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영혼이 선택한 마을 - 동암1리 원동암
원동암 마을은 망운면에서 운남면으로 가는 도중 운남면 소재지 못 미쳐서 좌측으로 돌아 4㎞ 쯤 가면 나온다. 마을 앞에는 청계만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 배산임해(背山臨海)의 마을로 행정구역명으로는 운남면 동암1리 원동암 마을이다.
‘마을유래지’의 기록으로 보면 “원래 마을 이름은 ‘전좌리’였으나 이후 동쪽으로 바위층이 펼쳐져 있어 ‘동암’으로 부르다 지금은 ‘원동암’으로 부른다”고 했다. 원래 마을 뒤로는 병풍처럼 산이 감싸고 있었으며 왼쪽으로는 모래산이 오른쪽으로는 상투머리라는 부리가 있어 전후좌우가 잘 짜여진 마을이었다. 더구나 마을 앞으로는 2㎞가 넘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 있고 해당화가 피어 있어 그림 같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창포만이 막히면서 마을환경은 많이 변했다. 왼쪽의 모래산이 없어지고 마을 앞의 백사장이 사라지면서 아늑했던 마을은 삭막한 풍경이 되어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봄철과 가을철에 주민들이 잡아왔던 낙지가 잡히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는 하루 저녁 3시간 정도 낙지잡이를 하면 보통 3-40마리를 잡아서 농사 비용 및 가용으로 사용하였는데 요즈음엔 5-6시간 잡이를 해도 5마리 잡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작년에는 마을 앞에서 한 마리의 낙지도 잡을 수 없었다. 마을 앞에는 양과 같이 생긴 밈섬(맨섬, 또는 沼池島)이란 섬이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준희다. 김준희는 선조 代 사람으로 영암에서 살았으나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영산강변의 잦은 왜구의 출몰에다, 이러한 왜구를 토벌한다 하여 관군의 출입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 이주 한 곳이 이 마을이다. 현재는 여러 성씨가 모여 20여 세대 5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 뒤에는 ‘궁게들’이라는 간척지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물길을 막으면서 형성된 들인데 들의 모습이 갯가의 ‘궁게’를 닮아서 붙인 이름이라 하나 ‘궁게’라는 게는 없고 ‘남게’를 ‘나무에’로 풀이 하듯이 ‘궁게’가 ‘구멍에’의 뜻을 지니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해서 ‘궁게’는 일반 ‘게’의 의미를 지닌 지명으로 보인다. 여기서 생산되는 쌀은 최고의 밥맛을 지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는 ‘사도세자당(동암묘)’이란 특별한 사당이 있다. 주민들은 이 마을에 사당이 들어선 것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마을 주변의 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여기고 있다. 이 사당은 현재까지 네 번의 변화를 겪어왔다.
사도세자당이 있어
1777년(정조 1년) 사도세자의 어린 아들 정조 임금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 해에 이 마을의 村老인 成, 李, 朴씨의 꿈에 한 貴人이 나타났다. 마을 앞에 배 한척이 나타나더니 한 귀공자가 내려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를 보러 모여든 마을 사람들에게 “나는 先王의 세자이니라. 원한이 뼈에 사무친 채 나라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이곳에 이르렀느니라. 이곳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내 영혼이 이곳에 머무르고자 하니 그리 알라” 하고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튿날 주민들이 모여서 서로 지난 밤 이야기를 하던 중 세 사람의 꿈이 같은 내용인 것을 알고는 어떤 의미가 있는 줄 몰라 궁금해 하면서 헤어졌다. 밤을 맞은 세 사람에게 또 다시 세자의 혼령이 나타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다음 날에 다시 모인 세 사람은 똑 같은 현상에 놀라워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바다에 뭐가 떠내려 온다’는 주민의 외침에 가서 살펴보니 까만 궤(櫃) 하나가 바다에 떠 있었다. 그제서야 이틀간의 현몽이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여기고 정성스럽게 모셔와 제단을 쌓고 모시니 이것이 동암묘의 첫 번째인 단이었다.
그러다 폐서인이 되었던 세자가 그의 아들 정조에 의해서 복위되고 고종 대에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일시 제단을 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도세자가 다시 촌로들의 꿈속에 나타나고 마을에 재액이 생기자 인근 유림들과 함께 다시 사우를 세워 제사를 모시니 고종11년 1874년이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인 제단이다.
그리고 1899년에 사도세자가 장조황제로 추존되면서 단을 훼철하였다. 이후 다시 1918년 사당을 세워 면민들이 모시니 이것이 세 번째 변화인 사당이고 1971년 현재의 모습으로 동암묘를 중건하여 군수가 祭主가 되어 모셔오다 현재는 마을 주민만의 제사가 되니 이것이 네 번째의 변화이다.
동암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건물 내의 바닥에는 중앙에 烏石으로 된 장조황제 위패가 놓여 있다. 또한 묘실 좌우로 [동암묘중수기]등 4기의 편액이 걸려 있으며 사우 입구에는 수령 100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소나무가 두 그루 있고 좌측에 [장조황제동암묘비]가 세워져 있다. 향토문화유산 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는 ‘사도세자당제’, 또는 ‘당제’라 해서 제를 모셔왔는데 먼저 동암묘에서 제를 지내고 마을의 중앙에 있는 당산나무에 가서 다시 제를 지냈었다. 현재는 당산나무가 말라 죽어버린 관계로 동암묘에서 사도세자 당제만 지낸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비린 음식을 먹었거나 상가에 조문을 갔던 사람은 ‘동티난다’ 하여 참석할 수 없으며 또 그 달이 出産 달인 임신부는 다른 마을에서 아기를 낳고 오도록 했다. 특히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일주일간 몸조심 말조심 마음조심을 하였다. 또한 제사 사흘 전부터 샘을 가뒀다. 이 말은 샘에 금줄을 쳐서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황토를 뿌려서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것이다.
10여 년 전에 사도세자당 옆에 한 무당이 집을 짓고 기도를 하며 산 적이 있었다. 기도를 열심히 올리며 치성을 드리던 그녀는 얼마 후에 마을을 떠났다. 떠나면서 ‘사도세자당의 기운이 너무 세 감당할 수가 없다’는 말을 남기며 떠난 것이다.
같은 유래와 성격을 지니는 당제가 신안군 임자도 무산단에서도 지내지고 있다.
동암 8경
明沙海棠 밝은 모래위에 해당화
漁村落照 마을에 퍼지는 저녁노을
桃茂果樹 마을 곳곳의 복숭아 나무
僧達歸雲 승달산에서 넘어오는 구름
木浦儒山 목포의 유달산
光州瑞山 광주의 무등산
遠浦歸帆 머언 포구로 돌아오는 배
江湖漁大 강호에 고기잡이 성하다
한국전쟁 때 많은 피해를 입었던 담터의 마을 - 동암2리 신기
신기는 동암2리에 속한 마을로 새로이 터를 잡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87년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경술국치 때에 ‘신규’로 고쳐 부르다가 ‘신기’로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한 주민은 마을의 지형이 마치 기(基)자 형국이어서 신기라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마을은 웃 담터, 아랫 담터, 서촌, 떼집, 주막너머 등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담터라고도 불려지는 이 마을은 예전에 목장이 있어서 목장 안터라 부르기도 했다. 목장을 둘러싸고 있는 긴 담 안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담터라 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리고 떼로 만든 집을 짓고 살았다 해서 떼집이라 했으며 죽산 마을 서쪽에 거주한다 해서 서촌, 신기저수지 주변의 주막 부근에 있다 해서 주막 너머 등으로 부르는 마을들이 있다. 서촌 마을에는 1600년대에 나주 임씨 林沈 공이 처음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며 예전에는 10가구가 넘는 여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한 가구만이 살고 있다.
담터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해주오씨 오처태(영조대, 자-汝成)이다.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는 ‘吳處恭’으로 나오나 해주오씨 족보를 확인한 결과 吳處泰 였다. 공은 함평군 나산에서 거주하였는데 화재를 만나 1730년대에 살기 좋은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한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공은 ‘늘 바른 몸가짐과 어진 행동으로 주변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으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현화면 新基洞으로,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는 망운면 新基洞으로 나온다.
예전에는 마을 주변이 울창한 숲이었으나 현재는 개발로 주변이 모두 황토밭이다. 마을길이 닦여지기 전에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는 밭들이었다. 마을 앞은 당개산(죽산 마을 뒷산으로 기우제를 지내던 산)이 안산 역할을 하고 있으며 두 차례의 간척(일제 강점기와 50여 년 전)으로 주민들은 넓은 농토를 갖고 있다.
마을 입구에 말무덤(말맷등, 몰무덤)이 있다. 근래 들어 주민들이 힘을 모아 봉분을 새로 만들고 그 위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예전에는 훨씬 더 큰 봉분이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말무덤을 대단히 신성시 했다. 무덤에 훼손이 있으면 마을에 큰 재앙이 닥친다고 믿고 있어서 관리를 잘 했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에 ‘효열부김령김씨지비’가 서 있다. 원래는 마을 앞에 있던 것인데 옮겨 온 것이다. 효열부 김씨는 주민인 오정묵의 처로 젊어서 혼자 되어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아이들을 잘 키워 칭찬이 자자하였다. 주민들과 후손들이 그 기상을 기리기 위해 1940년에 세운 비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 때 33명의 주민이 피해를 입었던 마을이다. 이른바 운남 운북의 갈등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두곡 원동 마을과 함께 한국전쟁 때 가장 많은 피해를 봤던 마을이다. 이 마을이 그렇게 큰 피해를 봤던 이유는 좌익사상에 물든 주민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계면 사마리 전리에서 누이를 따라 이사 온 사람으로 한국전쟁 당시 군당위원장을 역임할 정도로 핵심 좌익 성향의 사람이었다. 주민들은 이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사상이 지역간 갈등에서 피를 부르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때 33명의 주민이 피해를 입어
희생을 당한 사람들은 돌로 맞아 죽거나 칼과 죽창에 찔려 죽기도 하였으며 생매장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한 집안에서 6명이 희생을 당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당시에는 제일 무서웠던 것이 죽어있는 시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또 호랑이나 사자 같은 동물이 아니라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주민 간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당시에 이 마을 주민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활동적이고 개혁적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연극 등을 통해서 주민들을 개혁시키고자 했고 단결과 협동이 잘 되었던 마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피해가 컸는지도 모른다.
마을 동쪽 오목한 곳에 장안터라 부르는 곳이 있다. ‘장안터’의 지명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목장 안터의 의미가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다. 이곳을 경작하는 주민의 말에 따르면 수많은 기왓장을 볼 수 있었으며 조금만 깊이 파면 운남에서는 볼 수 없는 큰 돌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커다란 무덤으로 보이는 봉분이 있었다고도 한다.
장안터 주변에 건넷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었다. 전하는 말로는 그 샘은 주민 千戶가 먹을 수 있을 만큼 수량이 풍부했다고 한다. 지금은 바위는 묻혀지고 방죽도 메워져 논이 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당시에는 사방에 네 개의 커다란 돌들이 있고 샘 주변에는 선돌이 서 있었다. 또한 주변에 큰고랑이라 부르는 골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앞 저수지에 홍련이 자라고 있다. 저수지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간척지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다. 저수지의 면적은 주민들의 말처럼 백평이 부족한 만평의 넓이다. 일제강점기 때 목포에서 사법서사를 하던 해주오씨 오경배씨가 홍련 씨앗을 뿌린 것이 계기가 되어 홍련이 자라는 저수지가 된 것이다. 늦은 봄부터 여름이 되면 빨갛게 피어오른 홍련의 자태가 주민들에게 색다른 아름다움을 주고 있다.
목포대학교에서 발간한 문화유적분포도를 보면 ‘신기마을 유물산포지’가 나온다. 마을 서쪽에 있는 양곡저수지주변에 위치하는데 신성들이라 부르는 저평한 구릉에 해당한다. 현재 과수원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유물은 다량의 회청색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기우제를 지낸 산이 있는 마을 - 동암3리 죽산
죽산은 동암3리에 속하는 마을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中村’으로 나온다. 마을유래지에 중촌은 동암리의 중간에 있다 해서 부르는 이름이라 하나 동암이란 지명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형성된 이름이다. 추정컨대 中人들이 사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주변에 전좌리 하전좌리 등의 민촌에 해당하는 마을 지명이 있었던 것이나 이후에 지명을 바꾼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반촌이었다고 한다.
이후에 나온 지명이 ‘竹山’이다. 이 마을은 원래부터 대나무가 많이 있었던 자리다. 이 마을 입향조로 여겨지는 광산김씨 김남중의 호가 竹菴이었으며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마을 주변이 개발되기 전에는 마을을 대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듬성듬성 대나무들이 자라고 있긴 하다. 일제강점기 때 지명의 변경을 시도하면서 대나무가 많은 특성을 살려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자료에도 1912년에는 현화면 죽산리로, 1917년엔 망운면 동암리 죽산리로 나온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광산김씨 金南重(1595 - ?, 자-士重, 호-竹菴)이다. 공은 광주 판정에서 세거하였으나 명리를 멀리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조용한 여생을 보내기 위해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마을유래지에는 여산 송씨 송명길이 최초의 입향조라 하나 여산 송씨 족보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주민들이 말하는 여산 송씨의 입향조인 宋忠命(1625 - 1670)은 광산김씨보다 약간 늦게 나주 금안동에서 이 마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광산김씨와 하동정씨가 많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망운쪽으로 1㎞ 쯤 가다 우회전하여 영해로를 따라 한참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마을 뒤는 광산김씨 문중의 망재산과 맞은편엔 여산송씨 문중의 당재산이 있다. 그리고 마을 왼쪽에 안산이 있다. 앞에는 간척으로 인한 농지가 조성되어 있어 지형으로 봤을 때 전형적인 소쿠리형의 마을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운남면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의 하나였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야산이 개발되면서 아늑하고 포근한 전경의 마을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다. 마을 앞의 간척은 196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다. 영해로는 지형적 특성상 예전에 야산의 능선에 형성된 오솔길이 도로가 된 것이며 동암리에 속한 마을은 대부분 영해로 주변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옆에 있는 망재산(망개산이라고도 함)은 조그만 야산으로 보이지만 예전에는 재를 올리는 당이 있었고 비가 안 올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곳에 커다란 바위(고인돌) 1기가 있었는데 기우제의 단으로 사용했던 돌이다. 주민들은 현재도 기우제의 단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올라가서 확인해보니 이미 마을 샘 앞에 다리를 놓으면서 가져다 사용해 버렸다. 주민들은 그 고인돌 위에다 촟불을 켜고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망재산은 높이가 꽤 되어 운남면과 청계면 일대의 측량기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실지로 올라가 보니 청계만과 운남면이 훤히 보인다.
이 마을은 매년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예전에는 걸궁을 포함하여 샘굿과 거리굿을 함께 지냈으나 현재는 당산나무 아래서만 제를 모시고 있다. 마을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당산목은 둘레가 3미터 50이 될 정도의 크기와 250여년이 넘는 수령을 갖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수형이 잘 잡혀진 나무다. 1982년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한옥으로 지어진 마을회관
당산나무 아래에 있는 마을의 샘은 물이 좋기로 널리 알려져 있어 주변 마을 특히 신기 마을에서 매년 정월 보름이면 주민들 몰래 물 타러 오기도 했다. ‘물 타러 온다(간다)’는 일종의 민속놀이로서 물을 소중하게 여겼던 마을 샘에 관련된 놀이다. 이 마을의 샘은 암컷이고 신기 마을 샘은 수컷이어서 이 마을의 물을 길러다 신기 마을 샘에다 부으면 물이 잘 나온다 해서 행해진 민속놀이다.
이 마을에서도 예외 없이 한국전쟁 때 10여명 이상이 희생을 당했다. 특히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던 예비검속 때부터 주민들 중 말깨나 했던 많은 사람들이 당했다. 한때는 마을 이름을 錦山이라 했다. 마을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일부 주민들이 마을 이름을 바꿔보자는 생각에서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행정기관에서 지명 변경이 어렵다고 하자 현재는 다시 죽산으로 부르고 있다. 지금도 마을 앞 버스 정류장에는 금산과 죽산이 함께 쓰이고 있다.
이 마을의 마을회관은 무안에서 유일하게 한옥으로 지어진 회관이다. 2007년 한옥시범마을로 선정되어 군의 지원을 받아서 지은 것인데 색다른 느낌을 준다. 2007년 무안군으로부터 건축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운남은 여러 가지로 불교와 관련된 사항이 많다. 우선 연동과 하묘라는 지명이 불교적 지명이고 큰 스님이 두 분이나 태어나신 곳이다. 한 분은 연리 저동 출신의 청화스님인 강호성이고 또 한 분은 이 마을 출신의 정각스님인 김태현이다. 정각스님은 목포의 대표적인 사찰인 보현정사의 주지이며 설립자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무등골, 들넘어(들너매), 마을 뒤 서당골(서당너매) 옹개 등이 있다. 참고로 마을노래가 남아 있다. 운남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마을 노래이다.
망개산 북쪽에 두고
남으로 흘러가는 여수의 강물
씩씩하다 죽산학교 배움의 노력
오천년 역사를 가슴에 품고
남으로 흘러가는 여수의 강물
씩씩하다 죽산학교 배움의 노력
영해공원이 있는 하동정씨 집성촌의 마을 - 동암4리 영해
永海마을은 하동정씨 집성촌으로 감태미(하전자리) 자막골 영해촌 으로 이루어졌다. 이후에 김씨 서씨들이 들어와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영해마을은 행정구역상 동암4리에 속하며 운남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4㎞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영원히 바다에 있는 섬마을’이란 의미로 영해라 했다고 한국지명총람에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들은 자세히 모르고 있으며 다른 기록도 없어 확실치 않다. 마을의 입향조인 하동정씨 족보에는 永湖라고 나오는데 간척을 하기 전 물이 들면 마을 안쪽에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어 이것을 보고 永湖라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의 입향조로 하동 정씨 鄭禮弘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이나 입향시조와 성씨자료를 보면 鄭宣日(1654 - 1692, 하동인, 호-쌍류당)로 나온다. 정선일의 선조들은 나주 금안동에서 세거하다가 함평의 감방산 아래 금곡으로 이거하여 문호를 이루었다. 정예홍은 정선일의 부친으로 무안에서 거주한 일은 없다. 단지 후일 그의 무덤을 후손들이 이 마을의 자막골로 옮겨온 것이다. 한 주민은 연리 저동의 입향조와 이 마을 입향조는 형제였다고 한다. 하지만 족보를 통해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자료에 따르면 정선일은 ‘덕을 기르고 숨어 살고자 함평의 금곡을 떠나 바다로 들어 와 영해촌에 입향 하였다’고 한다. 공은 재질이 밝고 총명하여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으며 영욕을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원래 이 마을은 하루에 두 차례씩 썰물일 때 육지와 연결되는 섬이었다. 물이 들 때는 마을이 섬으로 변하여 영해도라고도 하였다. 육지와 연결된 것은 서울 사는 이창손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과 대박산 마을을 연결하는 사업을 했으나 완성을 시키지 못하고 1970년대에 구일산업에서 완성시켜 육지가 되었다.
섬으로 있을 때 가장 큰 문제가 아이들의 학교 문제였다. 물 때(밀물과 썰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때)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마을의 초등학생들은 항상 등교시간과 하교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10시에 등교했다가 저녁 8시가 넘어 하교하기도 했다. 또한 간만의 차가 심하여 늘 위험하기도 했다.
그러다 한 학생이 밀물 때 노두길을 건너 등교하다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주민들이 아이들의 안전을 위하여 분교 설치를 무안교육청에 강력하게 건의하여 1958년 교실 두 개의 운남영해분교가 설치되었다. 비록 교실 두 칸의 복식수업을 하는 작은 학교였지만 1999년 폐교될 때까지 이 마을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던 학습의 전당이었다. 이 학교에서는 4학년까지만 가르치고 5학년이 되어서는 운남 본교로 진학하였다.
해양 생태계의 변화로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어
청계만을 마주하고 있는 마을 앞에는 세 개의 섬이 보인다. 하나는 청계면 구로리 앞의 대섬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 바로 앞의 젖섬 또는 젓둑이라 부르는 유도(乳島)다. 이 섬에는 나주 김씨의 묘가 있다. 또 하나는 섬이 길다하여 띠섬이라 부르는 茅島가 있다. 모두 무인도다.
이 섬들 사이에 썰물이면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가 있다. 강중내바위 또는 주네바위라 부르는 이 바위는 간척이 되기 전에는 이 마을 주민들에게 육지로 갈 수 있는 알림이 역할을 했다. 즉 이 바위가 썰물로 모습이 보이면 육지로 연결된 노두가 보이기 때문에 운남에 가려고 하는 주민은 집을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창포만 간척으로 물살의 흐름이 변해 피해를 많이 보고 있었는데 더욱이 골프장 운영으로 거르지 않는 오염물질이 그대로 방류되어 영해만을 오염시켜 그 피해가 막심하다고 한다. 특히 해양 생태계의 변화로 낙지나 김 석화의 양식에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한다. 해서 뜻을 같이 하는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피해보상 청구를 하고 있으나 결과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마을에는 둘레 2미터 50이 넘는 오래된 팽나무인 당산나무가 있다. 목포대학에서 나온 자료에는 이 나무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 또한 입향조가 심었으리라 짐작되는 아름드리가 넘는 구수나무가 있었으나 지난 날 태풍 때 가지가 부러지고 넘어져 고사되었다.
마을에는 1976년에 전기를 끌어오기 위해 융자를 받았던 융자금을 지금도 내고 있었다. 이른바 ‘농어촌융자금’이란 명목으로 전 주민들에게 징수하고 있었다. 이는 마을이 섬이었을 때 정부에서 마을까지 전기를 넣어주지 않고 이웃 마을인 죽산리까지만 전신주를 연결하자 주민들 스스로 돈을 갹출하고 융자를 받아 전기를 끌어오고 시설하면서 생긴 빚이다.
마을 앞에 1941년에 세워진 광산김씨효열비가 있다. 광산 김씨는 하동 정씨 가문에 시집 와 19살에 청상이 되어 죽을 때까지 수절하며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을 해 주민들의 귀감이 되어 후손들이 세운 비이다. 현재는 비가 넘어져 있어 후손들은 다시 세우려 하고 있다.
자막골에 영해공원이 들어서 있다. 낚시터와 해수욕장을 갖추고 있어 오래 전부터 관광지 개발이 예견되어온 지역이다. 또한 일출과 일몰을 다 볼 수 있는 이 지역은 수려한 주변 풍경이 강점이다. 해서 매년 운남면 사회단체 들이 중심이 되어 1월 1일 해맞이 행사를 하고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마을의 남쪽에 있는 개로 갓등개가 있다. 마을의 서쪽에는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의미의 용계이산으로 부르는 지명이 있으며 그 너머를 망넘이라고 한다. 또한 산이 소라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소라골도 있다. 하동 정씨 선조 묘들이 있는 자막골이 있으며 죽산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한아지란 지명이 있다. 이곳에는 마을 주민들이 전부 이용했던 한아지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었다. 수량이 풍부했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앞서 가는 농촌의 용골 마을 - 동암5리 용동
東巖里는 운남면 소재지에서 동남 방향으로 3,5㎞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청계만을 마주하고 있다. 동암 신기 죽산 영해 용동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진 동암리는 원래 무안군 현화면의 지역으로 큰 바위가 동쪽에 있다 하여 동암이라 부른다. 하지만 또 다른 "東巖"의 지명 유래는 1874년, 사도세자 사당을 세우고 사당 이름을 마을 동쪽 바위산 위에 있다 하여 "東巖廟"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호구총수에는 전자리 하전자리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전자리는 민촌을 말하는데 지역의 주민들은 전자리라 부르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1912년의 자료에 비로소 무안군 현화면 동암리로 나온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죽산리 신기동 영해촌 석교촌 서촌을 합하여 망운면 동암리 묶여졌다. 이후 1983년 망운면과 운남면으로 분리되면서 운남면 동암리가 되었다.
용동은 동암5리에 속한 마을로 10여년 전에 원동암에서 분리되었다. 궁게들을 중심으로 탑동 색교 어장골 용동 마을로 이루어졌다. 탑동은 용동 마을 안 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에 절이 있었는데 그곳에 탑이 있어 마을 이름도 탑골이라 불려졌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오래 전 동암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목포에다 이 탑을 팔았다고 한다. 탑은 지금도 목포에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절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도 많은 기와조각들이 나온다고 한다.
색교 또는 새터는 새로 조성된 마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장골은 용동잔등이라 부르는 지역 주변에 있는데 예전에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던 곳이다. 특히 용등 잔등은 쪽두리 잔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예전에 서해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저녁 늦게 마을로 들어오는 배들에게는 등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용동은 용골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지형이 용을 닮았고 마을에 물이 잘 나오는 샘이 있어 마치 용이 머물고 있는 마을처럼 여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원동암 마을과 같은 김해김씨 김준희다. 얼마 전에 원동암 마을과 분리되었고 지금도 마을에 김해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입향조인 김준희 공은 선조 대 사람으로 영암에서 살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영산강변에 왜구의 출몰이 잦았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왜구를 토벌한다 하여 관군의 출입이 빈번해지자 이를 피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온 곳이 이 마을이다.
마을 앞 청계만은 얼마 전까지 황금어장이었다. 석화를 비롯하여 낙지 오징어 숭어 등이 이른바 고기반 물반으로 잡혀 주민들에게 많은 소득을 안겨줬다. 또한 마을 앞에 송림이 우거진 1200여평의 동산이 있어 바닷고기들이 산란하고 활동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고기 잡는 철이 되면 이런 수산물을 상대로 파시가 형성되었고 많은 사람의 왕래가 있었다.
하지만 톱머리 간척이 이루어지면서 물길이 바뀌고 이어 농장과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바닷물이 오염 되었다. 해서 그렇게 많이 잡히던 고기와 그들의 서식지였던 뻘밭은 모래와 자갈로 황폐화되어 버렸다. 예전의 황금어장의 소멸은 물론 덤으로 물이 썩어가는 냄새까지 주민들은 맡아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청계만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대책위를 구성해서 어민들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전자리란 파시가 열렸던 자리를 말해
예전에는 이 마을에서 청계만 건너 도대 마을까지 이어지는 나루가 있었다. 이 나루로 인하여 波市가 이루어졌는데 이 파시로 인하여 전자리란 지명이 생기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왜냐하면 "전자리"란 田(물때 따라 물가 교통 요지에 열리던 임시 저자)이 섰던 자리를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해제 쪽의 어촌에서는 파시가 열렸던 전막금이란 지명이 많이 있다. 또한 이 나루는 얼마 전까지 하루에 한 번씩 목포와 연결해 주는 여객선 ‘진경호’가 다니는 포구이기도 하였다.
마을 앞에 있는 궁게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서 간척이 되어 형성된 농지이다. 이 들은 운남에서 제일 먼저 침수되는 수해 지구로 일로의 영화농장과 망운의 구렛들과 함께 3대 수해지구이기도 하였다. 해서 조금만 비가 와도 주민들이 불안해 했는데 현재는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궁게는 ‘궁 - 구멍’을 파고 사는 "게"이니, "궁게들"이란 게 구멍에 게의 종류인 "서른기, 농기, 갈기"가 들판 곡식처럼 널려 있는 갯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뻘이 일제강점기 때 간척이 이루어지고 용동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주민들에게 옥답으로 바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운남면에서 제일 먼저 경지정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운남과 망운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데 운남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피해를 많이 입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피해가 적었다. 주민들이 서로 보호해 주고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2명인데 경찰 출신과 면사무소 직원이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주민 중 3명이나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이 마을은 농사를 짓는데 선도 농가였다. 주민들 스스로 배우고 익혀서 효과적인 농산물을 생산해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예전에는 고추와 담배 농사가 주를 이루었으나 현재는 양파와 마늘이 주된 농사이나 면적당 수확량이 다른 마을에 비해서 높기도 하다. 또한 다양한 계층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어 국회의원 언론인 등 인물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2005년 문화유적 자료조사에서 이 마을 저온창고 뒤편에 있는 구릉에서 유물들을 발굴하였다. 유물은 회흑색연질토기에서 구연부에 파상문이 시문되어 있는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동암 마을과의 경계에 있는 새알등, 죽산 마을과 경계에 있는 똑똑골, 신기마을과 경계에 있는 시망등이 있으며 그 외에 서당너머 동산길 초분골 정기밑에 해지기 잔등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마을 입구에 동암교회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