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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주일) 창세기 48:8~22 나의 고정관념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
오늘은 ‘나의 고정관념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흔히 고정관념은 다른 말로 ‘선입견’이라고도 하고, 영어로는 ‘스테레오타입’이라고도 합니다. 고정관념에 너무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변화시키기는 참으로 힘들고, 그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콘크리트벽과 같이 강해서 깨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또한 자신의 속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또한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학습되어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뉴욕 타임즈는 미국인의 ‘인종’에 대한 대표적인 고정관념으로 몇가지를 소개했는데요. ‘욕심있는 유대인’, ‘비열한 중국인’, ‘바보 영국인’, ‘게으른 흑인’ 등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때로 분쟁이나 극단적인 인종차별과 같은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하는데요, 그렇지 않은 유대인이나, 중국인이나, 영국인이나 흑인도 다 싸잡아서 그렇게 판단한다는 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각 지방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또한 혈액형도 A형, B형, o형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정관점이 있고, 그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적으로도 교회안에서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생긴 종교적인 생각들이 고정관념으로 굳어져서 그것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는데, 문제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개인의 종교적인 관습이나 고정관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깨기가 힘든 것이 됩니다. 이런 고정관념은 나이가 들수록 깨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살아온 날들 만큼 그것들이 쌓이기 때문이죠. 일반적으로 고정관념을 깬다는 것은 지금까지 당연시 여기던 것들을 이제는 다르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관점으로 보면 지금까지 신앙생활해오면서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르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의 고정관념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면서, 오늘 이 시간 나의 고정관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궤도 수정이 있기를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자식은 내 소유이다(8~12절).
오늘 본문 8~12절은 요셉이 자신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아버지 야곱의 손자로 입양하기 위하여 그 의식을 치르는 법적 절차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입양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여러가지 이유로 자신의 자녀를 돌 볼 수 없는 부모가 그 아이를 다른 집으로 입양시키는 것도 있을 수 있구요. 또한 자신의 자녀를 가질 수 없는 부부가 기관에서 아이를 입양함으로 자신의 자녀로 삼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부모로서의 영향력을 배가하기 위해 이미 자신의 자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녀가 아닌 아이들을 입양함으로써 자신의 자녀를 포함한 대가족을 만들기도 합니다. 성경도 입양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모세가 대표적인데요. 애굽의 바로왕이 모든 히브리 남자 아기를 죽이라는 칙령을 내린 시기에 아들을 낳은 ‘요게벳’이라는 히브리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출1:15-2:10). 요게벳은 아기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상자를 가져다가 방수 처리를 한 후에 그 아기를 넣고 나일강에 띄워 보냈습니다. 그 때 목욕하러 나일강에 나와 있던 바로의 공주가 그 바구니를 발견하고는 아이를 꺼내었습니다. 너무 예쁜 나머지 바로의 공주는 결국 그 아기를 왕실에 입양시키고, 그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 주지요, 그리고 왕궁에서 잘 자라도록 양육시켜 줍니다. 또한 ‘에스더서’에는 에스더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나옵니다. 에스더는 부모가 죽은 후 사촌에게 입양되었고, 그 후 페르시아 여왕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유대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녀를 사용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씨를 통하는 대신에 성령을 통하여 잉태되었습니다(마 1:18). 요셉은 예수님을 자기 자녀로 입양한 후 예수님을 키웠습니다. 또한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신뢰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리면, 우리가 그분의 가족이 되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자연적인 잉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입양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5). 오늘 요셉의 아들들의 입양절차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운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누구인지’를 먼저 묻습니다(8절). 확인하려는 절차겠지요. 이 질문에 요셉은 9절에 ‘내 아들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라고 답합니다(9절). 신앙은 일반적인 자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뛰어넘습니다. 자녀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관념은 ‘내 것이다’ ‘내 소유이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의 고백은 오늘 본문의 요셉과 같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녀’라는 고백입니다. 분명히 요셉의 자녀들은 고난을 겪은 후에 얻은 축복의 열매요, 육신의 열매요, 요셉의 자식이지만, 요셉은 자녀들에게 대해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라고 믿음의 고백을 합나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란 이름의 뜻은 각각 ‘잊게 한다’와 ‘두 배의 열매를 준다’입니다. 즉, 하나님이 므낫세를 통하여 ‘나의 고난을 잊게 해주셨다’는 의미이고, 또한 에브라임을 통하여 ‘두 배의 열매를 맺게 해주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란 이름은 요셉의 생애 전체를 요약하는 말입니다. 요셉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지요. 거기서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지요. 고통스럽고 마음 아픈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잊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므낫세’입니다. 그 후 요셉은 두 배의 복을 받았어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다른 형제들은 한 지파씩 몫을 받았는데 요셉은 두 지파의 몫을 분배받았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 요셉은 자기 후손들이 두 배의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브라임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통해 하나님이 그 고난을 잊게 해주셨고, 하나님께서 두 배의 열매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두 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뭘하려고 하면 잘 안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는 것, 시험에 합격하는 것,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직장에 취직하는 것, 승진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는 것이나 큰 돈을 버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나간 일을 잊어버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앞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인생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없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도 잊지 못하고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갑니다. 두 배의 열매도 거두지 못하고 열매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반면에 하나님 중심으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인생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 속에 지난날의 고통을 잊게 해주시고, 그의 모든 일에서 두 배의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요셉이 고난 후에 얻은 축복의 열매이지만, 요셉은 이 열매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그 분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을 기쁘게 하나님께 드립니다. 우리의 자녀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로 귀하게 존귀하게 여겨야 하며, 또한 나의 자녀도 하나님의 소유로 하나님께 기쁘게 드려야 합니다. 마치 모세가 어머니 요게벳이 만든 갈대 상자를 통해서 나일강에 보낸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의 손에 넘겨드려야 합니다. 갈대상자를 통해 띄워보냈다는 것은 하나님이 너의 삶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너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의 결단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믿음의 고백이 우리 신앙인에게 먼저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아들을 위한 기도문>의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게 이런 자녀를 주옵소서. -- 중략---생각해야 할 때에 고집부리지 말게 하시고 주(主)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그런 자녀가 되게 하소서 원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안일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나, 분투하며 도전할 줄 알도록 인도하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중략-- 그리하여 어느 날, 나 아버지는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告白)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아멘)
적용) 우리 가정에 허락한 자녀가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합니까? 나는 하나님의 소유인 자녀를 하나님께 어떻게 드리겠습니까?
2.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13~16절)
이제 야곱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합니다.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기르시고 많은 환난에서 건지신 것처럼, 요셉과 그의 두 아들에게도 하나님이 같은 복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15,16절 함께 읽겠습니다. 출생 때부터 형 에서와 다투면서 욕심이 많은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목자’(요10:14)가 돠어 자신과 가족을 평생 먹이고 입히시고 기르실 뿐 아니라, 삶의 위험한 고비 때마다 천사의 모습으로 자신을 지켜주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하심’이 있기를 축복합니다(16절). 세상에는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 살아간다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또한 하나님의 공급해 주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이 가진 좋은 것의 원천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고정관념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내 자신이 나의 주인임을 더 확고하게 믿고 자신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실제적으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자수성가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그 노력과 수고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고, 남들에게도 귀감이 됩니다. 그것도 백만장자, 억만장자가 되는 것을 스스로 해냈다면 정말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혼자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는 옆에서 도와주었고, 뒤에서 응원해주었고, 앞에서 이끌어주었고, 심지어는 그 때의 환경이 자신이 부자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백만장자’, ‘억만장자’가 되는 것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모든 것이 공급되고 모든 환난에서 벗어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왔다고 확실히 고백하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야곱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뿐더러, 그 하나님을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듯이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인생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나를 만드신 분이 누구신지를,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 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몰라서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세상과 마귀는 우리를 인생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네 인생의 주인은 너 자신이다. 네 생각대로 살아가라. 네 마음대로 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언약의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완전한 공급하심과 보호 아래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적용) 하나님이 그동안 나와 나의 가족을 어떻게 먹이시고 입히시고 지켜주셨습니까? 야곱처럼 내가 만난 하나님을 소개하고 간증하고 만나게 해주는 것이 다른 사람을 향한 가장 큰 축복임을 믿으십니까?
3. 내 뜻이 먼저다(17~22절)
눈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 야곱이 안수하고 축복하는 과정에서 요셉은 당시 사회의 전례대로 장남 므낫세를 아버지의 오른손 앞에 뒀고, 차남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 앞에 데려다 놓았다. 고대사회의 전통은 오른쪽에 우선순위가 있었고, 더욱 큰 권위가 있다고 믿었다. 사실상 장남 므낫세는 요셉이 어려웠던 고통의 시절을 잊도록 해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요셉은 두 아들 중에서 과거에 자신에게 일어난 힘든 고통을 모두 잊게 해준 기쁨조 므낫세를 더욱 좋아했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 므낫세의 출생과 더불어 처음으로 극복되었으므로, 요셉은 장남을 크게 사랑스러워했다. 눈 먼 야곱은 손을 엇바꾸어 두 아들들의 머리에 올려 놓았다. 요셉은 거의 장님 상태에 이른 아버지 야곱이 장남과 차남의 순서를 구별하지 못하여 실수한 것으로 알고 올려 놓은 손의 위치를 바꾸라고 주문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서 실수한 것이 아니라고 아들 요셉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눈이 어두운 야곱은 오른 손을 차남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올려 놓았고, 왼손은 장남인 므낫세의 머리에 올라가도록 해서 제사장으로서 축복을 했다. 히브리 공동체의 지도자 야곱이 가진 육신의 눈은 거의 보이지 않은 상태였지만, 건강한 신앙의 눈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서 그 분의 지시를 성실하게 이행했다.
아버지 야곱이 ‘차자 에브라임’을 오른손으로 축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아 그 손을 옮기려고 합니다(17,18절). 요셉은 ‘장자 므낫세’를 ‘권위와 능력과 은혜의 상징’인 오른손으로 축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의 고정관념이지요. 이러한 요셉의 도전에 야곱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야곱은 ‘나도 안다’(19절)라고 하며 거절합니다. 세상의 눈이 밝고 사회적 통념을 따라온 요셉은 ‘장자만이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영적인 눈이 밝은 이스라엘은 사회적 관습과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고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과 학벌과 권세’에 좌우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통치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습니다(사55:8~9).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나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언약의 계승자가 되어 믿음의 땅, 영원한 기업인 본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적용) 나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으로 윗질서를 거스른 적은 없습니까? 요즈음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다르다고 기뻐하지 않으면서 내 뜻대로 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인정은 하고 믿는다고는 하지만, 여러 가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도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죠, 바라기는 우리의 여러 가지 고정관념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 아래에서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어져서 우리의 신앙이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고백과 같이 아름다운 삶으로 바꾸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