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0곡이 수록된 독집 1면 첫곡 마지막 교정은 모든 포크가수들이 감탄해 마지 않았던 김의철의 대표곡중의 하나.
1973년 1월10일 보성고 졸업식날 , 3학년6반 친구인 짝궁 "정남일은 기발한 착상을했다. 보성고 방송반이던 같은반 "남기우"를 통해 졸업을하면 들을 수 없는 의철이의 노래 한곡을청해왔다. 이때 졸업식 이틀 전부터 왠지 쓸쓸하고 정든 사람 정든 장소에 내한 미련을 동요를 부르듯친구들과 선생님에게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김의철은 방송실에서 즉흥적으로 노래를 부르기로했다. 하지만 연주할 기타가 없었다. 이에 노래를 청했던 짝 정남일은 학교 담장을 넘어 학교 근처에 살던"홍봉철"(현, 용산 전자랜드 대표)의 집으로 달려가 그의 기타를 가져왔다. 졸업식이 끝날 즈음 느닷없이 김의철의 노래가
교내방송 스피커를 타고 온 교정에 울려 퍼졌다. 즉흥적으로 제목도 없이 만들어 부른 "마지막 교정"의탄생 순간이었다. 부모님께서 사업차 베트남으로 떠나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해 마음이 아팠던 그는 늘 자신을 이해해주신
박종렬 담임선생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학창시절의 추억과 아픔을 담고있는 명곡이었다. 김의철은 "그때 단 한번 부르고 버릴 생각으로 노래했던 곡이
" 마지막 교정"이다 고 밝혔다. 이후 음반 발표이전 명동의 "르시랑스" 에서 이 노래를 불러 보았다. 노래를 들은
한 평론가는 "멜로디는 너무 아름다운데 가사 내용이 국민학교 학생 수준으로 유치하다"고 평했다. 자존심을 건들인
평을 들은 그는 "일시적으로 만든 노래라 세상에 내놓지 않으려 했는데 왜 세상에 이노래를 내 놓아
이런 수모를 받는가"생각했다. 하지만 주변의 친구들이 너무 좋아해 계속 청해와 살아 남은 곡 "이라고했다.하지만 녹음실에 놀러왔던 선배 윤형주가 "마지막 교정"을 듣고는 "이런 곡 또있어 ?"하며 관심을보이자 성음 제작소 나현구 사장은 이곡을 타이틀 곡으로 선정했다. 김의철은 "이곡을 타이틀 곡으로 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마음과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껄껄웃는다."마지막 교정은 포크가수 양병집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탄탄한 가창력으로 노래를 부르던)
김추자: 댄스 가수 김추자와는 동명이인)와 윤형주, 섬아이를 부른 서강대 영문과생 박찬응이 코러스를 넣어 주었다. 녹음때, 기타는 4명이 연주했다. 김의철은 쓰리핑거로 멜로디 파트를 이정선과 윤복희의 의동생인 김영배(보성중 3학년 2반 동창)는 리듬, 국민학교와 중고교를 같이 다니던 죽마고우 "이정용(전자공학 교수)" 은
트레몰로와 탐보라(북처럼치는 주법)을 맡았다. 세째누이 김의혜는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3Dkschoi@hk.co.kr">kschoi@hk.co.kr">3Dkschoi@hk.co.kr">kschoi@hk.co.kr>
보성고를 졸업한 1973년, 김의철은 명동성당 뒤 카톨릭여학생 기숙사 내에 있던 ‘해바라기’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이주호나 한영애는 그곳의 골수 관객이었다). 김민기, 양병집, 정태춘, 이광조 등이 그곳에서 노래운동을 같이
했던 이들이다. 당시 당국은 해바라기를 노래를 통한 의식화 운동 집단으로 지목하여 집요한 감시와 압력을 가했다.
당연히 그 모임의 진행자였던 김의철은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다.그의 첫 음반도 코메디 같았던 70년대 상황을 비껴갈 수 없었다. 그는 고고시절 작곡해둔 맑고 순수한 노래들을 묶어
세상에 내놓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는 유신체제가 막 출범했을 때였다. 국민적 단합을 고취해야 하는 시기에,
보헤미안이나 히피들의 허무감 짙은 노래들은 용납될 수 없었다. 어둡고 쓸쓸했던 김의철의 노래는 검열통과가
불가능했다. 그러자 성음레코드사는 본인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가사와 제목을 바꿔서 음반을 발매했다.
위에 소개한 <김의철 노래모음 (1974, 2003)>이 그것이다. 발매된 음반을 뒤늦게 받아본 김의철은 좌절감을 맛보았다.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만한 제목이나 가사는 모조리
임의로 개작되었다. 원제목이 ‘불행아’였던 곡이 ‘저 하늘의 구름따라’로 제목이 바뀌었다. 고교 1학년 때 만든
이 곡은 부모님과 떨어져 삼촌 집에 얹혀 외롭고 힘들게 살아야 했던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만든 곡이었다.
그는 이 곡을 타이틀곡으로 넣으려 했었다. 하지만 곡이 전체적으로 너무 어둡고 가사도 너무 어렵고 많다는 이유로
2면 첫 곡으로 밀려났다. 가사 또한 '갈 수 없는 신세'가 '갈 수 없는 이 몸'으로 '흙 속으로 묻혀갈'이 '흙 속으로
헤어갈'로 수정되었다.이런 날림 발매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은 당국에 의해서 판매 금지되었다. 그 중에서도 박찬응이 노래한 ‘섬아이’와
‘평화로운 강물’은 창법이 미숙하다는 희한한 이유로 금지곡 리스크에 올랐다. 하긴 클라리넷과 기타가 만들어내는
황량한 무드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퇴폐적인 느낌을 주었으니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을 어지럽히는 노래로
판단했을 것이다. 김의철은 “상상력과 표현의 제한을 받는 이런 환경과 무대에서는 다시는 음반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은둔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저 하늘의 구름 따라’는 양희은, 이광조, 김광석 등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리어지며 그의 대표곡으로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고, 1974판 그의 첫 음반은 음반 수집가들 사이에서
100만 원 이상을 호가하고 있다.김의철은 기타리스트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줄리어드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한 전력이 있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기타의 매력에 빠진 이후로는 기타만 잡고 살았다. 79년에 독일로 음악 공부를 떠난 그는 세계적 기타리스트들에게
음악을 사사받았고 80년대 초반부터 뉴욕에서도 연주력을 인정받으며 AMERICAN INSTITUTE OF GUITAR에서
기타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세고비아의 수제자 볼로틴도 그의 기타 연주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얼마 전 독일의 한 일간지는 김의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나치가 600명의 저능아를 살해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해마다 열리는 추모제에 전 세계 장례곡들 중
한국의 김의철 곡이 선곡되어 91년부터 10년간 빠짐없이 불리어지고 있다” 한편, 거칠고 투박하지만 가슴 깊게 파고드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섬아이’를 애절하게 불렀던 박찬응은 당시엔 서강대
영문과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문학보다는 무대를 휘젓고 다니며 울고 웃는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있었다.
서유석, 양희은과 함께 포크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는 고무신에 한복을 잘라 개량해 입고 담배를 피우고
다니는 ‘이상한 여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 후 박찬응은 ‘김소희 학원’에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뒤로 판소리꾼으로
변모했다. 현재 그녀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한국학 교수가 되었지만 판소리꾼으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