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시월)에 관한 시모음 39)
10월이 오면 /김원각-2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만 보고 자라던
나무들도 기세를 접기 시작해야 하는 달.
아직 지쳐 쓰러지지 못한 하와이의 9월
지난달이 둘러메고 가지 못한
불벽(Firewall) 무더위가
떠나기 싫어
쪼골쪼골 쇠를 녹이는
용광로에서 끓고 있네!
하늘이 높아질수록
생각이 깊어지는 10월의 가을
여문 꽃씨 속에 저물어가는
9월의 아름다움을 보듬어주네!
10월 첫날의 기도 /정연복
산들바람에
춤추는
길가의 코스모스
아가씨의
명랑한 모습이
참 보기 좋은
오늘은
10월의 첫날.
이미 흘러간
시간의 강물엔
아무런 미련
두지 말고
올해의
남은 세 달에는
코스모스처럼
살게 하소서.
죽음을
지레 겁먹지 않고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함으로
밝고 명랑한 마음
또 평안한 영혼으로
여린 듯 강한
내가 되게 하소서
시월의 기도 /정심 김덕성
시월에는 결실의 기쁨을 주소서
농부의 땀으로 일구어 놓은 가을
신선한 가을바람과 함께
행복한 삶이 되게 하소서
시월에는 겸손한 마음을 주소서
미움에는 용서하는 마음을 주시고
매사에 낮은 자세로
삶의 향기를 풍기게 하소서
시월에는 사랑의 마음을 주소서
계속되는 갈등과 반목에서 벗어나
떠오르는 아침 햇살같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하소서
시월에는 감사하는 마음을 주소서
넉넉한 가을을 행복으로 사색하면서
가을을 찬양하는 시(詩)로
하루의 삶이 곧 감사가 되게 하소서
시월 새벽 /류시화
1
시월이 왔다
그리고 새벽이 문지방을 넘어와
차가운 손으로 이마를 만진다
언제까지 잠들어 있을 것이냐고
개똥쥐바퀴들이 나무를 흔든다
2
시월이 왔다
여러 해만에
평온한 느낌 같은 것이 안개처럼 감싼다
산 모퉁이에선 인부들이 새 무덤을 파고
죽은 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3
나는 누구인가
저 서늘한 그늘속에서
어린 동물의 눈처럼 나를 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 그것을 따라가 볼까
4
또다시 시월이 왔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침묵이
눈을 감으면 밝아지는
빛이 여기에 있다
5
잎사귀들은 흙 위에 얼굴을 묻고
이슬 얹혀 팽팽해진 거미줄들
한때는 냉정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럴수록 눈물이 많아졌다
이슬얹힌 거미줄처럼
내 온 존재에 눈물이 가득 걸렸던 적이 있었다
6
시월 새벽, 새 한 마리
가시 덤불에 떨어져 죽다
어떤 새는
죽을 때 가시 덤불에 몸을 던져
마지막 울음을 토해내고 죽는 다지만
이 이름없는 새는 죽으면서
무슨 울음을 울었을까
7
시월이 왔다
구름들은 빨리 지나가고
곤충들에게는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리라
곧 모든 것이 얼고
나는 얼음에 갇힌 불꽃을 보리라
시월 /김행숙
고추잠자리 서넛,
무지개빛 날개로 들판을 맴돌고 들녘은 한참 무르익어 가을 냄새로 그득하다
비바람 몰아치던 때 있었던가 싶게 말짱한 아침,
남은 날들도 햇살처럼 청명해서 눈 시리게 맑았으면.
온통 단풍이 붉고 너와 나의 가슴에도 적막이 찾아들면
짧아진 햇살만큼 엑기스 된 사념도 깊어지겠지
고춧대 걷을 때쯤이면 호박이 늙어가고
새로 파종한 김장용 무 배추가 탄탄한 밭두렁을 이룬다
무대도 없이 펼쳐지는 잠자리의 군무를 가을하늘 같은 눈길로 바라보면서
마음 빗장을 푼다 나뭇잎이 하나 둘 지상으로 떨어지는,
지금은 알싸한 시월
시월의 눈물 /청산 홍대복
비, 바람 몰아쳐
거리에 날리는 낙엽
저무는 인생의
뒤안길에 나래 접는다
어둠 속에 감춰진
허전한 마음이
스산하게 느껴지고
텅 빈 마음 한구석을
거세게 후벼 파듯
차가운 눈물 흘러내린다.
시월 비 3. /문종식
― 동암리에서
석범 할머니 부러뜨리는 생솔가지
아픈 소리 태우던 연기가
어둠이 내리는 은행나무
메마른 가지 기어 오르고
꿈이나 한둘 집어야 할 손가락
앙상한 마디 움켜잡는 이야기
종지 한그릇에 담지 못했어도
한 국자 듬뿍 퍼올린 된장국물에서
피어 오르는 석범 할머니 훈김이
처마밑에 모이는 비바람을 감싸 안는데
호롱불에 흔들리는 등그림자
굽은 어깨 짊어진 평생
무게 숨기고 오르내리던 돌계단에서
무릎 관절 삐걱이는 물소리가
선잠깨는 파도를 더 보채게 한다
10월도 중순을 넘어섰다 /유승도
베어서 눕혀놓은 들깨를 털려고 밭으로 나갔다가 푸릇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꼬투리가 눈에 거슬려
발길을 돌렸다 채 익지도 않은 감을 쪼아 먹는 물까치들을 ‘훠이’ 쫓았으나 날아가지 않는 놈들이 있어
돌멩이를 주워 던졌다 그래도 날아가지 않는 녀석이 있어 한 번 더 던졌다
비가 온다더니 흐릿한 날이 저녁까지 이어졌다 풀을 먹으라고 흑염소 네 마리를 풀어놓으니 밭으로
가서 눕혀진 들깨를 질겅질겅 밟고 돌아다닌다 소리를 쳤으나 녀석들도 들은 둥 만 둥이다 돌을 던지
니 염소는 맞지 않고 깨가 털리는 소리가 난다 염소들이 놀랐는지 와다다닥 들깨를 밟아대며 우리 쪽
으로 달아난다
얼큰한 시월 /전영관
작년에 나, 뺨 맞았잖아
장성댐이 깊기는 깊더구만 가을이 통째로 빠졌는데 흔적 없고
조각구름만 떠다니더군 백양사 뒷산 정도야 그 남색 스란치마에 감기면
깜박 넘어가지 않겠어 뛰어들까 싶기도 한데
집사람 얼굴이 덜컥 뒷덜미를 채더군
피라미 갈겨니 메기까지 푹푹 고아
수제비도 구름같이 떠오르는 어죽(魚粥) 한 사발 했지
반주로 농탁(農濁) 몇 대접 걸쳤다가 휘청
단풍에 취한 낭만파처럼 평상에 누웠던 거 아닌가
목침 베고 한 잠 늘어진 뒤 화장실에 가보니 아 글쎄
벌건 뺨에 손자국 선명한 거라 애기과부 손바닥 같은 단풍잎 대고 누워
잠시 딴살림 차렸던 거라 뭣에 쫓기기는 한 듯
뒷골 얼얼하니 내려오는 내내 흙길도 출렁거리더군
오늘 나, 거기로 뺨 맞으러 간다
혼자 쓸 한나절쯤 배낭에 챙겨 넣고 지팡이 들고
는실는실 웃는 고것들 후리러 간다 농탁(農濁)에 엎어진 핑계로
작년처럼 낮잠 한 숨 퍼지르고 올 참이야 한쪽 뺨 벌겋게 얻어터져야
후끈한 뒷맛으로 올 겨울 얼음고개 넘지 않겠나
누구나 사랑한 시월 /장종섭
가을을 품에 안고
기쁨 한 아름
아쉬움도 한 아름
우리 곁에 나눔하고
찬바람 맞으며
가는 시월에
콧대 높던 노처녀
평수를 넓혀
팔 벌리고
눈이 높아
좁은 이마 노총각도
가슴 뛰게 하였지요.
10월 /김윤현
초록을 안고 사는 사람보다
초록을 내려놓고 사는 사람이 더 그리워지는
꽃내음에 젖어 사는 사람보다
마른 풀에서도 꽃향기를 느끼는 사람이 더 생각나는
단풍으로 물든 사람보다
단풍으로 물들게 해 주는 단풍나무 같은 사람이 더 보고 싶은
벌써 시월도 끝이네 하는 사람보다
아직도 시월이야 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 주고 싶어지는
10월령에서 /임영준
그래 이제
그간의 허물
초라한 초상이
투영되고 있는가
해맑은 하늘을
마주 보고 낱낱이
고뇌하고 있는가
모두 비우고
그리움만 채워서
저 산과 더불어
저물어가고 있는가
10월의 연밭 /古松 정종명
저 넓은 밥상에
거뭇거뭇 한 밥그릇 먹기 좋게도 담았다
봄날 논배미마다 연꽃을 심은 건
저리 큰 밥상에 성찬을 차리기 위해서였어
불타는 붉은 입술의 설렘과 뜨겁던 햇살, 두근거림, 식혀 낼 살가운 바람, 청개구리의 울음이 섞인 연밥
새벽안개와 아침이슬과 소낙비로 익혀낸 연밥
연밭에 펼쳐 놓았던 수채화
초록은 여물어 단풍 들고
굳은 의지 꺾인 펄 속 꿈의 싹
깊이 잠 들여놓은 시월
쿰쿰한 펄 묻은 연밭이 마주한 밥상,
그릇마다 탐스러운 연밥
한 술 한 술 연밥을 먹는 소리
구수한 연밥 냄새 연밭을 덮고
먹은 그릇마다 텅 비어 허하다
허기진 연밭의 입속에
퐁당퐁당
떨어지는 밥알들
성찬의 밥상에 빈 그릇만 남았다
시월의 파노라마 /정찬열
밭 언덕을 뒤덮은 호박이
쓸쓸한 넝쿨을 지키고 있다
밭두렁에 파수꾼 옥수수는
된서리에 시들고 대만 푸르다.
피 변(彼邊)의 언덕을 지킨 감나무
잎은 떨어져 가고
누르스름한 감만 보인다.
고추 따는 아낙의 콧노래 흥얼거림에.
고추처럼 붉어져 가는 계절이다
자루 망태
이고 가는 옷 적삼에는
후덥지근한
땀방울이 등골에 베인다.
가을바람이 동행하며
따라온 것을 문득, 알았다.
대문 열고 돌아와
밥솥에 식은 밥을 퍼 담아
시원한 냉수에 물을 말아
풋고추 찾아 된장에 밥을 먹으려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적신다.
매운 고추도 아닌데…!
내 고향 뒷산에서
바라다보이는 파노라마
주인 떠난 까치둥지처럼 빈집 같다
오늘따라 그 옛날 정경(情景)이
허허로운 몽환에 바람만 냉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