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468m) - 경북 경주
☞ 산행일자 : 2022. 1. 22.(맑음)
☞ 산행경로 : 포석정주차장~부엉골~부흥사~금오정~상사바위~사자봉~지바위골~국사골
~상사바위~고깔바위~금오봉~바둑바위~삼불사~윤을곡마애불좌상~포석정
☞ 산행거리 : 약 19.4km (도상거리 18.0km)
☞ 산행시간 : 약 5시간 55분
오늘은 경주 남산을 간다.
산행지로 여기저기를 찾아 보다가 마땅한 곳이 없던 중
갑자기 경주 남산이 생각났다..
남산도 등산코스가 여러곳이라
지금까지 가보지 않은 경로를 여기저기 돌아 볼 생각이다.
포석정주차장에 도착하고 보니 요즈음 코로나 시대를 반영하기라도 하는 듯
드넓은 주차장이 썰렁하다...
포석정주차장에서 이정표는 금오봉 4.7km를 가리키지만
금오봉으로 오르는 등로가 워낙 여러갈래라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 다르기에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힐링마을도 보이고...
산행준비를 마치고 넓은 도로를 따라 서남산공원지킴터로 올라가는데
들머리로 하려했던 황금대능선의 진입로가 보이지를 않는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그냥 도로를 따라 올라갔더니 지킴터 앞에서 길은 갈라지고
경주 남산 일원
남산은 신라의 왕도였던 서라벌 남쪽에 솟아 있는 금오산과 고위산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통틀어 남산이라 부르고 있다.
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동서로 가로지른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거리는 약 8km에 이른다.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었으며,
수많은 불적들이 산재해 있다.
불교 관련 유적 이외에도 남산에는 신라의 건국 전설이 깃든 나정,
신라 왕실의 애환이 서린 포석정터, 서라벌을 지키는 중요한 산성인 남산신성 등
왕릉, 무덤, 궁궐터 등을 망라한 많은 유적들이 간직되어 있다.
그 뿐 아니라 여러 전설. 설화들이 남산 곳곳에 깃들어 있어
마치 야외 박물관이라고도 할 만큼 신라의 예술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남산은 경주시의 남쪽에 솟은 산으로 신라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공원지킴터에서 우측길로 접어들고
좌측은 윤을곡 마애불좌상으로 가는 길인데 하산길에 들러볼 생각이다.
우측길로 접어들었더니 당초 하산길로 생각했던 부엉골로 들어선다...
어쩔수 없이 계획을 바꿔 당초 생각했던 코스를 역순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이쪽이면 어떻고 저쪽이면 어떠랴..
일단 산속으로 들어서니 빽빽히 자리잡은 소나무가 반기고
울창한 소나무 숲사이를 걸어 들어가자니 여름이 아니어도 상쾌하기 그지없고..
곳곳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를 찾아 볼 생각을 하니
마치 수도를 하러 길 떠나는 수도승의 마음이 이러지 않을까 싶다...
초반의 넓은 길은 이내 끝이나고 곧 울퉁붕퉁한 부엉골의 계곡이 시작된다.
생태복원을 위해 샛길은 대부분 츨입금지...
그런데 부엉골엔 개인묘지가 제법 보인다...
묘지옆엔 이장안내문이 붙어있지만
아직도 남쪽방면에 비해 이장이 잘 안되는 모양이다.
부엉골엔 꽁꽁 언 계곡물이 흐름을 멈추고 아침햇살에 보석처럼 반짝인다...
계곡을 따라 오르던 등로는 계곡을 한 번 건너고나서
본격적으로 능선으로 오름길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다시 나무계단을 따라 계곡을 건너 능선길로 오른다.
계단을 따라 내려서고 다시 계곡을 건넌다..
키 큰 산죽길을 지나면 곧 부흥사에 닿는다..
키큰 산죽길을 빠져나가니 조그만 돌무덤이 보이고..
무슨 유적지인것 같은데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좌측엔 기도처가 보여 안을 슬쩍 들여다 보니 자그만 돌부처님이 한 분 앉아계신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이곳이 바로 부흥사구나...
옆엔 조그만 부처상도 보이고...
부흥사로 들어서니 요사채와 종무소 건물만 보여 잠깐 실망했지만
계단을 올라서니 커다란 대웅전이 나온다...
부흥사 대웅전과 경주남산 포석계 포석곡 제6사지 탑부재
부흥사 법당 인근에 있던 탑의 지붕돌 1매를 2019년 정비하였다.
아래쪽 지붕돌받침은 4단이고 둥근 모양의 구멍이 있다.
지붕돌받침이 4단이고 빗물이 떨어지는 면이 급경사인 점
등으로 보아 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아래에 석탑이 보이고 오측석탑 안내판도 있길래
오층석탑인가 했더니 원래의 오층석탑을 본 떠 새로 세운 탑인 것 같다...
포석곡 오층석탑은 능선으로 올라서면 다시 나온다....
경주남산 포석계 포석곡 제6사지
통일신라후기부터 고려전기까지 운영된 사찰로 추정된다.
사지의 중심부는 현 부흥사가 있다.
법당, 요사채 2동, 삼성각과 아래쪽 연못 앞에는 근래에 조성한 불상이 있다.
위쪽에는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 남.북으로 작은 평탄지와 석축의 흔적이 있다.
석탑은 남산의 유일한 오층석탑으로 백제 계통의 양식을 보인다.
석탑 앞에는 복원 후 남은 탑재와 사리탑이 있다.
부흥사를 한바퀴 돌아보고 다시 등로로 복귀..
능선에 올라서니 금오봉과 반대방향으로 오층석탑 200m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오지만
실제론 50여m쯤 가니 넓은 암반위에 우뚝 솟은 석탑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올라서니 산악회에서온 산객 몇 분이 모여 시산제를 지내고 있다.
경주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
경주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은 작은 늠비봉 정상부에 위치하여
늠비봉 오층석탑이라고도 불린다.
절터를 발굴조사하고 2002년 석탑을 복원하였다.
이 탑은 경주 일대의 일반적인 석탑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다.
자연암반을 받침으로 삼아 암반의 요철에 따라 바닥돌을 세우거나 눕혀 쌓았다.
바닥돌 부재는 일반적인 가구식기단과 달리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이다.
암반에 홈을 파서 바닥돌이 밀려나가지 않도록 고정하였으며,
1층 몸돌은 4개의 장방형 돌로 구성하여 모서리기둥 없이 세장한 형태이다.
나머지 몸돌은 각각 한돌로 만들었는데, 2층부터 급격하게 높이가 낮아진다.
각 층 마다 몸돌보다 넓은 몸돌받침을 두었다.
지붕돌은 각 층마다 4매의 돌로 짜였고, 받침은 3단이다.
지붕돌 윗면에 두터운 내림마루를 새겼다.
통일신라 후기~고려시대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경주 남산에 있는 백제 계통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예이다.
오층석탑에서 본 경주시가지
오층석탑뒤로 금오봉이 보이고...
포석곡 제7사지(큰늠비절터) 주변 석조유물
포석곡 제7사지 큰늠비절터로 불리는 이 곳에는
오래전부터 폐허가 된 절터에 탑재들이 흩어져 있었다.
1층 탑신과 옥개석, 기단갑석 등 6점의 석조 유물들은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삼층석탑의 부재로 추정된다.
유물의 망실과 훼손을 방지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2013년 4월 현 위치에 받침대를 설치하고 정리하여 놓았다.
늠비봉 오층석탑에서 10여분 후 금오정에 도착한다...
금오정앞 넓은 암반위엔 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금오정을 내려서니 등로는 다시 넓직하게 변한다...
잠시 후 남산순환도로를 만나고 금오봉 방향으로..
상사바위
옛날 국사골 어귀에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외롭게 홀로 사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좋아했으며
그중에서도 "피리"라는 소녀를 무척 귀여워했다.
소녀도 외로운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과일이랑 맛있는 음식도 갖다 드리고 때로는 말벗이 되어 주었다.
어느 듯 "피리"도 꽃다운 처녀가 되어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할아버지는 홀로 남게 되었다.
소녀가 떠난 후, 할아버지는 "피리"소녀를 잊지 못했고
눈을 뜨면 산마루에, 눈을 감으면 눈 속에 "피리"가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남자로써 피리소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피리소녀를 생각하며 자신을 원망하다가
사랑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나무에 목을 매고 돌아 가시고 말았다.
죽은 할아버지는 큰바위가 되어 정상으로 우뚝 솟아올랐다
그 날 이후로 "피리"소녀는 밤다마 큰 뱀이 되어
자기에게 다가오는 할아버지 꿈을 꾸었다.
어느 날 밤 꿈속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죽음을 택했는데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피리"아가씨를 이렇게 괴롭히니 나를 용서 하려무나,
살았을 땐 죽을 길이라도 있었는데 이제 죽었으니 더 죽을 길도 없구나.
제발 나를 용서해 다오" "피리"소녀는 자기를 그리워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어 할아버지 바위에 올라가
"할아버지, 인간세상에서 나이 때문에 소원을 못 이루었으니
천년세월 지나도 나이를 아니 먹는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고 말았다.
그러자 할아버지 바위 옆에 또 하나의 바위가 솟아올라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부른다.
지금도 큰 바위 아래에 붉은 반점이 "피리"의 핏자국이라 전하는 전설이 깃든 바위다
상사바위 전망대에서 잠시 주변을 조망한다..
토함산과 우측으로 삼태지맥능선의 풍차가 힘차게 돌아가고...
우측에 마석산이 보인다..
동대봉산과 토함산
상사바위의 전모를 잘 볼 수가 없어 뒤로 돌아가 본 상사바위...
하지만 안내판의 상사바위 모습은 보이지가 않는다...
상사바위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금오봉 0.5km 지점에서
금오봉으로 가지않고 팔각정터 방향으로 올라선다...
사자봉...
바위면에 사자봉글씨가 새겨져 있지만 마모가 심해 알아보기 힘들다.
팔각정터
우측에 고위봉이 보이고..
지난 번엔 여기에서 금오봉으로 되돌아 갔지만 오늘은 계속 지암골로 내려선다..
잠시 내려서면 지나왔던 능선으로 금오정과 상사바위가 보인다..
남산부석
남산부석은 큰바위위에 부처님 머리처럼 생긴 바위가 얹혀 있어
마치 커다란 좌불처럼 보이는 바위이다.
바위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여 부석(浮石)이라고 부르고 있우며,
버선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과 같다하여 버선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바위는 경주 팔괴(八怪)의 하나로 생김새가 괴상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앙하고 있다.
부석과 상사바위를 사진으로 담기위해 암반위에 힘들게 올라섰더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바위 옆쪽으로 돌아가면 쉽게 사진을 담을 수 있는데..
이곳에서 보니 부석이 정말로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다...
이곳에서 보니 안내판에 있는 상사바위의 그림이 나온다..
지암골로 내려서고...
바위벽면에 부처님상이...
선이 제법 뚜렷하게 살아있다...
아래 바위에 부처님상이 새겨져있다..
경주 남산 지암곡 제3사지 삼층석탑
유형문화재 제449호인 이 탑은 무너져서 절터 주변 능선과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0년 발굴 조사하여 2003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복원된 탑은 자연 암반을 다듬어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올린 모습으로,
이러한 독특한 구조는 경주 남산에서만 볼 수 있다.
복원한 높이가 3.8m로 바위 위에 세운 석탑으로는 규모가 큰 편이다.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은 점과 지붕돌 아래 받침이 4단인 점 등
탑의 구성과 제작 방식이 서남산에 위치한 비파곡 제2사지 3층석탑과 거의 같다.
만든 시기도 서로 비슷한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3사지 삼층석탑에서 450m쯤 내려서면 지암곡 2사지 삼층석탑 갈림길이 나오고
330m라는데 다녀올까 말까 잠깐 망설이다가
이왕 여기저기 둘러볼 생각으로 나선 산행길이라 석탑길로 들어선다..
경주 남산 오산계 지암곡 제1사지
통일신라말에서 조선후기까지 대규모 사찰이 운영되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서쪽 계류를 경계로 동,서로 나뉘는데,
동편은 작은지바위를 이용하여 형성된 3단의 평탄지이다.
상단 평탄지에는 남산에서 유일한 정방형 건물지가 있다.
서편은 3단의 축대가 있고, 자형 건물지가 확인된다.
경주 남산 지암곡 제2사지 삼층석탑
문화재자료 제600호인 이 탑은 동남산의 지바위골 절터에 있는 석탑으로
2002년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 부재들을 모아 복원한 것이다.
지바위골 절터는 후대에 생긴 계곡으로 인해 동쪽에는 건물터,
서쪽에는 탑의 터로 나누어져 있다.
복원 전에는 탑의 제일 바닥에 있던 돌만 제자리에 있었고,
나머지는 동쪽과 북쪽의 경사면 아래에 흩어져 있었다.
1층으로 된 바닥돌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얹었다.
각 층의 몸돌은 모두 없어져 새로 만들어 넣었다.
바닥돌에는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을 새겼고 몸돌에는 모서리기둥만 새겼다.
경주 남산 오산계 지암곡 제2사지 석재
지암곡 제2사지 삼층석탑 부근에 있으며
분실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2020년 정비하였다.
사각형 석재의 크기는 66cm*68cm, 높이 33cm이다.
석재 윗면에 난 사각형 홈은 23cm*25cm, 깊이 15cm이다.
사리탑의 하대석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다시 돌아온 삼층석탑 갈림길에서 5분쯤 후 순환도로를 만나고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동남산 탐방지원센터 앞에서 국사골로 들어선다...
동남산 탐방지원센터를 잠깐 들러보고
국사고로 들어서니 초반 넓직하던 등로는 이내 소로로 변하고..
경주 남산 국사곡 탑부재
국사곡 계곡 인근에 있던 석재의 분실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2020년 정비하였다.
2020년 10월경 국사골 탐방로 순찰중 추가로 발견하였다.
탑의 기단갑석으로 보이며, 윗면에는 2단의 몸돌받침이 있다.
크기는 93cm*51cm이다.
갈림길에서 국사골 제4지삼층석탑 방향으로...
옛부터 있던 석축인지 최근에 쌓은 석축인지 모르겠지만 곳곳이 무너져 있다.
갈림길에서 10여분 쯤후 삼층석탑에 도착하고
경주 남산 국사곡 제4지 삼층석탑
유형문화재 제447호인 이 탑은 금오산 고깔바위 아래에 있다.
절터는 해발 약 230m 지점의 능선에 있는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절터를 발굴 조사한 후
2001년 말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탑을 복원하였다.
삼층석탑이 절터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탑 주변으로 탑구가 마련되어 있다.
바닥돌은 모서리 기둥과 면마다 1개씩 안기둥이 있는데,
안기둥은 다른 돌을 다듬어 끼워 넣은 방식이 독특하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고,
몸돌은 모두 모서리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각 층마다 아래 받침이 4단이고 처마의 경사는 완만한데
모서리만 치켜 올라간 형태이다.
머리 장식부의 받침돌인 노반은 새로 복원해 올렸다.
남산 국사곡 제4지 삼층석탑은 바닥돌과 1층 몸돌 받침 등
복원한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경주 남산에서 자주 보이는 단층 기단 석탑의 한 예로서 귀중한 가치가 있다.
삼층석탑 주변 절터에 흩어져 있던 5점의 석조 유물들은
통일신라시대에 각각 다른 양식으로 조성된
2기의 불상대좌와 건물 초석으로 추정된다.
유물의 망실과 훼손을 방지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2013년 4월 현 위치에 받침대를 설치하고 정리하여 놓았다.
삼층석탑에서 3분쯤 올라서면 통일전 방향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만나고..
등로는 차츰차츰 가파르고 거칠어진다..
고위봉과 좌측 뒤로 마석산도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숲 사이로 통일전의 연못이 내려다 보이고..
뒤로는 함월산과 토함산으로 보인다..
고깔바위
등로는 다시 순탄하게...
오전에 지나갔던 등로에 다시 돌아오고...
상사바위도 다시 지난다...
오전엔 좌측 팔각정터로 갔으나 이젠 금오봉으로 간다...
우측으로도 금오봉으로 갈 수 있으나
순환도로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간 후 금오봉으로 오른다..
우측 금오봉으로...
빙빙 돌아서 포석정주차장에서 4시간 10여분 후 드디어 금오봉에 올랐지만
얼마전에도 왔던 곳이라 잠깐 인증샷만하고 곧바로 바둑바위 방향으로...
단석산 방향의 경주시가지도 조망하고...
선도산과 뒷쪽의 구미산
상사바위
경주 남산 포석계 포석곡 제9사지
통일신라부터 조선후기까지 사찰이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상사바위부터 약 30m아래에 2단의 평탄지와 우물지까지 사지로 추정한다.
상사바위에는 방형의 감실이 있고, 안에 돌출된 단이 있다.
상사바위 앞의 석조여래입상은 불두가 결실되었고 시무외인.여원인을 하고 있다.
삼국시대 양식을 계승한 통일신라의 불상으로 추정한다.
상사암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내려다 보이고..
통일신라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이다.
높이는 6m에 달아며 남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머리와 어깨를 입체적으로 조각한 반면, 몸체는 아주 얕게 새겼다.
결가 부좌로 앉아 설법인을 하고 있다.
암반을 광배로 삼고 대좌는 2겹의 연꽃으로 표현되어 있고
꽃잎마다 보상화를 새겼다.
앞에서부터 망산, 벽도산, 단석산...
금송정터
금송정(琴松亭)은 이 곳 금오산에 있던 정자였는데
경덕왕때 음악가 옥보고가 가야금을 타며 즐기던 곳이다.
금송정이 있었다는 이곳 냉골 바위산은 그 모습이 괴상하고 거대한 바위 더미로
밑에서 쳐다보면 정상은 구름이 걸린 듯 드높아 보인다.
옆의 금오봉 방향에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는 상사암이라 한다.
옥보고는 이곳 금송정에서 바위들과 솔잎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흰구름을 벗 삼아 가야금을 뜯으며 세상 시름을 잊었다고 한다.
지난번엔 안내판의 사진장소를 찾지 못했는데 이번엔 찾았다.
바둑바위
여전히 바둑판은 찾지 못했다...
바둑바위에서...
바둑바위를 지나니 황금대능선으로는 등로가 폐쇄되었다..
이래서 아래에서도 들머리를 찾을 수가 없었던 모양..
단석산 방향을 조금 더 당겨보고...
들녁을 가로지르며 형산강이 길게 흐른다...
할 수 없이 상선암 방향으로 하산해야겠구나 생각하고 내려서니
상선암갈림길 이정표에 삼불사 방향이 보인다..
상선암 방향은 두 어번 갔으니 이번에는 당근 삼불사 방향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삼불사 방면은 초행길인데 암릉구간도 제법 있고 등로가 제법 맘에 들었다...
경주 남산 선방곡 제4지 석조여래입상
불상은 높이 240cm, 너비 110cm의 바위 한 면에 선으로 조각되어 있다.
광배를 갖춘 불상은 높이 208cm, 너비 80cm정도이다.
현재 마모가 심해 세부표현을 알기는 어렵지만
연꽃받침 위에 서있는 불상으로 확인된다.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2019년 주변을 정비하였다.
소나무와 바위는 언제 보아도 멋진 앙상블을 이룬다...
이건 또 뭔지????
벽도산...
선도산...
경주 남산 선방곡 제1사지 석조여래입상
삼불사와 약 120m 떨어진 곳으로 계곡 인근에 넘어진 채 있었다.
훼손을 막고자 2019년 정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머리와 광배 일부가 남아 있었다.
현재 머리 부위는 없어지고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여 조각이 희미하다.
남아있는 높이는 120cm이고, 발 아래에는 길이 12cm의 네모난 촉이 있다.
불상을 대좌에 꽂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선방곡 제1사지 석조여래입상으로 가는 길...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은 이곳 주변에 부서진 채 흩어져 있던 조각들을 모아
1923년에 다시 세운 불상과 보살상이다.
인근에서 선방사(禪房寺)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되어 '선방사삼존불'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지명을 따서 배동 삼존불이라 한다.
이 삼존입상은 미소를 머금은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 모습이 특징적이다.
중앙에 자리한 불상은 이중으로 된 상투모양 머리에 네모나고 통통한 얼굴을 하고 이다
원통형의 몸은 목이 거의 없고 두 손은 큼직한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왼쪽의 보살상은 작은 부처가 새겨진 보관을 쓰고
왼손에 정병을 든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왼쪽의 보살상과 달리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을 발목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이 점 때문에 두 보살상의 제작 시기를 다르게 보기도 한다.
이 삼존입상은 어린아이의 얼굴과 몸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7세기 신라 불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경주 남산 선방곡 제1사지 석재유구
1926년 주변에서 "乾符六年禪房寺塔鍊治內記"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되어서
이곳을 선방사로 추정하고 있다.
부근에 흩어진 부재들을 2019년 정비하였다.
파손된 불상대좌, 건물의 주춧돌 탑의 지붕돌까지 다양한 유구가 있다.
*건부:중국 당나라 희종의 연호로
건부6년은 신라 헌강왕 5년 (879년)에 해당한다.
삼불사...
삼불사를 둘러보고 나오니 건너편으로 망월사가 보이는데
절의 규모는 망월사가 훨씬 더 큰것 같다...
태진지를 지나고...
소나무숲속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지마왕릉...
경주 지마왕릉
사적 제221호인 이 능은 신라 제6대 지마왕이 묻힌 곳으로 알려져 있다.
파사왕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
지마왕의 재위 기간에 신라는 백제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가야와는 낙동강 하류를 둘러싸고 패권을 다투었다.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으나 교섭하여 강화를 맺었고,
북쪽에서 말갈이 쳐들어오자 백제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다.
무덤은 포석정에서 남쪽으로 200m쯤 떨어진 남산의 서쪽 자락에 있다.
왕릉 중에는 작은 편에 속한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외형과 입지로 보아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5시간 30분만에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오고..
오전에 갔던길을 순환도로를 따라 올라가고...
공원지킴터를 지나 마애불좌상을 보기위해 다시 올라간다..
주차장에서 0.9km지점에서 좌측 산길로 들어선다..
경주 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5호인 이 불상은
바위가 "ㄱ"자형으로 생긴 동쪽면에 약사여래를,
북쪽면에 두 분을 조각하였는데 한 분은 약사여래이다.
모두 약한 돋을 새김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바위면 양 안쪽 두 분은 안쪽을 파고 밖을 선으로 돌리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중앙의 불상은 연꽃 대좌에 앉았는데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있다.
얼굴은 큼직하고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를 크게, 귀는 길게 조각되었다.
몸은 목을 약간 움츠리고 어깨를 들어올렸으며,
가슴은 양감이 없는 편이어서 빈약해 보인다.
오른쪽 불상은 높이 108cm로 본존불보다 조금 작은데,
얼굴이 길고 턱이 각졌으나 양감이 있고 미소를 띠어 부드러운 인상이다.
신체는 몸을 움츠리고 양 어깨가 치켜 올라갔는데,
상체에 비해 하체가 너무 높아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
오른손은 무릎에 얹어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왼손은 배에 대고 약합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로 추정된다.
왼쪽 불상은 세 불상 가운데 조각솜씨가 가장 떨어지며,
신체도 양감이 없고 편평하다.
대좌는 연화대좌를 표현한 듯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알려져 있던 이 불상들은
근래에 북쪽면 왼쪽불상의 왼쪽 어깨 위쪽에서 태화 9년 을묘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신라 흥덕왕 10년에 조각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곳 불상은 같은 곳에 약사여래를 두 분 조각하였다는 것이 특이하다.
산행을 마치고 주차장 뒷쪽에 있는 포석정에 들린다.
별 볼것도 없는 데 입장료가 2천원이다...
포석정은 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통일 신라 때에 연회를 하던 정자이다.
왕과 신하들이 전복 모양으로 생긴 돌 홈의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정자는 없고 물길만 남아 있는데,
물길은 22m이고 높낮이의 차는 5.9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