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03월03일, 사순절(3) 호산나교회, 행27:1~2, 진정한 친구는 구원자 예수님!
세상에는 많은 친구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친한 친구도 있고 친하지 않은 친구도 있습니다. 그걸 진짜 가짜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짜 우리의 친구라고 여기시면 성공합니다.
1절 "우리가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갈 일이 작정되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우리라는 공동체는 본서의 저자인 누가 가 자신을 말하고 있으며, 바울과 함께 동행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행16:10-17). 누가는 의사로써 바울의 2차전도 여행 당시 드로아에서 바울 전도단에 합류한 인물입니다. 이후 누가는 빌립보의 사역자로 남았다가 훗날 바울의 3차전도 여행 당시 다시 빌립보에서 바울과 합류한 뒤(행21:6), 줄곧 바울과 동행하면서 바울의 복음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인물입니다.
(딤후4:11),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누가는 바울이 죽음을 앞둔 시점까지도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에게 좋은 동반자 친구들이 있었던 것처럼, 목회자의 좋은 친구는 호산나교회, 성도 여러분들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친구는 우리 예수님이심을 믿고 의지하시길 축복합니다.
누가는 언제나 변함없는 바울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바울이 가장 어려운 때에 곁에서 돕던 친구였습니다.(바울이 간질병으로 고생할 때 곁에서) 많은 친구들이 바울 주변에 있었지만 바울이 곤경에 처하고 죽음을 앞두자 많은 사역자들이 바울의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사실 바울에게는 그때가 가장 위로가 필요하고 함께 할 친구가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바울을 버리고 자기 갈 길로 가버린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대다 수 친구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대개 절친하다는 친구들이 몇 명씩은 있습니다. 그들은 평소에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생명도 내어놓을 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중 대다 수가 친구가 어려움에 처하면 자기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 친구를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어찌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겠지요, 소위 바울의 동역자요, 친구라는 사람들도 다 그렇게 위기에 처한 바울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누가와 '아리스다고'만은 끝까지 바울 곁에 남아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누가와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진짜 친구였습니다. 오늘 이 땅에 이러한 진짜 친구들이 많지 않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우리도 다른 이들의 진짜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한 잘못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망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우리에게는 우리와 끝까지 동행하는 진짜 친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친구는 다 우리를 떠난다 해도 이 친구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늘 함께 동행하며 우리가 어떠한 상항에 처해 있든지, 어떤 곤경에 처해 있든지 늘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를 돕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친구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요15:15),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또(마28:20), 주님은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주님은 우리의 친구로서 우리와 오늘도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통해 지금도 세상 끝날 때까지 굳세어라,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돕고 또 위로해 주고 계시는 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우리의 진정한 친구로 인정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늘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 곁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주님의 참 친구가 되어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우리의 생명도 아끼지 아니하며 주께서 간절히 원하는 바 복음 전파도 힘껏 이루어 드려야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많이많이 높여드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은 영원한 우리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1, 나쁜 친구는 의인 인척하지만 참된 친구는 친구의 죄를 뒤집어쓰려 합니다.
좋은 친구는 친구입장에서 이야기하고, 나쁜 친구는 자신입장에서 이야기합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도 좋은 친구는 친구의 유익을 위해 말하고, 나쁜 친구는 자신의 좋은 점만 말하고 친구의 허물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을 과시합니다.
다시 1절을 보면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과 다른 죄수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죄수들과 같이 동석해서 로마로 압송되어 가지만 미결수의 신분이었기에 죄수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이걸, 무죄추정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란, 형사소송의 피고인은 사법부에서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고한 사람으로 추정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서 말하는 '추정이란 단순히 '추측' 예측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헌법제27조제4항에 명시) 만약 친구 집에 형사들이 왔다 하면 동네 사람들이 물어요, 왜? 왔지, 좋은 친구는 좋게 말하고 나쁜 친구는 나쁘게 말합니다.
하지만 누가는 친구 바울을 향해 다른 죄수들처럼 죄가 있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스스로 죄수가 된 몸이다를 주장합니다. 요즘 방송을 보면 세상사 참 아이러니합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어떤 사람들이, 죄 없는 사람 죄인으로 만들고, 정말로 죄지은 사람은 죄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권력의 힘이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주님의 심판대에 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죄가 없습니다. 주님께로 부터 죄 씻음을 받은 의인입니다.
(단3:13-23),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솨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그들은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정한 국법을 어기고 스스로 죄인이 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때 세친구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풀무 불에 우리 주님께서 함께 동행하여 주셨습니다.(단3:23-24)
또 다니엘은 어떠하였습니까? (단9:1-19), 그는 예레미야의 글을 읽다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의 날이 가까웠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앉아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다니엘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된 것입니다. 어디 이들 뿐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 아무런 죄도 허물도 없으신 분이셨지만 친구 같은 우리의 죄를 씻기시기 위하여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잖아요,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죄인의 판결을 받으시고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들이나 받는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그 형벌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친구삼아주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친구인 우리들의 죄와 사망을 뒤집어쓰시고 건져내시기 위해서 그렇게 스스로 죄인 되셨던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 밖에도 사도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의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친구와 이웃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스스로 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정한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그들에게 천상의 하나님의 영광을 허락해 주셨음을 믿으시길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오히려 정말 죄인의 자리에 앉아야 하는 진짜 죄인들은 이들처럼 스스로 죄인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의인이 되려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오늘의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마23:27),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마 23:23), '독사의 자식'이라고까지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지적하시는 예수님을 죽여 없애 버릴 궁리만 하였습니다. 그러했기에 언제나 그들은 죄인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못된 인간들에게 우리 주님 부활하셔서 너희들이 죽인 나 예수다 하나님이시다라고 호통 좀 쳐주시지 왜 그랬어, 라고 꾸짖어주었으면 우리의 속도 시원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셨던 우리의 진정한 친구이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9:41),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우리는 과연 스스로 의인 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혹시 누가 여러분을 향하여 죄인이라고 하면 도저히 참지 못하고 분노하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할 순간에도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려고 발버둥치는, 그런 사람은 혹시 아닙니까? 여러분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직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부탁합니다. 아니, 죄가 없을지라도 예수님처럼,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저와 여러분을 진정한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 좋은 친구는 친구를 위해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주님 희생 위에 세워진 교회
2절을 보면 바울과 그의 일행들이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올라 행선할 때에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아리스다고'가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사도행전19:29절에서 예수를 전파하였다는 이유로 에베소의 아데미 우상숭배자들에게 붙들려 곤욕을 치렀던 사람입니다
(행20:4). 그 후 아리스다고는 바울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바울과 동행하며 바울의 사역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아리스다고의 도움이 사도바울의 사역에 얼마나 큰 힘이 되고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아리스다고는 사도바울 사역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으며 그에 대하여 (골4:10; 빌레몬서1:23-24), 사도바울이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사역이 결코 그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반영합니다.
바울의 복음 사역과 이 놀라운 업적은 아리스다고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을 희생해 가며 바울을 도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이 시대 및 오늘날에도 목사들이 이처럼 이름 없는 성도들의 말 없는 희생을 힘입어 수많은 하나님의 계획들이 성도들과 함께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몇몇 위대한 사람의 이름만을 기록해 놓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오직 그들을 통해서만 유지되어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엘리야 시대 때 (왕상19:18),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 천 인을 남겨 두셨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시대마다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수고할 이름 없는 성도들을 남겨 두시는 줄 믿으시길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바로 성도 여러분들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이름난 몇몇 목사들의 수고와 능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주는 이도 없지만, 상을 주는 이도 없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말없이 수고하고 봉사하는 성도님들에 의해서 오늘의 이 호산나교회 역시 주님께서 기뻐하는 복음의 사역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름 없는 성도란 과연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바로 성도 여러분들이 이 시대, 이 민족의 교회를 세우고 부흥시켜 가야 할 이름 없는 하나님의 일꾼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절대로 사람들이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 상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이해해주고 사랑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간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가와 상관없이 항상 충성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하며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