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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에 대하여
2018년 11월 4일 / 마태복음 7:1-6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성품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신앙이 깊은 분들은 입만 열면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쏟아낸다. 그런 분들은 다른 사람의 좋은 점만 보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늘 부드럽고 따뜻한 말이 나온다. 이런 분들이 그리 많지 않은 반면에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다른 사람의 나쁜 점만 들추어낸다. 왜 그렇게 하는 말마다 가시가 돋쳤는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예로부터 “옷감을 자를 때에 열 번 자로 재본 다음에 자르라”고 했다. 옷감을 잘못 잴 가능성이 많으며, 일단 잘못 자르면 돌이킬 수 없고 그 피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이는 매사에 신중을 가해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제를 비판하면 자기의 외식을 면치 못한다
마 7:5 /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줄 수 있을 것이 아니냐.
‘티’의 헬라어 ‘카르포스’는 지푸라기, 가시, 작은 알맹이를 뜻한다. ‘티’와 같은 잘못은 진리를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 작은 실수이며, 비고의적인 잘못을 의미한다. 반면 ‘들보’의 헬라어 ‘도코스’란 대들보, 통나무, 널빤지를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자신의 크나큰 허물이나 잘못을 상징한다. 전체적인 진리를 거스르는 고의적인 범죄를 뜻한다.
본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무엇보다 타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데에 온 관심이 집중됨으로써 자신을 정확히 조명하지 못하는 잘못에 빠지지 말 것과 오히려 자기 판단과 심판에 엄격할 것에 대한 교훈이다.
바리새인처럼 이기적이거나 양심이 밝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영적 조언자가 되는 것은 절대로 금해야 한다. 자신과 남을 동시에 실족시키고 죽게 한다. 자신의 큰 잘못은 덮어 두고 권위의식을 가지고 타인의 작은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 주려고 하는 행위가 외식이며 죄라는 것이다. 그만큼 자신을 바로 알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며 어렵다는 말이다. 이 모습은 그 어느 누구만의 모습이 아닌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비판’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크리노’(κρινω)란 뜻도 있다, 이 단어에서 영어 ‘비판하다’(criticize)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영어 성경은 모두 ‘비판하다’는 ‘criticize’가 아니라 ‘판결’을 뜻하는 ‘judge’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 헬라어 ‘크리노’(κρινω)는 ‘판단하다’, ‘심판하다’는 뜻이다. 신약성경에서 ‘크리노’(κρινω)는 거의 모두가 다 순전히 재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비판하지 말라’는 한글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비판하지 말라’는 뜻은 남을 ‘판단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는 말이다.
예수님도 ‘크리노’를 ‘송사’(고발, 법에 소송을 걸다)라는 뜻으로 성도가 지켜야 할 기준을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을 하도록 힘쓰자. 그만큼 하나님께 받을 것이다.
마 5:39-42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네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40)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 41) 비록 가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헤아리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마 7:2)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판단(비판)’이라는 말과 ‘저울질(헤아림)’이란 단어가 나란히 반복되어 나온다. ‘헤아림’이란 단어는 오늘날 미터법, 혹은 길이의 단위의 ‘미터’라는 말의 어원으로 ‘측정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측정당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측정당하고 평가당하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이 없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누가 나를 점수 매긴다. ‘성격이 어떻고, 인품이 어떻고, 능력이 어떻고 … ’라며 평가한다. 그리고 그 평가의 결과를 자기들끼리 말한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고!’ 요즈음에는 인터넷에 올리기도 하고, 동네방네 말을 한다. 남에게 신상 털리는 것만큼 찜찜하고 불쾌한 일이 없다.
어차피 인간 사회는 돌고 된다. 내가 남의 신상을 평가하고 뒷얘기 하면 남들도 내게 똑 같이 한다. 내가 다른 사람의 결점을 지적하고 이야기하면, 남들도 내 결점을 지적하고 이야기한다. 그나마 인간 사회에서 비판하고 비판당하는 것은 별 문제도 아니다.
심각한 것은 하나님께서도 내가 비판한 것만큼 똑 같이 갚아주신다는 점이다. 사람은 혹시 뒷얘기 하는 것을 당사자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들으신다. 내가 골방에서 은밀하게 나눈 이야기까지도 다 아신다. 심지어는 내가 기도하는 내용까지 다 들으시면서 평가까지 하여 심판까지 하신다(눅 18:11-12).
롬 2:1-3 /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 비판하는 마음은 사탄이 심어 놓은 가라지의 씨앗과 같다. 누구에게나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어서 때때로 나 자신도 비판적이 될 뿐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남을 정죄할 때가 많다. 주목해야 할 글이 있다.
➊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언제나 ‘줄자’와 같다.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해 놓고 언제나 거기에다 사람을 비추어 보고 비판하고 정죄한다. 자기를 높이는 악한 사람은 말씀을 잣대로 내세우나 자기의 기준을 잣대로 삼는 사람은 남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기에 바쁘다. 평소에는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날카로운 눈으로 남을 살피며 신속하게 ‘줄자’를 늘어뜨려서 비판과 정죄의 날을 세운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정직한 사람은 요셉처럼 용서와 관용을 베푼다.
➋ 조금 더 심한 사람은 ‘망치’와 같은 사람이다. 자기 기준에 틀리면 마구 두들기고 자기 기준에 맞추기를 강요한다.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사람을 억압한다.
➌ 더 심한 사람은 ‘톱’과 같은 사람이다. 여유나 기다려 줌이 없이 망설이지 않고 자기와 맞지 않으면 잘라 내버리는 사람이 있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다.
➍ 어떤 사람은 ‘자물쇠’같다. 다른 사람을 상처 주거나 해하지는 않아도 자기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폐쇄적이고 방어적이 되어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 자신부터 이 시대의 바리새인이 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자.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고 거룩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 내 안에 뿌리를 내린 마귀의 본성 인 비판하고 정죄하는 삶의 태도를 고치자. 남을 비판하고 정죄했던 것을 회개하고, 혼자 속으로 남을 판단했던 죄를 회개하며 교만을 버리고 예수님에게 온유와 겸손을 배우며 기도하자.
▶ 하나님은 아주 정확하게 내가 남에게 한만큼 갚아주신다. 내가 남을 악평하면 나도 악평 당하게 하신다. 이렇게 하심은 그나마 나를 긍휼히 여기사 죄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남을 후하게 대하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후하게 대하신다. 내가 남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신다.
눅 6:37-38 /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만일 너희가 남에게 주면 너희는 그것을 다시 얻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서 차고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대로 되돌려 받을 것이다.
올바로 판단하여 비판 대신에 할 일은 용서하고 관용하는 일에 힘쓰자. 본문에서 비판의 대상은 대부분 형제(동료,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다. 그 형제들의 결점에 대해서 오히려 관대하게 대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관대하게 대해 주실 것이다. 내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을 덮어주실 것이다. 오히려 격려해 주실 것이다(마 6:14-15).
사람들의 관점에서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면에서 모범을 보이던 사람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금식과 기도를 자주 했으며, 십일조를 드리고, 품행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듯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무섭고도 두려운 책망을 들었다. 문제는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며 십일조도 드렸지만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기’(마 23:23)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신 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감히 형제를 비판할 수 없는 것은 비판은 하나님의 고유의 권한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주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지 않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주겠다며 비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로서 외식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외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겉치레 하는 외식이 아니라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빼는 회개이다. 그래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죄악을 회개할 뿐 결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비판할 생각은 하지도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는 냉엄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는 관용하게 된다.
▶ 어느 누구도 남으로부터 비판받기를 원치 않는다. 당연하다. 남들이 자기를 비판하는 것을 가장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한다. 이상한 일이다.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자기는 재미있게 하면서, 남의 말은 못 받아주는 이런 사람들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지? 사실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항상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그 분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바르게 판단하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남을 비판하는 죄를 범치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다윗의 이야기이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죄를 크게 지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충성스런 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자기 처로 삼았으며, 장군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전사하게 했다. 성경은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큰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다윗을 심판하셔서 징계하시기 전에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비유로 경책하셨다.
비유의 내용은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부자가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의 하나밖에 없는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잡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다윗은 그 사람에 대하여 크게 노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면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삼하 12:5)며 정죄했다. 그때에 나단이 다윗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삼하 12:7)고 지적했다. 다윗은 자기가 비판하고 정죄했던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고 즉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3)라며 선지자 앞에 고백했다. 다행히 다윗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께 모욕을 끼쳤으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아들은 죽임을 당했다.
다윗도 이러할진저 하나님 앞에 과연 바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로마서 3:9-20을 마음에 담아 나 자신의 잘못과 부족한 것을 바로 잡도록 하자.
롬 3:9-20 / [모두가 죄인이다] 그러면 우리 유대인들만이 훌륭한 사람들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죄인입니다. 10)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잘도 말하는구나. 하나같이 썩어 빠져 흉칙한 짓만 저지르고 11) 혹시나 깨달음 있는 이 있을까 하나님을 찾는 이 있을까 하여 찾아보시나 12) 모두 다 딴 길로만 걸어가 하나같이 썩어 버렸구나. 착한 일 하는 이 찾을 수 없구나. 도무지 없구나. 13) `저것들이 뇌까리는 말 한마디인들 어찌 믿을 수 있나요. 생각하는 것마다 못된 것뿐이고 목구멍은 열려 있는 무덤이라. 14) 혀에 발린 말밖에 할 줄 모릅니다. 15) 하는 말마다 저주요 거짓이요 으름장입니다. 16) 남 욕이나 하고 꼴 보기 싫다는 말이 아예 입에 발렸습니다. 17) 모두 다 딴 길로만 걸어가 하나같이 썩어 버렸구나. 18) 착한 일 하는 이 찾을 수 없구나. 도무지 없구나.' 19)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유대인들에게 무겁게 내려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책임이 있는데도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모든 악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변명해 볼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온 세상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입을 봉한 채 유죄 선고를 받을 처지입니다. 20) 이제 여러분도 아시겠습니까? 율법이 명령하는 것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알면 알수록 우리 자신이 그것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줄 따름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디 목사님에게 남을 비판하면서 자신에게 동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때 무디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지금 당장 무디라는 인간의 골치 아픈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 볼 시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비판(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비판하지 말라고 해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일이나 진실과 거짓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밴 병폐 즉 바리새인들과 같이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비판을 금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형제 비판을 금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깨닫고 나면 비판을 스스로 삼가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나야 하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실제로 나의 언어생활과 마음은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스스로 판단하자. 잘못된 모습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채워나가도록 노력하자. 자신의 경건을 위해서도 유익하거니와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매우 필요하다.
우리가 많이 듣는 말 중에 ‘예수 믿는 사람치고 말 못하는 사람 없다’는 얘기가 있다. 이 말은 결코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을 잘한다는 뜻으로 사실 교회에는 다툼도 많거니와 비판과 비난이 난무(亂舞)하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믿음이 좋다는 분들 가운데서도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언어의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마치 혼자서 온 세상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사사건건 열을 내며 남을 비판한다.
그런 사람들의 말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니다. 교회가 자기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가기 때문은 아닌지? 또 교회의 지도자라는 분들이 비난받을 짓을 많이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죄하고 손가락질하는 비난에는 증오가 숨겨 있다. 그런 비판으로는 결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상담사에서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비판하지 않는 자세이다. 왜냐하면 비난하는 마음으로 상담을 해서는 치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발견되는 수가 많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모습이 상대방에게 투영 또는 반사되어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차가운 사람이라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사실 차가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아주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자신이 사실은 이기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자에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잘못을 깨닫게 하시는 경우가 많음을 기억하자.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지적했다.
갈 6:1-5 / [서로 짐을 져주자]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져 있거든 성령을 따라 사는 여러분이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도와 바른길로 돌아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혹시 여러분 자신도 악한 길에 빠져 들지 않을까 늘 주의하십시오. 2) 서로 남의 어려움과 짐을 함께 나누어지고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십시오. 3)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처지에 무엇이나 된 것처럼 자기를 높이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거역하는 짓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 값어치도 없는 인간입니다. 4) 각각 자기가 한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래서 참으로 자기가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 혼자만 자랑스러워할 뿐 남 앞에 드러내 놓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5) 우리는 모두 결점과 고뇌를 짊어진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인다고, 뭔가 잘못된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만 보인다. 그러니까 자꾸 남을 비난하게 되고, 그렇게 남을 비난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더욱 강조하고 확인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을까?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러니까 큰 잘못을 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이라도 잘 찾아내는 법이다.
문제는 남의 작은 잘못은 그렇게 잘 보이는데 자신의 큰 잘못은 전혀 보지 못한다.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담대하게 남을 비난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눈 속에는 커다란 통나무가 들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주겠다고 설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도 없고 용납되지도 않는다. 누가 그런 사람의 말을 들어주기나 하겠는가? 누가 그런 사람을 인정하겠는가? 그렇게 비판적인 사람들이 인기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는 일이 효과적이지도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 한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 여자는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선생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수법이었다. 예수님으로서는 아주 곤란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늘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들 편을 드셨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왔다’고 하셨다(눅 5:32). 그러니까 ‘돌로 치지 말라’고 하자니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돌로 치라’고 하자니 지금까지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외치셨던 입장과 다른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기세등등하던 사람 모두가 양심에 가책을 받아 모두 슬그머니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니까 거기 나왔던 사람들 중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보다 더 깨끗하고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만 찾아내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래도 거기 왔던 사람들은 양심이라도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을 했다. ‘만약 오늘 이 사회에서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서로 먼저 치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돌로 치지 않는 것은 자기도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기가 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서로 큰 돌을 들어 던지려고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비판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판의 본질은 타락한 인간의 질투와 악한 성품의 산물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형제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형제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은 ➊ 우리 자신이 그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고, ➋ 우리는 그러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여기서 사도 바울이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각자가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잘하든 못하든 그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다. 잘하면 하나님이 상 주실 것이고 잘못하면 하나님이 벌을 주실 것이다. 그것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형제를 판단한다면 하나님이 하실 일을 가로채서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사도 야고보 역시 같은 얘기를 했다.
약 4:11-12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헐뜯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남을 비판하거나 헐뜯는다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율법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셈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잘못되었다고 판정을 내리는 결과가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그 율법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판가름이 아니라, 그 율법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12) 그 율법을 만드신 분인 하나님만이 우리들을 바르게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구원하기도 하고 멸망시키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무슨 권리로 남을 심판하거나 비판할 수 있습니까?
■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영국 런던이 첫 번째 폭격을 받았다. 그 이튿날 아침에 런던에 있던 모든 언론계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때 한 저널리스트가 이런 제안했다. “영국 언론은 사회에 대하여 아주 예리한 비판적 안목을 가진 언론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판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전시(戰時)이고 지금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때입니다. 비판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제 잠시 동안만은 희망을 선전하고 희망의 기사를 씁시다. 신문에서 희망을 보게 하여 우리의 현실이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과 희망을 우리 민족에게 주도록 합시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신문 기자들은 그 저널리스트의 말에 모두 합의하여 모든 기사의 논조를 다르게 썼다. 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실었고, 군대에 출정하는 젊은이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도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러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의 모습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차지했다. 또한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지도자들의 희망에 찬 메시지가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영국 국토 전체는 한순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고 승리를 믿기 시작했다.
먼저 선 사람이 정당한 비판의 기능을 무시하거나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형제를 바로 세우고 우리 가운데 죄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뼈를 깎는 듯한 자기반성도 필요하고, 마치 자신의 수족을 찍어내는 듯한 고통스러운 비판을 형제에게 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러한 비판은 매우 소중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도 신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룩한 것을 개(부도덕의 상징으로 어떤 주석가는 본문에 언급된 개는 주인도 없이 거리를 떠도는 개로 해석한다. 이런 개들은 정처가 없으며 더럽고, 탐욕스럽고, 지나가는 행인을 향해 짓고, 물기도 한다)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돼지는 더러움의 상징) 앞에 던지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에게 거룩한 것을 준다는 것은 거룩한 고기 즉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고기를 주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개가 그것을 알겠는가? 개한테는 그 고기가 거룩한 고기인지 그냥 고기인지 아무런 구별도 없고 상관도 없다. 마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는 것과 같다. 돼지에게는 진주 목걸이가 필요 없다. 오히려 돼지는 먹지도 못할 것을 주었다고 화를 내고 주인에게 달려들어 상하게 한다.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인 줄 모르고 값진 것을 값진 것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을 줄 필요도 없고 주어서도 안 된다.
잠 9:7-9 /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체 우쭐대는 자들은 아예 꾸짖을 생각도 하지 마라. 그런 자를 꾸짖었다가는 도리어 봉변을 당하기 일쑤이다. 못된 일만 꾸미고 돌아다니는 녀석을 꾸짖었다가는 도리어 화를 입게 마련이다. 8) 그러니 잘난 체하고 우쭐대는 것들을 꾸짖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 그들이 너를 미워할까 두렵다. 세상은 묘해서, 슬기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꾸짖으면 오히려 그 사람이 고마워하고 너를 아낄 것이다. 9)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나무라면 그 사람은 더욱더 슬기롭게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올바른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가르치면 더욱더 옳은 일에 힘쓸 것이다.
▶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과 또 비판을 거부하지 말라는 말씀을 함께 하셨다. 어떻게 보면 서로 상충되는 말씀처럼 생각되지만, 비판에 대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꼭 필요한 두 가지 태도를 말씀하신 것이다. 한 우물에서 쓴 물과 단 물을 동시에 낼 수 없다는 말씀처럼 우리 입에서 악한 말도 나오고 선한 말도 나올 수 없다. 우리가 입을 열 때마다 격려의 말, 칭찬의 말, 용서와 사랑의 말이 나오도록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거룩한 고기처럼 소중하고 진주처럼 값진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고치는 비판을 대할 때, 겸손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날로 새로워지고 변화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깨끗한 언어의 습관으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꾸어나가자.
예수님은 정죄는 하지 않으셨지만 비판은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습관적으로 비판하였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항으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였다. 정말 그 비판으로 사람들이 깨닫고 고치고 변화되기를 바라서 하는 비판이 아니다. 이해심도 동정심도 없이 그야말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했다.
눅 18:10-14 /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자기가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뽐내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는 세관원이었다. 11)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12)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13) 그러나 세관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관원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은근히 다른 사람과 세리 등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남을 경멸(輕蔑 - 깔보아 업신여김)하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비판을 잘하는 사람은 사람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에 대한 경멸은 비판보다 더 큰 죄이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약 2:13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판단은 필요한 것이다.
비판을 두려워하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성숙할 수 없다. 건전한 비판은 개인에게는 깨달음을 주고, 공동체의 질서를 세워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비판을 하거나 받아들일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➊ 확실한 근거에 기초하지 않은 추측성 비판은 삼가야 한다. 의혹만으로 비판하지 말라.
➋ 상대방을 일깨워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헐뜯고 비방하려는 목적으로 비판하지 말라.
➌ 판단은 판단으로 끝내야 한다. 판단을 받는 일이 유쾌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태도이다.
이러한 원칙이 무시된 채로 함부로 판단할 때 그것은 곧 심판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은 개인의 인격과 공동체의 평화를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요즘 인터넷 댓글 문화가 매우 심각한 지경이다. 근거 없는 비방성 글을 무책임하게 유포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하고, 개인의 인격을 짓밟고,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모건 블레이즈는 심판의 역기능(逆機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이 있다. 나는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국가, 그리고 어떤 조직도 파괴할 수 있고, 수많은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다. 나는 바람의 날개를 타고 여행한다. 아무리 순결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무력하고,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도 내게는 더럽다. 나는 결코 망각하지 않으며,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내 이름은 비난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구별해야 하는 것이 있다. 판단과 심판이다. 옳고 그름을 따져서 그릇된 것을 지적하는 것은 판단이다. 심판(judgment)은 그릇된 것에 대한 지적을 넘어서 상대방을 정죄하거나 저주하는 행위이다. 예수님 자신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엄청난 판단을 쏟아 부으셨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셨다.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 오히려 그들에게 심판을 받아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자녀를 혼내고 때려주십시오! 하지만 때릴 때 당신의 마음이 더 아파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이 있는 지적은 단순한 비난과 다른 것이다. 이것은 정죄가 아닌 ‘교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선한 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더 깊이 보면, ‘판단은 하되,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대원칙 하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심판에 관한 진실을 일러주셨다.
➊ 남에게 들이대는 심판의 잣대가 바로 우리 자신이 심판 받는 잣대가 될 것이다(2절).
➋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3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마치 자기가 세상의 기준처럼 착각하여 자기는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 없이 너그러우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냉혹하리만치 엄격하게 비판하고 정죄한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가혹하다. 자기가 하면 투자인데 남이 하면 투기이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인데 남이 하면 불륜이다. 그래서 내 눈의 들보는 티로만 보이고, 남의 눈의 티는 들보로 보인다. 비판의 기준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나를 보아야 한다. 그래야 내 눈의 들보를 들보로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의 티가 티로만 보인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자신에게는 바늘 끝처럼 철저하고 남에게 대해서는 바다처럼 관대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실수와 허물은 뼛속 깊이 아파하고 괴로워해야 한다. 남의 실수와 허물은 한없이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내 눈의 들보가 들보로 보여야 하고, 남의 눈의 들보는 티로 보여야 한다. 내 눈의 들보가 티로 보이면 그 눈에 병이 든 것이다. 이 영적 눈병을 고쳐야 한다.
갈 6:1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져 있거든 성령을 따라 사는 여러분이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도와 바른길로 돌아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혹시 여러분 자신도 악한 길에 빠져 들지 않을까 늘 주의하십시오.
➌ 마지막으로, ‘판단은 하되,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에 이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하셨다. 여기 ‘거룩한 것’과 ‘진주’는 상대방을 바로 잡아주려는 목적에서 주는 애정 어린 판단을 말한다. 그것을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마음이 완고해져서 아무리 진심 어린 판단을 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무리 권면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무리 판단을 해주어도 고치지 않는 경우에는 이후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히 문제를 내려놓으라는 말씀이다.
우리에게는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언제까지 인내하며 머물러야 할지, 언제 포기하고 떠나야 할 지 분별해야 할 때가 있다. 언제까지 참고 받아주어야 할 지, 언제 포기하고 놓아주어야 할 지 분별해야 할 때가 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지혜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 훗날 후회하지 않을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진리에 대한 소신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한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Hate the sin, but not the sinner)는 말이 있다. 참으로 바르고 귀한 말이다.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죄이지 죄인이 아니다. 죄인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옳은 길을 따르고 그릇된 길을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옳고 그름은 분명히 하되, 판단이 심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파헤치는 일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더욱 치열(熾烈 - 기세나 세력이 불길같이 맹렬함)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 겸손하기 바란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일은 우리의 판단 몇 마디로 가능한 일이 아님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되 또한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더욱 평안하고 성숙한 가정, 교회, 사회를 이루어나가기를 바란다.
참고가 되는 글이 있어 소개한다
한 홍 목사가 쓴 「리더여, 사자의 심장을 가져라」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너무 쉽다고 생각될 때, 이것쯤은 내 경험과 상식으로도 너끈히 해결할 수 있다고 방심할 때 우리는 덫에 걸리고 만다. 당신의 지식이 아무리 풍부해도, 당신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당신의 처세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당신은 유한한 인간에 불과하다.
조종사 가운데서도 가장 숙달된 조종사가 뜻밖에 쉬운 비행 중 사고로 죽는 비율이 높은 원인을 아는가? 너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계기판을 보지 않으므로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종사를 훈련할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계기판을 철저히 바라보고, 자신의 감을 믿지 말고 계기판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당신은 영리하다고 자부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그 영리함이 오히려 당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 당신의 인생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경솔하게 결정해 버린 일,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라고 여겨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신속하게 처리해 버린 일이 뜻하지 않게 당신의 덜미를 잡는 치명적 실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판단하시게 하라.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자꾸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라.
■ 본문을 이런 비유로 연계한다 / 십여 년 전 가이드포스트라는 작은 잡지에 이런 글이 실린 적이 있었다. 어느 아파트에 사는 한 부인의 체험담이었다. 그 부인은 이따금씩 한가할 때 응접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든지 또는 신문을 읽든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사는 아파트는 그다지 넓지 않은 작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와 마주 서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건너편 아파트의 응접실 안이 육안으로도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건너편 아파트에는 아주 고상하게 생긴 부인이 이따금씩 응접실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날도 커피 잔을 들고서 응접실의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자연히 그의 눈길은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로 쏠렸다. 그런데 그날따라 건너편 아파트에 있는 부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것을 보면서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원 세상에 아무리 바빠도 창문이라도 닦고 책을 읽든지 뜨개질을 하든지 할 것이지 저게 뭐야? 얼굴은 곱상하게 생기신 분이 살림살이는 시원치 못하구먼!” 그로부터 한 두 주가 지났다. 그날은 따뜻한 봄날이었다. 그래서 그는 큰마음을 먹고 집안을 구석구석 쓸고 닦으면서 대청소를 했다. 그리고 창문도 깨끗하게 잘 닦았다. 그는 집안청소를 다하고 난 뒤에 피곤한 몸을 끌고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채 응접실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자연히 그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건너편에 있는 응접실로 쏠렸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부인이 응접실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 내가 얼마 전에 저 부인이 자기 집 창문을 제대로 닦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렸지. 이제 보니까 내가 우리 집 창문을 제대로 닦지 않아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내가 이처럼 어리석구나.’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경솔함을 깊이 뉘우쳤다. 그리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앞으로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결 론
밤에 못 보는 눈을 야맹이라고 한다. 자기를 못 보는 눈은 들보가 박힌 눈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자기를 못 보게 하는 시력장애이다.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한다.
바울이라는 사울의 눈에는 “비늘 같은 것”이 덮여 있었다. 눈을 덮는 데는 두꺼울 필요가 없다. 얇을지라도 시력을 가로막는 데는 충분하다. 구름이 가리면 해도 안 보인다. 눈앞에 있는 것도 눈이 가려지면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니니아가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있던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행 9:17-18 / 그래서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서 그에게 손을 얹고 말하였다. “사울 형제여, 당신이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나타나셨던 주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당신이 충만히 성령을 받고 또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18) 그러자 그 순간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 것은 종교적인 편견이었다. 편견이라는 들보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편견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편견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비뚤어진 눈에는 모든 것이 뒤틀려 보인다. 편견은 무지의 자식으로 편견은 썩은 이처럼 뽑아내야 한다.
눈에서 들보를 빼는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과 같다. “육체의 할례는 할례가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 2:28)라고 했다. 미움과 증오는 마음의 들보이다. 누구를 미워하면 그 사람의 실상을 볼 수 없다. 그의 나쁜 점 만 보인다. 이것은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친다. 시기도 들보이다. 시기는 질투이다. 이것은 자기를 욕되게 한다. 시기심은 남이 잘되는 것을 못 본다. 남의 화를 기뻐하는 것이 자기 복보다도 훨씬 좋아한다. 시기라는 들보 때문이다.
미국 법정 앞에 동상이 하나 서있는데 저울질하는 저울대를 가지고 저울질하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다. 그 사람의 눈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는 동상이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공평하고 바르게 판단한다고 해도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교회와 선지자의 사명을 완수하려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계 3:17-18 /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는 네 자신이 불쌍하고 비참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충고한다. 불로 제련된 순금을 내게서 사라. 그것만이 네가 참다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깨끗하고 순결한 흰옷을 내게서 사라. 그래야 너는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네 눈을 치료하려거든 내게서 안약을 사라. 그러면 시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판단력보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솔로몬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자.
왕상 3:9-14 /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치심을 항상 느끼고 들을 수 있는 총명한 마음을 제게 주셔서, 제가 주님의 백성을 바로 인도하고 공평한 판결을 내릴 수 있게 하소서! … 10) 솔로몬이 이렇게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간구하자,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합당하게 여기고 기뻐하셨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주님의 백성을 위해서만 간구하였기 때문이다. 11) 주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오래 살게 해달라거나 큰 부자가 되게 해달라거나 원수들을 죽여 달라고 간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이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하여 내게 지혜를 간구하였다. 12) 그러므로 내가 네 간구대로 과거에나 앞으로나 어떤 사람도 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지혜와 총명을 네게 주겠다. 13) 뿐만 아니라 네가 간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화도 네게 주어 네 평생에 어떤 왕도 너와 비교할 수 없도록 하겠다. 14) 또 네가 네 아버지 다윗처럼 진실하게 나의 모든 명령을 지키면 네게 장수의 복도 주어 네 날수를 길게 연장시켜 주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셨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까지도 정죄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위한 죄 사함의 기도를 드리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함부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한다. 긍휼의 마음을 품고서 다른 사람들을 항상 사랑으로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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