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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다기(茶器)에 발목을 잡히다
여섯 식구 중 넷은 출근 혹은 등교하고 난 뒤다. 야산(野山) 같으면서도 실제는 제법 가파르고 높은 석성산(471미터)이 한눈에 들어온다. 몇 년 전만 해도 둘이 가끔은 거기 올라갔었는데, 이젠 어림도 없다. 둘의 머리카락이 하얗고, 기력이 그만큼 부친다.
김찬구는 스마트폰을 매만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남창질음(男唱叱音) ‘푸른 산중’을 터뜨린다. 푸른 산중 백발옹(白髮翁)이 고요 독좌(獨坐) 향남봉(向南峰)이로다/바람 불어 송생슬(松生瑟)하고 안개 걷어 학석홍(壑成虹)을…누구서 산을 적막(寂寞)타던고 나는 낙무궁(落無窮)인가 하노라(*‘송생슬-소나무끼리 부딪쳐 나는 소리/ 학성홍-골짜기의 무지개-골짜기 壑 ‧ 이룰 成‧ 무지개 虹)
차 한 잔을 나누기 위해 물을 끓이던 찬구의 아내 이정미(茶人名 초려)도 찬구의 손짓에 따라 창가로 나와 석성산 정상에 시선을 쏴 올렸다. 가끔 그랬듯이 오늘도 백발노인이 산허리 어디쯤 혼자 앉아, 이 남창질음 시조를 소리 높여 바람결에 싣는 것 같다. 착각이되 행복감을 주는 착각이고말고.
그들은 서울 근교에 온 지 10년이 채 못 되었는데, 이사를 세 번이나 했다. 이 집에서 7년 남짓 지난 셈이다. 내외는 낯선 땅에서의 외로움이나 설움을 이겨내느라 고생하다가 이제 심신이 안정이 되었으니 눌러 앉고 싶다. 석성산 정상이 손닿을 듯한 곳에 이웃해 있어 더더욱 그렇다.
한데 그게 또 여의치 못하다. 초려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억누르느라 고통을 느낀다. 잠시 제방에 들어갔다. 초려는 찡그린 표정을 짓고, 거울 속의 또 다른 60대 후반의 여인을 보고 자문자답도 해 본다.
“이사한다고 딸 내외며 손자 둘은 좋아서 야단인데, 너희 둘은 왜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어?”
“누가 아니래. 진짜 여기가 둘이 생을 마감하기에 참 좋은데….운명의 장난이야.”
남편 찬구는 그래도 가끔 서울로 줄행랑치다시피 한다. 코로나도 남편의 발목을 잡지 못하는 게 불가사의하다며 푸념을 정미는 늘어놓을 수밖에. 인터넷신문 기자인 남편은 취재원을 만나는 그 자체가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찬구는 기자 수첩을 들고 인사동 전통찻집 밖을 벗어나는 일이 없으니, 초려는 그를 신뢰한다.
그들이 부산에서 둘 다 교육공무원(초등학교 교장) 정년퇴임할 무렵에 비하면 참으로 바뀐 게 많다.
둘은 재직 중 문집(혹은 자서전) 비슷한 걸 공저(共著)로 두 권 냈었는데, 좋은 평을 못 얻었다. 차(茶)를 소재로 한 거였다. 함께 ‘共’이란 한자가 되레 흉기가 된 경우라 하자. 물론 둘 다 문단에 데뷔는 했다, 수필로.
둘이 함께하는 것이 또 하나 있었고 지금도 있으니 ‘다도(茶道)’다. 하지만 역시 말이 다도지, 차라리 ‘실용다법(實用茶法)’쪽에 가까운 정도라 하는 게 옳겠다. 둘을 고의로 폄하하고자 함은 아니고, 다만 전문 식견이 약간 부족해서 그렇지 수십 년 끽다 생활을 해 온 것을 가상히 여겨 어정쩡하게 표현한 것일 따름이다. ‘다도’와 ‘실용다법’의 중간쯤의 세계가 있다면, 둘은 거기서 날개를 펴고 살리라. 다만 초려는 다인명을 가질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들이 차와 인연을 맺던 시절로 되돌아가 보자.
둘이 데이트를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나고 나서였다. 전화선을 통해 들려온 이정미의 말이 이것이었다.
“우리 토요일 오후 세 시, 교대 앞 ‘악양(岳陽) 전통찻집’에서 만나도록 해요.”
“전통 찻집이라….다방도 있는데 왜 거기서지?”
“우리가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면, 꼭 김 선생님에게 약속받을 일이 하나 있어서요.”
“약간 성급한 거 아냐? 부부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지만, 무슨 기속력(羈束力)을 미리부터 행사하려 하니 두려울 수밖에. 하하.”
“큰 염려는 하지 마세요.”
이튿날 둘은 약속대로 악양 전통찻집에서 얼굴을 마주대했다. 개량 한복을 입은 초로의 아주머니가 둘을 반겨 맞았다. 아주머니는 정말 미인이었다. 정미는 아주머니를 이모(姨母)라고 불렀다. 정미가 찬구에게 물었다. 무얼 마시겠느냐고. 그러나 생전 처음인 전통찻집이라 찬구는 머뭇거릴 수밖에.
그러자 눈치를 챈 정미가 찬구에게 권했다. 세작을 마시자며 미소를 보냈던 거다. 차에 완전 문외한인 찬구는 그저 좋다며 얼버무렸다. 겸연쩍은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이마에 식은땀이 번지는 걸 혼자서 느꼈고.
이윽고 아주머니가 쟁반에 뭔가를 가득 담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별 말도 없이 돌아갔다. 그러자 정미가 입을 여는 것이었다.
“하동 악양면에서 며칠 전 도착한 작설차(雀舌茶) 세작입니다. 찻잎이 참새의 혀를 닮았다고 해서 작설차라 하지요. 참새 작(雀), 혀 설(舌)….김 선생님은 저를 여태 카페나 커피숍, 혹은 다방에 저를 불러 내셨지만, 이제 제가 이 작설차를 정성껏 달여 대접하고 싶어요.”
“거부감은 없지만, 낯선 세계에 정미를 따라 들어가는 느낌이네. 그건 그렇고. 이 맛이 어떤지 퍽 궁금하네. 설마하니 참새 혀를 달인 국물 맛은 아니겠지.”
이래서 둘은 웃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찬구는 파안대소했고, 정미는 그냥 미소만 지었다. 정미는 이윽고 귀엣말 정도로 속삭이듯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차(작설차)를 마실 때는 소음(騷音)은 금물이라고. 대소(大笑)엔 소리가 나게 마련이라는 뜻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정미는 찬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연(示演)을 보였다. 뜨거운 물을 사발 같은 데에 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걸 숙우(熟盂)라고 해요. 물을 식히는 사발이지요. 섭씨100도 이상 끓인 물을 여기 부어서 70도 정도까지 내려가도록 기다립니다.”
“…….”
찬구에게는 정미의 그 행동이 지루하기보다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정미가 일찍이 어떤 중요한 일에 열중할 때에도, 그런 진지한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고나 할까?
조그마한 잔에 1/3 가량 차를 따랐는데, 세 번씩 나누었다. 차의 성분이 골고루 섞이게 하기 위함이란다. 차를 마실 때는 눈으론 차의 색깔을, 입으론 차의 맛을, 코론 차의 향기를 맡는다고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귀중한 체험을 찬구는 난생 처음으로 한 셈이다. 그는 소리 없는 감탄사를 정미에게 전할밖에. 그러자 정미가 다시 운을 떼었다.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 갈파했답니다. 차를 마시는 국민은 흥(興)하고 술을 마시는 국민은 망한다고.”
“그렇다면 우리 같은 술꾼들에겐 낭패 날 진단이구먼. 그리고 술의 소비가 없으면 나라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게 뻔한데….”
“너무 거창하게 받아들이면 그렇지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각해 보도록 해 보세요. 가장이 술을 좋아해서 만날 만취가 되어 늦게 집에 돌아온다고 쳐요. 아이들이 알게 모르게 주독(酒毒)에 빠지겠지요. 근묵자흑(近墨者黑)….먹 가까이 있는 자 옷 따위 검어지게 마련 아니겠어요?”
“정미도 학교에 있어서 잘 알겠네. 교사들이 대체로 술을 많이 마시는 거. 어디서 돈이 생기는지 모르지만….수수께끼야. 분필 가루를 술로 씻어낸다는 우리 푸념도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어. 소주와 삼겹살, 그게 명약 중의 명약 아니겠어? 술잔이 앞에 있어야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하는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어요. 김 선생님이 술을 늘 가까이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신다는 것도 눈치 채고 있습니다. 한데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애국자이시다? 거긴 동의할 수 없어요. 다산 선생의 편에 서고 싶습니다. 술잔을 앞에 놓고 요란하게 떠들어야만 제격인가요? 저는 찻잔이 술잔을 밀어내야 한다고 봅니다. 술로써 패가망신한 경우가 많으니, 제 말이 맞겠지요.”
“야, 정말 오늘 대단한 설교를 듣는 셈이로군.”
“이렇게 한 번 정리해 보면 어떨까요? ‘술을 차를 마시는 ’가족‘은 흥한다!’”
정미가 터뜨리는 뜻밖의 선언에 찬구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딴은 일리가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미가 드디어 다관 뚜껑에 왼손 검지와 중지로 누르고 차를 찻잔에 따랐다. 그리고 자기를 따라 해 보라며 차 마시는 법을 알려 주었다. 찬구는 웃으면서 한마디 한다.
“이게 몸에 좋다는 말이 맞는 말일까?”
정미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연 하나를 덧붙였다. 고향 하동군 악양면에는 밭이 차나무 울타리로 되어 있는 데가 많단다. 잔칫날아 겹치면, 가장이 축하하러 나설 때 지천인 차나무에서 찻잎을 한 움큼 훑어다가 온수에 넣어 데치곤, 그 물을 한 두어 사발 마시고 간다는 거다. 그러고 나면 여기저기 들러 종일 말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끄떡없다는 것! 정미가 웃으면서 내리는 결론(?)이 재미있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고, 전자(前者)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해요.”
그러면서 정미가 다른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다관에서 두 번째 차를 따르면서.
악양면 어느 산골에 한 나그네가 홀로 들어왔다, 피골이 상접한데 배가 유난히 불러 보이는 외관(外觀)으로. 그는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도 없고 집 바깥에 잘 나오지도 않았더란다. 며칠에 한 번씩은 1.5킬로미터쯤 걸어 내려와, 동네 구멍가게에서 생필품을 사 가는 게 고작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그럴 때 막걸리도 잊지 않더라나? 그가 중병에 걸려 있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십 리 밖에까지 퍼져 나갔다. 또 하나 이상한 게 있었으니, 그에게 우체국 집배원이 한 달에 한 번씩 들르는 것이었다. 수제(手製) 작설차였다.
그러던 그가 점점 건강이 좋아 보이더니, 2년 만에 횅하니 짐을 싸서 고향 김해를 향해 떠났으니,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간이 나빠 복수까지 차서 죽기를 각오하고 타관 땅을 밟았는데, 그걸 차와 막걸리로 완치 시켰다? 그런 이야기가 회자(膾炙)되었고말고, 오랫동안.
“이번에 확실할 확(確) 믿을 신(信)이지요. 지금은 김해 장군차(將軍茶)에 빠져 있는 그를 차인들은 잘 알아요. 불가사의는 존재하지요.”
정미는 찻값을 찬구더러 치르게 하고는 자기는 이모에게 가는 것이었다. 미리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이모가 작은 가방 하나를 찬구에게 건넸다. 그걸 정미가 찬구에게 안기며 하는 말이다.
“다관(茶罐) 즉 차주전자와 숙우 하나씩, 찻잔 세 개, 차시(茶匙) 다시 말해 차숟가락(茶匙), 찻잔받침(茶托) 등이 들었어요. 세작 두 통도….과음한 날 저녁에 귀가하거든 2.5그램 정도 되는 찻잎을 달여 잡수세요.”
“2.5 그램이라니 어떻게 측정하지?”
“그냥 한 ‘차시’라고 여기면 돼요. 그리고 이건 교음사에서 낸 <실용다사교본(實用茶事敎本)>인데, 참고로 하시면 며칠 안 되어 익숙해지실 거예요. ‘다도(茶道)’까지는 요원할 테니, 우선 우리 의기투합하여 일상에서 차를 마셔요. ‘교음사’는 우리 수필집을 낸 데 아니예요? 대표 강석호 수필가가 말한 적이 있어요. ‘정장(整腸) 작용을 하는 데 있어 차 이상 없다고.’”
“오늘 굉장한 것을 배웠네, 정미한테서….고마워.”
돌아서 나오려는데, 어떤 점잖은 할아버지 앞에서 한 아가씨가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는데, 뭔가 좀 어색하다는 느낌이었다, 좀 전에 차를 난생 첨으로 대했던 찬구에게도 말이다. 찻집 바깥으로 나오자 경미가 귀띔을 한다.
“음주할 땐 어른께 예절이 있지요? 적어도 고개만은 돌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차는 안 그렇습니다. 똑 바로 앉은 자세에서 고개는 반듯하게 해서 차를 조심스레 넘깁니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군요.”
“뭔데?”
“과공은 비례라 하지 않습니까? 끽다 생활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바로, 매사에 지나침이 없어야 한다는 걸 꼭 집어 가르치는 ‘지나치다, 초월하다, 분수를 잃다’를 뜻하는 ‘과(過)’입니다. 차도 지나치면 해악이 있지요.”
“오늘 참 고마웠어. 내 오래 기억할게.”
그렇게 차 생활로 데이트는 무르익어가고, 둘은 3년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 북구 만덕동 만덕사 바로 밑의 열한 평짜리 서민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그 까닭이 기가 막힌다. 물통을 들고 20여 분만 올라가면, 석간(石間)에서 낙숫물처럼 떨어지는 데가 있다는 것. 정미는 차를 달임에 있어 최고의 물은 석간수라 했다며 강조했다.
둘 다 북부 교육청 관내의 몇 군데를 번갈아 옮겨 다니며 근무했다. 딸 하나를 낳고 단산했는데, 오직 녀석 하나만을 잘 기르겠다는 욕심에서였다. 북구는 경합 지구가 아니어서, 25여 년 동안 그렇게 터줏대감처럼 흉내를 내다시피 하는 게 가능했다.
둘은 여전히 차를 마셨다. 자신들은 1년에 수십 통의 우전차를 소비시키기 예사였다. 물론 동료나 문인, 이웃들에게 선물용이 반은 되었다. 김연우 피부비뇨기과에 가면 시조시인이기도 한 원장이 내 주는 차를 마실 수 있어서 셋이서 자주 만나기도 했다. 이웃 부성 병원 병리시험실에 근무하는 김연우 원장의 부인도 가끔은 합류했고.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이 적용될지 모르지만, 좋은 다기로 차를 다루면 그 맛이 확실히 달라진다는 걸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둘은 다기를 모으는 걸 하나의 취미로 삼았다. 수십 년 동안 계속되는….강서구와 북구 만덕동에 손으로 빚는 도자기 가마가 있었는데, 참으로 거기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둘이서 구입하는 다기 등의 반의반은 선물용이었다. 차 문화제 같은 행사에도 참여해서, 승용차 트렁크에다 차에 관련되는 모든 걸 갖추갖추 채워 돌아왔다. 물론 상대들도 차나 다기로 되돌리기 예사였고. 그러다 보니 20여 년 동안에 어지간한 전통찻집과 맞먹는 물량을 보유하게 되었다. 요샛말로 하면 어마무시하게 많았다고 하자. 그걸 보고 매만지는 그들의 기쁨이 세월이 가면 더 커질 수밖에,
그게 다도까지는 못 가더라도 끽다의 생활화라는 말이 그들에게 어울릴 정도는 되었다. 정미가 언제나 더 깊이 파고들었으니, 차에서 ‘여성 상위 시대’를 여는 데 이바지한 셈이다. 하여튼 둘은 어느 학교에 가든 ‘다도부’를 만들어 어린이 열두어 명에게 차의 이모저모를 가르쳤다. 물론 다기며 기타 필요한 것과 차는 자비로 부담하였고. 그 학교를 떠날 때 후임 지도 교사가 없을 경우엔 그것들을 도로 싸서 갖고 올 수밖에 없었다.
이쯤에서 차로 말미암은 가슴 아픈 이야기 하나.
찻집에서 데이트한 그날 경미가 찬구에게 건넸던 ‘과유불급(過猶不及)! 그 말을 생각나게 하는 무섭기조차 한, 차라리 사건이라는 게 나을 듯한….찬구가 장본인이다. 정미는 다도를 정식으로 배워 ’초려‘라는 차인명(茶人名)을 얻었을 정도지만, 찬구는 아무래도 초려에 미치지 못한 게 까닭이었다고 하자.
그에게는 그즈음 알코올램프로 삼발이 위에 얹힌 유리 주전자 위의 물을 끓이는 게 하루 몇 번씩 반복되는 일과였다. 교장실 문을 언제나 활짝 열어 놓고, 나그네라도 들러 차 한 잔을 원하면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그는 어떤 누가 교장실을 방문하더라도, 차를 내오라고 행정실에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 교육감인들 예외일 수 없었고말고. 하물며 교육장(현 교육지원센터장)이며 지역 기관장 혹은 유지(有志)들이랴. 찻잔을 앞에 두고 그가 그들에게 하는 말은 이것이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모든 국민은 커피를 차로 우깁니다만, 아니지요. 후피향나무과에 속하는 차나무에서 딴 잎을 법제(法製)한 이것만 차입니다.”
그의 지론도 시종여일하였다. 정미보다 더 열을 내어 다산 선생의 지론을 전하기도 했고말고. 누구든 차 한 잔 마시고 가는 것만으로도 흥하는 국민의 지름길에 발을 들여 놓는 거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의 철학(?)은 어린이들에게까지 파급되었다. 해서 교장실에 생각보다 어린이들이 많이 드나든 것은 차라리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다 할밖에.
그러면서도 그가 특별하게 차와 관련을 지어 특별하게 애정을 쏟은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특수반 어린이들이었다. 정신 지체나 뇌전증을 앓고 있는….그는 생각했다.차가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정서를 안정시키는 데 녹차가 큰 기여를 한다? 그렇지, 그 이상 은혜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그로부터 수시로 그는 특수반 어린이들을 교장실로 불렀다. 이름을 일일이 부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일고여덟 명에게 차를 마시게 한 것이다. 물론 그의 주장은 별로 근거도 없다. 그저 그러려니 하는 추측 외는 말이다. 담임 교사에게 문의해 봤더니, 녀석들이 좀 차분해졌다는 아리송한 대답을 했다.
그렇게 여섯 달쯤 지나니까, 특수반 어린이들이 스스로 가끔 교장실로 찾아오는 게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제일 ‘높은’ 교장 선생님이 자기들을 따뜻이 대해 주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좋아서 그랬으리라. 녀석들은 두서너씩 무리 짓기도 하지만 가끔은 혼자서 그러기도 했다. 그중에 손창분은 교장실의 단골손님이라 해도 과인이 아닐 정도로 발길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찬구가 동장(洞長)과 학교 앞 교통정리 문제를 의논하고 돌아와서 교장실 문을 열었더니, 창분이 시무룩한 얼굴로 그를 기다리는 게 아닌가? 찬구가 인사를 해도 아니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찬구는 창분에게 물었다. 차 한 잔 하겠느냐고.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5분쯤 지나서 차를 한 잔 아이에게 건넸더니, 평소 배운 걸 잊지 않고 그걸 받아 마셨다. 좀 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가 두 잔, 석 잔을 비우고 난 뒤였다. 갑자기 아이가 뒤로 넘어지는 게 아닌가? 한데 아이가 그 순간 하는 말이 이거였다.
“교장 선생님, 남학생들이 저를 때렸어요.”
결국 아이는 급히 교무실을 거쳐 양호 교사(현 보건 교사) 및 담임교사와 함께 대학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진작 숨을 거두고 말았다. 때린 남학생들도 밝혀졌는데, 외상(外傷)은 없었다.
검사가 사체를 보더니 단 한마디로 폭행에 의한 건 아니라는 첫말을 하더란다. 부검 결과도 마찬가지. 이웃의 진술에 의해, 며칠 전 본인의 부주의로 머리를 냉장고 모서리에 부딪혀 상처를 입는 바람에 항생제만 복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덕분(?)에 약간의 위로금을 전달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게 심적 고통을 주는 게 있다. 실신(失神)하기 전, 아이에게 마시게 했던 약간은 진했던 녹차? 그 녹차가 어떤 작용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한갓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겠지만, 함구만은 능사가 아니었다 싶어 그는 후회도 했다. 지금 사실 대로 털어놓아도 양심이 불량한 것 같은 느낌이니 이를 어쩌랴.
대신 초려(草麗/이정미의 차인명)는 차 생활을 함에 있어서 중용(中庸)을 표방하였다. 남편과는 달리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하지 않는 편이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으니 당연지사였다 하자. 초려는 남편처럼 교장실을 전통찻집처럼 꾸미고 온갖 다기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다. 약간은 다른 부부의 성정(性情)을 잘 나타내는 상징과 같은 모습이었다 하자.
다만 하나 초려는 악양 어느 업체와 녹차 수제비를 급식용으로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하여 워낙 호평을 얻은 터, 마침내 1지구 전체 초등학교에까지 확산시키는 데 성공한다. 물론 학교 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쳤다. 녹차가 체중 조절에 유효하다는 세간의 소문이 영향을 끼친 덕분이지만, 초려는 결코 ‘과유불급’의 외연을 벗어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다.
수박 겉핥기식에 가까웠다고 자책하지만 찬구도, 한갓 어정뱅이보다는 열심히 끽다 생활을 했다. 초려는 끝내 다도(茶道) 사범의 경지에 이를 정도에 이르렀다. 아무튼 둘은 원도 한도 없이 차를 마셨다 하겠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의 입에서 먼저 나왔는지 모르지만, 둘의 삶에서 화두가 되어 자리 잡은 게 있다. 퇴직 후에 부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직업을 하나 갖자는….쉽게 의견이 접근되었으니, ‘전통 찻집’이었다.
각기 정년이 2년 3년이 남았을 무렵에 둘의 합의가 이뤄졌다. 딸도 사립 고등학교 생물 교사로 임용되었던 터여서 부모의 여생을 보람 있게 보내겠다는 데에 이의를 걸 턱이 없었다. 해서 둘의 계획은 일사천리로 실천에 옮겨지게 되었다.
다기를 좀 더 사 모으자며 둘은 부지런히 가마를 찾아다녔다. 특히 강서구(江西區) 가락도예에서는 가마를 뜨겁게 달구었던 장작불을 빼내면 그 안에 들어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찜질을 할 수 있어서 자주 셋이서 거길 드나들었다. 단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말고. 지명보 사장이 돼지삼겹살을 숯불 위에서 구워서 대접하기도 했으니, 그들은 금상첨화가 무엇인지 체험하면서 지낸 셈이다.
가까운 데 차의 생산지가 있었으니, 양산군 신평면, 밀양 산외면, 울주 두서면 등이었다. 거기 일부러 가서도 차의 여러 가지 흔적이며 현주소를 알아보았다. 제다 공장이 있어 차를 대량으로 법제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노령(老齡)이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차나무의 웅장한 자태에 숙연함을 느꼈다.
그런데 뜻밖에 장애가 생겼다.
그럭저럭 거의 5천 만 원어치에 가까운 다기를 모았으나 만약에 찻집을 운영하면 실내 장식이 그럴싸해야 하는데, 그 소품을 구하는 게 힘들었던 것. 시내 여러 찻집에 가서 물어봐도 주인들은 정답을 내 놓지 못했다. 아니 안 한다는 의심이 부쩍 들 만큼 여간해서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옛날 냄새가 나는 건 무엇이든 좋은데….
그 고생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부산에서 밀양 시내를 거쳐 찬구의 고향 단장면 국전리까지 가는 도중 바깥 무릉(武陵)이란 동네에 가까운 친척이 살고 있어서, 거기 들렀다. 본채와 멀리 떨어진 헛간에 들어갔더니, 창호지가 거의 떨어져 나간 문짝이 하나가 있지 않은가? 옳다구나 싶어서 구석구석 샅샅이 살펴봤다. 눈에 그럴싸한 것들이 띄었다. 자루가 부러진 삽, 등잔대, 꽤나 낡아 너덜너덜한 <동몽선습(童蒙先習)>,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벼루 등등. 서로가 눈짓을 주고받은 끝에 부부는 그것들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흥정.
“형수님, 이거 안 쓰는 물건들인 것 같은데 저한테 파시지요.”
“그렇긴 하지만, 그런 골동품 시세가 참 좋다는 소릴 들어서….돈 백 만원 주고 갖고 가세요. 도련님은 잘살지 않아요?”
농반진반 같은 표정이라 좀 깎아 보려다 그만두었다. 살림이 궁색해 보여서다. 그는 지갑에서 5만 원 짜리 스무 장을 꺼내 주고 그 소품 등을 인수하여 차에 실었다.
그로부터 그런 일들을 둘은 몇 번 겪었다. 밀양 댐 건설 현장 밑에 수몰된 마을이 있어 그 근처에 구경삼아 들렀다. 물엔 반쯤 잠긴 텅 빈 농가에 쓸모없어 보이는 소쿠리 등이 있어 그걸 안고 나오는 대신 낡은 입춘서가 붙은 기둥에다 둘은 몇 자 메모를 붙였다. 값을 후히 쳐 줄 테니 연락하라고….경상도 사람들이 흔히 뿍지라고 부르는 물고기 동사리를 잡는 작살도 뒤란에 보여, 그것도 메모와 바꾸어 차에 실었다.
그러다가 이런 웃지 못 할 일도 겪었다. 그길로 표충사까지 가서 후미진 마을에 들어갔다. 끝집의 울타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장작을 팬 흔적이 보였다, 제법 굵은 나무토막이 널브러져 있는데 그 가운데가 움푹 파였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부부는 그걸 집어 들었다. 그러고 집안을 찾아 들어 주인을 찾았지만 인기척이 없다. 메모를 남기고 돌아서려 할 때, 밭에 갔다 오는 차림으로 아주머니가 호미를 들고 귀가하는 게 아닌가!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굴을 붉히고 선 둘에게 아주머니가 묻는 것이었다. 그걸 무슨 보물처럼 들고 있느냐고. 둘은 아주머니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아주머닌 우스워 죽겠단 표정으로.
“그거 옛날에 우리가 음식점을 할 때 닭 잡는 데 쓰던 물건인데, 그게 필요하다니 갖고 가세요. 안 그래도 조금 있다 버릴 참이었으니, 일거양득이네요,”
부부는 얼씨구나 싶어 그것도 차에 실었다. 만 원 짜리 두 장을 억지로 아주머니 손에 쥐어 주고. 그렇게 고생을 해도 소품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기백 만 원을 투자했는데도 만족할 양을 확보하기까지는 요원하였다.
내외가 경기도로 올 수밖에 없는 까닭은 딸 내외와 손자 때문이었다. 안사돈이 그때까지 손자를 보살폈는데, 부득이한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둘이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도로 부산으로 간다는 기약이 없어서, 아예 이사를 하기로 했고.
전통 찻집을 열겠다는 꿈은 그래서 사라지고 말았다, 굉장한 충격이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삿짐의 대부분이 다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그것과 관련이 있는 잡다한 소품들은 버릴 수밖에.
그런데 다기가 상당수 도중에 부서진 것이다. 센터에서 조심해서 싸고 옮겼지만, 이사 온 집에서 짐을 정리하다가 일당을 받고 일하는 초로의 아주머니 손에 사단이 났으니 참으로 낭패였다. 액수로 환산하기 힘든 결과였다. 부부는 이삿짐센터 사장에게 물어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부산에 근거를 둔 영세업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적잖은 충격을 주었고 상처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딸 내외가 출근하고 손자까지 등교하고 난 뒤 둘이서 차를 마시는 시간은 각별한 기쁨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래 차는 둘이서 마시는 게 제일이라 했지!
집 안 곳곳에 진열해 놓은 다기들을 수시로 바라보는 자체도 둘에게 나무나 큰 행복감을 안겨 주었다. 기나긴 세월의 의미가 그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데 코미디 같은 사실. 그렇게 어렵게 구하느라 애썼던 소품들이 인사동에 가면 지천으로 널려 있었으니! 1백 만 원만 투자하면, 까짓 웬만한 전통찻집을 차리고도 남을 각종 골동품 비슷한 것들을 구할 수가 있다는 사실 앞에 부부는 경악하고도 남았다. 왜 고물상을 찾지는 않았는지? 등잔 밑은 역시 어두웠는가 보다.
물론 꿈을 접은 지 오래라 인사동에서 지갑을 열지 않았지만. 그래서 세상은 요지경인지 모른다며 둘은 인사동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장탄식에 고소를 섞어 날렸다.
내심을 대놓고 드러내기 힘들지만, 이사는 가기 싫다는 게 둘의 공통된 정서다. 그래서 이런 농담도 던지기 마련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내가 죽으면 이사 안 가도 되겠지. 그 방이 막내 몫이 될 테니까.”
부부가 여태껏 방을 따로 써온 것은 둘의 사생활 영역이라 밝힐 수 없다. 어쨌든 그러다 보니 커가는 막내 방이 필요했던 것. 부부 중 하나가 저승으로 떠나면 이사 계획은 원위치이고말고.
다기가 얼마쯤 되느냐고? 글쎄다, 둘은 이구동성으로 답하리라. 조그마한 박물관 하나 열 정도에 약간 못 미친다고 말이다. 어지간하다는 형용사가 딱 들어맞지 않은가. 마지막에 덧붙여야 할 게 꼭 하나 있다. 찬구는 지금 1년에 소주 한 병도 안 마시는 사람이다. 초려는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차 덕분임은 강조하나마나. 나아가 그들이 추구하는 명제는 이것이다.
“차를 마시는 최고의 덕목 내지 명제는 ‘임종 때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음’이다.”
아 참, 잊을 뻔했다. 앞서의 ‘장군차’ 나무는 지금 김해의 상징 중 하나이고, 노무현의 사저(私邸)를 둘러싸고 있다. 심은 사람은 악양에서 기사회생했었던 그이? 아니다.
* 약력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문인복지 위원‧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 경기PEN 운영위원‧ 경기문학인협회 회원 ‧ <문학과 비평> 운영이사 ‧ 한국전쟁문학회 자문위원 ‧ 표암문학회 자문위원 - 전 초등학교장-전 유네스코부산협회 부회장-
* 저서
소설집 <거기 나그네 방황 끝나는 곳> 등 4권 ‧ 수필집 <죽어서 개가 될지라도> 등 15권 ‧ 기타 논픽션 등 4권 총 23권(共著 제외) *개인 저서임)
* 수상
황조근정훈장 ‧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 봉사본상 ‧ 부산교육상 ‧ 자랑스러운 부산교대인상‧ KNN부산방송 문화대상‧ 화쟁포럼 문화대상 ‧ 한국수필 청향문학상 ‧ 경기PEN문학대상 ‧ 허균문학상‧ 부산수필대상‧ 부산가톨릭문학상 ‧ 부산북구문학상 ‧ 쿠알라룸푸르 한인회장 감사패(아동도서 현지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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