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나름의 습관이 있다. 타인과 구별되는 버릇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좋아하는 영화가 있으면 여러 번 본다. 지겹거나 귀찮은 노릇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대꾸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한 번만 먹고 마나요?! 혹은 좋아하는 사람을 한두 번 만나고 그만 만나시나요?!’ 열댓 번 본 영화도 있다. <동사서독>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가 그렇다.
이런 영화는 여러 번 보아도 질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 사람을 끄는 강렬한 매력이 부설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쿠지로의 여름>은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일본의 대표적인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가 1999년 연출한 <기쿠지로의 여름>은 우리나라에서 2002년에 개봉된다. 일본문화를 경계하여 빗장을 채운 전임 정권과 달리 김대중 정권이 개방에 앞장선 결과다.
일본 만화영화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나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어둠의 경로를 거쳐서만 볼 수 있었다. 두세 번에 걸쳐서 녹화하고 그걸 다시 녹화한 필름으로 보았기에 화질은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만큼은 선명하게 다가오곤 했다. 그런 암흑기를 거쳐서 요즘에는 한류가 외려 일본 청년들을 사로잡고 있다. 정말로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 수 없는 대목이다.
각설하고 <기쿠지로의 여름>을 보면서 여러 상념에 젖어 들었다. <소나티네>와 <하나비>, <자토이치> 같은 영화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야쿠자나 검객 같은 폭력적인 인물을 다룬다. 그런데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그는 아주 다른 질적인 변용을 선보인다. 영화 중간에 폭력적인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면 보름달에 반딧불이 정도다. <기쿠지로의 여름>에 담긴 서정성이 마음 한가득 따사로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9살짜리 소년 마사오와 52살 먹은 전직 야쿠자 사내가 왕복 600킬로미터의 여정을 경험한다. 로드무비 형식을 갖춘 <기쿠지로의 여름>은 어째서 그들이 장도(長途)에 올랐으며, 그런 노정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풀어나간다. 아버지를 잃고 할머니와 함께 사는 마사오가 먼 데서 일한다는 엄마를 찾아가는 것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다 보면 아, 저런 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여러 번 찾아온다.
토요하시에 거주하는 엄마가 어떤 여자애의 엄마이자 어느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마사오.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닦는 마사오를 위로하는 기쿠지로. 엄마를 만난다는 기대와 기쁨에 들떠서 머나먼 길을 어렵게 찾아왔건만 눈앞의 엄마는 다른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니, 어린 마사오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 아닌가?! 그런 소년을 달래려고 온갖 기지를 발휘하는 기쿠지로를 보면서 ‘천사’를 떠올린다.
아직도 일본 사회에는 저런 순박하고 따사로운 영혼을 가진 어른이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여전히 살만한 나라일 것이고. 한 편의 영화가 전해준 따뜻함이 오래 기억될 듯하다. 올여름은 <기쿠지로의 여름>과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다.
<경북매일신문>, 2022년 7월 4일자 칼럼 ‘파안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