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朝鮮史]의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은 대륙[大陸]의 남방[南方] 지역
오늘날, 한국[韓國]에는, 멸실[滅失]되고 잃어버린 우리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을 찾기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이 있다. 이러한 현상[現狀]들은, 우리의 역사[歷史]에 대하여 제기되고 있는 모순[矛盾]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문[疑問]에 대하여,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본 모습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만큼 많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아쉽고 안타까운 일들이 수 없이 반복[反復]되고 있으며, 오히려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고자 하면서, 우리의 역사[歷史]를 다시 한 번 왜곡[歪曲] 시키는 사례들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난마[亂麻]처럼 얽히고, 실타레처럼 이리저리 엉켜져있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사서[史書]들 속에서,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밝히고 본 모습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한 사례[事例]의 일면[一面] 일 것이다.
우리의 역사[歷史]에서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에 대한 사서[史書]의 기록들은, 삼국시대[三國時代]로부터, 근세[近世]의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같은 기록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또한, 그에 대한 설명과 내용들이 풍부하다. 역사서[歷史書]의 원문[原文]을 보지 않고, 공교육[公敎育]을 통하여 역사[歷史]를 배운 사람들은, 수[數] 천년[千年]을 전하면서 이어 내려온 우리의 선조[先祖]들이 남겨놓은 사서[史書]의 기록[記錄]들과 관계없이, 반도[半島]의 중심부[中心部]에 있는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을 역사[歷史]속의 실재[實在]로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러나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고 설명하는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에 대한 내용들은, 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 가르치고 주장하는 내용들과는 전혀 다른 기록[記錄]들을 남기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전해 오는 역사서[歷史書]가 수 없이 많은 기록[記錄]들을 남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진실[眞實]된 역사[歷史]를 국민[國民]들이 모르게 하고, 거짓과 왜곡[歪曲]의 역사[歷史]를 우리의 역사[歷史]라고 가르친 그 후과는, 엄중[嚴重]한 역사[歷史]의 응보[應報]를 스스로 받게 될 것이다.
지금은 양자강[揚子江]으로 불리우는 중국[中國]의 장강[長江] 남[南]쪽으로 내려가면, 강서성[江西省], 절강성[浙江省], 복건성[福建省]이 만나는 내륙의 경계[境界] 지역에,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대로 동[東]과 서[西]로 600리를 힁으로 뻗은 산맥[山脈]과 만나게 된다. 이 산맥[山脈]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북[北]쪽에는, 상요시[上饶市]가 있고, 남[南]쪽에는 포성시[浦城市]가 있다.
이 산맥[山脈]의 중심부에서 남[南]과 북[北]을 넘어가는 두 개의 큰 재가 굽이굽이 준령[峻嶺]과 서리어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이다.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조령[鳥嶺]은, 남[南]쪽에서 동북[東北]쪽으로 넘는 길이고, 죽령[竹嶺]의 길은 남[南]쪽에서 북[北]쪽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이 준령[峻嶺]을 넘어가는 남[南]쪽 지역[地域]에는 작은 산골 읍[邑]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작은 읍[邑]에 들어서게 되면, 옛 고[古] 건축물[建築物]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대[時代]를 거슬러 올라가 역사[歷史]속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는다. 족히 수[數] 백년[百年]은 되어 보이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 지역[地域]에는 옛 고을의 관아[官衙], 동헌[東軒], 학당[學堂], 종사[宗嗣], 문창각[文昌阁] 등이 당시[當時]의 모습 그대로 보존[保存]되어 있어서 지나간 역사[歷史]에 대한 당시[當時]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서 받는 느낌은, 그저 경이[驚異]롭고 놀라움 그 자체이다. 이렇게 당시[當時]의 옛 모습과 당시[當時]의 고[古] 건축물[建築物]들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보존[保存]되어 전해지고 있는 지역[地域]은 그리 많지 않은데, 이 지역[地域]만은 예외[例外]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地域]에는 옛날에 다니던 당시[當時]의 다리가 그대로 보존[保存]되어 있고, 지금도 당시[當時]의 다리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다리위에는 회랑[回廊]을 지어 누각[樓閣]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러한 다리의 형태[形態]는 장강[長江] 이남의 지역에서 많이 보게 된다. 그리고 다리위에 누각[樓閣]을 만들고 회랑[回廊]을 만드는 이러한 유형[類型]의 다리가 조선사[朝鮮史]의 충청도[忠淸道]와 영남[嶺南] 지역의 기록[記錄]에 등장 하는데, 이 지역[地域]에 있는 이 다리도 그와 같은 유형[類型]이다
지금 이 지역[地域]은, 강산입팔도고진[江山廿八都古镇]이라고 부르고 있다. 도[都]자와 도[道]자의 글자를 다르게 표기[表記]하고 부르고 있으나, 팔도[八都]라고 하는 지명[地名]은, 팔도[八都]라고 하든, 아니면 팔도[八道]라고 하는가의 여하를 떠나서, 이것은 조선사[朝鮮史]의 고유 지명[地名]이지, 소위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지명[地名]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입[廿]자[字]라든가 도[都]자[字]를 변형[變形]시켜서 다르게 부르는 것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가리려는 얄팍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역[地域]에는 팔도[八都]의 자[字]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다. 왜 이렇게 팔도[八都]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고 있을까 ? 그리고 이 지역[地域]에 있는 옛 다리의 이름이 수안교[水安桥]이다. 수안교[水安桥]는 수안보[水安堡]에 있는 다리를 말하는 것인데, 조선사[朝鮮史]의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의 수 많은 기록[記錄]중에서, 조령[鳥嶺]을 넘기 전에 있는 안보[安保]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수 많은 조정[朝廷]의 대신[大臣]들과 백성[百姓]들이 넘나들던 길목에 안보[安保]가 있었고, 안보[安保]를 거처서 조령[鳥嶺]을 넘어가기 때문이다.
지금 옛 조령[鳥嶺]을 넘어가던 길은, 선하고도[仙霞古道]라고 부르고, 옛 조령관문[鳥嶺關門]은 선하관[仙霞关]이라고 부른다. 조령[鳥嶺]의 관문[關門]은 3개가 아니라 4개가 설치되어 있다. 조령[鳥嶺] 3관문[關門]이라고 하는 것은, 반도[半島]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조선사[朝鮮史]의 조령[鳥嶺]은 4개의 관문[關門]이 있다. 여기에 기찰[譏察]을 위해 역사[驛舍]를 짓고 만든 관문[關門]이 하나 더 있는데, 이 관문[關門]까지 합하면, 5관문[關門]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이렇게 조령[鳥嶺]에는, 모두 5개의 관문[關門]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금도 이 관문[關門]들은 손상 없이 그대로 보존[保存]되어 있다.
이 조령[鳥嶺]의 준령[峻嶺]은, 대나무가 많기는 죽령[竹嶺]만 못하지만, 이 고개를 굽이굽이 돌고 넘는 주위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여 남국[南國]의 정취에 훔뻑 취하게 한다. 그리고 이 조령[鳥嶺]의 길에는 모두 돌을 깔고 다져서 길을 만들었는데, 얼마나 튼튼히 견고하게 만들었는지, 무너진 곳이 거의 없고, 지금도 수[數] 백년전[百年前] 당시[當時]의 길을 가는 느낌을 받는다. 이 길을 보면, 옛 사람들의 슬기에 길을 가는 사람을 탄복[歎服]하게 한다.
이 돌을 다지고 깔아서 만든 길을 넘으면서 조선[朝鮮]의 선유[先儒]들이 많은 시[詩]를 남겼는데,......... 하늘을 떠받치는 새재 돌길이 긴데 鳥嶺撑天石路脩, 봄추위는 낡은 담비 갖옷을 파고드누나 春寒猶襲弊貂裘, 라고, 하였고,...... 중천에 비낀 새재[鳥嶺] 기나긴 돌사다리 鳥嶺橫天石磴脩, 백 번 꺾여 돌고 도니 시름 다시 더하구려 盤回百折更添愁, 라고, 노래 하였다.
그리고 조령[鳥嶺] 북[北]쪽의 안보[安保]에서 관문[關門]을 오르다보면 옛 고건축[古建築]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고풍[古風]스러운 건물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이 바로, 점필재집[佔畢齋集]에서,............ 새재[鳥嶺]의 동쪽 비탈에 새로 지은 정자가 있어 퍽 넓고 화려한데, 이는 곧 신구관[新舊官] 방백[方伯]들이 서로 직무를 인수인계[引受引繼]하고 작별하는 곳이다. 라고, 하는. 그 교귀[交龜]의 건물이다. 이 조령[鳥嶺]만 하더라도, 조선사[朝鮮史]의 여러 기록[記錄]들이 부절[符節]과 같이 합치[合致]되고 있으며,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점필재집[佔畢齋集]
鳥嶺東崖有新亭頗宏麗乃新舊方伯交印面別處也前縣監愼承命所建而無名號余命以交龜壁有進士柳順汀詩次韻
새재[鳥嶺]의 동쪽 비탈에 새로 지은 정자가 있어 퍽 넓고 화려한데, 이는 곧 신구관[新舊官] 방백[方伯]들이 서로 직무를 인수인계[引受引繼]하고 작별하는 곳이다. 전 현감 신승명[愼承命]이 세운 것인데 명호[名號]가 없으므로, 내가 교귀[交龜]라 명명하였다. 그 벽에 진사[進士] 유순정[柳順汀]의 시[詩]가 있으므로 차운[次韻]한다.
교귀정[交龜亭] 위에 앉아 천지를 오시하노니 交龜亭上傲乾坤
어느새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졌네그려 不覺霜華點鬢根
한 강물 소리는 바람이 절로 부딪쳐 나고 一水宮商風自激
그림 같은 일천 암벽엔 날이 저물어 가네 千巖圖畫日將昏
시는 경치를 쓰기 위해 나는 새를 탐구하고 詩因寫景窮飛鳥
눈물은 상심의 소치라 단원을 나무란다오 淚爲傷懷讓斷猿
남[南]쪽 땅에는 이미 쌍척후[雙隻堠]가 사라졌으니 南地已銷雙隻堠
달 밝은 오늘 밤엔 어느 마을서 묵을거나 月明今夜宿何村
쌍척후[雙隻堠], 후[堠]는 곧 흙을 쌓아 돈대[墩臺]를 만들어서 이수[里數]를 표기한 것인데, 10리마다 쌍후[雙堠]를 두고 5리마다 척후[隻堠]를 두었다.
주흘산[主屹山]은 안보[安保]에서 바로 동북[東北]쪽에 인접해 있다. 이 산은,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에서 설명하듯이 천하[天下]의 절경[絶景]을 자랑한다. 산위에 하늘로 치솟아 오른 거대한 암산[巖山]이 있는데, 이 암산[巖山] 아래로 구름이 감도는 선경[仙境]과 같은 산세[山勢]를 지니고 있다. 이 산기슭에 용추[龍湫]] 폭포가 자리 잡고 있다. 조령[鳥嶺]의 용추[龍湫] 폭포는, 이 폭포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그림과 같이 일치[一致]하고 있다.
동사일록[東槎日錄]
11일병진[十一日丙辰]
晴。早食後離發。到龍湫駐節。而正使使李錫予。題詩於瀑布岩上曰
맑음. 일찍 아침밥을 먹고 떠나서 용추[龍湫]에 도착하여 쉬었다. 정사가 이석여[李錫予]를 시켜서 폭포암[瀑布岩]위에 시를 썼다.
오월에 지나던 곳인데 仲夏經過地
돌아올 때는 동짓달 초승일세 歸來至月初
일본에 간 통신사가 抺桑通信使
옛날로부터 나만한 이 없으리 從古莫如余
종사관[從事官]도 또 시[詩]를 썼다.
올 때는 바야흐로 더운 여름이었는데 來時方盛夏
돌아가는 길은 이미 깊은 겨울일세 歸路已深冬
용추에서 잠시 쉬노라니 駐節龍湫上
시내와 산은 옛 모습이 바뀌었네 溪山變舊容
踰鳥嶺。安保驛止宿。是日行四十里。又遞驛馬
새재를 넘어서 안보역에 도착하여 잤다. 이날 40리를 갔고, 또 역마를 갈아탔다. [중략]
동명집[東溟集]
류별휴휴[留別休休]
내일 아침 말을 타고 주흘산을 지날 건데 馬首明朝主屹山
꼬불꼬불 산속 길은 구름 속에 나 있으리 迢迢山路入雲間
성 서쪽서 술잔 잡고 그대 모습 그릴 거니 城西把酒長相憶
용추에 비 많아지기 전에 속히 돌아오소 莫待龍湫積雨還
동명집[東溟集]
송임자인선백이수[送任慈仁善伯二首]
계림에 현 속한 지가 오백 년이 되었는데 縣屬鷄林五百年
지금 와선 다시 두 개 산천으로 나뉘었네 于今分作兩山川 [중략]
주흘산은 높고 높아 그 형세가 우뚝하고 主屹山高勢紏紛
용추에는 물보라가 일어 구름 일어나리 龍湫䨪雨起黃雲
남방에다 이제 새로 자인군을 두었거니 南方新置慈仁郡
오백 년의 세월 지나 사군 오길 기다리리 五百年來待使君 [중략]
동사일기[東槎日記]
이십일일[二十一日]
晴。朝主人趙毅仲歷過。漱玉亭觀瀑。削壁周遭。三面古木蒼蔓。翳然蒙絡。懸瀑約高十數丈。飛沫跳珠。望若雪霜。舂撞石缸。仍停爲數畒之潭 [중략]
맑음. 아침에 주인 조의중[趙毅仲]과 수옥정[漱玉亭]을 지나다가 폭포를 보았는데, 깎은 듯한 석벽이 3면[面]에 둘렸고 고목과 푸른 덩굴이 울창하게 뒤얽혔다. 공중에 달린 폭포는 어림잡아 10여 길이 넘고 비말[飛沫]과 튀는 물방울은 바라보매 마치 눈과 서리 같으며, 절구질하듯 석항[石缸]에, [항아리처럼 된 웅덩이]에 쏟아져 내려, 그대로 조그마한 못을 이루었다. [중략]
潭邊盤石平鋪。正如繩削。砌臺上可坐百餘人。傍有小亭數楹。蓋毅仲所刱也。遂盤礴解衣迎爽氣。酌一兩盃而起。踰鳥嶺窺龍秋 度三關輒登眺。蓋關防形勝。不讓百二之險也。夕宿聞慶 [중략]
그리고 못가에는 판판하고 널찍한 반석이 있어 마치 먹줄을 치고 깎은 듯한 체대[砌臺]와 같으며, 그 위에는 백여 명이 앉을 만 하였다. 그리고 바로 곁에 조그마한 정자[亭子]가 있으니 이는 의중[毅仲]이 창건한 것이다.
그 반석 위에서 의관을 벗고 상쾌한 공기를 쏘이면서 한두 잔씩 마시고 일어났다. 조령[鳥嶺]을 넘으면서 용추[龍湫]를 엿보고, 삼관[三關]을 지나면서 높이 올라 관망하니 관방[關防]의 형승[形勝]이 백이험[百二險]에 못지 않았다. 저녁에 문경[聞慶]에서 잤다. [중략]
그러나 여기서도 예외 없이 관문[關門]은, 반도[半島]의 조령[鳥嶺] 삼관[三關]에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역사[歷史] 왜곡[歪曲]의 흔적은, 역사서[歷史書]의 곳곳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 폭포는 주흘산[主屹山]의 서[西]쪽 기슭에 있는데, 동사일기[東槎日記]에서 말하는 내용에, 한자를 더 빼지도 못하고, 한자를 더 붙일 수도 없이 그렇게 일치[一致] 할 수가 없다. 동사일기[東槎日記]의,......... 공중에 달린 폭포는 어림잡아 10여 길이 넘고 비말[飛沫]과 튀는 물방울은 바라보매 마치 눈과 서리 같으며, 절구질하듯 석항[石缸]에, [항아리처럼 된 웅덩이]에 쏟아져 내려, 그대로 조그마한 못을 이루었다. 라고 하는 이 말은, 이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 용추[龍湫] 폭포에 있었던 정자[亭子]는 현재는 없다. 그러나 정자[亭子]가 있던 자리의 널찍한 반석[盤石]은 그대로 있으니, 자연[自然]의 지세[地勢]는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자들에게, 천지[天地]가 주는 교훈[敎訓]이 될 것이다.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행태[行態]를 이곳에서도 보게 되는데, 조선사[朝鮮史]에 수 없이 많이 기록[記錄]된 안보[安保]는, 지금은 글자를 뒤바꿔서 보안[保安]이라고 부르며 그렇게 표기[表記]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歷史]는 이렇게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중국[中國]의 남방[南方]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선하고도[仙霞古道]의 강산입팔도고진[江山廿八都古镇]이 바로 조선[朝鮮]의 문경[聞慶]이다. 이 문경[聞慶]의 고택[古宅]에는, 남극성휘[南極星輝]라는 오래된 현판[懸板]이 남아 있어 이 지역[地域]이 조선[朝鮮]의 영남[嶺南] 지역[地域]이었음을 다시 한 번 증명[證明]하고 있다.
남주[南州], 남방[南方] 극남[極南], 남극[南極]의 이러한 어휘들은,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에 수 없이 등장 한다. 영남[嶺南]이나 호남[湖南]으로 내려가는 조선[朝鮮] 조정[朝廷]의 대신[大臣]들은, 이러한 문구[文句]들을 수 없이 많이 남기고 있다. 조선사[朝鮮史]의 남주[南州]가 이러한 지역[地域]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朝鮮]의 남방[南方]으로 내려가는 대신[大臣]들이, 장기[瘴氣]의 독기[毒氣]에 대하여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회재집[晦齋集]
조령[鳥嶺]
龍安驛早發 秋向南
용안역[龍安驛]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며, 가을에 남[南]쪽으로 향했다.
새벽 해가 창공으로 솟아오르자 曉日昇寥廓
천산을 덮은 연무 사라져 가네 千巖煙霧消
험한 새재 시름겹게 쳐다보는데 愁看鳥嶺峻
멀리 고향 바다가 눈에 선하네 眼入海天遙 [중략]
택당집[澤堂集]
봉증홍령재경시[奉贈洪令宰景時] 이수[二首]
영남[嶺南]의 길목 조령[鳥嶺]을 넘어 鳥嶺通南極
영가[永嘉]와 접해 있는 용궁 땅으로 龍宮接永嘉
복금 연주하며 누워서 다스릴 분 宓琴今臥理
노래[老萊]의 옷 입고서 예전에 함께 지났는데 萊服昔同過 [중략]
용재집[容齋集]
용담[龍潭]
영남[嶺南]의 산수는 고금에 알려졌고 嶺南山水今古知
용담[龍潭]의 빼어난 경치 천하에 기이하구나. 龍潭形勝天下奇
새재[鳥嶺]는 높아라 구천에 솟았는데 鳥嶺高哉九天上
그 아래 물줄기가 긴 뱀처럼 달린다 下有一派長蛇馳
긴 뱀처럼 굽이쳐 긴 골짝으로 가니 長蛇蜿蜒赴長壑
흡사 못 아래 신룡과 만나기로 한 듯 似與潭底神龍期
늙은 나 이곳을 서너 차례 지났건만 老我過此已三四
올 적마다 우두커니 맑은 물결 구경했네 每來延佇耽淸漪 [중략]
아계유고[鵝溪遺稿]
남곽록[南郭錄]
허유격국위許송오선구제[遊擊 國威 送五扇求題]
하늘을 떠받치는 새재 돌길이 긴데 鳥嶺撑天石路脩
봄추위는 낡은 담비 갖옷을 파고드누나 春寒猶襲弊貂裘
멀리서 알겠노니 말 위에서 마음 어지러워 / 遙知馬上難爲思
도리어 한양을 바라보매 바로 복주이리라 / 却望藩京是福州
나그네 마음 나랏일 서로 재촉하는데 / 客心王事日相催
삼월이라 강남을 재차 갔다 돌아오네 三月江南再往迴
좋은 절기엔 타향살이 곱절로 서글픈 법 佳節他鄕倍惆悵
봄바람 불 제 높은 대에 오르지 말라 春風莫上最高臺 [중략]
남주[南州] 고을 성곽들은 전란에 뒤덮였다가 南州城郭戰塵餘
창해에 구름 걷히니 둥근 해가 높이 떴구나 雲捲滄溟轉日車
멀리서 생각노니 군문에 봄날은 긴데 遙想轅門春晝永
장군은 일없이 한가로이 누워 책을 보리라 將軍無事臥看書 [중략]
사상록[槎上錄]
조령[鳥嶺]
중천에 비낀 새재 기나긴 돌사다리 鳥嶺橫天石磴脩
백 번 꺾여 돌고 도니 시름 다시 더하구려 盤回百折更添愁
높은 누에 홀로 서니 천 봉우리 새벽이요 高軒獨立千峯曉
절정에서 내리보니 만 리가 가을일세 絶頂平看萬里秋
하늘 밖에 붉은 기운 바다 해 떠오르고 天外紫光騰海日
구름 사이 푸른 빛은 봉구가 나타나네 雲間霽色出蓬丘
시 삼백 왼다면 사신 자격 있다 하니 古稱三百能專對
높은 데 올라서 원유부 지을 게 있나 不必登高賦遠遊
동사일기[東槎日記]
신장[贐章]
참판회헌이정작[參判晦軒李庭綽]
동으로 가는 사신이 붉은 도포를 입으니 征東使節著猩袍
대마도는 하늘에 뜨고 새재는 높아라 馬島浮天鳥嶺高
북극의 의관이 일본 지역을 통하고 北極衣冠通日域
남녘 바다 배는 물결을 건넜도다 南溟舟楫犯風濤
분정의 예가 엄숙해 오랑캐 왕이 꿇어앉고 分庭禮肅蠻王跪
서해의 글이 무서워 물귀신도 도망가리 誓海文雄水伯逃 [중략]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배가군부문경관외구공조령련병[陪家君赴聞慶 觀外舅公鳥嶺鍊兵]
부친을 모시고 문경에 가서 장인 홍공의 새재에서의 군사 훈련을 구경하였다.
이른 새벽 나팔 불어 진용을 정돈한 뒤 平明吹角整軍儀
도위가 진문 열고 장수 깃발 들여오네 都尉開門納帥旗
땅은 두 관문 설치 자물쇠가 엄중하고 地設二關嚴銷鑰
하늘은 오령 에워싸 울타리를 만들었구나 天圍作藩籬
竹嶺,鳥嶺,化嶺,秋風嶺,八良嶺。爲新羅五嶺
죽령[竹嶺], 조령[鳥嶺], 화령[化嶺], 추풍령 [秋風嶺], 팔량령[八良嶺]으로 신라[新羅]의 오령[五嶺]이다. [중략]
신립의 군사 행동 세상이 다 의심하네 申砬行兵世共疑
애석할사 표도를 어디에다 시험할꼬 可惜豹韜何處用
지휘대의 풍악소리 청명한 시대 즐긴다오 將壇笳鼓樂淸時 [중락]
壬辰之難。申砬不守烏嶺。謂之誘敵。遂至覆軍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신립[申砬]은 조령[烏嶺]을 지키지 않고 적을 유인하겠다고 했다가 마침내 패배하고 말았다. [중략]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동일령내부경유조령작[冬日領內赴京踰鳥嶺作]
時家君爲御史所陷。余乃先行
이때 부친께서 어사의 탄핵을 받았는데 나는 먼저 길을 떠났다
새재의 험한 산길 끝없이 이어지는데 嶺路崎㠊苦不窮
기울어진 절벽 다리 거쳐 지나간다네 危橋側棧細相通
거센 바람 솔소리에 말이 주춤거리고 長風馬立松聲裏
온종일 길가는 사람 바위 기운 속이로세 盡日行人石氣中
얼음이 언 깊은 시내 비탈과 함께 하얗고 幽澗結冰厓共白
눈발 거친 늙은 덩굴 잎이 오히려 발갛네 老藤經雪葉猶紅
마침내 바야흐로 계림의 경계 벗어나 到頭正出鷄林界
서쪽 서울 바라보니 그믐달이 걸리었네 西望京華月似弓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酉山遷人之思也 離其室家不能安土焉
유산[酉山]은 귀양살이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곳을 말한다. 자기 집을 떠나 있어, 마음을 정착시킬 수 없음이다.
저 황수를 건너고 涉彼潢矣
저 높은 주흘산을 넘어 踰彼屹矣
潢。洛東水也。主屹山。卽烏嶺
황수[潢水]는 낙동강(洛東江)이고, 높은 산은 주흘산(主屹山)인데 바로 새재[烏嶺]이다. [중략]
송계만록[松溪漫錄]
송계만록 상[松溪漫錄上]
安東有一措大李孝則。携魚無迹同踰鳥嶺。李有一絶云。秋風黃葉落紛紛。主屹山高半沒雲。二十四橋嗚咽水。一年三度客中聞。魚閣筆 [중략]
안동[安東]에 청렴 결백한 선비 이효칙[李孝則]이 있었는데, 어무적[魚無迹]과 함께 조령[鳥嶺]을 넘었다. 이효칙[李孝則]이 한 절구를 지었다.
추풍에 누른 잎은 우수수 떨어지는데 秋風黃葉落紛紛
주흘산 높이 솟아 반은 구름 속에 묻혔네 主屹山高半沒雲
이십사교 흐느껴 우는 물을 二十四橋鳴咽水
한 해 세 번 나그네 길에서 듣네 一年三度客中聞
위의 지역이 죽령과 조령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출처 구글어스
죽령[竹嶺]을 넘는 길은 반이 암산[巖山]의 준령[峻嶺]으로 되어 있다. 그 깊은 골짜기와 거대한 암석[巖石] 사이에는 대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도, 왜군[倭軍]이 이 죽령[竹嶺]의 길을 넘지 않았던 것은, 그 만큼 험한 지형[地形]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이곳을 죽림고도[竹林古道]라고 부르고 있지만, 대나무 숲이 조령[鳥嶺]에 비해서 몇 배는 많다. 죽령[竹嶺]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由來]도 이에 의거[依據] 했을 것이다.
이 지역[地域]이 조선[朝鮮]의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이었음을 증명[證明]하는 또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자연[自然]의 지세[地勢]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서 말하기를,......... 기사년[己巳年] 모춘[暮春] 3일 계로[溪老], 나의 고향 예안[禮安]은 영남[嶺南]의 가장 북[北]쪽에 있다. 육로[陸路]로 새재[鳥嶺]를 경유하여 가면 남행[南行]이라 하고, 수로[水路]로 죽령[竹嶺]을 경유해서 돌아가면 동행[東行]이라 하니, 모두 예안[禮安]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라고 분명[分明]하게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史實]이다.
지금의 죽림고도[竹林古道]라고 부르는 서[西]쪽에, 죽령[竹嶺]의 준령[峻嶺]을 감싸않고 흐르는 하나의 강[江]이 있다. 이 강[江]은, 죽림고도[竹林古道]의 남[南]쪽에서 발원[發源]하여 서북[西北]쪽으로 굽이굽이 돌아 흘러서 파양호[鄱阳湖]로 들어가는 큰 강[江]이다.,......... 수로[水路]로 죽령[竹嶺]을 경유해서 돌아가면 동행[東行]이라 하니. 라는 이 말은 바로 이강[江]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記錄]은 조선사[朝鮮史]에 있어서, 그리고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에 대한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밝히는 또 하나의 중요[重要]한 증가[證據]가 되고 있다.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 있는 죽령[竹嶺]의 북[北]쪽에서,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을 넘지 않고, 강[江]의 뱃길을 따라서, 영남[嶺南]의 문경[聞慶]으로 가는 길이 어디에 있을까 ? 그리고 그러한 강[江] 자체가 아예 없다. 그러나 이 죽림고도[竹林古道]의 준령[峻嶺]이 서리어 있는 이 지역[地域]에는,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과 정확[正確]히 일치[一致]하는, 자연[自然]의 지세[地勢]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역사[歷史]에서,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의 위치[位置]는, 영남[嶺南]의 문경[聞慶]에서 볼 때에, 조령[鳥嶺]은 동[東]쪽에 있어야 하고, 죽령[竹嶺]은 서[西]쪽에 있어야 한다............ 역사의 기록에서,........... 수로[水路]로 죽령[竹嶺]을 경유해서 돌아가면 동행[東行]이라 하니, 라는, 말은, 죽령[竹嶺]이 동[東]쪽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물줄기가 죽령[竹嶺]의 준령[峻嶺]을 감싸 돌며 흐르기 때문에, 이 물줄기를 따라가면 문경[聞慶]이 동[東]쪽이 되기 때문에, 동행[東行]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도[半島]의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은, 동[東]과 서[西]가 뒤바뀌어 있다.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이 왜적[倭敵]을 막는 요충지[要衝地]라고 하는 것은,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위치에, 그 연유와 그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위치[位置]를 선명[鮮明]하게 말하고 있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當時]]의 기록[記錄]을 보자.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五月李提督親率大軍。踰鳥嶺至聞慶。分部諸將。以劉摠兵綎。率福建川蜀南蠻等處召慕兵。屯星州八莒縣。以吳摠兵惟忠。率南兵屯善山鳳溪縣。以李總兵寧祖摠兵承訓葛摠兵逢夏。率遼廣兵屯居昌。駱游擊尙志王摠兵必迪。亦率南兵屯慶州。環四面而相持不進 [중략]
5월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새재를 넘어 문경에 이르러 제장에게 분부하되, 총병 유정[劉綎]은 복건[福建], 천촉[川蜀], 남만[南蠻] 등지의 군사를 모아 성주[星州] 팔거현[八莒縣]에 주둔하게 하고, 총병 오유충[吳惟忠]은 남병을 거느리고 선산[善山] 봉계현[鳳溪縣]에 주둔케 하고, 총병 이녕[李寧], 총병 조승훈[祖承訓], 총병 갈봉하[葛逢夏]는 요광[遼廣]의 군병을 거느리고 거창에 주둔케 하고, 유격 낙상지[駱尙志], 총병 왕필적[王必迪] 또한, 남병을 거느리고 경주에 주둔케 하여 사면으로 빙 둘러 에운 태세를 취한 채 진격하지 않았다. [중략]
粮餉取之兩湖。踰越險阻。散給諸軍。民力大困。耕種不得以時。流離失所。勢將不支。戶曹判書李誠中隨大軍南下。辦助有贍。上下皆賴。在咸昌病卒 [중략]
군량은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에서 수급하였는데 산천이 가로 막히고 도로가 험난하여 여러 군[軍]에 각기 공급하느라 백성들이 매우 힘들었고 농사철을 잃어 백성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거주할 곳을 잃으니, 형세가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이 대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군량을 주선하여 맡자 상하가 모두 믿었는데, 함창[咸昌]에서 병사하였다. [중략]
七月布政使韓取善戶部主事艾維新參將郭夢徵李芳春游擊將軍王守臣周弘謨等。依經略檄回去 [중략]
7월 포정사 한취선[韓取善], 호부 주사 애유신[艾維新], 참장 곽몽징[郭夢徵]과 이방춘[李芳春], 유격장군 왕수신[王守臣]과 주홍모[周弘謨] 등은 경략의 격문에 의하여 철수하여 떠났다. [중략]
經略旣以師老無功。亦欲因賊退解職。乃謬依違其間。然每陳倭奴多詐。兵難盡撤。陰主款而諱言款。奏揭前後異同。終無堅決。其留兵全羅慶尙議畧曰 [중략]
경략[經略]은 기왕에 싸움만 오래 끌고 공적은 없었는데 역시 적이 물러가는 기회를 타서 직을 해임하려다가 마침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그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매양 왜놈들이 간사한 죄가 많아서 병력을 다 철수하기는 어렵다고 진술하고 음으로는 화친을 주장하면서도 화친을 말하기를 꺼려하여 주장이 전후가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끝내 확고한 결정이 없었다. 그 전라[全羅], 경상[慶尙]에 군사를 남겨두자는 의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중략]
全慶二道。在該國極南。慶稍東羅稍西。朝鮮稱曰兩南。此必倭由之路。爲國門戶。以眎王京。平壤則堂奧也。兩道守則朝鮮安而保薊遼 [중략]
전라[全羅], 경상[慶尙] 두 도[道]는 그 나라의 극남[極南]에 있는데, 경상[慶尙]은 약간 동[東]에 가깝고, 전라[全羅]는 약간 서[西]에 가까우며, 조선[朝鮮]에서는 이를 양남[兩南]이라 칭합니다. 이는 반드시 왜인의 경유하는 길로서 나라의 문호가 되고 왕경[王京]과 평양[平壤]은, 당[堂]이나 실[室]과 같은 형편이라 두 도[道]가 지켜지면 조선[朝鮮]이 편안하여 계요[薊遼]가 보전될 것입니다. [중략]
釜山雖濱南海。猶朝鮮境。又近接對馬。倭若能乘我罷兵。突入再犯。朝鮮不支。前功且棄 [중략]
부산[釜山]은 비록 남[南]쪽 바닷가에 있으나, 오히려 조선[朝鮮]의 경계일 뿐더러, 또 대마도[對馬島]와 인접해 있어 왜인이 만약 우리가 군사를 철수하는 틈을 타서 돌연히 들어와 재차 침범한다면 조선[朝鮮]이 견디지 못할 것이니, 전공[前功]을 모두 포기하는 셈입니다. [중략]
且遼東與日本隔絶。不通海道者。以有朝鮮也。關白之圖意。實在中國。我救朝鮮。非鄕隣比也。今日發兵。協守爲第一策。卽議撤宜少需時日。俟倭盡歸。量議防守 [중략]
더구나 요동[遼東]이 일본과 더불어 단절되어 바닷 길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조선[朝鮮]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백[關白]의 의도는 실로 중국[中國]에 있으니, 우리가 조선[朝鮮]을 구원하는 것은 다른 이웃 나라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니 오늘의 처지로는 군사를 협동해서 지키는 것이 제일 상책이요, 군사를 철수하는 의논은 마땅히 조금 시일을 두고서 왜인[倭人]이 다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방어하도록 해야 합니다. [중략]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當時]에, 조선[朝鮮]이 반도[半島]에 있었다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의 기록[記錄]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 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의 기록[記錄]들은, 당시[當時]의 명[明]나라와 요동[遼東], 그리고 조선[朝鮮]의 위치[位置]를 분명[分明]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且遼東與日本隔絶。不通海道者。以有朝鮮也。關白之圖意, 더구나 요동[遼東]이 일본과 더불어 단절되어 바닷 길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조선[朝鮮]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조선사[朝鮮史]의 전반적인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내용이다.
서애집[西厓集]
연보[年譜]
二月。啓請措置忠州。以固上流。且於鳥嶺。設關屯田。其略曰 [중략]
2월, 충주[忠州]를 조치하여 한강 상류를 튼튼하게 하고, 또 조령[鳥嶺]에 관문과 둔전을 설치하도록 계청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중략]
忠州居上流。爲國門戶。忠州不守。則沿江數百里。皆爲受敵之地。欲保忠州。當自把截鳥嶺始。有守門將辛忠元者言。嶺上東下十餘里。兩岸斗絶。中蟠溪水。名曰鷹巖。若於此處築城把截。不過百餘勁卒。而嶺路把守自固 [중략]
“충주[忠州]는 상류에 위치한 국도의 문호이니 충주를 지키지 않으면 강 연안의 수백 리가 왜적의 공격을 받는 지역이 될 것입니다. 충주를 보전하려면 당연히 조령을 막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수문장 신충원[辛忠元]이 말하기를, ‘새재 위에서 동[東]쪽으로 내려간 10여 리에 양쪽 언덕이 깎아지르고 가운데 시냇물이 굽이쳐 흐르는 곳을 응암(鷹巖)이라 합니다. 만일 이곳에 성을 쌓아 막으면 백여 명에 불과한 굳센 군사로도 고갯길의 파수가 자연히 견고해집니다. [중략]
辛忠元忠州人。曾爲義兵將。邀截賊兵於鳥嶺。詳知嶺路形勢。先生白遣之。給空名帖數十。使募人營築。設城砦建門樓。招集流民。屯田於㺚川麞項水回村安保等處。以通道路 [중략]
신충원[辛忠元]은 충주[忠州] 사람으로 일찍이 의병장이 되어 조령[鳥嶺]에서 왜적을 맞아 격파하여 고갯길의 형세를 자세히 알았다. 그러므로 선생이 임금에게 아뢰어 내려 보내면서 공명첩[空名帖] 수십 장을 주어 사람을 모집하여 지형을 살펴서 성채를 마련하고 문루를 세웠으며, 유민을 불러 모아 달천[㺚川], 장항[麞項], 수회[水回], 안보[安保] 등에 둔전을 설치하고 도로를 개통시켰다. [중략]
至丁酉歲。賊再動而不由鳥嶺。兩湖避亂之民往依忠元者。充滿山中。人以爲設城之功。其後忠元得罪。城亦廢不修 [중략]
정유년, 1597 년에 이르러, 왜적이 다시 출동하였어도 조령[鳥嶺]을 경유하지 못하였고, 양호[兩湖]의 피란민이 신충원[辛忠元]에게 가서 의탁한 자가 산골에 가득 찼는데, 사람들은 성[城]을 설치한 공이라 하였다. 그 뒤에 신충원은 죄를 얻었고, 성도 허물어졌으나 수리를 하지 않았다. [중략]
고봉집[高峯集]
존재만록[存齋謾錄]
앙차퇴계선생매회시[仰次退溪先生梅花詩]
칠언절구 8수[七言絶句八首]
退溪先生梅花詩元韻幷附
퇴계 선생의 매화시[退溪先生梅花詩] 원운[元韻]을 모두 붙이다.
東湖望湖堂。有梅一株絶佳。乙卯仲春南行之日。正値花發携酒就訪。題詩二首而去 [중략]
동호[東湖]의 망호당[望湖堂]에 매화 한 그루가 아주 아름다웠다. 을묘년[乙卯年] 중춘[仲春], 남[南]쪽으로 떠나는 날에 막 꽃이 피어남을 만나 술을 가지고 찾아가서 시 두 수를 쓰고 떠나다. [중략]
己巳春。在漢城寓舍。得盆梅。常對案上。將行贈別 [중략]
기사년[己巳年] 봄에 한성[漢城] 우사[寓舍]에 있으면서 분매를 얻어 늘 책상에서 대하였는데 장차 떠남에 이 시로 작별하다. [중략]
매선이 있어 쓸쓸한 나의 짝이 되니 頓有梅仙伴我凉
소쇄한 객창에 꿈속의 혼이 향기롭네 客牕瀟灑夢魂香
동으로 가면서 그대를 데리고 가지 못해 한스러우니 東行恨未携君去
서울이라 풍진 속에 고이 간직하게나 京洛塵中好艶藏 [중략]
梅花答
매화가 대답하다.
도선의 말을 들으니 우리도 쓸쓸해 聞說陶仙我輩凉
공 돌아감 기다려 천향도 떨어지리라 待公歸去落天香
원컨대 공은 기다리고 생각하는 곳에 願公相待相思處
옥설과 청진을 함께 잘 간직하세 玉雪淸眞共善藏 [중략]
己巳暮春三日。溪老吾鄕禮安。在嶺南最北。陸路由鳥嶺而行則曰南行。水路由竹嶺而歸則曰東行。皆指禮安言也 [중략]
기사년[己巳年] 모춘[暮春] 3일 계로[溪老], 나의 고향 예안[禮安]은 영남[嶺南]의 가장 북[北]쪽에 있다. 육로[陸路]로 새재[鳥嶺]를 경유하여 가면 남행[南行]이라 하고, 수로[水路]로 죽령[竹嶺]을 경유해서 돌아가면 동행[東行]이라 하니, 모두 예안[禮安]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중략]
가정집[稼亭集]
道過星山。至黃澗縣。漸凋弊可憐。行次永同郡。留詩一首。以示往來
길이 성산[星山]을 지날 무렵부터 황간현[黃澗縣]에 이를 때까지 갈수록 더 황폐해지는 것이 애처롭게 느껴지기에, 영동군[永同郡]에 도착해서 시[詩] 한 수를 남겨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보이기로 하였다
죽령은 동남으로 통하는 두 번째 중요한 길 竹嶺東南第二程
이 요충이 어느 날부터 인적이 끊어졌는지 要衝何日斷人行
상하의 경쟁적인 세금 독촉도 이미 싫거니와 已嫌上下爭科歛
조석으로 보내고 맞는 것도 역시 겁나는 일 更怯朝昏管送迎[중략]
조선사[朝鮮史]의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은, 파양호[鄱陽湖]의 동남[東南]쪽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영남[嶺南]이라고 하는 것은, 조령[鳥嶺] 이남의 60개 주[州]를 말하는 것이고, 경상도[慶尙道]의 70개 주[州]라고 하는 것은, 조령[鳥嶺]의 북[北]쪽에 있는 12개의 주[州]를 합쳐서 말하고 있는 것인데, 충청도[忠淸道]의 동[東]쪽이 경상도[慶尙道]라고 하는 기록[記錄]은, 맞는 말이다.
다산[茶山]선생은, 영남[嶺南]으로 내려가면서, 우리나라는 백성[百姓]들이 조밀하고, 백성들이 정말로 많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조선[朝鮮]의 팔도[八道]에는 성곽[城郭]들과 하늘로 치솟은 루대[樓臺]들이 곳곳에 즐비 하였다고 역사[歷史]는 많은 기록[記錄]들을 남기고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조선[朝鮮]의 역사[歷史]를 지우기 위한 창작[創作]의 거짓 사관[史觀]일 뿐이다. 그러한 사관[史觀]을 한국[韓國]의 역사[歷史]라고 가르치는 한국[韓國]의 사학[史學]을, 어찌 역사[歷史]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
중국[中國] 장강[長江]의 남[南]쪽, 강산입팔도고진[江山廿八都古镇]의 일대에 사는 사람들이 죽림고도[竹林古道]의 동[東]쪽 지역[地域]을 신라[新羅]라고 버젓이 부르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신라[新羅]라는 말속에,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 수[數] 천년[千年]의 역사[歷史]가 함축[含蓄]되어 다시 들어나고 있는 것이리라.
이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의 실체[實體]는,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이 담긴 작은 한 부분이다. 앞으로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하나 하나 분명[分明]하게 들어나, 잃어버리고 짓밟힌 조선팔도[朝鮮八道]의 역사적[歷史的] 사실[史實]들이 하나로 모여, 끊어진 역사[歷史]의 웅혼[雄渾]한 맥[脈]과 기상[氣像]이 다시 흐르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첫댓글 죽령과 조령의 동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곳이 "신라"였다>는 말은, <토착민들이나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조선 역사의 진실을 다 알고 있다>는 말이군요. 놀라운 일입니다. 솔직히 직접 대륙을 세세히 답사해 보지 못하고, 고전에만 의존하여 조선의 역사를 해설하고 있는 것에 항상 답답함을 느켰는데, 님께서 그곳의 지형지리나 그곳 사람들의 말까지 전해주니,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합니다. 수백번 고전을 가지고 논하는 것보다는 한번이라도 직접 현장을 보면서 고전과 지세와 방향등을 비교, 검토해보면 무엇이 옳고, 잘못된 것인지를 금새 파악할 수 있겠지요. 절절히, 애정어린 조선사의 진실을 찾는 글, 감사합니다.
조선사의 진실을 찾아보려는 많은 역사카페가 있습니다만, 대부분이 '고전'이나 '한글번역서'를 가지고 진실을 찾으려하니, 많은 시행착오가 발생됩니다. 고전(대륙+조선)과 현지답사를 병행하는 연구과정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군요. "환국고려"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이미 마쳤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조선사 연구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조선사의 진실을 찾아, 조선사의 진실에 목말라하고 있는 회원님들을 위해서 수고를 부탁드립니다.> 댁내 평안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동사일록의 저자인 김지남이 조령(지금의 강서성과 복건성 사이)을 지나갔다면 대마도는 현 대만이 유력하군요...만약 대만을 거처서 일본(?)에 갔다면 현 필리핀과 그 이하의 인도네시아가 이 역사속의 일본(?)이 확실해 질수 있겠읍니다.
'아침밥을 먹고 용추에 도착하여 쉬었다. 정사가 이석여를 시켜 폭포암위에 시를 썼다.'
또 동사일기에 '공중에 달린 폭포가 어림잡아 10 여길이 넘고....' 또 '반석이 마치 체대와 같으며...'등등
용추폭포를 상세하게 묘사했는데 ......님께서는 직접 보셨는지요...? 폭포암위에 시를썼다 했는데 그것이 남아 있다면 결정적 증거가 될수 있읍니다만 ... 누가 일부러 지우지 않았다면 바위에 새긴 글이니 남아 있겠죠....?
반석이 체대(砌臺)와 같았다 하니 아마도 네모 반듯한 바위일 것입니다. 또 석항(石缸)이라고 구체적으로 묘사 했으니 확인 하기는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지금의 조령 가까이)에는 이런 지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중국의 남방 지역에는, 옛 선조들의 전통을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는 종사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러한 분들을 찾아서 . 그분들의 역사에 관한 말씀을 들어야 우리 역사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그 지역 분들에게 왜 八道의 도자를, 都자로 쓰느냐고 물어 봤습니다. 그 분들의 말씀이, 都나 道나 같은 뜻으로 생각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훗날 사서를 보면서 받는 느낌은, 고려나 조선에서 지방을 다스리는 관료들은, 侯라는 존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 이었습니다. 문무 선생님의 노고에 항상 감사를 드립니다. 댁내에 두루 평안 하시고, 항상 강건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직접 보지않고 어찌 그 내용을 알 수 있겠습니까 ? 지금 중국에서 역사에 관련된 석벽이라든가, 석비라든가, 이에 관련된 모든 역사 유적은, 중국에 맞추어 개조가 된지 이미 오래 됩니다. 그러한 것이 남아 있다면 반가운 일이겠으나,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산간오지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의 종사들에는, 우리의 역사와 관련된 현판들이 가끔 남아 있습니다.
맑은 영혼님의 댁내에 두루 평안 하시고, 항상 만복이 가득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임진왜란때 왜군은 무엇때문에 그높고 험한 조령을 넘어야 했을까요? 오늘날 상해 인근이 부산이었다고보면 굳이 험준한 조령을 넘어 가야할 까닭이 없을텐데요. 부산포에 상륙해서 곧바로 평탄한 길을 타고 경성으로 빠르게 진군하면 될텐데요.
임진왜란사의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새로 조명 되어야하고, 역사서의 고증을 통하여, 역사의 사실대로 밝혀져야 합니다. 상해 인근이 부산 이었다는 역사서의 자료가 있으시면, 이에 대한 사료를 올려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조선사의 기록으로 본다면, 지금의 대만이, 조선사의 대마도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청나라 시대의 대만은, 그들이 말하는 남만 지역의 계룡산 지역 입니다. 명나라 마지막 황조에 충성을 다한 이정국의 유지를 찾았는데, 그 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의 광동 광서라는 것은, 옮겨온 지명 일 뿐 입니다. 임진왜란사의 진실은, 앞으로 많은 사실들이 분명히 밝혀 지리라 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수고많으십니다.본문의 내용상 상요시와 포성시라고 하는 도시는 현재의 상라오시와 푸청현같습니다만, 그 다음구절 준령의 넘어가는 남쪽 지역의 작은 읍은 푸청현에서 장산시로 넘어가는 길목 중간의 입팔도진을 말씀하시는지요? (강성강산시입팔도진(浙江省江山市廿八都镇))
또 궁금한 것이 있는데 또 죽림고도 서쪽에서 포양호로 흘러가는 강은 신장(Xin Jiang,Hsin River,信江)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죽림고도는 어디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