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마후라 -81-공군과 해병대는 맹우(盟友) | |
사소한 싸움으로 해병대 병사 한 명이 죽고 쌍방 간에 수십 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적과 싸워도 인명 피해를 줄여야 하는 판에 젊은 혈기라고 하지만 아군끼리, 따지고 보면 동료나 친구끼리 사소한 시비로 죽고 죽이는 참사로까지 이어졌으니 어리석어도 보통 어리석은 문제가 아니었다. 성질대로라면 가담자들을 모조리 영창에 보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곧바로 해병대사령관 강기천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역시 보고를 받았는지 분을 못 이기고 있었다. 나는 강사령관에게 제의했다. “우리 빨리 현장으로 내려갑시다. 비행기를 낼 테니 지금 떠납시다.” 나는 해병대사령관 출신인 김성은 국방부장관에게도 약식 보고를 하고 강사령관과 함께 해병대 진해 기지로 들어갔다. 일부러 해병대부터 찾은 것이다. 연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 진해 기지는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특히 병사가 죽었다고 하자 장교단도 흥분하고 있었다. 강사령관의 지시로 전 병력이 연병장에 모였다. 나는 도열한 병사들 앞에 있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나는 공군참모총장 장지량 중장이다. 불미스러운 일로 여러분 앞에 서니 면목이 없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웃의 공군 병사들은 너희들의 가장 듬직한 형제들이다. 그릇된 형제가 있으면 버릇을 고쳐 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먼저 그들을 대신해 사죄하러 여기 왔다. 죽은 병사의 명복을 빌고 부상한 용감한 해병대 병사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그러면서 공군과 해병대와의 전우애를 강조했다. “사실 해병대와 공군은 전투 수행상 다른 어떤 군보다 가까운 사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해병대와 공군은 서로 협력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내가 강릉전투비행단장으로 있던 6·25전쟁 때 미 해병대 비행전대원들과 합동 작전으로 동부 전선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많은 땅을 빼앗아 오늘의 휴전선을 만들었다. 이런 공군과 해병대가 사소한 혈기로 죽음을 부르는 싸움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고 안타깝다. 이와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공군참모총장인 내가 공군 병사들을 단속하겠다. 해병대원 여러분의 남아다운 기백으로 멋지게 한 번 용서하기 바란다. 앞으로 더 친한 전우가 될 것이다.” 나는 실례로 김포에 주둔한 해병대 기지와 김포전투비행단이 피를 나눈 친구처럼 가깝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공군과 해병대의 충돌은 내가 김포 11전투비행단 시절(1958~61년)에도 자주 일어났다. 김포 반도에는 해병대 기지가 많다. 해병대 병사들은 외출 나오면 김포 읍내나 김포공항 인근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갔다. 이때 김포전투비행단의 공군 병사들과 맞부딪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툭하면 해병대원들이 공군을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이런 보고를 받을 때마다 나는 속이 상했다.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나갈 수 없어 며칠 궁리 끝에 해당 기지의 해병대 여단장에게 제의했다. “내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데 해병대 병사 10명을 선발해 공군에 보내 줄 수 있겠습니까. 5일간 데리고 있다가 보내 주겠소. 대신 해병대도 우리 공군 병사 10명을 받아 해병대원과 함께 훈련받고 식사와 잠자리도 함께 하면 어떻겠소?” 해병대 여단장 역시 골치를 썩이고 있는지라 좋은 아이디어라면서 당장 10명의 해병대원을 김포전투비행단으로 보내 줬다. 나는 특별히 공군전투비행단 기지로 파견된 해병대원들의 숙식을 체크하며 함께 훈련과 운동을 즐기도록 조치했다. 이윽고 5일을 마치고 송별회가 열렸는데 병사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석별을 아쉬워했다는 소식이 전해 왔다. 해병대 기지에 간 우리 병사들도 그들과 끈끈한 우정을 나눴다. 공군참모총장이 직접 진해 기지에 내려와 이런 일화까지 소개하니 해병대 병사들은 진정됐고 오히려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그들을 진정시킨 뒤 나는 강사령관과 함께 김해전투비행단으로 향했다. |
빨간 마후라 -82-사격훈련장으로 들어온 대통령 전용 헬기 | |
공군 병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번에는 강기천 해병대사령관이 단상에 올라 일장 연설을 했다. 가장 가깝게 지내야 할 공군과 해병대가 맞서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며 불미스러운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친구가 돼 달라고 당부했다. 공군·해병대의 최고 수뇌가 이렇게 사건 해결에 적극 나서다 보니 양군은 멋지게 화해했다. 이런 우의를 다지기라도 하듯 이번에는 공군과 해병대원들이 합세해 공수부대원들을 두들겨 패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본래 해병대, 공수부대, 공군전투비행대가 거칠고 용맹하기로 유명한 집단이다. 그래서 서로 부딪치기 일쑤였는데 각기 개성을 인정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참모총장 취임 두 달 뒤인 1966년 10월 총리 공관에서 합참의장, 3군 참모총장 등 군 수뇌가 참석한 가운데 만찬이 열렸다. 그런데 만찬 도중 나에게 비상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기를 들자마자 상대방이 다짜고짜 말했다. “나 박종규요. 급히 대전으로 내려오시오.” 대통령 경호실장이 호출한 것이었다. 당장 대전으로 내려오라는 것으로 보아 비상 상황이 돌발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그길로 총리 공관을 나왔다. 다른 참석자들에게 누를 끼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적 선약을 이유로 자리를 떴다. 나는 승용차 안에서 L-26기(에어로 커맨더)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여의도 공항으로 나갔다. 야간 비행으로 대전공항에 도착해 보니 활주로에 라이트가 켜져 있지 않았다. 유도등(런웨이 라이트) 시설이 돼 있지 않은 것을 그때서야 알고 아차 했다. 자꾸만 낌새가 이상하다고 여기며 상공을 몇 차례 선회하다가 비상 착륙을 위해 지프 여러 대를 일직선상으로 배치, 라이트를 켜도록 지시하고 그 불빛을 따라 비상 착륙에 성공했다. 역시 궁하면 통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묵고 있는 유성의 호텔을 찾으니 박종규 경호실장이 대단히 화난 얼굴로 나를 맞았다. “세상에 이럴 수 있소. 각하의 전용 헬기가 부산을 출발, 대전으로 오는데 공군 전투기가 전용 헬기를 향해 총을 쏘고 있는 거요. 어떻게 된 거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나는 곧바로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구미 인근 낙동강 상류에는 모래사장이 질펀히 뻗어 있다. 공군은 그 모래밭을 대지 공격 사격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김포비행장은 물론 김해·강릉·광주 등 전국의 각 비행장에서 공군기가 날아와 폭탄 투하, 로켓포 발사, 기관총 사격을 하고 돌아가는 훈련장이었다. 대통령 전용 헬기가 부산을 출발해 대전으로 가던 중 때마침 사격 훈련장 안으로 들어왔다. 말하자면 헬기는 사격 훈련 중인 전투기 밑으로 들어온 것이었으며 전투기는 헬기 위에서 폭탄 투하와 기총 소사를 퍼부었다. 진상을 알고 보니 이는 상호 교신이 안 된 결과였으며, 무엇보다 대통령 전용 헬기가 항로를 무시하고 운항한 데서 나온 실수였다. 그렇더라도 공군이 대통령의 전용기 운항 코스와 시간을 체크했어야 옳았다. “아무래도 큰일 나겠소. 앞으로는 각하의 전용기에 참모총장이 동승해야겠소.” 박경호실장이 단호히 말했다. 사상이 투철한 최우수 공군 조종사가 대통령 전용기에 배치되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 경호실장의 생각이었다. 그 무렵 대통령은 유독 지방 순시를 많이 다녔다. 각 지역 현안, 숙원 사업 독려와 지역 인사들을 두루 만나는 일정이 하루에도 두세 곳씩 잡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어서 육로 이동은 생각할 수 없었다. 대통령의 잦은 지방 순시는 67년 5·30 대통령 선거를 대비하는 일환이기도 했다. |
빨간 마후라 -85-영하 30도 산 정상 비상착륙 | |
주조종사가 엔진 상태를 살피더니 별 이상이 없다고 보고했다. 미심쩍었지만 이상이 없다는 데야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헬기는 다시 대구로 날았다. 대구에는 이효상 국회의장을 비롯해 경북지사·대구시장 등이 환영 나왔고 우리 일행은 그들과 함께 음식점으로 가 오찬을 나눴다. 그러나 예감이 좋지 않아 나는 벌써 대구비행장에 날아와 대기하고 있는 전용기(공군 1호기)로 상경하자고 대통령께 건의했다. 대통령은 여전히 고속도로 지형을 살펴야 한다며 헬기 탑승을 고집했다. 헬기가 대구를 이륙한 지 20분쯤 지났을까, 추풍령을 넘어 시곗바늘 1시 방향에 있는 황간읍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기체가 급강하하고 있었다. 뒷좌석에서 리시버 마이크로 주조종사와 교신하던 나는 깜짝 놀라 “이 사람, 왜 이래?”하고 물었다. 조종사는 “엔진이 이상합니다. 올라가지 않습니다”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헬기는 계속 밑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불시착하겠습니다!” 아래를 살펴보니 도저히 불시작할 지형이 되지 못했다. 잘못 내리다가는 헬기가 박살 나 버릴 것 같았다. 순간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전용기로 지역 순시를 하고 귀환하던 중 마닐라 남쪽 세부의 산에 부딪쳐 탑승자 모두 순직한 사건이 떠올랐다. “아니다. 다음 고지에서 불시착하라!” 다음 산 정상에 헬기가 불시착하니 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별 내색 없이 헬기에서 내려 계곡 아래로 가더니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일행은 대통령이 대구에서 막걸리를 많이 마신 탓으로 소변이 마려워 헬기가 비상 착륙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산 정상의 날씨는 영하 20∼30도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 잠시도 머무를 수가 없었다. 나는 지형을 살피는 대통령께 춥기 때문에 기내에 들어가 계시라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황간 시가지가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계곡에는 눈이 쌓였고 지형이 상당히 험했다. “이건 나의 최후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지만 계속 비상 호출을 했다. 대통령·비서실장·경호실장도 눈치를 채는 것 같았지만 침착하게 말없이 기내에 앉아 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마침 우리와 같은 기종의 헬기 2대가 대구∼대전∼서울 코스를 잡아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이때다 하고 파일럿 야전잠바를 벗어 던져놓고 흰 와이셔츠 바람으로 두 팔을 들어 SOS 수신호를 수 차례 반복했다. 헬기는 나의 머리 위까지 날아오더니 두세 바퀴 상공을 선회했다. 정상에 불시착한 비행기와 나의 수신호를 이상하게 보았던 모양이다. 헬기 2대는 이윽고 우리 헬기 옆에 착륙했다. “아, 살았다.” 나는 순간 탄성을 지르며 착륙한 헬기 쪽으로 달려갔다. 바로 미 육군 헬기였다. 1기는 준위가, 2기는 상사가 조종하고 있었다. “Who are these guys?”(이자들 누구야) 준위가 조종석에서 내리더니 우리 헬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비속어로 물었다. 나는 그에게 바짝 다가가 “Shut up, Its code one!”(대통령의 암호)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그때서야 준위가 깜짝 놀라며 엉뚱한 방향에 대고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엔진 트러블이다. 이머전시 콜을 했지만 불통이다. 대전까지 태워 줄 수 있느냐.” “OK.” 나는 그때서야 우리 헬기에 올라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대통령과 일행은 내가 이머전시 콜을 해서 헬기가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순전히 운이었다. 이렇게 해서 무사히 귀경했는데 얼마 후 본스틸 유엔군사령관을 만나 이 사실을 얘기했더니 그가 “Your lucky man”이라고 치켜세웠고 박대통령도 “역시 참모총장이 타야 안심이야”하고 껄껄 웃었다. |
빨간 마후라 -86-제대군인들의 기술 교육 | |
내가 참모총장으로 있을 때는 매일 450∼480대의 비행기가 전국의 각 비행 기지에서 뜨고 내렸다. 밤에도 100대, 많을 때는 200대가 뜬다. 초계 비행을 비롯해 연락·훈련 비행을 하기 위해서다. 참모총장은 이를 매일 체크하는데 대통령을 수행하는 데만 신경 쓸 수 있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실제로 경호실의 협조 요청을 받고 이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긴요한 것은 무선통신으로 해결하고 참모차장에게 역할을 더 부여하는 것으로 하다 보니 임무가 수월하게 돌아갔다. 어느날 C - 54 4발 비행기로 제주에 가는데 기상 악화로 도저히 제주공항에 내릴 수가 없었다. 이런 때 기후가 내 탓인 양 결단하기가 대단히 곤혹스럽다. 대통령의 스케줄을 맞추려면 반드시 제주에 내려야 하고 대통령은 또 기상 악화에 대한 절박성을 모르는 수가 있다. 그러나 사고 방지가 우선이기 때문에 공중에서 비행 계획을 변경, 김해비행장으로 회항했다. 단순히 젊은 조종사의 판단에만 맡긴다면 대통령의 엄한 지시와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념을 갖고 있는 조종사라 할지라도 대통령 앞이라면 움츠러 들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 많은 참모총장이 직접 비행기에 동승해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면 대통령도 조종사도 안심하게 된다. 실제로 횡간의 산꼭대기에서 엔진 고장으로 헬기가 비상 착륙한 뒤로 대통령은 더욱 나를 신뢰했다. 한편 함께 비행기를 타다 보면 대통령을 독대하는 시간이 많아 나로서도 힘이 됐다. 나는 그 무렵 병사들이 제대하면 대부분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매년 16만 명의 제대자가 나오지만 산업 구조는 70%가 농업이어서 일자리 창출이 안 되고 또 기술도 없어 젊은이들이 제대하면 할 일 없이 쏘다니다 사고나 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평소 생각하던 것을 대통령께 건의했다. “각하, 제대 병사들을 써먹을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대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떻게 써먹는다는 거야?” 나는 길게 설명했다. 병사들이 제대하기 한 달 전쯤 기술교육을 시켜 사회에 나가 유용하게 써먹도록 한다. 일종의 취업교육으로 공병·자동차 정비·운전병과를 익힌 군인을 제외하고 일반 사병들에게 집중적인 기술교육을 실시한다. “장비와 교관 충당이 문제 아닌가.” 대통령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장비 문제는 크게 걱정할 것이 없었다. 우리 군은 미국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아 각종 장비가 들어와 있고 그보다 우수한 장비는 미군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군 막사 짓는 데만 쓰기에는 아까운 측면도 있었다. “각하께서 유엔군사령관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시면 가능한 일입니다.” “좋은 안이다. 청년들이 공장에 들어가고 철공소에서 일하고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이렇게 하여 각 도별·지역별·부대별 기술학교(여섯 곳)가 편성돼 운영됐다. 군사 원조 장비를 총동원해 굴착기·불도저·터널 파쇄기·그레이더 운전을 익히니 산업화로 이행해 가는 초기 기초 인력으로 동원되는 동력이 됐다. 그리고 취업도 용이해져 농업에만 의존하던 가계에 큰 보탬이 됐으며 10년 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특수의 풍부한 인적 자원이 된 것이다. 16만 명의 제대자는 단순한 제대자가 아니라 각종 기술자다. 그리고 조국의 산업 역군으로서 조국 근대화에 앞장선 ‘코리안 드림’을 이룬 주역들이다. 그 이후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면 “장총장, 오늘은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왔나”하고 나의 다음 말을 재촉할 정도였다. |
첫댓글 공군을 현대화시킨 업적
길이 길이 빛나고 있네요
숨겨진 비사들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