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두 의학박사의 요양병원 이야기(46)
약 힘으로 산다
김 할머니는 75세로 8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지금까지 병상에 누워 지내고 있다.
복용약이 무려 17가지나 된다. 혈압약 3종류, 당뇨약 2종류, 협심증심장병약 둘, 배뇨장애치료약 둘, 항혈전제 둘, 치매약 둘, 위장약 둘, 변비약 하나, 콜레스테롤약 하나이다. 하루 세 번 먹는 것도 있어 한 웅큼의 약을 늘 복용한다. 약만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캡슐 약 한 가지는 입안에 넣을 때의 그모양 그대로 대변으로 나오는 것도 있다. 흡수가 전혀 안된다는 의미로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노인에서는 약효가 크게 떨어진다. 약을 줄이려고 설득해도 막무가내이다.
심 할머니는 86세인데 손목 골절이 있어 수술을 받고 오셨다. 처방약이 19가지나 되었다. 수술한 정형외과에서 5종류, 치매가 있어 신경과에서 4종류, 배뇨장애가 있어 신장내과에서 5종류, 최근에 감기가 들어 개인의원에서 5종류의 약을 가지고 왔다. 약을 다 모아보니 진통제가 5가지나 있어 한 가지로 줄였다.
여러 병원 의사에게서 처방받은 약을 요양병원 의사가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겹치는 것은 빼고, 최소한으로 줄여 복용하게 한다. 약을 왜 먹게 되었는지 상세히 물어보고 가능한 한 5종류 이내로 먹게 하려고 노력한다. 환자의 상태를 잘 관찰하면서 서서히 조금씩 약을 줄여나간다는 말이다.
약을 보는 시각이 세대별로 크게 다르다. 지금 70대 이상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전쟁 등 아주 열악한 사회적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약이 귀하여 약이란 생명수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약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고 약을 감량하려고 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거부감이 심하다.
50대 이전은 어느 정도 풍족한 환경 속에 태어나 약이 풍부했기 때문에 약은 곧 독(毒)이라고 말하면 잘 알아듣고 약 감량에 저항감이 거의 없다.
노인에서는 위장장애 등으로 약물이 흡수가 잘 안되지만 한 번 흡수한 약물은 간에서 독성제거능력이 떨어져 빨리 신진대사가 되지 않고, 신장에서 배설능력도 떨어져 잘 배출되지 않기 때문에 약물의 독성이 오래 몸에 잔류할 수 있다. 노인에서 약물 부작용은 젊은 사람에서보다 약 2~3배 더 커지는 경향이 있어 약물 투여로 없던 병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여러가지 약물을 복용하면 약물끼리 서로 충돌하여 원하는 약효는 떨어지고 원하지 않는 부작용은 더욱 커진다. 다제(여러 가지)약물복용의 위험성을 연구한 자료가 있다. 5가지 이상의 약물을 복용하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에 비해 입원이 18%, 사망위험이 25% 증가한다(2019년 국민건강보험공단자료).
응급의학과 남궁인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 여기에 옮긴다.
87세 건강한 할머니가 무릎이 아파 병원에서 진통제를 처방받아 먹었다. 진통제를 먹으니 부작용으로 혈압이 높아져 혈압약(암로디핀)을 먹었다. 이 약을 먹으니 발목이 부었다. 발목이 부어 병원에 가니 부기 빠지는 약 이뇨제를 처방하였다. 이뇨제를 먹으니 요의를 자주 느끼고 요실금 증세가 생겨 요실금치료약을 먹었다. 이것을 먹으니 안구건조증이 생겨 인공눈물을 넣게 되었다.
진통제 하나의 부작용 때문에 무려 네다섯 종류의 쓰지 않아도 되는 약을 먹게 된 것이다. 나이가 들면 기저질환도 생기고 아프고 불편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에 약을 많이 먹게 된다.
집사람이 얘기하는데 아침방송에 여에스더라는 여의사가 나와 자신이 복용하는 건강보조식품이 서른 가지가 넘는다고 기염을 토한다고 한다.
비타민 등 건강보조식품까지 먹다 보면 식탁의 한 켠에 약봉지가 수북하게 쌓이게 된다. 노인들은 복용하는 이런저런 약봉지의 약을 모두 가지고 와 주치의와 약물복용에 대해 자주 상의하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의사들은 노인 약물 부작용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약을 감량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혈압약이나 당뇨약을 하루에 여러 번 복용하는 것보다 하루 한번 복용하는 것이 오히려 약물순응도(약을 빼먹지 않고 규칙적으로 먹는 정도)를 높여 더 효과적이라는 보고도 있다. 전문가들은 한 가지 병에 한 가지 약물을 하루 한 번 먹는 것이 노인들에게 제일 적합하다고 조언한다.
다음번 병원에 갈 때 약봉지를 모두 가져가 상담해 보자. 중복되는 것도 많고 기한 지난 것도 많음을 알게 된다. 어릴 때 어른들에게서 ‘약 힘으로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노령자들은 많은 약물에 노출되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노령자는 되도록 약을 적게 먹는 것이 좋다. 약으로 속 쓰림이 생겨 식사를 못할 지경이면 약을 포기하고 식사를 하는 것이 좋다. 밥(음식)은 최고의 약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