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학을 언급할 때, 하나의 전제처럼 설정된 인식의 틀이 있다. 정치적 ‘패배자’, 경제적 ‘빈곤층’이 그것이다. 물론 그들은 정계에서 강퇴(强退)된 것이 맞고, 살림살이 또한 팍팍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실학을 ‘권력적 결핍’과 ‘절대가난’이라는 혹독한 현실 속에서 응결된 지적(知的) 포효로 착상하는 것도 다소 억지스러워 보인다.
가난은 성호학을 설명하는 상투적 규범이 된 지 오래지만 오늘은 그들의 살림살이를 생활사의 지층으로 남은 옛 문서를 통해 스케치하는 기회를 가져볼까 한다. 그 주인공은 덕산현(德山縣) 고산면(高山面) 장천리(長川里; 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 살았던 성호의 종손자 이삼환(李森煥, 1729-1814)이다. 남의 삶을 조금 들여다본다 해서 역사적 인물의 뒤를 캐는 학문적 색은으로 치부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이삼환 초상 : 성호박물관] 여주이씨가 덕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성호의 숙부 이명진(李明鎭, 1641-1696) 때였다. 양근군수를 지낸 그는 용인이씨를 재취로 맞았는데, 그 처향이 덕산이었다. 효자로 이름이 높았던 처부 이갑준(李甲俊)은 퇴계문하의 선진으로 명종 때 부제학을 지낸 정존재(靜存齋) 이담(李淡, 1510-1557)의 증손이었다. 양가의 혼맥은 덕산 땅에 성호 일문이 정착하여 학향을 지펴올리는 배경이 되었는데, 성호학의 도도한 물줄기를 이은 이용휴(李用休;惠寰), 이병휴(李秉休;貞山), 이가환(李家煥;錦帶)의 터전이 바로 여기였다. 이삼환은 용휴‧병휴의 백씨 광휴(廣休)의 아들로 경학에 정통하여 성호의 깊은 사랑을 입었고, 35세에 권씨 부인과 사별한 이후 86세로 고종할 때까지 독신을 고집했던 순정남이었다.
[이삼환 준호구 : 1801년 덕산현]
성호박물관에는 1801년 덕산현에서 발급한 준호구(準戶口:호적등본) 한 점이 소장되어 있다. 호주는 73세의 유학 이삼환이다. 규식에 따른 관문서이니만큼 그 형식에 있어 여느 집안의 호적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묘하게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보유한 노비의 인적 사항을 적은 천구질(賤口秩)이다. 이에 따르면, 이삼환은 집안에서 직접 부리던 앙역(仰役) 노비를 비롯하여 고덕‧면천‧안산‧과천현 등 기호 일원에 외거했던 노비까지 총 55구를 소유하고 있었다. 도망한 노비 7구를 제하더라도 당시 그가 소유했던 노비는 48구였다. 물론 인근 예산의 대부호였던 수당 이남규(李南珪)의 선대가 보유했던 백 수십 구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50구에 육박하는 노비 보유가에게 ‘절대가난’이란 표현을 쓰고 사회경제적 약자로 규정하는 것은 실상으로부터의 민감한 이탈이다. 이가환의 생장처를 인각(印刻)한 것으로 알려진 덕산 탁천장(濯泉庄)의 모습에서도 궁상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덕산 탁천장(濯泉庄)]
그렇다고 이삼환의 살림살이가 유여했다고 하는 것도 섣부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적잖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었다. 당시 이삼환은 자신보다 13세 연하의 계모 거창신씨(60세), 아들 재상(載常), 며느리 고령신씨, 아우 명환(鳴煥), 사위 유명환(兪命煥;49세) 등 5명을 부양하고 있었다. 명환은 서제(庶弟)라는 점에서 적서를 뛰어넘는 형제애가 엿보이고, 유명환의 솔가는 상처한 외동사위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읽힌다.
짐작컨대, 이삼환은 성호 일문에서는 여유로운 편에 속했던 것 같고, 그의 자산은 친인척에 대한 포괄적 부양의 밑천으로 쓰였던 것 같다. 그런 정황은사후 2년 뒤인 1816년에 작성된 준호구에서 포착할 수 있다. 당시 호주였던 이재상은 조모 거창신씨(75세)를 비롯하여 종제 재갱(載賡;14세), 큰아들 시굉(是鑛) 부부, 작은아들 시홍(是鉷) 부부, 세째아들 시흠(是欽), 네째아들 시황(是鎤) 부부, 종질 시알(是钀)․시경(是慶) 등 모두 12인이었다. 재갱은 이삼환이 부양한 바 있던 서제 명환의 아들이었으니, 대를 이은 동거였던 것이다. 단약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의 독점적 향유가 아닌 주변을 돌아보는 ‘모둠살이’의 밑천으로 투자되었던 이삼환의 자산이었고 보면 그의 재력의 용(用)은 정(情)과 활인(活人)의 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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