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재를 기억하며>
누구나 삶 속에는 즐거움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도 있고 고통이 있다.
또한 우리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만나게 되면 이를 쉽게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절망이 따른다.
그러나, 막걸리 한잔에 행복해하고, 이세상을 소풍 가듯 걷다가 떠난 시인도 있다.
문창재는 아름다운 세상을 소풍 가듯, 껑충한 큰 키로 껑충껑충 걸어서 놀다간 사람이다.
한라산 100회 등반 기념 트로피를 해줄 때만해도 그리 바쁜 걸음으로 멀어져 갈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일본 북 알프스라고 불리는 <호다다다께 /3200m봉>- 정상에 있는 마지막 산장에서 눈비에 젖어 탈수 상태에 빠진 나에게 따듯한 茶를 주전자에 끓여서 주던 추억,
동기생들과 끝도 없이 걷고 또 걷던 홍콩 <드래곤스 트레일>에서의 고생,
후지산 마지막 산장인 <팔합목>에서 얼굴에 모래가 박히듯 휘몰아친 세찬 비를 맞던 기억(한국일보와 고대 합동 팀이었다).
백두산 등반시 여권을 제시했음에도 국내ID NO.를 요구하여 혈압을 올리던 중국에서의 웃픈
사건은 <내가 북경 올림픽에 가지 않는 이유>라는 칼럼을 쓰게 하기도 했다.
그때가 아마 북경 올림픽 전이었던 것 같다.
논객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그의 발자취는 사회적인 눈높이에서 볼 때, 어느정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적절한 지위와 명예도 덤으로 주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 (형님과 처제들은 그의 왕펜이다),아내와 자식들의 <존경>을 받은
그의 넉넉한 마음------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화목을 이끌어낸 그의 자취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성공적인 삶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가 떠났으니 이제는 옛 이야기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뭉툭하고 못생긴 엄지와 한 일자 손금이 같다는 것 외에 나와는 닮은 점이 없는 그는 투병으로
인한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마라토너처럼 긴 숨을 쉬며, 묵묵히 글쟁이답게 유고작이 되어버린
< 징용조선인은 전쟁소모품이었다 >을 발로 뛰며 써내려갔다.
사하린 동포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며 같이 가자던 그.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고통이 있고, 그러한 것 때문에 죽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내가 갖지 못한 인내와 포용의 향기를 느낀다.
지금은 세상의 저 끝에서 잠들어 있는 그 흑석동 성당에서 견진 세례를 받던 날 그의 상기된
모습은 기쁨을 뛰어넘어 거룩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날 예식이 끝나고 친구 몇 명이 모여서 함께 점심을 했다.
카톨릭 대부인 나를 제끼고 식사비용을 굳이 낼 때, 그리고 알 듯 모를 듯 승급과 낙제 이야기를
할 때 그는 무언가 예감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한달 후에 책상에 앉아서 잠들 듯 떠났다.
나는 잠을 자는 동안에 매일 밤 무수한 꿈과 함께 잠을 잔다.
대개는 기억에 없는 것들이지만, 특이하게도 떠난 이들을 자주자주 만난다.
어떤 꿈에서는 서로 모르는 이 친구 저 친구들이 같이 놀기도 한다.
문창재도 그간 서너번을 소풍 오듯이 다녀갔고, 목청 좋은 목소리로 <향수>라든가 <최진사댁 셋째 딸>들을 불러 제끼기도 했다.
그는 가랑잎처럼 떨어졌지만 아랫목 덥히듯 아직도 우리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고 있다.
고영길
첫댓글
'내가 갖지 못한 인내와 포용'의 사내 - 그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