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춘대(賞春臺)를 아십니까?
모악산에서 방장산까지 4계절관광지 개발을 위한 정읍알프스프로젝트의 핵심 문화콘텐츠는 칠보에 있다. 그래서 칠보는 정읍의 보배를 넘어 전북의 보배 그리고 대한민국의 보배다.
내장산의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 돈 안 쓰고 그냥 가는 관광객을 붙잡기 위해서 먹거리가 필요한데 먹거리로 산외 한우 및 콩이 그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내장산도 식후경이요, 그래서 산외에서 한우고기 배터져라 먹었다손 치더라도 문화가 없으면 허전하다.
그런데 내장산과 산외의 사이에 칠보가 있다. 엄청난 문화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는 칠보다. 전북의 면단위 행정구역에서 이 정도로 많은 자료를 보유한 면은 없을 것이다.
한국 유교문화의 비조 최치원이 이곳 태수를 지냈고, 무성서원에서는 그를 향사하고 있다.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이곳을 태산이라고 했다.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을 쓴 불우헌 정극인의 묘소가 여기에 있고, 정극인 또한 무성서원에서 향사하고 있다.
물테마공원의 문제점
산외면 김동수가옥에 근무하는 관광해설사가 말했다. “4계절관광을 위한 정읍시청의 대책은 전시성 콘크리트문화다. ‘산외콩테마공원’, ‘칠보물테마공원’, ‘내장산물테마공원’ 같은 콘크리트 시설은 시설비용 및 유지비용이 많이 들어갈 뿐 아니라 특색이 없다. 태산문화콘텐츠만 살려도 엄청난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다 .”
그렇다. 물테마공원은 정읍의 문화를 담지 않은 전국적으로 많이 개발되는 테마다. 전국 기초단치단체 마다 거의 똑같은 사업을 하고 있다. 관광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전국 유일하거나 전국 최고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춘대(賞春臺)의 건설
상춘곡을 테마로 한 공원을 만들자. 그 이름은 상춘대로 한다. 칠보 관광은 상춘대 하나면 된다.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속세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가? 안빈낙도하여보세.”
“풍류, 지락, 수간모옥, 벽계수, 송죽, 풍월주인, 도화행화, 녹양방초, 세우, 춘기, 교태, 물아일체, 소요음영, 한중진미, 답청, 욕기, 채산, 조수, 화풍, 녹수, 청향, 낙홍, 미음완보, 명사, 청류, 무릉, 송간세로, 두견화, 금수, 청풍명월, 백년행락”을 즐길 수 있는 상춘대를 만들자.
그리고 상춘대가 중심이 되어 무성서원 등 문화콘텐츠를씨줄날줄로 엮는다. 상춘대! 듣기만 해도 설레는 말이다.
상춘곡(賞春曲)
홍진(紅塵)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生涯) 엇더한고. 녯 사람 풍류(風流)를 미칠가 못 미칠까. 천지간(天地間) 남자(男子) 몸이 날 만한 이 하건마는, 산림(山林)에 뭇쳐 이셔 지락(至樂)을 마랄 것가. 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碧溪水) 앏픠 두고 송죽(松竹) 울울리(鬱鬱裏)예 풍월주인(風月主人)되여셔라.
엊그제 겨을 지나 새 봄이 도라오니 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리(夕陽裏)예 퓌여 잇고, 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중(細雨中)에 프르도다. 칼로 말아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조화신공(造化神功)이 물물(物物)마다 헌사롭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春氣)를 못내 계워 소리마다 교태(嬌態)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어니, 흥(興)이에 다를소냐. 시비(柴扉)예 거러 보고, 정자(亭子)애 안자 보니, 소요음영(逍遙吟詠)하야, 산일(山日)이 적적(寂寂)한데, 한중진미(閑中眞味)를 알 니 업시 호재로다.
이바 니웃드라, 산수(山水) 구경 가쟈스라. 답청(踏靑)으란 오늘 하고, 욕기(浴沂)란 내일하새. 아침에 채산(採山)하고, 나조해 조수(釣水) 하새. 갓 괴여 닉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화풍(和風)이 건듯 부러 녹수(綠水)를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새 진다.
준중(樽中)이 뷔엿거든 날다려 알외여라. 소동(小童) 아해다려 주가(酒家)에 술을 믈어, 얼운은 막대 집고, 아해는 술을 메고 미음완보(微吟緩步)하여 시냇가의 호자 안자, 명사(明沙) 조한 믈에 잔 시어 부어 들고, 청류(淸流)를 굽어 보니,
떠오나니 도화(桃花)ㅣ로다. 무릉(武陵)이 갓갑도다, 져 메이 긘 거인고. 송간(松間) 세로(細路)에 두견화를 부치 들고, 봉두(峰頭)에 급피 올나 구름 소긔 안자 보니, 천촌만락(千村萬落)이 곳곳이 버려 잇네. 연하일휘(煙霞日輝)는 금수(錦繡)를 재폇는 듯, 엊그제 검은 들이 봄빗도 유여할샤.
공명(功名)도 날 끠우고, 부귀(富貴)도 날 끠우니, 청풍명월(淸風明月) 외(外)예 엇던 벗이 잇사올고. 단표누항(簞瓢陋巷)에 흣튼 혜음 아니하네. 아모타, 백년행락(百年行樂)이 이만한들 엇지하리.
칠보의 문화재 및 관광지
♦김회련 공신녹권 보물 제437호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886 조선 태조4년(홍무28년, 1395) 개국 원종공신 김회련에게 내린 공신녹권이다. 크기는 폭이 30.3cm, 길이 925cm의 두루마리이며, 총 307행, 4,272자에 문체는 이두문체로 쓰여져 있다. 여기에 수록된 공신의 수가 66명이다.
♦이태조 4,6년왕지 보물 제438호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886 개국원종공신 김회련에게 내린 두 개의 직첩왕지로 하나는 조선 태조4년(1395) 2월초 2일에 공주목사(公州牧使) 겸 관내권농방어사(管內勸農防禦使)를 제수한 것이며, 또 하나는 태조6년(1397) 정월 27일 해주목사(海州牧使) 겸 권농병마단련사염장관(勸農兵馬團練使鹽場官)을 제수한 첩지이다.
♦태인 고현동향약 보물 제1181호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930-2 미풍양속(美風良俗)의 근본으로 주민자치(住民自治) 사회규범(社會規範)이었던 우리나라 최초(最初)이면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태인 고현동 향약은 현재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서 행한 향약을 말한다.
♦무성서원 사적 제 166 호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이 건물은 신라말(新羅末)의 유현(儒賢)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과 조선(朝鮮) 중종(中宗)때 태인현감(泰仁縣監)이었던 신 잠(申 潛)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태산서원(泰山書院)이라 하던 것을 숙종(肅宗) 22년(1696)에 사액(賜額)됨으로써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하게 되었다.
♦무성리 석불입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 불상(佛像)은 요사(療舍. 절에 있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집)를 겸한 법당(法堂)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불상의 하부(下部)에는 불단(佛壇)이 만들어져 있다. 원래는 서 있는 부처(立像)인데, 허리 아래는 땅에 묻혀 있다. 전체적으로는 장대(壯大)하면서도 중후(重厚)한 양식(樣式)으로 약간 앞으로 기울어진 하나의 자연석(自然石)을 이용하여 뒷면(後面)은 다듬지 않고, 앞면만 조각(彫刻)하였다. 머리부분은 소발(素髮. 백발)로서 두견을 쓴 것처럼 표현되었고, 장타원형에 가까운 상호(相好. 사람의 용모와 형상)에 비하여 코는 크지 않고 입은 윗부분이 볼통하게 표현되어 있다.
♦무성리 삼층석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434-1 한 변(邊)의 길이가 2.6m인 사방(四方)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0.69m의 상대중석(上臺中石현)을 세우고, 그 위에 일단(一段) 괴임이 있는 상대갑석(上臺甲石)을 얹고 삼층탑신(三層塔身)과 옥석(屋石)을 짰다. 제일탑신(塔身)은 한변(一邊)이 1.09m이고, 높이 1.14m로 가장 높고 2,3층(層)탑신(塔身)은 짧아졌다. 옥석(屋石)에는 삼단(三段)의 층급(層級 )받침을 새기고 있다. 제일 높은 곳(頂上)에는 노반석(露盤石)만 남아 있다. 지금의 높이는 4.85m이다.
♦남근석(男根石)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3호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1095 흰 바위(白岩)마을 입구 서쪽에 자리 잡은 이 남근석(男根石)은 백암(白岩마을) 열두 당산(十二 堂山)의 하나이며 전에 남근석당산(男根石堂山) 앞에는 여근목(女根木)이 있었다고 한다. 화강석제(花崗石製)의 네모난 기단(基壇) 1m 가량의 위에 원통형(圓筒形)의 남근형태(男根形態)를 조각(彫刻)한 이 신앙물(信仰物)은 300년 전 이 마을의 자선사업가(慈善事業가)인 모은(慕隱: 또는 蒼陰) 박잉걸(朴仍傑: 1676~ )에 의하여 부락의 번영(繁榮)과 도적(盜賊)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송정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산 4 조선조(朝鮮朝)의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사건(廢母事件)에 항소(抗訴)한 세속 7광(七狂) 10현(賢)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곳에 모여 음풍영월(吟風詠月)하며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을 버리고 세월을 보내던 곳이라 한다. 이들 후손들이 영당(影堂)을 세우고 7광도(七狂圖)와 10현도(十賢圖)를 봉안하고 조상의 높은 기상과 우국(憂國)의 뜻을 기리며 춘.추(春秋) 중정(中丁)에 제사(祭祀)를 지낸다.
♦남천사 문화재자료 제154호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849 남천사는 조선시대 유학자인 김후진(金後進),안의(安義),손홍록(孫弘祿),김만정(金萬挺) 등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안의와 손홍록은 임진왜란때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과 경기전의 태조 영정을 내장산으로 옮겨 조선왕조 역사기록 단절을 막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김후진은 향리에서 학문을 장려하였고 임진왜란에 장성남문(長城南門)에서 창의하여 공을 세우고 군자감 직장(軍資監 直長)의 벼슬을 받았다. 남천사는 이들의 뜻을 기리고자 숙종 2년(1676년)에 처음 세웠으나 고종5년(1868년) 정부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렸다. 그 후 1926년에 다시 세우고 김두현(金斗鉉)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무성서원 사적 제166호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이 건물은 신라말(新羅末)의 유현(儒賢)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과 조선(朝鮮) 중종(中宗)때 태인현감(泰仁縣監)이었던 신 잠(申 潛)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태산서원(泰山書院)이라 하던 것을 숙종(肅宗) 22년(1696)에 사액(賜額)됨으로써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하게 되었다. 사우(祠宇)에는 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하여 신 잠(申 潛),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 김 관(金 灌) 등의 향현(鄕賢)을 배향(配享)하였다. 현존 건물로는 현가루(絃歌樓)를 비롯하여 강당(講堂), 동서재(東西齎), 사우(祠宇), 비각(碑閣) 등이 있다.
♦용계서원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688 숙종 27년(肅宗 27年소:1701年성)에 향현사(鄕賢祠)의 서원으로 창건하여 관곡 최서림(寬谷 崔瑞琳)을 향사(享祀)하고 1750년(英祖 26年) 동곡 김정호(東谷 金挺昊) 백계 은정화(柏溪 殷鼎和)를 또 1757년(英祖 33年)에는 오천 한백유(鰲川 韓佰愈) 안식와 김습(安息窩 金習) 유종흥(柳宗興)을 추배(追配)하였다. 1868년(高宗 5年) 정부(政府)의 영(令)에 의하여 헐렸는데 1910년에 다시 세워졌다.
♦필양사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1910년 일본 황제(日皇)의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하고 그것 때문에 군산 감옥(群山監獄)에서 순절한 춘우정 김영상(春雨亭 金永相)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기 위하여 1945년 김환풍(金煥豊) 안항섭(安恒燮) 등이 유림(儒林)의 발의로 창건하여 향사(享祠)하였다.
♦도봉사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886 1945년에 건하여 개국원종공신 김회련(開國原從功臣 金懷鍊)을 향사(享祠)하였다. 도강 김씨(道康 金氏)의 종중(宗中)에서 세운 가묘(家廟)이다.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개국(開國)을 도와 1395년(태조(太祖) 4年) 개국 원종 일등공신의 록(錄)을 받았다. 외직(外職)으로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지내고 공주목사로 옮겨 재임시 향교(鄕校)를 세우고 학적(學田)을 마련하였으며 또 해주 목사로 재임중 객사(客舍)와 동헌(東軒)을 세우고 내직(內職)으로 한성판윤(漢城판尹)이 되어 도성(都城)을 축조 하는 등 공(功)이 많았다.
♦시산사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산 4 1906년(高宗 光武 10年) 무성 창의(武城 倡義)의 맹주(盟主)인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을 추모하여 1907년 태산사(台山祠 : 七寶國民學校)를 세웠는데 왜정(倭政)의 탄압으로 헐리우고 1975년 다시 시산사(詩山祠)를 세우고 최면암과 국헌, 김기술(菊軒 金箕述) 화개헌, 김직술(和介軒 金直述)을 추배(追配)하였다.
♦송산사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산 4 1788년(正祖 12年) 창건하여 김대립(金大立) 김응빈(金應嬪) 김정(金鼎) 김감(金堪) 김금(金汲) 송치중(宋致中)을 향사(享祠)하였는데 1868년(高宗 2年 戊辰)에 정부의 영에 의하여 헐렸다가 1954년 송산(松山, 詩山里)에서 성황산(城隍山) 동편에 중건(重建)하였다.
♦태산사(무성서원內)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은 신라(新羅)시대 대문호(大文豪말)이며 정치가(政治家)였다. 이는 신라 정강왕(定康王) 1년에 태산군수(泰山郡守, 현 泰仁)로 와서 뛰어나서 군민의 칭송을 받다가 합천(陜川)군수로 떠나게 되니 그를 흠모하는 나머지 선생의 생전(生前)에 월연대(月延台 : 현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의 서쪽 능선)에 생사당(生祠堂 : 생존하고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세워 태산사(泰山祠)라 부른 것이 시초였다.
♦석탄사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 사자산 용태봉(龍台峰)인 석탄(石灘)의 동봉(東峰) 암벽(岩壁)에 있으니 창건년대는 잘 알 수 없으나 오래된 절로 보인다. 신라 27대 선덕여왕(新羅 27代 善德女王)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도 한다. 선조(宣祖)때 임진(壬辰)과 정유(丁酉) 난(亂)때 병화로 타 버렸는데 영조(英祖: 1750年경)때 모은 박잉걸(慕隱 朴仍傑: 七寶面 白岩里 출신)이 다시 지었고, 1894년(高宗 31年) 갑오동학혁명에 소실된 것을 가산 김수곤(迦山 金水坤: 泰仁人 1873~1950)이 중건했었는데 1950년 6.25사변에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1973년 조병준(趙秉晙: 반곡리 석탄 출생)이 어머니 송씨 부인(宋氏夫人: 1894~1955)의 뜻을 받아 중건에 뜻을 두고 추진하다가 1986년 불전(佛殿: 12.5평)과 종각(鐘閣: 2평)을 세웠으며 종은 무게가 일천근이나 되고 시주(施主) 김환재(金煥在)가 만들었다.
♦무성리 산성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무성리 성황산(城隍山)에 있는 토성지(土城址)이다.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고적조(古蹟條)에 있는 「고태산(古泰山) 현동(縣東) 20리」의기록은 성황산의 성지(城址)를 가리킨 말이다. 태산(泰山)고을의 역년(曆年)이 삼국(三國)시대에서 고려(高麗)에 까지 무려 1천여 년에 이르니 성황산은 그 동안의 한때 고을 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행단산성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향단 둘레가 482.5m이다. 칠보발전소(七寶發電所) 동방 향단(杏壇: 405m)의 봉상(峰上)을 감은 「테머리」식 산성이다. 1955년 평사리(平沙里) 주민의 제보로 현지를 측량 조사하였다. “ㄴ”자형 능선을 감았는데 성내(城內)의 동서폭은 150m 남북의 길이 95m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성지(城址)이다.
♦백암리 당산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1069-1 원 백암(白岩) 마을 어귀의 남근석(男根石)을 지나서 개울 양측에 장승을 새긴 2기(基)의 입석 당산(立石 堂山)이다. 이조 영조(英祖)때 자선사업(慈善事業)으로 유명한 백암리 거주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이 세웠다는 백암리 당산의 하나이다. 백암 마을 주위에는 남근석을 포함해서 노거수(老巨樹), 암석(岩石), 입석(立石)등으로 된 24개의 당산이 있다. 마을 어구의 개울 왼쪽 입석당산을 남장군석(男將軍石) 오른쪽을 여장군석(女將軍石)이라 한다.
♦시산리 고비군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시산리 삼리(三里)마을 고현동각(古縣洞閣) 앞에 있으니 옛날 고현내 면사무소(古縣內 面事務所)가 있었던 곳이다.
♦의사 김천술 순정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칠보면 시산리(七寶面 詩山里) 향단(香壇)마을 안에 있으니 희당 김천술(希堂 金天述) (1881∼1910)이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나라가 망하자 비분 강개하여 우물에 몸을 던저 순절(殉節)한 곳이다. 1912년(壬辰) 8월 우물가에 비를 세웠는데 그 비는 35㎝ 높이의 비대(碑台) 위에 세워져 있다.
♦최치원 영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지금 무성서원(武城書院)에 있다. 최치원은 신라말엽 태산(泰山) 군수로 이 지방에 도임하였다가 협천(陜川)군수로 떠나자 태산에서는 그의 덕과 업적을 기려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태산사(泰山祠)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숙종 22년 무성서원(武城書院)의 사액(賜額)이 내리자 이에 병설되었다. 1784(正祖 8)년에 하동(河東)의 쌍계서(雙溪서)에서 최치원 영상을 이곳으로 옮겨 안치했다.
♦영모당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송정 10현도(松亭 十賢圖)를 모신 곳이다. 1898년(松亭 十賢圖)에 창건하였다. 일명 송정영당(松亭影堂)이다. 광해 난정(光海亂政)에 항소(抗疏)하고 벼슬을 버리고 나와 이곳에 모여 나라를 염려하는 뜻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이를 가리켜 7광10현(七狂十賢)이라 한다.
♦불우헌 정극인 묘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은석마을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이 이 지방에 끼친바는 아주 많다. 은석(銀石)마을에 그 무덤이 있으니, 출생(出生)은 이곳이 아니지만, 정읍에 그는 항상(恒常) 있는 셈이다.
♦영천군 묘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왕임동 영천군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다섯째 아들로 세종 4년에 탄생하였다. 이름은 정(定)이고 자(字)는 안지(安之)이다. 처음 묘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상초리(현: 서초구 서초동)에 있었는데 서울시의 확장으로 파묘(破墓)되어 1969년 음2월 1일에 이곳 백암리 왕림동(王臨洞)으로 이장(移葬)된 것이다.
♦연시각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886 1872년(高宗 9年) 김회련(金懷鍊)이 "충민(忠敏)" 시호(諡號)가 내려 교칙(敎勅)을 맞이하던 집이니, 김회련(金懷練) 공신록권(功臣錄券)과 김회련에게 내린 이태조 4년(李太祖 4年) 및 6년왕지(六年王旨)를 보존하고 있다.
♦도강김씨 훈도공파 종중 고문서 유형문화재 제212호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781번지 이 고문서는 교지(敎旨) 4점, 교첩(敎牒) 3점, 그리고 분재기(分財記) 1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지와 교첩을 받은 이들은 태인현 고현내(현 정읍시 칠보면) 일대에 세거한 도강 김씨가의 조상으로 조선개국원종공신 충민공 김회련의 후손 5대에 걸친 문중 문서로 시대적으로 보아 510~390년전의 문서이다. 이 문건들은 태산선비문화권역에 보존 전래되어 이곳이 선비문화의 중심지로 자리하는데 정신적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태산선비문화(향토문화)사료관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310번지 칠보는 산자수명하며 아름다운 풍경은 고현팔경과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을 낳았고 법도 있는 이 고장 예풍은 고현향약을 탄생시켰다. 고현향약과 무성서원을 비롯한 칠보면과 관련된 유물, 유적을 한데 모아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31종의 자료를 전시한 곳이 향토문화사료관이다.
♦칠보 물 테마 유원지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1016-1 물테마전시관(974.82㎡/2층), 비지터센터(114.35㎡),수영장(5,277㎡), 야생화관찰원(4,192㎡), 수생식물원(2,013㎡), 인공폭포(209㎡), 야외전시장(937㎡), 분수대(115㎡), 유상대(792㎡),휴게소(252.17㎡/2층)
♦섬진강(칠보)수력발전소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210 정읍, 임실에 걸쳐있는 옥정호는 섬진강 상류로부터 82.4km 지점인 전북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에 중력식 콘크리트댐을 축조하고, 이곳으로부터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 위치한 섬진강수력발전소로 연결되는 약 6.2km 압력수로를 이용, 도수하여 발전을 한 후 물을 동진강으로 방류함으로써 약 4만 정보의 호남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전라북도 서남지역 광역상수도 수원을 공급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이다.
♦수청저수지 정읍시 칠보면 수청리 1986년도에 저수지가 준공되어 저수지 바닥이 깨끗하고 상류에는 산림으로 조성되어 오염원이 전혀없는 깨끗한 공기, 물이 항상 풍부하게 있어서 야영 및 오염 없는 민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
♦칠보산 정읍시 칠보면 정읍시의 동쪽에 위치하여 칠보, 북면과 접계하였다. 노령산맥의 주맥으로 이곳에서 한가닥이 지맥이 동쪽으로 뻗어 성황산을 이루었다. 칠보산은 동, 북, 서의 계곡이 수려하여 칠보림학(七寶林壑)으로 유명하다. 칠보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가 연수봉인데 여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를 지칭한다. 피난지골은 남한골의 좌측 골짜기로 안개가 많아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들이 관군 에게 쫓겨 이곳으로 피신했다고 하나 근거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
첫댓글 정말 꼭 해야 될 ... 태산 선비문화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짚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