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위기는 임진왜란 때였다. 대장경판과 판전을 포함한 해인사의 건물들은 임진왜란의 전화를 면하였다. 이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진년 왜란 때에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및 덕유산은 모두 왜적의 전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 소백산 그리고 가야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예부터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해인사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 당시 이 지역을 지켰던 승병과 의병의 힘이 절대적으로 컸기 때문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보름 만에 경상도 전역의 주요 읍성들을 모두 짓밟았다. 그 과정에서, 왜군은 창원, 창녕, 거창을 지나 4월 27일에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를 점령하였다. 이때 왜군은 북상하며 해인사 고려대장경에 눈독을 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해인사를 왜군의 전화로부터 지켜낸 것은 소암(昭岩,? ~1605)대사가 이끈 해인사 승병과 거창, 합천 일대에서 송암 김면(金沔,1541~1593), 내암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각각 이끈 의병이다. 이들은 가야산으로 접근하려는 왜군의 진로를 목숨을 걸고 막아 왜군이 이듬해 정월 개령, 선산 쪽으로 철수하게 만들면서 해인사와 대장경도 안전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위기는 조선 후기 해인사에 수 차례 발생한 화재 이다. 숙종 21년(1695)부터 고종 8년(1695~1871)에 걸쳐 해인사에 일곱 차례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때 해인사에 무슨 건물이 화재를 당하였고, 또 새로 지어졌음에 대하여 1876년 2월 퇴암(退庵) 스님이 찬술한 ‘해인사실화적(海印寺失火蹟)’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695년, 1696년, 1743년(영조 19), 1763년(영조 39), 1780년(정조 4), 1817년(순조 17), 1871년(고종 8)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렇듯 임진왜란 이후 해인사에는 무려 일곱 차례의 큰 불이 났으나,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장경판전 건물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이와 같은 화재로 장경판전을 제외한 해인사의 당우들은 모두 1817년 이후에 지어졌다. 특히, 1818년 때의 중건은 1488년(성종 19) 학조(學祖)대사의 해인사 중창 이후 해인사의 중건 역사상 획을 긋는 큰 불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