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도시(7권) 3

[나막신]

3. 피값

「출동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방에 들어선 볼로프가 기운차게 말하고는 로스토프의 앞자리에 앉았다.

「기상 상태가 나쁩니다만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는 근대리아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가 지휘하는 1개 여단의 공수부대는 새벽 5시에 공군기지를 출발하여 근대리아에 투입된다.

새벽 1시 30분이었다. 로스토프가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잔을 쥐었다

「이제부터 일본과 미국이 시끄러워질 것이다. 볼코프, 나한텐 앞으로의 대여섯 시간이 문제란 말이다.」

그는 술을 한 모금에 삼켰다.

「네가 근대리아 땅을 밟을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미국과 일본 놈들이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서 우리를 저지하려고 들 테니까.」

볼코프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공수여단이 부대를 떠나 비행장으로 출발한 것은 두 시간 전이다.

현재 여단 병력은 비행장에서 탑승 명령만 기다리는 상황이었는데 미국과 일본의 정보망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다.

「코마노프는 협상하려고 들 것이다. 그자는 근대리아의 군사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어. 지난번의 결정은 우리 기세에 밀렸기 때문이야.」

로스토프가 다시 잔에 술을 채우더니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것을 잠자코 바라보던 볼코프는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로스토프가 비행장에서 출동점검을 해야 할 자신을 이곳에 묶어두는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모스크바로 부터의 작전취소를 경계하고 있었다. 작전취소는 모스크바에서 비행장에 있는 자신에게 직접 내려질지도 모른다. 볼코프가 머리를 들었다.

「각하, 근대리아 경비대가 행정청으로 진입해 들어갔습니다. 김상철이 오래 견딜 것 같지가 않은데요.」

「타니츠키는 지금 어디에 있나?」

「타운에서 근대시로 향하고 있습니다만 김상철에게 큰 도움은 못 됩니다. 병력이 50 명도 안 되어서.」

「행정위원장을 인질로 잡고 있지?」

「일부러 남아 있었다니까 인질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운영위원장은 어디로 갔나? 그 부위원장이라는 놈하고.」

「정보원이 찾고 있습니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들은 탁자 위의 전화기로 시선을 돌렸다.

흰색의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는데 모스크바와의 직통전화였다. 로스토프가 숨을 들이마시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사령관 로스토프요.」

「로스토프, 나 타시르요.」

정보국장 알렉세이 타시르었다.

「타시르, 무슨 일이오?」

로스토프가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타시르는 그의 인맥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그가 군단장을 맡고 있었을 때 타시르는 군단 참모장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로 철수하고 나서는 운이 좋지 않아 참모부에서 대기상태로 지내다가 로스토프와 체르넨코의 추천으로 정보국장이 되었다.

「로스토프, 조금 전에 미국 대사가 크렘린에 들어갔소. 그리고 나신스키가 일본 대사관의 참사관과 벨로크 식당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타시르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지금이 오후 4시 30분이다.

로스토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놈들이 시작했군, 타시르.」

「체르넨코한테도 연락을 했습니다.」

「잘했어, 타시르.」

국방장관 체르넨코는 잔뜩 기분이 상해 있을 것이지만 각료의 신분이다.

일본은 체르넨코의 설득을 단념하고 그의 라이벌이자 중앙회의 부위원장이며 국방위원인 나신스키를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로스토프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정치가 놈들이란. 적도 아군도 없어, 그래서 쓸개도 없는 놈들이다.」

잠자코 그를 바라보는 볼코프를 향해 그가 다시 말했다.

「모스크바에 있는 체르넨코가 곧 흔들릴 것이 틀림없다. 그 사람도 반쯤은 정치가가 되어 있으니까.」

그는 잔에 보드카를 채우고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새벽 1시 45분이다.

「볼코프, 기지로 돌아가라.」

그가 뱉듯이 말하자 볼코프가 몸을 굳혔다.

「네,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면‥‥‥」

「돌아가는 즉시 출동이다.」

「예, 각하.」

「지금 이 순간부터 작전개시다, 볼코프. 따라서 너는 내 명령만 받는다.」

「알겠습니다, 각하.」

자리에서 일어선 볼코프가 경례를 했다

「그럼 출동하겠습니다.」

청와대 안보수석 박정규가 러시아 극동군이 움직인다는 정보를 들은 것은 새벽 1시였다.

그에게 연락을 해온 사람은 일본 대사관의 참사관 시마무라였는데 공수부대가 공군기지로 이동하고 있다고만 말해주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 정부의 입장이나 대응방향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답답해진 박정규는 미국 대사관의 워렌 영사를 찾았지만 그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대치동의 자택을 나온 것은 1시 50분, 그는 청와대의 상황실로 차를 달렸다.

안보위원인 안기부장과 국방장관, 국무총리에게 상황을 알렸으나 대통령에게는 조금 지켜보았다가 보고할 생각이었다. 승용차는 새벽길을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창밖을 마라보던 박정규는 문득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들었다. 수첩에 적힌 전화번호를 찾은 그는 카폰을 들고 다이얼을 눌렸다. 강회장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다. 어쨌든 강회장은 근대리아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그만큼 러시아 대통령이나 크렘린의 고위층과 통하는 사람은 없다.

직통전화였지만 먼저 낯선 사내가 전화를 받더니 박정규가 신분을 밝히자 곧 강회장과 연결이 되었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다.

박정규가 늦은 밤의 전화에 대한 사과를 하자 강회장이 불쪽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근대리아 문제 때문에,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어요.」

그의 말투는 담담했다. 그러나 자다 깬 목소리는 아니다. 그가 남의 일처럼 말했다

「김상철이 난리를 친다고 들었는데‥‥ 수십 군데를 폭파하고 사람도 수백 명이 죽었답니다.」

「러시아군이 움직일 것 같다고 합니다. 한 시간쯤 전에 믿을 만한 곳에서 정보를 들었는데 공수부대가 출동준비를 한다고.」

「수십 억 달러를 투자한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도 그렇지만 근대 쪽도 문제가 될 것 같아서 러시아가 임차관계를 백지화시킨다면 한국도 국가적으로‥‥‥」

「금시초문인데, 그 이야기는.」

강회장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서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난 망했어. 러시아가 군대를 보낸다는 것은 근대리아를 환수한다는 거야.」

그의 목소리가 하도 처절하게 들렸으므로 박정규는 온몸에서 찬 기운을 느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미국과 일본인들이 그렇게 설치게 놔둔 한국 정부는 누가 책임을 질 거요? 수백 억 달러를 투자했다가 날리게 된 나한테 말이오.」

「회장님, 그래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방법을 만들어 보려고.」

「어떤 방법 말이오?」

「크렘린을 움직여서 군대가 나서지 않도록 하는 것이 …….」

「누가 말이오?」

「회장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무래도‥‥‥‥」

강회장이 헛웃음 소리를 내었다.

「내가 그런다고 들어줄 것 같소? 그들이 미국과 일본 핑계를

댈 것이 뻔한데 내가 어떻게 나선단 말이오?」

「‥‥‥‥‥」

「박수석, 너무하신 거 아니오? 나한테 이러면 안 됩니다. 나는 지금 가슴이 미어질 지경이오. 약을 먹어야겠소.」

「다시 연락드리지요. 어서 약 드시고 …….」

카폰의 스위치를 끈 박정규가 세게 혀를 찼다. 이번 사태로 가장 큰 손해를 입는 것은 강회장인 것이다.

소득이 없는 전화였지만 한 가지는 깨우친 것이 있었다.

한국 정부는 피해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질적인 피해는 기업들 몫이었고 전략적 손실은 미국과 일본 정부가 입었다.

그가 주도했던 한국 정부의 근대리아 운영은 어떤 면으로 보면 성공작이었다.

조금 가슴이 가벼워진 박정규는 어깨를 폈다. 대통령에게도 그런 관점에서 보고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박정규는 이번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강회장이 강용식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박정규 같은 관료들이 써오는 수단이지. 그자들은 손해볼 일도 책임질 일도 하지 않는다.」

「미국과 일본 정부가 동분서주하겠군요.」

가운 차림의 강용식이 말하자 강회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그놈들이 뒤통수를 맞았다. 지금 날뛴다고 해서 군대는 쉽게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미현이는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다니?」

강회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내버려 둬라. 지금 그 애에게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한민수가 전창남이까지 저택으로 데려왔다지 않습니까?」

강미현은 그들이 집 안으로 들이닥치자 강용식에게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아마 한민수가 제대로 상황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서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강회장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강용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건 내 잘못이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어. 난 그놈의 교활한 수단에 넘어갔다.」

「아버님 잘못이 아닙니다. 저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신경을 더 썼어야 했습니다.」

「근대리아 전복의 가장 큰 성과는 미 · 일의 세력 축출보다도 내부의 매국노인 그놈의 제거가 될 것이다.

그놈을 죽여 없애야 한다.」

강회장의 격렬한 기세에 놀란 듯 강용식이 얼굴을 굳혔다. 이제까지 강회장은 한민수에 대한 표현을 자제해 왔다. 그에게 한민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것도 최근의 일이었던 것이다.

「아버님, 러시아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근대리아를 장악하고 나서 근대에 다시 돌려준다는 약속 말입니다.」

강용식이 말머리를 돌렸다.

「이 기회에 근대리아의 모든 시설과 자원을 몰수한다면‥‥‥」

「그럴 수는 없다. 그런 강도짓을 해서 득이 될 것이 별로 없을 테니까. 그들은 근대리아를 경영할 능력도, 자본도, 그리고 명분도 없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어.」

강회장의 얼굴에 활기가 띠어졌다. 그가 생기 있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본과 미국의 정보원들을 몰아낸 다음에 그쪽 기업들을 우리가 관리하면 된다. 그, 우 아무갠가 하는 놈이 장악했던 톰프슨 그룹의 사업장들‥‥‥」

잠깐 말을 멈춘 그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오성그룹의 사업장 말이다. 그곳을 우리가 관리한다. 대동그룹의 사업장들도,」

「오성과 대동도 지금 비상이 걸렸습니다, 아버님.」

「법석을 떨겠지만 속수무책일 것이다.」

그가 이제는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 웃었다.

「머지않아 오성측은 우리에게 접근해 올 것이다. 상황에 따른 변신에 능한데다 요점 파악이 뛰어난 것이 그자들의 전통이야. 톰프슨의 껍질을 벗고는 우리와 손잡자고 나설 것이다.」

「대동이 문제겠군요.」

「정치적으로 나서겠지. 하지만 난 이미 모든 재산을 처분한 입장이야. 대통령이 아니라 단군 할아버지라도 나한테 압력을 가할 수는 없어.」

강용식이 입맛을 다셨다.

「남아 있는 저한테 압력이 오겠군요.」

「글쎄, 박정규가 그때까지 청와대 기둥에 달라붙어 있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고 대통령 임기가 1년 6개월밖에 남지 않았어.」

「그렇다면 아버님, 근대리아 경영은 누구에게 맡기실 계획입니까? 사업장 관리 말씀입니다.」

불쑥 강용식이 그렇게 묻자 강회장이 시선을 들어 앞쪽의 벽을 바라보았다. 정색을 한 표정이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건 러시아 측과 상의를 해봐야 한다.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김상철이 아닙니까?」

그렇게 묻던 강용식은 이제까지의 대화에서 자신이 그의 이름을 처음 꺼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오늘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어야 함에도 아버지는 물론 자신도 그것을 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회장은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는데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으므로 강용식도 더 이상 물지 않았다

새벽 3시가 되자 경비대는 12층까지 진입해 왔다. 엘리베이터를 모두 파괴시켰기 때문에 두 곳의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2개 층의 계단뿐이었고 이쪽의 사상자도 반수가 넘었다. 격렬한 총성과 폭음이 계속해서 행정청 안을 울렸고 화재가 발생한 듯 검은 연기가 계단을 통해 위쪽으로 뿜어 올라왔다.

좌측의 계단을 맡고 있던 그레고리가 14충 복도에 서 있는 김상철에게 달려 왔다.

「보스, 놈들이 악착같습니다. 아예 건물 전체를 폭파시킬 모양이오.」

그는 왼쪽 팔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어서 방한복을 벗어 던지고 셔츠 위에 피가 배인 붕대를 아무렇게나 감고 있었다.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폭음이 켰으므로 소리치듯 그가 물었다. 김상철이 맞받아 소리쳤다.

「날이 밝을 때까지다. 그레고리, 그때까지 견뎌야 돼.」

「만일 안 온다면 우리만 개죽음을 당하는 거요,」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몸을 돌린 그레고리가 복도를 달려 사라졌다.

계단은 테이블과 캐비닛 등 갖가지 집기들로 막아놓았지만 경비대는 끈질기게 장애물을 제거하고 다가오는 것이다. 폭음과 총성으로 가득 찬 행정청 건물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김상철이 한쪽 계단을 맡고 있는 송길수에게 다가갔을 때 그는 13층의 계단 위쪽에서 테이블을 방패삼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래쪽 계단은 산더미처럼 쌓인 집기들로 막혀 있었지만 틈 사이로 총탄이 날아와 벽과 테이블에 맞고 통겨났다.

「조금 전에 놈들이 가스탄을 쏘았다가 연기가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다시 쏘지를 않습니다.」

송길수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장애물이 쌓여 있어서 이쪽으로 쉽게 던질 수도 없게 되었으니 다행이오.」

14층의 유리창을 깨고 가스탄 두 개가 떨어졌지만 곧 아래로 되던져졌고 이제는 복도의 창문은 캐비닛으로 막아놓았다.

총성이 조금 뜸해지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김상철은 머리를 들었다. 완급을 조절할 수 있는 여유는 저쪽이 갖고 있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공격하려는 겁니다. 아까도 폭약으로 장애물을 제거하려고 5분쯤 소강상태가 되었지요.」

송길수의 부하 두 명이 재빠른 동작으로 철제 테이블을 들고 그들 옆을 지나갔다.

그들도 그 사이에 장애물을 더 쌓으려는 것이다. 계단은 폭이 5미터 정도로, 꺾어지는 지점까지의 거리는 10미터쯤 되었다.

부하들이 캐비닛을 던져두고 서너 계단씩을 뛰어 올라오는데 아래쪽에서 총성이 났다. 뒤쪽의 부하 한 명이 눈을 부릅뜨면서 송길수의 앞에서 넘어지더니 곧 아래쪽으로 굴러 내려갔다. 곧 이쪽에서 격렬한 사격이 시작되었다.

테이블을 젖힌 송길수가 일어셨다. 그는 김상철이 말할 겨를도 없이 계단을 달려 내려가 쓰러진 부하를 들쳐 메었다.

그가 부하를 업고 계단을 오르는 동안 아래쪽을 향해 총탄이 퍼붓듯 쏟아졌지만 상대방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윽고 그의 옆으로 다가온 송길수가 부하와 함께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김상철은 모로 누워 있는 부하를 내려다보았다. 반쯤 눈을 뜬 동포 청년이다.

고향이 하얼빈인지 블라디보스토크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등을 관통당한 그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오세영은 10층의 복도에서 소명일과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들의 주위는 소란스러웠다.

아직도 총성이 울리는 중이었고 간부들의 고함 소리와 무전기에 대고 외치는 소리들로 어수선한데다 대원들은 무리를 지어 그들 옆을 뛰어 지났다.

부상자를 들것에 담아든 대원들이 다가왔으므로 그들은 벽 쪽에 붙어 섰다.

오세영이 핏발 선 눈을 들었다.

「그렇다면 러시아군이 출동했단 말입니까?」

머리를 끄덕인 소명일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소리를 낮추었다.

「1개 여단의 공수부대야. 세시에 기지를 떠났으니 앞으로 두시간 후에는 이곳에 떨어져 내릴 거야.」

「그들이 김상철을 구하려고 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턱을 들어 위쪽을 가리켜 보인 오세영이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내란을 이유로 근대리아를 환수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김상철이 저놈은 원인제공을 해주도록 계획이 되어 있었군요.」

「행정청으로 치고 들어온 이유도 그것이다. 내란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지.」

간부 하나가 서둘러 그들에게로 다가와 섰다.

「특공대 투입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가 오세영과 소명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번의 특공대는 화염방사기를 앞세워서 13총 이상부터 불바다로 만들 작정이었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어.」

소명일의 지시를 받은 간부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행정청 안은 차츰 총성과 폭음이 뜸해지고 있었다. 간혹 산발적인 총격이 오갈 뿐 공격 이후 처음 찾아온 소강상태였다.

「정부에서 다른 지시는 없습니까?」

오세영이 묻자 그는 입맛을 다셨다.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라더군.」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라는 거야. 러시아와 미국, 일본이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라던데. 우리는 피해자라는 거야.」

「누가 그랬습니까?」

「안보수석 박정규야.」

「구체적인 지시는 하나도 없어, 그 개자식.」

이제까지 억누르고 있었던 모양으로 소명일의 얼굴이 갑자기 붉게 달아올랐다.

「책임질 일이나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수작이야.」

그는 번쩍 머리를 들고 오세영을 바라보았다.

「러시아군과 싸울 필요는 없어 그럴 만한 전투력도 없고 솔직히 지킬 명분이나 의욕도 없다.」

「동감입니다, 본부장님.」

오세영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다시 턱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저놈은 잡겠습니다. 러시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말입니다.」

「두 시간쯤 후에는 러시아군이 도착한다는 거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전창남이 한민수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빛바랜 종이 색깔이었다.

「로스토프가 출동 예정시간을 두 시간 반이나 앞당겼다는군.」

그는 박정규와의 통화를 끝낸 것이다.

15층 옥상의 헬기장에서 24시간 대기하고 있던 전용헬기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가 조금 못 되었을 때였다. 그러나 마음을 놓은 것은 잠깐 동안으로 전창남은 시내에 있던 우재환으로부터 러시아 극동군이 움직인다는 연락을 받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박정규로부터 러시아군이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한민수가 옆에 앉은 강미현을 힐끗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김상철이 러시아군을 끌어 들인 셈이군요.」

「그런 셈이지. 러시아는 군대를 투입할 명분이 세워진 셈이지.」

전창남이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박수석은 별일 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근대리아는 러시아 직할영토도 아니니까 말이야.」

「우재환과 시바다는 입장이 다르지요. 러시아군의 목표는 그쪽이 될 것 아닙니까?」

전창남이 대답 대신 길게 숨을 뱉아냈다.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강미현이 한민수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겠어요?」

「우린 괜찮아.」

어금니를 문 전창남이 머리를 돌리고는 길게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 왔으므로 방 안의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셨다.

총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더욱 거칠어졌다. 방문이 덜컥 열렸으므로 놀란 그들이 몸을 굳혔다. 경비대장이 들어선 것이다.

「습격입니다. 놈들이 사방에 깔려 있습니다.」

「누가 말이야?」

놀란 것에 스스로 화가 난 전창남이 소리치듯 물었다. 그 순간 총탄이 날아와 응접실의 유리창에 구멍을 냈다. 그들은 일제히 응접실 바닥에 엎드렸다.

「김상철의 일당인 것 같습니다만.」

엉거주춤 엎드린 경비대장이 말꼬리를 흐렸을 때 밖에서 총성이 뜸해지는 것 같더니 확성기를 통한 러시아어가 울려 퍼졌다.

「경비대는 들어라. 우리는 러시아군이다. 3분 안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하지만 반항하면 모조리 사살한다. 자, 3분의 여유를 준다.」

방 안의 사람들 중 러시아어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없다. 한민수의 팔 안에 엎드려 있던 강미현이 머리를 들었다. 한민수는 마침 전창남과 마주보고 있었다.

「빨리 왔는데.」

전창남이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은 크게 뜨여 있었지만 초점이 잡힌 것 같지는 않다.

「자, 2분 남았다.」

밖은 이미 깊은 정적에 덮여 있었으므로 확성기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한민수가 몸을 세우더니 강미현을 부축해 일으켰다.

「러시아군을 상대할 수는 없어요. 자, 어서 나갑시다.」

불길은 14층의 계단을 통해 복도까지 밀려 올라왔다. 짙은 연기에 덮인 15층의 복도에서 부하들이 부상자를 끌고 옥상의 계단으로 대피하고 있었다.

옥상에는 이한이 나가 있었지만 이미 그곳은 막다른 곳이다. 텅 빈 헬기장이 있을 뿐이었다.

계단 입구에서는 아직도 격렬한 총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송길수가 맡고 있는 계단이다. 그레고리가 맡고 있던 계단은 불길에 덮여 굴뚝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복도로 올라와 있었다.

연기를 헤치며 부하 한 명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는 김상철의 앞에 헐떡이며 멈춰섰다. 옷과 머리칼이 불에 그을은 그는 송길수의 부하였다.

「형님이, 저기 ‥‥」

「어떻게 된 거야!」

러시아어로 소리쳐 물은 것은 옆에 있던 그레고리이다.

「고립되었습니다. 14층의 한쪽에.」

이미 경비대는 14층에 올라온 것이다.

그들은 연기를 헤치고 송길수의 부하를 따랐다. 계단이 복도 끝의 양쪽에 있는 구조였는데 송길수가 맡은 쪽은 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그는 14층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14층과 15층 사이에 쌓아둔 장애물을 부하들이 넘도록 엄호한 다음 14층의 어딘가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이 계단으로 다가가자 주위에 엎드려 있던 사내들이 머리를 들었다. 모두 얼굴과 옷이 불에 그을리고 찢겨져 마치 아수라와 같은 형상을 한 사내들이다. 그러나 숫자는 대여섯도 되지 않았다. 40명 가까웠던 인원이 이렇게 줄어든 것이다.

그들이 장애물을 향해 쏘아대고 있었으므로 김상철이 소리쳤다.

「지금도 살아 있느냐?」

「예.」

하고 오른쪽 사내가 금방 소리쳐 대답했지만 그 옆의 사내는 상반신을 벌떡 세우더니 머리만 저었다.

김상철이 기관총을 내려놓고는 방한복을 벗어던졌다. 탄띠도 풀고 벨트에 베레타를 꽂고는 바지의 양쪽 주머니에 수류탄을 한 발씩 넣었다. 30발들이 탄창 하나를 작업복 윗저고리에 꽂았을 때 그는 그레고리도 금방 그와 비슷한 차림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보스, 나도 가겠소.」

「그레고리, 넌 남아서 부하들을 맡아.」

「맡아야 할 병사도 없어, 이젠.」

퍼뜩 그레고리를 바라본 김상철이 방한복을 집어 들었다.

「저쪽으로 내려간다, 그레고리.」

그가 턱으로 가리킨 쪽은 불길을 물고 있는 계단 쪽이다. 복도의 천장에서는 화재 경보가 쉴새없이 울리면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방한복에 방한모까지 눌러 쓰고는 물줄기 아래 서 있었다.

흠뻑 물에 젖은 그들이 계단으로 뛰어든 것은 그로부터 5분쯤 후였다.

불줄기는 계단에 쌓여 있는 장애물을 태우며 그들에게 뻗어왔다. 방풍 안경에 방한 장갑까지 끼고 있었지만 테이블 두어 개를 치우자 금방 온몸이 뜨거워졌다.

다시 캐비닛 하나를 들어 옮기던 김상철은 무엇인가에 걸려 비틀거렸다. 앞쪽에서 총성이 울렸는데 이쪽을 향한 것은 아니다. 그레고리가 미친 듯 의자 하나를 옆쪽으로 던졌는데 이미 그의 방한복 등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캐비닛을 겨우 옆으로 밀고 테이블 위에 발을 딛고 올라선 김상철이 앞에 가로막은 불덩이를 발길로 걷어찼다.

그러자 앞쪽의 천장이 보였다.

김상철은 몸을 돌려 그레고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막 테이블을 밀어젖히는 중이었는데 이제 방한복 어깨가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김상철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레고리를 힘껏 테이블 위로 끌어올린 김상철은 곧 그의 다리를 들어 앞쪽의 빈 공간을 향해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곧 자신도 공간을 향해 몸을 던졌다. 어깨가 의자의 팔걸이에 부딪치면서 김상철은 반대쪽 바닥에 떨어졌다. 이쪽도 불이다. 그러나 바로 눈앞의 공간은 멀쩡했다. 서둘러 몸을 일으킨 그는 방한복을 벗어던지면서 계단을 뛰어내렸다.

이쪽은 14층 아랫부분의 계단이다.

방한모를 벗어 던진 그의 바로 눈앞에 그레고리가 벽에 붙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지금 바지에 붙은 불을 손바닥으로 두드려 끄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상철은 어깨에 걸고 있던 AKS-74U 자동소충을 손에 쥐었다.

이제 14층에 내려온 것이다.

「보스, 우린 양념 바른 불고기였소.」

그레고리가 불에 그을은 수염 속의 흰 이를 드러내었다.

「자, 인사하러 갑시다.」

반대쪽 계단에서 나타난 두 사내가 기관총을 난사하자 14충의 복도는 금방 수라장이 되었다. 김상철은 복도 왼쪽의 방 앞을 10여 명의 경비대원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쪽은 불길에 싸여 있는 곳이었는데다 불길을 뚫고 내려올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 같았다. 1분에 800발이 발사되는 Al諸-74U기관총이다. 30발들이 탄창이 모두 비워졌을 때 복도에 서 있는 경비대원은 보이지 않았다.

김상철은 탄창을 갈아 끼우면서 경비대원이 둘러섰던 방으로 달려갔다.

「송길수! 어디 있느냐!」

그 고함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 순간 오른쪽 계단입구에서 번쩍이는 불꽃이 보이더니 총탄이 쏟아졌다. 김상철은 이마 옆쪽에 뜨거운 인두로 지진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그쪽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옆쪽을 달리던 그레고리가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더니 앞쪽을 향해 던졌다.

김상철은 닫힌 문짝을 발로 차 열고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레고리가 그의 등을 덮듯이 들어선 순간 폭음과 함께 파편이 등 뒤의 복도를 날았다.

송길수는 방 안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김상철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에 웃음을 띠었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김상철은 그의 앞쪽에 쓰러지듯 앉았다.

「맞았어?」

송길수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입가에서는 핏방울이 흘러내렸고 방한복을 벗어제친 그의 작업복 상의는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레고리가 문 안쪽에 서서는 계단 쪽을 향해 한두 발씩 총을 쏘았다.

송길수가 피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형님, 난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그는 울컥 한 움큼의 피를 뱉았다. 서둘러 그의 작업복을 열어젖히던 김상철이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가슴에 두 발의 총탄을 맞은 것이다.

송길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대리아는 다시 찾게 되는 거요?」

「그렇다, 길수.」

「한이는 살았습니까?」

「그래.」

「형님, 나 미련이 많소.」

「알고 있어.」

김상철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자 송길수는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난 그저 이 땅에서 살려고, 가족과‥‥‥」

「알아.」

송길수의 머리를 끌어안은 김상철의 악문 이 사이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미안해, 미안해.」

뒤쪽에서 그레고리가 기관총을 짧게 쏘아젖히고는 소리쳤다.

「보스, 업고 나갑시다.」

김상철은 안았던 송길수의 머리를 떼어내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가 힘없이 옆으로 젖혀졌다. 송길수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부릅뜬 눈은 이제 먼 곳을 향한 시선이 되어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진 느낌이 들었으므로 김상철은 머리를 들었다. 총성이 그친 것이다. 그레고리는 그것이 더욱 불안한 모양으로 몸을 굳히고는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김상철은 다시 바닥에 누인 송길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눈을 감겨 주어서 이제 송길수는 자는 듯 누워 있었다. 근대리아에 처음 발을 디딘 김상철에게 무법자 타운에서 견디는 법을 알려주었고 그와 함께 하나씩 사업장을 세워간 동료이자 형제였다.

그레고리가 입을 열었다.

「보스, 나도 곧 따라간다고 생각하면 조금 위로가 되실 거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주위가 조용했으므로 크게 들렸다.

「용감한 고려인이었소. 신중하고 의리가 강한 사람이었소.」

김상철은 기관총을 짚고는 자리에서 일어셨다. 15층의 복도와 옥상에 흩어져 있을 부하들은 이한이 인솔하고 있었지만 이쪽과 연락이 끊겨 있는 상황이다.

그가 옆으로 다가가자 그레고리가 그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보스, 괜찮소?」

「총알이 스쳤을 뿐이야.」

그러나 흘러내린 피가 한쪽 얼굴과 어깨까지 피범벅으로 만들어 놓았다.

주위는 여전히 조용해서 총성에 익숙해진 귓속에서는 쇳소리가 울려왔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었다. 그레고리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4시 10분인데 놈들이 마지막으로 밀어붙일 준비를 하는 모양이군.」

김상철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레고리, 저 소리 들리나?」

「무슨 소리 말이오?」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그레고리의 귀에도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이제는 선명하게 들렸는데 이한의 목소리였다. 이한은 복도 끝의 15충으로 올라가는 계단 안쪽에서 부르고 있다. 아마 장애물 건너편에서 소리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형님!」

「나 여기 있다!」

김상철이 소리치자 이한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제 장애물을 넘어오는 것 같았다. 이맛살을 찌푸린 김상철이 그레고리를 바라보았다. 14층 복도로 내려오는 계단은 13층의 계단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다.

「내려오지 마라!」

김상철이 고함을 쳤다.

「거기서 기다려!」

「형님, 경비대는 물러갔습니다!」

이제 이한의 목소리가 바짝 다가오더니 그의 몸이 계단을 내려와 복도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는 한 손에 기관총을 세워 들고는 복도가 떠나갈 듯이 소리쳤다.

「타니츠키가 전창남이와 한민수를 잡았습니다. 그리고나서 경비대의 철수를 요구한 겁니다. 형님, 우린 살았습니다.」

아침 7시 정각에 근대시 주위에 낙하한 러시아 극동군 소속의 제81 공수여단은 4개 방면으로 근대시에 진입해왔다. 닷새 동안이나 계속되던 폭설은 어느덧 그쳐 있었지만 아침 하늘은 흐렸다. 각 단위부대로 나뉘어진 여단병력의 2개 대대는 타운으로 진입해 들어갔고 1개 대대는 이미 비행장을 점령한 상태이다.

볼코프가 아직도 검은 연기를 뿜어올리는 행정청 건물에 도착한 것은 아침 9시가 조금 못 되었을 때였다. 징발한 경비대 소유의 지프에서 내린 그는 잠시 거대한 행정청을 올려다보았다.

「굉장하군.」

이미 방사선 도로를 질주해오면서 그는 몇 번이고 근대시의 위용에 같은 말을 되풀이 하였었다.

여단장 스크라빈 소장은 조금 싱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대리아 경비대는 저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차량지원까지 해주었던 것이다.

볼코프는 스크라빈과 함께 로비로 들어섰다. 간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로비를 보자 스크라빈의 얼굴에 생기가 살아났다. 그가 감탄했다.

「사령관, 이건 대단하군요.」

계급은 같은 소장이지만 볼코프가 이번 작전의 지휘관인 것이다.

이제 행정청은 러시아 진압군의 사령부가 되어 있었다.

장교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났고 병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소방복 차림의 사내들이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면 위쪽의 불이 아직 덜 꺼진 모양이었다.

사령관실로 만들어진 2충의 사무실에 김상철이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10분쯤 후였다. 그는 이마에 피가 배어나온 붕대를 감은데다가 옷은 불에 그을리고 피에 젖어 참혹한 모습이었다. 볼코프와 같이 앉아 있던 스크라빈이 다시 감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상철을 맞았다.

「다행이요, 드미트리. 위험했었다고 들었소.」

볼코프가 김상철의 손을 잡고는 스크라빈을 소개했다

「당분간 당신을 도와줄 사람입니다.」

자리에 않자 김상철이 물었다.

「시바다와 우재환은 찾았습니까?」

「지금 찾는 중인데 아마 곧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스크라빈이 넓은 어깨를 펴며 대답했다.

「근대리아를 빠져 나갈 수는 없습니다. 국경에는 1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으니까.」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러시아군 장교와 함께 유장석이 들어섰다.

엊저녁과 같은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었지만 초췌한 모습이다.

볼코프와 스크라빈이 일어서더니 정중하게 그를 맞았다. 그들과 인사를 나눈 유장석이 김상철과 나란히 않았다.

「위원장 각하, 우린 궁극적으로 러시아와 근대를 위해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알고 계시지요?」

볼코프가 묻자 유장석의 시선이 김상철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 있는 김상철 씨한테서 몇 시간 전에야 들었습니다.」

얼굴에 웃음을 띠운 볼코프가 머리를 끄덕였다.

「보안유지 때문입니다. 우리가 강회장께 철저하게 보안을 지켜달라고 당부를 했지요. 위원장 각하의 주위를 첩자들이 둘러싸고 있었으니까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근대리아가 정상적인 상태가 되면 우리는 철수합니다.」

「그건 들었소. 그러나 근대리아의 내부정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여기 있는 김상철 씨도 모르고 있던데.」

볼코프가 정색을 했다.

「곧 지시가 내려올 겁니다. 난 명령에 따를 뿐이오.」

「우리는 미국과 일본의 압력 따위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근대의 간판 뒤에 숨어서 러시아의 극동 지역에 거점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유장석이 아니다. 잠자코 있는 유장석을 향해 볼코프가 부드럽게 말했다.

「위원장 각하, 피로해 보이시는데 조금 쉬십시오. 쉬고 일어나시면 정리가 되어가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볼코프의 방을 나온 유장석과 김상철은 아래층의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에는 러시아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그들은 왕래가 뜸한 벽 쪽으로 다가가 섰다

「기뻐해야 할 일인데도 도무지 나는 그럴 기분이 나지 않는다.」

넥타이의 매듭을 거칠게 당겨 늘어뜨린 유장석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지친 표정이었다.

「이봐, 상철아, 우리가 다시 주권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 근대의 주권 말이다.」

「약속했습니다. 우리에게 맡긴다고.」

김상철이 핏발 선 눈을 들었다.

「지키지 않는다면 또 전쟁을 할 겁니다.」

「회장님이 나한테까지 비밀로 한 건 서운하다. 나는 알고 있었어야 했어.」

「‥‥‥‥」

「전창남과 한민수 부부를 인질로 잡았다는데, 강미현 씨는 풀어 주겠지?」

「볼코프가 결정하겠지요.」

유장석의 시선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을 향해 이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도 한 손에 자동소총을 쥔 그는 산발한 머리에 눈을 부릅뜨고 있어서 귀신같은 형상이다. 그의 뒤로 10여 명의 부하가 따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백 명 가까웠던 조선족과 고려인 부하들의 살아남은 인원이다.

「형님, 죽이러 갑시다.」

다가선 그가 유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리쳐 말했다. 시바다와 우재환을 죽이자는 것이다. 그는 모든 원인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단순한 그의 직감이 틀린 것은 없다.

아침 9시. 박정규는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터너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이제 꺼릴 것도 없었으므로 차를 몰아 대사관으로 달려온 참이다.

「이젠 크렘린도 어쩔 수가 없어요, 박. 이미 상황은 벌어졌으니 주워 담을 수는 없소.」

터너의 표정은 어두웠다.

「모스크바에서 우리 측과 일본이 적극적으로 움직였지만 너무 늦었어. 손 쓸 여지도 없이 극동군이 출동해 버린 거요.」

「근대리아와의 통신이 세 시간 전부터 두절상태요.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한숨도 잠을 자지 못한 박정규가 충혈된 눈으로 터너를 바라보았다.

대통령한테는 근대리아의 소요사태 때문에 러시아군이 진입했다는 식으로 짧게 보고를 하고 나왔지만 그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터너가 입을 열었다.

「러시아군은 모든 행정기관과 경비대를 장악했소. 그리고 대부분의 요인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전창남과 한민수가 체포된 것은 압니다. 하지만 그 후로 연락이 끊겨서 …….」

「우재환은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시바다는 부하 몇 명과 함께 도주한 모양이오.」

「곧 모스크바에서 코마노프가 정부 입장을 발표할 겁니다. 아마 근대리아의 상황을 강력히 비난하겠지. 그래야 명분이 서니까.」

「한국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터너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크렘린의 속셈은 알 수가 없어놔서. 당신도 알다시피 코마노프는 예상할 수가 없는 인물이라‥‥」

「한국 정부도 비난할까요?」

「글쎄, 그것은‥‥‥」

「대통령께서 염려하고 계십니다.」

터너가 커피잔을 들고는 한 모금을 마셨다. 아직 미국과 일본 정부는 근대리아의 러시아군 진입에 대해서 공식발표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헛기침을 한 박정규가 터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터너 씨, 대통령께서는 미국에서 먼저 러시아군 진입에 대해서 강하게 비난해 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물론 일본도 마찬가지로.」

커피잔을 내려놓은 터너가 입술 끝으로만 웃었다.

「글쎄, 우리가 한국 정부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주객이 전도된 것 같지 않습니까? 근대리아는 엄연히 한국 기업이 임차한 땅인데.」

「물론 근대그룹은 한국의 기업이니 한국 정부가 나서야 정상이기는 하겠지만‥‥」

「먼저 항의 성명을 내시면 미국 정부도 도와드리지요.」

「러시아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말이오?」

「이건 내 추측이지만 러시아 정부는 한국 정부를 비난할 겁니다. 미국과 일본의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내용이 되겠지요.」

「우린 부인할 거요. 이건 뻔히 서로 알고 있는 일이지만 관례지요. 그리고나서 정치적으로 해결하게 될 겁니다.」

우려했던 일이 사실로 닥쳐오자 박정규는 잠자코 터너의 가슴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되면 한국 정부는 미 ·일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피해를 입었다는 책임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근대리아의 임차주는 엄연히 근대그룹이었고 한국 정부가 전면에 나선 적은 한 번도 없다.

박정규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히 우리도 부인할 겁니다. 한국 정부는 이번 일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이 투자를 한 지역에 러시아 정부가 계약을 깨고 진입했다는 것은 문제로 삼겠습니다.」

터너가 이제는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땐 적극적으로 도와드리지요. 러시아가 억지를 썼다는 보도 자료를 한국의 언론에 배포하겠소. 아마 일본도 그럴 겁니다.」

박정규가 서둘러 방을 나가자 빌리 핸슨이 들어섰다. 그는 정보담당 영사이다.

「크렘린이 한국 정부를 강력히 비난할 것 같습니다, 대사님.」

조금 전까지 박정규가 앉았던 의자에 털썩 앉은 그가 눈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미스터 박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을까요?」

「천만에.」

터너가 머리를 저었다.

「여긴 미국이 아냐, 빌. 언론은 정부가 장악하고 있어. 며칠 동안 러시아 정부의 과민반응과 흑심에 대해서 대학교수, 전문가 등을 동원해서 집중적으로 보도하겠지. 어용 관련조사 기관도 동원할 것이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한국 국민들은 잊어버리게 되어 있어.」

쓴웃음을 지은 핸슨이 들고 있던 팩스 용지로 시선을 내렸다.

「근대리아 진입군은 모든 행정기관과 사업장에 정상 활동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경비대는 영내에 대기 상태로 두었습니다.」

「미국인 24명, 일본인 32명, 한국인 67명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서 감금당해 있고 약 200명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색출해내고 있으니까 그 숫자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추방시키겠지?」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터너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목을 좌우로 흔들어 목운동을 했다.

이것은 미국 정부의 입장으로 보면 CIA의 공작 하나가 좌절된 정도의 사건이고 피해는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서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청와대로 돌아온 박정규는 곧장 대통령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회의실에서 총리를 비롯한 안보위원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보고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대통령은 책상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자코 시선을 주는 것을 보면 좋은 분위기는 아니다.

「각하, 미국은 근대리아 사태에 대해서 러시아를 강하게 비난할 작정입니다.」

그가 말하자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박정규가 한 걸음 다가와 섰다.

「하지만 근대리아는 엄연히 대한민국 기업의 임차지이므로 미국이 먼저 나선다는 것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일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우리 정부가 먼저 한국 기업의 재산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내용의 항의 성명을 내는 것이 정상일 것 같습니다만.」

「러시아는 성명을 아직 안 내었나?」

「곧 발표할 것입니다, 각하.」

「내용이 어떻게 될 건지 알아보았나?」

「미국이나 일본 측도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그자들이 미국이나 일본을 비난할 것 아닌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를 더 비난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각하.」

「미국과 일본은 즉각 한국 정부를 돕겠다고 했습니다, 각하.」

「모두 제 앞가림이 우선이야.」

혼자소리처럼 말한 대통령이 시선을 들었다.

「근대리아는 어떻게 될 것 같나?」

「아직 미국 측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각하.」

「하긴 그자들이 손해본 것은 없을 테니까. 한국 기업들만 타격을 입었지.」

「‥‥‥‥」

「임차지를 환수당하면 근대가 흔들리겠군. 오성이나 대동도 손해가 꽤 크겠군, 그렇지?」

「예, 각하.」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어때?」

「예, 그것은 아직 ‥‥‥」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였다.

「대변인과 함께 성명서를 작성하도록.」

「예, 각하.」

「한 시간 후에 내가 안보회의에 참석할 테니까 그땐 경제부총리도 불러오도록.」

그 시간에 강회장은 자택의 응접실에 앉아 그가 즐기는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진하게 끊인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난 그는 입안에 배인 향을 음미하려는 듯 서너 번 입맛을 다셨다.

「오성의 조실장이 미국 대사관에 들어갔다구?」

조실장이라면 비서실장 조영규다. 앞에 앉은 이남호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예, 회장님, 박정규가 나오고나서 곧 조영규가 들어갔습니다.」

「똥줄이 탈만도 하지. 조영규 다음 순서로는 대동의 한회장 놈이 되겠구나.」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한국 정부에는 책임질 사람이 없습니다.」

「당분간은 우리도 표정관리를 해야 되겠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후에 그룹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두었습니다.」

「잘했어. 회의 주제는 근대리아가 러시아에 환수당했을 경우에 그룹에 미치는 영향으로 하도록.」

「예, 회장님.」

「난 충격을 받아 드러누운 것으로 해라.」

「알겠습니다, 회장님.」

강회장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회의를 마치고 자네가 근대리아에 들어가야 되겠어. 난 여기 있을 테니 자네가 협상을 해.」

「알겠습니다. 저녁 비행기로 일본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러시아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청와대나 미국, 일본 놈들이 자네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조심하도록.」

「제가 들어가는 것이 이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놀라서 상황파악하려는 것으로 알겠지요.」

러시아 정부는 근대리아의 임차주인 근대그룹과 다시 협상을 하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근대리아를 다시 정립시키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다.

이남호가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잘하면 제가 근대리아를 살려낸 영웅이 되겠습니다, 회장님.」

「러시아인들도 믿을 수가 없어.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정색을 한 강회장이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오성은 명색이나마 톰프슨 그룹으로 허울을 감추었지만 대동의 월슨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처음에 간판만 걸었다가 아예 대동의 100퍼센트 투자로 바뀌었는데‥‥‥」

그가 시선을 옆쪽으로 돌렸다.

「우릴 무시한 것이지. 가소로운 놈들이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회장님.」

이남호의 얼굴도 굳어졌다.

「죽 쥐서 개 줄 뻔했습니다, 회장님.」

이대각은 대위 계급장을 단 러시아 장교에게로 다가갔다. 얼룩무늬의 전투복을 입은 장신의 사내였다.

「이봐, 대위. 난 이대각이라고 근대리아 행정위원회의 전(前) 부위원장이었던 사람이다.」

그의 러시아어는 유창했으나 대위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전 부위원장이라구?」

「그렇다, 이대각이다.」

타운의 한복판인 서울 호텔 앞쪽 대로상이다. 군데군데 진주군이 서 있는 외에는 거리는 여느 때와 별로 다른 점이 없다. 대위가 이대각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김상철과 만나고 싶다.」

「김상철이라니?」

「그를 모른단 말인가? 어젯밤에 근대시를 뒤집은 한국인 말이야.」

「용건이 뭔데?」

「근대리아의 장래에 관한 일이야.」

「전 부위원장이라고 했지?」

다시 한 번 확인한 대위가 옆에 서 있는 무전병에게로 몸을 돌렸다.

한낮이다. 아침부터 눈이 그쳐 있었지만 기온은 영하 30도 가까웠다.

잠시 후에 대위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가십시다, 부위원장 각하.」

그가 경비대의 지프로 그를 데려간 곳은 근대시에 있는 근대 호텔이었다. 이대각은 기다리고 있던 사내의 안내로 12층에 있는 객실에 들어섰다. 스위트룸이어서 응접실에 앉아 있던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요, 부위원장님.」

「성공했구만, 그래.」

이대각이 그의 손을 잡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의 시선이 김상철의 이마에 감긴 붕대를 스치고 지나갔다.

김상철은 이제 옷을 갈아입고 말끔히 면도를 한 얼굴이었지만 지친 표정이었다.

그들은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다.

「러시아 정부의 발표를 들었는데, 개인 재산과 투자기업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한다는 내용이었어. 자네도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약속을 지킬까?」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지킬 겁니다.」

러시아 정부는 한 시간쯤 전에 근대리아를 미국과 일본의 위성국가로 만든 한국정부를 강력히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한국도 비슷한 시간에 러시아의 근대리아 침공을 항의했는데 한국기업의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다소 비껴선 듯한 반응이었다. 이대각이 큰 머리를 들었다.

「한국 정부는 벌써부터 꽁무니를 빼고 있어, 성명서를 봐도 그것이 보여, 근대리아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놈들이 말이야.」

「그럴 줄 예상하고 있었지요.」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놈들은 어떻게 할 계획인가?」

「추방시킬 겁니다.」

「한민수는 어떻게 할 거야?」

김상철이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그럼 내가 누구한테 물어?」

「아마 추방되겠지요. 그자도.」

「위층에 유위원장이 계십니다. 볼코프 소장과 함께 상황정리를 하고 계시는데, 안내해 드리지요. 도움이 필요하실 텐데 마침 잘 되었습니다.」

김상철이 벨을 누르자 문이 열리더니 사내 한 명이 들어섰다. 옷을 갈아입지 못해서 온몸이 피와 검정으로 얼룩진 조선족 사내였다.

그에게 시선을 주었던 김상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 희생이 켰습니다. 날 따르던 부하들을 거의 잃고 10여 명이 남았지요. 송길수도 죽었습니다.」

「‥‥‥‥」

「내 형제 같던 사람들이 이제 거의 다 죽었습니다. 난 꼭 피값을 받을 겁니다.」

지프에서 내린 이한이 행정청에서 아래쪽으로 5킬로쯤 떨어진 대륙호텔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카자코프 대위가 다가왔다. 그는 타니츠키 중령의 부관으로 이번 작전에 처음부터 참가한 사내였다.

「한, 이나카와회 소속의 시바다와 나카무라, 그리고 몬도의 행방을 아직 알 수가 없어. 잡아온 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10여 명의 부하를 데리고 남쪽으로 갔다는 거야.」

그들은 계단을 올라 2층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대륙 호텔은 완공을 며칠 앞둔 근대 소유의 호텔로 객실이 2,000개나 되었는데 지금은 진주군의 숙소와 체포당한 사람들의 감방 겸용으로 쓰이고 있다.

안쪽의 자리에 앉아 있던 타니츠키 중령이 이한을 맞았다. 그는 이제 스파이 검거의 책임자였다.

「한, 의외로 놈들이 순순히 자수해왔어, 아무래도 본국에서 지시를 받은 모양인데 우리가 작성한 명단에서 빠진 놈은 이제 10퍼센트밖에 되지 않아.」

타니츠키가 부드럽게 말했다.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그들은 두 달 가깝게 처리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이한이 탁자 위에 펼쳐진 명단을 들처 보았다. 수십 장의 종이에 적힌 사람 이름 옆에는 팬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한, 송의 이야기는 들었어. 안 됐네.」

타니츠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바빠서 조금 전에야 그레고리한테서 들었어.」

그에게 머리를 끄덕여 보인 이한이 손가락 끝으로 이름 하나를 짚었다.

「우선 이놈부터 봅시다. 내가 직접 알아보겠소.」

타니츠키가 머리를 숙여 그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사이토라면 나카무라의 부하로군. 카자코프가 안내해 줄 걸세.」

이한이 네 명의 부하를 뒤에 달고 카자코프를 따라간 곳은 객실 1415호실이었다.

마땅한 시설이 없었으므로 체포된 사람들은 특급호텔의 첫손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방 안에는 세 사내가 있었는데 들어선 그들을 보고 모두 긴장을 했다. 이한이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사이토가 누구냐?」

한국어였지만 시바다의 부하들 중 상당수가 재일동포 출신이었고 일본계라도 간단한 한국어는 말하고 듣는다. 사내 하나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곧은 콧날에 배우처럼 잘 생긴 사내였다.

「내가 사이토요.」

한국어도 익숙했다. 머리를 끄덕인 이한이 소파에 앉아 턱으로 앞쪽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내가 이한이다.」

「명성은 들었습니다.」

카자코프가 이한의 옆에 앉았지만 그는 한국어를 모른다.

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시바다는 어디에 있어?」

「모릅니다.」

선뜻 대답한 사이토가 끓은 입술을 열며 웃자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난 타운에 있었습니다. 보스는 근대시의 로열 카지노에 계셨고.」

「불칸 역을 친 것이 누구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 ‥‥‥」

사이토의 검은 눈동자가 이한에게 향해졌다. 그와 한동안 시선이 마주친 이한이 벨트에 찔러넣은 베레타 M9을 빼어 들었다. 미군의 제식권총으로 38구경에 15발이 장탄된 근접전용이다.

「모른다면 죽어라,」

이한이 권총을 세워 들고는 입술을 찌푸리며 웃었다.

「모른단 말이냐?」

「모릅니다.」

그 순간 요란한 총성이 울렸으므로 카자코프가 흠칫 머리를 들었고 사이토는 입을 딱 벌렸다. 사이토의 뒤쪽에 서 있던 부하 한 명이 한 발에 심장이 명중되어 테이블을 넘어뜨리며 방바닥에 쓰러졌다. 이한이 다시 베레타를 세워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두 놈 남았는데 한 마디씩만 묻고 두 발로 끝내겠다. 자, 불칸 역을 누가 쳤어?」

「모릅니다.」

다시 총성이 울렸고 이마가 뚫린 부하 하나가 벽에 부딪치며 주저앉았다. 이미 숨이 끊어졌으나 두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여 있다. 이한이 사이토를 바라보았다.

「불칸 역을 누가 쳤어?」

「나카무라가 쳤습니다.」

입술만을 움직여 사이토가 말했지만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알아들었다.

머리를 끄덕인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도 끼었나?」

「난 아닙니다. 이와구치와 다른 부하들이.」

머리를 끄덕인 이한이 한 손을 뻗어 사이토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곧장 권총의 총구를 그의 코에 대고는 옆으로 눕히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다시 총성이 울렸고 이어서 사이토가 자지러지는 신음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코가 달아난 것이다.

「당분간 살려두겠다.」

이한이 카자코프를 바라보았다.

「카자코프, 저것들을 어젯밤의 전상자 명단에 끼워넣어 주시오.」

입맛을 다신 카자코프가 머리를 끄덕였다.

「두 명은 그렇다고 치고 코가 없어진 부상자는 저놈이 처음일 거요, 한.」

「곧 미국과 일본이 정치적인 협상을 해올 거야.」

한민수가 그렇게 말했지만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저택에서 대륙 호텔의 15층 객실로 옮겨진 것은 오전 11시경으로 전창남은 바로 옆방에 들어 있었다. 완공을 며칠 앞둔 호텔이어서 방 안은 따뜻했고 시설도 훌륭했으므로 지낼 만은 했다. 그러나 어쨌든 포로의 신분이다. 문밖에는 러시아군이 지켜 서 있었고 전화는 불통이었는데 다행인 것은 TV를 시청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그들은 코마노프 대통령의 강경한 비난 성명과 한국 외무부 대변인의 두리뭉실한 항의 성명을 들었고 이어서 근대리아 진주군 사령관인 볼코프 소장의 협조문 발표까지 시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볼코프는 미・ 일의 스파이 혐의자를 색출하여 추방시키는 것이 목적이며 근대리아를 환수할 의도는 없다고 했다. 근대리아가 정상이 되면 즉시 철수한다는 것이다.

창가에 서서 어두워가는 근대시를 내려다보던 강미현이 돌아섰다.

「볼코프는 유위원장의 협조를 받고 있다고 하던데 당신은 왜 부르지 않죠?」

「저는 그것이 꺼림직 해요.」

「꺼림직 하다니?」

한민수가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볼코프인가 원가 하는 자가 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야?」

「당신은 근대그룹 경영자의 사위예요. 유장석 씨를 풀어 주었다면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것 아녜요?」

「전창남과 당신을 같이 취급하는 것 같아서.」

「그런 것에 신경 쓸 것 없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곧 나가게 될 테니까. 다만 이 사건으로 근대리아의 성장에 타격이 올 거야. 나는 그것이 걱정 돼.」

갑자기 TV에 뉴스 화면이 펼쳐졌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추었다.

먼저 아나운서의 소개가 있은 다음 한국인이 화면에 나왔는데 그는 한국어로 자신은 근대시에서 무역상사와 여행사 대리점을 운영하는 박기동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곧 열띤 어조로 일본의 야쿠자 조직인 이나카와회가 근대리아에 위조지폐를 대량 반입하여 러시아와 관광객들에게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나카와회의 근대리아 책임자인 시바다가 그 주범이며 그것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은 일본 정보국 요원이며 시바다의 자문역인 몬도 이찌로라고 폭로했다. 그가 앉은 테이블 옆에는 그가 수수료로 받았다는 위조지폐가 쌓여 있었다.

다시 아나운서에게로 카메라가 돌아갔다. 아나운서는 일본이 양동작전을 쓰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하나는 근대리아에 세력을 굳히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근대리아 발전의 방해였다. 위조지폐의 대량 투입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근대리아 정부와 주민, 그리고 러시아 정부인 것이다.

한민수가 TV의 스위치를 껐다.

「저놈 내가 알아. 사기꾼이야.」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김상철이를 배신하고 우재환과 시바다에게 붙더니 다시 김상철에게 돌아선 모양이군.」

「‥‥‥‥」

「위조지폐라니, 러시아 놈들도 꽤 머리를 썼군. 아니, 김상철이 농간인가?」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이유미는 TV의 화면이 바뀌어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박기동의 얼굴이 나왔을 때부터 놀람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은행의 개인 금고에 보관된 5천만 엔도 위폐일 가능성이 있고도 남는다. 박기동이 테이블 위에 얹어놓았던 엔화 뭉치는 자신의 몫에서 횡령해간 돈일 것이었다.

이유미는 힐끗 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의 습격 때부터 오금이 저려 한 발자국도 문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TV만 지켜보았었다. 말로만 듣던 쿠데타가 눈앞에서 벌어졌고 자신이 하늘처럼 의지했던 시바다 겐지는 이제 스파이에다 위조지폐범 혐의까지 겹친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또한 언제나 든든하게 생각했던 개인 금고 안의 5천만 엔이 생각조차 하기 싫은 물건이 된 것이다.

머리를 든 이유미는 창밖으로 허리를 돌렸다. 짙은 어둠에 싸여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눈이 그쳐 있다는 것은 맑은 유리창으로 알 수 있었다. 진주군 사령부는 곧 활주로를 정비하는 대로 관광객의 입출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이유미는 소스라치며 생각에서 깨어났다. 오후부터 근대리아 내부 통화는 허용되어 있었다. 벨이 다섯 번쯤 울릴 때까지 몸을 굳히고 있던 그녀는 결심한 듯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이유미 씨, 그랜드 여행사의 이사장 아니시오.」

그 목소리는 조금 전에 TV에서 들었던 박기동이다. 이유미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박기동의 느글느글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모처럼 매스컴을 탔는데, 보셨소?」

「보신 모양이구먼.」

「용건이 뭐죠?」

이유미는 박기동이 어제까지만 해도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였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자는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난 것이다.

「용건이라니? 내가 그 위대한 시바다 겐지의 정부한테 용건이 있을라구.」

「전화 끊어요.」

「끊지 말고 내 말 들어.」

박기동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넌 이제 마음대로 성질부릴 상황이 못 돼.」

「난 지금 방송국에서 나온 길이야. 아무 곳에나 다닐 수 있는 패스가 있어. 이른바 진주군에서 발행한 특별 통행증이지.」

「네가 시바다의 위조지폐 5천만 엔을 갖고 있다는 걸 나만은 알지.」

「거기에다 네가 시바다의 정부였다는 걸 러시아군이 알면 어떻게 될까?」

「용건을 말해.」

「사업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어차피 러시아군은 물러갈 것이고 시바다는 끝났어. 그러니 당신은 새 파트너를 찾아야 할 것 아닌가? 일본 측 호텔이나 미국 측 호텔은 이제 내 입김이 통할 것이고.」

「오늘밤에 그곳에 가지, 계약을 하자는 거야. 긴장하지 말아, 어때?」

「좋아.」

이유미가 앞쪽의 벽을 쏘아보았다.

「당신의 사업기질은 인정해. 비록 바탕이 사기꾼이기는 하지만.」

그러자 박기동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꽤 밝고 긴 웃음소리여서 수화기를 내려놓아도 이유미의 귓속에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몰운대]

감사합니다 ~~~

[파라다이스]

감사합니다

[심산까치]

잘읽었습니다 감사드려요

[엔젤]

즐감요

[희망찬오늘]

즐감요~^^

[홀인원leewoo]

감사합니다.

[소돌이]

잘 읽고 있습니다.

[남한강dl]

이렇게 되는군요.
흥미진진?

[남길]

감사합니다 .

[가랑잎]

즐독하였습니다

[서리1]

즐독~~~~~~

[김윤남]

아._대한민국

[김윤남]

아._ 내조국 대한민국

[원남]

「여긴 미국이 아냐, 빌. 언론은 정부가 장악하고 있어. 며칠 동안 러시아 정부의 과민반응과 흑심에 대해서 대학교수, 전문가 등을 동원해서 집중적으로 보도하겠지. 어용 관련조사 기관도 동원할 것이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한국 국민들은 잊어버리게 되어 있어.」
그때는 그랬지. 어용 언론, 어용대모, 어용교수, 어용전문가들까지.... 군사독제는 못할 일이 없었고 ㅊㅊㅊ 냄비근성의 대한민족 ㅎㅎㅎ

[감사강]

감사합니다

[문예당]

상황 전개가 실감 납나다. 감사합니다.

[촌노인]

감사합니다

[자갈길]

즐감요~~~ ! 감사합니다.

[백록담11]

하여튼 사기치는 놈 잘되는건 못봤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즐독 합니다

[나야짱]

감사...

[산로렌즈]

감사합니다.

[운초]

감사합니다

[2017]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