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 이래로 끊임없이 되풀이 되온 질문이다
성(性)은 심(心)과 생(生)을 합쳐 만든 글자다. 글자대로 풀면,
성의 본래 뜻은 '마음속에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속에는 도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리적 욕구와 감정이 같이 들어 있다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
그리고 사람은 태어날 때 백지인 상태로 태어나서 경험
또는 교육을 통해서 선과 악으로 행동한다는 백지설...
유사이래로 끊임없이 논쟁이 되어온 성선설과 성악설
어떤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성선설
맹자(孟子)가 주장한 중국철학의 전통적 주제인 성론(性論].
맹자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고 했다.
맹자의 이러한 주장은 공자가 사람의 본질로 내세운 사람다움,
즉 인(仁)을 체계화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그러면 맹자의 주장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맹자는 용자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구를 위해 신발을 만들어 준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발 크기를 모른다고 해서
신발 모양을 삼태기처럼 만들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의 발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맹자는 사람의 겉모습에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겉모습만이 아니라, 맛을 보고 소리를 듣고
모습을 보는 데도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외모나 감각 기관에만 공통점이 있을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공통점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도덕적 품성이라는 것이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는 증거로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예를 들었다.
누구든 길을 가다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즉시 '저런, 저거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황급히 달려가 아이를 구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나중에 어린애를 구해 준 것을 빌미삼아 그 아이의 부모와
사귀어 보려 해서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이나 벗들에게
침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사람들로부터 물에 빠지는 아이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비난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도 아니라는것이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본 순간 생겼던 순수한 마음,
이 마음을 맹자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라고 부르며,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맹자는 이런 마음 말고도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고 이 마음들을 잘 기르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착해질 수 있는 네 가지 실마리(四端)'라고 한다.
맹자는 이 네 가지 단서가 사람 마음에 있는 것은
몸에 팔다리 네 개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맹자는 4단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러한 인간의 선천적인 요소를
'양지', '양능'이라는 말로도 설명했다.
양지 양능이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린 아이가 제 부모를 따를 줄 아는 것처럼,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니고 따져 봐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갖춘 것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맹자의 양지 양능은
뒤에 명나라 때 나온 양명학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본래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산이 있다.
그런데 나무꾼들이 매일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내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풀을 뜯어 먹여서 헐벗게 되었다.
사람들은 헐벗은 산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산은 처음부터 나무가 없는 산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산의 본모습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본성도 매일 나무를 잘라내듯 착한 마음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나쁜 환경 때문에 악한 짓을 하는 것이지,
그것이 본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자기 자신이 태어날때부터 악하게 태어났고
본래부터 악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性惡說를 주장한
순자는 본성이란 배우거나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욕구다.
이 욕구는 귀가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눈이 좋은 빛깔을 보고 싶어하는 감각 기관의 이기적 욕구와도 통한다.
순자는 이러한 생리적 욕구에 바탕한 이기심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욕구대로 간다면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하루도 빠지지않고 일어나는 전쟁과 싸움...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무어라고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시대에 말씀하신 것인데,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fullness)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보셨을 때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러니까 어떤 계획은 악하고 어떤 계획은 선하며,
또 어떤 때는 악하지만 어떤 때는 선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전혀 없고 의롭거나 거룩한 것이 손끝만큼도 없이
모두가 악하다는 말인데 이것을 오랫동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전부 악하다는 말을 잘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어느 정도 죄를 지었고, 내 속에 추하고 악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시인했지만 내 자신이 전부 惡뿐이고,
선(善)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것이다.
그러나 이해가 되든 말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모두 惡하다고 말한다.(환장할 일이네 )
.
누가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약국을 경영하는데 제가 돈을 들여 사온 약을 때때로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을 적게 받고 주고,
더 불쌍한 사람에게 무료로 약을 줄 때가 많았고,
어려운 사람을 볼 때 돈을 주어서 그들의 삶에 보탬이 되도록 돕곤 했는데,
그것은 분명히 선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저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성경은 창세기 6장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인간에게 선한 것이 없다고 기록하고있다.
특히 시편 14편 1절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 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시편 53편에도 있는데,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이 인생을 굽어 살피사 선을 행하는 자가 있는가 살펴보았다.
인간들의 생각에는 착한 자도 많고 선을 행하는 자도 많은 것 같았으나,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수많은 연대가 흘러가면서 오고간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선한 자를 찾아보실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름대로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더욱 환장하겠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보고,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질문을 했을 때, 예수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고 하셨다.
예수는 이 땅위에 하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선한 사람은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 18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고 말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악한 것도 있다고는 인정하나 선이 전혀 없다고
하는데는 굉장한 반발을 일으킨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악한 것도 있지만
선한 것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만 인간의 생각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한번도 인간들 속에서
선을 발견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특히,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신앙생활 하면서 자신에게 선한 것이
조금도 거하지 않는 줄 깨달았다고 간증했는데, '원함은 있노라'고 했다.
즉, 모든 사람의 속에 선이 없으니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시장에 가 보면 가짜 금반지 하나에 천원도 하고, 사파이어 반지 하나에 팔백원,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에 천 오백원도 하는데, 반지를 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진짜 반지를 살 능력이 없는 사람이 가짜 반지를 낀다.
마찬가지로 속에 선한 것이 없는데, 선을 원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가짜 선을 가지고 선인 줄로 속고 있는 것이다.
진짜 반지와 도금한 반지의 차이점은 진짜 반지는 아무리 속으로 파고
들어가도 금이지만, 가짜 반지는 겉은 진짜 같으나
속은 불순물이 섞여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때때로 행하는 선(善)들은 어떤 면으로 보면 선(善)같이
보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속속들이 변해 버리는 가짜善인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약사가 약을 무료로 주고 구제도 했지만,
그것은 그가 선을 행하기 원해서 한 것이지
그 마음 중심에 선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순간적인 것이지 온전한 선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선이라면
계속 그런 일을 지속해야 하는데, 선이 아니고 위장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고 애를 써야 했고, 또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사라져 버리며,
결국 속의 악이 드러나게 된다.
인간들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순간은 자기가 선한 일을
했다며 기뻐할지 모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참된 선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왜 구태여 이런 것을 따져서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없고 악한 것뿐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 만일, 우리에게 선이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선을 키워서 선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노력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아니므로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없다.
즉,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의 노력이 가치가 있겠지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실 수 없는 것이다.
사과나무가 아무리 노력해도 복숭아를 맺을 수 없고,
포도나무가 아무리 노력해도 무화과를 맺을 수 없다는 진리를 분명히 알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선을 행하려는 노력을 그치고 "하나님,
나는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악뿐입니다" 하며 전적으로 예수를 의지해서 나아오지만,
자기 속에 선이 없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무엇을 잘해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므로
자기 행위 속에 빠지게 되는것이다.
例를 들면 소원 기도 할時
가짜 善을 품고 있는 인간이 기도 한다고 하나님께 상달 할수 있겠는가
반드시 끝에 중보자 "예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를 붙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당시에도 자기가 애쓰는 사람은 예수를 항상 대적하였고,
예수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축복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십자가의 강도나 38년 된 병자,
간음 중에 잡힌 여자는 자기가 무엇을 한다는 사실이 무익함을 깨닫고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 속에 악만 있지 선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해서,
우리 노력이나 행위에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를 멸망으로 끌어가려 하고 있다.
하나님은 정말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자기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구원의 주(主)가 되어 주신다.
참고--여러 성서 사이드
1953년 종군 예배=화천
첫댓글 그렇습니다내안에선한것이라고는없습니다단지예수그리스도로 옷입을뿐입니다신의성품에첨예한자로 여겨주심이 은혜일뿐입니다고향산천님 감사드립니다
토토님
답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향산천 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