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주 교수, 인공지능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기독교와의 관계 강의
인공지능 시대, 그리고 기독교
중앙대학교 김형주 교수(독일지겐대 철학박사) 강의
2023년 8월 21일 월요일 저녁 7:30에 기독인문학 연구원은 8월의 특별강좌로 중앙대 김형주 교수를 모시고 인공지능시대, 그리고 기독교란 주제로 온·오프로 모였다.
강의하는 김형주 교수
김 교수는 인공지능 인문학 연구를 6~7년, 학교에서 수업하여 가르쳤다. 군 장병 AI대학원교육 등. 기독교 관련 기관에서 강의는 처음이다. 그의 전공은 칸트이다. 그가 기독교인이지만 교회 관련 기관에서 강의를 처음이라고 했다. 김 교수의 강의를 요약하며 소회를 밝힌다.
인공지능은 생소한 분야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인이 어떤 고민을 공유하며 해석할 수 있을까?
터툴리안이란 교부는 이런 말을 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인가? 인공지능인문학이 무엇인가? 둥근 사각형이 아닌가? 기독교와 철학, 종교와 이성, 두 가지를 섞어서 하는 시도에 대한 반발이 터툴리안의 언급이다. 인공지능을 인문학적으로 사고한다. 생소하다.
인공지능을 만든 인간은 근대 이후 독점적 위치를 점유해 왔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인간 외에 지능적 존재로 다가왔다. 인간보다 뛰어넘는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알파고가 그 예이다. 각 영역에서 또 다른 세계관, 존재 질서의 충돌이 생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과 기독교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결론을 도출할까? 반창조적 질서, 타인간 중심적, 문명의 파도에서 앞에서 어떤 기독교적 설명이 가능할까?
결론은 생명 혹은 창조 죽음 영생 부활 원리로서는 사랑 공감 등의 키워드와 공의 정의 평등을 언급해 볼 수 있다. 성경 구절도 언급하였다. 동시에 인공지능의 원리들도 가지고 왔다. 인공지능시대에 기독교세계관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을 열어본다.
김형주 교수 강의안 갈무리
먼저 인공지능이 무엇인가?
두 가지로 규정한다. 공학적 입장과 철학적 입장이다. 인공지능의 개념사적 입장에서 설명한다.
독일 바이에른주 어떤 교회에서 인공지능 목사가 예배를 인도했다. 찬송인도, 고백 인도와 설교까지 40분간 진행, 이제 인공지능은 종교까지 왔다. 더 큰 광풍은 법조계이다. 변호사에게 사건 의뢰하는 비용이 비싼 것은 대부분이 문서 작업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판례 찾는 등의 데이터 정리작업은 너무 큰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AI가 잘한다. 지치지 않고, 키워드도 잘 찾고. 이제는 한국어도 잘한다. 법 AI은 미국에서 두 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물론 최종적인 판단만 사람이 하는데, 심지어는 인공지능도 한다. 인공지능이 면접도 한다. 병원에서 문진표 작성을 40분 동안 하기도 한다. 그것이 다 데이터이다. 인간의 취직 당락을 인공지능이 결정하는가? 관계의 역전이 일어났다. 최근 AI 면접 통과하기 위한 책이 잘 팔린다. 면접자들의 데이터로 된 자료이다. 기존의 데이터와 자신의 데이터와 일치되어야 합격한다. 최근 수능도 어떻게 하면 틀리게 하는가 관심이다. 그러면 그것을 피하는 노력을 수험생이 하듯이, 면접 보는 자들이 자신을 인공지능의 데이터에 일치시킨다.
심지어 종교에서도 인공지능 목사가 일어나세요. 주기도문 합시다. 신앙고백 합시다. 하면 다 일어나서 한다.
종교의 관념이 바뀌는가? 쾰른 대성당에서 진실한 성도들이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변 관광객에게는 관광 거리이다. 종교 제의와 인간적 볼거리가 공존한다. AI 목사가 아예 대놓고 인도한다. 코로나 이후 건물, 모임, 교제로서의 교회 기능이 반성을 했다. 메타버스 세상에서 아바타의 설교. 설교문도 인공지능이, 아바타도 이미지 생성프로그램이 만든다. 요3:16절 설교문도 만들어 준다.
지식을 인간만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챗지피티도 가지고 있다. 앞으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각광을 받을 것 같다. 입력을 잘하여서 좋은 결과를 얻도록 하는 역할이다. 인공지능은 코딩을 잘한다.
AI할루지네이션(환각) 현상이 있다. 소위 세종대왕 맥북 투척사건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말을 듣지 않는 신하들에게 화가 나서 맥북을 집어 던졌다는 AI가 만든 이야기이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내가 가지고 싶은 지식을 인공지능에게 잘 물어서 알려주는 역할이 중요해진다. 인공지능을 활용할 것인가? 학교 수업할 때 교수에게 수업자료에서 질문을 받는다. 확장해서 설교문을 인공에게 의존하는 것이 정당할까? 설교를 텍스트를 적어준다. 성령의 역사는 무엇인가?
1956년 다트머스 콘퍼런스에서 존매카스, 마비 민스키 등이 인공지능을 처음 이야기했다.
굿윌헌팅이란 영화는 인공지능을 만든 주인공을 그렸다. 인공신경망. 학습주의 등 인공지능의 개념을 제공한다.
당시 미국의 학문적 분위기가 독일의 형이상학적 관점이 삶과 유리되었다는 반성적 분위기이다. 논리적, 과학적 분위가가 득세를 한다. 실험 중심의 뇌과학 중심의 심리학. 철학과 심리학이 합쳐서 인공지능의 모토가 되었다. 이것이 인공지능의 배경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합의된 정의가 없다. 인공지능이 무엇이라 정의하는 것이 자꾸 바뀐다. 기술적인 정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기술 발전에 따라 인공지능의 개념이 상응하여 나오기 때문이다. 과거 인공지능 세탁기가 나왔다. 단지 타이머가 있다는 이유이다.
공학에서는 합의적 정의가 있다. 지능이 필요한 업무를 기계에 시키고자 하는 노력. 기술이다. 이것은 자연어처리, 컴퓨터시각, 패턴인식, 로봇공학...등등이다.
김형주 교수 강의안 갈무리
철학적 정의
지능은 철학 용어이다. 말을 가지고 분석한다. 의미가 무엇인가? 공학은 대상에 따라 맞추는 작업이었다. 철학은 대상을 삭제하고 의미를 분석하여 탐구한다.
인공은 무엇인가? unnatural, man-made,= imitation 모방이다.
지능을 인간만의 고유한 속성으로 이해해왔다. 생존, 자극반응, 계산, 정신의 활동, 언어의 구사. 지능적 존재는 인간만이다.
두 정의를 붙이면 모방지능이다. 사람의 지능을 모방한 것이다. 이로 인해 자연지능이 생겼다. 인공지능의 반대 용어가 생겼다. 지능은 계산적 능력이다. 그리스 철학에서 누스이다. 이 누스에 참여한다고 한다. 분유 받아 참여한다. 공학적 개념에서 철학 신학, 미학 등은 학문이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모방을 할까?
사람의 뇌 기능을 모방한다. 뇌의 형상을 모방한다.
지능은 계산 능력, 논리적 사고력이다. 이것을 모방한다. 철학은 계산과 논리적 추론에 의해 뇌의 기능을 모방한다.
뇌 형상 모방은 뇌의 모습이다. 신경망의 모양을 따라한다. 인공지능이. 자극과 반응, 감화 등이다. 한쪽 경험이 쌓이면 신경망이 두꺼워진다. 시냅시스가 두꺼워진다. 교육학 행동주의 파브로프 실험. 숙제 잘하면 상 준다. 이것들이 뇌 형상 모방이다.
기능을 모방하는 것이 규칙기반 인공지능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리 실증주의이다. 수리철학과 논리학이다. 자연과학이다. 연역논리 추론과 판단에서 인공지능이 힘을 얻는다.
학습기반 인공지능; 많은 데이터가 쌓일수록 좋은 결과. 귀납논리. 통계, 개연성, 실용주의. 논리적 진리성과 관계없다. 철학적 배경은 실용주의이다. 명확한 답이 아니고 유용한 답을 산출한다.
규칙기반과 학습기반 인공지능은 서로 싸워왔다. 규칙기반은 문법적 번역과 연역적 작업을 한다. 학습기반은 통계이고 귀납의 원리이다. 양으로 승부를 본다. 규칙기반은 인공지능의 메인 기술이 아니다. 딥러닝은 학습기반 인지이다. 통계와 귀납의 원리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윤리적인가?
학습인공지능의 예가 넷플렉스 같은 것이다. 계속 추천이 된다. 나와 유사한 데이터가 많이 있다. 의료데이터는 공개가 안된다. 비식별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두개의 자료만 합치면 특정화된다. 요기어때 앱이 엄마밥과 같이 인공지능이 추천해준다. 나보다 나를 더 잘안다. 나의 입맛에 맞게 추천한다. 장점이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 기회를 박탈한다. 후회할 수 있는 권리. 자유 의지를 뺏어간다.
학습기반 인공지능은 결과 도출 과정이 설명이 안 된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설명이 안 된다. 결과만 잘 나오면 된다. 퍼포먼스는 나왔는데, 논리가 있지만 잘 알 수가 없다. 규칙기반과 다르다.
설교문으로 돌아가자
나는 집에 00. 00에 들어갈 단어들이 맛있다, 졸립다, 먹는다, 간다 등이 있다. 가장 부드러운 경향이 간다이다. 그러면 인공지능은 나는 집에 다음에 간다를 선택한다. 이것을 양방향으로 읽거나 큐브로 쌓는다. LLM(large linguistic model)이다. 데이터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다. 확률적으로 빈도가 높은 말을 던진다. 너무 자연스럽다.
말을 잘 이어 말하는 것이 챗GPT이다. 다음 단어에 적합한 것을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인간은 자기 투사적 속성이 있다. 인공지능이 말을 잘해 주기에 대상을 인격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인공지능과 대화하다가 자살도 한다. 이것은 할루지네이션(환각) 현상이다. 인간이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인공지능이 기계임을 밝히도록 한다. 인간이 환각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기독교와 관련해서 본질적인 문제를 공유한다.
첫째 생명과 죽음이다.
인간이 인공지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intellectus archetypus 신의 지능
intellectus ectypus 모방된 인간의 지능.
창1:6, 2:7 하나님의 형상,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된다. 흙은 질료, 생기는 숨이다. 숨이 들어왔을 때 흙이 정신적 존재가 된다. 독점적 지위를 신의 지능을 모방하는 지능에게 주었다. 찬양할 수 있는 인간 지능이다. 무한한 이성적 존재, 유한한 이성적 존재이다(칸트 등).
지능이라는 생기는 숨(프쉬케, 니쉬마트 하임, 네페쉬)이다. 영혼론은 인식과 의식을 다룬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다스리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형상 질료의 이분법적 해석이 과연 성경적 해석인가? 철학자들의 지능이 하나님이 준 인식적 능력인가? 지금은 인간이 원본이다. 인공지능이 모방이다. 이것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인간과 기계의 구별은 낡은 사고이다. 포스트 휴머니즘의 문제이다. 인공지능 세계관이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공존이란 말로 덮여진 세계관이다.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한다. 기독교는 부활을 말함으로서 죽음을 극복한다. 영혼은 죽지 않지만 단절적 사건이 있는데 죽음이 있고 부활이 있다.
모든 이분법은 철학이 성경을 해석해서 인간에게 독점적 위치를 주었기 때문이다. 흙과 생기이다. 형상과 질료.아리스토텔레스 방식.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 마저도 극복해야 할 허상이다. 포스트 휴머니즘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없다. 인간도 물질 덩어리이다. 단백질 덩어리가 뇌이다. 물질로 환원된다. 정신도 형이상학적 가설이다. 의족 의수는 일반화했고, 뇌에 칩을 꽃아 뇌의 신경으로 보고, 글도 쓴다. 기계와 인간의 이분법을 해체한다. 기계의 도움으로 인간이 자신을 확대해 왔다. 인공장기는 당연하다. 여기서 두가지 입장에서 진화한다. 자연스런 죽음은 없다. 인간과 인공지능과 차이가 없기에 낡으면 갈아 끼우면 된다. 내 정신자료를 데이터하여 내 육신은 썪어도 내 정신은 영존한다. 죽기 싫다. 포스트 휴머니즘은 종교이다. 죽기 싫다. 트렌스 휴머니즘이다.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하지만 차이는 있다. 부활은 없다. 내가 내 힘으로 영존한다. 인간은 인간지능이 되면서 안 죽을 수 있다. 숨겨진 이야기이다.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을 극복하겠다고 하면서 결국은 이분법에 의한 죽음을 피하고 있다. 마인드 업로딩도 이분법을 전재한다.
다음은 사랑의 문제이다.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공감의 문제를 생각한다(einfuehren).
컴퓨터도 감성에 반응하도록 한다. 아이보라는 인공지능 애완이 있다. 소니가 절판했을 때, 집단 장례식을 치뤘다. 자기 투사를 한다.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 인공지능 섹스로봇도 사랑을 한다. 챗지피트와 공감하다가 자살한다. 그러나 일방적 공감이다.
짝 사랑도 사랑이다. 내가 남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중국어방 논변이 있다. 인공지능도 생각할 수 있다. 중국인이 중국말로 질문을 했을 때, 인공지능을 이용해 아주 휼륭한 중국말의 답을 낸다. 그러면 질문하는 인간은 답을 낸 사람이 중국인이라고 생각한다. 휴링테스트라고 한다. 실제는 영국 사람이 인공지능을 통해 답변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을 존설이 했다. 환각이다.
어떻게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까? 인식적론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은 명령을 하고 있다. 은혜를 받으면 공감 능력이 생기면서 명령을 진심으로 받는다. 환각이 아닌 참된 사랑을 하게 되며 해야 한다.
마지막은 공의이다.
인과응보이다. 심판과 칭찬이다. 칸트의 최고선의 개념도 여기서 왔다. 집단 윤리는 평등이다. 갈3:28. 인공지능은 심각한 도전이다. 전에는 같이 놀았는데 지금은 핸드폰만 본다. 소통의 문제이다. 챗지피티도 유료, 무료 버전이 있다. 인공지능 혜택을 못 받는 사람이 많다. 접근성이 좋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자와 차별이 생긴다. 전지구로 보면 정보 격차가 벌어진다.
오픈 AI의 모토는 공유이다. 그런데 케냐 노동자를 쓴다. 시간당 2달러를 준다. 인공지능은 우아한 백조다. 밑에는 발이 부지런히 젖는다. 어머어머한 노동력이 들어간다. 비윤리적인 말을 배제하는 챗봇이 되려고 비윤리적인 것을 쥐어 짜내는 노력을 한다. 인공지능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존재론적인 양극화가 있다. 비관론자들의 전망이다. 플랫폼 노동자들이다. 스타벅스 노동자, 끊임없이 노동을 요구한다. 인공지능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점차 콜을 안준다. 존재론적 가치가 동일한 인간론은 인공지능 시대에 여전히 유의미하다.
인공지능을 대하는 태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인간성 보존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하겠다.
인공지능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에 기독교와의 관계를 살피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출처 : 코람데오 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