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여,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여
우리가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갈구하는 바에서
무한히 멀어지고 있음을 살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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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멀찍이 두고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오.
자기 자식이나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
숨 막힐 정도로 가깝게 결합해 있는 가족들이 이 세상에는 차고 넘치오.
같은 화장실을 쓰고, 같은 이불을 덮으면서도, 서로 으르렁대고 짜증내며 서로 지긋지긋해하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면, 이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 아니오?
그들은 서로 증오하면서도, 함께 집 깊숙이 파묻혀 묶인 채 서로를 피할 방도를 못 찾는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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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 결혼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결합인지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오.
당신 어머니의 정신나간 신념, 그리고 그것에 영향 받고 동조한 당신과 당신 아버지 때문에 초래된 비극적 결과였지.
필리포 남작 부부는, 당신이 나와 결혼 하면 당신과 연을 끊겠다고 협박했다고 했소.
뤼송에서 우리가 이 우스꽝스러운 남작을 비웃는 동안, 그는 퐁 도데주가 사람들을 당신으로부터 갈라놓기 위해 모든 수단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하지만, 난 당신을 버리지 않았어요. 남작이 완전히 헛수고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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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경사지를 따라 계속 내려갔소.
포도원 위로 호리 호리하게 솟아오른 과일나무들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오.
저 멀리 언덕 일부도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소.
안개 속에 어렴풋이 드러난 종탑과 교회의 모습은 살아 있는 육체 같았지.....
당신은 내가 종교적인 열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속단하지만…
맹세하건대 그날 아침, 철저히 깨진 피조물로서 나만큼 간절하게 종교적인 물음을 던진 자가 또 있었을까? 나는 믿지도 않는 누군가에게, 절대자에게 간절히 물었다오.
이 모든 비극과 패배 뒤에 있을지도 모르는 궁극적 이유와 의미를 말이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이 모든 사건은 무언가를 말하기 위한 메시지이며, 우리는 그 비밀을 해석해 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그렇소, 내 인생의 그 몇 시간 동안 난 그런 것들을 어렴풋이나마 믿었다오.
당신과 나를 가깝게 해주었을지도 모르는 그것들.
하지만, 그건 순간적인 감정일 뿐이었소. 난 방향을 틀어 집을 향해 올라오기 시작했소.
여덟 시도 안 되었지만,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기 시작했지.
창가에 당신이 서 있는 게 보였소.
고개를 약간 수그린 채, 양손 에 머리카락을 나눠 쥐고 빗질을 하는 중이었어.
당신은 날 보지 못했소. 난 한순간 잠자코 서 있었지.
몇 년이 더 흐르면 깊은 원한으로 변할 갑작스러운 증오를 당신을 향해 느끼면서.
난 서재까지 냅다 뛰어갔소.
그러고는 열쇠로 잠근 서랍을 열고 구겨진 손수건을 꺼냈다오.
유적지 산책로에서 당신이 울음을 터뜨렸을 때 눈물을 닦아주었던 그 손수건 말이오.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인 난 그것을 보물처럼 고이 접어 가슴팍에 넣었었지.
난 거기에 돌을 달아맸소. 마치 살아 있는 개를 수장시키려는 사람처럼.
그러고는 더러운 연못 속에 그것을 던져버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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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내가 화가 났던 건 모욕 때문이 아니라오.
당신네는 노쇠의 고통이 어떤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늙는다는 건, 현재의 삶에서도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장래의 죽음에서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고문을 받는 상태라오.
이 지상을 넘어선 곳에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소.
아무런 설명도 없고, 수수께끼에 아무 해답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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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액, 10만 프랑....." 하지만 난 꼼짝하지 않소.
옛날 같으면 이 한밤중에 포도원으로 달려 나가는 걸 누구도 막지 못했을 텐데.
내게는 타고난 농사꾼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실내화 바람으로 손에는 꺼진 초를 집어 들고 온통 우박을 맞으며 서 있었겠지.
마치 내 몸으로 우박 세례를 당하는 포도원을 덮기라도 할 듯 말이오.
하지만, 오늘 밤, 난 내 소유, 내 재산이라고 불리던 것에 대하여 이방인으로 서 있다오.
드디어 모든 속박에서 풀려난 거요.
어찌 된 영문인지, 누가 풀어준 건지 나도 몰라.
분명한 건, 여보, 밧줄이 끊어졌다는 거요.
이제 나는 표류하오.
어떤 힘이 나를 이끄는 걸까?
맹목적인 운명의 힘? 아니면 사랑? 그렇소, 난 사랑이라고 믿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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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도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싸워왔다.
그러나 이 오래된 투쟁의 끝에서, 돌연 노쇠라는 현상이 우리 둘을 공모자로 엮고 있다.
우린 서로 증오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지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우리가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이곳 너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어쩌면 이자에게는 그녀의 하느님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지.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나만큼이나 그악스럽게 그녀가 움커쥐고 있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 힘을 잃고 말았다.
그녀와 절대자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그 모든 탐욕이 말이다.
절대자에게서 아내를 떼어놓는 욕심들이 힘을 잃은 지금, 그녀는 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니,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
여전히 아내의 마음 엔 아이들의 야망과 요구 사항들이 남아 있으니까.
그녀는 지금도 그들의 욕망의 짐을 지고 있다.
돈과 건강에 대한 염려, 야심과 질투의 계략, 이 모든 것이, 마치 선생님이 칠판에 써놓은 학교 숙제와도 같이 그녀 앞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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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무 대꾸 없이 포도원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하나의 의심이 떠올랐다.
반세기나 되는 세월 동안 삶을 공유하면서도 상대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오직 그 사람의 한 단면만을 관찰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우리의 원한과 증오의 원인이 되는 상대의 말과 몸짓만을 골라 기억할 수도 있을까?
다른 사람들을 단순화 해버리는 우리의 치명적 경향성이여!
우리의 증오심은 자기 정당화를 위해 상대를 희화화하는 것이다.
눈을 더 크게 뜨고 그의 다른 점들도 함께 본다면, 우리의 증오심과 과장이 조금은 완화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우리의 사악한 경향성은, 그의 일면에만 빛을 비추고 나머지 부분은 죄다 제거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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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들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알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침묵과 냉기, 어둠 속에 잠긴 오래된 돌 냄새 밖에 없지 않은가?
문득 모자 만드는 젊은 아가씨의 얼굴이, 다시 내 관심을 끌었다.
감은 두 눈과 긴 속눈썹, 그늘이 진 눈꺼풀…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던 마리의 모습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완전한 선의 나라, 미지의 영원한 나라가 존재함을 다시 한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비록 그 나라가 아주 가까운 동시에 무한히 멀리 느껴지긴 하지만 말이다.
이자는 말했다.
"당신은 나쁜 면밖에 볼 줄을 몰라요…….... 어디서나 악한 것만을 본다고요.......”
그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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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난 내 마지막 카드를 내던졌다.
이 애 말고는 더는 기대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여기서 실패한다면 이제는 웅크리고 앉아 벽이나 바라보는 수밖에 없으니까.
40년 동안이나 난 남들을 증오하는 동시에 그들의 증오를 불러일으켜 왔다.
그러면서도 다른 바보들과 똑같이 어떤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
마지막 비축 식량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내 배고픔을 스스로 속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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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사업이란 것도 있다.
자고로 이런 사업은, 모든 재산을 한 번에 꿀꺽 삼킬 수도 있는 함정아니던가?
사회사업 사무실이나 수녀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에 기 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난 남들 생각을 할 수 없는 위인이다.
노쇠가 끔찍한 이유가 무엇 인지 아는가?
사람이 늙으면 한평생 그가 쌓아왔던 내적인 것들이 총화를 이루며 드러난다.
누구도 맘대로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난 60년이나 투자해서, 증오로 가득 찬 채 죽어가는 늙은이를 창조해 왔다.
바로 지금 내 모습, 내 존재가 전부이다.
그러니 어떻게 갑자기 다른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오, 하느님, 하느님 이시여...... 만약 당신이 존재하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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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이 문장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종잇조각을 더 발견하고 싶다는 열망 뿐이었다.
상체를 숙인 자세로 오래 버티고 있었더니 숨쉬기조차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거의 훼손되지 않은 듯 보이는 몰스킨 수첩 한 권이 나왔다.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리던지.
하지만 한 페이지씩 자세히 살펴보니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부분 천지였다.
표지 뒷면에 이자가 손수 쓴 듯한 문장들만 제외하곤 말이다.
'영적 묵상들로 엮은 꽃다발.'
제목 아래에는 다음 과 같은 글이 인용되어 있었다.
'나는 영벌과 심판을 내리는 자가 아니다. 내 이름은 예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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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만에 처음으로 포도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수확이 끝난 포도원은, 잠에 빠진 듯 고요했다. 풍경은 경쾌하고도 투명했다.
먼 옛날 마리가 빨대로 불어 만들었던 비눗방울처럼. 벌써 바람과 태양이, 땅 위에 새겨진 바큇자국들과 황소 발자국을 딱딱하게 굳혀놓았다.
난 가슴에 새로운 이자의 모습을 간직한 채 걸었다.
하느님만이 어찌할 수 있는, 강력한 열정의 포로가 된 그녀의 모습을!
꼼꼼한 살림꾼으로만 보였던 그녀도, 실은 질투로 눈이 먼 여자였던 것이다.
귀여운 뤽을 그렇게나 증오했었다니...어리고 약한 애도 미워할 수 있는 그런 여자였다…
자기가 낳은 자식들 때문이었을까? 내가 그들보다 뤽을 편애했기 때문에?
하지만 아내는 마리네트도 질투하지 않았던가?
그래, 확실해. 그녀가 질투로 괴로워한 건 나 때문이었어.
난 그녀를 고문할 만큼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야.
얼마나 미친 생각인가? 마리네트도, 뤽도, 이자마저 죽고 없는데.
그들이 파묻혀 있는 죽음의 심연, 바로 그 끝에 매달려 있는 늙은이가, 아내가 자신 때문에 질투하고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처럼 기뻐하다니.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실제로도 난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면서 포도나무 지지대에 몸을 기댄 채로 말이다.
내 앞에는 창백한 안개가 펼쳐져 있었고, 그 어렴풋한 그늘 속으로 마을과 교회, 미루나무와 길 들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이 어둠에 파묻혀 가는 풍경 속으로, 석양빛만이 힘겹게 한 줄기 길을 내고 있었다.
마침내 난 내 죄악을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었다.
자식들에 대한 증오심, 복수하고자 하는 열망, 돈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진짜 심각한 죄악은, 똬리를 튼 독사 떼 바깥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난 우글대는 독사 떼로부터 시선을 들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는 것을 거부해왔다.
마치 이 흉측한 뱀 구덩이가 진정한 내 모습이기라도 한 듯, 그 추악한 몰골에만 집중해 왔던 것이다.
내 살아 있는 심장의 파닥거림이, 저 우글거리는 파충류들과 뒤섞여 분간할 수도 없다는 듯…
반세기나 되는 긴 시간 동안, 나의 본질이 아닌 것만을 진짜 나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을 보면서 내가 온통 마음을 빼앗졌던 건,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가련한 탐욕의 표정뿐이었다. 로베르에게서 내가 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어리석음이 전부였고.
한 마디로 나는 외관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그들의 본질에가 닿으려면, 일견 흉해 보이는 그들의 외관을 부수고 뛰어넘는 길밖에 없음을 왜 지금까지 몰랐던 것일까.
서른이나 마흔 살 즈음에 이런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지금 나는 너무 느리게 뛰는 심장을 가진 늙은이일 뿐이다.
생애 마지막 가을이 연기와 광선으로 찾아와, 포도원을 잠재우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는 게 고작이다. 마땅히 사랑해 주었어야 했던 사람들도 모두 죽어 사라졌다.
내가 사랑을 주었더라면 그들도 틀림없이 나를 사랑했을 텐데.
아직도 남은 자들이 있지만, 그들의 본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긴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하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내 모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내 목소리, 내 거동, 내 웃음 속에는 괴물의 형상만이 어른거린다.
그 괴물에게 이름을 준 것도 바로 나니까.
진짜 내 모습 대신, 난 스스로 이 괴물의 얼굴을 세상을 향해 쳐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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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훌륭한 사람조차도 혼자서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약점과 악덕을 용서하고 그냥 넘기려면,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사 랑의 비밀을 발견해야 한다.
그 비밀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인간 조건을 바꾸려는 모든 시도는 필연적인 실패로 끝나리라.
난 내가 이기적이기 때문에 사회적, 경제적인 개선책들에 무관심하다고 믿어 왔다.
물론 내가 고독하고 무심한 괴물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 안에도, 그런 것들이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기에는 무력 하다는 확신의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세상의 핵심에 도달해야 한다.
전적인 승리를 보장해 줄 바로 그것, 사랑의 비밀을 나는 찾는 것이다.
핵심 중의 핵심, 모든 사랑을 포괄하는 불 타오르는 중심,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그것을 갈망하는 것, 이것이 곧 기도이지 않을까?
그날 밤 나는 거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팔꿈치를 의자 위에 가지런히 놓을 뻔했다.
저 옛날 여름밤, 이자가 자기 치마폭 가까이 세 아이를 가까이 오게 한 채 그랬듯이 말이다.
나는 그때 테라스에 선 채 불을 밝힌 창문 을 통해 기도드리는 무리를 바라보곤 했었지.
발소리를 죽이고 어둠 속에 서 있는 내가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이자가 기도문을 암송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었다.
"오, 하느님, 당신 앞에 무릎을 끓고 당신께 감사드리옵니다.
당신이 내게 당신을 알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으니……"
방 한가운데 나는 마치 얻어맞은 사람처럼 우뚝 서 있었다.
내 인생을 바라보며 반추하면서 말이다.
안 돼, 이런 더러운 진흙탕 물결 속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어.
나는 친구 하나 없을 만큼 그렇게 흉측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가리고 변장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지 않을까?
내가 한평생 그랬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가면을 벗은 얼굴로 돌아다닌다면 그때는 놀라게 되리라. 각각의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작은 차이밖에는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 테니까.
사실 누구도 벗은 얼굴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원숭이처럼 위대함이나 고상함의 시늉만 하는 것이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 문학작품 속에나 존재하는 인물의 유형에 자신을 끼워 맞추면서.
성인들은 이런 사실을 아는 자이다.
그들은 자기 모습을 볼 줄 알기 때문에 자신을 경멸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적나라하게 벗은 모습을 드러내지만 않았어도, 이런 심한 멸시의 대상은 되지 않았을 텐데.
불 꺼진 방 안을 배회하던 그날 밤, 내 머릿속을 소용돌이치던 상념들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어둠 속에는 모래톱에 좌초한 난파선의 잔해처럼, 마호가니로 만든 육중한 가구들이 흩어져 있었다.
한때 저기에서, 지금은 썩어 흔적도 없이 분해되었을 육체들이 기대거나 뒹굴었었는데. 아이들은 장화를 신은 채, 긴 의자에 발을 올려놓고 그림책을 들여다보곤 했었지.
의자를 싼 천 위에는 아직도 시커멓게 변한 부분이 남아 있을 것이다.
갑자기 바람이 집 근처를 휘몰아쳤다.
보리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어느 방 덧창이 열린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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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죽지는 않더라도 자닌의 남은 인생은 비참하리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고통은 줄어들지 않겠지.
이 늙은 변호사의 경험으로 보건대, 그녀는 충성심이 대단한 동물같은 여인이다.
이런 종류의 여자에게 희망은 절대로 치유되지 않는 병과 같다.
20년이 흘러도 그 이상의 세월이 흐른다 해도, 개의 충성스러움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시선은, 언제 열릴 지 모르는 문에 박힌 채 떨어지는 법이 없다.
나는 다시 자닌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언제든지 네가 원한다면 내 집으로 와도 좋다..
늘 환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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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희한하게도 내가 느끼는 평화는 흔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격리된 상태로 무서운 죽음의 일격을 기다리면서도, 내 영혼은 고요하고 각성된 상태로 있었다.
내 슬픈 인생에 대한 회상과 후회에 휩싸이는 법도 없었다.
이제는 흘러간 저 황무지 같은 세월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마치 나 자신이 더는 아파 죽어가는 늙은이가 아닌 듯....
내 앞에는 아직도 온전한 생이 남아 있기라도 한듯…
그리고 나를 감싸는 이 평화가 마치 나와 함께하는 어떤 사람이기라도 한 듯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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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나는 자닌의 어린 딸이 내 품 속에서 안식처를 찾을 수 있도록 무릎 위에 앉히고 두 팔로 껴안아 주었다.
그 애의 머리카락에서는 저 옛날의 마리를 상기시키는 새의 깃털 같은 냄새가 났다.
나는 증손녀의 머리 위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댄 채 눈을 감았다.
이 여린 육체를 너무 세게 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내 잃어버린 아이를 불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낮 동안 쉬지 않고 뛰어다녔는지 아이의 피부에서는 소금기가 느껴졌다.
마치 어린 시절의 뤽처럼…... 얼마나 격렬하게 놀았는지 뤽은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졸고는 했지…디저트 시간까지 견디지 못하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내가 꿈을 꾸고 있으면, 자닌은 자닌대로 잃어버린 사랑을 가슴에 품은 채 방 안을 배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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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마지막에는 꼬박꼬박 헌금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하리라.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평생 증오해 왔던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저 유치한 캐리커처와 범속한 희화!
그래서 난 그리스도인적인 삶을 증오할 권리를 얻고자, 이러한 캐리커처가 종교의 진짜 모습이라고 믿는 척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증오하는 것의 진정한 얼굴을 정면에서 다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속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전 세기 칼레즈에서, 아르두앵 신부가 내게 '당신은 참으로 관대하신 분이군요' 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이미 내가 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던가?
죽어가는 마리의 침상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었지.
그 애가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하던 말을 나는 듣기 싫어 귀를 막았었다.
그 애 머리맡에서 난 이미 삶과 죽음의 비밀을 넘겨받았던 것이다….
내 어린 딸이 나를 위해 죽어가고 있다는 비밀….
기를 쓰고 이 비밀의 열쇠를 잃어버리려 했지만, 인생의 전환기마다 어떤 신비로운 손이 내게 그 것을 되돌려주었지….
(매미가 울기 시작하는 무렵의 일요일 아침, 미사를 마친 뤽의 눈길 같은 것이 말이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불현듯 의자를 거칠게 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자닌이 놀라 몸을 떨었을 정도였다.
칼레즈의 짙은 고요가 그 애의 고통을 진정시켜 주는 듯했다.
손녀딸은 불이 죽어가도록내버려 두었다.
그러고는 방이 차갑게 식어갈수록 의자를 불 가까이 가져갔다.
점점 작게 사그라져 가는 불빛이 그녀의 이마와 손에 작은 그림자를 던져주는 가운데, 나는 마호가니와 주목의 육중한 가구들이 드리우는 그림자 속을 배회했다.
완전히 무력한 채, 몸을 숙이고 있는 이 퉁퉁한 손녀딸 주위를 맴돌면서.......
"얘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할 말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날 저녁,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과 마찬가지로 나를 숨 막히게 했던 것, 심장이 끊어질 것처럼 나를 아프게 했던 것, 그것은 드디어 내가 발견한 사랑이라는 그 고귀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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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제는 냉혹했던 할아버지의 편을 들어 우리 집안에 해를 끼칠 의도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 우리 가엾은 할머니의 신앙이, 할아버지의 눈을 열어주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도 잊지 않고 있고요.
할아버지가 그처럼 오랫동안 원한을 갚는 데 몰두하지만 않으셨어도 말이에요.
그럼에도 저는, 할아버지가 우리 모두 보다 옳으셨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네 보물 있는 그곳에 마음도 있느니라.’ 라는 성경 말씀을 상고해 볼 때......
사실우린 오로지 유산 상속이 위협받는 것만 생각했잖아요. 물론 변명하자면 변명할 게 많지요. 외삼촌은 사업가이시고, 전 하잘것없는 여자에 불과하지요.....하지만 이 변명이 충분한가요?
할머니만 제외하고, 우리 모두의 신앙은 삶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나요?
우리의 생각과 욕망, 행동은 전혀 신앙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어요…
.의례에 따라 끝없이 십자가에 우리 입술을 갖다 댈 뿐…..
우리가 모든 힘을 소진한 건 물질적 부를 위해서였어요.
반면 할아버지는....... 그 분의 마음은 결코 지상적 보물이 있는 곳에 머물지 않았잖아요?
이 점에 대해서라면 할아버지가 남긴 기록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줄 거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