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부의 단상]
푸른문학 2019년 가을호
10월 6일, 음력 구월 초여드렛날
집에서 거의 5km 남짓한 거리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띠리링~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지?
"택배기사인데요. 택배가 왔는데 공사중이라 차가 못
올라가는데 어떡하죠?" 난감했다. 요즘 상수도 공사
하느라 자동차 통행이 안되니 말이다. "비가 오지요?
비를 안맞는 곳에 두고 가시면 안될까요? "라고 했다.
"사장님댁 올라가는 삼거리 공사하는 곳 돌틈 사이에
놓으면 비 안맞을 것 같네요. 여기 두고 갑니다." 라고
했다. 혼자 속으로 "나는 사장 아닌데..." 중얼거리며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한 후에 아내에게 급히
전화를 하여 내려가 택배를 찾으라고 했다. 조금후에
아내가 전화를 했다. "돌틈 사이 있는 택배 찾았는데
뭔지 알아요? 바로 당신이 좋아하는 <푸른문학>에서
책이 온 것 같아요.헉헉.." 아마도 비탈길을 걸어올라
가면서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아내에게 "맞아! 푸른문학 가을호가 올 때가 되었어!
수고했네!" 산골살이 하다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싶다. 저녁무렵, 집에 오자마자 택배 포장을 벗겼다.
반가운 <푸른문학 2019년 가을호>와 대면을 했다.
이번호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 ☆ ☆ ☆ ☆ ☆ ☆ ☆
못말리는 수집벽(蒐集癖)
촌부에게는 남다른 수집벽(蒐集癖)이 있다.
취미라고 할까, 아님 특기라고 해야할까
잘 구분은 못하겠지만 조금 특별하고 특이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전적인 의미의 수집벽(蒐集癖)은 "취미나 연구를
위하여 여러가지 물건이나 재료를 찾아서 모으기를
대단히 즐기는 버릇."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의학적인
분류를 한 의학사전에서는 수집벽을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하고 있다. "물건을 모으는 습벽을 말하며 병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눌 때 병적인 수집벽은
"collectionism"이라고 하고, 그렇지않고 즐기면서
하는 수집벽은 "collecting mania"로 분류한단다.
그저 즐기며 재미삼아 취미로 하는 촌부의 수집벽은
"collectionism"이 아닌 "collecting mania"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언제부터 이런 수집벽이 생겼을까? 생각하건데 50년
넘게 한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요즘과 달리
우표를 붙인 편지와 엽서가 통신 수단이었을 당시에
편지 겉봉에 붙은 우표를 물을 묻혀 떼어내고 수집을
하게 된 것이 시초였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서울에서
편지를 보내시면 읽는 것은 어머니 몫이지만 곧바로
봉투를 차지해 우표를 떼어냈던 그 기억이 너무
새롭다. 그 후 서울로 전학을 왔더니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우표를 돈을 주고 사는 것이었다. 수집
목적으로… 시골 촌놈의 눈에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 뿐이 아니고 서울 아이들은 우표 따먹기 놀이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저 옆에서 보긴 했으나 하고
싶은 충동만 생겼지 전학을 온 경상도 촌놈이라고
무시를 당했고 끼워 주지 않았다. 절호의 기회가 생긴
계기는 1968년 12월 5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였고 다음날 숙제가 외어오기
였다. 그 다음날 아침, 조회가 끝나고 담임 선생님께서
"국민교육헌장 외울 사람 손들어!"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요? 제가 외울랍니다."라고 경상도
사투리로 말했더니 주위 친구들이 "촌놈이?",
"손 안내려!", "죽을래!" 등등 시기가 섞인 듯한 야유로
웅성거렸다. 다행히 손을 든 사람은 단 세 명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께서는 "그래! 전학 온
이용식이가 외어봐라!" 라고 하셨다. 벌떡 일어나
자신있게 다 외웠더니 교실 안은 조용해졌고
선생님께서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이 아이가 저
멀리 경상도 남해에서 반장을 하다가 왔다. 촌놈이라
놀리지말고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시며 아이들에게
당부를 하셨다. 그 날 이후 몇몇 아이들과 우표따먹기
놀이도 함께 할 수가 있었고, 진석이란 아이는 집에
우표가 많다며 꽤나 많이 그냥 주기까지 하였다.
그때 고마운 선생님 존함은 박태근 선생님이셨는데
지금쯤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그 당시에는
감사하다는 말씀도 못드렸는데... 그 이후 촌부
나름대로 우표수집은 계속 어어졌고 사용한 우표
위주로 수집을 하였다. 그러니 많은 양은 아니다.
심지어 광고회사 시절에는 출장, 연수등을 다니며
면세점에서 싸게 파는 외국 우표도 수집하게 되었다.
또한 동료들이 해외촬영을 위하여 해외에 나갔다가
들어올 때는 선물을 사오곤 했는데 우표수집을 한다는
소문이 나서 촌부의 선물은 모두 우표를 사다주는
것으로 통하였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동료, 선후배들이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우표수집은 이곳 산골로 이사를 오면서 중단이
되었지만 가끔씩 보며 추억에 잠겨본다.
그 다음은 사보, 간행물 같은 책을 수집하는 버릇이
우연히 생겼다. 1975년 해태제과에 입사하던 그 해
12월 해태제과의 월간 사보가 창간되었다. 당시에
판매관리실에서 근무하며 출하, 판매 집계와 서무를
담당하여 매월 총무부에서 사보를 받아다 직원들에게
나눠주었고 남는 것을 두어 권을 혹시나 하여 보관을
하다보니 해가 지나면서 쌓이기 시작하여 수집하듯
집에 갖다 놓았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훗날 그룹사
광고회사에서 퇴직할 무렵 해태그룹이 lMF로 인하여
와해가 되면서 사보도 폐간되었다. 재직기간 동안의
해태그룹 사보를 모두 수집해 보관한 사람은 촌부가
유일하다. 또한 해태그룹 마지막 근무처인 광고회사
코래드 사보도 창간호부터 폐간될 때까지 모두 수집,
보관을 하고 있는 사람도 촌부 뿐이다. 당시 생각으로
퇴직을 하게 되면 회사에 기증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룹은 와해되고 광고회사 또한 주인이
바뀌게 되어 그냥 지금껏 촌부의 서재에 꽂혀있다.
추억을 간직한 추억의 산물이 되어…
그런데 최근에 그 수집벽이 다시 꿈틀거렸다.
우연히 서재에서 책을 찾다가 가지런히 정리된 책들
사이에 계간 <푸른문학> 동인지가 눈에 띄었다.
창간호부터 최근 2019년 여름호까지 있는데
딱 한 권이 비었다. 촌부가 푸른문학을 통하여
2017년 12월 3일 제8회 푸른문학 신인문학상
수필부문에 당선되었고 더불어 50년 동안 간직했던
꿈인 수필가로 등단을 하였으며 푸른문학회 동인이
되었다. 등단을 하기전에 발간된 동인지
<푸른문학>과 함께 많은 시집, 수필집 등을 푸른문학
이은별 대표님께서 챙겨주셨다. 또한 푸른문학에
추천해주신 선배 문인 가인 시인님도 많은 책을
선물해 주셨다. 두 분께 너무나 과분한 책선물을
받아서 감사한 마음이다. 읽고 서재에 꽂아둔 책을
보면 두 분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데 촌부의 등단
이전에 발간된 2016년 푸른문학 가을호가 비어서
인터넷 서점을 검색했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이은별 대표님께서 푸른문학 2019년 여름호를
보내주셔서 부탁을 드릴까 말까 망설이다 염치불구
하고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보내주시겠다고 하셨고
이틀 후에 기다리던 책이 도착하여 읽은 다음
푸른문학 칸에 꽂아두고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레 발동을 한 촌부의 못말리는 수집벽을
만족하게 해주신 푸른문학 이은별 대표님께 거듭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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