨가 자라는데 필요한 영양소는 벼의 알갱이 대신 땅(흙,물, 공기,햇볕 등)이 하게 됩니다.
<벼와 볍씨의 구조>
<그림> 볍씨의 씨눈이 땅에 뿌리를 내려 스스로 자라기까지 씨젖을 먹고 자란다. 씨젖은 씨눈이 가진 생명을 위해 희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십자가의 구원원리다. 부활은 씨젖이 희생하여 새싹을 틔우는 것과 원리가 같다(요 12:24). 이와 같이 씨알 하나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에는 창조(우주)질서, 생활(경제)질서, 구원질서, 천국질서의 원리가 모두 들어있다.
벼는 껍질이 알갱이를 보호하고, 알갱이의 씨젓은 씨눈을 자라도록 자기 몸을 내어주고(헌신하고) 사라집니다. 씨눈은 생명을 가졌지만, 자신을 보호하는 껍질과 영양소가 되어주는 씨젖이 없으면, 생명을 가졌어도 싹을 틔우지는 못합니다. 벼는 알갱이가 하는 역할을 다하면, 이제는 땅이 그 역할을 이어받아서 대신하여 줍니다. 곧 벼의 생존과 생장은 씨눈을 가진 씨알과 그 씨알이 자라도록 영양을 공급하는 땅이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볍씨가 자라는 생명의 원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질서의 하나이며, 생명체가 가진 생명의 기본 속성입니다. 이런 생명의 역사는 성경에서 보면 창세기 1:11,12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흘러왔습니다. 사람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쌀로 예를 들면, 쌀은 이런 창조질서의 과정을 거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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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로고스) -> 땅 -> 씨 -> 모 -> 벼 -> 알(곡식) -> 쌀 -> 밥 -> 몸(사람, 肉) <=> 영(靈)
예수님은 이처럼 씨알이 싹을 틔우고 자라는 원리를 예로 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씨눈이 싹을 내거나 씨눈을 살리기 위해 알갱이가 죽어야 하는 희생의 원리를 비유로 들어서 예수님 자신이 죽어서 다시 사는 부활을 가르쳐 줍니다. 곧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희생되어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십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속량의 원리를, 싹이 나서 자라는 씨와 생명의 원리를 비유로 들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도 이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는 식물은 물론, 모든 생명체, 그리고 사람까지 그러한 속성을 가집니다. 어미는 새끼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주거나 희생하면서 새끼를 기릅니다. 사람도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는 온갖 정성을 쏟아붓는 사랑으로 양육합니다. 이러한 생명의 활동과 인간의 상호관계는 원리가 같습니다. 그래서 이 지구에서 생명의 역사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이렇게 구원자가 희생하는 원리, 곧 능력자가 값을 치러서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방식에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의 원리가 생명을 이어주고, 죽어가는 생명이 회복할 수 있으며, 인류와 생명과 역사를 이어갑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를 통하여 바로 깨달아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영성이 열려서 그 값진 죽음과 거룩한 희생에 대하여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서 그분을 따라 사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볍씨로 예로 든 생명과 그 생명체의 희생원리가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의 바탕이기도 하지만, 윤리 도덕의 기초이고, 구원받은 천국 백성이 살아가는 삶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생명체 생존원리와 무생물의 존재원리
그런데 이러한 볍씨의 예로 든 생명체의 존재와 생존의 원리는 무생물에도 비슷한 원리나 상호 작용의 관계적 요소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물과 무생물은 차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씨가 자라는 비유를 들고, 이어서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화나 진주, 고기잡는 그물 등의 비유로도 천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겨자씨가 자라는 생명의 성질이나 생명이 없는 누룩이 부풀어 커지는 물질의 성질은, 천국이 시작되어 미래를 향하여 자라거나 확장되는 것과 성질이 같다는 뜻입니다.
희년법에서 사람이 땅을 저당 잡히고 빌린 빚은 무생물인 땅이 생산물을 내어 대신 갚아줍니다(레 25:15,16,24,28). 그리고 그 땅은 내게 다시 돌아오는데 이때가 바로 희년입니다(레 25:28,8~10).
생명체인 볍씨는 성장하고 자라다가 때가 되면 자기 역할을 끝내고 일생을 마감합니다. 곧 소멸합니다. 그런데 비유로 든 누룩이나 보화도 마찬가지로 수명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명이 있는 볍씨의 성장과 변화, 그리고 소멸이라는 물질의 순환 관계는 생명이 없는 무생물에도 들어있는 속성입니다. 원래 생명체이었던 나무를 재료로 하여 지은 목조 건축물이든, 생명 없는 콘크리트로 지은 건축물이든 그 건축물의 특성, 곧 생성과 변화, 그리고 소멸하는 원리는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이 가진 기본 속성은 서비스나 무형물에도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볍씨를 재배하는 농업이든, 진주나 보화와 관련된 공업이든, 상업이든, 같은 원리가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서비스업, 최첨단 과학이 적용되는 정보화 산업에도 같은 성질이 들어있습니다. 오늘날의 IT 기술, AI의 등장과 기술의 혁명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창조질서에 들어있는 볍씨 한 톨이 자라는 생명의 속성과 작디 작은 모래알 하나가 가진 존재원리(생성->변화->소멸)가 같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기술의 진보와 혁명이 무에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1차 산업을 바탕으로 하여 2차 산업으로, 2차 산업이 3차나 4차 산업으로 변형,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를 지어서 볍씨를 자라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사람의 살아가는 현세나 내세에 대해서도 구분 없이 그 원리가 하나로 통할 수 있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창조질서는 생활질서, 경제질서, 구원질서, 그리고 미래에 완성될 천국의 질서까지도 모두 창조주로부터 만들어진 하나의 피조물입니다. 그 질서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그 안에 모두 들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두고 “하나님은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있다(엡 3:6)”라고 했습니다.
지금 말하는 볍씨 이야기는 씨알에 들어있는 그 만유 공통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과 천국 복음을 비유로 말씀하신 원리 안에 다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세 가지 농업 비유에 대한 내용 요지
세 가지 농업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 포도원 품꾼의 비유,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비유 중에 농업을 예로 든 비유이므로 “농업 비유”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세 가지 비유를 종합하면, 이 비유들 속에 천국 농업, 곧 천국의 경제법이 들어있습니다. 이 땅에서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 경제원리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먼저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가르쳐 주는 시장원리대로 사람을 포도원에 고용하여 그 급료를 일당제(날품), 월급제, 연봉제로 지급하면, 레위기 희년법에서 발생한 몸값이 소멸합니다. 그래서 안식년이나 희년이 와야 풀리게 되는 빚 거래, 곧 몸값으로 발생한 채권 채무가 소멸합니다. 그래서 노동시장은 채권 채무가 걸려있는 금융가격과 자본가격이 소멸하여 이 값이 일으킨 구조적 문제가 소멸하여, 온전한 자유가 회복되고 보장됩니다.
그다음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가 가르쳐 주는 시장원리대로 주인이 포도원을 경작하고, 주인에게 세(貰, rent)를 내면 포도원 토지는 레위기 희년법에서 발생한 땅값이 소멸합니다. 그래서 희년이 와야 풀리게 되는 빚 거래, 곧 토지의 금융가격(채무)과 자본가격(채권)이 소멸합니다. 그래서 토지시장은 온전한 자유가 회복됩니다.
빚 거래이고, 금융가격인 몸값과 땅값이 소멸하는 것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하는 땅이 스스로 내는 산물, 곧 토지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것은 창조 섭리에 들어있는 토지 주인의 크신 능력과 은혜로 가능합니다. 이것은 천지를 만드신 주인과 땅, 그리고 주인의 땅을 관리하는 사람 간에 있어야 할 창조질서입니다. 그리고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는 천국 경제이고, 자유 경제의 시장원리입니다.
이 말은 처음 들으면 생소하게 느껴지고, 수긍하기도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혹자는 흔히 있을 수 있는 비유의 지나친 해석(또는 비약이나 독단)을 뜻하는 알레고리(allegory, 寓話)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우화적 내용이 담긴 비유나 계시록의 지나친 풀이로 신천지나 땅밟기(?) 같은 이단과 사교 집단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비유 풀이와 적용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세 가지 농업 비유에는 레위기 희년법이 보여주는 농업과 그 원리가 같으며, 이를 복음적으로 가르쳐 주는 내용들입니다. 곧 성경 희년법과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준 세 가지 농업 비유는 그 뿌리가 같습니다. 희년법과 농업 비유는 창조주가 만든 창조질서의 하나이며, 물질이 가진 물리 법칙과 과학적 성질을 가진 생활경제의 필수적 수단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농업 비유에서 필자가 말하는 비유의 주된 목적은 경제문제의 해결과 경제 천국의 실현에 한정되어 있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는 천상(天上)의 의미를 지상(地上)의 이야기(비유)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의 의미를 말하는 비유에 소개된 지상의 이야기는 실체가 아니라 천상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도구에 불과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비유가 천국을 설명하는 도구로만 사용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도구에는 경제활동이나 삶의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 가지 농업 비유에는 구약의 희년법에 있는 독특한 경제구원의 원리를, 복음적으로 바꾸거나 개선하여 더 우수하고 탁월한 시장 경제법이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농업 비유에 들어있는 경제원리나 시스템을 경제적 현실에서 이 부분을 바로 알고 적용하면, “천국 경제법”이 이 땅에서도 실현되고 완성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 경제법”은 이 지상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현실적, 최적의 경제적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경제적 최적 상태는 세상 마지막에 있을 영원 천국과도 그 고리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비유란?
비유란 히브리어로 “마샬(mashal)”, 아람어로 “마틀라(mathla)”이며, 수수께끼, 속담, 잠언 등을 뜻합니다. 헬라어로 “파라볼래(parable)”로, ‘(둘을) 나란히 놓다’라는 뜻입니다. 비유는 보이지 않는 천국과 영적인 세계를 보이는 자연 현상, 경제 현상, 물질 현상 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추상적(抽象的) 세계를, 구상적(具象的)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부호로 표시하면 보이거나 경험이 가능한 A 세계(또는 B와 C의 세계)를 비유로들어서 보이지 않거나 경험해 보지 않은 X 세계(또는 Y나 Z 세계)를 설명하여 천국의 신비함을 가르쳐 줍니다. 이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하나의 등식처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비유(히, 마샬) : 구상 세계(비유문) = 추상 세계(신앙, 복음, 하나님의 나라 등)
비유(헬, 파라볼래) : 비유(A or B or C) = 실체(X or Y or Z)
** “=”는 ‘나란히 놓다(파라볼래)’라는 문자적 의미이고, 실제적 의미는 ‘비슷하다’는 “≒” 표시가 적절한 부호로 여겨짐.
비유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천국의 신비나 복음의 세계를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제적 경험 또는 경험 가능한 사실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3대 사역은 복음 전파, 교육, 그리고 약한 곳의 치유입니다(마 4:23, 9:35).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3대 사역을 위하여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필요한 수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신비를 비유로 가르쳐 준 이유는 이렇습니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9,10)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 복음을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를 필자 나름대로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제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천국을 쉽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많은 비유를 들어서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가르치셨습니다(막 4:33). 오늘날의 교육 방식으로 치면 입체적으로 구성된 동영상이나 시청각 자료를 가지고 필요한 것을 가르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이나 불신자들은 알아듣지를 못하거나 들어도 깨닫지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서 비유는 두 가지 상반된 효과를 가져옵니다. 비유는 마음이 열려서 진리를 가깝게 하려는 자들에게는 그 진리가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영적인 관심이 결핍된 자들은 그 진리가 더 모호하게 되는 효과를 주게 됩니다. 비유는 쉬운 것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들으면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쉬운 내용이라도 그 비유가 영적인 의미로 이해가 되고 전달될 때는, 이것이 신앙문제이므로 믿음이 없는 자, 마음이 완악한 자들은 비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ㄱ자를 알려주기 위하여 낫의 생김새를 비유로 든다면, 한국인에게는 이해가 쉽지만, 낫의 생김새를 모르는 외국인은 어렵고 이해가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천국 복음을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 비유는 창세로부터 감추어진 것들을 들어내기 위해서입니다(마 13:35, 시 78:2). 이것은 창조세계에 들어있는 창조주의 신비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로 그 실체가 드러나고 펼쳐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비유에 들어있는 창조의 신비(mystery)는 암호처럼 덮여있는 비밀(secret)이 아니고, 열려있으나 깨닫지 못한 수수께끼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수수께끼를 전심으로 풀려고 하면, 풀어낼 수가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비유는 이렇게 창조세계의 신비함이 풀려서 깨달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4) 비유는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영적, 현실적으로 풍성한 삶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같이 이런 삶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마 13:23, 막 4:20, 눅 8:15). 그러므로 비유는 신구약 전체가 의도하는 바와 같이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은 현세나 내세를 구분하지 않고 받아야 할 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은 곳간에서 새것(신약)과 옛것(구약)을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은 역할자로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마 13:52).
(5) 비유는 미래 또는 궁극적으로 도래할 말세에 대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알곡과 가라지(독보리)의 비유는 이 종말의 때를 추수기라고 합니다(마 13:30). 마태복음 25장이 말하는 열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비유도 세상의 종말과 심판을 알리고 있습니다.
비유 풀이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 대하여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을 많이 접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보는 비유 연구 중에는 윤승은 장로가 지은 『예수님의 비유들 연구(도서출판 로고스, 1997)』와 비유의 연구로 정평이 있는 예레미야스(J. Jeremias)의 『예수의 비유(허혁 역, 분도출판사, 1999』를 주로 참고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연구(최갑종,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도 정독 했습니다.
윤승은 장로의 비유에 대한 연구는 헬라어 주석으로, 4복음에서 소개된 101가지 비유를 하나하나 모두 소개하고 있습니다. 비유에 들어있는 원어 하나하나의 뜻과 문장 구조와 주석, 그리고 해석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4복음서 상호 간의 원문 비교와 분석, 도마복음 등 성경외 전승 자료까지 들어있어서 분량만으로 1천 쪽이 넘는 방대한 내용입니다. 예레미야스의 책은 비유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종합하고, 그 내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비유 풀이에 대한 엑기스를 모두 뽑아내었다고 할만큼 세밀하고, 함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에 대한 두 분의 연구는 비유 풀이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두 분의 연구 외에 다른 연구들은 제가 세세하게 보지 못했지만, 학자들이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도드(C.H. Dodd)와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에 초점을 맞춘 역사적 해석, 존스(G.V. Jones)는 비유를 예술 작품으로 접근하는 문화적 해석(심미적 해석), 린네만(E. Linnemann)과 비아(D.O. Via)는 비유를 철학적,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접근하는 실존주의적 해석을 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유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다른 종교 경전과는 다르게 실제 생활을 직접 다룬 책입니다. 곧 성경은 경제적 내용이 구체적으로, 또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의 경제법은 세상의 어느 문헌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탁월합니다. 이것이 바로 희년법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이런 경제생활에 관련된 내용이 없습니다. 특히 비유에서 소개된 농경생활에 대한 몇 가지 비유는 희년법과 직접 관련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와 관련시킨 연구나 해석이 없었습니다. 비유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유를 영적, 종교적 주제로만 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는 희년법과 성경이 말하는 경제적 내용을 관련시켜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는 천국과 천국 복음을 어렵게 설명하거나 알리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유는 누구나 쉽게 알아듣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사용한 설명의 도구입니다. 그런데 비유 풀이에서 등장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원문의 뜻을 찾아내고, 문장을 쪼개고, 대조하고, 분석한 해석이 원래 비유가 의도하는 취지에 맞을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이나 천국 복음을 쉽게 전하려고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전문지식을 동원하여서 어려운 용어와 내용으로 풀고 있다면, 그런 접근 방식이 오히려 비유가 가진 본래 취지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의사가 환자의 신체를 해부하여 그 부위와 조직, 가진 기능을 전문지식을 동원하여 상세하게 파악한 것과 그 환자의 수술이 성공한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수술은 아주 잘했지만, 환자가 질병이 낫지 않는다면, 그 수술은 실패입니다. 비유의 풀이도 그것이 해박한 지식과 상세한 분석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접근이 오히려 비유가 가진 참 뜻을 어렵게 하거나, 빗나가게 하는 변죽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비유의 목적이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천국 비밀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용한 비유는 내용이 어려워서 모르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없거나 마음이 완악하여 비유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의 비유에 관한 수용과 거부는 신앙문제이지, 내용의 난이도와 지적인 수준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비유가 미래에 도래할 천국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하더라도 그 비유는 미래에 필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필요한 것입니다. 비유는 우리가 지금, 이 시점, 이 자리에서 알고, 실천해야 할 내용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는 그 비유의 의미를 지금 깨닫고, 지금 생활에서, 지금 적용해야 할 과제들입니다. 그러면서 미래에 도래할 천국의 소망을 갖고, 지금 생활 현장에서 천국 백성으로서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물론, 그런 풍성한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예배와 감사로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세 가지 농업 비유와 경제적 이해
씨 뿌리는 비유의 경제적 이해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마 13:3)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서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마 20:1)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더니(마 21:33)
세 가지 농업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 “포도원 품꾼의 비유”,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를 말합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농업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을 말하므로 농업 비유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 보화와 진주의 비유는 상업과 관련되며, 고기를 잡는 그물 비유는 수산업의 예를 들은 비유입니다. 그 당시는 농경시대이므로 이 세 가지 농업 비유는 백성들 대다수가 생활 현장에서 경험을 통하여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는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농업 비유에서 먼저 알아야 할 공통된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세 가지 농업 비유에서 농업은 경제적 활동입니다. 농경시대에 농업은 백성들 대다수가 생업을 위해 종사하는 경제의 필수적이며, 기초적인 활동입니다. 여기서 경제활동은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양식과 재화를 생산하고, 유통(거래)하며, 소비하는 활동의 전체 과정을 통틀어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농업 비유에는 사람의 생존과 번성에 필수인 경제와 그 경제를 운영하는 경제의 기본 원리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둘째, 농업 비유에서 농업은 땅과 사람이라는 생활에서의 필수적인 요소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땅과 사람이 창조자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므로, 농업을 창시하신 창조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농업은 반드시 그 농업에서 주인 역할을 하는 창조주가 있고, 피조물인 땅과 그 땅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필자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농업 비유에는 먼저 창조자인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의 피조물인 땅이 있으며, 그 땅의 경작자 또는 관리자로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 모든 비유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원리와 섭리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 하나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로고스”라고 합니다. 로고스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보편적인 원리이자 각각의 사물을 고유하고 일정한 것이 되게 하는 형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인체를 생물학적으로 표현하면, 사람은 유전인자인 DNA를 가진 존재입니다. 사람이라는 개체가 눈, 귀, 코, 입이 다르지만, 그것은 모두 그 사람이 가진 하나의 유전인자, 곧 DNA가 결정합니다. 사람의 인체가 가진 세포의 수가 60조 개라고 하더라도, 그 많은 세포에 들어있는 단 하나의 DNA가 60조 개의 세포가 가진 전체의 성질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 귀, 코, 입이 서로 모양이 다르고, 기능도 다르지만, 그 근본 성질은 하나입니다.
넷째, 비유가 보여주는 구상 세계와 천상 세계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본 원리가 같습니다. 이것은 세 번째로 설명한 창조원리 하나로 현실 세계는 물론, 미래에 완성될 천상의 세계까지 모두 해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천지를 만든 창조의 원리, 그 천지만물을 이용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원리나 경제원리, 그리고 생활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원리가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원리가 미래나 종말에 완성될 천국의 원리까지 모두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같은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란 원리는 하나이나 그 원리가 일으키는 현상은 복합적 또 중첩적(overlap)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창조원리와 질서 = ㉡생활원리와 경제질서 = ㉢구원원리와 방식 = ㉣천국과 생활
** ㉠ ㉡ ㉢ ㉣에는 모두 말씀(로고스)이 들어있어 범주(界, category)는 다르지만, 각각이 가진 속성은 같은 점이 있으므로 부호 ‘=’로 표현함(씨는 ㉠ ㉡ ㉢ ㉣에서 모두 같은 물질, 같은 생명, 같은 원리가 들어있다.)
예를 들어서 레위기 제사법과 레위기 희년법은 내용이 다르지만, 구원을 이루는 방법은 같습니다. 제사법에는 죄를 사하는 방법이 들어있고, 희년법은 빚이나 값을 없애는 방법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대속물이나 대속자를 세워서 하게 되며, 희년법에서도 빚이나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대속물이나 대속자를 통해서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사법이나 희년법은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들어있는 원리가 같습니다. 그러므로 비유는 보이지 않는 천상 세계와 복음의 진리를 보이는 지상 세계의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 세계와 천상 세계가 말씀으로 창조된 하나의 세계이므로, 씨가 땅에 뿌려져서 자라는 성질과 원리를 비유로 하여 천국 복음이 사람의 마음 밭에서 자라서 열매를 내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연활동, 사람의 생산활동, 복음의 전파와 성장활동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천연 밭, 마음 밭, 경제 밭이 하나의 속성과 원리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에서 알려주고자 하는 천국이 지상 세계에서 경험하는 창조원리나 생활원리가 적용된다고 보면, 그 비유의 풀이는 한결 쉬워지고, 단순해집니다.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를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경제 현상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 4:18~20)
농업에서 제일 먼저 하는 농작업의 순서가 밭에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씨를 뿌리는 비유는 씨를 뿌리는 예를 들어서 천국 복음을 듣고 수용하는 태도나 반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곡물은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양식입니다. 그래서 비유의 장인 마태복음 13장은 일곱 가지 비유 중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짓는 농업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도 씨 뿌리는 이 비유를 먼저 또는 대표적 비유로 제시하였고, 예수님은 이 씨 뿌리는 비유를 모든 비유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님이 친히 설명하여두었기에 이해가 쉽습니다. 이스라엘의 농사법은 밭을 갈기 전에 씨를 먼저 뿌리고 밭을 갈게 됩니다. 그런데 씨를 뿌리다 보면 길가나 돌무더기에도 씨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씨가 가시밭에 뿌려질 수 있고 옥토에도 뿌려질 수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가 먹어버렸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기는 했으나 해가 돋으니 수분이 없어서 곧 시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가시밭에 뿌려진 씨는 싹이 나고 자라기는 했으나 가시넝쿨에 덮여서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옥토에 뿌려진 씨앗을 30개, 60개, 100개의 열매를 내게 됩니다.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씨를 보셔요. 민들레씨는 자연 상태에서도 씨가 바람에 날려서 길에도 떨어지고, 돌무더기에도 옥토에도 떨어집니다. 비유는 사람이 씨를 뿌리는 노동을 전제하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는 이런 사람의 노동이 0이라도 생명을 가진 씨는 이런 성질을 가집니다.
그리고, 원래 볍씨 하나의 이삭에는 130개, 밀은 80개 정도의 낟알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 씨알 하나는 싹이 나서 가지를 치기 때문에 볍씨 하나는 이보다 훨씬 더 수가 많아집니다. 옥토에 뿌린 씨가 30개, 60개, 100개의 열매를 낸다는 말은 과장이 없고, 실제적 사실에 부합하는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밭에도 천국 복음이 떨어지면 길가, 돌밭, 가시밭, 옥토에 따라서 그 열매가 다르게 됩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이렇게 자연 밭에 뿌려진 씨가 결실하는 정도를 따라서 사람의 심성에도 전달된 복음이 자라서 열매가 맺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두 가지의 경제적 주제를 끄집어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시밭에 뿌려진 씨가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가 경제적 이유입니다. 씨를 뿌리는 비유도 농업이라는 경제적 현상을 말하고 있는데 그 비유의 실제도 경제적 이유로 결실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유에서 길가와 돌밭은 아예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있어도 초보적 상태에 머물다가 그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씨가 가시밭에서 뿌려져서 결실하지 못하는 믿음은, 우리에게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이 자라기도 하지만, 결국은 경제적 유혹을 이기지는 못하면,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족하게 되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유대교인들이 희년법을 버리고, 바알 신을 섬긴 주된 이유가 경제적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하나님과 재물(신)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 6:24)”고 한 말씀은 가시밭에 뿌려져서 결실하지 못하는 믿음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좋은 땅에 뿌려져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바르게 자라서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풍성한 결실은 농업은 물론, 다른 산업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제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씨가 땅에 뿌려져서 열매를 내는 성질을 비유로 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밝혀지는 경제적 토지가치의 본질과 생산량 크기에 대한 결정이론은 필자의 -책 한가위 희년나라 1권(희년법과 포도원 천국)-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농업 활동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8)
마가복음은 씨 뿌리는 비유에 이어 땅에서 씨가 자라는 것을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에 씨를 뿌림과 같으니 땅이 스스로 열매를 자라게 하여 결실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모르고 있다가, 열매가 익으면 낫을 대어 수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땅이 씨를 자라게 하여 열매를 거두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주도하거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권적 섭리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손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적처럼 일시에 급조되는 것이 아니고, 상당한 기간을 거쳐서 점진적으로 커지면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 천국 복음의 씨가 뿌려지면, 길가나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싹을 내지 못하고, 싹이 나도 자라지는 못합니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앗은 자라기는 하지만, 결실은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옥토에 뿌려진 씨앗처럼 그때부터 싹이 트고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장하여 이삭을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성장과 결실하는 원리와 과정은 농업은 물론, 산업 전체의 경제활동에서도 같은 원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구성 원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당시부터 있었던 창조질서입니다. 그래서 땅과 천지 만물에 들어있는 창조의 원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경제생활, 그리고 천국 생활에도 들어있는 피조 세계의 기본 요소입니다.
씨 자람의 비유에서 땅과 사람의 경제적 역할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막 4:28)
네 수확 중에서 스스로 자라난 것은 네가 거두지 말며...(킹제임스성경 레 25:5)
땅은 자기 산물을 내리니 너희가 배불리 먹고 거기 안전히 거하리라(킹제임스성경, 레 25:19)
씨가 자라는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할 때 그 씨 자람의 비유는 세상의 경제법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활동과 농업의 경제활동에서 등장하는 주인, 땅, 그리고 사람의 경제적 관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음 말하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를 경제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관계는 하나님 나라의 경제법과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이것이 창조주의 창조적인 경제활동이고, 천국의 경제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를 경제 현상에서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땅이 ‘경제적 생산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현상은, 경제활동은 사람이 한다는 우리의 일반적 관점에서 보면 특이한 것입니다. 사람은 경제활동을 사람만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생산은 사람만이 한다” 또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만이 생산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사람은 경제활동에서, 특히 가치의 생산은 사람만이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공산주의의 사상적 기초는 노동가치론입니다. 이들의 노동가치론은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가치론은 야생 상태에서 사람의 노동이 가해져서 필요한 물질을 얻을 때, 그것을 생산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맞습니다. 물질이나 가치의 취득은 물리적으로 사람의 손(행위)에 의해서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연, 곧 땅이 생산에 기여한 사실은 모르거나 부정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땅은 사람이 손을 대기 전에 이미 열매를 내고 있고, 가치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자연 샘에서 물을 한 바가지 길어서도 그 물은 내가 생산한 것이 아니고, 자연이 생산한 물입니다. 나의 노동가치는 내가 바가지로 길은 수고에 국한됩니다. 노동이 있기 전에 그리고 노동과는 별개로 이미 생산되어 존재하는 물을 바가지 길러내는 수고를 한 것뿐입니다. 물을 기른 수고는 사람의 노동으로 생산활동이지만, 이미 있는 물의 존재와 생산은 샘(땅)이 먼저 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노동가치론은 이런 물에 손을 대어 기르면(생산하면), 그 물의 가치에 대한 전부를 사람의 노동이 생산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노동가치론은 투입된 노동가치를 초과한 잉여가치도 노동가치라고 우기게 됩니다. 이것이 잉여의 주체도 모두 노동에서 나온다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설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설은 일부만 맞고, 거의 틀립니다. 지금의 노동운동의 현장에는 노동 약자에 대한 집단적 호소와 요구도 있지만, 노동가치론의 사상적 배경이 노동자의 집단적 이기심을 부추기는 면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둘째, 자본주의의 사상적 토대는 사람 또는 사람이 만든 자본입니다. 그래서 가치의 생산은 노동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만든 자본이나 기술이 들어가서 생산에 주도한다고 봅니다. 이런 주장 역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자본의 범주에 자본보다 먼저 있고, 오래 있고, 자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토지를 자본에 포함시켜 이해합니다. 그래서 토지를 자본의 종속물로 봅니다. 이것 역시 경제의 기본 속성이나 시장원리를 기초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큰 실수입니다.
셋째, 성경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 인식도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든, 상업으로 돈을 벌든, 그 수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신앙공동체, 아니면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그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은 신앙고백과는 별개로 사람만을 생산의 주체로 보는 인본주의로 빠져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산주의(또는 인본주의) 노동가치론, 아니면 자본주의의 잘못된 물질관을 인정하며, 그 속에 동화되어 버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농업이든, 상업이든, 생업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인정하지만, 그다음의 역할은 모두 사람의 노동과 자본이 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땅이 자기의 생업과 생산에 공헌한 기여도(몫)는 인정하지를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독인들도 성경이 말하는 희년법은 기초에서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늘날까지 부정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땅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은 경제활동에서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자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땅이 스스로 생산하는 경제활동을 사람이 투자한 자본이 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땅의 자생적 생산활동 부인). ㉡땅은 자본보다 먼저 있고, 오래 있는 물질로 자본과 근본 속성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땅과 인공자본의 가격 성질에 대한 오해). ㉢땅이 생산한 생산물과 땅이 가진 자신의 몸체가 근본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땅과 땅의 생산물에 대한 존재물의 착각).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씨 자람의 비유는 땅이 스스로 생산을 한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막 4:28). 그리고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경제활동에서 필요한 사람의 노동이나 활동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씨를 뿌리는 것, 그리고 열매가 자라서 결실하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낫을 대어 수확을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경제활동에서 오히려 땅은 능동, 사람은 수동적 역할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경제적 활동에서 사람이 하고 있는 경제적 역할을 모르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람의 역할을 실제보다 축소 또는 과소평가한 비유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땅은 사람보다 먼저 있고, 오래 있으며, 사람이 생산활동을 하지 않아도 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노동과 자본이 투자되어 생산활동을 하게 되면, 땅도 이에 동반하여 함께 생산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곧 땅은 경제활동에서 사람보다 먼저, 그리고 더 본질적이고 주도적인 생산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땅의 이러한 경제적 생산활동을 레위기 희년법은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땅은 사람이 쉬는 안식년에도 생산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레 25:5). 땅은 경작년에도 자기 열매를 내기 때문에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안전하게 거할 것이라고 합니다(레 25:9). 토지를 거래할 때 희년까지 기한을 정하여 팔고 사는 가격도 미래에 땅이 생산할 토지가치를 지금 팔고 사는 것입니다(레 25:15,16). 다시 말하지만 희년까지 팔고 사는 가치물은 노동가치가 아니고 토지가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땅의 자생적 경제활동을 아직 제대로 인정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레위기 25장 5절과 19절에 대한 번역에서부터 나타납니다.
레위기 25장 5절에서 원문은, 안식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라고 하여 사람의 노동과는 별개로 스스로 난 것을 히브리어 “세피아흐”로 표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개역개정 성경에는 “세피아흐”라는 용어 자체를 빼버리고 “수확 후에 난 것”이라는 의역을 했습니다. 이것은 원문 그대로 문자적인 해석을 하면, 갑(사람)의 땅에 갑이 낸 생산물이 아니고, 을(땅)이 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을(땅)의 생산”이라고 하기보다 “갑(사람)이 거둔 후에 난 것”이라는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생산활동에서 사람(갑)이 아닌 땅(을)을 생산의 주체로 인정하기가 싫거나, 그런 번역은 어색해 보이니까 이런 어설픈 번역이 나온 것입니다. 레위기 19절에서도 땅은 자기의 열매를 낸다는 의미이지만, 번역은 “그 열매”라고 번역하여 뜻을 애매모호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번역에서부터 땅이 생산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우리는 땅에 대하여 공산주의나 인본주의의 노동가치설, 아니면 자본주의가 하나님의 땅을 자본의 예속물로 여기며, 이에 그리스도인들마저 신앙고백과 경제생활은 이중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희년법은 아직 성취는커녕 해석마저 되지 않은 채,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필자는 여기서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씨 뿌림 비유를 경제법으로만 보면, 마가복음 4장 28절 한 절만 이라도 우리가 인정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이 땅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천국 경제가 지금의 현실에서 바로 실현될 수 있고, 완성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한 그대로 땅의 자생적 생산활동을 경제생활에서 인정하면, 세상은 더 바랄 것이 없는 온전한 경제가 성립할 수 있습니다. 곧 성경이 말하는 구약의 희년법이 신약시대에 맞게 복음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포도원 품꾼 비유와 경작자의 비유는 다음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