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막사발 / 신봉승(辛奉承)
우리 나라의 부산과 그리 멀지 않은 일본땅에 하기(萩:야마구치 현)라는 작고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도자기인 이른바 '하기야키(萩燒)'의 본고장이며, 일본국 근대화의 불길을 당긴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주역들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후일의 木戶孝允) 등과 같은 명치정부의 총리대신들을 비롯한 유명 정치인들이 태어난 곳이어서 명치유신의 발원지라고 자랑하는 고장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하기야키는 숨을 쉬는 도자기라 하여 오래 사용하면 사용한 차(茶)의 특색에 따라 자기의 빛깔이 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로 이 하기야키를 처음 구어낸 사람들이 임진·정유년의 왜란 때, 조슈번(長州藩)의 번주 모리 데루모토(毛利輝本)에게 전쟁포로가 되어 왜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이었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이작광(李芍光), 이경(李敬) 형제들이라고 되어 있으나, 합천 이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이들이 형제라는 근거는 찾기가 어렵다. 아마도 잡혀간 처지가 부끄러워 본명이 아닌 다른 이름(假名)으로 살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찌되었거나 이들에 의해 구어진 '하기야키'는 조선 막사발이었다. 조선 막사발이란 이가 빠지면 개밥그릇으로 쓰이는 그야말로 천하디 천한 것인데, 이 조선 막사발이 일본땅 하기에서 구어지면서 당시의 일본땅을 뒤흔드는 명품이 되었고, 하기아키 중에서도 이 조선 막사발만을 일러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명칭의 내력이 또한 재미있다. 조선 땅에서 막사발이 만들어지던 곳이 경상남도 사천지방의 새미골이다. '새미골'을 일본식 한자로 옮겨 적으면 이도(井戶)가 된다. 그러므로 일본어의 '이도다완'은 한국어의 '새미골 막사발'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이 사실은 일본에서도 인정을 하고 있고, 또 지금의 새미골 여류도공인 장금정(張今貞)여사의 가마에 일본인 광광객이 몰려드는 것은 그때문임은 말할나위도 없다.
4백여 년전, 전쟁포로가 되어 왜국땅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 막사발(초기의 하기야키)은 지금도 42개가 남아있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일본국 국보로 지정되어 교토(京都)의 대덕사(大德寺)에 보관되어 있다.
나는 일본인 수집가 하마타 요시아키(濱田義明)노인이 보관하고 있는 초기의 조선 막사발 두 개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 다도(茶道)의 시조라고 불리우는 센 리큐(千利休)가 사용하던 것으로 놀랍게도 그가 입었던 당시의 옷자락에 싸여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도쿠가와(德川)집안에서 사용되는 것이 황실로 옯겨가 명치 천황이 사용하던 것이었다. 엷은색 흙빛이 도는 4백년 전 조선 막사발의 촉감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마타 노인은 내가 조선 막사발의 고국 사람이라 하여 거품이 살짝 인 말차(末茶)를 대접해 주었다. 내 평생 가장 비싼 다완으로 가장 맛있는 차를 마신 셈이다. 물론 팔지는 않겠지만, 한 개의 값은 놀라지말라, 일본돈으로 무려 40억엔(우리 돈으로 4백억원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마타 노인에게 물었다.
"이만하면 일본에 남아 있는 이도다완은 대부분 보았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허허허, 대부분이 아니라 신선생께서는 전부를 보았습니다." 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하마타 노인은 활짝 웃으면서 부연하였다.
"좋은 도자기는 방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꽃을 살립니다."
도자기의 수집가 다운 시적인 표현이 아닐 수가 없다.
무엇이 조선 막사발을 그같이 높히 평가하게 하는 것일까. 해답은 아주 간단하다. 소박하고 순수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에서는 모든 가마(窯)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류를 사옹원(司饔院)에서 관장하였다. 임금이 쓰는 왕실의 집기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왕실에서 쓰이는 도자기류를 만들 때는 '좀더 잘 만들어야겠다'는 욕구가 작용하게 마련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엇인가.
보상을 받으려는 도공들의 욕심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상민들이 쓰는 막사발은 구을 때는 아무 욕심이 없는, 그야말로 순수하고 편한 마음으로 빚어지기 때문에 막사발의 외양에서 내용에 이르기까지가 순진무구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막사발의 밑둥을 흘러내리는 유약(釉藥)의 자욱이 마치 개구리 알과 같이 뭉쳐있는 것을 그들은 가이라기(梅皮와 같다하여)하여 예술적인 표현으로 보았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인 도공들에 의해 조선 막사발이 만들어 지기 전까지의 일본국의 사정은 도자기를 옥(玉), 그러니까 보석으로 볼 만큼 소중히 여겼다. 따라서 명나라의 도자기나 간혹 고려청자로 다도를 즐기던 일본인 상류사회의 다인(茶人)들에게 조선 막사발의 때묻지 않고 순박한 모양과 마치 숨을 쉬듯 살아 있는 외피의 촉감이 경탄스럽기 한량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다인들이란 일본국 최상부의 권력에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센 리큐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사카이(堺)의 호상들이었기에 도자기에 관한한 그들의 평가는 법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 막사발의 가치는 보석보다 더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 영향이 오늘에까지 전해지면서 지금도 조선 막사발인 '이도다완'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봉승(辛奉承)
1933년 강릉 출생. 강릉사범, 경희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대문학」에서 시·문학평론을 추천받아 문단에 나왔다.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을 거쳐,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추계예술대 영상문예대학원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대하소설 조선왕조 5백년』(전48권), 『소설 한명회』(전7권), 『왕건』(전3권), 『조선의 정쟁』(전5권), 『이동인의 나라』(전3권) 등의 소설과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양식과 오만』, 『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 등의 역사 에세이, 『초당동 소나무 떼』, 『초당동 아라리』 등의 시집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