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내용을 삭제하지 마세요!!
(아래 선 아래에 글을 올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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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가신 아버지는 민자통(民自統 민족자주통일)을 주장하며 활발히 활동을 전개 하셨는데 그 주장은
바로 미국의 신경을 정통으로 건드리는 것이었다. 정통성이 없는 박정희는 미국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어
맨먼저 한 일은 '반공을 국시로'내걸며 미국의 입맛에 맞도록 온힘을 다하는 한편 거슬리는 자국인들에겐
무자비한 압력을 가하는 거였으니 그리하여 혁재(혁명재판소)라는 이상한 기구를 만들어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간다.
그것은 그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기도 했지만 미국의 눈에 가장 크게 걸려있던 그의 약점 바로 그 빨갱이
경력을 무마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보라, 이래도 내가 빨갱이라는 거냐 하는 시위로.
그리하여 미국은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몇년 후 케네디는 드디어 박정희를 미국에 초청한다.
비행장에 동원되어 갔던 교포들은 종이 태극기들을 흔들며 서있었는데 트랩에서 내리는 박정희가 하도
새카맣고 작아 키큰 미국 경호원속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고 그들은 누가 대통령인지를 못알아보아
우왕좌왕하여 몹시 창피하더라했다. 대외용 업무를 고려해서 외모도 어느 정도 고려해서 뽑는 게 좋을
거라는 의견인데 누가 뽑아서 된 대통령이었어야 말이지.
대놓고 그 혁재 작업에 들어가긴 국민들 보기에 뭣했던지 이정재 임화수 같은 자유당 깡패들도 양념으로
끼워 넣어 국민들의 눈요기도 시켜주고 자신은 정의로운 자라는 걸 과시하면서.
아버지는 일차로 구속되었고 나는 입시를 치룬 다음 연일 열리는 그 재판에 참석하는 것으로 내 참담한
인생의 막은 시작되었다.
언니는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는데 중학교 교사로서 일하는 것 만으론
심에 안차 방과 후엔 광복동에 있는 민민청(民民靑 민주민족청년 주로 아버지 제자들로 구성된 단체이름)
사무실을 공짜로 빌려 방과 후 일반인들의 영어회화를 가르치고 문화방송 MBC 에도 나가 한 미국인과
영어회화 일주일분을 하루에 나가 녹음하고 또 동아대학 영문과 4학년 여학생들 열몇명들을 모아
영어회화도 가르쳤다.
나도 한번 그 모임에 나가보았는데 웃기는 것은 2년제 영문과를 나온 언니가 월반을 3년이나 하여 실상
그 여학생들보다 나이도 한두살 아래면서 버젓이 회화를 가르친다는 거였다. 의젓한 포스로 의당 나이도
몇살 위라는 듯 점잖을 빼면서.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사기같은 것들이 잘 통하여 여학생들은 그 앞에
선생님 선생님 하고 설설기며 잘 따라 공부하고 있었다.
한번은 그 광복동에 있던 당시 USIS (미 공보원)에서 직원한명을 뽑는다하여 수십명이 몰려들었는데 필기
시험과 미국인 원장의 인터뷰끝에 언니가 당당히 혼자 합격하여 중학교 교사직은 당장 때려치운다.
봉급도 훨씬 높고 위상도 높아 언니마음에 더 들었던 것이다.
또 주말엔 서면에있는 학생과 일반인들을 위한 영어회화클럽에도 나가기 시작했는데 하루는 그곳에서
가까운 하야리야 미군부대에서 자원봉사로 나온 한 미국인 병사를 소개받는다. 아아 그것이 우리 가족의
운명을 두고두고 송두리채 크게 흔들어 놓은 사건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일 줄이야...
그 병사는 언니를 처음 소개받는 순간 갑자기 독침을 맞은 듯 온몸이 마비되어 몸을 까딱할 수도 없고
한마디도 나오지 않아 돌처럼 굳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이란..
언니는 항상 바쁘게 왕성한 의욕으로 일을 해냈지만 가슴 밑바닥엔 외로움이 깊은 수렁처럼 소용돌이
치고 있었는데 그 '촌스런' 남자들은 어느 누구도 그 외로움을 채워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여자를 위한 세련된 매너가 부족했고 부산남자들 뿐만 아닌 한국남자들은 대체로 모두 여자를 공주처럼
모시는방법엔 서툴었으니.
그런 황량한 가슴에 그 미국인이 보여준 폭풍같은 열정이란.. 그런 걸 한번도 경험해보질 못한 나는 설명도
잘 할 수가 없다. 그 때부터 언니의 고통과 비극은 시작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강하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과 감옥에 계신 아버지와..
그 상반된 두개의 형태.. 미 제국주의 병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지와 그 상반된 감정의 부딪침.
그 후부터 언니가 얼마나 많이 울고 괴로워했는가는 내가 잘 안다. 나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옆에서
같이 겪었으니.. 나는 그래도 언니에게 아버지를 생각해서 그를 단념하라고 수없이 충고하였고 그러면
서도 같이 붙들고 수없이 울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대학 1학년 때 어느 날 언니는 그 미국인과 같이 서울로 올라온다... 드디어 언니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 모든 직장들도 포기하고. 그 남자는 제대를 하여 사복을 입고 같이 와서 언니의 미국행
비자를 얻기위해 둘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니의 신원조사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커다란
바위돌이었고 또 하나 결정적인 큰 장애는 언니가 민민청이라는 '이적단체'의 사무실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친다면서 들락거린 거였다. 영어만 가르친 것이지 그들의 일에 참가하진 않았다고 변명해볼 곳도
없고 통할 곳도 없었다.
그 남자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기한이 되어 할 수 없이 떠나서 바로 한국으로 나오는 일반비자를 신청해
한국으로 다시 나왔고 그래도 아무리 노력해도 언니 비자는 얻을 수가 없었다. 또 기한이 되어 그남자는
미국으로 돌아가야했고.. 그 작업은 세번이나 반복되어 그 바람에 그는 한국의 용병복무에서 알뜰히 저축
해 두었던 적지않은 돈도 비행기삯 등으로 거의 다 소비해 버린다. 그안에 서울에서 둘은 언니친구 지인
들을 불러놓고 간단한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도 했는데 그래도 언니비자는 나오질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제3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다시 미국행 비자를 얻는 거였는데 그렇게 하여 이탈리아
행 비자를 얻을 수 있어 드디어 떠날 수 있었다. 로마에서 1년을 산 후에 그곳에서 딸아이를 얻은 후
미국행 비자를 얻을 수 있어 도미했던 것이다.
그럼 감옥살이를 하고 계시던 아버지에게 어떻게 그사정들을 알릴 것인가. 그 큰 짐을 떠안을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역시 3년 월반을 하여 아직 어린 여고생나이였는데 게다가 마음까지 더럽게 약한 나는
그런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었으니 그 때부터 이미 나의 뇌세포 눈세포는 벌써 상당히 파괴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 나는 안양교도소로 아버지를 면회갈 때마다 입이 안떨어져 거의 침묵만 지키다 오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네 언니는 왜 요새 한번도 안오느냐' 라시는데.. 나는 고개를 숙이고 겨우
'언니는.. 언니는.. 미국... 갔어요..'라 띄엄띄엄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시더니 의자에서
비틀비틀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가시더니 그냥 면회소를 나가버리셨다.
면회시엔 교도관(간수)한명이 항상 지키고 앉아 대화를 종이에 기록해 두는데 그 대화는 필시 그 교도관의
입을 통해 순식간에 온 교도소내에 퍼져 버린다. 그로부터 모든 아버지의 동지 정치범들은 아버지를 공격
하는데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계셨다. 정치문제에선 어떤 동지의 잘못된 의견이라도 즉석
에서 바로 고쳐주시는 아버지의 곧은 성격은 모두의 존경을 받는 스승격이었는데 그 후부턴 수감생활
내내 입을 닫으신다.
'자네는 평생을 일본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몸바쳐 싸우던 사람이 정작 딸 하나는 간수를 못했단 말인가'
라는 공격들에 아버지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으셨던 것이다. 언니를 너무도 신뢰하고 사랑하셨던
아버지는 커다란 배신감과 타격에 몸은 급속히 쇄약해져가고 있었다.
세계역사상 수많은 제국과 식민지 나라들 간에 참으로 많은 충돌과 비극이 있었고 그 중엔 제국의 주로
남자와 식민지의 아가씨간에 금지된 사랑의 사건도 많아 영화나 소설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친침략국편의 가정에선 그래도 덜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우리집안에선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최대
금기의 반역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한 친구 이병주(李炳注 1921-1992 주요 작품으로 '지리산'이 있음)작가는 말하기를
'작가는 글을 쓸 때 물을 희석해서 써야한다. 곧이 곧대로 쓰면 너무 독해 독자들이 질식한다.' 근현대사의
우리 삶은 그만큼 아프고 혹독한 것이었으니.
첫댓글 현대사의 비극,고통.....언제나 끝날까? 일전에 빅터 차가 갑짜기 오는 통일에 대비하라고 하던데.....
근현대사는 아직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매번
대립이 되어 오고 있네요
그 예로 이승만을 다큐멘터리로 하는 건국전쟁 영화가 그렇습니다
그 영화가 2024년 까지 어제의 사이에도 버젓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니....
언니의 아버님이 딸때문에 일시에 살아오신 신조가 무너지셨으니
얼마나 비관적이셨을까 ,,,,
그 모습을 바라보고 살아온 산비탈양 언니 맘은 또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슬프네요
글씨가 커서 읽기가 좋았습니다,,,,시인 이상화님
이상화님은 나와 같은 본관 경주이씨로
내가 지극히 존경하는 조상 중 한분이시라..
......
선생님,건강하세요
비록 마음 하나 더 하는 저일 뿐이지만
우리 통일조국을 함께 봐야지요~
약속합니다
나는 정신력으로라도 버틸 것입니다.
......
언니의 미국청년과의 결혼,
그로 인한 가족간의 문제,
아버님과 동지,제자들간의 이견과 갈등문제,
가슴아픈 지난 사연들이네요
유사한 문제들이
국내에도 있었고 만주와 일본,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많이 있었습니다
지배민족의 청년과 피지배민족 처녀,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고
지배계급에 속하는 청년과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처녀의 사랑과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현상은 그때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문제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민족해방, 계급해방이 첨예하게 벌어지던
그 시기에는 그런 문제로 갈등과 곡절을 동반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런 청춘남녀들의 사랑문제를 어찌보면 좋을까요
침략과 약탈, 지배와 간섭, 전쟁과 살인을 저지르는
지배주의, 제국주의의 이념과 제도, 체제가 나쁜것은
두 말할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주도 상층, 고위층 세력들이 문제가 되는것도
맞지요
그러나
그 제도, 체제에 살고있는 일반인민대중, 근로하는
인민대중과 그 자식들이야 나쁠게 없고
그런 청년들 끼리 사랑하지 못할게 없지요
사랑은 순수하고 아름다운것입니다
민족해방이던, 계급해방이던, 조국통일이던
그것은 어찌보면
인간의 아름다움 삶, 사람다운 삶을 찾기 위한
찾기 위한 투쟁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혁명, 변혁, 개혁, 통일ㅡ
말과 표현은 거창할지라도
그것이 추구하는 본질적 목적은
인간의 본성적요구인 자주적인 삶,
즉, 인간의 아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자칫 생각하면 상충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 청춘들이 사랑할수 없고 사랑해서도 안되는것 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극복하고 사랑하고 가정도 꾸리고
자녀들을 낳아 훌륭하게 성장시킨 사례들을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나 찾아볼수 있습니다
준엄한 항일혁명투쟁시기에 그 대오에도
그런 일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정환경과 출신을 중요시, 문제시도
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의 현재를 중시했습니다
대부호의 아들딸들도 가정을 용약 떨쳐나 참군하였고
한 대오에서 그들은 누구나 서로가 조국과 동지들을
열렬히 사랑하였고 결혼하여 자녀들도 불길속에서
키웠고 한목숨 바쳐 싸웠습니다
아버지와 제자들 1.2.3
잘 읽었습니다
항상 좋은 글,
삶의 체험의 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꾸벅
그동안 나는 미국언니얘기 그리고 아버지얘기를 따로따로 많이 언급했지만 한번도 둘의 관계를 한꺼번에 말하진 못했지요. 언급조차 너무 겁이 나서..
대충 3회로 설명했지만 실상 이 테마는 장편소설로도 모자를 겁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간단히 4회만 더 써 보겠습니다. 사실 그 후 얘기가 더 비중이 크지요.
봉수님 말씀 잘 읽었는데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만을 고집할 순 없는 시대를 살아오며 양쪽 다 평생 가슴앓이를 많이 해왔고 그만큼 그 사이에서 나의 등은 엄청 터졌는데 두분 아무도 그 점에는 관심이 없으시더군요.
맞지요
아버님께서는 평생 동안을
우리 조국을 강점한 일제와 조국을 분단시킨 미제,
그 두 제국주의를 극도로 미워하고 반대하여
모든 심혈을 바쳐 투쟁하여 오신
혁명가, 애국자이시였는데
애지중지 키워오며 기대도 많이한 예쁜 딸이
미국 청년과 사랑하고 결혼까지 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고
서운하고 배신감도 들고
절통한 심정이 였을지 조금은 느껴집니다
자식을 헛키웠구나,
살아온 험난하면서도 값높이 쌓아온 인생의 탑이
그대로 무너지는 통절함을 느끼셨을것 같습니다
아버님 같은 혁명투사 분들이
자식들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누구보다 강렬합니다
어찌보면
그분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살아왔고
혁명에 몸바쳐 나서는것도 다 자식들을 위해,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 였지요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몰라준다고 생각되니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요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지요
해방후의 혁명가들은 다들 그리 생각하였지요
또한 믿고 따르고 지지하던 많은
동지, 동료, 제자들의 따가운 눈총과 비난에도
힘드시였지요
아버지와 언니의 관계를 보면서
어느한 쪽을 편을 들수도 없고
설득하기도 힘들었을 산비탈님의 심리적 고뇌도
느껴집니다
참으로 힘든 시기의 눈물겨운 사연입니다
이제는 추억의 사연이 되고
@Kbsns 한편의 훌륭한
사랑의 소설의 줄거리가 되였네요
항상 건강하시고
정필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