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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잃어버린 도산골 토계 번화가를 추억하는
헌정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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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마실을 급히 물돌이 한 낙동강은 계남 마을 맞은편 산야 아래 사련진에서 넓은 강물을 나룻배에 그득히 담은 마냥 가쁜 숨을 고르고 있다. 사련진은 퇴계구곡으로 들어가는 삽지껄인 강가 지대이다.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거친 낙수는 빼어나듯 수려한 청량산과 고산 단사 천사를 휘감아 돌아서 도산구곡을 역행하며 거침없이 흘러왔다. 아직도 의인 섬마와 탁영담 그리고 분천 오담 월천을 굽이굽이 감돌아 쳐서 가야할 낙강 천삼백리 물길이 끝없이 널려 있다. 그래도 강물은 서두르지 않았다. 계남 동네 앞 널찍이 형성된 물길 정거장에 걸터 앉아서 여독을 풀며 여명이 밝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낙동강 물안개 꽃에서 하얗게 피어난 여명이 어둠을 몰아낸 하계촌에는 찬연히 떠오른 아침 태양이 온 생명들을 가득히 비추고 있었다. 예배당 종소리가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 온다. 순정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산골에 주님이 내려 주는 은혜로운 빛이자 복음의 종소리였다.
저렇게 높은 첨탑 꼭대기에 어떻게 하얀 십자가를 매어 놓을 수 있을까요. 첨탑 속에 매달려 있는 큰 청동종에 달려 있는 길다란 밧줄을 아이들과 함께 평화롭게 당기는 인자한 목사님의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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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이고 있는 뾰족한 첨탑 지붕 안에 달려 있는 청동종 소리가 아침마다 고요한 정적을 깨우며 도산골에 울려 퍼진다. 도산서원 석간대 어귀에 박아 놓은 하마비 아래 파란 비단띠를 걸쳐 놓은 것 같은 청소깝 외나무다리 밑으로 흐르는 여울이 크게 우는 날은 종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여울의 심사가 뒤틀리지 않아서 평화로운 날이면 고요히 울려 퍼지는 이 종소리를 가끔씩 들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삼바꼬(원래는 삼밭골이다. 삼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실제로 당시 강섶이나 골 주변에 삼나무를 적잖이 볼 수 있었다) 주변이나 샅골(옛 지명은 살골 혹은 전골이다. 동취병산으로 들어가는 골이다. 지금의 도산서원 선착장에서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골을 말한다. 주차장 뒷산은 석간대이다. 주차장 오른편부터 도산서원을 감싸면서 옆으로 뻗어 나간 산을 동취병산이라고 불렀다) 앞에서 이 종소리를 들으면 큰 일이 난다. 지각을 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동골을 지나 "°참남배로(아래 지명고찰 참조)"를 돌아서서 의인으로 건너가는 섶다리 근처에서나 혹은 뱅기장 주변에서 종소리를 들어야만 안심할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등굣길은 섬마 시사단 마당인 솔밭 밑에서 떠난 나룻배가 맞은편 도산서원 강나루에 도착할 무렵에 부내 아이들이 이곳을 통과하거나 의인 번남 앞 여울 건너 가설극장 둔덕 공터 즈음에서 교회당 종소리를 듣게 되면 정말 한가로운 등굣길이 된다.
이때는 마음이 한결 풍요로워져서 내살미를 휘돌아서 낙동강을 타고 의인 앤떼이 앞으로 내려오는 시원한 강바람을 맞이할 수 있는 여유로움도 생기고 술도가 안을 기웃거릴 시간도 주어진다. 검은 담쟁이 넝쿨이 외벽을 가득히 덮은 술도가는 늘 친근하게 다가온다. 부내(분천동, 분강촌) 동네 마음씨가 순한 성기 형님이 이곳에서 일을 하는데 하굣길에 배고픈 우리들을 위해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 쪄 놓은 밀가루 설기를 눈치껏 주인 모르게 위도리 옷을 배 위에 접게 하고는 그 사이에 한웅큼씩 넣어주곤 했다. 구수한 그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사진 설명(caption): 사진1은 1976년 안동댐 준공을 눈앞에 두고 촬영한 사진이다. 우리가 등교하던 신작로가 도산서원 앞 소나무 가로수를 지나 참남배로까지 낙동강 옆으로 선명하게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왼쪽을 보면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만드는 중이라 산속에 공사 흔적이 역력하다. 우리들은 이 신작로를 따라 1975년 1학기까지 토계에 있던 도산국민학교를 다녔었다. 2학기부터는 수몰시기가 점점 다가와서 분강촌 마을이 매우 어수선 했다. 마을 뒷산인 영지산부터 도산서원까지 병풍처럼 이어진 취병산 중턱으로는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진입로 공사가 한창이어서 다이너마이트로 박살이 난 돌덩이가 거의 매일 마을까지 휙휙 날아왔다. 영천이씨 집성촌 마을인 이곳에서 620여 년 동안 대대손손 살아온 종친들은 이사짐 싸기에 정신이 없었다. 마을은 그렇게 파훼졌다. 아이들은 2학기부터 산너머에 있는 온혜국민학교를 다녔다. 사진은 수몰 전이라서 그런지 도산국민학교로 가는 옛길과 주변전경이 그대로 잘 보인다. 왼쪽 산 밑으로 난 낙동강 강둑 길을 따라 아래로 1km 정도 내려가면 분강촌(부내ㆍ분천동)인 우리 마을이 있었다. 토계 학교에서 사진에서 보이는 강둑길 십 리를 따라 내려오면 분강촌이 있었다(사진 출처: 도산서원 별유사로 계시는 도산국민학교 54회 졸업생인 이동채 선배님이 보내주셨다). 당시 도산서원 아래에서 섬마로 건너가기 위해 여울 위에 놓았던 청소깝 외나무다리가 장마기에 큰물에 사라진 채 외나무다리를 듬성듬성 걸었던 돌무더기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수몰을 앞두고 강가 위에 만든 선착장 시멘트 접안대도 보이고 있다. 지금 도산서원 주차창 아래에서부터 강가까지 계단식으로 만들어 놓은 선착장 가는 구조물이다.
사진2는 1975년 수몰 전 도산서원 강 건너 섬마에 있던 솔밭 전경이다. 가장 이상적인 등굣길은 섬마 시사단 마당인 솔밭 아래에서 출발한 나룻배가 맞은편 도산서원 강나루에 도착할 무렵에 부내 아이들이 이곳을 통과하면 정말 한가로운 등굣길이 된다. 이런 날은 토계 번화가를 여유롭게 구경하면서 등교할 수 있다. 토계 교회당 뾰죡 첨탑 지붕 속에 달아 놓은 큰 청동종은 정확히 아침 9시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종소리가 울린 뒤에 30분이 지나면 학교 수업이 시작되었다. 솔밭 속에 작은 누각인 시사단의 모습이 보인다. 1975년에 촬영한 희귀한 사진이다. 1976년 안동댐 준공을 앞두고 시사단이 수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1975년에 10여 미터 높이로 단을 만들고 그 위로 이 누각을 옮겼다(사진1,2 출처: 도산서원 별유사로 계시는 도산국민학교 54회 졸업생인 이동채 선배님께서 보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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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도가를 지나면 신작로 왼편 밭 속에 우뚝 솟은 마루 위에 엄청나게 크게 지어져 있는 계남고택이 한 눈에 들어온다. 큰 누각처럼 장대하게 다가오는 계남고택은 후원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전각은 넓은 마당에 흙과 큰 돌을 섞어서 단을 만들고 그 위에 툇마루을 놓은 다음 다시 난간을 두른 모양새였다. 신작로에서 보면 커다란 대청마루가 한 눈에 들어온다. 굴뚝에서는 아침때가 지났는데도 푸른 연기가 아직까지 나오고 있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신작로 옆에 줄지어 서 있는 탱자나무와 측백나무 그리고 오동나무 담장 사이로 보이는 높다랗게 솟은 계남고택은 마당도 넓고 들어가는 삽지껄도 길어서 언제나 흥미로운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계남고택은 하계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마치 우리 부내 동네에 있는 종가집 농암종택과 생김새가 흡사했다.
계남고택은 도산골에서 매우 유서 깊은 고택이다. 도산국민학교의 전신인 보문의숙은 진성이씨 문중이 1909년 12월 도산서원 자산에서 출자하여 계남고택에서 학당을 시작한 사립학교였다. 1916년에 옛날 수몰 전의 도산국민학교 자리로 옮겨왔고 1918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편하면서 편입되었다. 그러니까 1916년까지 계남고택에서 사립교육기관의 역할을 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인 1941년 일본은 자국내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을 "국민학교"로 통일시키면서 식민지인 우리나라도 자연히 국민학교로 변경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연유로 모든 학교가 그러했듯이 도산공립보통학교 또한 1941년에 도산국민학교로 개칭됐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포도 시인 이육사 선생은 12세이던 1916년에 보문의숙에서 수학하다가 개편된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1회로 졸업하였다.
이렇게 낙동강 언덕 위에 나 있는 신작로를 따라 걸어가는 매일 십 리 등굣길을 여유롭게 주변 경관을 살피면서 학교에 갈 수 있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예배당 종소리를 어느 곳에서 듣는냐에 달려 있다. 도산서원 앞 강나루 근방에서 종소리를 듣거나 혹은 아이들을 싣고 건너오는 나룻배를 이곳에서 볼 수 없거나 참남배로 산모퉁이에서도 종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계남고택에서 아침 군불을 때는 뭉게연기를 보지 못할 때는 영락없는 지각이다. 이때는 주변 경관이고 나발이고 뭐고 간에 여유가 하나도 없다. 머리 속이 그저 하얘질 뿐이다. 아무 생각없이 책보자기 안에 딸각거리는 필통 소리에 맞쳐 그야말로 삼십육계 출행랑 치듯 뛰어가도 교문과 운동장에서 토끼뜀을 면할 수가 없다. 남시창 선생님이 지각생을 맞이하기 위해 전혀 인자하시지 않은 얼굴로 곤봉을 빙글뱅글 돌리면서 저승사자처럼 정문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목실골 배오지 장구목 매내 아이들과 부내 아이들은 단골처럼 이곳에서 자주 만나곤 하지만 왠지 만날 때마다 사돈처럼 서로 민망스러워 했다.
목사님이 뾰죡 첨탑 양철 지붕 속에 달아 놓은 큰 청동종에 매여 있는 길다란 밧줄을 당겨서 내는 종소리는 정확히 아침 9시에 울려 퍼진다. 길고도 굵은 밧줄을 힘겹게 당기면 늙은 종도 아침 잠에서 비로서 깨어나서 양 옆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큰 소리를 내어 도산골 사람들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게 알려주는 일상의 시계가 되어 주곤 했다. 그리고 종소리가 울린 뒤에 30분이 지나면 학교 수업이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학교 수업을 알리는 신호도 종소리였다. 예배당의 연로하신 목사님이 내는 청동종 소리는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울렸고 젊은 소사 선생님이 치는 종소리는 "땡땡땡~ 땡땡땡~ 땡땡땡~" 소리를 냈다.
오늘 등굣길은 심신이 만만디다. 뱅기장과 의인 앤떼이를 지났는데도 교회당 종소리가 울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늙은 청동종이 늦잠을 잘 리도 만무하다. 이런 날은 토계 번화가를 여유롭게 거닐 수 있어서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고 흥분이 된다. 물론 하굣길이 훨씬 마음이 편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동심의 가슴은 아침 나절이든 오후든 걱정만 없으면 언제나 천사의 마음이다. 토계 정류소를 문턱 삼아 번화가에 발을 들여놓는다. 봄 햇살에 살랑살랑 날아다니는 호랑나비 발걸음처럼 가볍게 가볍게 번화가로 한 발 한 발 들어간다.
※지명 고찰: °참남배로(위 사진 붉은색 지대)
[도산서원을 지나 사백여 미터 올라가면 조동골이 나오고 다시 조금 더 가면 급히 굽어진 산모퉁이가 뾰족하게 나와 있었다. 의인으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는 강섶 옆 신작로 왼편에 길게 자리한 헬기장으로 접어들기 삼백여 미터 전에 툭 튀어나온 산굽이었는데 그 길 아래는 검푸른색이 짙게 드리운 표풍(회오리바람)이 빙빙 도는 깊은 '소(沼)'가 있었고 길 위에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들이 절벽을 이룬 가운데 돌 산 사이에는 크고 작은 참나무들이 여기저기 우거져 있었다. 옛사람들은 이곳을 "참남배로"라고 불렀고 우리들도 자연히 그렇게 따라 불렀다. 참남배로를 돌아서 조금만 올라가면 오른 쪽에는 의인으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왼쪽에는 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진 모래로 된 헬리콥터 비행장이 있었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을 지시할 때와 1970년 완공식 때 두 번 오셨는데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신작로 오른쪽에는 아카시아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밑에는 낙동강이 구불구불하게 흘러갔다.
강변에 아카시아나무들이 밀림처럼 길다랗게 신작로를 따라 우거져서 강과 도로 사이에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초여름에 아카시아 꽃이 필 때면 강바람에 밤꽃 향기 같은 냄새를 내뿜으며 흰색 꽃잎들이 하얗게 나부껴 마치 한겨울에 소담스럽게 흩날리는 함박눈을 연상케 했다.
참남배로는 외지고 인적이 드물고 깊은 소가 있어서 무서운 곳이었지만 참남배로를 돌아서 완만히 우회전 해서 나가면 여기서부터는 오른쪽 강 위로 의인으로 건너가는 섶다리가 나타나고 아카시아꽃들이 만발하고 키 작은 코스모스도 신작로 길을 따라 줄지어 피어 있는 운치있는 직선 도로가 의인 앤떼이 가설극장까지 쭉 뻗어져 있었다. 가설극장 앞 여울 건너에는 의인 번남고택이 99칸(한국전쟁 때 일부 소실로 현재 50여 칸 정도가 남음)의 위용을 자랑하며 강변 마을에 번듯하게 떡 위치해 있었고 그 윗쪽 산 아래에는 퇴계구곡 가운데 일곡이 시작되는 사련진이 깊은 강물을 형성하며 넓다랗게 고여 있었다.
의인 앤떼이 앞을 지나서 완만하게 좌회전해서 약간의 경사진 도로를 올라가면 토계 술도가가 나타나고 왼쪽 길 옆에는 계남고택이 보이고 저 멀리로는 토계 번화가와 함께 자하봉 아래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도산국민학교 건물과 운동장을 가득히 채운 산 만큼이나 큰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렇듯 참남배로를 돌아나가서 비행장으로 접어들어서야만 비로서 토계 번화가의 뒷산인 건지산 줄기와 도산학교 뒷산인 자하봉 산자락이 희미하게나마 시야에 잡혔다.
우리들과 애환을 함께 한 참남배로의 지명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참남배로는 지형적인 형상을 그대로 이름 붙인 지명이다. 신작로가 산모퉁이를 급히 돌아나가는데 아래에는 깊은 소가 있고 위에는 절벽에 참나무들이 빼곡히 숲을 이루고 있었다. 겨울날 우리는 등하굣길에 도로 위 벼랑 아래 움푹지고도 의자처럼 형성된 돌계단에 앉아서 햇볕을 쬐이기도 했다. 그 곳에는 강바람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추운 봄과 겨울에도 따뜻한 햇볕이 드는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참남배로는 참나무가 있는 벼루 혹은 벼랑 내지 베랑을 뜻한다. 벼랑은 낭떠러지의 험하고 가파른 언덕을 말한다. 그리고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벼랑을 벼루라고도 한다. 또 베랑은 벼랑의 경상도 방언으로 가파르다는 의미이다. 벼루와 관련된 사자성어는 안변현애(岸边悬崖: 언덕 안. 가 변. 매달린 현. 벼랑 애)와 안변초벽(岸边峭壁: 언덕 안. 가 변. 가파를 초. 벽 벽)이 있다. 두 성어 모두 "벽과 같이 깎아지른 듯한 물가의 절벽"을 뜻한다.
참남배로에 대해 한글과 한문 그리고 방언과 지형ㆍ 지세 등을 참고 내지 유추하여 나름대로 지명을 고찰한 것을 요약해보면 참나무를 줄여서 "참남"이라고 했고 벼루와 벼랑과 베랑이 앞에 말인 참남과 붙어서 발음하기 쉬운 언어의 역사성과 변천길을 걸어서 가장 말하기 편하고도 무난한 참남배로로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1] 이호신 화백의 도산서원(2008), 여행스케치
♤[그림2]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1746)
♤[사진1]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 이전에 촬영한 사진(촬영자 미상ㆍ일제강점기~1950년대 사이로 추정됨)
♤[사진2] 부내 종친 이재술 아재가 도산서원 정문 아래 신작로에서 촬영한 사진이다(1974.12).(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출품한 사진이다. 강 건너 의인과 섬마 사이 강변 중간 지점에 있던 양수장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진3] 남익찬 선생이 도산서원 정문 아래 강둑에서 촬영한 사진(1972.5)[(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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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와 3>은 각각 도산서원 정문 아래 신작로와 신작로 아래 강둑에서 담은 전경이다. 위 그림과 사진은 모두 도산서원 주변 풍광이나 전경을 담은 것이다. <사진 3>을 보면 강 건너 시사단 주변에 있던 옛날 솔밭이 보인다. 솔이 강변에 소복이 모여 있고 소나무 아래 잔디밭이 넓찍해서 솔밭 혹은 솔마당이라고도 불렀다. 솔밭은 시사단의 정원이자 마당이었다. 솔밭 아래 강나루에서 출발한 나룻배가 강 건너 도산서원 나루터에 도착할 무렵 부내 아이들이 이 지역을 통과해야 여유로운 등굣길이 된다.
♤[사진4, 5] 설명(caption): 두 개의 사진 모두 도산서원 샅골 앞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 전경이다. 위 사진4는 이서락 선생이 1974년에 촬영한 "사라진 의촌리 외나무다리"이다.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출품한 작품이다. 출처는 경북기록문화연구원이다. 사진5는 1970년대 이전의 사진으로 추정되며 작자와 출처 모두 미상이다. 강 건너 섬마 솔밭 속에 시사단이 선명하게 보인다. 부내(분천동)에서 도산국민학교에 매일 등교할 때 토계 예배당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종소리가 시계가 되어 주었다. 도산서원 삽지껄인 °하마비(사진8 참조) 아래 파란 비단띠를 걸쳐 놓은 것 같은 청소깝 외나무다리 밑으로 흐르는 여울이 크게 우는 날은 종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사진6] 설명(caption): 2018년 안동시와 경북기록문화연구원이 "안동댐 수몰마을 생활사 아카이브 사진전"에 전시한 사진이다(2018.12.11~15. 잃어버린 고향, 다시 찾은 마을, 장소: 안동군 와룡면 행정복지센터 2층). 이 사진전에는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수몰된 와룡 예안 도산 녹전 등 54개 수몰마을 가운데 9개 동네의 옛사진 200장을 전시했다. <사진 6>의 제목은 "나룻배를 타고 미실장터로 향하는 박시골 우지마 여인들"이다. 옛날 1970년대 도산서원 정문 아래 강나룻터에서 강 건너 시사단이 있는 섬마 마을을 무던히 오가던 그 나룻배와 영락없이 닮았다. 그리움이 가득히 묻어나는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사진이다. 사진을 출품한 주인은 기록돼 있지 않아서 표기하지 못했다.
가장 이상적인 등굣길은 섬마 시사단 앞에서 떠난 나룻배가 맞은편 도산서원 강나루에 도착할 무렵에 부내 아이들이 이곳을 통과하거나 혹은 의인 앤떼이 가설극장 근방에서 교회당 종소리를 듣게 되면 정말 한가로운 등굣길이 된다. 이런 날은 토계 번화가를 여유롭게 구경하면서 등교할 수 있다. 뾰죡 첨탑 지붕 속에 달아 놓은 큰 청동종은 정확히 아침 9시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종소리가 울린 뒤에 30분이 지나면 학교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림 1>은 등굣길 십 리 여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조망이다. 강 건너 중간 지점 골짜기에 도산서원이 널다랗게 자리잡고 있는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왼편 윗쪽 산과 강이 접해서 왼쪽으로 길게 이어진 지역이 부내 동네이다. 그림 저 멀리로 보이는 강물 끝자락 부분 왼편에 있는 산모퉁이가 참남배로 지점이다. 이곳을 돌아서 완만하게 좌회전 해서 조금 가다가 다시 우회전 하면 직선 신작로가 길게 나오고 그 신작로 중간 부근 왼편에 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 놓은 모래사장 헬기 뱅기장이 나오고 계속해서 또 한참 가다가 직선 신작로가 끝나는 지점에 의인 앤떼이 옆에 있는 가설극장 공터가 나오고 이를 지나 완만하게 좌회전 해서 올라가면 술도가, 계남고택, 버스 정류소가 줄줄이 나온다. <그림 2>의 부내 동네는 산수화 왼쪽 위 산과 강이 접해서 길게 이어진 지역이다. 그림 오른쪽 도산서원 입구 우편에 있는 절벽 지대인 천연대가 보이고 그 아래 강나루도 눈에 들어온다. 시사단 앞에서 출발한 나룻배가 강나루에 도착할 즈음에 이곳을 통과해야 여유로운 등굣길이 된다. 이런 날은 토계 번화가를 이곳 저곳 기웃거리며 학교에 가도 늦지 않는다. 부내와 도산서원 간의 거리만큼 두 배 정도를 더 가야 학교가 있다. <사진 1>은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 훨씬 이전의 사진으로 보여진다. 시사단 앞 솔마당에서 도산서원 입구 쪽으로 바라 보며 담은 전경이다. 강 건너 길 위에 보이는 작은 터널이 도산서원 입구이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서원 정문 길이 잘 정비 돼 있었다.
♤[사진7] 설명(caption):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12월 8일 도산서원 보수공사 준공식 때 도산서원에 참석한 모습이다. 박 대통령은 이때 도산서원 성역화 1차 사업 완료 기념으로 청와대 경내에 있던 금송을 가져와서 도산서당 왼쪽 축담 아래에 손수 식목 했다. 사진은 대통령이 환영 인파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를 하고 있는 광경이다. 대통령이 흔드는 손 뒤로 준공식을 적은 기념 비석이 보인다. 유년시절 도산국민학교 등하교 때 도산서원 정문 왼쪽에 설치해 놓았던 이 기념 석판을 늘 보았던 기억이 난다.
[사진 출처: 정부기록사진집(문화체육관광부 콘텐츠기획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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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은 1969년10월14일, 박정희 대통령이 도산서원을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서원의 보수와 정화에 정성을 들여서 빛나는 문화유적을 후세에 잘 보존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향후 착공될 안동댐으로 인해 지역민들의 피해가 없게 하라"고 했다(중앙일보 1969.10.15. 기사 참조함). 박 대통령은 1970년12월8일, 도산서원 성역화 1차 사업 완료 기념으로 청와대 경내에 있던 금송을 가져와서 도산서당 왼쪽 축담 아래에 손수 식목 했다. 이후 금송은 고사(1972)와 동일 수종 재식수(1973.4.22), 서원 경내 담장 바깥 마당 왼쪽 산 밑으로 옮겨지는(2018.11.26) 등 여러 이유로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의인 앤떼이 아래 신작로 왼편에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은 박 대통령이 도산서원을 방문하기 위하여 급조해서 만든 헬리콥터 비행장이었다. 당시 도산골에 살았던 현재 70대 어른들의 얘기를 갖추려 옮겨 본다. 대통령 방문 때 소방차가 미리 와서 강둑 아래에 흐르는 낙동강물을 길어다가 모래사장 헬기 비행장에 뿌렸다고 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헬기 이착륙 때 일어나는 강한 바람으로 자갈과 모래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마구 휙휙 날아다녔다고 한다. 비행장에서부터 도산서원까지는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여러 대의 검은 세단 승용차에 나눠 타고 이동을 했다. 대통령을 보기 위해 도산면 온동네에서 구경 나온 환영 인파가 섬마 시사단 근처 강변을 따라 줄지어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강 건너 도산서원 쪽으로 올라가는 대통령을 멀리서 바라보았다고 한다. 군인들이 빼꼭히 진을 쳐서 경계를 섰는데 아마 당시 안동 송현동에 있었던 36사단이 아닌가 싶다. 1970년대 분천동에서 도산국민학교를 다닐 때 날마다 도산서원과 비행장 앞을 지나 등하교를 했기 때문에 이곳 산천의 지리와 지형을 대부분 샅샅이 알고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대통령이 헬기로 어디에 내려서 어떤 경로를 통해 도산서원을 오고 갔는지는 훤히 짐작이 간다. 그 시절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날 때면 신작로가 파손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마다 36사단인 5797부대가 대민지원을 와서 도로를 보수해주었던 기억도 난다. 군용 트럭 앞뒤에는 5797부대라고 써져 있었다. 그때 우리는 신작로 공사를 하고 있는 군용 트럭 뒤에 타 본 적도 있었다.]
♤[사진8] 설명(caption): 옛날 도산서원 삽지껄(현재 도산서원 주차장 아래 선착장 끝 지점)에 있던 "°하마비(下馬碑)"의 유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산서원에는 퇴계 사후에 서원의 삽지껄(어귀)에 세운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는 1976년 안동댐 준공 이전, 즉 도산서원 아래 강변 길이 수몰되기 전에는 샅골(살골, 전골) 초입(현재 주차장 아래 선착장 끝 지점)에 관광 공예품을 팔던 상점의 뒷편에 있었다. 지금은 도산서원 주차장 오른편 도산서원 경내 건물 위치를 그린 안내판 우편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겨 놓았다. 옛날에 말을 타고 다니던 시절, 이 지역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서 가라는 일종의 푯돌이다. 하마비는 궁월이나 서원, 고궁, 향교 등의 입구에 설치했는데 누구든지 이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라는 일종의 '예를 갖추라'는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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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계 번화가 1번지는 도산지서에서 백운이발관까지"
번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서너 가지 필요충분 조건이 있는 것 같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번성하여 하려한 거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교수로 임용되기 전인 30대 시절에 기자생활을 10여 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편집국이 명동에 있었다. 그것도 한국에서 제일 땅 값이 비싸다는 상업은행 옆 빌딩이었다. 지금 명동예술극장 맞은편 한일관 5층이었다. 당시 자신도 놀랐다. 대한민국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제일 깡촌놈이 대한민국 최고의 번화가에 직장이 있다는데 대해 이따금씩 헛웃음이 나왔다. 그때 회사를 다니면서 느꼈던 번화가의 느낌을 몇가지 상기시켜 적어 본다. 먼저 거리가 사람들로 늘 북적거려야 한다. 그리고 일단 번화가로 접어들면 무엇인가 기대가 되고 충족되어질 것만 같은 흥미진진한 일들과 볼거리들이 즐비하게 널려져 있어야 한다. 마음 속에서는 잔잔한 흥분과 긍정적인 마인드도 일어나야 한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다양한 상점들이 밀집해 있는 가운데 구매력이 뒷받침되어 주거나 직접 충족되어 진다면 금상첨화이다. 마지막으로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다양한 먹거리들을 파는 식당가도 많이 집적해 있어야 한다. 언급한 번화가의 분위기를 토계 번화가에 한 번 대입시켜 전개해 보자. 다시말해 대한민국 깡촌 1번지 번화가의 모습을 대한민국 최고 번화가 거리에서 느꼈던 그 감성에 빗대어서 기술해보겠다는 얘기다. 천양지차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유년시절 서울 번화가를 아예 몰랐던 터라 토계 번화가를 처음 대하면서 설레었던 그 느낌은 매양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왕이면 아침 등굣길보다는 느낌이 더욱 편안하고도 안락하게 와 닿을 수 있는 "마치 도산국민학교 뒷교정 둔덕 위 내살미 가는 초입에 위치한 묘목장 애기 무궁화 나무에서 하루 종일 태평무사 하게 앉아 있는 행복한 고추잠자리의 평화로운 마음 같은 그러한 기분으로" 하굣길 토계 번화가 1번지 그 재미나는 거리로 들어가 본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토계 번화가 1번지 그 거리 속으로 말이다.
뭐니뭐니 해도 토계 번화가 1번지는 도산지서 앞 광장에서부터 "도산석유" 집인 기름방(석유집)까지이다. 좀 더 무리하게 확장을 해 본다면 도산국민학교 정문을 나와서 토계 다리 건너기 직전에 있는 점방에서부터 시작해서 버스 정류소까지를 번화가 권역으로 억지로 밀어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지역을 번화가 거리로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다. 혹자는 술도가 밀가루 설기는 잘도 얻어 먹어 놓고는 왜 술도가까지 번화가로 늘려 잡지 않느냐고 시큰둥할 수도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렷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술도가에서 버스 정류소 사이에는 도산면민들이 다 알다시피 계남고택(하계 남쪽에 위치해서 당호를 계남댁이라고도 부름)이 근엄하게 자리하고 있다. 옛날부터 의인의 번남(고택)과 하계의 계남(고택)은 도산골의 양남이라고 할 만큼 진성이씨 문중으로 그 내력이 대단한 집안이었다. 세상천지에 어느 번화가 거리 속에 수백 년 묵은 고택이 존재한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계남댁 마당에 사는 지신들이 들으면 놀라서 수졸당 동암종택 마당으로 피신할 일이다. 자~ 이제 드디어 토계 번화가 거리로 슬슬 들어가보자. 춘자 누님이 저녁 나절에 나와서 살뽕살뽕 걸어 주면 지나가는 토계 사람들이 모두 다 쳐다보았다던 우리 춘자 누님이 즐겨 걷던 토계 번화가 1번지 그 거리로 들어가 보겠다는 말이다(※필자의 수필 "깊은 가을날 도산국민학교 운동회"에 나오는 춘자 누님 말이다. 토계 무대가 좁다고만 했던 토계 번화가에 살았던 그 춘자 누님 말이다).
♤그림 및 사진출처와 설명(caption): <그림 1, 2>는 필자가 1970년대 토계 번화가 거리를 그린 전경이다. 눈을 감고 기억으로 그려 보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토계 번화가의 거리를 번화가를 구성하는 주체와 객체의 필요충분 조건에 맞추어 보았을 때 무리가 없는 이구동성의 결론은 "도산지서에서부터 버스 정류소"까지로 통일되는 분위기이다. 번화가 1번지로 더욱 압축한다면 "도산지서~도산석유"집까지 이다. <사진 3, 4, 5>는 이동운 친구(58회)가 4년 전에 드론 촬영(아름다운 풍경)과 일반 사진으로 담은 토계 전체 전경이다. <그림 1, 2>에서 보이는 하계(토계) 다리가 <사진 3, 4>에서도 아직까지 남아 있다. 토계 번화가는 <사진 3>에 보이는 다리를 넘어서 산 밑에 있었던 도산지서 지점부터 도로가 물 속에 들어가는 위치까지였다. 그 위치에 버스 정류소가 있었다. <그림 1, 2>의 방앗간 앞 개천에 놓인 징검다리가 유년시절 추억의 잔상들을 그립게 떠올린다. 원천에 살았던 58회 동창생 위자네 아이들이 하교 때 가재와 골부리, 피래미를 잡고 물장구 치며 즐겨 놀았던 정겨운 징검다리 놀이터였다.
<사진 4>는 도산국민학교 정문에서부터 토계(하계)다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다리를 건너면 왼쪽 하계천 둑방과 오른쪽 산 아래 사이로 편평하게 넓게 보이는 곳이 번화가 거리였다. <사진 5>는 <사진 4>가 수몰된 광경이다.
1976년 안동댐이 준공되면서 토계 번화가는 수몰지구가 되어 지도에서 사라졌다. 토계 번화가는 수몰되기 전까지 도산면사무소와 도산우체국 도산지서 등이 집적해 있는 도산면 소재지였다. 반천 년 훨씬 이전에 농암과 퇴계가 도산골에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과 후대의 터전들도 전설이 되어 물 속으로 들어갔다. 도산구곡의 절반 지역도 파란만장한 수난을 겪으며 수몰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림1, 2> 수몰 전 토계 번화가 건물 위치 고증에 도움 주신 분(1970년대 토계 번화가 1번지에 거주했던 도산국민학교 56회 졸업생 "도산석유"집 이창희님과 58회 졸업생 "자생당 약방"집 권내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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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지서... 불온 삐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토계 다리를 건널 때면 낙동강 강바람을 타고 하계천으로 몰려 들어오는 선선한 공기가 참 시원하고 좋다. 당시만 해도 그렇게 큰 다리를 도산골에서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작은 보폭으로 종종걸음 쳐서 다리를 건너 오면 오른쪽에 웃토계로 올라가는 길목에 규환이네 담배집이 나오고 그리고 왼쪽 토계천 둑방과 오른쪽 산 밑 사이로 넓게 펼쳐지는 찬란한 토계 번화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하계천 다리를 건너면 사실상 계남 권역이라고 보면 된다. 웃토계인 상계와 하계로 지형상 나누되 개천을 중심으로 다리 건너편 남쪽 방향 즉, 하계 지역의 남쪽에 토계 번화가가 형성되어 있다. 토계는 상계와 하계 지역 전역을 말한다. 퇴계종택이 있는 웃토계는 하계보다 위치가 위에 있는 만큼 상계가 되고 아래에 위치한 동네는 하계가 되는 것이다. 지리적으로는 이렇게 나누었지만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는 사람과 점방과 행정 기관이 모여 있는 하계 지역을 그냥 "토계"라고 불렀다.
도산면민들이 사랑하는 거리 그리고 도산골 사람들의 숱한 애환이 서려 있는 토계 번화가로 행복한 발걸음을 내딛어 본다. 우선 순경들이 들락거리는 도산지서가 오른쪽 산 밑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서 건물은 도로에서 산 쪽으로 20여 미터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 통로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고 양쪽으로는 회양목을 심어놓았다. 지서 건물 머리에는 큰 글씨로 쓴 "방공방첩 승공통일"이라는 반공 표어가 붙어 있었다. 공산주의와 간첩을 때리고 부시고 막고 이겨서 통일하자는 얘기다. 나는 하도 뻔질나게 이곳에 드나들어서 순경 아저씨들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곳이 겁나게 무섭다고 했지만 오히려 순경들이 나를 무서워 했다. 부내 동네에 살면서 독짓골과 영지산 곤재 심지어 거기가 워데라고 글쎄 주당골과 비암이골 토째비골까지 가서 주워온 불온 "삐라"를 수시로 들고 가서 공책과 연필로 하도 많이 바꿔 갔기에 순경 아저씨들이 나를 보면 오히려 지레 겁을 먹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지경이었다. 공책이 떨어지면 뒷산 영지산 꼭대기나 독짓골에 얼른 갈비 끌러 가고 그 다음에는 도산지서가 자동으로 문방구가 되는 식이었다.
♤ 사진은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 옛날물건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70년대 한국 문화 전시물을 필자가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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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학교에서 반공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열렸는데 귀신교실 마루 밑에 들어가서 주운 빨간색 몽당 크레용과 노란색 크레용 두 색으로 독짓골에서 주운 불온 삐라의 그림을 어설프게 밑그림으로 그리고 그 위에다가 큰 빨래 방망이로 내리치는 모양을 다시 그린 뒤에 양 옆에다가 "올빼미 눈으로 자나깨나 삐라를 찾아서 도산지서에서 공책 타자" 라고 써서 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보기좋게 떨어졌다. 삐라를 주워서 지서에 가져다주었을 때는 칭찬도 받고 공책도 쉽게 탔는데 삐라를 줍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반공 포스터를 나름대로 심오한 의미까지 넣어서 그렸는데도 연필 한 자루도 주지 않고 떨어트리니 어린 마음에 디기 서운했다. 그 다음부터는 미술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 버렸다. 순경 아저씨는 지서에 갈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숙제도 잘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어린 마음에 "어릴 때 숙제를 얼마나 안 했길래 저렇게 볼 때마다 숙제에 한이 맺혀서 숙제하라고 할까?" 하고 혼자 생각하니 아저씨들이 몹시 안쓰럽게 여겨졌다.
언젠가 하굣길에 순경 아저씨가 도산서원 간다고 하시면서 서원 입구까지 자전거 뒤에다가 태워 준 적도 있었다. 가만히 보니 그때 순경 아저씨들이 하는 일들은 어린 내가 보기에는 생소깝 꺾는 사람들 이름 적거나 감시하는 것과 자나깨나 간첩과 공비 잡는 일, 뭐 소 도둑 잡는 일, 장날 술 먹고 싸우는 사람들 말려서 집에 보내는 일 같은 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그 중에서도 간첩 잡는 일이 가장 큰 일처럼 느껴졌다. 지서 분위기도 그러했다. 또 집집마다 양철로 만든 반공 표어가 대문에 걸려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반공방첩 승공통일"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며 간첩활동을 막고 공산주의 세력을 무찔러 이겨서 통일하자는 뜻이다. 학교 본관 건물 지붕 아래에도 "간첩은 표시 없다. 우리 모두 살펴 보자"라고 대문짝만하게 써서 오 년 내내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사진출처: 예안면 서부리가 고향인 사진 애호가 신규원 선생(1949년생)이 1976년 수몰 후 촬영해서 "도산면 경찰지서 옛터"라고 이름을 붙인 옛날 도산지서 모습이다. 우리들이 도산국민학교를 다닐 때 매일 등하굣길에 익숙하게 보았던 도산지서가 강물로 허물어져 있는 모습이다. 그 옛날 토계번화가를 떠올리게 하는 그리움이 깊게 배어나는 사진이다.
♤간첩, 공비, 빨갱이는 일반 사람들과 쉽게 단번에 구별이 된다. 그 놈들은 모도(모두) 전부가 빨간색이기 때문이다. 겉도 속도 옷도 몸뚱이도 모두 빨간색이다. 그렇지만 국민학교 1, 2학년 때 그렇게 지천에 깔려 있을 듯했던 빨갱이 놈들을 실제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놈들은 다 어디에서 숨어 살았던 것일까. 온 산천에 빨갱이 놈들이 널려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서 이리저리 삐라를 찾듯이 경계하며 샅샅이 찾아보았는데도 빨간 색깔의 빨갱이 놈들을 한 마리(명)도 찾지 못해서 속이 상했었다. 그 놈들을 한 마리라도 잡기만 한다면 공책과 연필을 한 바소가리 탈 수 있었을 텐데. 56회 졸업 기념 사진 속 도산국민학교 구교정 본관 중앙 국기봉 왼쪽 지붕 아래 5년 동안 붙여져 있었던 반공 표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간첩은 표시 없다. 우리 모두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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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소년 이승복 군이 외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는 졸업할 때까지 교내 소년소녀 웅변대회의 단골 주제가 되기도 했다. 나는 소년 부문에 참가해서 일등도 하고 부상으로 앨범을 받은 적도 있었다. 웅변대회의 하이라이트는 누구나 막판에 하는 똑같은 행동이었다. 마지막에 교탁을 억수로 쎄게 "탁" 치면서 이틀씩이나 여물을 못 먹어서 화가 디따 나 있는 황소처럼 눈을 아주 크게 뜨고 얼굴에는 오만상 열받아 있는 표정을 잔뜩 담아서 심사 선생님들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나는 공산당이 글쎄 싫타니까요오오오오오~!" 하고 고함을 질러서 거기 구경하는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거의 장가지게 해놓아야 상을 탈 수 있다. 안 그러면 어림도 없다. 상장 근방에도 못 간다. 그러다 보니 해마다 교탁을 내리치는 소리가 점점 더 세져 갔다. 어떤 놈은 하도 쎄게 치고 고함을 냅다 질러서 지바람에 나자빠지거나 괴상한 기침이 나오는 녀석도 있었다. 상을 못 타는 녀석들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거나 뽕 맞은 놈처럼 생기가 없이 흐리멍덩하거나 멀겋게 보이면 이건 하나마나 꼴찌였다. 싹실에 사는 호윤이는 웅변을 제법 잘 했다. 호윤이는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구연동화에서 "나무꾼과 선녀"로 이미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나무꾼은 호윤이가 맡고 선녀 역할은 순희가 했다. 신수도 훤하게 생겨서 배구공보다도 작았던 나에 비하면 처음부터 점수를 왕창 따고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제복 차림에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구수한 입담과 정감이 넘치는 환한 웃음으로 공책 내주시고 자전거 태워 주시던 살갑고 정겹던 우리 도산지서 아저씨들도 어디에선가 지금도 마카 모도 잘 계시겠지. 물 속에 잠겨 있는 토계지서라 할지라도 지금도 찾아가서 맡겨 둔 내 공책인 마냥 떼쓰면서 달라고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한 움큼 가득히 안겨줄 것만 같다. 빈난했던 그 시절 공책에 목말라 하며 보채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보듬어 주시던 그 순경 아저씨들이 왠지 모르게 흘러나오는 흐릿한 눈물 속에 배여서 어른어른 보여진다.
자~ 다시 번화가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어쨌든 기분 좋은 토계 번화가로 들어가는 삽지껄이자 대문이 도산지서나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도산지서 앞으로 넓게 형성된 광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자장면 맛 잊을 수 없어... 선거 포스터도 아련히~"
도산지서 앞 왼편에는 마루가 높은 점방이 있었다. 점방에는 학용품보다는 대부분 군것질거리가 많이 놓여 있었다. 부내 우리집 뒤안 담벼락에 큼직하고 맛이 좋은 누런 왕살구가 열리는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이 점방에서 우리집 살구를 팔기도 했다. 할머니께서 크고 튼실한 놈들만 골라서 이 점방에 갖다주었기 때문이다. 부내와 섬마 아이들은 때때로 도산서원 앞 강가 유원지에서 주워서 모아 온 코카콜라 칠성사이다 오란씨 환타 공병을 갖다 주고는 비가사탕과 뽀빠이를 받아서 먹기도 했다. 이따금씩 일요일날에 부내 동네 통소 위 양수장 언덕과 물레방간 둔치에 널려져 있는 잘 익은 잔디씨를 훑어서 박카스 병에 가득 담아 가지고 가면 눈깔사탕과 라면땅으로 값을 쳐서 주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소재들을 가지고 가서 먹거리로 바꿔 먹을 수 있는 이 점방이 고마웠다.
점방 옆에는 하계천 둑방으로 질러가는 포도밭 두렁 위로 난 작은 길이 좁다랗게 뚫려져 있었다. 점방 앞에는 큰 공간 마당이 둥그렇게 장방형으로 나 있는 넓은 광장이 형성되어 있어서 말 그대로 무대 같은 번화가를 이루었다. 점방에서 개천 둑방으로 질러가는 작은 사이 길 입구 오른편에는 도산면 골골마다 그 명성이 자자하게 알려진 자장면 식당이 1970년대 초반부터 전설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낙동강 강바람이 하계천 둑방을 넘어 포도밭을 지나서 이 사이 길로 불어올 때면 엄청나게 고소한 자장면 냄새가 진동을 한 채로 온 광장을 뒤엎어서 등하굣길 아이들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하도 군침이 돌아서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운 날은 흙벽돌과 시멘트를 섞어서 지은 식당 안을 밖에서 기웃거리며 들여다 볼 때도 있었는데 온 몸에 현기증이 나고 닭살이 돋을 정도로 입맛이 돌곤 했다.
열려 있는 식당 문 안으로 가만히 들여다 보니 멋쟁이 아저씨가 하얀 주방 가운을 입고 위생 모자를 쓴 채 반죽한 밀가루를 양손으로 곤봉 돌리듯이 허공에 사방팔방으로 빙글빙글 요술을 부리며 이리저리 마구 휘저은 다음에 죽으라고 안반 위에 시다이 내리치면 밀가루 반죽 덩어리가 날 살려 달라고 고함치면서 "탁" 소리를 내고는 맥없이 비틀거리며 안반 위에 고꾸라졌다. 소리가 크게 날수록 아저씨는 더욱 신나는 듯 보였다. 자장면 아저씨는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그냥 한 번만 휘돌려서 메치는게 아니었다. 아예 철천지 웬수처럼 매간지를 비틀고 뒤흔들어서 반을 잡아놓았다. 그리고는 또 사정없이 두 번 세 번 포개어 꺾어서 접은 다음 또 다시 공중에 붕붕 띄웠다가는 아래로 급격히 강중배기를 치고 또 매조지고 여러번 패대기 쳐 댔다. 맛있는 밀가루를 왜 저렇게 온 얼굴에 다 뒤집어 쓴 채로 저리도 몹시 할까 하고 밀가루가 불쌍하고 안쓰럽다는 마음이 생길 때 쯤이면 그적새야 아저씨는 언제 그랬느냥 처럼 안반 위에 모시적삼을 펴놓고 다리미질을 하듯이 납작해진 밀가루 반죽을 고이고이 길게 펼쳐 가면서 살살 매만지며 편평하게 펴 놓고는 이번에는 또 대칼로 억수로 빨리 갈기갈기 난장 도리깨질 하듯이 촘촘히 썰어나간다. 이렇게 써레질을 마친 후에는 그제서야 모든게 다 끝났다는 듯이 새마을 담배 한 대를 식당 안에서 꼬나물고는 "푸"하고 담배 연기를 몰아서 내쉬면서 온몸에 묻은 밀가루를 사시나무 떨듯 떨어내었다. 지금 생각하니 영락없는 수타식 자장면 생산 제조 전 과정을 현장에서 생생히 목격한 셈이었다.
우리는 이다지도 어렵게 만들어진 자장면을 일 년에 한두 번씩 운동회 날이거나 혹은 누나와 형들이 졸업식을 할 때에만 먹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어찌나 그 맛이 좋던지 먹을 때마다 서너 젓까치에 게눈 감추듯이 게걸스럽게 훌딱 먹어 치웠다. 더러는 자장면이 먹고 싶어서 아예 졸업을 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어린 생각에 매주 운동회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장면 식당 안의 벽지는 대부분 신문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문 위에는 잘 생긴 사람들이 포스터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기억이 아주 흐리기는 하지만 한 두 사람의 이름은 확실히 떠오른다. 박정희 김대중 박기출 진복기 기호 몇 번 뭐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참 잘 생긴 아저씨들이 미남대회 선전을 참 요상하게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때 그 시절 전설의 자장면발을 예술 조각품처럼 섬세히 빚어내어 도산골 사람들에게 추억의 자장면 맛을 선사했던 수타식 자장면 제조 기술자였던 그 어르신께서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그리운 옛사람들이다.
"아까징끼는 만병통치약~ 배가 아파도ㆍ머리가 아파도ㆍ손이 삐여도 아까징끼 하나면 끝~"
자장면 집 앞 넓다란 광장을 끼고 번화가 왼쪽 도로로 바로 접어들면 다시말해 도산지서에서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 바라보면 도산골에서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건물이 다소곳이 길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 건물은 출입문이 미닫이로 되어 있어서 다소 모던하게 보여졌다. 이름하여 도산면민들의 건강을 관리하는 만능 약국이자, 도산골 사람들이 병원처럼 드나드는 "자생당 약방" 이었다.
어른들은 배가 아파도 아까징끼요 상처가 생겨도 아까징끼를 사오라고 했다. 아까징끼와 고약 그리고 안티프라민은 그 당시 만병통치약이었다. 도산골 어느 집이든 간에 아까징끼와 고약은 거의 다 구비하고 있었다. 나는 배구선수라서 안티프라민을 학교에서 하나 받아서 나일론 쓰봉에 달려 있는 보게토에 넣고 다녔다. 배가 아파도 머리가 아파도 손이 트거나 삐어도 안티프라민 하나면 끝이었다. 먹지 못할 뿐이지 모든 것을 다 치료할 수 있는 약이 고약과 아까징끼와 안티프라민이었다. 제일 늦게 나온 동아제약 자양강장제 박카스는 먹는 만병통치약이었다. 배가 아파도 머리가 아파도 손이 삐여도 몸이 피곤해도 박카스 한 병이면 땡이었다. 우리는 그런 약방이 도산골에 있어서 언제나 든든했다. 무엇보다 우리 동창 내영 공주가 자생당 약방집 따님이어서 좋았다. 내영이는 우리를 보면 쌩긋 웃고는 얼른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내영이 아버님 권영진 선생님께서 항상 약을 주셨는데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하셨다. 한 번은 엄마가 동생이 아파서 어린이 만병통치약인 기응환을 사오라고 했는데 그 이름을 잊어 먹고 "기린이 주소~" 했더니 선생님께서 웃으시며 기린은 동물원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동생이 아프다고 했더니 기응환을 주셨다. 어린 마음에 기린 가루로 만든 것이 기응환이라고 생각했다. 약방 선생님은 모든 것을 보지 않고도 다 아시는 듯 해서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내영이가 후광효과로 더욱 이쁘게만 보였다. 몇 해 전에 내영이를 통해 아버님의 안부를 물었더니 1995년에 58세로 작고하셨다고 했다. "어떻게 그 젊은 연세에 세상을 뜨셨을까" 하는 진한 안타까움에 한동안 말을 잃었다. "토계 번화가의 소산"과 함께 그리운 옛사람들은 이렇게 하나하나 별이 되었다.
자식은 부모의 성정과 그림자를 닮기 마련이다. 내영이는 아버님의 이웃사랑 정신을 이어 받아서 예천에서 《예천군 지적장애인 자립지원센터》를 운영하며 지역사회를 위한 공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동생인 권두현 선생도 한국정신문화재단 관광연구센터장을 맡아 "안동 관광 콘텐츠의 글로벌화 메신저"로서 지역사회를 빛내고 있다.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토계 번화가 수몰 전 도산지서 맞은편 오른쪽 길목에 있던 자장면 식당 벽지 위에 붙어 있었던 70년대초 미남대회 선전 광고 사진들 전경이다(본 사진은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 옛날물건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70년대초 대통령선거 선전 벽보판을 필자가 촬영한 것이다).
♤사진출처와 설명(caption): 자장면 집 앞 넓다란 광장을 끼고 왼쪽 도로로 바로 접어들면 다시말해 도산지서에서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 바라보면 도산골에서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건물이 다소곳이 길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건물은 출입문이 미닫이로 되어 있어서 다소 모던하게 보여졌다. 이름하여 도산면민들의 건강을 관리하는 만능 약국이자, 도산골 사람들이 병원처럼 생각하는 자생당 약방이었다(사진은 토계 수몰 후 온혜 청계마을로 이전한 모습이다. 온혜 이전 당시 처음에는 농협 맞은편 골목 끝 도로가에 있다가 나중에 우체국 아래, 위에 보이는 사진 위치로 옮겼다. 지금은 안동으로 이사를 해서 빈 건물만 남아 있다. 수몰 전 옛날 토계에 있던 자생당 약방과 닮아서 그리움을 자아낸다. 위에 사진은 필자가 2019년 10월에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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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표 축구화보다 더 좋은 맨발의 청춘~"
번화가 속으로 계속 들어가 본다. 약방 맞은편 조금 아래에는 신발 가게가 있었다. 기억에는 약간 높은 마루에 신발을 진열해 놓고 팔았다. 검은 고무신, 흰 고무신, 분홍신, 장화, 범표 축구화, 꽃신, 털신, 슬리퍼, 비단개구리 천으로 만든 예비군 군화, 비닐 우산, 밀짚모자 등 다채로운 물건들이 줄지어져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눈에는 오직 범표 축구화 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저학년 때는 언제나 검은 고무신 아니면 흰 고무신만 신을 수 있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고무신이 범표 축구화보다 쓰임새가 좋을 때도 많았다. 도산국민학교 다닐 때 5~6월이 되면 아이들이 코스모스 모종을 학교 가는 십 리 길 신작로에 구역을 나눠 심어 나갔다. 학교 정문에서부터 의인 앤떼이 뱅기장까지는 집이 가까운 토계와 의인 아이들이 줄지어서 심었고 참남배로부터 도산서원까지는 섬마와 부내 아이들이 떼를 지어 모를 심듯 심어나갔다. 아카시아 파란 이파리가 무성히 솟아나오고 시원한 강바람이 신작로로 불어올 때면 고사리 손으로 옹기종기 아기 코스모스를 줄줄이 이어서 심어나갔다. 주전자도 귀하던 시절이라 길가 언덕 밑에 낙동강물을 퍼 나를 때는 고무신보다 더 편리한 물그릇이 없었다. 우리는 강물에서 고무신으로 물싸움도 하고 또 강물에 고무신을 빠트려서 떠내려가는 신발을 건지려다가 옷이 흠뻑 젖기도 했다. 얼굴 가득히 묻은 흙가루를 닦으며 고무신으로 떠온 물을 코스모스에 부어 주면 코스모스도 좋아서 웃었고 우리도 흙이 묻은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저 즐겁기만 했던 그 시간들이 영원히 멎어 있을 줄만 알았던 아무 걱정이 없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신발 가게에서 고무신을 살 때는 언제나 고민스러웠다. 흰 색깔을 살까 아니면 검정색을 살까 하는 갈등에 빠졌다. 검은 고무신은 마구 신을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폼이 안 났고 흰 신발은 모래로 자주 씻어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다. 고민을 할 때면 신발 가게 어르신은 항상 검은 색깔을 권했다. 여러모로 관리가 편하고 질기다는 배려에서였다. 그토록 희망하던 범표 축구화는 결국 3학년 때 드디어 수중에 들어왔다. 작은 누님이 과수원에서 일을 하고 나서 범표 축구화를 사 준 것이다. 그때 기분은 날아갈 듯이 좋았다. 그 당시 한국 축구는 아시아의 맹주였다. 메르데카컵과 박스컵(박대통령컵)에서 버어마(미얀마)와 결승전을 치르기 일쑤였고 일본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우리는 부내 밀양대 잔디밭에서 돌을 주워 낸 뒤 땅을 평평하게 고른 후 베어 온 미류나무로 축구 골대를 만들어 놓고 이회택 김재한 차범근 김진국 황재만 이세연 흉내를 내며 하루 종일 아랫마(을)와 윗마(을)끼리 축구 시합을 했다. 범표 축구화가 산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밑창이 빠지고 옆 천이 찢어졌다. 이리저리 다시 꿰매어 신어도 봤지만 거친 축구 게임에 끝내 배겨날 재간이 없었다. 급기야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의 청춘으르 축구를 했다. 밑창이 빠질 일도 없고 옆 천이 찢어질 일도 만무한 무한정 전천후 장점이 있는 맨발이었다.
"아이들의 선호도는 먹거리... 장난감... 학용품 순이었다"
번화가의 다채로운 상점들은 길 양쪽으로 계속 이어져서 내려가다가 백운이발관 앞에서 절정을 이루는 형상이었다. 백운이발관은 아시다시피 계열사인 점방까지도 거느린 어엿한 상가 그룹이다.
물론 백운이발관 아래에도 석유집과 교회당 우체국 정류소가 줄줄이 나오지만 상가의 집적성 측면에서 여기까지와는 다르게 집들이 뜨문뜨문 이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흥미진진한 물건들이 이 점방에서만 가득히 차고 넘쳐났다. 토계 상점 가운데 아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점방이자, 문방구이자, 책방 역할까지 했다. 아이들은 뭐니뭐니 해도 먹는 것에 제일 먼저 눈이 쏠리기 마련이다. 그 다음에는 장난감이요, 마지막이 학용품일 것이다. 먹는 것과 장난감은 절대로 참을 수 없지만 수업에 필요한 준비물인 학용품은 엉덩이 서너 대 내지 손바닥 몇 대만 맞으면 훌쩍 그 시간이 지나가기 마련이다. 어차피 엉덩이의 일부분은 수업 준비물의 부재를 때우기 위해 입학 때부터 이미 전세와 담보로 내놓은지 오래다. 엉덩이에게는 정말 미안한 노릇이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돈을 마련할 길이 없는데야 어찌하랴. 주어진 돈의 효용극대화를 위해서도 먹는 것과 장난감이 훨씬 더 큰 만족감을 준다. 까짓것 수업시간에 준비물은 안 해 가도 어이어이 해서 주춤주춤 하다 보면 그 시간은 그냥 지나가게 돼 있다. 물 풀이 없으면 꽁보리밥 밥풀로 칠하면 되고 가위가 없으면 집에서 쓰는 옷 가위를 가져가면 되고 마분지가 없으면 공책 껍데기로 대신 쓰면 되고 지우개가 없으면 귀신교실 마루 밑에서 귀신들이 모아둔 것을 주워 올려서 쓰면 되고 노트가 없으면 또 지워서 또 쓰면 되고 색종이가 없으면 약방 내영이에게 한두 장 얻어 쓰거나 빌려 쓴 후 삼사십 년 뒤에 갚는다고 하면 되고 콤파스가 없으면 두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서 돌리거나 혹은 나무 두 개를 적당한 크기로 꺾어 붙여서 연필을 끼워 돌리면 대충 그려지고 분도기가 없으면 그냥 엉덩이를 들이대고 몇 대 맞고 들어가면 바로 끝날 일이다.
하지만 백운 점방에서 사시사철 우리들만 주구장창 기다리고 있는 뽀빠이 라면땅과 자야 쫀드기 달고나 비가사탕 눈깔사탕 삼양라면 크라운산도 삼립단팥빵 밀크카라멜 새우깡 롯데풍선껌과 코카콜라 칠성사이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 환타와 오란씨는 어째 대체 할 수가 없다. 먹어야 해갈이 되고 마셔야 소망이 이루어지는 격이다. 야들을 사먹지 못하면 밤새도록 침샘이 몸살을 하고 또 안방 온 천장에서 야들이 이리저리 맴을 돌아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서 없는 집안 살림에 또 어이어이 해서 학용품 준비물 값을 타 내어도 정작 준비물 구입은 아예 뒷전이고 대부분은 먹는데 다 소진한다. 그 아까운 돈을 준비물 사는데 쓰기에는 손 안에 있는 돈이 너무나도 애처로워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허약한 몸부터 챙겨야 공부도 할 수 있다는 굳고도 깊은 신념이 아이들 머리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을 그 시대 부모님들과 존경하는 선생님들께서는 다소 간과하지 않으셨나 싶다.
백운이발관의 알짜 계열사인 점방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표준새전과" 얘기도 빠뜨릴 수 없다. 전과를 살 돈은 아예 없고 산수 숙제는 무서워서 해서 가야할 때면 그냥 점방에서 전과를 적당한 자리에 펴 놓고는 주구장창 죽치고 앉아서 답을 줄줄이 산수 책에 베껴 옮겨 적은 뒤에 다시 전과를 원래 자리에 눈치껏 갖다놓고 태연하게 점방을 나서는 방법이 최고의 달관법이다. 이튿날도 그렇게 펴 놓고 베끼고 또 그 이튿날도 그렇게 펴 놓고 죽죽 눈치껏 베껴서 하면 된다. 왕복 이십 리 등교길에 맨날 녹초가 되는 몸인데 밤새워서 머리 싸매고 산수 숙제를 풀 여유도 없고 또 풀 의욕도 안 나고 풀어도 그 놈의 문제가 잘 풀리지도 않는다. 문교부에서 디기 억수로 어렵게 만들어 놓아서 산수책을 보기만 해도 배까지 아파 온다. 가진 돈이 없다 보니 표준새전과를 사서 보는 아이들은 한 놈도 없고 모두 그런 식으로 점방에서 자기집 안방 마냥 어지럽게 펴 놓고 숙제를 하다 보니 보름만 지나도 점방의 표준새전과 책이 모두 표준헌전과 책이 되어 너절너절 해져 버린다. 그런데도 점방 아지매는 말 한마디도 안 하신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매일 넘어간다.
"가엾은 표준새전과여~ 누구를 원망하랴~ 부디 그저 시대를 잘못 만난 탓으로 여기소서~"
나는 그래도 숙제를 하기 위해서 백운 점방에 수시로 들렀지만 부내 용규 놈은 점방집 큰누나가 하도 이뻐서 누나 얼굴 볼려고 맨날 갔다. 그럼 그렇지 용규 놈은 숙제하고는 아예 담을 쌓은 녀석이다. 낙동강물이 사시사철 넘쳐나도 여름에 딱 한 번만 목욕을 하는 물을 참 아껴 쓰는 놈이다. 우리 부내 아이들은 그래도 여름 가을 연중 두 번은 깨끗하게 목욕을 꼭 하는 편이다. 오죽하면 낙동강물이 용규만 보면 지레 겁을 먹고 여울소리를 자지러지게 낸다.
원 세상에 별 미친 해괴한 놈이 다 있다. 공부도 안 하는 놈이 표준새전과를 뒤지는 척 하다가 우리가 산수 답을 열심히 베끼고 있는 동안에 지는 공책에 누나 얼굴만 베끼고 그리고 있었다나... 얼빠진 놈 같은니라고...(그 얘기를 세월이 45년이 흐른 몇 년 전 58회 동창회 때 고백하길래 후에 그 얘기를 누님께 전했더니 한참 웃으셨다. 가진게 아무 것도 없어도 우리 방식으로는 마냥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특히 그 시절 백운이발관 점방에서 마주한 또 하나의 천연기념물급 책이 어깨동무였다. 어깨동무는 벽촌에 사는 우리들에게 신세계를 알게 해 준 경이로운 잡지였다. 물론 이 점방에서 어깨동무를 만나기 전에도 학교에서 서울 어느 부자 학교가 분기별로 보내 준 어깨동무 과월호 기증책을 아이들이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빌려 본 기억은 있었지만 과월호가 아닌 새 책을 직접 상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특히 부내 낙구가 종종 구입을 해서 낙구와 친했던 나는 이때부터 일신상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며 신문물을 마구마구 접하는 일대 혁신을 맞게 되었다. 가끔씩은 어깨동무 뒤에 펜팔 주소가 나와 있는 서울 반포국민학교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도산우체국에 가서 부치기도 했다. 여기서 잠시 《※ 어깨동무》에 얽힌 필자의 수필을 소개한 후에 점방 이야기에 이어서 백운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백운이발관에 대한 얘기를 계속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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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이종구
유년시절 어깨동무는 동심의 세계에서 마음껏 나래를 펼치게 만들었던 꿈과 희망의 메시지였다. 마땅한 소년소녀지 하나 없던 그 시절에 전래 동요인 어깨동무를 굳이 어린이들의 잡지 이름으로 쓴 데에는 이 동요가 의미하는 노래가사를 보면 적이 이해하고도 남는다.
"어깨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 어깨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놀아라~"
이는 씨앗처럼 소중한 친구들이 추운 겨울을 잘 지내고 봄에 보리가 피어날 때 건강히 다시 만나자는 심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었다.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과 인접한 두메산골, 아름다운 분강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봄이면 온 동네에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만발하였다. 그야말로 벽촌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서울 어느 부자 국민학교가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어깨동무] 과월호 기증품을 천사들의 하사품인 마냥 애지중지 다루며 깊이 깊이 열독하곤 했다. 당시 어린이들에게 어깨동무의 위상과 인기란 우리 고장 하회마을 류 대감댁 솟을대문보다도 더 높고 표준전과보다도 더 소중한 비할 데가 아예 없는 최고의 잡지인지라 반장이 차례대로 순번을 정해놓고 이름을 적은 다음 대여 기한까지 엄격히 정해놓았던 몸값이 만만찮은 대단한 책이었다.
어깨동무 표지에는 <반포국민학교 기증> 이라는 오백원 동전 크기만한 파란색 둥근 큰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져 있었다. 나는 유년시절 어깨동무를 읽으며 또 다른 세상을 보았다. 만화는 단연 최고로 재미나는 대목이었고 동물원 사진과 과학상식, 동화, 동시들 등등 정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을 정도로 다채롭고도 흥미진진 했다. 이 외에도 지금은 단지 노란색과 빙상부만 생각나는 리라국민학교 아이들의 사진도 뇌리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대학에 진학하여 서울에 입성한 뒤로도 마치 누가 알아나 주듯이 내가 유년시절 벽지에서 자랐지만 어깨동무를 읽었으며 반포국민학교와 리라국민학교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뿌듯하게 자랑삼아 여기며 무엇인가 큰 일을 해낸 것 같은 여전한 동심에 지금도 빙그레 웃을 때가 많다. 그런 생각이 다소 이치에 맞지않더라도 무슨 상관이랴. 그냥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 추억의 편린으로 나부끼는 한 때의 동화 같은 마음들이 이 풍진 세상에 나를 선하게 만드는 힘이 되고 위안을 주는 듯해서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여느 때는 어깨동무를 읽느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때도 있었다. 반장이 대여 기한을 이틀로 못박아놓았으니 언제나 아쉬운 마음으로 책을 반납하곤 했다. 나는 어깨동무를 읽으면서 "반포국민학교는 도대체 얼마나 부자학교이길래 이런 잡지를 우리 학교에 보내줄까" 하면서 무한한 동경과 고마운 마음을 가졌었다.
세월이 유수처럼 굽이굽이 흘러흘러 어느날 아내의 국민학교 졸업장에서 눈을 번쩍 뜨게 하는 반포국민학교를 발견하고는 그냥 아무 말없이 그녀를 한참 동안 꼭 안아주며 왠지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난다. 영문도 모르는 아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대뜸 "거기 반포국민학교! 부자 학교예요?"
"아니, 우리 학교는 공립인데요"
"고마웠어요"
"???..."
공립이든 사립이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립과 사립이라는 말의 의미도 모르던 시절이었는데...
그리고 얼마 지난 후에 반포초등학교를 찾아가서 정문에서 무작정 학교를 향해 "고마웠다"는 인사를 뒤늦게나마 '꾸벅' 했다. 그리고 아내 손을 꼭잡고 함께 운동장을 거닐며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사진출처: 반포초등학교는 "doopedia"/어깨동무는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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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이쁘다~ 잘 깎겼데이~"
"달아노소~ 아부지가 장날에 준다니더. 가니데이~"
백운이발관은 은주 누님(56회) 아버님인 백낙원 원장님이 운영하셨다. 난청으로 귀가 안 좋으셔서 늘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원장님은 성정이 하도 순하셔서 우리 얘길 다 들어주었다. 일단 이발관에 들어서면 "어서 온나~ 반갑데이~ 앉아라~"고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이발관 안에는 큰 거울 앞에 이발용 대형 의자가 3개 놓여 있었다. 입구 쪽에는 대기용 긴 나무의자가 있고 맞은편에는 머리를 감는 시멘트로 만든 회백색 세면 다이가 있었다. 그 옆에는 시멘트로 만든 물을 보관하는 저장통도 있었다. 물 저장통과 세면 다이에는 네모난 반들반들한 작은 파란색 다이루(타일)들이 악세사리처럼 박혀 있었다. 중앙에는 사시사철 누런 큰 주전자를 올려놓은 연탄난로가 자리했다.
잠시 그 당시 아이들의 머리 스타일에 대해서 살펴 보자. 도산골 남자 아이들의 머리 스타일은 대부분 빡빡이었고 드물었지만 미또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 단발머리를 한 것으로 기억되지만 일부는 긴 머리를 양 옆으로 땋아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일손이 바쁜 탓에 쉽게 손질해줄 수 있는 스타일이 대부분이었다. 궁금한 것은 남자 아이들은 그래도 백운이발관에라도 갔지만 여자 아이들은 도산골에 미장원도 없었는데 어디에서 머리를 했을까. 그렇다고 댕기머리나 긴 머리 소녀들을 본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백운이발관에서 여자 아이들을 본 기억은 더욱이 없다. 생각건대 집에서 바리깡을 갖기는 어려우니까 남자 아이들은 이발관에 보내서 매우 경제적인 빡빡이 머리를 했고 여자 아이들은 가위가 집에 있으니까 엄마나 언니가 다듬어주지 않았나 싶다. 남자 아이들이 집에서 가위로 빡빡이 머리를 자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마찬가지로 여자 아이들이 이발관에서 바리깡으로 빡빡이 머리를 하는 경우도 없었다. 1970년대 중후반으로 넘어오면서 동네에 바리깡을 비치하는 집이 서너 집 나타나기는 한 것 같다. 나중에 동창회 때 목실골 재순이한테 한 번 물어봐야겠다. 그때 도대체 머리를 어디가서 잘랐느냐고? 백운이발관에서... 집에서 가위로... 아니면 이안(예안) 장에 가서... 거기도 아니면 토계 방앗간에서...😅😂🤣
이제 머리를 깎는 현장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 회백색 간판에 검은색 글씨로 두껍게 쓴 백운이발관으로 살방살방 들어간다. 하얀 가운을 입은 원장님은 우리가 이발용 큰 의자에 앉자마자 하얀 백프로 보자기를 목에 둘러주고는 그 다음 질문을 하신다.
"빡빡 깎을까~ 미또리할까~"
"빡빡 깎으소"
미또리는 머리가 조금 남아 있게 약간 멋이 들어가는 스타일이고 빡빡 머리는 말 그대로 빡빡 깎는 스타일이다. 일하기는 빡빡이 스타일이 훨씬 더 수월해보인다. 빡빡 머리는 거리낌없이 은색 바리깡으로 고속도로를 몇 번 쓱쓱 타다가 다시 되돌아오면 땡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솔을 컵 속에 담궈서 거품이 북적북적 일어나게 몇 번 휘적거린 후에 다시 머리 뒤에 북북 칠하고는 무서운 면도칼을 꺼내서 벽에 걸린 긴 가죽에 슥슥삭삭 서너번 문지른 다음 뒷목덜미 부분부터 가지런히 면도를 해주었다. 면도가 끝나면 시멘트 세면 다이에 다시 앉게 하고는 머리에 물을 몇 번 부은 후 향긋한 다이알 비누로 머리를 두리두리 칠한 후 신발 씻는 이빨이 듬성듬성 굵게 나 있는 납작한 플라스틱 작은 솔로 머리를 박박 몇 번 문지른 후에 다시 시원한 물을 몇 바가지 머리에 붓고는 마지막으로 세수를 하라고 하면 끝이 난다.
머리를 시원하게 다 깎은 후에 5년 동안 원장님이 나를 보며 하신 말씀과 내가 5년 동안 한 말은 언제나 똑 같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이 이쁘다. 잘 깎겼데이~" 라고 하신다. 그러면 나는 잘 깎인 줄 알고 나온다. 원장님께서 5년 동안 한 번이라도 "잘 안 깎겼데이~"라고 하신 적은 없었다. 그러면 나도 5년 동안 항상 같은 말을 하고 이발관을 나왔다.
"달아노소~ 아부지가 장날에 준다니더. 가니데이~"
이렇게 아름다운 언행과 말투와 신뢰와 신용을 보고 들은 적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 도산골 퇴계 선생의 손자인 동암 하계종택 수졸당에 면면히 흐르는 "부화를 버리고 본실을 도타이 하는 사람 간의 맑고 깊고 아름다운 정신"이 아니고 무엇이랴.
원장님은 도산골 대부분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주셨다. 기억나는 것은 하얀 가운과 회색 보청기와 목 밑으로 늘어뜨린 길다란 보청기 줄 그리고 선한 미소와 인자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가끔씩 머리를 깎는 도중에 도산국민학교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보시거나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 관한 얘기를 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 이발관 상거래는 대부분 아이들이 전부 외상으로 달아 놓았다가 장날에 부모님이 한 방에 정산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만큼 돈이 귀한 시대였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원장님은 누가 어느 집의 자녀인지 어느 동네에 사는지 다 알고 계셨다.
이태 전에 수몰 후 백운이발관의 행방이 하도 궁금해서 어이어이 하여 은주 누님을 찾아서 전화를 드렸더니 원장님께서는 토계에 물이 들 무렵에 대구로 이사를 가셨다가 2003년 향년 68세로 작고하셨다고 했다. 너무 이른 연세에 세상을 뜨셔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옛 추억이 되살아나 아련한 그리움이 솟아났다. 요즘도 가끔씩 누님과 안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알고 보면 수몰로 인해 이리저리 흩어진 모두가 그리운 고향 사람들이다.
♤성정이 선하시고 아이들을 좋아하셨던 백운이발관 백낙원 원장님이 그립다. 원장님 뒤로 이발관 건물이 보이고 왼쪽 건물 위에는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다가오는 백운이발관 상호가 보인다. 그리고 원장님의 정겨운 목소리와 함께 소년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아~이 이쁘다~ 잘 깎겼데이~"
"달아노소~ 아부지가 장날에 준다니더. 가니데이~"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번화가의 그리운 옛사람들 지금은 다 어디로 갔나~
♤사진출처: 백은주님(도산국민학교ㆍ56회)
♤사진출처: 백은주님(도산국민학교ㆍ56회)
♤1970년대 토계 번화가 1번지에 사셨던 그리운 우리 어머님들의 모습이다. 도시락을 싸서 도산서원 강변으로 나들이를 가셨나보다. 모두 청년의 모습이다. 어느덧 어르신들의 연세도 여든 중반을 훌쩍 넘으셨으리라. 오른쪽 첫 번째는 은주 누님 어머님이자 백운이발관 사모님이시고 왼쪽 두 번째는 약방 사모님이신 내영이 어머님이다. 중앙에 계신 분은 면장님 사모님이셨던가...
♤수몰 전 도산서원 삽지껄인 샅골 점방 시대 때부터 외국인 관광객과 소풍 온 사람들에게 환타와 오란씨 음료를 이따금씩 얻어 마신 기억이 있다. 오란씨는 병도 작고 디자인도 예뻤다. 토계 백운 점방에서도 드물긴 하지만 음료수를 사서 마실 기회가 있을 때는 콜라보다는 환타와 특히 오란씨를 사서 마신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오란씨와는 유년시절부터 정이 많이 들었다. 요즘도 아내와 종종 오란씨 씨엠송(CM song)을 부르곤 한다. 유년시절 함께 했던 음료수이자 추억이 가득 담긴 노래이기도 하다. 2017년이었던가 필자가 노래를 부르고 아내 앤이 반주를 하여 추억이 가득히 담겨 있는 그 시절의 오란씨 씨엠송을 한번 재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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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골 골골마다 호롱불ㆍ남포등 밝혀주던 석유집ㆍ기름방~"
도산골은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 지역인지라 전기도 없었다. 엘피지ㆍ엘엔지 가스는 더욱이 없던 시대였다. 도산골 사람들은 오직 석유에 의존해서 불을 밝혔다. 이따금씩 촛불을 켜는 집도 있었지만 실용적ㆍ경제적 측면에서 호롱불의 맞수가 되질 못했다. 도산면 골골마다 호롱불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도산석유" 즉, 토계 석유집(기름방)이 큰 역할을 했다. 석유집은 백운이발관 맞은편 조금 아래 도로가에 위치했다. 도산면사무소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도로가에 위 아래로 거의 붙어 있었는데 석유집이 밑에 자리했다. 등하굣길에 번화가를 오고 가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담벼락과 기름 창고 벽과 그리고 큰 도라무통에 커다란 붉은 페인트 글씨로 "불조심" "위험"이라고 써 놓은 관경을 무심하였지만 매일 매일 보았다. 석유가 들어 있는 기름 창고는 집 아래로 20여 미터 도로가를 따라 갈아놓은 마늘 밭 끄트머리에 있었다. 마늘 밭이 가정집과 기름 창고 사이에 자리해서 안전지대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만 해도 호롱불에 석유가 들어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기름방에서 석유를 물처럼 팔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널린 것이 주유소이지만 그 당시 석유집이 토계에 있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요즘 말로는 주유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주유소는 차에 기름을 넣는 곳이다. 그러나 도산골에 차를 갖고 있는 집은 하나도 없었다. 대신 안방과 사랑방에 불을 밝히는 호롱불이나 호야등 가운데 하나 정도는 모두가 필수품으로 소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스갯소리지만 토계 석유집은 호롱이나 호야등에 기름을 넣는 곳이니 호유소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학교에 갈 때 신작로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만 돌려도 이 집이 석유집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기름과 관련된 붉은색 글씨와 빨간불이 그려진 위험 내지 경고 표시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석유 냄새도 진동을 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이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왠지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따금씩 할머니께서 이홉들이(요즘 일반 소주병 크기인 360ml) 혹은 사홉들이(720ml) 금복주 빈 소주병을 주시고는 석유를 받아 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적도 있었다. 대병(요즘 생수 큰 페트병 크기인 1.8리터)은 무겁고 커서 형들에게만 시켰다. 그 당시만 해도 석유 곤로를 사용하는 집은 동네에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연탄을 때는 집도 매우 드물었다. 모두가 공유하는 문명의 등불은 호롱불이었다. 이렇게 볼 때 도산골 문명의 에너지는 사실상 석유 뿐이었다. 대부분 호롱불을 밝혔지만 집에 따라서는 초롱불이나 남포등을 밝히기도 했다. 호롱불과 초롱불은 구별되는 만큼 특징도 다르다. 호롱불은 초롱불에 비해 밝기가 약하고 덜 발달된 원시적인 형태이다. 등잔 위에서 불을 밝히는 만큼 바람막이도 없다. 방안이든 바깥이든 바람막이 없이 등잔 위에 호롱을 놓고 불을 밝힌다.
초롱불은 어떠한가. 초롱은 여러가지 뜻이 있다. 먼저 초롱이란 석유를 담는데 쓰는 양철로 만든 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초롱불은 양철과는 상관없이 촛불이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바람막이 천을 씌운 등을 말한다. 주로 촛불로 등을 밝힌다고 해서 초롱불이라고 불렀다. 옛날 시골에서는 호롱불이 바람에 쉬이 꺼지니까 네모로 된 유리막이에 넣고 위에 철사를 달아서 들고 다니기도 했다. 이런 형태의 호롱불은 초만 없다 뿐이지 초롱불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럼 남포등은 무엇인가. 사전에는 "석유를 넣은 그릇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유리로 만든 등피를 끼운 등" 이라고 했다. 더 이상 말을 안해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렇게 보았을 때 초롱불은 양초로 불을 밝히고 호롱불과 남포등은 석유로 불을 밝힌다. 또 초롱불과 남포등은 천이든 유리든 바람을 막아주는 외피 막을 씌운다는 것과 함께 걸어두거나 들고 다닐 수 있는 손잡이가 달려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호야등도 사전에는 남포등과 의미가 같다. 실제로 강원도에서는 남포의 방언으로 호야남포라고도 한다. 유년시절 도산골에서도 호야라는 말을 많이 썼고 또 듣기도 했었다.
토계 기름방은 도산골에 다목적용으로 석유를 공급했을 것이다. 호롱불 호야 남포등 곤로 원동기 오토바이 정미소 상황에 따라서는 자동차에 이르기 까지 수요자의 다양한 용도에 맞게 석유를 제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단지 호롱불을 밝히는데 필요한 석유를 파는 집으로만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석유집이라고도 불렀다. 석유집 자제분들이던 호걸-원걸-창희 형님들의 얼굴은 지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름만은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분강 강변 솔밭에 남포등 줄줄이 걸고 4H클럽 형님, 누나들에게 노래, 무용 배우던 그 시절 그리워"
유년시절 석유집과 관련된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부내(분천동) 강변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분강서원(농암종택)과 도산서원이 아래 위로 연결되어 있는 이 지역 일대는 알다시피 찬란한 문화유산과 수려한 주변 산천의 풍광으로 인해 그 당시에도 국내외 관광객들과 소풍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곳이었다. 풍광이 얼마나 찬연하길래 진경산수화의 개척자인 겸재 정선 선생이 이곳에 납시어서 당대 걸작품인 "계상정거도(1746)"를 그렸을까. 지금도 천원권 지폐 뒷면 그림만 보면 도원 마을 같은 고향 산천이 절절하게 떠올라서 향수에 취할 때가 적지 않다.
계상정거도는 도산서원을 정점으로 부내 밀양대 산천까지 일대 전경을 정밀하게 그린 아름다운 진경산수화이다. 깡촌놈인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코카콜라를 볼 수 있고 또 마실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세계 문화 유산인 도산서원의 은덕이었다. 외국인들이 도산서원에 관광을 와서 샅골 입구 점방에서 음료수를 사 먹을 때면 때꼬장이인 우리들이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쳐다보면 먹고 있던 콜라와 초콜릿 그리고 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안한 행동이었지만 그 시절은 그랬다. 그것을 도산서원의 은덕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지만 배고픈 시절에 어쨌든 허기를 채워 주었으니 아이들 입장에서는 적선과 은덕이 아니고 무엇이랴. 당시 도산서원 아래 샅골 입구(동취병산 기슭 입구인 살골 혹은 전곡, 석간대 입구, 하마비가 서 있던 곳, 삼바꼬 윗쪽, 지금의 도산서원 주차장 아래 선착장 주변)에는 관광 소품과 과자, 음료수를 파는 작은 점방이 두 개가 있었다. 매우 드문 일이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콜라와 오란씨, 과자를 직접 사 준 외국인도 더러 있었다. 지구촌 어른들의 마음은 매양 다 같은가 보다. 허기진 불쌍한 아이들을 보면 자식이 생각나서 사랑을 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도산서원 삽지껄에 있던 샅골 입구에서 점방을 하던 어른은 그 당시 섬마에 살았던 용운(53회 졸업)이 형님의 어머님이었다.
그런데 그 어르신께서 수몰 된 이후에도 지금의 주차장으로 가게를 옮겨와서 20여 년 전만해도 옛날처럼 관광 공예품과 점방을 계속해서 운영하고 계셨다. 주차장에서 그 어르신과 30여 년 만에 재회가 이루어진 내력은 이렇다. 선영이 주차장 뒷산 석간대에 있어서 서원에 갈 때마다 왠지 옛날이 그리워 누구 아는 사람이 없나 싶어서 주차장 옆에 있는 이 가게 저 가게를 두리번거리다가 소품 파는 어르신께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았다.
"혹시 옛날 샅골에서 장사하시던 그 아지매 아잉껴?"
"근데 거기는 누구 시잉껴?" 그래서 '옳구나' 싶어서 내가 살았던 부내 동네 번지수(분천동 가족관계)를 밝혔더니 바로 하신다는 소리가
"야이야~ 내가 그 옛날에 용운이 어메따~ 아이고 야이야~ 그러먼 니가 부내 인구 맹순이 동생이라~?"
바로 이름이 줄줄이 나오면서 손을 맞잡고 감격해 하신다.
"야이야~ 니가 어예 여기 왔노? 너 어메는 워데 있노~ 잘 있나~"
이때부터는 더 이상 번지수고 뭐고 말이 필요 없다. 그냥 '아지매요~' '어메요~'로 모든 것이 다 통한다. 아~ 반갑고 그리운 옛 사람들... 하지만 옛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고향 산천과 우리들을 남겨 두고 무슨 일들이 그리도 바뻐서 다들 모도 어디로 가셨는가~😢😭😭
도산골 옛 사람들은 누가 누구네 집 자손인지 거반 다 번지수를 알고 계신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 년 동안 한 곳에서 터전을 지키며 살다 보니 자연히 그렇거니와 또 줄줄이 낳은 자식들이 누구 누구네 자식들과 동년배이다 보니 이리 저리 얽히고 설키고 엮여서 결국은 다 알고 지낸다. 알고 보면 이렇듯 도산골 전체가 다 한 동네였다(※도산서원과 관계 되는 필자의 수필은 "금송과의 인연"을 참고하면 된다).
도산골에 관한 무슨 말만 나오면 주저리 주저리 할 얘기가 하도 많아서 이번에도 토계 번화가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빠졌다. 다시 기름방 얘기로 퍼뜩 돌아가보자. 부내 동네는 옛날 선조들이 강바람을 막기 위해 둔치와 동네 밭 사이에 소나무를 줄지어 심어 놓아서 솔밭이 길게 형성되어 있었다. 이런 모양을 동네 선대 어른들은 "쑤(藪ㆍ수풀 수ㆍ혹은 "수안"이라고도 함)"라고 불렀다. 다시말해 소나무 수풀(숲)이라는 말이다. 또는 수안이라고도 했다. 수안은 소나무 숲이 동네를 안고 있다는 의미이다. 솔밭은 양수장 아래 강변에서부터 실거랑 너머 구당나무 옆에 있는 천방 앞까지 담장처럼 길게 이어져 있어서 퍽 운치가 좋았다. 솔밭이 마실로 불어오는 강바람을 막는 방풍 역할을 한 것이다. 분강(낙동강)에 휘영청하게 달이 뜨면 달빛이 강물에 비쳐 파문을 일으키며 일렁거리는 모습이 가히 강호시가를 읊어도 좋을 법한 몽환적이고도 목가적인 전경을 만들었다. 이 솔밭에서 동네 4H클럽 형님들과 누나들이 국민 학생인 우리들을 환한 달밤 아래 모아 놓고 노래와 무용을 가르쳐 주었다.
솔밭에 있는 소나무에는 여러 집에서 가져온 남포등이 마치 연등처럼 걸려 있어서 어린 우리들이 보기에도 정말 운치가 있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때 그 남포등에 넣을 석유를 토계 석유집에서 사홉들이 진로 소주병에 어렵사리 사온 기억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석유를 사서 십 리 길을 가지고 올 때는 무척 힘이 들었는데 반공일(토요일) 저녁에 남포등을 소나무에 줄줄이 걸어 놓고 노래를 부를 때는 정말 뿌듯하고 좋았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머리 어깨 발 무릎 발
머리 어깨 무릎 귀 코 입
커다란 꿀밤 나무 밑에서
아빠하고 나하고
정다웁게 얘기합시다.
커다란 꿀밤 나무 밑에서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저 멀리 달 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여름 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질 않네
랄랄랄 라랄라라 랄랄라 라랄라라~
이 노래는 그때 4H클럽 동네 형님들과 누나들이 가르쳐 준 노래다. 노래와 무용이 함께 어우러지는 시원한 낙동강 둔치에서 달빛을 맞으면서 놀다 보면 소나무에서는 참새와 물새들이 지켜보고 있고 하늘에서는 달님과 별님이 내려다 보고 있고 둔덕 아래 분강 물섶에는 통소 구여울 분천바위 감퇴바위 농암바위 애일당 물레방간까지 다 몰려와서 우리들의 귀엽고 앙증맞은 예쁜 율동을 구경하며 함께 즐거워 했다. 유년시절 아름다운 양수장 푸른 강변 솔밭에 곱게 꾸몄던 잊을 수 없는 동심의 무대들이 지금까지도 꿈결 속에서 그립게 어른거린다. 고마운 기름방, 아련한 석유집에 얽힌 추억들이여~
♤사진 종합 설명(caption): 부내(분강촌, 분천동) 동네 앞 분강(낙동강) 위로 휘영청하게 보름달이 떠오르면 달빛이 강물에 비쳐 파문을 일으키며 일렁거리는 모습이 가히 몽환적이었다. 여름 밤 강변 솔밭에서 동네 4H클럽 형님들과 누나들이 국민 학생인 우리들을 환한 달밤 아래 천연 잔디밭에 앉혀 놓고 노래와 무용을 가르쳐 주었다. 솔밭에 있는 소나무에는 여러 집에서 가져온 남포등이 마치 연등처럼 주렁주렁 걸려 있어서 어린 우리들이 보기에도 정말 운치가 있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때 그 남포등에 넣을 석유를 토계 석유집에서 사홉들이 진로 소주병에 어렵사리 사 온 기억도 아스라이 떠오른다(<사진 1> 속에 남포등을 연등처럼 줄줄이 걸었던 솔밭이 보인다. 부내 종친 재술이 아재가 동생들과 양수장 아래 통소 옆 둔덕에서 1970년 8월에 찍은 추억이 가득히 담긴 사진이다. 아~ 그리운 통소여~ 구여울이여~).
토계 석유집에서 사홉들이 진로 소주병에 석유를 사서 십 리 길을 가지고 올 때는 무척 힘이 들었는데 토요일 저녁에 남포등을 소나무에 줄줄이 걸어 놓고 노래를 부를 때는 정말 뿌듯하고 좋았다. 그때 4H클럽 동네 형님들과 누나들이 가르쳐 준 노래가 생각난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커다란 꿀밤 나무 밑에서~. 노래와 무용이 함께 어우러지는 시원한 낙동강 둔치에서 달빛을 맞으면서 놀다 보면 소나무에서는 참새와 물새들이 지켜보고 있고 하늘에서는 달님과 별님이 내려다 보고 있고 둔덕 아래 분강 물섶에는 통소 구여울 분천바위 감퇴바위 농암바위 애일당 물레방간까지 다 몰려와서 우리들의 귀엽고 앙증맞은 예쁜 율동을 구경하며 함께 행복해 했다. <사진 2>의 위치는 부내 물레방간 바로 위 강변이다. 왼쪽 상단 빼곡한 소나무 숲 속에 애일당이 숨어 있고 오른쪽 산자락이 끝나는 지점에 도산서원이 있다. 앞에는 분강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흘러가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에게 범표 축구화를 사준 분자 누님이다. 왼쪽 세 번째 창금이 아지매가 보이고 그 뒷편 멀리 보이는 큰 바위가 부내 동네를 대표하는 명물 가운데 하나인 농암바위(귀먹바위ㆍ이색암)이다. 부내 즉, 분강촌은 농암마을(농암종택ㆍ분강서원)이라고 불러도 무난하다. 670여 년 전인 1350년경에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입향시조도 농암의 고조부인 소윤공 이헌 선생이었다. 온 산천이 농암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농암이 존재함으로써 향촌 산야에 얼과 문화가 생성되었으며 분강촌이 역사 속으로 찬란하게 들어왔다. 부내는 영천이씨 집성촌이다. 사진기는 재술이 아재네 집이 가지고 있던 일제 코니카 카메라이고 촬영은 유서 할배가 했다. 모두 부내 한 동네에 사는 종친들이고 또래 친구들이다. 1974년 12월 물레방간 위에 있는 강변 잔디밭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에서부터 재술이 아재, 유행이 할매네 친척인 부산 사는 희자 할매, 창금이 아지매, 유화 할매, 유행이 할매, 필자 누님인 분자 처자, 윤화 아지매가 멋진 폼(form)으로 통소와 구여울 쪽을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낙강 강가에는 승철이 할배가 반도로 고기를 잡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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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예배당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질 때 '기쁘다 구주 오셨네~' "
번화가 1번지 시작 지점인 도산지서에서 버스 정류소 방향으로 내려가면 백운이발관 맞은편 아래로 면사무소와 석유집이 이어져 있다. 석유집 밑에 있는 기름 창고를 지나 계속해서 변두리로 100여 미터를 내려가면 길 건너 오른편에 회백색 목조식 예쁜 예배당이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었다. 예배당의 마당 가장자리 담장 쪽에는 높은 첨탑 위에 십자가가 우뚝 솟아 있었고 첨탑 아래 양철 지붕 속에는 큰 청동종이 줄을 길게 늘어뜨린 채 매달려 있었다. 청동종은 매일 아침 도산골 사람들을 깨우고 '일상을 선하게 시작하라'는 듯이 오랫 동안 은은하게 여운을 남기는 종소리를 울려 주었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예수 할머니의 손을 잡고 부내(분천동) 동네에서 토계에 있는 예배당에 나갔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교회를 다니셔서 예수 할머니라고 불렀다(조모님의 택호는 구레실댁). 교회당은 도산우체국 약간 위에 길 건너 맞은편에 있었다. 부내 우리집과는 학교 거리와 거의 같은 십 리 길이었다. 주일마다 교인들은 넓고 큼직한 예배당 마루에 빼곡히 앉아서 엄숙하게 예배를 보았다. 연로하신 목사님께서는 예배 시간에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여러번 말씀하시며 울다시피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목사님께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은 죄가 참 많으신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나도 덜컹 겁이 났다. 지난 봄 뒷동산에서 참꽃을 닥치는 대로 꺾어서 두견주를 담근 죄, 통소 여불대기에 고인 저수지에서 버들뭉치와 붕어를 마구 잡은 죄, 물레방간 강섶 왕버들 엉클어진 뿌리 사이에서 피래미와 흑조개 가족들을 못살게 굴은 죄, 한여름 양수장 아래 물섶에서 사발무지로 수루매기 어미들을 잡아서 새끼들과 생이별 시킨 죄, 학용품을 산다면 할머니를 졸라서 받은 돈으로 산도와 오란씨를 사먹은 죄, 뒷 담벼락 살구나무에 탐스럽게 익은 살구를 먹으러 온 다람쥐에게 돌을 던져 괴롭힌 죄, 기와집 처마에 제비가 애써 지은 집을 장대로 후빈 죄, 달걀을 낳던 암닭을 밀어내고 달걀을 빼앗은 죄, 학교에 가기 싫어 삼바꼬 아래 토째비골에서 중간학교 한 죄, 알분이 아지매 우표 수집책에서 우표를 훔진 죄, 선돌할배네 수박밭에서 수박 서리를 한 죄, 정옥이 아지매네 복숭아 밭에서 복숭아를 따먹은 죄, 구당나무 아래 영주할매네 땅콩밭에서 땅콩을 마구 캐 먹은 죄... "으앙~" 나 또한 만만찮은 온갖 죄들이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나서 예배 시간 동안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아서 온 몸에 식은 땀이 줄줄 났다. "아~ 이제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천당에는 다 갔구나" 하며 절로 탄식이 흘러 나왔다. 불안한 마음이 여기까지 미치자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용서를 빌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목사님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죄를 지으신 것 같았다. 주일날 설교 때마다 기도를 할 때마다 큰소리로 죄를 용서해 달라며 예배를 끝마칠 때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연신 부르시며 사정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도 무척 안돼 보였다. "연세가 많으시니 나보다 지은 죄가 훨씬 더 많으시겠지" 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며 스스로 위안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할머니한테 목사님께서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으셨냐고 물어 보았더니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또 다른 세상에서 이미 우리가 지은 죄가 많이 있다'고 하며 '그 용서를 대신하여 빈다'고 하셨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 봐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에 태어난 기억도 전혀 없는데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워서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죄를 짓지 않고 착하고 이쁘게 살아야겠다고 주님과 목사님과 할머니께 마음 속으로 약속하며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러다 보니 숙제도 잘 해 가고 삽지껄 담벼락 아래 만들어 놓은 채송화ㆍ봉숭아 꽃밭에 물도 잘 주고 감실이 안에 기르는 집토끼들에게 써구새(씀바귀)도 잘 뜯어다가 갖다 먹이고 다람쥐과 제비들에게 행악을 부리는 일도 없어지고 뒷산에 참꽃도 안 꺾고 분강에 고기들을 괴롭히는 일도 점점 줄어 들었다. 어느덧 일기장에는 항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말로 끝을 맺는 문구가 많아졌다. 그러면 2학년 담임인 안계화 선생님과 3학년 담임인 장낙진 선생님께서 그대로 다 믿어주시며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다섯게 포개어 그려주시고는 그 위에 "참 잘 했어요" 라는 예쁜 칭찬 글씨를 써 주셨다. 그렇게 사인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참 좋아졌다.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유년시절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물레방간 둔덕과 양수장 앞 파란 잔디 언덕 그리고 솔밭과 통소, 구여울 주변에서 보냈다. 밀양대는 축구와 권투, 이까놀이(오징어놀이), 감자꾸지를 할 때만 찾았다.
어느 때는 양수장 아래 푸른 언덕에 앉아서 손을 턱에 고이고는 흘러가는 낙강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곤 했다.
"나는 나중에 무엇이 될까. 달리기 선수가 될까. 선생님이 될까. 구여울을 지나 흘러가는 저 강물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저 강물이 굽이굽이 돌아서 다다르는 먼 산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엄마 아부지는 왜 우리만 부내에 남겨두고 목실골로 가셨을까"
순결한 마음과 동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시를 써 갔을 아름다운 소년의 지난날의 모습들이 적이 떠오른다.
눈이 펑펑 내렸다. 예주님의 생일인 성탄절 날이었다. 예배당 사람들이 모두 들떠 있었다.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했다. 나는 색종이로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루돌프 사슴을 그리고 교회당 누나들은 예수님을 그려서 작은 소나무에 붙이는 일을 맡았다. 간단한 일이었다. 교회에서 나눠준 다양한 색종이에 별과 사슴을 먼저 그리고 나서 크레용으로 색깔을 칠한 후 오려서 노끈으로 소나무에 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 별들과 사슴이 하늘하늘 흔들리며 반짝이는 예쁜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었다. 하늘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교회 마당에서는 마실에서 놀러 온 백구들과 참새들이 함께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예배당 안에서는 고요히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이 온 도산골과 하계 마을로 가득히 내려오는 은혜롭고도 축복받는 성탄절이 되었다.
"예수 할머니~ 목사님은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으셨어요?"
예수 할머니는 밤마다 호롱불 아래서 돋보기를 쓰시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번갈아 읽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찬송가를 부르시고 주무셨다. 나는 예수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곤 했다. 거의 매일 이런 날이 반복 되곤 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이 찬송가는 예수 할머니께서 제일 즐겨 부르시는 노래였다. 그래서 나도 1학년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 찬송가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노래였다.
3학년 어느 겨울 주일날 예수 할머니는 예배당 종이 울리는 시각에 맞춰 주님께로 가셨다. 편안하신 얼굴로 임종을 맞이하셨다. 얼마 전에는 잠자리에서 "저 하늘에 가면 모두 다시 만나게 되니 내가 없어도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해 놓고서는 할머니 품 속에서 한참 울었다. "할매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럴 때는 기도를 많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 교회 사람들이 모두 와서 분홍색과 붉은색을 입힌 꽃봉오리를 만들었다. 꽃상여가 되었다. 목사님께서 우리집 담장 바깥 우릉골 할매네 청보리밭에 펴 놓은 큰 멍석 위에 놓인 상여 앞에서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과 도산골 교인들을 바라보며 영결예배를 올리신 후에 찬송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불렀다.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여러 번 부를 때 아버지가 소리없이 흐느끼시며 많이 우셨다.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이 슬퍼 보여서 나도 따라 울었다.
그리고 꽃상여는 집을 떠나서 마릉당골로 갔고 할머니께서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얼마 후 엄마가 할머니께서 꿈 속에 나타나서 하늘나라로 간다고 하시며 손을 흔드시는 것을 보았다고 가족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주님 나라로 가셨다.
예수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신 후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부내에서 혼자 다닐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주님께로 가신 후 등하굣길에 교회 앞을 지나갈 때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서 우체국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교회당 앞을 후다닥 뛰어 지나가곤 했다. 교회 쪽으로 자꾸만 돌아보고 싶었지만 꾹 잘 참았다.
은은한 종소리... 여운이 길게 울려 퍼지는 고요한 그 종소리가 지금도 잠의 길목에서 서성거릴 때면 아련히 저 멀리 어딘가에서 고적하게 들려온다. 먼 옛날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던 그 어느 성탄절 날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예배당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정겹게 부르던 그날의 잔상들이 오늘처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왠지 쓸쓸하게 떠오른다. 휘날리는 하얀 눈발 속으로 잊혀진 교회당의 전경들이 까마득한 세월의 미로 숲을 헤치며 다시 기억 속으로 나오고 첨탑 위에 높이 매달린 십자가의 소슬한 풍경들도 그립게 다가온다.
♤위 사진: 성탄절 날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목사님과 아이들이 늙은 청동종의 밧줄을 함께 당기며 행복해 하고 있다. 참새들과 강아지들도 주님의 축복 속에서 성탄절을 찬양하며 기뻐하고 있다. 예배당 속에는 은혜로운 찬송가가 고요하게 흘러나왔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아들 경이가 아빠의 상상에 맞게 추억 속의 전경을 그림으로 그려 주었다. 1972년 성탄절 날 토계 예배당의 전경이다).
♤아래 사진: 사진 오른편 둘째줄 모자를 쓴 애기의 바로 왼편에 계신 분이 필자의 할머니(조모님 함자는 이기수)이다. 1950년대 말경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고모님이 살았던 반야월에 잠시 사신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반야월교회를 다니셨다. 할머니는 1960년대초 분천동으로 다시 오셨다. 도산국민학교에 다닐 때 할아버지를 따라서 반야월에 있는 고모님댁에 가면 주일날 고모님 가족과 함께 반야월교회에 간 적도 있었다. 지금 기억에도 반야월교회의 건물이 엄청 크고 마당도 넓었다. 50여 년 전인데도 그곳 큰 예배당에서 설교를 듣고 기도를 올리던 모습이 어렴풋하지만 전설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운 추억들... 그리운 사람들... 위에 할머니가 나온 사진은 토계 예배당이 아니고 반야월교회이다. 우리 집안에서는 할머니께서 작고하신 후 예수할머니라고 불렀다. 고모님들과 할머니만 기독교를 믿고 할아버지(조부님 함자는 이유석)를 포함한 우리 가족 모두는 불교를 신앙으로 삼고 있다. 유년시절 할머니와 함께 다닌 예배당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는 결혼 후 우리 팔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교회를 다니고 있다. 서래마을에 살았던 아내 집안은 부모님께서는 반포성당에 나가셨고 아내와 동생은 남서울교회에 다녔다. 아내는 모태 신앙자이다.
♤우리 가족이 다니는 서울 노원교회 시온성가대가 지난 2022년 성탄절 오후 예배 때 캐럴을 부르는 광경이다. 앞줄 왼쪽 첫번째가 아내인데 키가 커서 단을 낮추어 따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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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와이셔츠 군단인 면사무소는 토계 번화가를 만든 주인공~"
토계 번화가 1번지 건물 가운데서 가장 관계십(relationship)이 일어나지 않았던 곳이 면사무소이다. 면사무소의 성격상 면민들의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주로 어른들과 소통을 해서 그런지 아이들이 들릴 일은 거의 없었다. 면사무소는 백운이발관 건너편 아래 석유집과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윗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관계십을 형성할 수 있는 소재거리가 많았다면 접근성 측면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길이 닿을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그러한 일들이 거의 없어서 소통이 매우 빈약하게 이루어졌다. "가을 깊은날 도산국민학교 가을운동회" 때 본관 건물 앞 일자로 길게 쳐진 회백색 휘장 속에서 면장님과 우체국장님을 먼 발취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얼굴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실 그 때도 휘장 속에 계셔서 얼굴이 보이지도 않았다. 귀빈에 관심을 가질 나이도 되질 못했다. 마음은 콩밭인 운동회 생각으로만 가득 했다. 다행히 사회를 보신 선생님께서 귀빈 소개를 하신다며 우리 부내 동네에 사는 조태현 육성회장님부터 제일 먼저 인사를 시키셨기에 한 동네에 사는 아재인지라 반가와서 큰 박수로 맞이했었다. 이어 인사를 하신 순서는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여하튼 면장님 지서장님 우체국장님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자 선생님께서 귀빈들의 존함을 부르면 휘장 속에서 일어나셔서 인사를 하시고 우리들은 박수로 화답하는 식이었다. 우리는 운동장 가운데 서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이런 분도 오셨네 혹은 저런 분도 계셨구나" 하고 생각했다. 도산국민학교를 다니면서 면장님을 보았던 기억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가을운동회 때 부내 대규모 천방공사 때 그리고 도산서원 행사 때가 아니었나 싶다.
면사무소 그리고 면장님과 관계십이 있을 일이 없다 보니 토계 번화가 1번지와 연관된 사람과 건물 가운데 인상적인 기억이 남아 있지 않는 곳이 면사무소인 것 같다. 무엇이든 관계십이 있어야 연결이 되고 일이 일어난다. 번화가의 다양한 필요충분 조건 중에서 면사무소와 내가 연결되는 부분은 극히 적었다. 번화가의 필요충분 조건 가운데 주체와 객체 간 소통과 관계십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면사무소를 토계 번화가의 변방으로 치부하면 큰 오산이다. 왜냐면 면사무소는 면에 관한 모든 행정을 도맡고 있는 만큼 토계 번화가를 존재하게 만드는 주인공이다. 나는 5년 동안 등하굣길에 면사무소 앞을 지나 다녔다. 유년시절 먼 발치에서 바라본 면장님의 분위기와 직접 가서 본 면사무소의 분위기가 어쩐지 닮은꼴이었다. 정장 양복을 단정히 입으신 그 모습과 주관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왠지 모를 근접하기가 서먹했던 면사무소의 모습, 자주 대면할 수 없는 면장님처럼 우리도 면사무소에 갈 일이 거의 없다는 점 등이 내가 친근하게 넘나드는 점방들과 학교와 이발관과 지서와 예배당과 비교했을 때 분위기가 사못 다르게 느껴졌다.
한 번은 2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면사무소를 간 적이 있었는데 사무실과 일반인 사이에 시멘트인지 가구인지 큰 칸막이가 있었던 것 같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일을 하는데 공간이 넓고 또 천장도 높아 보였다. 벽에는 괭장히 큰 괘종시계가 달려 있었다. 시간에 맞춰 종을 울려 댔으며 시계 추가 마치 박자를 맞추듯이 똑딱똑딱 소리를 내며 그네를 잘도 탔다. 어떤 아저씨가 펜으로 잉크를 찍어서 쓴 글씨로 만든 서류를 주었는데 그 글씨체가 가히 한석봉 선생처럼 훌륭해 보였다. 모든 행정을 이렇게 직접 쓰고 적는 방식인 것 같았다. 사람들도 전혀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도산골 사람들이 맞는가 싶었다. 모두 옷이 말끔 했고 신발도 고무신이 아닌 구두를 신고 있었다. 머리에는 기름을 바른 사람도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서 펜으로 글씨를 정성들여 쓰고 있거나 일부는 또 모나미 볼펜과 만년필로 대장에 무엇인가를 자꾸 쓰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저 모든 것이 생소하고 낯설어 보였던 기억만 남아 있다. 면사무소는 번화가를 만든 일등공신이었지만 소통과 관계십이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늘 사돈처럼 어렵고 서먹하게 느껴졌던 곳으로 기억이 된다.
정감이 넘쳐나는 희한한 관계십과 더불어 토계 번화가 1번지를 구성하는 핵심 건물들 가운데 하나인 지서 안에서 사람들 간에 번화가 조건들을 충족시켜 주는 말이 필요 없는 "필요충분 상황"들이 일어나는 현장 사례를 다시 한번 쉽게 기술해 보면 바로 요런 케이스이다.
도산지서에 들어갈 때 나는 이 산 저 산에서 마구 주워 모은 불온 삐라를 별거 아니라는 듯이 한 손으로 휙휙 돌리면서 의기양양하게 마치 맡겨 놓은 물건을 되찾으러 왔다는 듯이
"내 왔니데이~ 거 공책 좀 주소~ 공책이 다 떨어졌니더~"
"야야 니 또 왔나. 그래 알았데이~"
순경 아저씨들이 모두가 아는 척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내 가니데이~ 다음에 또 보시더~"
"잘 가그래이~ 근데 니 삐라 좀 덜 주래이~ 공책들이 니만 보면 억수로 무서워 한데이~"
사람은 관계십에 영향을 크게 받고 그 방향으로 진로를 몰아가기 마련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샤인의 경력 닻 이론이다. 도산골에 살면서 많은 유무형의 존재들과 끊임없는 관계십을 가졌지만 도산국민학교 만큼 유년시절 내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또 있었던가. 그때 내 진로의 절반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 체보 아저씨는 못 가는 곳이 없단다~"
석유집 아래, 다시말해 예배당 길 건너 조금 밑에 있었던 도산우체국에 대한 기억은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고 좋았다. 우체국은 토계 번화가였기는 했지만 번화가 1번지는 아니였다. 하지만 관계십과 소통이 빈번하다 보니 위치에 상관없이 번화가 1번지 이상으로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한마디로 체보 아저씨 하면 바로 생각나는 느낌 딱 그것이다. 체보는 우체부의 경북 방언이다. 어릴 때 우리는 체보라고 불렀다. 까치가 울면 소식이 오고 그러면 곧 나타나는 사람이 체보 아저씨다. 또 부모님들이 어린 아이들을 보고 머리를 끍어보라고(장배기 끍어 보거래이~) 시킨 후 아이들이 머리를 똑바로 앞으로 끍어내리면 그날 기다리는 사람이 온다고 하거나 혹은 체보 아저씨가 기쁜 소식을 날라주실 것이라고 했다.
체보 아저씨는 전천후요 근면 성실의 대빵으로 통한다. 비가 억수로 와서 목실 배오지 내살미 섬마의 나룻배가 떠내려 가도, 천둥 벼락 홍수 화산이 폭발해서 사달이 나도 체보 아저씨는 다 오실 수 있다. 전하는 소식도 천태만상이고 우편물을 배달하러 가는 곳도 물과 불과 산야를 가리지 않는다.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토계번화가든 학교든 종가집이든 싹실이든 장구목이든 토꾸바들이든 심지어 글쎄 도산골 제일 깡촌인 목실골 정상인 우리집 양짓마까지(양지마을ㆍ항곡: 도산국민학교 다닐 때 방학이 되면 필자는 분천동을 잠시 떠나서 부모님이 계시는 목실골에서 지냈다. 목실골에서 제일 높은 산꼭대기 이름이 양짓마이다. 음지가 아닌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마을은 아니고 우리집 하나만 달랑 있었다. 백마골 정상이다. 천지개벽 해서 요즘은 둘레길이 뚫리고 승용차가 올라간다. 이곳에 우리집과 농장이 있었다). 거기가 워데라고 글쎄 이곳 양짓마 까지... 한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기진맥진 하면서 올라온다. 어찌나 힘이 들었던지 아예 술을 한 잔 걸치고 올라올 때도 있었다. 맨몸으로 올라와도 힘든 두메산골 그 꼭대기까지... "휴~ 아 아 아지매요. 저 저 전보 왔니데이~ 차 차 찬물이나 한 사발 주소~" 체보 아재는 숨이 차서 말도 제대로 안나온다. 그러고는 찬물 한사발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또 왔던 길로 곧장 되돌아 간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속으로 "참~ 전보가 다 뭐여~ 순하신 우리 체보 아재 잡을라~"
체보 아저씨의 행장과 행낭은 간단하다. 낡고 비쩍 마른 삼천리 자전거 하나에 큰 우편가방만 둘러매면 모든 게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 검정 색깔의 제복에 제비가 그려진 누런 우편가방을 둘러매고 검은색 모자를 쓴 채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동네로 들어오는 체보 아재를 만나면 왠지 신기하고 좋아서 동네를 벗어날 때까지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복장과 모자가 순경과 흡사했다. 체보 아저씨는 우편물이 적은 날은 하굣길에 자전거 앞과 뒤에 우리를 태워 주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도 우체국 택배나 배송차를 보면 더욱 믿음이 가고 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체보 아저씨를 만나면 괜히 옛 생각이 나서 절로 정이 간다.
우체국에는 어깨동무 잡지 뒤에 적혀 있는 서울 펜팔 친구들에게 편지를 부치려고 종종 들렸다. 우표가 떨어지면 편지가 가다가도 집으로 되돌아 온다고 하길래 온 때꼬장이 침을 다 뺃어서 우표에 꾹꾹 발라붙인 후 편지를 넣는 함인 시멘트 구멍 속으로 쏙 밀쳐 넣은 뒤에도 한동안 걱정을 하기도 했다. 특히 답장이 늦으면 행여나 중간에서 우표가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나 해서 에무한 침 탓을 하기도 했다. 우체국에 가면 우체국 마당에서 항상 정겨운 빨간 우체통이 우리를 반갑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날은 무엇을 잘못 적어서 우체통을 열어 달라고 하기도 했다. 요즘도 더러 옛날 생각을 떠올리며 가끔씩 "캬~ 내가 그때 도산우체국이 없었다면 그리고 어깨동무를 보지 못했다면 문명세계에 사는 서울 반포국민학교 아들(아이들)과 리라국민학교 갸들을 어이 꿈엔들 알았을까... 대한민국 최고의 번화가에 사는 갸들을... 도산골 벽촌에 사는 이 깡촌놈이..."
원천에 사는 동용이는 우표 수집광이었다. 그 놈은 우체국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특히 크리스마스 씰이 나오면 환장을 하고 샀다. 나는 씰이 우표가 아닌지도 모르고 얻어서 편지를 부쳤다가 편지가 되돌아오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다. 씰은 우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씰은 우표보다 훨씬 더 예쁜 풍경이나 그림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성탄절 씰은 결핵 협회에서 결핵 퇴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전 후 쯤에 만들어져서 나왔는데 우체국에서 팔다보니 촌놈인 나는 우표로 착각하는 바보가 되었던 것이다.
우체국에 대한 짓궂은 기억도 있다. 토계 도산국민학교가 수몰지구가 되어서 1975년 5학년 2학기부터는 부내 양평 웃토계 사는 아이들이 온혜국민학교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편입 직전에 도산국민학교에서 담임이셨던 이재호 선생님께서 온혜로 우리들과 함께 갔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사모님과 한창 교제 중이었다. 이따금씩 선생님은 밤새도록 쓰셨을 듯한 연정이 가득 담긴 편지를 도산우체국(토계에 있던 우체국이 온혜 청계마을로 이전해가서도 명칭은 그대로 도산우체국이었다)에 가서 부치라고 주시곤 했는데 하도 내용이 궁금해서 심부름 할 때마다 뜯어보고는 학교 앞 청계 개울에 버렸다가 나중에 들통이 나서 온혜까지 가서도 또 괭이자루로 뒈지게 얻어맞고...(선생님과의 추억 서린 수필은 차고 넘칠 만큼 많이 썼다. 우리 큰 형님과 동창인 우리 선생님. 참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이다).
♤사진출처: 우정사업본부, 우정생활뉴스(유용한 정보), 집배원복 그 변화의 발자취.
♤사진설명: 필자의 유년시절인 1970년대 근면ㆍ성실의 표본처럼 느껴졌던 집배원 모습이다. 친근한 체보 아저씨가 검은 제복 차림새에 모자를 쓰고 누런 우편가방을 둘러맨 채 가가호호 우편물을 건네고 있다. 뒤에는 낡은 우체국 자전거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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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이~오라이~ 영자 누님의 전성시대~"
이제 토계 번화가의 종점이자 또한 버스 정류소의 종점이자, 이 수필의 종점이기도 한 토계정류소에 대한 추억담으로 들어가 보자. 토계정류소가 언제 생겼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리저리 인터뷰를 해 보니 지금 70대 중반 세대도 실제로 1962년경에 버스를 타고 하교(下校)를 한 기억이 있다고 하니 최소한 1960년대 초반에도 버스가 들어왔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일제는 1907년 한반도 수탈을 위한 수월성 제고를 위해 7개년 신작로 건설 사업에 착수 했다. 한반도의 첫 신작로는 1908년 완공된 "전군가도"인 전주와 군산 간의 도로이다. 그 당시 일본이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착수한 정책들이 바로 신작로 건설과 함께 193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화 된 저수지 및 보 건설 등과 같은 수리 사업(관계시설)이다. 의인에 앤떼이(둑 혹은 보)를 설치하여 지대가 높은 의인 여울의 물을 부내(분천동)까지 농수로를 만들어서 보낸 것도 곡물 생산을 높이기 위한 책략이었다.
일제는 조선에 신작로 건설을 통해 전국의 군과 군, 군과 면을 이어서 붙였다. 경부축(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연속적인 도로 구간)도 이 정책의 한 권역이었으며 도산면의 신작로도 이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이렇듯 신작로도 알고 보면 일제의 조선 경제침탈과 수탈정책을 뒷받침 하기 위한 교활한 방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도산면 부내와 토계 사이의 신작로는 1938년 이후에 건설되었으며 읍ㆍ면 도로로 분류 되어진 등외 도로였다(당시 국도는 도로 등급제 1ㆍ2등 도로이고 지방도와 부도는 3등 도로였다).
이렇듯 신작로 건설과 연결시켜 보았을 때 50년대 후반부터 버스가 들어오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해 본다. 한국 최초의 시내 버스는 1928년 4월 22일 조선총독부 사업 허가 아래 운행한 경성부영버스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49년 8월부터 서울시가 시내 버스 운행을 허가해 주었다고 한다. 이후는 알다시피 6.25 전쟁 기간이다. 전쟁 통에 도산골에 버스가 다닐 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도산골에 버스가 들어온 시기를 1950년대 후반으로 보는 것이다.
문제는 버스가 운행한 역사는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었지만 이에 비해 우리가 실제로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수몰 되기 전 부내에 살면서 등하교 시 버스를 탄 경우는 모두 세 번이었다. 무슨 일로 탔는지는 기억에도 없다.
확실히 기억을 하는 것은 4학년 때 배구시합을 하기 위해 안동에 나갔을 무렵이 처음이었고 이후 언제인가 등교 때 한 번 그리고 또 세월이 많이 지난 뒤 어느 하교 때 한 번이 있었다.
그 시절 버스를 타지 못했던 이유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빈난한 살림 때문이었다. 집안 환경에 따라 다소 약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처지는 대동소이 했다. 수몰 전 학교에 다닐 때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할 수 있는 가장 먼거리에 위치한 동네가 부내였다. 다시말해 지형적으로 버스가 다닐 수 있도록 신작로가 뚫려져 있는 동네가 부내 마을 정도였다. 부내와 토계 사이는 왕복 거리로 족히 이십 리는 된다. 아이들이 매일 다니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거리이다. 하지만 버스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 길이어서 도로 자체는 무난했다. 목실골 배오지 개목 매내 장구목 아이들의 등하굣길 상황에 비하면 언급 조차 하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그곳에 사는 아이들은 산을 넘나들고 숲을 헤치고 강을 건너서 학교에 오고 가는 타잔 같은 아이들이었다. 매내에 사는 용필이는 아침에 학교에 올 때 산 밑까지만 내려와도 벌써 배가 고파서 도시락을 까먹고 온다고 했다. 요즘은 매내 같은 곳이 예던길이 지나가는 길목이어서 인적이 닿는 지역이지만 그때는 산신령님만 백호를 타고 다니는 "전설의 고향" 같은 길이어서 사람을 구경하기 조차도 힘든 벽처였다. 그 당시 도산골에서 버스가 마을 사이를 직접 통과하는 동네는 사실 부내와 토계 뿐이었다. 의인과 섬마는 강 건너 불 보듯 바라볼 뿐이었다.
버스를 매일 볼 수 있는 동네에 살아도 돈이 있어야 탈 수 있지 돈이 없으면 태워주고 안태워 주고는 전적으로 버스 운전사 마음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그 끝발로 버스 운전사가 멋져 보였다. 1970년대 초반에 학교에 다닐 때 버스는 아침에 한 대 저녁에 한 대가 다녔다. 토계에서 나가는 버스는 그 반대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버스 운행 코스는 안동-와룡-오룡-예안- 부내(분천동)-도산서원-토계정류소-온혜-태자 순이었다. 그 당시 어른들의 버스 운임료는 정해져 있었지만 아이들의 버스 값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를테면 어른이 앉아서 아이를 업고 또 안고 있으면 한 명 버스 값만 내면 되는 식이었다. 어른이 아이들을 두 명 업든 세 명 업든 여하간에 업고 서서 앞에는 또 안고 있어도 본인 한 명 값만 내면 되는 시대였다. 차지하는 넓이나 공간의 크기 보다는 버스 안에 발을 딛는 인원 수에 따라 차비를 내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라도 혼자서 버스를 타면 돈을 내어야 했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1973년 3학년 때 부내 동네 친구 녀석이 토계까지 10원을 주고 버스를 탔다고 억수로 자랑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생각건대 버스를 탔으니까 돈은 주어야 했고 꼬맹이가 주니까 운전사는 그냥 주는 대로 받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정해진 값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버스 정류소 주변에는 공짜 버스를 타려는 아이들이 서성거리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버스 구성원은 운전사 아저씨, 조수 총각, 차장 누나로 원 팀이 구성 됐다. 운전사는 검정색 라이방을 끼고 한껏 폼을 잡는 멋쟁이였고 조수 총각은 기름때에 쪄려 있는 머슴처럼 보였다. 해방 이후 1949년부터 시내 버스가 운행되면서 원래 차장은 남자인 조수가 해 오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1961년부터 여성이 차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차장 누나는 이렇게 해서 1961년부터 신직업으로 우리 사회에 첫 선을 보이며 인기리에 등장한 것이다. 우리들이 억수로 좋아한 버스 구성원 원팀 가운데 한 명은 가냘프지만 억센 힘으로 오라이~ 오라이~를 외치며 버스 문짝을 "탁 탁" 치고 여닫는 우리 이쁜 차장 누나 영자였다. 영자 누나는 그렇게 70년대를 전성시대로 만들었다.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몰랐지만 우리는 이쁜 차장 누나를 그냥 모두 영자 누나라고 불렀다. 파란 제복에 빨간색 동그란 베레모를 쓰고 가냘픈 몸매와 목소리로 오라이~오라이~ 하고 외칠 때면 그 인기가 가히 백운 점방의 표준새전과나 어깨동무에 대적할만 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조수 총각이 슬그머니 사라지는가 싶더니 1980년대부터는 왠지 영자 누나의 모습도 점차로 보이지 않았다.
(※ 교통부는 1961년부터 기존의 버스 안내양 대신 여성 차장제를 만들어서 80년대까지 운영했다. 하지만 버스 차장직에 대한 구인난과 버스 운행사들의 인건비 문제 등으로 난항을 겪다가 1982년 자동개폐문과 요금함이 장착된 시민자율버스가 등장하면서 버스 차장직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통계청 공식 자료에 의하면 서울시는 1982년 8월부터 안내양 없는 시내 버스, 즉 시민자율버스가 운행되면서 안내양은 급속히 줄어들었으며 1989년 안내원 관련 조항인 자동차운수사업법 33조가 없어지면서 추억의 직업으로만 남게 되었다. 안내양은 1970년대 중반이 5만여 명에 달할 정도로 인원이 가장 많은 시기였다.)
한 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부내 동네 형들이 버스는 타고 싶고 돈은 가진게 없자 심술이 나서 버스가 지나가는 동네 신작로에 돌을 쌓아 놓고서는 양쪽 길가 집 기둥 끼리 새끼줄을 묶어서 버스를 골탕 먹이는 짓을 했다. 하지만 그냥 당할 운전사 아저씨가 아니었다. 이튿날 작당을 지긴 형들을 어이어이 물어물어서 하굣길에 골라 태우고는 부내 동네를 지나가도 내려주지 앉자 겁먹은 형들이 차안에서 대소변을 마구마구 누며 사정사정 용서를 구해서 송티재에서 내려 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영자 누나의 전성시대에 천지도 모르고 감히 도전장을 냈다가 본전도 못 찾는 맹탕짓이었다. 나는 4학년 때 배구선수가 되어 안동이라는 큰 도시에 처음 나갈 때 버스를 처음 탔다. 촌놈들이 하도 멀미가 심해서 출발부터 영자 누나가 까만 봉지를 예주룩 나눠주었다. 버스에 타자마자 올리는 놈도 있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 술도가까지 가니 벌써 속에 기별이 왔다. 버스 안에 좌석마다 재떨이가 달려 있던 시대인지라 어른들이 아리랑 새마을 청자 등을 메뉴 대로 입맛 대로 엄청 피워댔다. 운전사도 피우고 조수도 피우고 손님도 피우고 그야말로 토굴 속에 들어있는 너구리를 잡는 모양새였다.
배구 선수 아이들이 얼마나 토해댔는지 북문동에 내리자마자 안동교대 운동장으로 들어가서 수도꼭지를 꽐꽐 틀어놓고 온몸에 들러붙은 찌꺼기를 씻느라 목욕하다시피 했다. 녹초가 된 몸으로 이튿날 안동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배구시합에서 용상 아이들과 녹전 아이들에게 연거푸 두 게임, 도합 네 세트를 전패ㆍ완패로 몰살 당한 후 그 다음주 월요일 도산 학교 배구부는 영원히 해체되어 버렸다(※도산국민학교 배구부에 대한 이야기는 "이종구교수의 에세이 산책/ 앙팡테리블의 음지와 양지"에 수록돼 있음).
가냘픈 여자의 몸이지만 정신만은 "굳세어라. 금순아~"처럼 억세었던 우리 영자 누나. 오라이~ 오라이~를 외치던 그 아련한 목소리가 아직도 희미하고도 애잔하게 들려 온다. 그리하여 몇 푼 번 돈은 죄다 동생들 학비 마련에 쏟아부었던 그 시절 영자 누님들의 효녀 가장 노릇이 시대가 변한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눈물나게 고맙게 다가온다. 정겨운 그 목소리 "오라이~ 오라이~ 탁~탁~" 그때 "오라이~ 오라이~"를 외치던 우리 영자 누님들은 모도 다 어디로 갔나.
♤사진출처: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사진설명: 빈난 했던 그 시절 영자누님들의 효녀 가장 노릇이 시대가 변한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눈물나게 고맙게 다가온다. 정겹고도 애처로운 그 목소리 "오라이~오라이~탁 탁~" 그때 "오라이~ 오라이~"를 외치던 영자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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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점방마다 건물마다 추억 가득히 남아 있어~"
이렇듯 유년시절 주저리 주저리 얽히고 설켜서 영글어진 추억들은 사실 수많은 관계십으로 인해 퇴적된 열매들이다. 토계 번화가에 대한 이러한 기억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마다 점방마다 건물마다 각각 특색이 있는 캐릭터의 모습으로 뇌리에 아스라이 그립게 남아 있다.
도산지서 하면 버뜩 생각나는 것은 불온 삐라 줍기, 공책-연필, 공비, 간첩, 빨갱이, 순경 아저씨, 반공 소년 이승복, 공산당, 반공 포스터, 소년-소녀 반공 웅변대회, 방공방첩 승공통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등이 떠오른다.
자장면 집을 생각하면 가을운동회, 졸업식, 아부지, 장날 자장면 냄새, 멋쟁이 자장면 아저씨, 밀가루 반죽 허공에 돌리다가 시다이 강중배기로 매조지기(요즘 수타식 제조법), 신문벽지, 선거 포스터, 기호1 박정희, 기호2 김대중 등이 기억난다.
간판으로 붙여 놓은 상호는 없었지만 도산석유 집을 떠올리면 기름방, 석유집, 불조심, 위험, 접근금지, 다황, 아리랑 성냥, 사홉들이 진로소주 및 금복주 술병, 호롱불, 호야, 초롱불, 곤로, 난로, 불치기, 부내 양수장 푸른 잔디 언덕의 솔밭, 통소, 남포등, 보름달, 낙동강, 4H클럽, 소나무, 동요, 무용 등이 생각난다.
예배당을 생각하면 예수 할머니, 고요한 종소리, 종각, 늙은 청동종, 십자가, 첨탑, 교회 넓은 마루, 목사님, 구약성서, 신약성서, 돋보기, 찬송가, 구주 예수 의지함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 성탄절 트리, 함박눈 펑펑 내리는 성탄절날 교회 마당에서 이리저리 뛰어놀던 귀여운 강아지, 루돌프 사슴코, 사탕-과자-공책, 꽃상여,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하늘나라-천국-천당, 아부지의 슬픈 얼굴, 그리움 등이 속절없이 몰려 온다.
면사무소의 이미지는 가을운동회, 면장님, 큰 건물, 큰 사무실, 높은 천장, 하얀 와이셔츠-양복-구두, 사무실 가로막이, 시계 추 달린 큰 괘종시계, 펜-잉크-만년필-모나미볼펜 그리고 낯선 사람들이 떠오른다.
우체국은 체보 아저씨, 낡은 삼천리 자전거, 제비가 그려진 큰 우편가방, 근면-성실의 끝판왕, 어깨동무, 펜팔, 빨간 우체통, 반포국민학교, 리라국민학교, 아내의 국민학교 모교, 성탄절 씰, 우표 수집광 동용이, 체보 아재 목실골 양짓마(항곡) 전보 배달 추억, 이재호 선생님 연서 개봉사건 등이 생각난다. 제비가 우체국의 심벌인 것은 생각건대 아마 제비가 봄 소식을 정확히 알려주듯이 기쁜 소식을 좋은 날에 제때 전해준다는 메시지를 상징하고 있지 않나 싶다.
백운이발관 하면 갑자기 생각이 차고 넘친다. 먹거리가 풍성했던 점방부터 떠오른다. 온통 그냥 먹는 생각 뿐이다. 못 먹어도 그냥 널려 있는 것만 봐도 좋았다. 뽀빠이, 라면땅, 삼립단팥빵, 쫀드기, 삼양라면, 비가사탕, 풍선껌, 달고나, 크라운 산도, 새우깡, 코카콜라, 칠성사이다, 환타 특히 내가 좋아했던 오란씨 등 환장했던 먹거리들부터 섬세히 먼저 떠오르고 이어서 차순위로 어깨동무, 딱지, 구슬, 화약총, 물총 등이 보이고 마지막에는 굳이 사지 않아도 베끼거나 빌려 쓰거나 만들어 쓰거나 엉덩이 맞고 때우면 그만인 표준전과, 백노지, 마분지, 콤파스, 공책, 색종이, 물 풀, 가위, 지우개가 보이네. 백운이발관은 원장님이 제일 먼저 생각나고 보고 싶어진다. 동심 같이 선하시던 백낙원 원장님 그리고 보청기, 바리깡, 흰 가운, 빡빡이-미또리 머리, 다이알 비누, 면도칼, 연탄 난로 위에 얹혀 있던 누런 큰 주전자와 은색 양동이(바게쓰), 빡빡 머리 씻길 때 마구 문지르던 파란 납작 솔, 목에 동이던 하얀 백프로 보자기, 파란 다이루 박힌 시멘트 세면 다이, 외상 인사말, 장날 아부지 모습이 아른거린다.
자생당 약방을 떠올리면 마냥 친절하셨던 권영진 선생님과 잔정이 넘치셨던 사모님 아지매, 약방 미닫이 창문, 아까징끼, 고약, 안티프라민, 박카스, 기응환, 배시시 웃던 내영 공주가 보인다.
토계정류소는 오라이~오라이~외치던 우리 이쁜 영자 누님, 검정색 라이방 쓰고 폼 잡던 운전사 아저씨, 꺼먼색 기름때 가득 배어 있던 정류소 마당, 버스 좌석 뒤에 저금통처럼 달려 있던 담배 재떨이, 예안 장날 이 보자기 저 보자기 이고 들고 매고 안고 타던 도산골 아지매-아재들, 안동중학교 배구시합, 오바이트, 북문동 안동교대 수도꼭지, 설레면서 처음 탔던 안동행 버스, 완패-전패-몰패, 도산국민학교 배구부 해체...😂😢😭
신발집 하면 높은 마루 위에 진열된 검정색-흰색 고무신, 길다란 검은색 장화, 분홍신, 고동색 슬리퍼, 예비군 얼룩무늬 군화, 범표 축구화, 메르데카컵-박스컵 축구대회, 화랑-충무, 버어마, 이회택-김재한-차범근-김진국-황재만-이세연-변호영 선수, 부내 밀양대 천연 축구장, 미류나무로 만든 골대가 어제처럼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토계 다리 건너 가기 전에 웃토계 올라가는 길목에 홀로 있던 규환이네 담배집이 떠오를 때면 부내 오칠이 형이 멋지게 뽑아 내던 70년대 담배 타령도 생각이 나네.
"태양"이 고요히 잠든 "은하수" 반짝이는 "단오"날 달밤에 "한산도"와 "한강"이라는 사나이가 "청자" "수정" "금잔디" "진달래" "백조" "수연" "희망"이라는 아가씨들과 함께 "거북선"을 타고 "신탄진"을 유랑하며 "아리랑"과 "개나리"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며 "환희"에 찬 밤을 보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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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추억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세월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그때는 참 슬퍼질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오지 않는 길을 꼭 찾아 두리라. 별이 되는 그날까지 유년시절 넓은 도산마당 동심의 정원에서 뛰어 놀았던 아름다운 추억들을 영원히 되새기며 살아 가리라. "어느 번화가의 소산"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흩어지지 않고 유구히 가슴 속에서 그대로 남아 있기를 오늘도 기억 속에서 여전히 그리운 종소리를 울리고 있는 토계 예배당에 경건하게 기도해 본다.
《그리운 소리ㆍ그리운 사람들》이종구(22.1.6)
예배당 고요한 종소리가 땡그랑 땡그랑 울리네
하계천 개울물 속살대는 소리도 졸졸졸 들리네
교문길 논두렁 사이 하늬바람은 싱싱싱 거리네
소사아저씨 치는 학교 종소리가 땡땡땡 퍼지네
선생님 풍금 타는 소리도 뿡뿡뿡 뿡뿡뿡 떠도네
운동장 플라타너스 숲에서 까치가 깍깍깍 울고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서 참새들이 짹짹짹 울고
펌프 우물가 호박넝쿨에는 꿀벌들 윙윙윙 울고
검회백 교정 지붕에는 비둘기가 구구구구 울고
묘목장 애기무궁화 잎에서 참매미가 맴맴 울고
뒷교정 미류나무에는 까마귀들 까악 까악 울고
뒷동산 자하봉 뻐꾸기는 뻐꾹뻐꾹 뻐뻐꾹 우네
ㆍ봄에는 화단에 개나리 진달래 채송화 봉숭아 붓꽃 가득 피고
ㆍ여름에는 자하봉 천사곡 사련진에서 시원한 강바람 불어오네
ㆍ가을에는 오색 만국기가 펄럭이는 도산골 한마당 운동회 대잔치
ㆍ겨울에는 활활 장작 타는 정겨운 난로 위에서 벤또가 구워지네
ㆍ우리들은 1학년 어서어서배우자 구경하는 참새~
ㆍ주먹쥐고 손을 펴서 손뼉치고 주먹쥐고 이 손을~ ㆍ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ㆍ아빠하고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봉숭아도~
ㆍ풀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새파란 하늘을~
ㆍ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잘있거라아우들아 정든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아름답던 시절은 봄비에 떨어지는 분분한 낙화마냥 사라졌다 강물 따라 쉬이 흘러간 아카시아 꽃잎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월 따라 인생도 쉬이간다 도산마당에서 여섯번의 동요를 부르고 나니 육년의 세월이 구름같이 떠나갔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었다
드넓은 도산 마당 하늘 높이 두둥실 떠다니던 하얀 뭉게구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나 윗도리 무명 적삼 보게토에 노란 손수건 한 땀 한 땀 곱게 달아주시던 그리운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나 파랑 원피스에 찔레꽃 리본 꽂고 곱디고운 모습으로 콧물 눈물 닦아주던 임이시던 우리선생님 어디로 가셨나 구슬치기 땅따먹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재깔대며 하던 영이 순이 철수 동무들은 모도 지금은 어디로 갔나
복숭아꽃과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꽃동네를 이루고
동구밭 과수원 길에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날리고 코스모스 하늘하늘 춤추는 신작로가 곱게 펼쳐지고 애일당 도산서원 소나무 가로수에 하얀 눈꽃송이 피어나는 사계절 등굣길을 책보자기 둘러매고 꿈속에서 끝없이 걷고 있네♧.
♤도산국민학교 구교정 본관 전경(토계)
♤도산국민학교 구교정 뒷편 건물(토계)
♤부내 종친 이재술 아재가 도산국민학교 구교정 정문 오른편 교감사택 앞, 양철 지붕 속에 있던 펌프 우물가에서 촬영한 가슴 뭉클한 그리운 전경 사진이다(1995.1). 도산국민학교를 다닌 학생이라면 누구나 이 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뒤안길의 얘기지만 빈난한 많은 선후배들이 허기진 배를 이 우물로 채웠으리라.
♤도산서원 전경(촬영자 미상)
♤이호신 화백의 도산서원(2019), 여행스케치
♤유산 김영환 선생의 분천마을도(2014): 분강촌
♤종친 화가 이택 선생의 분강도(1992): 분강촌
♤종친 조각 예술가 이재홍 선생의 2020년 作, "수몰 전 1970년대의 분천마을 전경": 분강촌
유년시절 도산골에 살면서 유무형의 존재들과 많은 소통과 관계십(relationship)을 형성했었다. 특히 위에 정렬해 놓은 사진에 담겨 있는 도산국민학교와 도산서원 그리고 분강촌(농암종택ㆍ분강서원)이 가르쳐 준 맑은 정신과 아름다운 감성은 은혜로운 자산이 되어 복된 삶을 안겨 주었다. 도산골이 내려 준 축복이자 고귀한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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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본 글을 토계 번화가와 도산골과 도산국민학교를 기억하고 그리워 하는 모든 도산면민들과 신ㆍ구 세대들과 모교 전 기수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강물처럼 세월이 쉬이도 많이 흘러갔습니다. 먼 옛날 토계 예배당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던 정겹던 그 종소리가 마냥 그립습니다.
첫댓글
엊그제 근황이 불편하고 여러가지 제약이 따르는 시간을 이용 했다고는 했는데 이런 긴글을 쓰느라 고생했어.
설날명절에 큰선물이네
고향을 그리며 감사하게 잘읽을께
너무나 고마워
늘 건승하고 행복하길 바래
도산지서 앞에서 백운이발관 까지는 토계 한복판이었지, 지금 회상해 보면 토계는 번화가로 마을중에 특별시 급이였어
카페장님. 늘 응원해주셔서 반갑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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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지난해(2021) 12월 코로나 격리 기간 동안에 갖혀 지내며 쓴 수필이다. 도산 동창들은 줌zoom으로 화상 모임을 한다고 좋아했는데 당시 필자는 호흡과 기침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한참 헤매던 시간이어서 참여하지 못했다. 격리된 상황이 고요하고 적막한 공간을 만들어 주어서 오히려 "어느 번화가의 소산"을 쓰게 도와준 일등공신이 되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호불호가 되는 듯 싶다. 감사히 수용한 시간이었다.
토계 친구를 비롯한 우리친구 모두가 너무 감사하지~
이렇게도 상황을 디테일하게 글을 써주어서 추억을 완전 되찾은 듯 하다
격리되어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 이었을 텐데 전화위복으로 넘기고
정말 아련한 추억들이 엊그제 일들 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게 해주네
설날 연휴 집콕하면서 너무 잘보고 있어
새해 더욱 건강하고 복 많이 받길 바라고 우리 모두모두 행복 하자~
종구야
호윤이는 내살미가 아니고 싹실에 살았지~
호윤이 옛집은 싹실에 빈가로 아직 있어
지금은 경산에 살고있고.
모든 것이 그저 다 감사합니다.
정겨운 도산골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떠 오른다
이글 미영이가 볼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특히 토계 번화가 부분을...
이글 토계친구들과 미영이가 보면 토계마을 어릴적 그대로 회생 될것 같고 그시절 추억이 떠 오르겠다
정말 종구 글 대단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