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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산 윤선도 선생의 연보 (출처 : 선경 보길도 윤고산 발자취를 따라서 ,완도군, 1998)
1. 1587년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漢城府 東部 蓮花坊)에서 태어남
2. 6세에 학문(學文)을 시작함
3. 8세때 해남윤씨 가문의 대통을 잇기 위해 숙부 유기의 양자로 입적함
4. 26세때 진사시(進士試)에 장원급제함
5. 30세때 12월 집권파(執權派) 이이첨 등의 어지러운 정치를 탄핵하는 병진소를 올림
병진소로 인해 31세 2월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됨
6. 37세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귀양에서 풀림
7. 42세때 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初試)에 장원급제함
8. 42세 3월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 두 왕자(王子)의 사부(師傅)가 됨
9. 50세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킴
10. 51세 2월 보길도에 입도(入島)함
11. 52세 6월 대동찰방에 제수된 것을 거부한 이유로 경상도 영덕(慶尙道 盈德)으로 귀양감
12. 53세 2월 귀양에서 풀림
13. 56세 해남금쇄동(海南金鎖洞)에서 산중신곡(山中新曲) 19수(오우가 6수포함) 지음
14. 65세 가을 보길도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 지음
15. 66세 8월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됨
16. 74세 6월(1659년) 효종의 장지와 조재비의 복제문제로 서인 송시열과 논쟁을 벌이다가
함경도 삼수(咸鏡道 三水)로 귀양 감
17. 81세 7월(1667년) 귀양에서 풀려 보길도 부용동에 은거함
18. 1671년 6월 11일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甫吉島 芙蓉洞 樂書齋)에서 85세로 돌아가시고
같은 해 9월 22일 해남군 현산면 문소동 금쇄산성 아래에 묻힘
19. 1675년 숙종(肅宗)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679년 충헌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짐.
(2). 고산 윤선도 선생의 일생
고산의 일생을 흔히 유배와 출사, 그리고 은둔의 세가지로 나누어 말한다.
고산의 일생은 1671년(현종 12년) 85세로 세상을 마치기까지 파란 많은 일생이었다. 고산은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바르며 곧은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부당함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지
못하여 바른 말 잘 하는 선비였다고 한다. 이는 그의 인품을 짐작케 하는 언급이기도 하려니와
또한 그의 일생이 결코 순탄할 수 없었던 요인을 지적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고산은 실은 과거 보기 위한 공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유가에서의 수학은
주로 출세를 위한 일이었으므로 과거를 보기 위한 공부를 열심히 하여 2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
하였다. 그런데 세를 부리는 이이첨 등의 횡포가 심하게 되자 분을 이기지 못하여 그들의 죄를
묻는 상소를 올렸다. 그것이 고산의 생애에 큰 시련을 안겨 준 첫 계기가 된 병진소이다. 이로
인해 31세를 맞이한 정사년 2월에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고, 양부인 유기는 강원도 관찰사에서
파직되고 말았다. 다음 해에 경상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으니, 이 때의 귀양살이는 모두 6년
이나 되는 힘든 세월이었다.
고산은 37세가 되던 해 3월,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이는 처음
갖는 출사의 계기였지만 유배 후의 심정도 정리되지 않아 곧 사직하고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약 5년, 나라에서 몇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속에 젖어 독서에 몰두했다.
처절했던 유배의 아픔을 달래며, 벼슬을 버리고 두문불출(문을 닫고 밖에 나가지 아니 함) 하였
다고 하니 이는 은둔생활의 첫걸음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때는 인생의 깊이를 아는 원숙한 나이
로써 고향의 아름다운 산천의 정을 만끽할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다.
42세에 별초시에 나아가 장원급제하고 이어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입신양명을
바라던 화려한 출사의 꿈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부터 약 7년간은 한성서윤 등 요직을 거치
면서 유가의 소망을 이루고 정치적 경륜을 쌓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성산현감으로 좌천되
면서 경세의 뜻이 좌절되어, 49세 되던 겨울, 관직을 버리고 해남으로 귀향했다.
그런데 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남달리 애국의 정이 투철한 고산은 의병을 이끌고 배를
몰아 강화도 가까이 갔다. 그러나 왕자들은 이미 붙잡히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며 청과 화의를 맺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개탄하며 평생을 탐라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한 끝에 뱃머리를 돌려 남쪽으로 향하였다. 남하하다가 발견한 수려한 자연이 뒷날 어부사시
사의 배경이 된 선경(仙景) 보길도이다.
보길도 산수의 품안에 안기어 나라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자 조정에서는 그를 지탄하는 모함이 일기
시작했다. 52세에 경상도 영덕으로 간 2차 유배는 이로 인한 일이다. 약 1년이 되던 다음 해 2월에
사면되고 다시 해남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향리의 이웃에 있는 현산면 산중을 찾아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정동과 금쇄동, 문소동 등을 발견하고 자연을 벗하는 본격적인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 후
고산은 이곳의 금쇄동과 보길도의 부용동을 번갈아 자주 왕래하였다.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부용동에는 7차에 걸쳐 약 13년 간을, 금쇄동에는 4차에 걸쳐 약 10년 간을 머물렀다.
고산이 택한 주된 은거지는 해남 금쇄동과 보길동 부용동 두 곳이다. 전자는 첩첩산중 육로를 거쳐
찾아야 할 산수 자연이요, 후자는 절해 고도로 배를 타고 찾아야 할 해중 자연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되는 삶의 공간이다. 그런데 그의 이 같은 은거는 망세(세상을 잊음)라기보다 경국제민과 충군
의 뜻을 저버리지 못한 피세(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피함)였다.
효종이 등극한 이후, 임금의 총애를 잊지 못하고 자주 나라의 부름에 응한 출사는 이 같은 본심
때문이다. 선비로서의 소신이 강했기 때문에 정적과의 격론도 적지 않았다. 74세 때는 승하한 효
종의 산릉과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서인 송시열 등과 대립하다가 또 다시 함경도 삼수로 유배당
하고 말았다. 이것이 세 번째 유배이다. 이 때의 귀양도 7년 4개월이나 되는 긴긴 세월이었다.
그의 출사(벼슬길에 나아감)는 9년여에 불과하지만 유배생활은 3차에 걸쳐 14년이 넘는다.고산
의 생애는 자연에 파묻혀 산 은둔생활과 풍류, 고난과 개척 등으로 점철되어 있는 파란 많은 한
평생이었다.
(2). 고산 윤선도 선생의 업적
고산 윤선도의 시문을 기록한 저작으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책은 전부 6권 6책으로 되어 있는데,
그 판본은 정조께서 윤선도의 공적을 기리어 문집을 만들도록 명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권1에는
율, 절, 집고 등이 실려 있고, 권2에는 소, 권3에는 소와 서, 권4에는 서 단, 권5에는 서, 제문,
축문, 조약, 서, 기, 설, 비명, 잡록, 권6에는 시, 부 등과 가사가 실려 있다.
고산은 정치, 학문, 예술의 전반에 걸쳐 조예가 깊었다. 그는 항상 정치의 중심에서 활약하였고,
그 결과 긴 세월 동안의 유배생활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소학의 기르침에 근거하여 선비로서의
기풍을 지키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경학 위주의 유학자이면서도, 제자백가(온갖 학문)를 두루 섭렵했고 나아가 의학, 복서, 음양,
지리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러한 그의 박학한 면모는 후일 이용후생의
학문적 기초를 확립한 다산 정약용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고산의 박학다식함은 모두 당대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지만, 고산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한국
문화의 폭과 깊이를 심화시킨 문학적인 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학적 업적 가운데에
서도 특히 국문 시가의 경우는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3). 고산 윤선도 선생이 보길도에 남긴 문화 유산
1.고산 윤선도 선생님의 보길도와의 인연
고산 윤선도는 선조 20년(1587년) 6월 22일 한성부 연화방(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부친
윤유심과 모친 순응 안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으며 6세 때부터 학문을 익히고 독학으로 26세에
진사시험에 장원급제하고 40세 때 문과초시에 합격한 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50세(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해남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강화도에 이르렀으나
강화도가 이미 함락되고 임금님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한 심정을 참지 못하
였다. 51세 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하기로 결심하고 탐라(제주도)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정자포 대풍구미에서 항해에 알맞은 바람을 기다리다가 이 곳 보길도의 산수의 수려함에 이끌려
황원포(지금의 등문리 부근)를 통해 보길도에 입도하였다고 한다.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섬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윽함에 이끌린 그는 원시림을 벌채하여 터를 닦고
길을 내어 거처인 낙서재를 지었다. 그리고 낙서재 주변 첩첩이 이어진 산봉우리가 마치 연꽃
봉오리가 피어나는 듯 하여 이곳의 지명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지었다.
고산은 부용동을 보고,
'산들이 둘러 있어 바다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맑고 소쇄하고 천석(泉石)이 절승(絶勝)하니
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라.' 라고 이 곳의 절경을 예찬하였다.
고산의 5대손인 윤위가 기록한 보길도지(甫吉島識)에 의하면, 고산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꾸며낸
부용동은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최고의 걸작품으로서 격자봉 아래 북쪽 산자락에 생활의 본거
지인 낙서재를 세웠고 푸른 숲속에 기기묘묘한 거석들이 들어선 건너편 안산 산허리에는 동천
석실을 세워 사색의 장소로 사용했다고 적고 있다.
특히 황원포(보길면 부황리 등문리 부근)에는 시내가 흐르는 골짜기에 판석(板石)으로 제방을
막아 세연지(洗然池) 라는 연못을 조성하고 그 옆에 인공방지(방지 : 네모 난 연못)인 회수담
(回水潭)을 만든 다음,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세연정(洗然亭)이라는 정자를 세워 이 곳에서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며 풍류를 즐겼다고 전한다.
고산 윤선도는 51세(1637년)에 보길도에 와서 85세에 돌아가시기까지 이 곳 보길도에서 생활한
기간은 13년 정도로 추정된다. 선생은 이 곳에서 우리나라 국문학 사상 금자탑을 이루는 어부사
시사 40수와 한시 32수의 작품을 남겼다.
2.문화 유산
- 세연정
격자봉에서 흐르는 맑은 계류를 하류에서 받아 만든 큰 못을 세연지(洗然池)라 하고 세연지의
물을 끌어 들여 인공 연못인 회수담(회수담)을 만들었는데 두 못 사이에 세운 정자가 세연정
이다.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점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주로 연회와 유희의 장소였다. 고산은 이 곳에서 세연지에 배를 띄우고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며 풍류를 즐겼다.
건물터만 남아있던 세연정은 92년에 복원됐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서 동쪽면에
아궁이가 있는데 평면이 중자형으로 온돌에 직접 불길이 닿지 않도록 설계한 독특한 방식
이다. 서측 굴뚝은 기단면 아래로 향해 있으며 끝 부분이 역풍현상을 막기 위해 양쪽으로
갈라진 점이 특징이다.
고산의 후손 윤위의 보길도 기행문인 '보길도지'에 따르면 세연정의 창문은 비바람을 막기위해
외부에 판문(板門)을 달았다. 판문을 열면 윗부분은 처마에 매달리고 아랫 부분은 땅에 늘어
뜨려져 합치면 판옥(板屋)이 되는 구조였다고 한다.
세연정은 동서남북과 중앙, 모두 다섯곳에 현판을 달았다 비홍교 남쪽에는 혹약암 등의 일곱
암석이 있어 정자 서쪽의 편액을 칠암헌(七岩軒)이라 하였다. 중앙은 세연정(洗然亭), 남쪽
에는 낙기란, 서쪽으로 동하각(同何閣), 동쪽에는호광루( 呼光樓)라 했다.
동하각
내 어찌 세상을 저 버리랴
세상이 나를 저 버렸네
이름은 중서위에 있는 것이 아니거니
삶은 항시 녹야의 규범과 같았다네
고산은 동하각이라는 시에서 자신이 은둔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정치적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절한 심경을 위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 세연지
세연지는 시냇물을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연못이다. 흘러 가는 계류를
판석으로 제방을 막아 마음 심(心)자 모양의 연못을 만들고 연못 안에 인공 섬을 만들고
곳곳에 바위를 배치하여 운치를 더하고 물 흐름을 더디게 하여 수면을 고요하게 했다.
고산은 옥소대에서 기녀들에게 긴 소매를 단 채색 옷을 입혀 춤을 추게 하고 그 그림자가
세연지에 비치는 모습을 즐겼다고 전한다.
- 세연지 인공섬
세연지 연못 가운데 조성된 인공섬이다. 세연지 인공섬은 둥그렇게 석축을 쌓고 그 안에 흙을
부어 나무를 심었는데 세연지 연못의 경관을 한층 더 멋스럽게 해 준다.
-칠암(七岩)
세연지에 여러 개의 바위를 배치하여 운치를 더하고 유속을 조절하였는데 바위 무더기를 칠암
이라 한다. 이 바위들 때문에 세연정에는 七岩軒(칠암헌)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었다.
- 사투암(射投岩)
윤선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사람 외국 세력의 침략이 잦았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어찌 선비라고 무(武)를 등한시 했겠는가. 세연지 건너 편 산중턱에 있는 옥소암에 과녁을
설치하고 이 바위에서 활을 쏘았다고 전한다. 바위에는 활을 쏘기에 알맞도록 다듬은 흔적이
역력하다.
- 혹약암(或躍岩)
세연지 안에 있는 거대하고 뛰어오를 듯한 형상을 한 바위의 이름이다. '큰 두꺼비가 뛸 듯하
고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 는 뜻 의 역경(易經)에 나오는 시구에서 취한 아름이다. 고산
은 이 바위가 와룡암(臥龍岩)을 닮았다고 하여, 촉망되는 인물이 아직 나타나서 활동 하지 않고
있음을 비유하였다. 촉한의 제갈량 (諸葛亮)은 희세의 걸출한 인물이었지만 삼고초려(三顧草廬
: 유비가 세 번을 찾아가 제갈량을 모셨다는 고사에서 연유한 말)에 응하기 전에는 세상에 나타
나지 않았으며, 평소 와룡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불리운 사람이다.
용처럼 꿈틀거리는 물속의 바위
어찌하여 와룡암을 닮았는고
나는 제갈 공명의 상을 그려
이 연못 곁에 사당을 세우고져 하네
이 시 귀절은 고산이 지은 혹약암이라는 한시를 번역한 것이다. 제갈량을 기리며 이를 기념하
고자 한 것은 대망(大望)을 꿈꾸며 장래를 기약하고자 한 고산의 야심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산이 세연지에서 어부사시사를 부르며 낚시를 한 것은 고기를 낚고자 함이
아니라 대망을 펼칠 세월을 낚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비홍교(飛虹橋)터
고산은 세연정에 오를 때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설치한 무지개 다리를 지나 세연정에 오르곤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 고산마총(말무덤)
세연지 건너편 대나무가 무성히 자라는 곳을 말하는데 고산은 자신의 충절을 표현하기 위해
타고 다니던 말의 목을 쳐 이 곳에 묻었다고 전한다.
- 판석보(일명 굴뚝다리)
시내에 제방을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를 이용하여 세연지에 물을 가두기 위한 시설이다.
일명 굴뚝 다리라고도 부른다. 양쪽에 판석을 세우고 그 안을 진흙과 강회를 섞어 채워서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였고 윗 부분에 다시 판석을 깔았다, 판석보는 물막이 시설이나 평소
에는 옥소대로 오르기 위해 세연지를 건너는 다리의 역할을 했다. 장마 때는 물이 넘쳐 작은
폭포가 되기도 한다.
- 동대와 서대
세연정 입구에서 들어오다 보면 왼쪽에 사각형으로 단을 쌓은 시설이 보이는데 이 시설이
동대이다. 이 시설은 일종의 무대이다. 고산은 이 기녀들을 시켜 이 무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이를 보며 즐겼다고 한다. 서대는 세연정 입구에서 들어오다 보면 오른쪽에 있는 시설
로써 삼단의 돌 계단이 나선형 모양으로 축조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국악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 회수담(回水潭)과 연꽃
회수담은 세연지 맞은 편에 있는 네모 난 인공 연못이다. 연못 가운데 역시 네모 난 방도
(사각형의 섬)를 만들어 회수담의 물이 돌게 하고 수입구와 배수구를 과학적으로 조절하여
항상 일정한 수위가 되게 하였고 연못 가운데에는 연꽃을 심어 고산의 연꽃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고산 윤선도의 생애는 기이하게도 세 송이의 연꽃의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이 서울의 동부 연화동(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이고, 해남 종손이 되어 종택을 물려받은 곳은
전남 해남의 연동이다. 이 두 곳과의 인연은 숙명적인 인연이라 하겠으나, 윤선도는 그 자신
이 선택한 마지막 은거지인 낙서재 주변을 부용동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꽃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였음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연꽃은 흔히 혼탁한 시류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기품을
잃지 않은 선비나 시인을 상징한다. 중국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주돈이는 '애련설'이라는 글을
남겨 연꽃의 이같은 상징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내 홀로 연을 사랑하노니, 진흙에서 나서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기어 요염하지 않고,
가운데는 총하고 밖은 곧으며, 넝쿨도 가지도 없으나 향기는 멀리 더욱 맑으며, 정정하여
조촐히 섰으니 멀리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 매만질 수는 없다.'
회수담에도 역시 연꽃을 심었으니 고산과 연꽃의 특별한 인연을 생각케 한다.
- 무도암과 유도암
무도암은 회수담 안에 있는 사각형의 평평한 바위로 고산은 이 바위 위에서 무희들을 시켜
춤을 추게하고 그것을 보며 즐겼다고 한다. 유도암은 회수담과 정자에 붙은 바위로 고산은
이 바위에 앉아 낚시줄을 드리우고 무도암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 회수담방도
회수담에는 사각형의 인공섬을 만들고 그 곳에 나무를 심었다. 인공 방도의 역할은 회수담의
물을 돌게 하여 썪지 않게 하고 경관을 아름답게 하기 의해 조성한 것이다.
- 수입구
세연정 동쪽 축담 밑에는 계담에서 인공연못으로 물을 공급해 주는 터널식 수입구가 있다.
오입삼출이라 하여 물이 들어가는 구멍은 5개이며 인공 연못 쪽으로 나가는 구멍은 30cm
아래에 세 개가 만들어져 있다. 이런 구조덕에 판석보로 막은 계담의 물이 인공연못으로 빨리
유입되며 연못 속의 수면을 고요하게 했다. 이는 농민들이 개울에 보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방법을 응용한 것으로 고산의 절묘한 건축조예까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세연정 노송
세연정 앞 회수담 쪽에 몇 백년쯤 자랐을 것 같은 노송이 있다. 세연정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옛부터 이 소나무를 세연고송(洗然孤松)이라 하여 부용동 팔경 중의 하나로 불렀다.
- 옥소대(玉簫臺)
세연지 건너 편 산 중턱에 있는 넓적한 바위로 고산은 기희(妓姬)에게 소매가 긴 채색 옷을
입혀 춤추게 하고, 그 모습이 세연지 못에 거꾸로 비치는 그림자를 즐겼다고 전한다. 옥소란
(玉蕭)란 '옥으로 만든 퉁소' 라는 의미이므로 이 곳에서 기희들의 춤과 더불어 풍악을 연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봉화대
세연지를 조성하면서 파낸 흙을 쌓아놓은 곳이라고 한다. 고산은 세연정에서 유희하다가
음식이 필요하거나 낙서재와 연락할 일이 있을 때 이 곳에서 깃발이나 연기를 피워 신호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각종 푸르른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여름철에는 바람이 서늘하여
여행객들이 이 곳에서 땀을 식혀가는 곳이 되었다.
- 세연정 토성
세연정 둘레에 쌓은 토성이다. 지금은 토성의 일부만 남아 있고 토성에는 각종 상록수가
원시림을 방불케 하고 있다.
- 낙서재(樂書齋)
낙서재는 격자봉 산자락에 자리잡은 고산의 생활 공간이다. 독서를 즐기는 집이라는 뜻의
낙서재는 처음에는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던 국법 때문에 잡목을 베어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낙서재는 간 곳 없고 면에서 세운 관광 안내판만이 그 옛날 이 곳이 낙서재 건물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 무민당
고산은 낙서재 아래 사랑채를 짓고 주로 이 곳에서 기거하며 손님을 맞고 자녀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세상의 온갖 번뇌를 잊고 살고자 하는 뜻으로 무민당(無憫堂)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낙서재처럼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고 무심한 돌담만이 그 옛날 이
곳이 집터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고산 윤선도 사적지 복원 사업이 진행되면
낙서재와 무민당이 옛 모습을 되찾을 것으로 전망된다.
- 소은병(小隱屛)
낙서재 뒷편의 두어 길의 거대한 병풍처럼 생긴 암반이다. 「고산유고」 에 '소은병은 낙서재
뒤에 있는데 송나라 주자(朱子)가 경영하던 무이산의 대은병보다 작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바위 위 물이 고여 있는 곳은 인공의 흔적으로 보인다.
- 곡수당(曲水堂)
곡수당은 낙서재에서 북동쪽으로 200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집터로서 고산의 아들 학관이
지어 공부하는 곳으로 썼다고 한다. 곡수당의 건물은 초당으로 한 간 정자이며 세연정보다
작았다고 전한다. 곡수당에는 장방형의 연못을 조성하여 곡수(曲水)의 계곡물을 끌어와서
다시 계곡으로 방류하였다고 전한다.
- 조산(造山)
낙서재 아래 들 가운데 인공으로 조성한 듯한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사람이 조성한 듯 하다
하여 조산(造山)이라고 명명하였다. 옛날에는 이 곳에 연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전해 온다.
- 동천석실(洞天石室)
부용리 마을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고산이 특히 사랑하여
부용동의 제일 명승으로 생각했던 곳이다. 안산의 바위틈에 지은 집으로 주변에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여러 형태의 바위들이 있어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을 연상케 했던 데서 붙인
이름이다. 동천(洞天)이란 하늘에 이어지는, 곧 하늘로 통한다는 뜻이며, 석실(石室)이란
산중에서 은거하는 방, 또는 도서를 소장해 두는 곳을 의미한다. 서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자연선경을 소요하였던 때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 석담(石潭), 석천(石泉)
동천석실 정자 오른쪽 암벽사이에서 솟아나오는 석간수를 받아 모으는 연지(연꽃을 심은
연못)가 있다. 벼랑쪽을 석담(石潭)이라 하고 바깥쪽 연지를 석천(石泉)이라 한다. 석담과
석천은 모두 인공으로 암벽을 파서 조성하고 그 사이는 바위에 구멍을 내어 물이 서로 통
하게 했으며 석담에는 연꽃을 심었다고 한다.
- 격자봉
고산이 살았던 부용동의 主山이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산 전면이 붉은색으로 변한다고
하여 격자봉(格紫峯), 또는 적자봉(赤紫峯) 이라 하였다 한다. 格(이를 격)에 紫(붉을 자)
는 주자의 은거한 무이구곡의 자양서원 (紫陽書院)을 합한 것으로 곧 ' 조선의 주자가
은거한 곳에 이르는 봉우리 '란 뜻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 부용동
고산은 보길도에 입도하여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섬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윽함에 이끌린
그는 원시림을 벌채하여 터를 닦고 길을 내어 부용동(芙蓉洞)을 건조했다. 첩첩이 이어진
산봉우리가 마치 연꽃봉우리 피어나는 듯 하다 하여 이 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했다.
고산의 5대손인 윤위가 기록한 보길도지에 의하면 고산이 심혈을 기울여 꾸며낸 부용동은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했다. 격자봉 북쪽 기슭에 생활의 본거지인
낙서재를 세웠고 푸른 숲속에 기기묘묘한 거석들이 들어선 건너편 산허리에는 동천석실을
세워 사색의 장소로 사용했다.
- 하한대, 혁희대
낙서재 오른쪽을 감싸고 도는 산봉우리가 하한대이고, 하한대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듯한 산봉우리가 혁희대이다. 보길도지에 의하면 하한대는 장송이 늘어서 있어 여름
에는 서늘한 곳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혁희대는 고산의 임금에 대한 충정을
나타내는 명명으로 이 산에 올라 멀리 해남 고향과 임금이 계신 궁궐을 바라보며 연모의
눈물을 뿌렸다고 전한다.
- 낭음계
고산이 붙인 이름으로 격자봉 서쪽 세번째 골짜기이다. 고산은 여기서 죽장을 짚고 소요
하면서 보냈다. 왕희지가 난정에서 문인들과 모여 술잔을 물위에 띄워 놓고 시를 짓고
즐긴 놀이터와 같은 곳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 있었다 한다. 또 이 곳에는 목욕반이
있어 고산이 때때로 여기서 목욕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낭음계가 있었던 곳에 지금은
둑을 막아 저수지를 축조하여 보길도 주민은 물론 바다 건너 이웃 노화읍까지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우리 고장의 가장 큰 어려움은 뭐니뭐니 해도 생활용수와 산업용수의
확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식수확보는 시급하면서도 해결이 어려운 문제
였다. 보길도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는 노화읍의 경우 가뭄이 조금만 심해도 격일제
급수, 3일제 급수, 심지어 5일제 급수를 해야만 했다. 고지대의 경우 수압이 낮아 급수를
할 수가 없었으며 빨랫감을 한꺼번에 모아 보길도로 건너가 해와야 하는 어려움 이을
겪었다. 이런 아쉬움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중앙에 건의한 결과 식수문제가 어렵
사리 해결되었다. 보길면 부용리에 있는 부용천 계곡을 막아 노화읍 이목리의 1,500여
명의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부용리 상수원은 1987년 착공하여 총 공사비
약 19억 원을 들여 1990년에 완공한 것으로 42만 톤을 저수할 수 있다. 특히 바다로
가로 막혀있는 부용리와 이목리를 연결하기 위해 바다 밑으로 1km 길이의 상수도관을
매설하였는데 이런 방법은 우리나라에서는 두번째다. 현재 일일 3천 톤 정도를 급수하고
있기 때문에 노화읍 고지대까지 급수가 되어 노화읍 이목리 사람들에게는 부용리 저수지
는 생명수라고 할 수 있다..
- 용두암
동천석실 바로 앞에 있는 쌍동이 같은 두 개의 바위를 용두암이라고 부른다. 용두는 도르
레의 방언이다. 고산 윤선도는 용두암에 도르레를 설치하고 명주실로 낙서재와 연결하였
다. 그리하여 동천석실에서 소요하며 사색에 잠기다가 음식이나 지필묵이 필요하면 낙서
재와 연락하여 이 도르레를 이용하여 물건을 날랐다고 한다. 그 옛날에 오늘날의 케이블
카와 같은 시설을 설치한 고산의 기발한 착상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용두암 사이로
조그마한 산이 조산이고 조산 너며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격자봉 산자락이 낙서재
터이다.
- 차바위
동천석실 바로 앞에 있는 쌍동이 같은 두 개의 바위가 용두암이고 용두암 앞에 넓적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차바위이다. 고산은 차바위에 앉아 부용동 절경을 내려다 보며
차를 마시며 사색에 잠겼다고 한다. 해질 무렵 차를 끓이는 연기가 동천석실을 감싸고
도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 풍경을 석실모연(石室募烟)이라고 표현하고 부용동
팔경(芙蓉洞 八景)중 하나로 쳤다.
- 희황교(羲皇橋)
석담 위 벼랑에 계단을 만들고 이를 석계(石階)라 불렀으며 이곳을 오르기 위해 석담을
가로질러 다리를 만들었는데 이 다리를 희황교라고 했다. 희황(羲皇)은 전설상 중국의
복희씨를 존칭한 말로 세상을 잊고 숨어 사는 사람을 이른다고 할 때, 곧 고산 자신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산은 희황인이 되어 여름에 청풍(淸風)을 즐기며 벼개를
높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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