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수작문화(酬酌文化)를 상상하다
이윤화
정자(亭子)에서 즐기던 수작(酬酌)
경상북도를 여행하다 보면 정자가 유독 많이 보인다. 안동을 중심으로 종가가 집중되어 있고 종갓집 고택 근처 고즈넉한 어딘가에 정자가 남아 있다. 정자는 사대부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사랑방과 또 다른 분위기의 수작문화(酬酌文化)가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즐거울 때도 우울할 때도 정자를 찾은 흔적이 많다.
아침을 먹은 뒤에 네댓 사람과 함께 세심정에 올라갔다. 위에서 산수를 보고 객지에서의 수심을 다 털었다.
- 서찬규(徐贊奎) 임재일기(林齋日記)
그 시대의 정자에서는 술과 안주, 담론의 방법, 모임을 위한 명목 등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음식디미방’은 정부인 장씨(장계향 1598-1680)가 영양의 석계 이시명 선생과 결혼한 후 평생 종갓집 음식을 만들어온 것을 일흔이 넘은 나이에 정리한 최초의 한글조리서이다. 이 책 안에는 총 146항목 중 51개가 술에 대한 것으로 삼해주, 이화주 등 수많은 술의 제조법이 나온다. 청주에서 소주까지 다양한 기록을 보며 당시 양반가 안주인의 접빈객(接賓客)에 대한 고단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 양반가의 일기를 보면 각자 술을 가지고 와서 술자리를 가진 것을 보며 여러 가지 추측도 해보게 된다.
1622년 3월 말, 김령의 친족들은 쌀을 됫박씩 모아 술을 빚었다. 여희(汝熙)와 이실(而實), 이지(以志) 형제가 쌀을 냈고, 김령과 자개(子開), 서숙(庶叔)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쌀을 냈다.
- 김령(金坽) 계암일록(溪巖日錄)
다음 날 3월 21일, 초청장을 받은 여러 친구들이 계대(溪臺)에 모였다. <중략> 모두 술을 차고 찬합을 들고 와서 모였다.
- 김택룡(金澤龍)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집마다 다른 손맛의 가양주를 맛보며 서로 술의 평을 하였을 것이다. 술은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큰 노고의 음식이기에 각자 소지하여 마시는 풍속이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찹쌀로 만드는 술은 당시 고가의 음식일 수밖에 없기에 서로 쌀을 부조하여 만든 이야기도 여러 번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모임의 경우 한사람에게 술을 전가하기엔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각자 음식을 가져오는 포틀럭 파티(potluck party)의 조선시대 버전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은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을 지닌 조리서로 안동장씨(安東張氏)가 집안의 딸과 며느리를 위하여 쓴 것이다. 뒤표지 안에는 “이 책을 이리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은 하지 말고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쉽게 더럽히지 말라.”는 저술 동기와 당부를 적고 있다. 표지에는 ‘규곤시의 방’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이는 자손들이 격식을 갖추려고 새로 지어 붙인 것이다.
술 내리는 날의 만찬
몇 년 전 종가음식 취재를 할 때 여러 종부들의 삶과 집안 음식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전주이씨 평장사공가문의 종갓집에서 차려낸 한상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음식이 여럿 있었다. 돼지의 내장, 간, 허파 등이 들어가고 은행, 잣, 대추가 고명을 얹어진 간장으로 간이 맞춘 전골이 유독 눈에 띄었다. ‘중탕’이라 불리는 이 음식은 술 내리는 날이면 으레 돼지를 잡아 만들던 음식이란다. 돼지머리누름, 돼지등뼈가 들어간 비지, 썰어진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녹두지짐 등이 차려져 있다. 쉬죽(수수죽)과 행적(잘 익은 김장 김치로 지져낸 전)에도 군침이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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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평장사공가문의 한상 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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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내장으로 만든 중탕
전주이씨 집안에서 내렸던 술은 ‘감홍로(甘紅露)’, ‘문배주’로 도수 높은 증류주이다 보니 고기 안주류가 더욱 발달되었다. 평양의 평촌양조장의 故 이경찬 선생(중요무형문화재)의 큰아들 이기춘씨가 문배주를 막내딸 이기숙씨가 감홍로를 빚고 있으며 두 분 모두 우리 술의 보존에 힘쓰고 있다. 술도가의 안주인이자 종부인 故 김옥수 할머니(2016년 1월. 96세로 별세)는 술 단지 열리는 날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경북 예천지역 권별(權鼈)의 죽소부군일기(竹所府君日記)를 읽어도 술 내리는 날의 축하를 상상할 수 있다.
권별은 숙부님을 뵈었다. 숙부님이 지난날 주미(酒米, 술을 빚는 데 쓰는 쌀) 10말을 내어 두 박 좌수 댁에서 나누어 술을 빚었는데, 오늘 같이 술 단지를 헐었다. 성주 감역과 이숙이 다 와서 참석하였다. 권별은 저녁때에야 크게 취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일기에서 보듯 술을 빚기 위해 식재료(쌀)를 추렴 하고 빚은 술의 개봉 날에는 주위 소중한 이들과 축하하며 즐거운 만찬의 시간을 보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술잔치가 이어진 뒤 평양에서 온 종부는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 하여 겨울 김치를 쫑쫑 썰어 동치미국물에 국수나 밥을 말아 먹었는데, 국수로 먹을 때를 ‘말이국수’라 불렀다. 술에 취한 속을 풀어주고 든든히 해주는 이북 술도가집의 겨울별미임에 틀림없다.
누구와 함께 주물상을…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간의 이목을 받은 양동마을은 늘 관광객의 방문으로 분주하다. 하지만 세상의 집중에 아랑곳하지 않고 16세기에 지어진 집에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종가 사람들이 있다. 바로 마을의 입향조(入鄕祖) 손소(孫昭·1433∼1484)선생과 그의 외손자 이언적 선생(1491∼1553)의 후손들이다.
무첨당(無忝堂) 보물 제 411호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마을 여강 이씨 대종가의 별당
여주이씨 회재 이언적 선생의 무첨당(無忝堂) 종가를 방문했었는데, 이곳에서는 변함없이 계절의 청주를 빚어 주물상을 차리고 있었다. 겨울에는 노란 국화꽃을 넣고 여름에는 솔잎을 넣어 술을 빚는다. 초하루를 피해 손 없는 날이라는 그믐으로 날을 잡아 담근다. 서리가 오기 전에 국화를 거둬들여 갈무리해둬야 겨우내 술을 담을 수 있다. 국화는 꽤 쓸모가 있어 꽃을 따로 모아 봄의 진달래화전처럼 제사상에 올리는 지진떡으로 부쳐지고 국화차로도 쓰이고 줄기는 말려뒀다 달여서 술을 담글 때 사용 하게 된다. 잘게 빻아 햇볕에 잘 말린 누룩, 가마솥에 밥을 지어 식힌 찹쌀고두밥, 약숫물과 국화줄기 달인 물을 넣어 버무려 치댄 뒤 뽀얗게 물이 나오게 만든다. 항아리는 차나락(찰벼)짚을 태워 소독한 뒤 여기에 버무린 재료를 넣어 기다린다. 3일 정도 지나면 술독은 바작바작거리며 숨을 쉬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여름엔 일주일, 겨울은 보름이면 술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술은 사랑방을 드나드는 손님들의 주물상에 올려지게 된다.
무첨당의 주물상 (이 상은 실제 종가의 주물상과 다를 수 있습니다)
무첨당의 주물상 안주에는 경상도 집장(여러 채소가 들어간 두엄열기에 발효시킨 염도 낮은 속성장), 육회, 육포, 북어보푸라기(북어포를 가루 내어 무침), 어회(생선회) 등이 올라간다. 오늘날 양동마을에 가면 전혀 상상이 안되겠지만 옛날에는 마을까지 물이 들어와 배에서 신선한 횟감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놋그릇에 차려진 정갈하면서 품위있는 안주와 국화주 한잔을 받는다면 술 못하는 사람이라도 감히 술잔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김택룡(金澤龍)의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에서는 1612년 3월에 김택룡이 고을군수가 파직된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를 위해 술과 안주를 대접했다는 기록이 있다. 3월은 아직 추워 지난해 말려두었던 국화로 담근 술이 오가고 정성으로 차려진 주물상이 아니었을까 마음대로 상상해본다. 그리고 김택룡은 내 술잔을 받아달라며 심약(沈約)의 시를 써서 이별시를 건네게 된다. 파직된 군수는 어찌 이 술자리를 평생 잊을 수 있을 것인가.
平生少年日 소년 시절에는 헤어질 때 分手易前期 훗날 다시 만날 것을 쉽게 기약했지 及爾同衰暮 이제 우리 모두 늙었으니 非復別離時 다시 헤어질 날도 없으리라 勿言一尊酒 한 동이 술 물리치지 말게나 明日難重持 내일이면 다시 함께 술잔 잡기도 어려울지니 夢中不識路 꿈속에서 친구 찾아가다 길을 잃으니 何以慰相思 어찌하면 친구 그리는 내 마음 달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첨당 17대 종부 신순임씨는 그녀의 시(詩)에서 ‘갱시기’를 말했다.
감기 기운돌 때 / 술 먹은 뒷날 별미 중 별미가 / 가난의 산물이었대
지끈지끈 머리 아프면서 으슬으슬 추워지면/ 콩나물 김장김치 잘게 썰고 / 계란 하나 풀고 찬밥 한 덩이 넣어 / 팔팔 끓여 한 사발 들이키면 <중략> ‘양동물봉골이야기(신순임)’에서
라며 해장의 하나로 경상도 김치국밥 갱시기를 말하고 있다.
억압당한 술이 만든 오늘날의 수작문화
권상일(權相一)의 청대일기(淸臺日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1755년 11월 13일 삼가 들으니 성상께서 종묘(宗廟) 제사를 고례(古禮)로 행하고자 예주(醴酒)를 썼다. 이 때문에 서울과 지방의 사대부 집도 다 제사에 예주를 썼다. 그길로 술을 금하면서 내년 1월 초 1일까지로 기한을 삼고 엄금한다고 하교하였다. 이는 술을 팔아 생활하는 자가 지탱할 수 없음을 염려한 것이다.
흉년으로 인한 기근 해소를 위하여 영조는 일시적 금주령을 내렸고 당시 당신도 술기운이 나지 않는 단술인 예주로 제주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세계역사 속에서 금주령이 내려졌던 시대를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미국의 금주령 시대에 몰래 술을 팔던 밀매점을 말하는 '스피크이지(speakeasy)'를 오늘날 역으로 하드리쿼바(Hard Liquor Bar)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몰래 만들어 파는 술은 스릴이 있고 숨어 마시는 술맛은 특별한 재미를 가져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술 역사에서 강제적 금주령으로 인한 피해가 막급하다. 청대일기에 나오는 것처럼 임금이 생활고의 일시해결을 위한 단기 금주령이 아닌 민족 수탈을 위해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한 술 제조 금지는 그때까지 향유되었던 개성의 가양주를 말살하게 되었다. 지금은 복원하려고 해도 단절된 시간이 너무 길어 제대로 된 복구가 쉬운 일이 아닌 상황이다.
한국에는 청주, 막걸리, 소주 등이 가정별, 지역별, 시기별로 구분되어 많은 술이 있었으나 일제가 세금 착취를 위해 가정에서 술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지정 양조장에서만 제조하게 함으로써 가양주라는 술은 점점 없어지게 되었다. 그 후 박정희정권에서는 한국의 빈곤을 퇴치하기 위한 대의명분 하에 곡류로 술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여 한국의 전통주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는 쌀 대신 밀가루로 만들고 소주 또한 쌀로 만든 양조주를 증류한 것이 아니라 수입 타피오카 전분을 발효시킨 술을 증류하여 95℃에탄올을 만들고 거기에 물로 희석하고 조미료, 향료, 첨가물을 더한 현재의 시중 소주만 남았다.
식량난이 해결 된 후에는 곡류로 술을 제조 할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막걸리는 쌀로 만들기 시작하였지만 소주는 계속 희석 제조 방법으로 머물고 옛 전통의 증류식으로 쉽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술을 마시는 다수의 대중들은 희석식 소주에 길들여져 전통 증류식 소주의 참 맛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의 맥주는 맥아를 10%만 사용하고 나머지 90%를 곡류 및 전분을 사용한 것도 맥주라고 인정하기에 맥아를 소량만 사용해도 되는 맥주, 즉 맛에서 국제경쟁력이 월등히 떨어지는 개성 없는 술을 만들게 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맥주는 술자리에서 희석식소주와 혼합을 위한 폭탄주 밑술 역할로 전락될 때가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술을 대하는 문화도 바뀌게 되었다. 희석식 소주는 저렴한 가격으로 빈속을 진하게 그리고 바로 불을 지피는 효과가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한국인의 성급한 성격을 대변하는 원샷 스타일이 일조했는지는 몰라도 개성의 술맛을 음미하며 삶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수작문화(酬酌文化)보다는 점점 하루의 스트레스를 잊는 술로 대체될 때가 많아 지난 시대 선연의 술 향유가 그리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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