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전통
우리는 다시 기차에 올랐다.
예블라(Gevle)는 다시 한참을 가는 거리,
그런데 아내랑 함께 앉을 자리가 없어 따로 떨어져 앉게 되었다.
내 옆엔 60대의 현숙해보이는 지성파 할머니가 앉아있었다.
그때 차장이 왔다.
난 유레일 패스를 건네줬다.
차장은 익숙하게 제자리를 찾아 스탬프를 찍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매너가 정말 고맙게 생각되었다.
그러니까 차장에 따라 잊어먹거나 아니면 요령을 몰라 묵과하는 경우가 있다.
이쪽은 아마 유레일 사용객이 별로 다니지 않는 코스여서
그런 일이 가끔 생기는 모양이었다.
나는 마치 어망을 피한 물고기처럼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예블라는 인구 약 8만의 동부스웨덴 중심지다.
북유럽이 원래 겨울엔 냉동실이라 연중 3개월은 얼음에 갇히기도 하지만
예블라 항은 아주 바쁘게 돌아가는 무역항이다.
철광석, 목재. 제지, 피혁제품, 섬유, 맥주,자기제품의 수출, 그 관문이다.
이 나라의 가장 오래된 도시였으나 150년전에 도시가 대부분 화염에 소실된 후
근대식으로 재건되었다.
사실 읍살라보다 더 관광객이 몰린다.
전자에는 역사가 숨어 있고 후자에는 예술과 경제가 들어있다.
그러니 역사에 관심이 없는 외국인은 읍살라에서 별 흥미를 느낄 수 없으나
예블라에선 그게 아니다.
예믈라 대학교
예블라에는 별난 전통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짚이나 나무로 대형의 염소를 만들어 비밀히 보관했다가
크리스마스때 태우는 축제행사를 한다.
그런데 2001년, 미국인 투어리스트가 잡혀 1개월 감방 신세를 지고
게다가 10만크론의 벌금을 물었다는 스캔달이 있다.
그는 그 염소를 성급하게 태워버렸는데 이유인즉 자기는 염소를 태우는 것이
이곳 스웨덴의 전통인 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통역의 행운
옆에 앉은 할머니는 처음엔 정숙한 표정으로 인사를 해왔다.
“반가워요. 어디서 오셨어요?”
“코리아, 3면이 바다이고 아름다운 산이 많은 나라.”
“하하 알아요, 우리 삼촌이 가서 전쟁을 해서 잘 알아요,
지금은 아주 잘사는 나라지요?”
“그럼요. 근대 삼촌이 어느 나라 분이었어요? “
스웨덴, 놀웨이가 한국전 참전국이 아닌데?
난 그게 의아스러웠다. 그래 바로 물었다.
“덴막사람. 난 덴막에서 자랐어요.”
이 할머니는 그 때부터 깔깔대기 시작했다.
내릴 때까지 계속 깔깔댔다. 나는 그게 좋았다.
그래 나도 끌끌댔다. 한 시간을 내내 깔깔, 끌끌댔다. 하하
“이 나라 왕을 존경하나요?”
“헤헤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왕은 특히 여성들의 우상이잖아요?
국왕 칼 구스탑은 1946년생이니 나보다 쬐끔 어리죠.
태자였던 아버지가 코펜하겐에서 비행기 사고로 하늘로 갔어요.
그래 지금의 구스탑왕의 조부가 왕관을 썼어요.
그때 구스탑은 한살짜리 애기였으니까요.
네 살때 태자가 되었어요.
1973년, 조부가 서거하고 27세에 왕관을 썼어요."
“연세가 쬐끔 많아 당신께선 왕비지망엔 그만 유감스럽게도
용단을 내지 못했나요?”
“헤헤 정이 들면 그깐 나이차가 문젠가요?
하지만 태자가 뮤닉 올림픽에 갔는데 그 때 통역을 소개 받았어요.
그 통역이 지금의 왕비야요,
행운이 굴러들어온 거죠! 하하”
졸작과 걸작
“어쩜 준비된 대사를 외우는 앵커같아요. 당신은..”
”예, 난 엠시라는 걸 했어요. 하하”
“와! 어쩐지 말씀이 청산유수라 했더니!”
“네? 하하 난 지금 당신과 채팅을 즐기고 있어요. 하하”
읍살라까지 올 땐, 숲속에 숨어있는 언덕위의 빨간집이랑 눈이 좋았다.
시원하게 트인, 넓은 목초지대를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엠시의 채팅맛에 그만 난 창밖으로 흘러가는 경치를
거의 다 놓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난 질문이라는 공을 계속 굴린다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데 스웨덴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부자가 되고 또 복지 국가가 되었어요?”
“난 여자니까 그걸 먼저 말씀 드리고 싶어요. 여자의 취업율이 80%가 넘어요.”
“하하 여자야 뭐 남자의 갈빗뼈를 훔쳐다 만드신 장물이 잖아요? 하하”
“네? 하하 당신은 뭘 착각을 하고 계세요.”
“내가 뭘요?”
“원래 걸작이란 많은 졸작을 만들어 그걸 폐기처분한 다음에 새로 만들어요.
그러니 남자는 졸작이고 여자란 걸작이라요, 헤헤”
“틀린 말이 아니네요. 하하”
“하하 동의해주는 남잔 정말 신사야요. 하하”
“여자의 취업율? 그거 남자는 관리직, 요직을 거의 독점하고 여자는 변두리나
달동네에다 배치할 테죠 뭐”
“남자란 그저 뻐기는 맛에 사는 바보야요. 인정해요.
그러면서 여자들은 안정과 평화를 즐긴단 말이에요.하하”
“그런 걸 인정해주는 여성들은 현명해요. 하하”
소득의 재배분
“다음으로, 복지란 게 뭡니까?
빈부간의 균등한 교육혜택, 도농간의 작은 소득격차. 어린이와 노인중심의
공공서비스, 뭐 이런 걸 들 수 있잖아요?. 하하”
그게 말 같이 쉬운가?
“농촌사람들이 어떻게 대등한 소득을 받아요?”
“그게 사실이에요. 비교적으로 그렇다는 얘긴데 시골에 사는 게
더 좋은 점이 많아요.
대체에너지랑, 세금우대. 참정의 기회, 이런 면에서 농촌우대를
하고 있어요. 하하”
-대체에너지란 석유대신 전기공급을 의미하는 거로군,
음 유가부담이랑 자동차세를 면제해 주면 그럴 테지.
소득의 재배분을 잘 한다. 그런 얘기다.
난 동의하고 싶은 게 바로 교육의 균등이란 점이다.
사실 한국에서는 영어교육을 뭐 대단히 강조한다고 사람들이 비난해 왔는데
여기에 와 보니 전연 그 게 아니다.
러시아는 영어의 공백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는 좀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성세대는 아직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유독 스웨덴에서는 국민 거개가 영어를 한다. 60대까진 다들 잘 한다.
한국의 유치원생이 영어 세대이다.
그들이 60대가 되려면 50년이 지나야 한다.
이렇게 반세기를 뒤 쳐져 있으면서 영어교육에 제동을 거는 세력이
더 우세하다.
영어가 어디 미국만의 언어인가?
반미 친공세력이 영어를 러시아식으로 풀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세계공용어지!
여기까지 생각의 굴레를 굴리자, 솟아오르던 웃음이 잠수해버렸다. 제길…
북유럽 5개국이라면, 아이슬랜드, 덴막, 놀웨이, 스웨덴, 핀란드 이렇게
다섯나라다.
총인구 2,500만은 한국인구의 절반 밖에 안 된다.
그 중에서 실업자는 42만정도이니 2% 미만이다.
참으로 잘 사는 나라들이다.
에토스
그렇다면, 세계화의 물결을 어떻게 탔을까?
이 할머니가 유식하다는 건 사실인데 이 것까지 알까?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근로자의 취업정신을 ‘에토스(ethos) 라고 했다.
그러니까 일하는 자는 가난할 수 없다.
다같이 잘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라는 노동의 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줬다. 마치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정신과 유사하다.
“글로벌라이제이션 모델은 어떤 방식으로 수용했습니까?”
“내가 정부 대변인은 아닌데, 무역장려가 그 핵심이었다고 생각해요. 마침
그제께 신문에 났어요.
GDP의 45%가 무역에서 생깁니다.
미국은 아마 15% 밖에 안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무역의 장애요인을 과감히 제거했어요.”
하, 이 할머닌 참 용하다.
어떻게 시사문제에 그렇게 정통하단 말인가?
나라가 기업을 잘 하도록 지원하고 좋은 무역을 장려한다.
기업의 창의력과 실적을 포상한다. 그런데 개도국에선 올가맨다.
규제가 너무 많다.
너무 어려운 문제를 자꾸 묻는 게 미안했다.
그래 이번에는 쉬운 문제를 묻기로 했다.
사자의 포효보다, 기적소리보다 더 잘 듣기는 건 미인의 속삭임이다.
미혼모의 출산율
“스웨덴의 미혼모 출산율이 55%라는데 그 이유가 뭐죠?”
“하하, 그건 아이슬랜드에선 65%야요. 북유럽에선 만혼풍이 성해요.
그리고 산모의 출산연령도 늦어지고.”
“바꿔 말하면 독신기간이 그만큼 연장되는 거네요.”
“젊은 것들이 독신생활을 무슨 피난처로 알고 있어요. 간청하지 않아도
해는 지는데 말이야요. 하하”
“경험이 등불인데, 출산과 양육의 경험이 없는 세대가,
늦게 애를 키우는 게 얼마나 더 힘이 드는 진 미쳐 생각하지 않아요. 글쎄”
-혼외정사는 또 얼마나 많을까?-
미혼모도 있지만, 이혼자도 있고, 여행객도 있고, 이민자도 있다.
스웨덴 사람들은 정말 쉽게 친해질 수 있다.
어쩜 남녀간의 장벽이 베르린 장벽처럼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미혼모의 출산율이 높다.
이혼율이 높다는 건 바로 편부모가 많다는 거고, 국내거주자가 아닌 부모의
수도 자꾸만 늘어난다.
“몇살이면 결혼이 허용돼요?”
“18세면 자유로 결혼해요. 그래도 결혼은 안하고 동거를 해요.
그러니까 30세가 되기 전에는 기혼자 보다 동거자가 더 많아요.
이건 눈만 맞으면 글쎄, 무슨 극장의 로맨스 프로인 줄 알아요.
하하 바로 동거생활로 들어가는 거에요.
당신 같은 외국 사람들 보기에 창피해요.”
이때 엠시여사는 내 귀 밑에다 입을 갖다 댄다.
이따금 터져나오는 웃음을 웃을 땐 어깨에 기대거나 내 턱밑에다 입을 감춘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엠시 여사가 하나도 밉지 않다.
외려 귀엽다.
난 채팅이란 게 이렇게 달콤하단 걸 여기 스웨덴에 와서 처음 알았다. 하하
총각 처녀는 혼전에 거의가 된장맛을 다 본다는 게 아닌가?
콩을 삶아 짓이겨 묶어놓았다가 보글 보글 끓여먹는 된장엔 콩의 원형이 없다. 하하
동거생활
이 순간 난 엉뚱한 발상이 유성처럼 망막너머로 지나가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젊은 코리안들이 스웨덴엘 대량으로 원정을 가 동거방식으로
무제한 파종을 하면...
그 벽안과 금발, 하얀 피부의 코리안 2세들이 봇물처럼 마구 쏟아져 나올 게
아닌가? 하하하….
이건 물론 조크다. 그 조크를 당장 털어놓을 상대도 없다.
그러나 많은 경우, 아버지의 사랑을, 때로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녀가 대량으로 출생하고
자녀양육의 신성한 사명을 잊어버리는 독신자가 급증한다는 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정말로, 시원한 느티나무 가지에 앉아 유쾌하게 지저귀는 새는 집을 짓지 않는다.
1960년대에. 백인은 5분의 1, 흑인은 2분의 1 이 미혼모 출산이었는데,
지금은 백인계인 아이슬랜드에서. 그리고 스웨덴에서. 흑인의 모범을 따르고 있다.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동거생활 (cohabitation)이 그들에겐 거의 장애물 없어 얻기 쉬운 별장이란
말인가?
만남
흑인들 뿐만 아니라 종전에는
가난 때문에 미혼모나 독신모의 출산이 많았으나
지금은 영어권 국가의 대부분의 경우, 이혼녀와 미혼모의 약 75%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잘 사는 나라에서 쉽게 동거생활에 들어가 아이를 낳는다.
아프리카에서 미국에서 무수한 흑인 실업자가 사랑은 하고 싶어도
그 놈의 돈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에 비해 무려 3 배나 편모양육이 늘어났다.
사랑할 때야 좋지만 키울 땐 그리 달콤한 시간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이 때였다.
엠시도 엠시 나름일 테다. 여하튼 이 분은 많이 안다. 그래서
“혹시 학위가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사회학을 전공한 박사라고 했다.
어쩌다 이런 분을 또 만났을까?
핀란드의 기차에서 만난 정부의 고문이 생각났다.
어쩜 개미는 길에서 개미를 자주 만나고 똥개는 또 똥개를 자주 만난다더니
골치 썩히는 흰색칼라를 길에서 자주 만난다.
하하 그게 다 세상 사는 이치가 아닌가? 하하
백인의 조상
이번엔 이 걸 물어보았다.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아! 그런 경향이 이 노딕사회엔 살아있구나!
바다속에 살고 있는 덩치 큰 고래들처럼 살아 있구나!
“혹시 백인 노딕들의 조상은 어떤 종족일까요?”
하고 물었을 때였다.
엠시 여사는 전연 엉뚱한 대답을 했다.
“백인 노딕들은 역사와 문학 속에서 악마의 후손으로 묘사되어 있어요.”
“네? 아모리 그럴 이가?”
“보세요. 그런 사상을 받아 지금의 백인들은, 긍지는 커녕 인종의 이질화를
제촉하고 있잖아요?"
국정책임자들이 흔히 다원화 사회가 더 이상적이라고 외치고 있어요.
혼혈사회 말입니다. “
“스웨덴 정부도 이질화가 부의 중대한 요인이라고 했지요?”
”정부는 미국보다 스웨덴이 훨씬 더 이질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웃기는 얘기다. 미국은 잡종들의 집합이지만 유럽은 아직은 유럽인들의
집합이다.
그걸 이질적 (heterogeneous)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하-
“아하! 그래서일까?"
너무나 잘 빠진 화이트 노딕들 앞에서 열등감에 빠져있는 나를
그들은 오히려. 십중 팔구가 열성으로 환영하고 좋아한다.
그런 심리사조를 난 전연 알지 못했었다. 하하
예를 들면 식품점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캐셔앞을 지나가는데
내 차례가 되었다.
그 여성 캐셔가 고개를 들고 쌩긋 웃으며 다정하게 인사를 한다. 그 바쁜 중에도…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언제나 내게 불리한 대답을 찾는다.
“그 많은 북 유럽 사람이 당신을 환대하는 건요. 당신이 아롬하게 보이기
때문이에요. 하하”
아롬하게 보인다.
어른이 애기를 보는 것처럼 맞설 상대가 아니니까, 호랑이가 사슴을 보고
좋아서 하하 …
영원한 비밀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내의 그런 비유를 탓하지 않는다.
질투는 일종의 칭찬이니까 하하
백인의 조상이 악마(devils)이고, 코카시안 또는 앵글로 섹슨족이다?…
그들 유럽인들은 원래 노딕(Nordic) 즉 북유럽, 다음 알파인 사람들 즉
중부유럽인, 그리고
지중해 사람들, 이렇게 세 개의 부류에 속한다.
엥글로 섹슨족은 튜톤족의 한 부족이다.
Caucasian 이란 말은 ‘유럽에서 온’이란 말의 어의론이다.
튜톤족은 게르만족에 속한다.
인종의 분류에 취미가 있는 학자들이 그렇게 멋대로 갈라놓은 것이다. 하하
그러니 지금은 그냥 ‘백인 노딕’이라고 하는 게 더 낫다.
기차에서 내릴 때, 엠시 여사는 내 귀에다 속삭였다.
뭐라고 말했는지 그 건 영원한 비밀이다. 하하
얼마나 깔깔대고 끌끌 댔는지 배가 고파왔다. 하하
예블라 항은 읍살라 보다 훨씬 모양이 좋았다.
구경꺼리가 더 많았다.
달구경을 하고 있으면 달도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
우리 자신이, 실은 구경꺼리가 되고 있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으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마구 돌아 다녔다.
그날 오후, 다시 스톡홀롬 역에 왔을 때였다.
귀여운 아가씨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