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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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함께하는 비범한 여정 08]
견고한 여리고성, 이렇게 무너지게 하라
수 6:1-27 (봉독: 1-5, 15-20)
오늘은 여호수아서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본문인 여리고성 정복입니다.
열두 정탐꾼들이 여리고성을 정탐하였을 때 그 성읍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설마 성벽이 하늘에 닿았겠습니까? 과장이 지나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여리고성은 분명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전체 크기는 약 10에이커, 약 12,000여 평 되고 약 1,500-2,000여 명 거주했다고 합니다. 고대 여리고성의 모습을 구현한 사진을 보겠습니다. (#사진1: 고대 여리고) 당시 여리고는 성 바깥으로 도랑이 있고 축성에 이어 하부 성벽과 상부 성벽이 있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루가 곳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곳에는 거인 족속인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었다고 하니 정탐꾼들이 여리고성의 기세에 눌릴 법도 했습니다.
여리고성은 요단 동편에서 지중해 연안 블레셋 땅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요단강 서쪽의 비옥한 땅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경제적 가치를 지닌 땅입니다.
그래서 이 성읍은 거의 기원전 7,000여 년 전부터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여리고성이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겁니다.
오늘 1절에 보시면 여리고성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단서가 나옵니다. 1절에 보시면,
[수 6:1]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자손을 막으려고 굳게 닫혀 있었고,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리고의 성문들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아무도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성문들이 닫혀 있다고 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을 막으려고.”
여리고성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과의 비범한 여정을 막아서는 성이요 문들입니다.
그럼으로써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을 얻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바로 여리고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예수님과 동행하며 나아갈 때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세력들이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면 음부의 권세입니다. 음부의 권세를 새번역에서는 ‘죽음의 문들’이라고 번역했어요.
[마 16: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 (개역개정-음부의 권세 the gates of hell)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여 성령을 따라 전진해 가며 하나님의 땅들과 영역을 회복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죽음의 문들(복수)입니다. 우리가 공격이고 그들이 방어입니다. 문들은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들이 성도들의 영적 여정을 가로막고 그들이 더 진군해 나가지 못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적 여정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습니다. 왜요? 치열한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 정복을 준비시키실 때 칼이나 방패, 이런 무기들을 준비하라고 하셨나요?
아닙니다. 그 말은 이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지 혈과 육으로 하는 무력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영적 전쟁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백전백승이 아니라 백전백패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영적 여정을 가로막는 여리고성을 견고한 요새라고 했지요.
고린도후서 10장 3-4절 보세요.
[고후 10:4]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 견고한 요새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사용되었던 요새화된 주거지입니다.
정확하게 여리고가 견고한 요새입니다. 성경에 견고한 요새는 2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주님이 우리의 요새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산성이시다!
그런데 또 다른 요새가 있는데 바로 마귀를 위한 요새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영혼 안에 마귀가 역사하는 근원지, 그것이 요새입니다.
아니, 사람 안에 마귀가 거주한다고요?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입니다. 마 12:43-44에 보세요.
[마 12:43-4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사람이 귀신의 집이 될 수 있어요. 이 말은 단지 귀신이 들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귀신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의 영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영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므로 그 영을 장악할 수 없습니다.
성령과 연합한 그 사람은 이제 마귀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거듭났다고 해도 마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에는 우리의 지성, 감정, 의지가 있는 곳이지요. 특히 그 사람의 지성의 영역, 세계관에 마귀가 자리 잡고 역사할 수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 집 안에 불법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들이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마귀가 우리들의 사고와 가치관, 세계관 안에 요새를 만들고 거하는 곳이 있다는 겁니다.
그럼 도대체 그것이 뭐냐? 견고한 요새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는 생각들로 지어진 요새입니다. 고린도후서 10:4-5를 다시 보세요.
[고후 10:4-5] ...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이 견고한 진은 어떻게 생기냐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생각들로 생깁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는 진화론이라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동성애라든가,
신은 없다고 가르치는 유물론적 세계관, 주체사상과 같은 가르침들이 바로 견고한 요새입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견고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어!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떻게 그런 창조가 있을 수 있어?” 이렇게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할 때, 마귀는 진지를 구축합니다.
말씀보다 ‘내가 아는 이론과 학문이 더 낫다’라고 여기는 그 부분이 바로 견고한 진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창조에 반하는 생각들을 요새의 재료로 계속 공급함으로써 그것이 진지가 아니라 요새가 되도록
건축합니다. 그리고 그 요새를 거점으로 하여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과 배우자들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영상으로 흘려보내고 책을 출간함으로써 그것을 읽는 이들의 영혼에도 견고한 진이 자리 잡도록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더 놀라운 일은 마귀는 이것이 마귀가 하는 일이 전혀 아닌 것처럼 진행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왜요? 그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경 말씀을 판단합니다. 경험은 중요하지요. 그런데 말씀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경험으로만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면 반드시 말씀과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경험과 말씀이 충돌하면 사람은 무엇을 택할까요? 보통 경험을 택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보세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그 후로 24년간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24년간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 그의 살아 있는 실제적인 경험입니다.
그의 나이 99세, 사라의 나이 89세가 되어 사라는 실제적으로 경수가 끊어졌습니다.
이게 현실이요 그들의 경험입니다. 이 경험에 비추어보면 아들을 주신다? 큰 민족을 주신다?
정말 죄송하지만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말은 우스운 말입니다. 희망 고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약속의 말씀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 기초했다면,
그들은 절대로 이삭을 얻지 못했을 겁니다. 경험은 마귀의 견고한 요새의 발판이 될 수도 있었고, 반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더욱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발판이 될 수도 있었지요(롬 4:20). 아브라함은 후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견고한 진들이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을까요?
먼저는 교만으로 인한 불신앙의 여리고성입니다.
교만은 모든 죄악의 뿌리입니다. 인류의 죄는 바로 교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여리고 사람들은 성문을 닫을 때가 아니라 성문을 활짝 열고 라합처럼 항복할 때입니다.
그들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 다 들었습니다.
언제부터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던 40년 전부터 들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하면 440년이 넘게 기다리신 거예요.
이제 하나님과 그의 군대가 바로 코앞까지 왔습니다.
그럼 이제는 항복하고 주 앞에 엎드려야지요. 그런데 이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있습니다.
고집스럽게 마음 문을 열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하셨습니다. 은혜로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교만에 뿌리를 둔 불신앙의 견고한 요새로 인해 심판을 자초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마음 안에 교만으로 인해 여전히 불신앙의 요새, 굳은 마음의 요새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부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생각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의도적으로 청개구리같이 불순종하는 영역들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불신앙의 뿌리가 교만이라면 불신앙의 결과는 삶의 폭풍입니다.
요나를 보세요.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에 의도적으로 거역하여 불순종하였더니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지중해 전체에 폭풍을 일으키십니다. 큰 물고기가 아니었으면 빠져 죽었을 겁니다.
왜 내 삶에 이렇게 폭풍이 일어나는가? 혹시 불순종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삶의 모든 어려움의 원인이 불순종 때문만은 아닙니다.
욥은 이유 없이 고난을 당했고, 다윗도 억울하게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요셉,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모든 행위에 고난의 폭풍이 함께 온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의 고난과 불순종하는 자의 고난”은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죠? 순종하는 자가 당하는 고난은 그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 성숙하게 합니다.
광야와 같은 힘든 시기를 지나지만 그의 영은 더욱 새로워지고 강건해집니다. 더욱 주께 나아갑니다.
다윗을 보세요. 광야에서 그의 영혼은 주님과 더욱 친밀해졌지 황폐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인한 고난은 삶이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황폐해지며 메말라집니다.
마귀가 속여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켜 결국 불순종의 광야 40년을 헤매게 하는 겁니다.
시간을 허비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잘 분별해야 합니다. 불순종으로 인한 고난은 아닌가?
이 외에도 다른 여러 견고한 요새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 용서하지 않음, 정욕, 탐욕, 중독, 인본주의 세계관 등 숱한 요새들이 내면에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막으려고 굳게 가로 막고 선 견고한 여리고성들입니다.
철저한 겸손이 기초다!
이 견고한 요새들은 반드시 무너져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내면의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한 기초는 철저한 겸손입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2장 2절에 보면 마귀는 불순종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치유하는 것은 오직 겸손입니다.
다시 말해 이 견고한 진은 내가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리고성은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분이 신앙을 가졌다가 교회를 떠났답니다. 10년을. 그런데 작년에 다시 돌아왔어요.
왜 돌아오셨나요? 물었더니, 자신이 하는 일들이 잘 안 되었답니다.
자기 힘으로 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다 실패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 돌아왔답니다. 하나님께서 실패를 통해 그 사람을 낮추시고 겸손케 하신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왜 할례를 베풀라, 유월절을 지키라, 네 신을 벗으라 하셨습니까?
우리가 오죽 교만하면 그렇겠습니까? 한 번 말하면 안 들으니까요.
“네 힘으로 절대로 안 된다. 내가 한다. 주도권이 네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것 아닙니까?
견고한 진이 더욱 견고해지는 토목재료가 교만한 생각입니다.
반대로 견고한 진이 무너지게 하는 영적 무기는 바로 철저한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했던 것을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 없이 ‘회복’과 ‘해방’은 없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겸손이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리는 기초입니다.
자 기초가 되었다면 견고한 여리고성, 이렇게 무너지게 해야 합니다.
이제 3단계를 통해서 여리고성은 무너집니다. 3가지인데, 영어로는 모두 S로 시작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보라 See”입니다.
[수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새번역에는 “보라 See”가 누락되었는데요, 분명히 원어(רָאָה)에는 있습니다. 무엇을 보라는 겁니까?
내가 이미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아니, 그들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여전히 그대로 있는데 언제 무엇을 넘겨주었다는 겁니까?
보라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보라는 겁니다.
이미 여러분들의 견고한 진이 무너진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엘리사와 엘리사의 사환이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분명 현실입니다. 사환이 두려워합니다.
엘리사가 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낸 군대를. 그러나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 시종의 눈을 열어주셔서 볼 수 있게 해주소서.”
그가 바라보니 온 언덕에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아람군대와 같은 문제들과 역경들은 현실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냐면 그것보다 더욱 분명한 현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분의 군대장관과 군대들이 함께 하여 승리를 주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참된 현실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이미 옛사람은 죽었고 죄도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으로 이미 여리고는 네 손에 넘겨졌음을 믿음으로 보라는 겁니다.
그 믿음의 눈은 말씀을 계속 들을 때에 들음에서 믿음이 납니다.
예배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무엇이 참된 현실인지,
우리가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바른 방향이 어디인지를 보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현실을 보게 되는 겁니다.
보라! 그리하여 이미 여리고가 넘겨졌음을 믿으라,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침묵하라 (be) Silent”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독특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전투를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6일 동안 그 성 주위를 한 번씩 돌되,
무장한 선발대가 제일 선두에,
그 다음에 제사장 일곱 명이 숫양 뿔 나팔 일곱 개를 들고 나팔을 불며 행진하고,
그 다음에 언약궤가 뒤를 따르고 그 뒤에는 후발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칠 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돌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일곱 번째 날 일곱 번째 돌고 함성을 지르기 이전까지 모든 백성들은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수 6:10]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함성을 지르지 말아라. 너희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여라.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말고 있다가, 내가 너희에게 '외쳐라' 하고 명령할 때에, 큰소리로 외쳐라."
나팔을 제외하고는 마지막 7일, 마지막 바퀴 이전까지는 완전한 침묵입니다.
여러분,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하고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들이 믿음의 말을 하면 하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혹여나 믿음 없는 말, 불평과 원망의 말을 할까 봐 침묵시킨 겁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견고한 요새 중 불신앙이 끊임없이 내뱉는 말이 바로 불평, 불만의 언어입니다.
왜 출애굽 1세대가 죽었다고 했지요? 그들이 내뱉은 불신앙의 말 때문입니다.
[민 14:27-28]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이 언제까지 그럴 것이냐? 나를 원망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을 내가 들었다 28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너희가 나의 귀에 들리도록 말한 그대로,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하겠다.
사람은 힘든 상황을 겪으면 자신도 모르게 멘탈이 무너지면서 말로 원망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자신의 귀에 들린 대로 행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민 14:2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정말 그들이 말한 그대로 되었습니다. “죽겠네” 하면 죽는 겁니다. “살겠네”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약한지, 우리가 얼마나 환경에 휘둘리는지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호하시려고 아예 말 한마디 하지 말라고, 침묵하라고 하신 거예요.
그리고 가만히 있어 be still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는 겁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덕스러운 말을 통해 격려가 되고 힘이 될 때가 있지요.
그러나 때로는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훨씬 나을 때가 있습니다.
입술로 더 하나님께 범죄 하기 이전에 입술을 다물어야 할 때가 있어요.
여러분, 힘들고 고통스러우십니까? 그럴수록 원망과 불평의 언어를 닫고 침묵하십시오. be Silent.
세 번째는 세밀하게 복종하라 (Submit)입니다.
순종 정도가 아니라 “복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대충 순종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명령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종 submission”입니다.
견고한 진의 뿌리는 교만이요 재료는 하나님을 대적한 생각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리는 것은 겸손을 바탕으로 한 철저하고도 세밀한 복종입니다.
그것이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립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세요.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그냥 대충 돌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열의 순서가 있고 몇 명이 누가 서야 하는지, 나팔을 누가 불며 언제 불어야 하는지,
언약궤는 가운데 있어야 하고, 그 앞뒤에 누가 서야 하는지, 며칠간 돌아야 하며,
마지막 날에는 몇 번 돌아야 하며 언제 함성을 질러야 하는지, 아주 세심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그분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일을 잘 처리하는 유능한 군인이 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고 세심한 복종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6장에 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1-20절 사이에만 15번이나 나오는 단어가 “나팔”입니다. 나팔이 여호수아 6장의 핵심 단어에요.
하나님은 입술을 다물라고 하셨는데 대신 침묵 속에 숫 양뿔의 나팔소리만을 요구하셨습니다.
여리고성을 돌면서 7일 내내 양각나팔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칠일을 도는데 일곱 명의 제사장들이 일곱 뿔 나팔로 매일 불다가 칠일 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돌며 뿔 나팔을 붑니다. 7일 동안, 마지막 7일은 일곱 번, 13번을 돌지만, 7과 7을 곱하면, 7x7의 49, 그 다음은 50이지요. 50년이 되는 해가 바로 희년입니다.
희년이 히브리어로 “요벨 jobel”인데, 뿔 나팔 소리라는 뜻입니다.
희년이 되면 대제사장이 숫양 뿔 나팔을 붑니다.
즉 이 숫 양뿔 나팔 소리는 희년을 상징하는 것이고 희년은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선포하는 해입니다.
모든 노예가 자유를 얻고 모든 땅은 휴경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지금 하나님은 이 죄악된 여리고 땅에 해방과 자유의 희년을 선포하라는 겁니다.
양각 나팔을 불라는 겁니다.
이미 지난 금요성령집회 때 나누었지만, 애즈베리 부흥의 도구가 되었던 리아우 Leow 박사님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주 세밀하게 그가 해야 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2016년 2월 21일, 하나님은 그에게 애즈베리의 부흥에 대한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2017년 12월, 하나님은 그에게 윌모어 켄터키의 부흥을 위해 풀타임으로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레이시아 교수직을 내려놓고 풀타임으로 기도하기로 순종했습니다.
2020년 6월 회개에 대한 말씀과 부흥을 준비하라는 글이 적힌 사인을 몸에 걸고 다니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가 복종하여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개월 뒤 9월입니다.
2020년 9월 26일, 그가 워싱턴 내셔널 몰에서 열린 글로벌 기도와 회개의 날에 참석했습니다.
오프라인으로 수천 명이 참석했는데 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금빛 열쇠를 받습니다.
(사진#2- 리아우 박사의 키) 사실 그냥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가 묵상하던 말씀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이거였습니다.
[마 16:18-19]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음부의 권세, 죽음과 지옥의 문들이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너에게 주리니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견고한 요새들이 무너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에 대한 약속, 기도의 권능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키는 바로 약속의 성취에 대한 말씀이었던 겁니다. 그로부터 약 2년 4개월이 지나고 지난 2월 8일에 윌모어 켄터키 애즈베리 대학에 부흥이 일어난 겁니다. 그 부흥으로 인해 미국 전역에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견고한 여리고성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키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는 키입니다.
올해 매일합심기도가 시작된 지 만 7년이 되는 해입니다.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한 이들을 통해 올해 하나님께서 부흥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즈베리 부흥을 통해 수많은 청년들과 사람들의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리고 계시는 것이 바로 그 응답이라 분명히 믿어집니다.
[수 6:20]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다. 그 나팔 소리를 듣고서, 백성이 일제히 큰소리로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백성이 일제히 성으로 진격하여 그 성을 점령하였다.
여리고성은 갑자기 무너집니다.
마찬가지로 무너지지 않을듯한 완고한 배우자의 여리고성도 갑자기 하나님이 무너뜨리십니다.
“한 권사님, 남편 문제로 부정적인 말이 나오셨음. 안 된다... 힘들다.”
부정적인 말 제하고 믿음으로 선포하세요! 정말 수십 년 술중독이 끊어지고 견고한 진이 무너졌습니다.
불신앙 자녀의 견고한 진도 갑자기 하나님이 무너뜨리십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와 우리 교회가 할 일이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남북한 통일을 믿음으로 보는 겁니다(See).
그리고 통일이 안 된다는 부정적인 말을 침묵하여 제거하는 겁니다(Silent).
대신 복종하여 희년의 양각나팔을 부는 겁니다(Submit).
주체사상으로 세워진 북한의 견고한 진, 여리고성은 하나님이 무너뜨리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양각나팔 부는 겁니다. 저는 강단에서 불고, 여러분들은 속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부는 겁니다. 성벽은 6일째까지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 마지막 바퀴를 돌 때 갑자기 무너지는 거예요. 갑자기 8.15 광복이 일어났듯이 주체사상의 견고한 진도 갑자기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고 복종할 뿐입니다. 선포할 뿐입니다. 외칠 뿐입니다!
견고한 여리고성은 믿음 안에서 이미 무너졌습니다. 그것을 보십시오.
부정적인 말을 제하고, 믿음으로 양각나팔을 불어 희년을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정과 삶, 이 한반도의 진정한 희년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그 믿음으로 함께 성찬을 받으십니다.
찬양: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첫댓글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