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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胡志明, 1890년~1969년)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꿍아(함께 산다)' '꿍안(함께 먹는다)' '꿍담(함께 일한다)'
베트남의 제1대 국가주석. 유명한 공산 혁명가이자 정치가이며,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평가받는다. 베트민을 조직하여 프랑스와 일본에 의해 지배받던 식민지 베트남의 독립을 이루었으며, 이후 베트남 전쟁을 통한 베트남의 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본명은 응우옌신꿍(Nguyễn Sinh Cung, 阮生恭, 완생공). 자(字)는 필성(必成, Tất Thành). 호찌민은 가명이며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은 '호 아저씨'(Bác Hồ, 박 호, 伯胡)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호찌민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민족주의자란 이유로 수배되어 세계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호찌민을 포함 대략 196개의 가명이 있었다고 한다.
2. 일생
베트남 응에안(Nghệ An, 乂安)성에 있는 호앙쭈(Hoàng Trù)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민 출신으로 가난한 유학자였다. 그의 가계가 객가(客家)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아버지가 관직에 오른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응우옌 왕조의 관리가 되어 수도 후에로 가족을 데려올 수 있었으나, 자신의 일이 식민지 경영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번민했고 결국 불복종을 이유로 해직된다. 현실에 실망한 그는 이후 후에를 떠나 시골에서 약제사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호찌민은 물론 형과 누나도 주변에 민족주의 사상을 전파하게 되는데, 때문에 호찌민의 형과 누나는 반식민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당해 수감된다. 호찌민 본인도 프랑스-베트남 학교인 국학 재학 시절인 1908년 징세반대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만다. 잠시 민족주의자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당시 독립운동 전반에 만연했던 '일본을 배우자.'란 구호를 넘어서 도리어 독립을 위해서는 서양, 나아가 세계를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1911년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해운회사에 견습 요리사로 취직,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를 타고 프랑스로 간다. 그리고 영국,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를 떠돌면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火夫) 등으로 일했다. 미국에 있을 당시 흑인인권운동에도 참여했다 한다.
그 밖에도 영국, 미국 등을 전전하면서 신문물과 사상 등을 배우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들 덕분에 영어, 중국어의 여러 방언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태국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도 능통했다.
1917년 호찌민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뒤 1918년에는 베르사유 회의에 우국지사들과 응우옌아이꾸옥(Nguyễn Ái Quốc, 阮愛國)이란 이름으로 참가해 베트남인의 자유·민주·평등권을 요구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의 호찌민은 프랑스로부터의 완전 독립보다는 프랑스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베트남인의 인권보장을 추구했다. 그리고 한국의 신한청년단에서 독립청원서를 발표한 것과 비슷하게 이 가명으로 사용해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8개 조항을 베르사유 회의에 제출하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젊은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 운동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고, 향후 27년간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베르사유 회의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우드로 윌슨을 만나 베트남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지만 애초에 민족 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들을 해체하기 위한 의도가 컸고, 미국은 승전국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도와줄 이유가 없었기에 윌슨은 무시했다.
1921년에 찍은 호찌민
1920년에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당시 식민지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러시아 혁명의 여파를 받았듯이 호찌민 또한 사회주의에 입문하게 됐고, 그 시기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 러시아 혁명사를 비롯한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1922년에는 <르 파리아(Le paria)>를 창간하여 편집인이자 중요한 기고자로 활동했고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낱낱이 비판했다. 때문에 프랑스 당국의 감시에 시달리기도 했다. 1923년에 개최된 제2차 프랑스 공산당 대회에서 대회 참가단 주석 자격으로 참가했다. 또한 그 해 소련에는 각국 식민지 농민 대표 자격으로 건너가 한동안 국제공산당에서 일하다가 1924년 중국 광저우로 갔는데, 당시 이름을 다시 리투이(Li Thuy, 李瑞)로 바꿨다. 여기서 그는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를 창립하고 동아시아 지역 피압박 민족연합회를 발족시켰다. 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공산당원 중 최고급 당원만 유학한다는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다. 이때 박헌영을 만난다.
별로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코민테른 요원으로, 소련 내에서는 일종의 피압박민족의 투사로서의 모델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과 베트남으로 파견되었을 때에는 혁명 조직을 형성하고 통합시키는데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여, 베트남청년단, 안남 공산당, 베트남 공산당, 인도차이나 공산당 등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각지에서 만난 뛰어난 인재들을 소련으로 보내 교육시키는 등, 조직과 인재를 통해 혁명의 근간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잠시 태국에 머물 때조차 그곳에 있는 베트남 이주자들과 원주민들을 통합해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기도 하는 먼치킨.
1930년 베트남의 통킹과 안남지역을 중심으로 프랑스 식민지배에 맞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주도아래 노동자 농민봉기가 일어났었다. 프랑스는 이 봉기를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아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그해 10월 호치민은 공산당 내에서 큰 비판을 받았고, 1931년 6월 호치민은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32년 12월에 석방된 호치민은 1933년 1월 중국공산당의 도움으로 홍콩을 탈출했다. 호찌민은 1934년 소련의 모스크바로 갔고 레닌 대학에 입학했다. 1935년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스탈린 대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1938년 그는 중국 팔로군 지역본부에서 기자 일을 하면서 보건 담당 간부로 일하기도 했다. 1940년부터는 중국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1년 2월에는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1942년 8월 호찌민(Ho Chi Minh)이라는 개명한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다가 중국 국경에서 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에 잡혀 1년 간 투옥되기도 했다. 1년 간의 감옥생활을 하며 그는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해외 생활 도중 미국의 OSS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OSS는 호찌민이 말라리아로 쓰러지자 키니네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앞서 장제스가 체포한 호찌민을 OSS가 구해주기도 했다. 또한 종전 직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호찌민의 주선으로 OSS에 들어가 여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 미국OSS로 부터 훈련을 받은 사슴팀과 베트민 부대는 보 구엔 지압의 지휘아래 몇 개의 일본군 외각 초소를 공격하여, 미국과의 공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 훈련 경험은 훗날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또한 호찌민은 이때 도움을 준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여러 차례 메세지를 보내지만 당시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 했고,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그 결과는... 2차세계대전 당시 OSS요원으로써 베트민과의 공동작전을 펼쳤던, 아르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 소령은 자신이 쓴 저서 <알바트로스의 서곡 왜 베트남인가?:Why Viet Nam?: Prelude to America's Albatross>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들 중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는 프랑스 사람들과 싸울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1945년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정식으로 자신을 호찌민으로 소개하며,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해 봉건 군주제를 종식시켰다. 이후 중국을 경계하여 권토중래를 노리는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하였으나 프랑스는 호찌민이 폐위시킨 바오다이를 왕위로 내세운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움에 따라 협정은 무산되게 된다. 1946년 11월 하이퐁 사건으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반기인 1947년 10월 프랑스군이 비엑 박을 공격하여 프랑스군에게 체포될 뻔하기도 했으나 호찌민은 무사히 탈출했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를 통해 프랑스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게끔 하여 프랑스군을 베트남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고 프랑스 식민통치 종결, 베트남 독립. 1955년 전투 지역으로부터 수도 하노이로 개선했다.
그 뒤 1955년 세워진 남베트남과의 전쟁으로 베트남 전쟁이 터졌다. 호치민과 북베트남 정부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1956~1957년 호찌민은 토지개혁을 마무리한 뒤, 1959년 부터는 공식적으로 남부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1960년 남베트남안에서 남부인들 출신들로 구성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 창설되고, 이에 맞서 미국은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전면적으로 참전하는 전쟁으로 변했고, 전쟁은 미국과 북베트남 그리고 베트콩의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1966년 7월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구절은 북베트남인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주제, 구호가 되었다.
구정 공세가 일어나기 한달 전인 1967년 12월 호치민은 당 지도부가 계획한 '총 공격과 봉기'를 승인 했고, 그의 최종적인 승인이 떨어짐에 따라 1968년 1월 31일 테트 공세가 시작되었다. 1968년 3월 구정 공세로 인한 반전 운동으로 미국이 고민에 빠져있을 당시호치민은 베이징에서 구정 공세의 결과를 보고 받았고, 베트남 정치국 국원인 레둑토가 "구정 공세 이후의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곧 남부로 출장을 갈 것"이라고 얘기하자, 호치민 또한 함께 내려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기 건강상 문제가 생겼던 호찌민은 요양차원에서 중국을 자주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었기에 직접 남부로 내려가 활동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1969년 9월 2일 9시 47분, 염원이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심장병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향년 79세. 그가 죽고 3년 후인 1972년 부활절 휴가 기간, 남베트남에 미군이 5만명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노이 정부는 새로운 군사작전을 다시한번 개시했다. 1973년 1월 베트남은 파리 평화 협정을 통해서 미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75년 3월 "남부를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4월 30일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은 통일을 이룬다. 공교롭게도 호치민이 사망한 날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운 날인 9월 2일이었다.
사망 전 유언으로 화장 후 재를 3등분하여 베트남의 북·중·남부에 한 줌씩 뿌려 줄 것을 요구했으나 베트남 정부는 하노이 바딘(Ba Dinh) 광장 앞에 대규모 영묘를 짓고 호찌민의 시신을 방부 처리한 뒤 안치하여 참배객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레닌 이후 시신이 미이라로 보존되고 있는 두 번째 공산권 지도자가 되었다. 호찌민의 유언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유언 중 하나가 전쟁에서 승리 시 남베트남 사람들을 탄압하지 말라는 유언도 있었다. 그러나 유언과 다르게 결국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에선 대대적인 숙청이 터지고 말았다. 유언의 전문은 이렇다.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한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그가 사망한 것에 관계없이 베트남전은 3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1975년에 북베트남이 승리함으로써 그의 숙원인 베트남의 통일을 이룬다. 그리고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을 그의 이름을 따서 호찌민으로 개명하였으며, 통일 수도는 하노이가 되었다.
거기다가 베트남전 당시 투쟁을 위해 노력한 베트남 국민들을 위해 1년 동안 세금을 거두지 말고, 그 후로도 세금을 줄이기를 부탁했으나 북베트남 정부는 이를 무시해버렸다. 그래서 훗날 호찌민의 비서는 베트남 정부가 호찌민의 유언을 훼손했다며 당 지도부를 비판하기도 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나 중국에 머물던 시절에 중국 여자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이후 혁명동지이자 애인이었던 응우옌 티 민 카이하고 결혼하려 했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호찌민이 체포되면서 이들 역시 실종되었고, 북베트남 주석이 된 이후 호찌민이 이들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이때는 주민등록제도와 같은 인구 파악 및 신분확인을 위한 제도가 완전하지 않은 시대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3. 성격
유능한 지휘관이지만 툭하면 부하를 때리는 장군이 있었다. 호 아저씨는 그 장군을 주석 집무실로 불러 며칠을 같이 지내면서 복잡한 나랏일을 항상 침착하고 온화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갑자기 장군의 뺨을 때렸다. 장군은 얼떨결에 당하고 어쩔 줄 몰랐다. 이렇게 맞는 심장이 어떠냐고. 이어서 호아저씨는 부드럽게 당부했다. 부대에 돌아가거든 부하를 때리지 말고 사랑하라고.
남들에게도 매우 친절하였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호찌민이 친척의 집에 갔을 때 친척들이 나중에 그가 유명한 호찌민이라는 것을 알아서 어찌할 줄 모르자 그는 "그냥 평소대로 해주세요."라고 했다. 진정한 대인배.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했는데 낡은 옷을 기워서 입기가 일쑤였고, 폐타이어를 잘라 신발을 만들어 신었을 정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하노이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고가 귀중품은커녕 고물 라디오 한 대와 책 몇 권이 있는 게 전부였다고 하니 이는 그가 얼마나 검소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3찬 만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왜 3찬 만을 드시냐고 물으니 "내가 반찬 하나를 더 먹을 때마다 우리 국민 하나가 더 죽는다."라고 했다고 한다.
호찌민이 죽은 뒤 그의 명성을 먹칠하고자 그가 실은 사치스럽게 지냈더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무엇 하나 증거도 없이 주장하던 거라서 결국 개소리로 묻혀졌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호찌민 연구가들도 꼼꼼하게 조사했지만 그가 사치를 누렸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긴 한데 실은 그도 사람인지라 화려하고 풍족하게 살고픈 욕망이 없던 건 아니다. 친구에게 털어놓은 고백을 보면 "나도 마음껏 먹고 싶은 걸 먹고 편하게 살고 싶다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걸 실제로 이루지 않으며 살았기에 전설이 되었다. 일화에 따르면 딱 하나 자신이 사치라고 부르던 것을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영국제 담배 555였다. 이것만은 양보 못 하겠다고 또한 자신이 가는 곳을 경호원들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이는 갈 곳을 알리면 그 곳에 있는 주민들이 귀찮기 때문에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노이에는 호찌민이 기거했던 옛 주석궁이 있는데, 이곳은 본래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총독부였다고 한다. 당연히 상당히 호화로운 곳이지만, 호찌민은 정작 이 옛 총독부 관저를 쓰지 않고, 주석궁 안의 연못 옆에 작고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와서 수염을 당기면서 '파파 호호'라는 애칭으로 불러주면 미소 지으면서 손수 베트남 고유악기를 치면서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불러주며 같이 놀아주곤 했다. 하루는 아랫사람이 아이들이 마구 뛰어놀면서 시끄럽다고 화내자,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처럼 활기찬 곳은 없다면서 놔두라고 했단다. 그 시절 그를 돌보던 가정 도우미는 그가 화를 낸 걸 좀처럼 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베트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호찌민 덕에 베트남에는 꽤나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지만 큰 마찰은 없다고 한다. 호찌민도 생전에 소수민족도 우리의 동포라면서 그들의 풍습에 맞는 집에도 거주하였다고 한다. 호찌민은 가는 곳마다 소수민족을 설득하여 베트남 독립운동에 동참하라고 권했고 그들을 위한 간단한 신문을 만들었으며 문맹자들을 위해 외우기 쉬운 노래를 만들어 가르쳤다. 그 결과 몇년 후 북쪽 지역 대부분 소수민족들이 베트민이 되었고 소수민족의 협조는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이 승리하는데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아무튼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이자 서민적인 모습으로 다가갔던 그를 기리기 위해 사이공을 호찌민으로 개명했다 그의 사망일은 공교롭게도 독립선언과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9월 2일과 일치하는데,이 날은 베트남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다. 그야말로 그는 전설이 되었다.
4. 비판
일부에서는 시대를 잘못 예측한 이상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마오쩌둥이 그렇듯, 68혁명 여파로 서구권에서 히피들에 의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시각도 많다. 무엇보다 외부적으로나, 베트남 내부적으로나 뭔가 뜬구름 잡는 훌륭한 민족지도자로서 존경만 받지, 제대로 연구 된 적이 별로 없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창당과 지하 혁명 시절, 그리고 월맹 정권 성립과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의 거두로서 성장한 과정만 보면 분명 엄청나게 피튀기는 정치적 투쟁, 공작질 같은게 필수적이기 마련인데, 관련 역사서나 서적들은 아직도 막상 그 과정 내에서 호치민이 '지도자'라는 거창한 타이틀 말고 구체적으로 한 게 뭐냐?라는 질문에 뚜렷하게 답을 하지 못한다. 베트남 당국에서 국가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퍼뜨리는 소위 '호치민 사상'의 정체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그냥 담백하고 진부한 도덕적인 교훈 빼고 도대체 구체적으로 그 실체가 뭔지 아무도 제대로 설명을 한 적이 없다. 따라서 현대 학계에서는 저급한 빨치산이냐 위대한 혁명가냐를 떠나서, 애초에 호치민의 영향력이 인도차이나 공산당 내에서 그렇게 절대적이긴 했나?라는 질문이 나올 정도다.
당장 이 항목만 봐도 호치민이 이만큼 훌륭한 인물이었다, 피상적인 60년대 신좌파의 낭만적인 미화적인 시선이 지배적인데,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사생활이 굉장히 깔끔담백한 검소 그 자체였던 건 레닌과 스탈린도 마찬가지고, 공산주의는 부분적으로 빌리기만 하되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더 중점을 둔 건 편협한 반공 자체만을 위한 반공적 시각이 아니고선 전혀 그 자체로는 딱히 긍정적인 사실도 아니다! 폴포트, 김일성 같은 아시아 사회주의권의 대표적 폭군들도 '사상적으로 순수한'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거리가 먼 반면 조국과 민족 타령은 입만 열면 해댔고, 이들의 최종보스 격 인물인 마오쩌둥과 마오이즘 자체가 이론적인 차원에선 소련의 원형과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결국 아시아 사회주의 정권들 중에서 오리지널 소련식 사회주의를 좋은 점이나, 나쁜 점이나 충실하게 따랐던 건 기껏해야 공산정권 수립이 아예 소련과 같이 이루어졌던 몽골 인민 공화국 정도다. 더 깊게 파고 들자면 그 소련 내에서도 제2세계라고 불리는 거대한 국제공산주의권,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소련의 붉은 제국주의 자체를 만들어 낸 스탈린 본인 자체가 아직 혁명가 정당이었던 시절 초기 볼셰비키 중에서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떨어지는 편이었고, 절대 권력 그 자체에 집착했지 사상적 순수성에 높은 가치를 둔 인물이 아니었다! 스탈린 항목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는 내용이지만, 애초에 스탈린이 가방끈 길이나 당 내에서 입지나 자기보다 훨씬 더 으리으리한 위치에 있었던 구 볼셰비키들을 모가지 치고 권력의 정점으로 올라선 비결 자체가 당시 신경제정책을 둘러 싼 정치국의 논쟁에서 유연하게-혹은박쥐처럼-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면서 경쟁자들이 서로 물어 뜯게 한 다음 나머지 판 자체를 뒤엎었던 것이다.
애초에 마르크스-엥겔스 듀오 본인들이 아예 이론뿐만 아니라 진짜 혁명을 일으켜 사회주의 국가를 새워서 자신들의 이론을 그대로 실천한 적이 없었던 만큼, 이리 보듯이 현실 정치의 역사에서 사실 순수한 오리지널 공산주의 국가의 원형을 찾는다는 발상 자체가 허상에 가깝다. 반공 가치관의 영향인지 한국의 미디어물이나 인터넷, 서적, 지식인들과 논객들 사이 평론을 보면 "빨갱이들 중에서는 그나마 덜 빨갱이스러웠다"라는 어조로 티토나 호치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위 문단에서 설명했듯이 현실 정치사에서 순수한 공산주의 국가 라는 물건 자체가 존재한 적이 없고, 해당 지도자들이 다른 공산권 독재자들에 비해 긍정적으로 평가 받는다면 그건 자기 자신들이 정치인으로서 당면한 역사적 과제들을 적어도 생전에는 다른 공산권 국가들의 역사를 장식한 대규모 전국민적 테러를 안/그나마 덜 저지르며 해결했기 때문이지, 사상적으로 더 순수하거나 덜 순수해서 긍정적으로 평가 받는게 아니다.
베트남의 경우 친소적이고 베트남 내부에서만 떠들어대지 밖으로는 무슨 정확한 사상 체계인 양 흉내도 안내고, 아무도 그리 봐주지 않는 '호치민사상'이란 물건만 제외하면 딱히 자신들만의요상한 사회주의 브랜드를 주장한 적이 없는데, 이건 말 그대로 사상적인 차원에서 보면 굉장히 유연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호치민에 대한 구체적인 정치인으로서 평가가 아닌, 그냥 대충 훌륭했던 사람이란 식의 두루뭉실한 인식은사실
1. 프랑스 입장에서 19세기 알제리의 압드 알 카데르 같은 자신들을 더럽게 애먹인, 악질 반란 분자지만 능력 하나만은 개쩌는 초월자 (혹은 프랑스의 위신을 위해 개쩔어야만 하는)
2. 미국 입장에선 자신들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에서 적군을 지휘한 적이지만 좀 위대한 천재 지략가 (역시 미국의 위신을 위해 위대해야만 하는)
3. 언론, 학계에서 영향력이 강하며, 베트남 반전 운동에서 큰 영향을 받은 리버럴 진영에선 저 멀리 떨어진 가난한 탈식민지 동남아인들보다 훨씬 더 가깝고 얄미운 숙적인 미국 내 군부와 정치인들이 대표하는 보수 우익의 가랑이를 대신 걷어 차 준, 직접적으로 언급하긴 뭣 하지만 어쨌든 고마운 양반
4. 특히 여기에 낑겨 어쩌다가 어중간한 비중으로 참전했던 우리 한국인 입장에선 가치관이나 외면에서 일단 비슷한 탈식민지 동아시아 유교권 국가의 민족주의 지도자이며, 실제로 박헌영과 레닌 학교 동문이었던 등 간접적으로 식민지조선과도 연관이 있었고, 상술한 베트남이란 나라와 근대사 자체가 한국과 공유하는 요소들 때문에 왠지 남의 얘기만으로는 들리지 않는 정서라는 점 자체에서 생기는 호감
호치민을 상대했던 다양한 적들의 인식이 맞물리고 증폭되어 형성된 점이 크다. 오히려 대미 항전, 대불 항전을 벗어나 2차대전 이전 젊은 혁명가로서 호치민이나 초기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행적과 발전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지금까지 알려진 붕 뜬 성자와 같은 두루뭉술하고 막연하게 긍정적인 이미지는 호치민 본인과 베트남 공산당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형성한 이미지이며, 실제로는 남의 힘(주로 프랑스 식민 총독부)을 빌려 정적을 제거하는 것에 능숙했으며, 필요에 따라 자신은 공산주의자라 했다가 민족주의자라고 왔다갔다 하며 공산권, 서방 양쪽 상대로 말을 잘 바꾸었던 굉장히 영악하고 노련했던 정치인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4.2. 토지개혁 관련
호치민에 대해 가장 강도높게 비판할 만한 것은 그 유명한 토지개혁이다. 1954~1956년 동안 북베트남에서 토지 개혁을 무리하게 이끌다가 반발하여 저항군까지 이룬 이들을 철저하게 뭉갠 일이다.
사실 이 문제에는 좀더 깊숙한 내면의 문제가 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중국의 도움을 받았기에, 베트남에는 중국 고문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문제는 이 때 중국은 대약진 운동 기간인데다 이 양반들이 마오주의에 물든 스페인 이단심문관급 인물들이었다는 것. 전쟁의 원조로 목소리가 높아진 것을 이용해 베트남에도 중국식 토지개혁과 사상개혁을 요구하고, 이를 소리높여 거부하기 힘든 호찌민 등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일. 당시 베트남 공산당 지도자이던 쯔엉찐(Trường Chinh, 長征)의 지도 하에 이게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결과는…북베트남에 오랫동안 공헌해온 베트민 고참 퇴역병부터 베트민에 꾸준히 협력해온 지주들까지 전부 쓸어버린 말 그대로의 중국식 개혁이었다. 과거 중국에서 벌였던 것처럼 공산당 내부에서 지정한 수치를 들먹이며 지주는커녕 중농이라고도 볼 수도 없는 사람들을 지주로 몰아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투옥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이 과정에서 의욕 넘치는 개혁요원들이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반동으로 몰아 가혹하게 고문하였다. 해묵은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여기저기 밀고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 여파는 21세기인 현재까지 이어져서 아직까지도 베트남 북부 농촌에서는 토지개혁 문제로 철천지원수가 되어 어떠한 일로도 교류하지 않는 집안들이 있다. 당황한 호치민과 북베트남 지도부는 2만명 이상의 억울한 피해자들을 석방하는 한편 조사를 통해 과잉을 인정하고 피해보상 대책 등을 내놓았으나 이미 농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없는 수준까지 차달아서 결국 대규모 농민반란이 벌어져 정권이 흔들리는 수준의 소요가 있었으며 진압과정에서 1만~5만 가량이 사망했다.
참고로 월맹 정권의 토지 개혁은 마침 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남북간 인구 교환 직전에 터진 사건이라 베트남전 당시 부터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것 마냥 월맹 정권을 미화하던 좌파 언론에 의해 뭍혀 있다가 새로 알려진 사실이 전혀 아니다. 처음에 토지 개혁 과정 중 10만 사망드립을 친건 프랑스인 공산주의자로서 처음에는 오히려 조국의 군대와 국가에 맞서 베트민에게 협조하다가 책이 아니라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우고 전향한 제라르 통가스(Gerard Tongas)로, 이를 이어 받아 당시 열혈 종군기자로 이름 높았던 버나드 폴이 5만을 주장하다가, 전쟁 중에전향한 베트콩 호앙 반 끼가 갑자기 난대없이 자신의 저서에서 30만명설을 주장하던게 당시 미국 당국자들의 입맛에 맞아 한동안 닉슨 본인이 백만희생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역풍으로 반전 성향의 학자, 언론인들은 게레스 포터가 1972년에 북베트남 당국의 결정을 옹호하는 어조로 겨우 1,500명 희생자를 주장했는데 이건 역으로 지나치게 적은 통계로, 학계 내에서는 이미 2000년대 후반에 당시 노동당 내에서 대충천명당 지주 한명씩 죽여라 라고 명시한 내부 문서가 공개 되며 이에 따른 계산이 가장 최근에 이 주제만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학자, 에드윈 모이즈의 15,000 추산과 맞아 떨어지면서, 당시 신생 정권의 통계적 부정확함, 통계에 잡히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례 등을 감안하면 2만 가량으로보는게 일반적이다.
이 토지개혁의 참상은 베트남 지도부들이 토지개혁을 경제개혁만이 아니라 반대파 축출로써의 기능을 이용하려다 어딘가 삐끗난 것도 컸다. 게다가 자기나라에선 오히려 이런 참상을 보고 반동 척결한다고 박수치던 근성 어디 안간 중국인 고문들은 이것을 진정시킬 생각은 않고 오히려 부채질했다. 심지어는 호찌민도 반대파 축출로써의 이 기능에 일부 동의하기도 했다. 때마침 모스크바 제20차 대회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시작됨에 따라 스탈린식 토지개혁의 당위성도 사라져버리고 중국도 더 이상 토지개혁을 하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이 일은 멈추게 되었다. 호치민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총서기 쯔엉찐을 비롯한 베트남 총지도부 4명을 해임했고 호찌민 자신조차도 자신이 민주주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자아비판을 해야 하는 등 참혹한 실패로 끝나 호찌민의 위신은 이때 크게 손상을 입었다.
이를 두고 호치민은 실권이 없었다, 반대를 했었다 운운하는 옹호도 있으나, 호치민이 스탈린과 회동하는 와중 직접 이를 언급했을 만큼 적어도큰 계획 만큼은 호치민이 알고 있었다는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애초에 토지개혁과 관련된 정치적 폭력이 호치민과 베트남 당국이 주장하는 만큼 '순진한 실수' 였는지 자체가 의문이다. 막말로 자아 비판은 일단 저지른 다음에 나중에 그냥 한번 하고 치우면 될 일이고, 그나마 호치민 만큼의 양심이나 수치심도 없었던 다른 공산권 독재자들은 그런 최소한의 반성하는 모습도 보여준 적이 없는게 차이인데, 진짜 순수한 의도로 진행하다 생긴 '재난' 치고는 당시 서방 상대로는 공산주의는 표면이고 자신은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던 것과는 반대로 당시 소련, 중국에게는 자신의 공산주의자로서 순수성을 증명할 필요라는 그럴듯한 외부적 여건도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그렇게 호치민이 정치적 탄압을 가하는걸 꺼렸던 성자였다면 30, 40년대에 그리 이를 악물고 VNQDD와 같은 다른 민족주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힘을 썼을까? 이리 순진함에서 비롯된 실수라고 보기에는 토지 개혁을 강행하며 원하는 향촌 자치를 억누르고 전통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했던 농촌들을 정권의 통제에 편입 시키는등, 베트남 노동당이 토지 개혁을 통해 얻은 점이 너무 많다. 일각에서는따라서 토지 개혁에 관련한 일련의 위기 사태에 호치민이 보였던 행보 전체를 쇼로 취급하고, 토지 개혁이 터진 시점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분수령이었음에 주목하여 의도적인 전시 공산주의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4.3. 정치적 탄압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북베트남 내에서도 정치적 반대파들에 대한 탄압은 관대함 없이 진행되었다. 이 와중에서 전 세계 공산권의 역사에서 거의 항상 발견되는 패턴인 좌파 내 지분 독점성 숙청도 여전했다. 주로 트로츠키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상대로 자행 되었다. 현대 베트남에서이런 주제는 당연히 연구하기 힘든 지극히 민감한 주제이고, 외국 학자들도 주로 관심이 대미전쟁기에 집중 되다 보니 거의 연구 되지 않은 주제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인도차이나 출신 유학파 반불 급진 독립 운동가들은 딱 소련 다음으로 19-20세기 급진 좌파의 역사에서 중요하다 할만한프랑스의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과 직접 연결 되 있었고, 이 와중에 트로츠키주의나 아나키즘 또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40년대 중후반, 외부적으론 프랑스와 전쟁하며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는 동안 호치민과 베트민 정권은 1945년 독립 이후 하노이에서 프랑스 유학파 트로츠키주의자 서클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따 뚜 떠우 (Tạ Thu Thâu, 謝秋收)를 암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꾸준한 테러, 정치적 박해를 통해 '해방' 이전 까지만 하더라도 상당히 다채로웠던 인도차이나 반제국주의 급진 민족주의 세력을 일당 독재적 지도 아래 통합했다. 이 와중에서 호치민은 상술한 따 뚜 떠우 암살 사건만 하더라도 당시 베트민 정치범 석방 운동을 하던 프랑스 출신의 스페인 아나키스트 CNT 소속혁명가, 저널리스트였던 다니엘 게렝에게 자신과 상관 없는 공산당 평당원들이 저지른 우발적 테러라 주장하며 "그는 훌륭한 애국자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된 노선 위에 있었다. 어쨋든 그리 죽은 건 애석한 일이다"라 말하는 기만적인 눈가리고 아웅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톨릭 교도들을 탄압한 것도 문제였다. 이미 베트남의 가톨릭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단순히 '친불매국노'로 볼 수 없는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었지만 북베트남 정부는 가톨릭 교도들이 매국노라는 선입견 하에 그들을 매우 박해하고 차별했다. 순전히 편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게 된 가톨릭 교도들은 크게 분노했고 카톨릭 농민 반란이 일어나 2500명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결국엔 북베트남의 150만명의 가톨릭 교도들 중에서 60만명 이상이 월남하였다. 이 토지개혁-카톨릭 탄압 콤보를 본 미국은 북베트남을 전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고 미해군과 CIA는 군사작전으로 천주교 월남을 적극 도우면서 이를 프로파간다로 써먹었다. 응오딘지엠도 신앙의 자유도 없는 너네랑 어떻게 자유 선거를 하냐?란 식으로 총선거를 거부하게 된다.
호찌민 스스로는 인자하고 관대한 성품을 가졌지만, 한참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던 시절 부하들의 난폭하고 무자비한 행동에는 별다른 터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북베트남 정권의 학살은 북베트남 지도부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현재도 남베트남인과 북베트남인 간의 갈등은 꽤 심하다. 북베트남인들은 남베트남인들을 보면서 저 돈만 아는 박쥐같은 앞잡이놈들이라고 하고, 남베트남인들은 북베트남인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으니 하면서 서로 경멸한다. 남베트남이 적화통일되면서 대대적인 학살과 보복을 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
호치민은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인물으로 인식되고 실제로 그런 모습도 보였지만, 권력 장악 과정에서 걸리적거리는 인물에게는 냉혹하게 대했다. 연립정부 수립 제안에서 응오딘지엠이 자신의 제안을 거부하자 호치민은 응오딘지엠의 큰형을 살해하고 응오딘지엠을 납치하여 감금하기도 했다. 이때 호치민은 응오딘지엠을 해치면 민족주의 세력 포섭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응오딘지엠을 석방하지만 원래도 사상으로 충돌하던 응오딘지엠과 월맹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응오딘지엠이 성명을 통해 프랑스는 물론 월맹과도 협력하지 않겠다고 천명하자 호치민은 응오딘지엠에 대한 암살지령을 내렸다.
4.4. 침략과 그에 대한 변론
당연한 소리지만 베트남 전쟁부터가 같은 민족을 상대로 벌인 침략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일성이나 다름없는 종자다. 이 과정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1954년부터 1975년 까지 최소 10만, 최대 22만에 추산되는 민간인학살을 벌였으며, 북베트남의 최고지도자 호치민도 그 책임을 피할수 없다. ...라고 보는 일각의 시선이 있는 모양인데, 분단 한국의 상황을 분단 베트남에게 일대일로 대입시키는거 자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역사적 관심 자체보다 일차원적인 정치적 이용에 더 관심이 노골적인 시각이다.
당시 남한 내 좌익의 사회적 영향력과는 별개로 어쨋든 소련군정이든, 김일성 정권 아래든 공산 정권 아래 살아 본 경험 자체가 없고, 따라서 북한의 남침은 일방적인 침략 행위로 국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당시 사회적 분위기나 인식 되었다. 소련 입장에서도 김일성에게 남침을 오케이 해 주었지만 이런점을 알고 있어서 당시 미그 앨리에서 미공군과의 대치로 유명한 64 전투비행군단은 공식적으로 중공군 마킹을 달고 활동했는등, 뻔한 눈가리고 아웅질을 했던 것이다.
반면 베트남의 경우 질적으로 뿌리 자체가 다르다. 월맹 정부가 프랑스와의 협약으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낸 1954년 제네바 협정 당시, 훗날 남베트남의 영토가 되는 베트남국 영토의 까오다이를 비롯한 무장 종교 교단 세력이 먹은 곳 빼고 60에서 90%가 프랑스 식민 당국 자체의추산으로 월맹의 통치 아래 있었고, 무엇보다 1950년 6월 25일이라는 뚜렷하고 구체적인 시간에맞추어 공개적인 침략 전쟁을 시작했던 북한과달리, 베트남전 당시 월맹군의 직접 개입은 일러도 1972년 춘계 공세다. 이 이전까지 베트콩과의 전쟁은 실제로 베트콩 내부에 북부에서 파견하여 내려온 조직원의 비중이 작았다 하면 그것도 뻔한 거짓말이지만, 원칙적으로 닉슨 행정부의 베트남화 정책 이전 베트남전은 남베트남 내부의 자생적인 게릴라 조직을 토벌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그리고 베트콩 항목에도 들어가보면 나와 있는 내용이지만, 사이공 정부에 대한 무력 투쟁은 월맹 정부가 아니라 월남 내 잔존해 있던 베트민 풀뿌리 세력으로 인해 시작됬다.
월맹 정부가 본격적으로 남반부를 군사적으로 전면 침공한건 호치민 사후의 일이고, (월맹 정권 입장에서는) 애초에 불제 격퇴와 독립 민족 국가성립으로 끝났어야 할 대불 항전이 얼떨결에 냉전 정치판에 걸려 대미 항전으로 변하는 와중 남베트남의 자체적인 반정권 인사들이 핍박으로인해 무장 반군화, 그리고 차후의 베트콩화 되는 것 까지 호치민이 책임 질 수 없다.
침략자 북베트남군은 10만~22만의 학살을 벌였다고 주장하는데, 각잡고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 책임여부를 상세하게 따지자면 저게 전부 다 베트콩이 아니라 북베트남군이 직접 저질렀다는 증거는 어딨는가? 베트콩이 큰 지휘 체계로 따지면 하노이에 있는 노동당의 지시를 따른건 맞지만, 베트콩 항목에나와 있듯이 대규모 작전이 아닌일상적인 차원에서 게릴라전은 현지 지도부 재량으로 움직였고, 월맹에서 남파된 인원이 많았다 한들 애초에 중부 고원지대와 사이공 외곽은 프랑스 식민시절 부터 독립 공산 세력의 안마당 같은지방이라서 그 남파된 인원도 막상 따지고 보면 남베트남인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도입부 부터 베트남 전쟁은 동족에 의한 침략 전쟁이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며 보다 더 일반적인 전쟁에 대한 반제국주의적 인식을 희석시키려고 하는데, 베트남 전쟁이 일방적인 침략 전쟁이었다면 1972년에 북베트남 춘계 공세로 시작 됐고 1969년에 죽은 호치민과는 전혀 상관 없는 전쟁이 되어버린다. 당연히 상식적으로 베트남전을 이렇게 인식하는 사람은 없다. 본질은 50년대 말, 60년대 통틀어 초기에는 남베트남내부의 소요사태가 국제전, 전면전으로 확산 된 것이데, 이 와중에서 애초에 월맹 정권의 지령을 받고 58년까지 가만히 있었던, 아직은 민족 해방전선으로 간판 제대로 차리기도 이전의 월맹 잔존 세력들을 자극해서 이들이 오히려 하노이의 지령도 무시하고 무장 투쟁을 강요한건 지엠 탓이 아니고 호치민 탓인가? 지엠에 대한 부분적 재평가에 대해 물타기해서 마치 지엠정권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권이 아니라는 양 주장하는 무리한 재해석이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인식이 좌편향 되있다고 불평하는 수정주의자들은 막상 본인들은 지엠 정권 아래 벌어졌던 실제로 상당한 규모의 정치적 탄압, 특히 전직 월맹 투사들에 대한 보복적 탄압 같은 중대하고도 악의적인 정치적 테러리즘은 전부 그냥 단순히 '실정'이라 두루뭉실하게 넘기기 일쑤인데, 이런 태도의 이중성은 둘째 치고 특히 전직 월맹 대원들에게 전면 '사면'령을 내렸다가 이를 철폐하고, 자신이 정적들을 구금하려고 만들어 놓은 재교육 시설에 끌고가며 집중적인 감시, 연금 등으로 탄압한 건 오히려 수동적 위치에 있었던 월맹 잔존 세력을 다시 과격화, 좌경화 시킨, 효율이란 측면에서도 팀킬에 가까웠던 실수였다. 당장 상술 된 후에 학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것도 물론 현대 베트남 당국의 정보 은폐와 자료 비공개도 있지만, 후에 탈환 이후 남베트남 측도 보복단을 조직해서 월맹 점령하 부역자 학살에 나섰으며, 탈환 이후 발견 된 수천구의 시체 중 얼마가 그 남베트남측 보복에 의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남베트남 측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내부 문서 같은건 월남 패망 이후 어디로 증발했는지 모를 일이고, 미국 측은 당연히 저널리스트나 고문단 개인 자격으로 회고록 같은 곳에 남긴 기록 빼곤 이런 자기편측의 인권 탄압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전후 북베트남 측이 남베트남에 대해 하는 소리는 신뢰성이 문제가 되니 그 구체적인 역사적 규모와 조직을 제대로 연구할 방법이 없어 안 알려졌을 뿐이지, 남베트남측의 백색테러는 분명히 전쟁의 발발과 확대, 자국 내 정치적 상황 악화에 큰 기여를 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처럼 실제 대중 조직으로서 베트민과 이를 계승한 베트콩 모두 이념과 상관 없이 그냥지역 사회에서 존경 받는 유지들을 의도적으로 많이 포섭했으며 베트남 분단시점에서 이들은사상과 무관하게 보통 지역 사회에서 독립 유공자이자 큰 어르신으로 영향력이 컸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구 월맹 대원들에대한 지엠 정권의 탄압은 어떠한 관점에서도 그냥 자기 무덤을 판 실책이다.
1968년 구정 공세 때 북베트남과 베트콩측이 기대한 일제 봉기가 없었다고 해서 마치 수정주의적 시각이 학술적으로 옳은 내용인 마냥 과대해석 하는데, 구정 공세의 실패는 공산군이 68년 2월이라는 구체적인 순간에 자신들이 생각했던 만큼 민심이 일방적으로 하노이측으로 기울어진건 아니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있어도, 십만 단위의 게릴라 반정부 단체가 국가 내 국가를 만들어 10년 동안 그걸 유지하다 겁대가리도 없게 이걸기반으로 남베트남정부와 이를 지지하는 54만9천명이나 되는 세계 초강대국의 군대에게 전면전을 걸을 만큼 성장했다는 문맥 자체는 싹 빼두고 이게 마치 남베트남이 국민일반의 지지를 받는 정상 국가의 증거였다는 양 제시하는 건 얄팍하고도 단편적인 관점이다.
우리가 아는 베트남 전쟁, 즉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발단이 이렇게 근본적으로 남베트남 내부의 소요사태에서 성장한거라 한다면, 남북간 군사적 충돌의기원은 분명히 호치민을 비롯한 월맹 지도부는 제네바 협정의 준수를 믿고 기다렸던 54~58년 동안 협정 생까고 남베트남에 남아 있던 월맹 인사들을 박해하며 남북간 신뢰를 박살낸건 물론이고, 결국 월맹 정권 전체가 개입하게 만든 지엠 정권에게 있다.
54년 제네바 협정 체결 당시 호치민, 쯔엉찐, 응 우웬 잡 삼인방은 남침 적화통일은 커녕 오히려 디엔비엔푸 전투 한번 이겼다고 해서 프랑스군 전체를 박살낸 마냥 착각하고있는 동지들을 어떻게 달래며 협정의 결과물이 최대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였음을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이러한 앞뒤 문맥은 쏙 빼놓은체 어쨋든 통일의 최종 형태는 월맹군 땅크가 사이공 대통령궁 철책 박살내고 들어오는 장면이라 해서 전쟁의 발단, 과정 다 싹 빼먹고 한국전쟁 마냥 김일성따위와 동급의 침략자라고 우기는 건 결국 그 미국이 베트남에서 저질렀던 실수 그대로, 베트남 현지의 역사와 상황은 안보고 한국의 현실에 그냥 멋대로 끼워맞추려는 억지이다.
베트남 민족주의자로서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 지도부는 전근대 베트남의 패권주의적 발상 또한 모순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의 독립이었다. 또한 베트남 공산주의 행동강령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일찍이 하였다. 얼핏 봐도 캄보디아 민족과 베트남 민족은 전혀 딴판인데, 호찌민 입장에서는 동일하게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아왔으니 베트남이 큰 형으로서 같이 도와줘서 독립해서 함께 잘 살자(그러니 내 말 들어)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프랑스와 미국을 무찔러내고 내친김에 중국까지 따끔하게 혼내준 베트남은 위풍당당해져서 단숨에 인도차이나 반도의 깡패 패권국가가 되었다. 한마디로 호랑이가 없어진 동굴에서는 여우가 왕이 되어버린 셈.
물론 호찌민 사후에 일어난 한참 뒤의 사태이긴 하지만,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점령해서 90년대까지 수년간 캄보디아에 주둔하게 된다. 이는 현 캄보디아의 불안정한 정치상황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게 된다. 이는 서방 세계로부터 큰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캄보디아 침공에 대해서는 제국주의 논리로만 따질 수는 없는 것이, 당시 캄보디아의 상황과 캄보디아의 선제공격과 베트남인 학살이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공격했던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폴 포트와 킬링필드의 막장성은 누구나 인정하기 때문에,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부정적인 결과를 남기고 갔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어도 모든 책임을 베트남에게만 돌리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 와중에 미국은 진영논리에 따라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고 있었으니 이뭐병...
그리고 일부에서는 현대 베트남의 경제적, 정치적 난맥이 극단적 이상주의자인 호찌민의 무조건적인 공산화 경제정책과 친중전략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호찌민의 친중은 공산주의자인 호찌민 입장으로선 프랑스, 미국 등과 싸우기 위해 필연적인 측면도 있었으며,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프랑스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측면에서라도 호찌민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호찌민이 미국의 힘을 잘못 평가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시당초 호찌민 자체도 전술했듯이 극단적 공산주의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으며, 베트남의 경제정책 실패를 호찌민의 잘못된 이상주의 탓이라 주장하는 것은 베트남의 주석이 타 공산국가와 같은 독재자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주석으로서 호찌민의 역할은 주로 외교분야와 대외적 이미지 담당의 측면이 강했으며, 주요 정책들은 쯔엉찐이나 레주언과 같은 공산당 서기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주석인 호찌민을 무시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호찌민의 지시를 받는 위치는 아니었으며 이들이 꼭 호찌민의 측근인 것도 아니었고, 특히 급격한 공산주의화 정책을 펼친 레주언은 자신을 호찌민에 맞먹는 이미지로 만들려 하다 실패하기도 했다.
오늘날 베트남의 경제적, 정치적 난맥에 호찌민의 책임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베트남 주석과 공산당의 분리 없이 호찌민의 이상주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호찌민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라 할 수 있다. 한국인 입장에서 공산권을 공부 할 때 마다 강조 되는 항목이지만, 대부분 공산권의 국가들은 북한 김씨 왕조가 아니다. 일반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은 당의 독재를 원칙으로 하고, 이는 개인의 독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물건이다.
천하의 그 블라디미르 레닌도 막상 정치국 내에서는 죽을때 까지 마음대로 다른 정치국위원들을 마음대로 찍어누르거나 하지 못했고, 스탈린도 완전한 권력 장악 까지 일정 부분 당내 민주주의를 실행해야 했으며, 전체주의적 독재자들이 죽어 사라진 이후 다시 과두 정치, 집단 지도체제로 돌아갔다. 북베트남은 이 와중에서도 솔직히 하노이 정권이 단단하게 자리 잡았을 시점인 1950년대, 60년대에 들어서는 호찌민도 노인이었기 때문에 상징적 국가 원수 역할이 더 강했지, 실무 통치는 쯔엉찐, 레주언, 레둑토 같은 정치국의 고위 관료들 중심으로 돌아갔고, 산하 조직인 베트콩의 경우 쩐반짜, 응웬치짠, 팜반둥 같은 인민혁명당 중앙 행정 위원회 (미국측 자료에서는 그냥 남베트남 중앙 위원회, 줄여서 COSVN으로 일컬는다) 지도부가 하노이 정치국의 지령을 받아가며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5. 평가
1952년 두 정상 사이에 회담이 열렸을 때 스탈린은 회의실의 의자 두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스탈린: 호찌민 동지, 여기 의자 두 개가 있소. 하나는 민족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요. 동지는 어디에 앉고 싶소?
호찌민: 스탈린 동지, 나는 두 의자에 다 앉고 싶습니다.
출처: 호치민 평전 p620~621
호찌민에 관한 논란 중 하나는 과연 호찌민이 민족주의자인지 아니면 공산주의자인지 여부였다. 실제로 한 동료에게 호찌민이 고백하기를 자신이 공산주의가 된 이유는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자신을 도와준 자들이 프랑스인 공산주의자들 뿐이어서 였다고 한다. 당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프랑스 좌파들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반대했고 해외 식민지 출신의 타민족을 배척하는 행동에 반대했다. 프랑스에 막 도착한 젊은 호찌민 입장에서는 먼저 손을 내미는 프랑스 좌파들의 도움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코민테른 요원이기까지 했으니 호찌민은 분명 공산주의자이긴 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제3세계의 식민국가들의 독립을 도와준 유일한 세력은 소련이었다. 당연히 찬 밥 뜨거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닌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호찌민은 좀더 민족주의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신경제정책 등을 펼치기도 했던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지자였고 많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공산주의의 이론적인 이해가 떨어진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다.게다가 밑의 명언에서도 나오는 "나를 이끈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심이었다."라는 말이나 일평생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 만큼 호찌민은 꼭 공산주의자이다 민족주의자이다 나누기 보다는 그 둘 모두로 바라보는 게 더 바람직할 것 같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J듀이커는 호치민을 반은 간디 반은 블라디미르 레닌이라 정의하며 "그가 민족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하는 논쟁은 그 다지 의미가 없다."라고 했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적절히 버무린 점, 그리고 제2세계 국가에서 비교적 민주적인 운영 시도를 한 점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비견되는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호찌민은 실용주의자기도 했는데, 이는 일생 줄곧 도덕적인 면모를 지켜나가면서도 혁명을 위해서라면 여러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든지, 그런 와중에서도 되도록이면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든지, 혹은 베트남민주공화국에서 공산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사적 소유를 크게 제한하지 않으며 신성한 권리라고 언급하는 등 여러모로 실용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는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볼 수도 있지만, 유명한 공산주의자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호찌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과 겹쳐서 생각해본다면 이는 공산주의에 구애받지 않고 호찌민이 베트남 민족 모두를 포용한 정부를 세우려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교계의 그랜드슬래머였다. 일본 제국을 몰아내기 위해 미국과 손을 잡고, 중국의 야욕을 견제하기 위해 (비록 걷어찼지만) 국치의 적인 프랑스에 손을 내밀고, 미국에게 호의 섞인 제스쳐를 보내기도 하며, 감정이 악화된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를 하며 어느 한 나라와도 크게 적을 만들지 않았다.
호찌민 사후 공산당이 베트남을 급격히 공산화시키며 나타난 경제적인 폐해와, 팽창주의와 급격히 친소련으로 기욺에 따라 일어나게 된 중월전쟁까지, 호찌민이라는 지도자 하나가 사망함으로써 일어난 베트남의 변화는 결코 좋은 것이라 말하기 힘들다. 이후 베트남의 개혁주의자들이 괜히 '호 아저씨라면 오히려 좀 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을 것이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비록 말년에 외교 분야를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많은 실권을 잃어버렸지만, 베트남의 국부로서 미국인들의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이미지로 베트남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인물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윗동네의 같은 공산주의자였던 마오쩌둥은 오늘날 중국에서조차 부분적인 비판은 받고 있지만 호찌민은 베트남에서 그야말로 국부 급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에 가거나 베트남인이 있는 곳에서 호찌민을 까내리는 것은 반드시 삼가도록 하자.
베트남으로 여행을 가든 출장을 가든, 베트남 공항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온 거리 온 건물 동서남북 어디에 있건 온통 호찌민의 인자한 초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지겹도록 보게 된다. 베트남의 따스한 아침햇살을 맞이함과 동시에 당신은 언제나 호찌민 초상화를 보며 상쾌한 하루를 시작할 것이고 호찌민 초상화를 보며 집으로 들어올 것이다. 예외는 없다. 진정한 국민적 스타가 호찌민이다. 이는 베트남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큰 정신적 자산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이런 긍정적인 평가는 어디까지나 북베트남의 관점이 짙게 반영된 결과이다. 아직 베트남의 남북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장 호찌민 시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어디 사냐 물어보면 대다수가 사이공이라 대답한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의 국부로 추앙 받음에도 터키 내 상당수를 차지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에게 적대시되는 것 처럼 베트남의 주도권이 북베트남에 있어 호찌민에 대한 칭송이 두드러지는 것이지 모든 베트남인에게 지지 받는 영웅으로 단정 지을 순 없다. 남베트남에선 정부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공간에서 두런두런 호찌민과 북베트남 정권을 까대는 이야길 들을 수 있다.
게다가 현지 남베트남인 보다도 구 남베트남 출신으로 북베트남에 동화되지 않고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다. 미국과 프랑스 등지에 사는 베트남계 이민자들이 대부분 구 남베트남 출신으로, 베트남전 전후로 도망쳐 나오거나, 이후 보트피플로 탈출한 사람들의 후예이기 때문. 실제로 1999년 한 젊은 베트남인이 미국의 베트남계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리틀 사이공에 있는 그의 비디오 가게에 호찌민의 사진을 걸었다가 베트남계 이민자들의 거의 테러에 가까운 분노가 섞인 항의를 받았을 정도. 한국 공중파 뉴스에서도 해외토픽 부분에 당시 상황이 나왔는데, 중장년 베트남계 이민자가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경찰이 출동하면서 말리자 "호찌민의 사진을 철거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라고 절규하는 모습이 나왔다. 미국이나 프랑스 같이 규모가 큰 베트남계 이민자 사회가 형성된 곳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보트 피플로서 망명해 온 구세대 이민자들과 90년대에 서방과 베트남의 관계가 정상화된 이후 유학이든, 사업이든 정상적으로 이민을 온 전후 세대 이민자들 사이의 갈등이 크다. 전자의 경우 당연히 통일 베트남에 의해 고향에서 쫒겨 나온거니 호찌민을 좋게 생각 할 수가 없으나, 국교 정상화 이후 떳떳하게 해외로 나온, 북베트남이나 통일 베트남의 교육을 받은 베트남인들에게 있어 호찌민은 당연히 국부이기 때문이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J듀이커의 경우 호찌민의 정체성을 반은 간디, 반은 블라디미르 레닌으로 정의했다. 즉 윌리엄J듀이커는 호찌민을 민족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로 정의했다 볼 수 있다.
1960년대 부터 베트남 전쟁을 연구해온 리영희는 호치민을 매우 존경했다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3월 23일 베트남의 호치민 묘소를 방문하면서 전 인류를 통틀어서 위대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6. 어록
나를 이끈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심이었다.
어려운 것이란 없다. 단지 흔들리는 마음이 두려울 뿐. 산을 파고 바다를 메울 수 있다. 마음을 굳게 먹는다면 할 수 있다.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우리가 당신들을 1명 죽일 때 당신들은 우리 10명을 죽일 것이다. 하지만 먼저 지치는 쪽은 당신들이 될 것이다.
내 안의 변하지 않는 한 가지로 세상의 만 가지 변화에 대처한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던가?
그것은 코끼리와 호랑이의 싸움이 될 것 입니다. 만일 호랑이가 가만히 서 있는다면 코끼리가 그 막강한 엄니로 호랑이를 짓누르겠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가만히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는 낮에는 밀림에 숨어 있고 밤에 나타납니다. 호랑이는 코끼리의 등에 뛰어올라 코끼리의 가죽을 찢어놓고 다시 어두운 밀림으로 뛰어들어 갑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천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이것이 인도차이나의 전쟁이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통해 자신을 부양하고, 자신을 방어하고, 여러분과 싸우는데, 여러 동지들은 왜 식민지를 무시합니까?
여러분이 이 작은 그룹 내에서도 단결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조국으로 돌아간 뒤에 어떻게 대중을 단결시켜 식민주의자들과 싸우게 하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나서게 할 수 있겠습니까?
7. 이야깃거리
호찌민이 유럽이나 미국을 일하며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의외의 곳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미국 보스턴의 유서깊은 호텔인 Omni Parker House는 호찌민이 1912부터 1913까지 제빵사로 일했던 사실로 유명하다.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앉아있는 사람이 박헌영이다. 뒷줄 맨 오른쪽이 호찌민.(최근에는 이 사진이 1921년에 촬영되었고 뒷줄 맨 오른쪽의 사람은 호치민이 아니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출처- 정병준,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2015)
호찌민이 1929년 소련에서 국제레닌대학교에 유학했을 시절에 박헌영과 만나 교류했고 친분관계를 쌓았다. 박헌영은 호찌민에게 목민심서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호찌민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 그가 크게 감명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근거는 없다. 심지어 목민심서가 호찌민 시신의 머리맡에 놓여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며, 박물관에 있다는 말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90년대 KBS-1에서 베트남 현지 취재를 가서 촬영한 영상에 의하면 호찌민의 서재에 목민심서 책이 있었던 걸 보여준 적이 있으며, 서재 담당이 호찌민이 즐겨봤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2006년 호찌민 관련 유품이 12만점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목민심서가 없다는 기사가 나왔다.
현재 바딘 광장에 있는 호찌민 묘소는 하절기에는 07:30~10:30, 동절기에는 08:00~11:00에만 출입이 가능하며 및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휴관한다. 그리고 매년 10월에는 호찌민 시신의 방부 처리를 위해 폐관한다. 호찌민 묘소 구내에서는 사진 촬영뿐만 아니라 전자 기기의 휴대 및 사용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만일 호찌민 묘소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휴대전화를 제외한 모든 전자·통신 기기를 내놓고 들어가야 한다. 호찌민 묘소에는 흰색 제복을 입은 경비병이 4인 1조로 시신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입구 및 출구에 경비 근무를 서는 경비병을 볼 수 있다. 호찌민 묘소 내부에서는 휴대전화는 진동 혹은 무음으로 전환해야 하고 절대로 큰 소리로 대화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참배 시에 유의하자. 참배를 마치고 반대편으로 나오면 입구에서 맡겨 두었던 전자·통신 기기를 찾아갈 수 있다. 사실은 호찌민의 유언에 따라 북부,동부,남부의 화장되어 나눠져지고 방문록 정도를 적을수 있고 나무를 심을 수 있게 해 후일 베트남의 도움이 되어야 했으나, 베트남 국민들은 유언에 따르지 않고 전국에서 온갖 재려를 모아 지었다 한다.그리고 그 옆에 호찌민 박물관과 한 기둥 사원이 있다. 호찌민 박물관은 어른 40000동 어린이는 무료 입장이며, 들어갈 때 짐을 사물함에 넣거나 공항에서 볼 수 있는 x-ray를 통과해야 한다. 한기둥 사원은 일주사로도 불리며 한기둥 사원은 말 그대로 한 기둥인데 자세히 보면 크기가 애매하다. 그리고 또 현재 베트남에서 가이드로 활동하는 분의 말로는 바딘 광장, 호찌민 생가에서 가이드가 사진을 찍히면 공안들이 집으로 찾아와 벌금으로 10,000불을 내야한다고 한다. 10,000불을 내지 못하면 추방까지 당할 수 있다고 한다. 가이드가 왜 사진을 찍히면 벌금을 내야하는가? 이유는 '왜 너네들이 우리의 호찌민을 설명하려 하냐!'라고 주장하고 부정부패가 심한 베트남에선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여담으로 호찌민이 이오시프 스탈린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는 사회주의 조국의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며 친필 사인을 요청했는데 그가 사인을 받아들고 돌아간 뒤 스탈린은 갑자기 "그 작자, 태도가 수상해."라면서 KGB에게 자기 사인을 도로 훔쳐오도록 시켰다. 이후 사인이 없어진 것을 알고 호찌민은 소지품을 모두 뒤지며 매우 당황했다고 하는데 라브렌티 베리야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스탈린은 굉장히 기뻐했다고 전한다.
삼국지 , 수호지를 즐겨읽었다고한다 네이버캐스트 호치민
호치민은 중국에 방문했을당시 공자 생가를 방문하며 "나는 공자를 존경해왔다."라고 얘기했다 한다.
8. 관련 서적
<호치민 평전>(윌리엄J듀이커 지음/정영목 역, 푸른숲 출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했던 듀이커가 호찌민이라는 인물에 매료되어 30년간 중국, 베트남, 프랑스, 러시아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비교하여 쓴 호치민 평전이다. 신화로서의 호찌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호찌민을 재조명 했다. 특히 호찌민의 초기 성장과정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까지의 내용이 매우 탄탄하다. 다만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호찌민에 대해선 책의 두께에 비해 깊이 다루지 않는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호찌민의 말년 행적보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기 까지의 그 과정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베트남 전쟁 파트는 평전에서 깊게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책 서문에 저자가 왜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호찌민 행적을 깊게 다루지 않았는지 나온다. 그러니 읽기 전 참고하자. 976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을 자랑하는 평전이긴 하지만 호찌민을 아는데 있어서 매우 좋은 책이다.
<호치민 평전>(찰스스펜 지음/김기태 역, 자인 출간)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 OSS로 근무하며 호찌민을 직접 만났던 찰스 스펜이 쓴 호치민 평전이다. 3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의 호찌민 평전이기에 듀이커의 호찌민 평전이 읽기 버거우면 이 책을 읽는것도 나쁘지 않다. 책 저자가 호찌민을 직접 만나봤던 사람이기에 호찌민을 만났던 미국인이 호찌민에 대해 어떤관점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왜 호찌민인가?>(송필경 지음, 에녹스 출간)
치과의사이자 한베평화재단 이사역을 맡고 있는 저자 송필경이 쓴 책이다. 베트남 여행을 통해서 저자가 알게 된 호찌민과 베트남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국군 문제에 대해 알 수 있다. 사실상 저자의 여행기이도 하다. 책을 통해서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가 의외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과 호찌민을 직접만났던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스토리를 알 수 있다.
<옥중일기>(호찌민 지음/안경환 역,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간)
1942년 호찌민이 감옥에 있을 당시 감옥에서 쓴 옥중일기 라고 하지만 4행시 형태의 시집이다. 호찌민 주석이 비참하고도 혹독한 수감 생활과 베트남 독립을 염원하는 그의 심정을 알 수 있는 시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집이기에 읽는데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김태완(글)/주경훈(그림)/손영운(기획),주니어김영사 출간)
어린이 위인전이다. 2012년 12월 28일 초판을 발행했다. 어린이용 도서이긴 한데 호찌민에 대한 내용과 베트남 전쟁 관련한 내용이 굉장히 탄탄하다. 호찌민의 일대기와 베트남 전쟁 관련해서 있을 내용은 거의다 있다. who?시리즈에서 출간한 호찌민 위인전에 비해 역사에 대한 설명과 고증면에서 매우 탄탄하다. 평전 자체가 부담스럽다면 입문격으로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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