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서평은 지중해지역원의 <지중해지역연구> 논문집, 제26권, 제1호(2024. 02)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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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모리스 블롱델의 『행동』
- 19세기 ‘행동(실천)의 형이상학’을 제시한 보기 드문 철학서
제주대학교 (이명곤)
I. 철학자 ‘모리스 블롱델’과 ‘행동의 형이상학’
모리스 블롱델(Maurice Blondel)은 1861년에 탄생하여 1949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철학자 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철학의 맥락에서 현대의 실용주의적 요소를 통합하여 행동주의 철학을 발전시킨 사상가이다. 가톨릭 철학자로서 그는 당시 합리적 사유가 가득하여 종교적 사유에 대한 반감이 컸던 일반 학계의 경향성에 맞서 변증론을 통해 종교와 이성적 학문(과학) 사이 에 화해를 이끌고자 노력하였으나 이로 인해 종교계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삶에 대한 비판과 실천과학에 관한 논고(essai d'une critique de la vie et d'une science de la pratique」라는 부재가 붙은 『행동(L’Action)』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단행 본으로 출간된 그의 첫 저작이다. 이 책 안에서 그는 존재론, 윤리학 그리고 신학의 분야를 아우르는 논의의 지평을 ‘행동’이라는 개념에 수렴하여 제시하고 있다. 불행히도 아직 국내에 서는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이 책을 읽은 불어권 독자들은 하나 같이 언어적 변증법이 탁월하고, 마치 잘 정돈된 산문처럼 독자로 하여금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드문 19세기 철 학 서적이라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의 후학들은 이 책을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버금가는 19세기의 위대한 형이상학적 서적이라고 말하면서 이 책이 품고 있는 3가지 형이상학적 특징 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주고 있다.
① 형이상학은 실험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 현실에서 모든 자양분을 얻는다.
② 형이상학은 현실적인 사태들을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아직 실현되지 않은 사태들’에 종 속시키고, 이로써 자연의 세계를 이성과 법칙으로 변모하는 사유의 세계로 확장한다.
③ 형이상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긍정하고 이것이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실천한다. 따라서 행동을 의미하는 인간적인 행위(acte humain)는 실재 안에서 ‘가능한 것’을 이식 (naturalization) 시킨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이란 역동성이며, 사태들에서 출발하여 사태들 로 돌아오지만 하나의 ‘높은 수준의 사태들’로 귀환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책은 ‘인간의 삶과 행동’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행동의 형이상학’이라고 불릴 만 한 책이다. 저자는 행동에 대해 “(한번) 행동하였다고 해서 행동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다. 도 덕적 삶에서는 ‘금리업자’가 있을 수가 없다(Avoir agi ne dispense pas d'agir : il n'y a point de rentiers dans la vie morale)1)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삶이란 곧 행동 으로 점철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또한 도덕적인 삶이란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대다수의 그의 후학들이 한 번 쯤은 인용하는 유명한 첫 페이지의 인용구는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가 ‘행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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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Action - Essai d'une critique de la vie et d'une science de la pratique, Paris, PUF, 1893, p. 192. 이 글에 인용된 『행동(L’Action)』의 모든 인용구는 이 책에서 인용된 것이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인간의 삶에는 의미가 있는 것이며, 인간에겐 목적지가 있는 것일까? 나는 행동하지만, 행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살고 싶다는 생각도 없이,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도 못한 채 행동하고 있다. 내 안에서 동요하는 이 존재의 모습, 그림자의 이 가볍고 덧없는 행동, 이 행동이 영원히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피를 흘려도 나는 무(無) 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무란 나에게 있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생명의 선고를 받고, 죽음의 선고를 받고, 영원을 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서문, p. VII)
II. 열린 시스템으로서의 철학과 ‘갱신된 의지주의’
이 책은 학위논문답게 매우 세부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 5부로 구성되어 있 는 각 부의 핵심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이 될 것이다.
위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비록 인간 행동의 특성을 밝히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 지만, 또한 근대와 더불어 시작된 인간의 도덕적 물음들에 있어서 순수한 이성적인 해결책(예 를 들어 칸트식의 해결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또한 당시 유행하였던 염세주의나 허무주의 (쇼펜하우어나 니체식의 관점) 그리고 실증과학의 방식(꽁트의 실증주의) 등에 대해 서도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물론 이들에 대한 비판은 인간의 행동이 본질적으로 도덕 적 행위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또한 ‘초월성’과의 관계성을 배제할 수가 없는 것이라 고 본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인간존재의 구조나 실존에 관 한 관점들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하면, 첫째, 인간 영혼의 구조는 충만함 이 아니라 그림의 여백과 같은 비움이 있으며, 초월적(신성한) 조명이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이 비움을 통해서 이다. 비움이 전혀 없다면 우리의 영적인 눈은 멀게 되고 종교적(초월적)인 것 - 3 - 과 관련된 어떤 작업도 수행할 수가 없을 것이다. 둘째,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진정 한 운명이 있다면 철학은 결코 이것에 흥미를 잃을 수가 없다. 종교(기독교)가 단언하듯이 이 운명이 초자연적인 것이라면 철학은 더 이상 자신의 힘만으로 이것을 달성할 수는 없다. 그렇 지 않다면 초자연적인 것은 더 이상 본래적 의미의 초자연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셋째, 바로 여기서 철학의 올바른 지위가 규정된다. 철학은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는 항상 불완전한 상태 로 남아 있으며, 불완전하기에 체계(시스템)를 형성할 수밖에 없고, 불완전하기에 열린 시스템 일 수밖에 없다. ‘열린 시스템(le système ouvert)’ 이것이 곧 철학에 대한 이 책의 핵심적인 관점이 되고 있다.
철학이 불완전하고, 열린 시스템이기에 이 열림을 메워주는 것이 ‘행동’이라고 저자는 주장 하고 있다. 따라서 블롱델의 ‘행동주의’는 새로운 ‘의지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이 유는 앎 혹은 사변이 실패하는 곳에서도 행동은 성취를 가져오는데, 여기서 행동의 동인은 곧 ‘자발적인 행위’ 혹은 ‘자율적인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의 4부에서 “의지를 물질화하 고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자발적인 행위(acte volontaire)’는 의지를 확대 하고 어떤 의미에서 의지를 살찌운다. 추상적인 사색이 실패하는 이 순간에도 실천은 끊임없 이 그리고 가식 없이 성공한다. 의지는 승리와 패배라는 반대되는 경향성들을 새로운 종합으 로 통합하고, 성취된 행동에서 모두 표현되고, 개혁되고, 변형된다(p. 193-194)”라고 말하고 있 다. 이는 말하자면 인간의 이성이 실패하는 곳에서도 ‘초월적인 힘’의 덕분에 인간은 행동하기 를 멈추지 않고 또 도덕적 실천에 있어서 성공, 즉 ‘선의 획득’과 ‘가능한 것에 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거의 철학자들이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 ‘이성이 우선 이냐’ ‘의지가 우선이냐’를 물었다면, 블롱델은 이성과 의지에 대한 물음 이전에 오히려 “행동 하라!”라고 주문하고 있다. 왜냐하면 (선의지를 통한) 행동(실천)만이 오히려 진정한 도덕적 앎 을 보장할 것이며, 의지는 행동의 과정에서 보다 확고하게 획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의지주의’는 보다 새롭게 된 ‘갱신된 의지주의(le volontarisme renouvelé)’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III. 인간 행동에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하는 지성
그렇다면 저자는 ‘행동’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나는 그것에 대한 명확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만일 볼 게 있다면, 나는 그것을 보아야 한다. 아마도 나는 나 자신에게 존재하는 이 유령, 내가 응시하는 이 우주, 과학과 그 마법, 이상한 의식의 꿈과 함께 어떤 견고성을 가지는지 여부를 알게 될 것이다. 나 자신 없이 그리고 나 자신에도 불구 하고 존재에 복종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이 마지막 심연에서 내 행동에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 틀림없이 발견할 것이다(p. VII)”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말하자면 행동이란 인간이 그것을 통 해 존재하는 의식과 자유에 앞선 ‘시원적인 기준’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행동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으며, 행동하는 인간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풍부함, 즉 의지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존재의 풍요로움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인생에 있어서 문제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해결한다. 이 해 결책은 옳든 그르든 모든 사람이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반영한다. (...) 사람 들에게 삶의 모든 요구 사항과 그의 작품에 숨겨진 모든 충만함을 제안하며, 긍정하고 믿는 힘과 행동할 용기를 그에게 부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p. VIII)”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인생을 마치 드라마처럼 고려하면서 ‘인생이 시작되었고, 따라서 누구도 행동을 멈출 수가 없 으며, 비록 자살을 했다고 해도 그가 행동을 배제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또한 “나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든 그곳에서 압제자(tyrannie)를 느끼지 않 을 충분한 지식과 의지가 있다. (...) 우리는 모든 어둠에 맞서 싸워야 한다. 싸움에서 도망칠 사람은 필연적으로 생명과 함께 자유를 잃게 될 것이다. 가장 좋은 것 중에도 악의, 불순함, 사소한 욕망의 보물이 있다. 이 적대적인 힘이 스스로를 습관과 체계로 굳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p. 224)”라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주장들이 결국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비록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선과 빛을 향해) 행동하기를 원해야 한다는 것이며, ‘원해진 행동(action voulue)’이 점점 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행동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이 옳고 그런지 알 수가 없는 ‘불확실성의 시 대’를 마주하게 되고, 이러한 불확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기를 멈추게 하고 수동적이 되 게 하며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럴수록 더욱 행동하기를 ‘원해야’ 한 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행동의 밑바닥, 그 심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존재의 빛 이 숨겨져 있으며, 이해와 앎은 행동과 더불어 혹은 행동의 이후에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행동이 존재론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정당하게 ‘행동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