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가 심해져 운동을 못 갈 것 같다는 준혁의 연락에 걱정된 진희가 찾아왔다. 매끈했던 얼굴이 조금 까칠한 것처럼 보이는 게 정말로 아픈가 싶어서 진희가 혀를 찼다.
"내가 이 검사랑 운동하면서 아픈 건 처음 보는 것 같네. 로봇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봐."
진희의 농담에 준혁이 웃었다. 자연스럽게 풀어지며 올라가는 준혁의 입꼬리를 본 진희가 놀란 듯 살짝 눈이 커졌다가 준혁을 따라 웃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결혼할 사람이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지?"
"네?"
"이 검사, 본인은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엄청 바뀌었어. 웃는 것도 자연스러워지고 말투도 부드러워졌고."
"... 네.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 맞습니다."
여주를 단순히 정의하자면 저 단어들이 제일 어울리는 것 같기는 했다. 준혁이 진희의 말에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희가 궁금한 얼굴로 준혁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결혼 날짜는 정했어? 결혼하기 전에 청첩장 주면서 인사는 할 거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랑 김 검사는 얼굴 보고 인사할 기회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진희의 능청스러운 발언에 준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머뭇거리며 자신의 결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렸다. 결혼식은 안 올릴 것 같아 청첩장 드릴 일이 없을 것 같으나, 식사 자리는 한 번 만들어보겠다는 말에 진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결혼에 왜 결혼식을 안 올리냐고 집요하게 물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아프다고 굶지 말고 밥 먹고. 아, 약도 잘 먹고."
"네. 안 그래도 약 잔뜩 들고 왔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진희의 말에 고맙다며 이렇게 반응하는 준혁조차도 처음이고 낯설어 진희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몇 년을 본 저도 변화시키지 못한 준혁을 몇 달 만에 이렇게 바꾸어놓은 사람이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
-안녕하세요. 여주 언니 김여진이라고 해요. 시간 있으면 저녁 한 끼 같이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우리 둘이 만나는 건 여주가 몰랐으면 좋겠는데.
여진에게 온 문자에 괜찮다는 답장을 보내자 식당 주소와 예약 이름이 바로 도착했다. 정순에게 불려 갔던 게 고작 며칠 전 일이었는데, 여진은 무슨 일로 저를 보자는 건지 몰라 하루 종일 일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여주에게 일이 있어 오늘 못 볼 것 같다는 연락을 남긴 준혁은 여진이 보내준 문자를 보고 식당으로 향했다. 잔잔한 피아노 건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들어서자, 예약자의 이름을 물어보는 종업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제일 안 쪽 룸으로 안내된 준혁이 심호흡을 하며 노크를 했다. 네. 하는 여진의 목소리에 천천히 문을 열자, 에스닉 무늬가 인상적인 블랙 셔츠를 입은 여진이 앉아서 저를 보고 있었다. 준혁이 서둘러 허리 숙여 인사하자, 여진이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왜 그렇게 인사해요. 깜짝 놀랐네. 갑자기 불러서 놀랐죠? 예의 없이 연락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오늘 여주 만나기로 한 건 아니었어요?"
"내일 만나기로 했습니다."
"나 때문에 미뤘구나? 미안해요. 앉아요."
미안한 목소리로 사과를 건넨 여진이 자리를 손짓으로 안내했다. 준혁이 여진의 손짓에 따라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았다. 옆에 마련된 바구니에 가방을 내려놓은 준혁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여진을 보았다. 웃는 낯으로 저를 보는 여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서 긴장하고 있는데 여진이 가벼운 목소리로 준혁의 시선을 제게 돌렸다.
"검사님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키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음식은 그냥 내 마음대로 시켰어요. "
"네. 감사합니다. 저 가리는 거 없습니다."
"그래요? 다행이에요. 차 가지고 왔어요? 괜찮으면 와인 한 잔 하라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요. 너무 굳어있으니까 할 말도 못 할 것 같아. 일단 숨 좀 돌려요."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모양인지 말을 거는 여진에게 길게 대답도 못하고 굳어있는 준혁이 웃겨서 웃음을 참았다. 준혁이 오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몇 분 되지도 않아, 나오는 음식이 두 사람 사이에 깔렸다.
"밥 먹으면 할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언제 말할까요?"
여진의 말에 음식을 먹으려던 준혁이 서둘러 포크를 내려놓고 대답했다.
"편하실 때 하세요. 전 상관없습니다."
"진짜? 정말로 괜찮겠어요?"
말투는 다정한데 내용은 아니라, 준혁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무섭게 말하나 싶었지만 준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진이 그런 준혁을 보다가 자신이 준혁을 부른 이유를 입에 담았다.
"동아병원 리베이트 수사건 수사검사, 본인 맞았죠?"
여주와 만날 구실이 되었던 사건이 여진의 입에 올랐다. 준혁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맞추자, 여진이 마저 입을 뗐다.
"우리 남편, 거기서 무혐의로 빠지게 해 준 사람, 검사님이시죠?"
"........"
"증거가 명백했거든요. 언제 할머니한테 불려 갈까 하루하루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병원을 압수 수색하고 났는데 갑자기 무혐의가 뜨더라고요?"
애피타이저로 나온 관자를 입 안에 넣고 여진이 웃었다. 가볍게 웃는 여진의 모습에도 준혁을 따라 웃지도 못하고, 입 한 번 떼지 못한 채 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른침조차 목으로 넘길 수 없었다.
"그리고 여주가 선을 보고, 또 얼마 뒤에 결혼을 한다고 검사님을 데리고 왔어요."
"....."
"내 남편 무혐의의 대가가 우리 여주인 건가요?"
여진이 덤덤하게 물어보았다. 준혁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시작은 맞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하면 되는데, 그걸 듣고 기분 나빠할지 아닐지도 모르겠고, 믿어줄 지도 정확하게 않았다. 대답 없이 있는 준혁을 보고 여진이 말했다.
"어차피 사건은 다 진행되어서 마무리되었고, 할머니도 아무런 말이 없으시고.. 둘 사이에 이제야 끼어들어서 관여할 일 아닌 거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맞나 아닌가는 확인하고 싶어서 불렀어요."
도통 무슨 생각인지 모를 여진의 표정에 준혁은 입을 떼지 못했다. 섣불리 대답하기에는 여진의 표정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대답 없는 준혁을 보고 여진이 웃었다. 조금은 짓궂은 표정이 담겨있었다.
"왜?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할까 봐요?"
"... 아니요, 그게 아니라.."
"여주가 선택한 결혼이라는 거 알아요. 걔가 그런 강단도 없이 이렇게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애도 아니라는 거 잘 알고."
노크소리와 함께 다른 요리가 들어왔다. 화려한 플레이팅으로 눈이 즐거워지는 음식이 제 눈 앞에 놓여있지만 준혁은 입맛이 하나도 돌지 않았다. 억지로 넣은 관자가 목구멍에 걸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여진은 제 궁금증을 해결해서 인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준혁을 보았다.
"고마워요. 뭐가 되었든, 난 내 남편, 우리 아이들 아빠, 우리 할머니 큰 손주 사위, 내 동생들의 형부... 책임지고 가야 할 역할이 많은 남편이 공중파 뉴스에 이름 오르고, 인터넷에 이름이 떠돌고, 수사받고.. 그런 추레한 꼴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
"그런 책임을 여주가 진 것 같아서 아주 살짝 마음이 안 좋기는 하지만."
여진이 웃었다. 여유롭고 덤덤해 보이는 그 웃음은 실은 씁쓸한 미소였다. 제 가족으로 인해 또 여주가 희생한 것이라는 게 명백해졌기 때문이라. 여진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준혁에게 말했다.
"여주는 나 때문에 많은 걸 포기했어요. 걔가 참, 똑똑하고 멋있는 애예요. 알죠?"
"네. 압니다."
"검사님이 알고 계신 것보다 훨씬 멋져요. 우리 여주. 지금도 고등학교에서 여주가 전설처럼 회자된대요. 할머니가 재단 이사장이라서 아니고, 여주 자체가 워낙에 대단했거든요. 걔가 고등학교 3년 내내 한 번도 전국 1등을 놓친 적 없었거든요. 그래서 대학교도 수석으로 들어가서 과 교수님들한테 얼마나 예쁨 받으면서 다녔는데.. 자퇴한다고 했을 때 걔네 과 교수님들이랑 대학 총장님까지 왔다 갔어요. 할머니 설득하려고.. 머리도 좋고, 사람도 잘 다루고, 멀리 보는 눈도 좋아서 할머니가 얼마나 탐냈는지도 몰라요. 실제로 여주가 할머니 이어서 경영 배우려는 욕심도 있었고.. 그런데도 여주는 다 포기했어요. 나 때문에."
동화네 집에서 여진에 대해 설명하며 행복해하던 여주의 표정이 떠올랐다. 과거를 회상하는 여진의 표정이 여주의 그 표정과 비슷했다.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은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준혁은 그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걔는 모든 욕심을 나 때문에 거세시킨 아이예요. 그래서 이번에도 혹여나 그런 걸까 봐 마음이 안 좋았는데.. 며칠 전에 여주 보니까 마냥 어린애처럼 내가 씻기고 거두고 할 정도로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믿어주고 밀어주려고요."
"... 제가.. 잘하겠습니다."
머뭇거리며 나온 준혁의 말에 여진이 단호하게 받아쳤다.
"제가 더 잘할 거예요. 검사님. 아, 이제 호칭 정리 좀 할까요? 준혁 씨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제부?"
"편하신 호칭으로 부르세요. 말도 편하게 하세요.. 저는.. 어떻게 부를까요?"
"그럼 저 진짜 편하게 할게요?"
편한 웃음을 짓는 여진을 보고 준혁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순과 독대할 때와는 다르게 풀어진 분위기에 나온 한숨이었다. 그런 준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음식이 식겠다며 걱정하는 여진을 따라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럼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 준혁아?"
"네. 전 괜찮습니다."
"준혁 씨도 저 누나라고 불러요."
".... 제가 감히.."
여진의 말에 준혁이 식겁하며 대답하자, 여진이 소리 내어 웃으며 상관없다고, 저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불러줘요. 우리 이제 서로 얼굴 보고 살 일이 더 많잖아."
"네. 감사합니다."
"아, 이거 여주랑 같이 한 번 미술관 오라고 준비한 건데 먼저 받아."
여진이 준혁에게 티켓 두 장을 내밀었다. '한국 현대미술의 빛'이라는 글씨가 써진 티켓이었다.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동아 미술관 관장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혼자서 그림 그리는 화가로 지내다가 감투를 쓰니까 주변 사람들한테 막 자랑을 하고 싶더라고. 관장 자리에 앉고 처음으로 시작하는 전시니까 여주랑 꼭 보러 와."
"네. 감사합니다. 꼭 가겠습니다."
"둘이 손 붙잡고 꼭 와서 구경해. 근데, 나 궁금한 거 있어."
풀어진 분위기에 덩달아 긴장이 풀린 준혁이 티켓을 가방에 챙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얼굴로 저를 보는 준혁의 눈빛에 여진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둘이 배드민턴 치고 다닌다면서. 진짜야?"
".... 아, 네."
"둘이 애들도 아니고.. 배드민턴은 재밌어?"
여진이 웃긴 듯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 준혁은 그런 여진을 보고 뭔가 민망해서 어색하게 웃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냈다.
"여주 씨가 생각보다 배드민턴을 못 치는데.."
".. 못하는데?"
"그게 좀..."
준혁이 말을 먹으며 여진의 눈치를 보았다. 그게 좀 귀여워서 재밌습니다..라는 말을 여진에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뭔가 창피해서 준혁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었고, 여진이 그런 준혁의 귀를 발견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걔가 동적인 거에 좀 약해. 필라테스랑 요가는 곧잘 했는데. 김여주 배드민턴 치는 거 궁금하네."
고기를 썰며 즐거운 듯 말하는 여진을 따라 준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열심히 하는 것치고 실력이 안 느는 것뿐이지, 여주가 운동신경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마냥 어려워하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더니 요즘은 곧잘 제 셔틀콕을 받아쳤다. 제 공을 쳐내면 기뻐하며 짧게 소리 지르는 여주의 얼굴이 눈 앞에 그려져 준혁이 자신도 모르게 스테이크를 입으로 넣으며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진이 준혁에게 물었다.
"우리 막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
".... 우산.. 씌워줘서."
"응?"
여진이 준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되물었다. 준혁이 여진과 눈을 맞추며 만나서 처음으로 정확한 어투로 말했다.
"저를 걱정해주고 감싸줘서 좋습니다."
"..."
"..... 기대고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처음으로."
준혁의 말에 여진이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준혁이도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나 입방정 떠는 거 아니라고 생각할게."
"아, 네. 말씀하세요."
"여주 얼굴이 얼마 전에 퉁퉁 부어서 왔던 거 알지?"
여진이 아는 줄은 몰랐던 준혁이 놀라 눈을 크게 키웠다. 여진이 그런 준혁을 보고 픽- 웃었다.
"그때 심정을 말로 못해. 우리들 중 아무도 여주 때려서 키운 사람 없어. 가끔가다 등짝이나 때리지. 근데, 여주 얼굴에 난 손자국이 정말 감정 담아서 때린 것 같아서 속이 얼마나 뒤집어졌는지.."
"죄송합니다."
".... 여주가 자세히는 못 말해준다고 해서, 정말 대충 알고 있기는 한데.. 그래서 미워하지 않을게. 여주가 그 사람은 잘못 없다고 계속 그랬거든. 그 사람은 죄 없으니까 그러지 마."
얼음팩을 대고 있는 와중에도 길길이 날뛰는 저를 말리면서 준혁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제발 진정하라고 연신 말을 뱉던 여주가 생각났다.
"걔는 나보다 11살이나 어린데, 나보다 가끔 20살 많은 언니 같을 때가 있어. 준혁이도 알고 있을걸? 걔가 애늙은이는 아니지만, 그렇게 어른같이 굴 때가 있어."
".. 네. 맞아요."
준혁이 공감하며 웃었다.
"그런 멋진 애 데리고 가니까 잘해야 해. 정말로. 난 이제 더 이상 여주가 상처 받는 거 원치 않아. 이제라도 내가 여주의 방패고 보호막이 되고 싶어. 그래서 준혁이한테도 든든한 가족이고 편이고 싶고."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압니다. "
"잘해보자, 정말. 나도 열심히 할게?"
여진의 말에 준혁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
정순이 식사를 하자며 여주와 준혁을 불렀다. 정순의 호출에 퇴근하자마자 평창동으로 향한 준혁은 잘 차려진 집밥에 놀라 인사를 하면서도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평창동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인테리어를 구경하거나 간단한 짐을 조금씩 옮기느라 왔다 갔다 하기는 했지만 식사는 나와서 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평창동에서 식사를 할 경우에는 여주가 간단히 차려주는 게 대부분이었던 터라 반찬이 조촐했었다.
"일이 바빠서 어쩌누."
정순이 안쓰럽다는 듯 준혁을 보고 말했다. 일이 많아 정시퇴근이 많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여주를 보느라 요즘은 일도 미루면서 계속 일찍 퇴근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배당받은 사건들이 복잡한 게 많았고 제 손으로 확인하고 가야 할 게 많다 보니 도저히 일찍 퇴근이 불가능했다. 너무 늦게 퇴근한 터라 준혁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인 정순과 여주는 얼른 먹자며 준혁을 보고 말했다.
"집은 나갔어?"
"아, 네. 계약금은 걸었고, 입주는 이번 달 말 일로 얘기한 상태입니다."
"그 집에서 할 거 없으면 일찍 들어와. 좁은 집에서 고생하지 말고, 이제부터 여기서 왔다 갔다 하면서 적응해야지."
"그래도 직장이 집에서 정말 가까워서 여기 오면 준혁 씨는 힘들어요, 할머니."
여주가 준혁을 두둔하며 말했다. 정순이 그런 여주를 보고 빙긋이 웃다가 준혁과 여주를 번갈아 보았다. 할 말이 있는 듯 쳐다보던 정순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네 결혼식 하는 게 어떻겠니?"
갑작스러운 말에 여주와 준혁이 동시에 정순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눈으로 저를 보는 두 사람을 보며 미소만 짓던 정순이 마저 제 말의 뜻을 늘어놓았다.
"내가 아무리 젊은 사람들 생각을 따라가고 이해해보려고 노력을 해봤지만 결혼식도 안 올리고 둘이 산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할머니, 근데."
"여주야. 너는 부정할 수도 없이 내 손녀고, 그 말은 곧 동아라는 기업을 운영하는 회장의 손녀다."
다급히 정순에게 제 의견을 피력하려던 여주가 단호한 말에 입을 다물었다.
"너네들이 언론 노출을 안 하고 살 수 있었던 건 내 노력이었고, 경영에 뛰어들지 않고 조용히 살려는 너네들을 보호해주는 역할로 언론들이 지키는 마지노선이었지. 하지만 그 언론들은 언제든 나를 물어뜯고, 너를 물어뜯고, 이 검사를 물어뜯을 수 있게 준비되어있는 사람들이야. 네 행보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냐."
수능 만점으로 신문에 이름을 올리며 대학을 수석 입학했던 여주였고, 돌연 2학년 때 자퇴를 강행했었다. 정순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생각에도 없던 프랜차이즈 외식기업 직원 교육을 받아 매장에서 일을 했었고,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난 뒤에 전문대를 들어가 제과제빵을 배웠다.
"너네가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된 시간이 고작 세 달 좀 넘는다. 혼인 신고하고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올리는 결혼식에 언론들이 얼마나 재밌어할지 얼마나 뻔한 지는 알고 있는 거지?"
"... 할머니."
"그리고 나는 우리 막내가 행복하게 남들에게 축하받으면 결혼식 하는 거 보고 싶은데. 할미 죽기 전 소원인데 안 될까, 여주야?"
여주가 정순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갑작스레 정순이 제 죽음을 논하며 부탁을 해오자 난감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러면 거절 못할 거 알고 그러시는 거죠?"
"... 그럼. 내가 우리 손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그래도.. 할머니.."
"비공개 결혼식으로 진행할 거고, 언론에는 최소한의 정보만 노출시킬 거다. 드레스 입으라는 말 아니야. 잠옷을 입고 걸어도 상관없다."
정순의 말에도 여주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남들 앞에 서 결혼을 맹세하는 게 준혁을 보는 제 마음가짐으로 가당키나 한 건가 싶었다. 준혁에게도, 저에게도 할 짓이 못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준혁에게 하는 노력과는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을 속이기 위해 연극을 하는 느낌이라 더 내키지 않았다.
"할미 소원 들어줄 거지? 여주, 이 검사."
여주의 눈치를 살피던 준혁이 정순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한 얼굴을 하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심각한 얼굴로 있던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진짜 할머니한테 약해서 탈이야.. 준혁 씨한테 제가 얼마나 이기적으로 얘기하면서 결혼식 안 올리자고 한 줄 아세요? 할머니 말 한마디에 이렇게 약해져서 고개를 끄덕이면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겠어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여주 씨."
미안하고 복잡한 얼굴로 말하는 여주를 보고 준혁이 웃어 보였다. 여주 뜻이 그렇다면 그런 거 지란 마음으로 있는 준혁을 모르는 여주는 밥을 먹으면서도 미안한 지 준혁을 자꾸 쳐다보았다. 여주의 대답을 듣고 정순이 준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검사도 여주와 같은 마음으로 생각해 줄 거지?"
"네. 여주 씨 생각이 제 생각이라도 믿어주시면 됩니다."
"고마워. 늙은이가 다 늙어서 원하는 게 참 많아."
"할머니! 우리 할머니 아직도 창창한데 왜 자꾸 그러시는지 모르겠네.. 저 진짜 속상해요."
"알겠다, 알겠다. 밥 식겠다 마저 먹고 우리 결혼식 이야기 나누자."
기분이 좋은 듯 활짝 웃으며 정순이 여주를 달래었다. 여주가 정순을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제 결혼이 뭐라고 약한 소리를 하나 싶어서 정순을 밉지 않게 흘겼다.
"준혁 씨. 소고기 냉채 맛있어요. 먹어봐요."
여주가 준혁에게 음식을 권하며 웃었다. 많이 먹고 있다며 같이 웃는 준혁을 본 정순이 생각이 많은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너 결혼식 올린다며?
받자마자 대뜸 여정이 물었다. 잘 준비를 하던 여주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여정에게 되물었다.
"어제 한 이야기인데 언니가 벌써 알았어?"
-할머니가 그러더라? 너 스튜디오 잡아줄 거면 결혼식 때 입을 옷도 같이 해주라고.
"할머니가 전화를 했어?"
-그래. 그래서 무슨 소리인가 해서 물어봤더니 할머니가 너한테 사정사정해서 네가 결혼 올리기로 마음먹었다고 자랑하시더라고.
여주가 여정의 말에 한숨 같은 웃음을 뱉었다. 막상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여주가 뜸을 들어다가 여정에게 제 고민을 털어놨다.
"언니."
-응?
"나 준혁 씨 좋거든? 좋은 사람인 것도 알고."
-응.
여주의 진지한 목소리에 여정도 덩달아 진지해진 목소리였다.
"근데 사랑인지는 모르겠어...."
-... 왜 결혼하는 건데?
"... 더 이상.. 주변 사람들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여주의 대답에 여정은 말이 없었다. 머뭇거리며 나온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결혼식 안 올리고 싶었어. 결혼식은 너무, 연기하는 것 같잖아. 사랑해서 하는 결혼 같아서.. 연극을 하는 것처럼 그래야 하잖아."
-그렇지. 네 마음이 그렇다면, 연극인 거지.
"... 남을 속이는 것만 같은 마음도 싫고.. 그리고 그 사람은, 부모님 자리에 아무도 없을 텐데.. 나는 할머니의 이름으로 많은 하객들이 올 텐데, 그 사람은 부모님 이름으로 올 하객들도 없을 거니까 그것도 걱정되고.. "
늘 여진에게 털어놓던 고민을 이번에는 여정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여진이라면 여주가 하는 말보다 곱절로 위로하며 달랬을 테지만 여정은 별다른 말없이 여주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 그 사람, 결혼식에서 외로울까 봐 걱정도 돼. 언니, 얼마 전에 나 인사 간다고 했었잖아."
-응.
".... 인사 못했어. 도착하니까 그 사람이 비를 맞고 있었다? 어머니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그 비가 쏟아지는 날에 우산도 못 챙기고 허겁지겁 나와서 나한테 오는데.."
그때 그 상황이 눈에 그려져서 여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네이비 슈트를 입고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를 홀로 맞고 있던 준혁의 처진 어깨가 생각났다. 우산을 씌워주며 빗물을 닦아주자 울컥한 얼굴로 눈가가 붉어지던 준혁의 눈빛이 아른거렸다.
"이제 그 사람을 보호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랬어? 왜 그런 마음이 들었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여정의 차분한 질문에 여주가 대답하지 못했다.
".. 그런 거 아닐까? 이렇게 좋은 사람이, 너무 아픈 상처를 갖고 있으니까.."
-그게 사랑의 시작 아닐까? 여주야.
여정이 복잡한 여주의 심정을 이해하며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꼭 그 사람을 보며 행복하고 설레고 웃어야만 사랑의 감정이 생긴다고 생각하지 마. 그 사람의 아픈 모습, 안쓰러운 모습에 감정을 느끼면서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어. 난 연민도 사랑이라고 생각해.
복잡한 마음을 풀어주는 것처럼, 여정의 목소리에 여주의 귓가에 감겨들었다.
"결혼?"
강원철 부장검사가 준혁을 말에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결혼 준비로 인해 한동안 연차를 쓰는 일이 많을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린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믿기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진짜 결혼?? 도대체 어디서 여자를 만났는데??"
"선 봤습니다."
"언제?"
"3월 달에 봤습니다."
"근데 결혼을 8월 31일에 한다고? 이 검사 답지 않은데?? 이렇게 빨리?"
"좋은 사람이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서둘렀습니다."
미심쩍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부장검사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준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준혁의 웃음에 어?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검사가 이렇게 웃을 줄도 알았어? 맞네. 결혼하네."
"...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준혁의 대답에 부장검사가 저를 놀리나 싶은 표정으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준혁만 진지한 얼굴로 눈을 굴리다가 목소리를 냈다.
"당분간만 사건 배당을 조절해주셨으면.."
"이 검사만 할 수 있는 굵직한 사건들을 누구한테 맡겨?"
"김선호 검사도 있..."
부장검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더 말해보란 얼굴을 했다. 준혁이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검사가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다 파악이 되었다.
"뭐, 결혼한다는데 열심해해 봐야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아직.. 안 정했습니다."
준혁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결혼을 두 달도 안 남긴 신랑이 맞나 싶었다. 준혁이 거짓말로 결혼하는 건 아닐 테니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으며 부장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참고할 테니까 나가봐."
"감사합니다."
"청첩장 기대할게."
부장검사의 말에 준혁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준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부장검사가 수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지 검사. 이준혁 검사 결혼한다는데 얘기 들었어?"
제 사무실로 돌아온 준혁이 울리는 전화에 수화기를 들었다.
"네. 형사 2부 이준혁입니다."
-8월 31일 결혼이 사실이야??
"... 저 지금 부장실에서 나온 지 5분 지났는데 벌써 소식이 들어갔나요?"
진희의 높은 목소리에 준혁이 신기한 듯 되물었다. 준혁의 되묻는 목소리가 거짓이 아닌 걸 깨닫자 진희가 흥분한 듯 말을 쏟아냈다.
-결혼식 안 올린다며?? 근데 갑자기 날짜를 받았어? 뭐야? 무슨 일인데??
"... 말하자면 길어서. 대충 그렇게 됐습니다."
-이렇게 어물쩍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 오늘 저녁 김 검사까지 해서 셋이서 삼겹살에 소주 어때?? 내가 쏜다.
몸이 달은 게 여실히 느껴지는 진희의 말에 준혁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저 오늘 선약이.."
-무슨 선약??!!
날카롭게 받아치며 진희가 물어보자, 준혁이 민망한 얼굴을 했다.
"프러포즈 링 고르러 갑니다.. 김 검사랑."
-
일을 끝내고 백화점으로 향한 선호와 준혁이 예약해놓은 곳을 향했다.
"여자들은 로망은 까르띠에, 부쉐론, 티파니 앤 코 요 세 군데 중에 하나래. 근데 세 개 다 돌기 힘드니까 오늘 까르띠에만 예약했어."
"세 군데나 봐야 해?"
아무것도 모르는 준혁이 놀라 되묻자, 선호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야. 열 군데도 더 봐야 할 수도 있어. 너 지금 프러포즈 링 고르는데 나를 데려왔잖아. 프러포즈받는 그분의 취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그러니 무조건 많이 봐서, 그중에 제일 예쁘고, 제일 비싼 걸 해야 해."
"동욱이 형한테 부탁할 걸 그랬다."
대책 없이 말하는 선호를 보고 준혁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바쁜 일 제쳐두고 예약에, 칼퇴에 저를 위해 움직이는 제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준혁을 눈을 홉뜨고 노려보던 선호가 준혁의 어깨를 툭- 쳤다.
"아, 일단 빨리 가자. 부티크는 8시에 문 닫는다."
선호의 리드를 따라 까르띠에 매장에 들어간 준혁이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가장 잘 나가는 프러포즈링, 웨딩 밴드를 쭉- 늘어놓고 보여주는데 준혁은 감흥 없는 얼굴로 반지들을 보았다. 선호가 옆에서 이거 예쁘지 않냐? 하고 물어도 덤덤한 표정이었다.
"고객님. 혹시 가격대를 생각해두신 게 따로 있으십니까?"
상냥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직원에게 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마음에만 들으면 됩니다. 가격 상관없으니 잘 나가는 거, 비싼 거, 예쁜 거 구분 없이 다 보여주세요."
준혁의 말에 직원의 표정이 화사해졌다. 가격 상관없이 보여달라는 말에 작정한 표정으로 창고로 향했다. 선호가 그런 준혁을 보고 놀란 표정을 하며 팔꿈치로 어깨를 툭- 쳤다.
"답지 않게 웬 허세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지금 보여준 게 얼마짜리인 줄은 알아?"
"알아. 설마 살 돈도 없으면서 말했을까 봐."
대수롭지 않게 선호의 말을 받아친 준혁이 차분한 눈길로 매장을 훑었다. 붉은 계열의 인테리어의 화려함이 보기만 해도 웅장함을 자아냈는데, 준혁은 이 분위기가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여주에게는 또 다를지 몰라 앉아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봐도 반지가 끌리는 디자인이 없었다.
"나가자."
결국 1시간 가까이를 구경만 하던 준혁이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준혁과 선호를 보았지만 준혁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받으시는 분 취향을 잘 모르기도 하고, 제 취향에도 아니네요. 좀 더 알아보고 난 후에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아쉬운 얼굴을 한 직원이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준혁과 선호를 배웅했다. 매장을 벗어나 걸어가던 선호가 준혁보다 더 속상한 얼굴을 했다.
"다 예쁘던데, 그렇게 별로였어?"
"아니. 별로라기보다는.. 별로 끌리지가 않아서. 다음에 한 번 다른 곳 가봐야지."
"남자 둘이 프러포즈링 보러 다니는 거 그림 별로지 않냐? 안 그래도 우리 아버지 너랑 내 사이 가끔 의심하시는데."
선호의 말에 준혁이 픽- 웃었다. 연애 안 하고 자꾸 저랑 붙어 다니는 선호를 가끔 의심하는 걸 알고 있기는 했는데, 그걸 선호의 입에서 들으니 새삼 웃겼다. 저녁이나 먹자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정리 중인 한 주얼리 매장에 준혁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 지금 들어가 보면 너무 늦었나?"
준혁의 말에 선호가 제 손목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사실 더 이상의 손님은 받지 않을 시간대이기는 했다. 안 될 것 같다는 선호의 말에 실망한 표정을 한 준혁이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돌아왔다.
"반지, 지금 볼 수 있을까요?"
매장을 정리 중이던 직원들이 준혁의 목소리에 행동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비장한 얼굴을 준혁이 보였다.
-
"다들 아무 말 없어요?"
민망한 얼굴로 여주가 웃었다. 하지만 여주의 충격적인 결혼 소식에 할 말을 잃은 직원들은 입만 벌린 채 있었다. 수영이 먼저 앞서서 박수를 쳤다.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달받아 알고 있던 수영이 정신을 차리고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축하드려요 사장님!! 결혼식까지 일사천리로 올리시네?!!"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많이 바빠질 것 같아서 더 이상 얘기하는 걸 미룰 수 없어서 말씀드렸어요. 최대한 카페에는 지장 안 가도록 하려고 하는데, 요 몇 주 제가 계속 카페에 신경 못 쓰고 그랬죠. 계속 결혼할 때까지는 그럴 것 같아요. 이해 부탁드려요."
"사장님. 진짜 축하드려요. 안 그래도 그때 사장님 언니분 오셔서 하시는 얘기 듣고 속으로 혼자서 너무 궁금해했단 말이에요!"
은서가 박수를 치며 축하를 건네었다. 수영과 은서의 말에 다들 축하한다며 말을 건네었고, 여주가 고맙다며 환하게 인사했다.
"청첩장은 나오는 대로 나눠드릴게요. 30, 31일 날은 카페 휴무일로 잡을 거예요. 결혼식 오시라고 부담 주는 건 아니고 오고 싶다, 시간 괜찮다 싶으면 오세요."
"장소는 어디서 하세요?"
"신라호텔이에요."
"우와. 대박."
보민이 부럽다는 듯 여주를 보고 감탄을 질렀다. 그런 보민의 반응에 여주가 소리 내어 웃었다.
"축의금은 낼 생각들 마세요. 축의금 안 받기로 했어요."
"신라호텔에서 하는데 축의금도 안 받아요? 헐. 빚 생기겠어요."
수영이 놀라 여주에게 말했다. 여주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할 생각이 없었는데 하는 거라서, 이것만큼은 제 이야기대로 들어주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혹여나 축의금 어떻게 하나- 하는 고민 마세요."
"남편 될 분은 뭐하세요?"
".... 음. 공무원이야. "
"나이는요? 키는? 잘생기셨어요?"
쏟아지는 은서의 질문에 여주가 차근차근 대답했다.
"나보다 3살 많아. 35살이고. 키는 180.. 넘는 것 같아. 잘생겼어. 보는 사람마다 다 얼굴 칭찬하던데?"
"대박. 너무 궁금해! 어디서 만나신 거예요?"
"선 봤어요."
"딱 보자마자 결혼할 사람이구나 하고 느끼셨어요?"
민형의 질문에 여주가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쏟아지는 질문에 정신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밥도 안 먹으려고 했었는데?"
"... 우와. 더 로맨틱해.. 처음에는 정말 아닌 것 같았는데, 만나보니까 완전 운명이라서 결혼하시는 거잖아요!"
보민과 은서가 여주의 말에 흠뻑 몰입한 모양인지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직원급 식구들 중 유일한 기혼자인 수영만이 여유로운 얼굴로 여주를 보며 말했다.
"부럽다~ 저때가 제일 좋을 때인데."
"제조장님도 아직 남편이랑 사이좋으시잖아요."
"우린 그냥 친구야. 서로 의리 지키고 살아."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며 이야기를 나누던 직원들에게 몇 가지 당부사항을 전달한 여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혁과 예복 맞춤을 하러 가기로 했기 때문에 지금부터 출발해야 시간이 얼추 맞았다.
"오늘은 어디 가세요?"
"결혼식 때 입을 정장 맞추러 가요."
"사장님 드레스 입은 거 상상 안 가요."
은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고, 여주가 그런 은서의 말에 콧등을 찡긋거리며 대답했다.
"나 드레스 안 입는데."
"헐. 그럼요?"
문을 열고 나서던 다른 직원들도 여주의 말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다. 여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정장 입어. 드레스 안 입는다고 말 끝냈어."
".. 역시. 우리 사장님. 달라도 뭔가 달라. 멋있어요!! 대박!"
보민이 엄지를 내밀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여주를 보는 눈이 반짝거렸다. 그런 보민이 귀여운지 여주가 웃으며 보민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보민이 실망 안 시키게 멋진 거 입을게. 다들 수고하시고, 퇴근들 잘하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주말에 뭐할까요?"
예복을 맞추고 나오는 길에 준혁이 여주에게 물었다. 준혁의 새삼스런 질문에 여주가 고민에 빠졌다.
"카페에서 일?"
심각한 척 말한 여주가 준혁을 보고 장난스레 웃었다. 여주의 농담에 준혁이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가 다시 얼굴이 밝아졌다.
"생각한 거 있어요?"
"... 저희 반지 맞춰야 하는데."
"맞다. 반지도 맞춰야 하는데.. 우리 할 거 너무 많네요."
여주가 박터지는 소리를 내며 준혁의 말에 동의했다. 두 달이면 넉넉하다고 생각했던 일정이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벌써 다음 주에는 준혁과 스튜디오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고, 결혼식을 하기로 한 호텔에도 방문해봐야 했다. 정순의 파워 덕분에 31일이라는 촉박한 날짜에 구애 없이 예약을 할 수 있었고, 시간대도 천천히 고르라는 배려를 받았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결혼식 덕에 청첩장도 맞춰야 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해야 할 것들이 점점 늘어갔다.
준혁이 조심스럽게 여주를 보며 물었다.
"여주 씨. 좋아하는 브랜드나 디자인 있으세요?"
"아니요. 전 일하니까 반지 잘 못 끼니까 관심이 없어서... 전 반지 맞춰도 목걸이에 걸어서 다녀야 할 것 같아요. 꼈다, 뺐다 하면 분명 잃어버릴 거예요. 우리 정말 심플한 걸로 해요."
".. 비싼 걸로 맞춰드리고 싶은데..."
"심플한 것도 비싼 거 많아요, 준혁 씨. 저 싼 거 한다고 한 적 없어요."
반지만큼은 본인이 꼭 하겠다며 주장하던 준혁이 생각나 여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능청스레 대꾸했다. 준혁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뜻을 담은 대답이었다. 그런 여주의 대답에 마음이 놓인 준혁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주말에 어떻게 할까요? 백화점에서 만날까요?"
준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던 여주가 행동을 멈추었다. 고개를 저은 여주가 준혁에게 웃어 보였다.
"카페로 데리러 와주세요."
"... 어, 직원분들은 아직.."
"오늘 말했어요. 직원들이 엄청 궁금해하니까 토요일에 와요. 준혁 씨 소개해 줄 겸 내 카페도 보여줄 겸. 준혁씨 제 카페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죠? 분명 내 카페 이름도 까먹었을 거야."
".... 동아 카페.."
"동화거든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준혁을 밉지 않게 쳐다보며 여주가 대꾸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여주를 보던 준혁이 조심스레 여주의 손을 잡고 목소리를 냈다.
"여주 씨 카페에 제가 편히 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생각 안 하려고 하니까 까먹은 거예요. 이제는 갈 수 있으니까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갑자기 제 잘못이 되는 것 같은데?"
"... 쌍방과실?"
여주의 눈치를 보며 준혁이 말했다. 여주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준혁을 올려다보다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배고프지 않냐며 준혁이 말을 돌리며 여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짐 정리는 얼마나 했어요?"
"폐기해야 하는 물건들은 거의 다 폐기했고, 박스 정리도 반 정도는 끝났어요."
"할머니 말대로 일찍 들어올 수 있으면 일찍 와요."
"... 네."
"준혁 씨 내 잠버릇에 적응하려면 진짜 힘들 텐데.. 걱정이에요. 저 잠버릇이 진짜 안 좋거든요."
미간을 찌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 여주를 보고 준혁이 웃었다. 제 잠버릇을 걱정하는 여주가 귀여워 보였다.
"얼마나 심각하길래 그런 표정이에요?"
"진짜.. 진짜 안 좋아요, 준혁 씨. 막 굴러다니고 넘어지고, 벽에도 머리도 박고 그래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자다 보니까 저를 컨트롤해줄 사람이 없었어가지고 그런가 잠버릇이 이렇더라고요."
"참고할게요."
"일하는 사람이 저 때문에 잠도 못 자고 그러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아서.."
여주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여주를 보고 준혁이 웃음을 삼키며 괜찮다고 여주를 다독였다.
-
"도와줘."
준혁이 진지한 얼굴로 선호에게 말했다. 요점은 여주가 운영하는 카페로 여주를 데리러 가기로 했는데, 그때 프러포즈링을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였다. 하지만 선호는 다른 곳에 초점이 맞춰져 놀란 얼굴을 했다.
"동화카페??"
"응."
"... 너 결혼하는 사람이 동아 사람이야?"
선호의 말에 준혁이 놀란 눈으로 선호를 봤다. 선호가 그런 준혁의 반응에 더 놀라 박수를 치며 제 입을 막았다.
"그래서 리베이트 건을 나한테 넘긴 거...!! 와. 대박."
"어떻게 알았어?"
"야. 내가 네 앞에서나 이렇게 빙다리 핫바지처럼 굴지. 우리 아버지 호 로펌 대표야."
큰 형이 담당 고문으로 동아 쪽 도와주고 계셔. 누나는 동아병원 담당 변호사로 일하다가 아버지 로펌을 돌아온 거라 잘 알고.
선호가 말을 마친 후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준혁을 봤다.
"동아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이 검사."
"선 봤어."
"누가 주선을 해줬는데? 그 집 막내 손녀 파혼하고 결혼 안 한다고 이 쪽에 소문 자자해. 그 집 막내 손녀가 얼마나 유명한지도 모르지? 다들 얼마나 탐냈는데."
선호의 말에 준혁이 이번에는 신기한 눈을 하며 선호를 바라봤다. 그런 준혁의 눈빛에 선호가 왜 그러냐며 물었다.
"아버지 회사 일은 관심도 없는 네가 이런 일을 알고 있는 게 신기해서."
"그 집 막내손녀가 관심이 없다고 얘기를 안 들을 인물이 아니야. 어쩐지.. 사실 저번에 봤을 때 얼굴이 익숙하기는 했는데, 너랑 그런 사이인 사람이 동아회장님 손녀라는 건 매치가 안되니까 설마 했지."
"그래서.."
정순의 존재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을 소개하는 게 가능할 것 같다는 덤덤한 대답을 했던 과거의 여주가 기억났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선호의 입에서 이렇게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정말 여주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간접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누가 주선해줬는데?"
선호가 되물었다. 준혁이 그런 선호를 보며 작게 웃고 대답을 피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나 프러포즈할 건데 안 도와줄 거면 동욱이 형 찾아가고."
"아, 앉아! 질투 나서 안돼! 다른 사람들 끌어들이지 마라. 내가 최고의 프러포즈를 할 수 있게 도와줄게!"
의자에서 일어나는 준혁을 끌어다 앉히고 선호가 생각에 잠겼다. 풍선을 쓰자, 캔들을 쓰자 구닥다리 방법을 입에 올리는 선호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보던 준혁이 혀를 짧게 차고 일어났다.
"나 간다."
"왜!! 이게 클래식인데!!"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한 거지. 수고해라."
준혁이 미련 없이 문을 열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나간 준혁의 자리를 보며 선호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혼 생각도 없는 사람을 선자리에 내보냈다..?"
아이. 몰라. 선호가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눈을 감았다.
-
뒷좌석, 앞좌석, 트렁크 가릴 것 없이 꽉 찬 꽃들을 심란한 얼굴로 보던 준혁이 차를 세우고 카페에 홀로 들어섰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고 생각했건만 카페에는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크고 고급진 카페의 모습에 준혁이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며 쭈뼛거렸다. 여주를 불러야 하는데 어디다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준혁이 결국 주문하는 곳 앞에 섰다. 포스기 앞에서 주문을 받는 직원이 준혁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저.... 사장님 좀 뵈러 왔는데요."
"네?"
"그.."
저를 뭐라고 소개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던 준혁이 말을 먹었다. 머뭇거리는 준혁을 의아한 눈으로 보는 직원을 향해 준혁이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이준혁 검사라고 전해주시면 아실 겁니다. 말씀 좀 전해주세요."
"아... 네..."
직원이 커피를 내리는 보민에게 말을 걸었다. 열심히 주문서를 보며 커피를 만들던 보민이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검사? 왜? 사장님 무슨 일 생기셨나? 하며 복잡한 얼굴을 했다. 준혁을 힐끔 본 보민이 잠시만요.라고 말을 하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포스기 정산 금액과 실제 정산 금액이 맞지 않아서 계속 미간을 찌푸리며 계산하던 여주가 노크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
"응? 왜? 바빠? 도와줄까?"
"아니요! 이준혁 검사님이라고 사장님 찾으시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보민의 말에 여주가 어? 하고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일어났다.
"아니야. 지금 왔어?"
"네. 검사님이 왜 카페를 찾아오시는데요? 근데 엄청 잘생겼어요. 완전 연예인인 줄. 손님들도 다 쳐다봐요. 너무 잘생겨서."
"그래?"
웃음을 삼키며 태연하게 대꾸한 여주가 픽업대 앞에서 황망히 서있는 준혁의 뒷모습을 보고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여주의 반응에 보민이 왜 그러지? 하는 얼굴로 여주와 준혁을 번갈아봤다. 뒤에서 여주가 준혁의 손을 잡으며 제 존재를 알렸다.
"아니, 이준혁 검사가 뭐예요. 정 없어 진짜."
"여주 씨."
여주를 보고 준혁이 반가움에 활짝 웃었다. 낯선 존재를 흘끔거리던 직원들도 여주와 준혁의 투샷에 대놓고 눈을 고정시켰다. 여주의 뒤를 쫓아오던 보민은 맞잡은 두 손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설마- 하는 눈이었다.
"소개가 늦었죠? 인사해요. 저랑 결혼하는 사람이에요. 제 남편 될 사람 이름은 이준혁. 직업은 검사."
"안녕하세요. 이준혁이라고 합니다."
"준혁 씨. 다음에는 오면 저 왼쪽 끝에 사무실 보이죠? 거기로 바로 와요. 누가 아내 가게에 그렇게 서있어요."
준혁의 타박하는 여주의 목소리에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남편, 아내라는 말이 여주의 입에서 나와서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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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 선호아버지는 여주가 파혼하고 나서 선호를 여주에게 소개시켜주려고 했었다. 아버지가 한참 선호에게 여주를 소개시켜주려고 귀에 피나도록 여주 정보를 읊어주는 바람에 선호가 동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음. 선호는 그 당시 결혼에 뜻이 없어서 완강히 거절하였고, 여주의 할머니도 더이상 여주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아 거절하여 이 만남은 성사되지 못함.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6.12 23:03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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