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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개월 기준으로 1주일에 하루씩 지방에 특강을 나가곤 한다. 동료 강사들은 힘들어 죽겠다는 둥, 이렇게까지 해서 벌어야 하는 둥 궁시렁거리지만, 내 생각은 전혀 반대이다.
일부러 경비 들여 여행도 다니는데, 깍듯이 대우해 주고 차비까지 얹어 주는데, 이를 마다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학교 캠퍼스에는 복닥거리는 고시학원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싱그러운 분위기가 분명히 있지 않던가?
더불어 멀리 떨어져 있어 적적했던 친구나 제자들을 만나 보기도 하고, 앞, 뒤로 시간표를 조절하여 몇 번인가는 가족을 동반하여 하루, 이틀씩 그 곳 여행을 즐기고 오기도 하곤 한다. 그 지역에서 취한 소득의 일부는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해야 할 게 아니냐는 구실을 만들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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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에는 진주에 있는 경상대에 특강을 내려갔다. 며칠 전에는 새벽 6시 고속버스로 타고 가서 내리 6시간의 수업을 하였다.
오랫만에 연락된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 3대째 80여 년간 이어왔다는 ‘천황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1960년대 식탁과 30년은 족히 되었을 양은 냄비를 보며 정감을 느꼈다. 변소(?)로 연결되는 마당을 나서니 한 쪽에 50, 60개는 족히 될 만한 크고 작은 장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문득 박경리 작가가 쓴 대하소설 '토지'에서 나오는 하동 평사리 최참판 댁을 기억에 떠올렸다.
아! ‘전통’이란 건 이런 것이구나. 어릴 때 한자는 기본적으로 배우고, 웬만한 집에는 초서로 휘갈겨 쓴 병풍이 몇 점씩은 있는 게 이 쪽 동네의 정서이다. 약간 촌으로 가면 길가에 걸어가는 노인을 외면한 채 승용차를 몰고 가다 가는 어느 집 자식이라고 알려져 혼쭐나는 그런 곳이다.
어쩌면 보수적이지만, 이런 모습이 그리워지는 건 무슨 까닭일런지....... 기능과 속도를 중시하는 사회 변화를 못 따라가기 때문일까? 이미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난다는 소외감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가 갖는 정서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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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에는 아침 일찍 진주성을 둘러보았다. 유유히 흘러가는 남강을 끼고 위치해서인지, 언제 와 보아도 참 편안한 곳이다. 마침 날씨도 풀려 봄기운이 완연해서인지 더욱 그러하다. 촉석루에 올라 운치를 느끼고, 의암에 서서 논개의 정절을 떠 올려 보았다.
왜란과 관련된 자료를 집중적으로 전시하는 국립 진주 박물관을 들러 보았다. 영상실에서 본 입체 영화는 불꽃이 번쩍 솟고 돌이 날라 들어 움찔 피할 만큼 실감이 났기에, 아이들이 참 좋아 하겠구나 하고 생각해 보았다.
전에는 박물관하면 천편일률적으로 유물들을 나열하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만큼 한자 어투의 딱딱한 설명이었는데, 요즈음은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 실제로 탁본을 하여 기념품 삼아 집에 가져갈 수도 있고, 유물 제작 과정을 형상화한 밀랍 인형이 실제 사람 크기로 눈썹까지 깜빡이는 등 실감나게 표현한 것을 보아 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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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는 수준 높고 예의바른 사람들이 살기에 참 깔끔하고 정돈된 게 살고 싶은 도시라고 머리 속에서 각인되어 있다. 진주는 큰 곳만 4, 5개에 이를 만큼 재래시장이 발달하였다. 지하상가가 고급스럽고 깨끗하기가 그지없어 백화점이 없다는 게 이 도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해 이마트가 하나 들어 선 다음에는 재래시장이 크게 위축되었단다. 또 이번에 혁신 도시로 지정되어 땅값이 3배로 뛰었다고도 하고 말이다. 하긴 2년 전인가 청주에서 대형 할인점이 3개 들어서자 재래시장이 모두 없어지다시피 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차피 이곳에서도 변화의 조짐을 느끼면서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한다면 개인의 바램일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어 시장 한 가운데 위치한 ‘제일 식당’에서 육회 비빕밥을 먹었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고, 선지 국물이 딸려 나오는 게 특징이다. 20년 전 시장 좌판에서 시작한 집인데, 이제는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집이 되었다. 옆 사람과 어깨를 맞대고 앉을 만큼 비좁고 허름한 공간이건만, 손님들은 줄지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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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인 중앙시장은 규모가 엄청나게 넓다. 남해, 사천에서 오는 해산물과 산청, 하동에서 나오는 산채로 경상도 서부 내륙 지역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이 곳 사람들 말로는 경상 남, 북도를 통틀어 가장 큰 시장이라고 하는데, 서울의 경동시장이나 남대문 시장보다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바구니에 담은 곶감이 빛깔이 좋아 한 무더기를 샀다. 씨가 없고 맛이 있어 또 하나, 이웃집이 생각나서 또 하나, 직장 동료들이 생각나서 또 하나, 해서 모두 네 무더기를 사 들었다.
마침 대보름 전이라 말리고 삶은 나물들이 신선하였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물을 사서 담는데, 언제부터인가 반말로 같이 어울려 흥정하였다.
“아지매, 더 주소.” “아이고, 마 이젠 그만 하거래이.”
연신 손이 서로 부딪치며 주워 담은 봉투가 꽤 여럿 되었다. 학생들에게 책 주려고 가져 간 책가방은 어느새 나물로 가득 채워졌고, 인심까지 더하여 불룩해졌다.
할머니가 머리에 이고 나온 인절미를 사서 내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시장 어귀에 있는 풀빵 한 봉지도 집어 들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2006. 2)
첫댓글 제가 카페에 자주 들어 오지 못해서 내고향에 대한 살뜰한 글을 미쳐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요즈음 진주에서 많이 지내고 있습니다. 경상대학교의 전신은 진주 농과대학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보신대로 여자아이들은 좀체 외지로 보내지를 않아서 진주농대 가정과 출신들이 많습니다.
시장안의 제일식당의 비빔밥은 먹어도 질리지를 않는 저의 기호품입니다.
진주에서 추천하고 싶은것은 새벽장입니다.
이른 아침에 나가면 밭에서 갓따온 과일과 채소가 싱그럽습니다.
음력 6월말일이 논개축제일입니다. 시간이 맞아지면 볼만합니다.
건필 하시기를 빕니다.
그 지역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진주나 강릉의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서울 토박이처럼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는 깔끔함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저 또한 이들 지역에서의 즐거운 기억들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진주라면 저도 추억이 어린 곳입니다.
얼마 전 탄현역 부근 아는 이의 아파트를 갔었습니다.
문득 선생님 글이 떠올라 허공에 대고 인사를 올렸는데, 들으셨는지요?
"안녕하세요? 김옥진 선생님" 하고 말입니다.
저도 진주를 가본 듯이 실감나게 쓰셨군요.
선생님은 힘 안들이고 쓴 것처럼 글을 술술 잘 쓰십니다.
진정한 글쟁이 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5개월 만에 주신 선생님의 댓글이라 얼떨떨합니다.
부족하더라도 보다 여럿이 글을 올리고, 또 더 많은 분들이 댓글 달아 서로 소통하면
<....수필카페>가 좀 더 활성화될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