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 중에 '도로남'이라는 트로트가 있다. 가사가 심오하면서도 재미가 있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찍으면 도로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점 하나의 차이로 인해 이렇게도 엄청나게 다른 뜻이 되고 만다.
우리 말은 참 어렵다.
많이 복잡하다.
그러나 그 어렵고 복잡한 우리 말이나 글에는 정말 미묘한 매력이 있다.
점하나를 지우면 전혀 다른 말이 되었다가 지웠던 점 다시 가져다 붙이면 또 전혀 새롭다.
그뿐인가.
사물의 이름들도 그렇다. 점이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에 따라서 이름의 주인은 상상도 못하게 달라진다.
봄에 피는 꽃, 얼레지도 그중의 하나다. '얼레지, 인터넷 유머로 해명하다'라는 시를 쓰려고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비슷한 발음의 이름이 더러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 시를 써서 스토리문학에 원고를 보내기 전에
혹시라도 잘못 쓰지나 않았는지 여러 번 보고 또 봤다.
점 하나 잘못 찍어서 자칫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 참 헷갈리게 비슷한 발음을 가진 얼레지, 알러지, 엘레지에 대해서 사전 검색을 해봤다.
1. 얼레지-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20~40m이며 잎은 하나씩 마주나고 달걀 모양 또는 타원형.
4~5월에 자주색 꽃이 피고 열매는 삭과(蒴果)이다. 어린잎은 식용하고 비늘줄기는 약용한다.
관상용이고 산의 기름진 땅에 절로 나는데 한국,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2. 알러지- 알레르기(Allergie 독일어), 앨러지(allergy 영어)라는 이름의 면역 반응이다.
알레르기란 면역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보통 사람에게는 별 영향이 없는 물질이 어떤 사람에게만
두드러기, 가려움, 콧물, 기침 등의 이상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3. 엘레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비가(悲歌) 또는 애가(哀歌)라고도 한다. 즉, 슬픔을 노래한 악곡이나 가곡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포괄적인 주제를 다룬 시들을 가리킨다.
옛날에, 대중가수 이미자씨를 일컬어 '엘레지의 여왕'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있다.
그때 사람들은 엘레지를 '눈물'로 해석 한듯하다. '이미자=눈물의 여왕.' 이런 등식이 성립되었던 것 같다.
또 하나는 구신(狗腎) 즉, 개의 음경과 고환을 이르는 한방 용어라고 한다. 해구신은 물개의 음경과 고환이다.
만약, 문학과 친한 어떤 사람이 누구와 만나서 로맨틱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분위기에 취해서
"당신은 엘레지 같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했다고 치자.
그의 기분이 과히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낭만이란 걸 아는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정반대의 상황에서 "흥! 당신은 꼭 엘레지 같은 사람이군요."라고 말했다면
말한 사람은 이미 뜻을 알고 했을 테니까 욕을 내뱉었음이 분명한데 듣는 사람이 정확한 뜻을 모른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비가나 애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칭찬인 줄 알고 겸손한 척하면서 "뭘요. 다 그렇지요."라고는 하지 않을까?
(혼자 그 광경을 생각하다가 킥킥대고 웃었다.)
참고로 오탁번 시인의 엘레지라는 시를 올려본다.
엘레지
오탁번
말복날 개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나에게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 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그날 밤 꿈에서 나는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오탁번 시집『벙어리장갑』(문학사상사, 2002)
30년 국어를 가르친 선생이 이 말을 몰랐던 이유는 순수 우리말이라기보다
한방이라는 특정 분야에서 쓰는 전문용어이기 때문이리라 짐작을 하며 오탁번 시인께선 자책하지 마시길 감히 바래본다.
아무튼, 바른말을 바로 알기도 어렵고 바로 사용하기도 정말 어렵다.
어렵지만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로 알고 바로 써야 할 것이다.
첫댓글 한글 제대로 쓰기 참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다른 나라 글에는 없는 띄어쓰기가 특히 어려워 자주 인터넷의 신세를 지지만 그래도 전문가가 내 글은 보면 많은
잘못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예. 한글은 쓸수록 더 어렵습니다. 대충 쓰자니 세종대왕께 죄송하고요. ㅎ
그러나 완벽하게 쓰는 사람은 드물것이라 생각됩니다.
하하하 정말 사람냄새나는 시네요.
전에 읽은 적이 있었지요
그때도 박장대소했네요.
얼레지... 얼래꼴래
내 얼레지 누가 볼까
두 손 모아 감춰봅니다 ㅎㅎㅎ
이러언~ 교수님. 얼레지가 아니라 엘레지를 걱정해야 된다니까요. ㅎㅎ
ㅎㅎ재미있고 유익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선생님, 잘 계시지요?
네, 덕분에 잘 있습니다. 같은 대구에 살아도 얼굴 뵙기는 어렵네요. 훌륭한 글에 많이 배우고 있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