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24.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목요일 강론>
<루카1,57-66.80>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그와 함께 기뻐하였다.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하느님을 찬미하였다.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태어난 지 여드레 째 되는 날 할례를 받는 풍습은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통해서 약속된 하느님의 축복의 징표였습니다.
이제 그 축복의 징표는 우리에게 있어서 세례의 인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선택된 자녀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을 만나면서 결정적인 하느님 체험이 될 것입니다.
그 체험의 장이 전례 안에서 창조(빛, 물, 불)와 인간 생활(씻음, 기름 바름, 빵을 나눔) 그리고 구원의 역사(파스카 예식) 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의해 뽑힌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전례를 거행하는 모든 회중은 각기 자신의 임무에 따라 ‘전례 거행자’ 들이 됩니다. 세례 사제직은 그리스도 신비체 전체의 사제직입니다. 그러나 어떤 신자들은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기 위하여 성품성사로 서품된다. 즉, 특수 사제직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성사의 표징.
성령 강림날부터 성령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성사를 통하여 보이게 하십니다.
교회의 성사적 표징을 통하여 신자들을 성화 시키시는 활동을 하십니다.
교회의 성사들은 물질 세계와 사회 생활을 정화합니다.
그뿐 아니라, 구약의 예표와 형상들을 완성하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상징하고 실제로 현존하게 하며, 하늘의 영광을 예시하고 미리 누리게 합니다.
성사 거행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만나는 것입니다.
이 만남은 행위와 언어를 통하여 미사나 다른 성사중에 대화로 표현됩니다.
무상으로 먼저 베푸시는 하느님의 주도와 이에 대한 하느님 백성의 신앙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성사에 현존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전례에 함께 계신 것입니다. 이 점이 모든 전례의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속성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다음 자리에 옵니다. 즉, 주례자는 예수님이십니다.
말씀 전례는,
성사 거행의 필수 부분입니다.
신자들의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는, 말씀의 책(전례 성서), 말씀에 대한 존경(행렬, 향, 촛불),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독서대),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성서 봉독, 말씀 선포의 연장인 사제의 강론, 회중의 응답(환호송, 화답송, 호칭 기도, 신앙고백) 등 하느님 말씀의 표징들이 부각됩니다.
표징과 가르침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을 불러일으키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하실 뿐 아니라, 성사를 통해서 말씀으로 사랑하시는 성자께서 성취하신 성부의 업적을 현존하게 하고 나누어 주십니다.
“온 교회의 음악 전통은, 다른 예술 표현들 가운데에서 매우 뛰어난, 그 가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보고입니다. 그것은 특히 말씀이 결부된 거룩한 노래로서 성대한 전례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전례 헌장, 112항 참조). 흔히 악기로 반주되는 영감을 받은 시편의 가사와 노래는 구약의 전례 거행과 이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전통을 지속 발전시켜왔습니다. “성시와 찬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에페5,19)(콜로3,16-17 참조). “성가는 두 배의 기도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상해’, 72, 1: CCL 39, 986(PL 36, 914) 참조)
성찬의 전례는,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주시어 우리도 당신에게 우리 자신을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이른바 백지 수표를 끊어 드립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우리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다시 한 번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는 것이고, 그로써 우리도 그분에게 우리 삶을 산 제물로 바칩니다. 즉, 제대 위에 우리의 육신 정신 영혼을 제단위에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당신의 육신 정신 영혼으로 고치셔서 아버지 하느님께 다시 제물로 바치시는 것이며, 우리의 육신 정신 영혼은 예수님의 육신 정신 영혼으로 성변화되며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이 된 우리의 몸을 우리가 다시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던 우리의 삶에는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되며, 하느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당신 삶을 사실 수 있게 됩니다. 즉, 밀떡에 예수님이 계시어 성체가 되듯이,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어 그리스도의 몸, 또다른 성체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성화와 전례에 쓰이는 성화상(icon)은 주로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하느님을 성화상(聖畫象)으로 표현할 수 없었으나,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육신으로 나타나시어 사람들 가운데 사신 이후로 이제는 내가 본 하느님을 그릴 수 있습니다…..가려지지 않은 그 얼굴에서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성화상 강론’, 1, 16: PTS 17, 89, 92(PG 94, 1245와 1248))
신앙을 간결하게 고백하기 위해서, 우리는 글이나 글 아닌 것으로 변함없이 전해진 교회의 모든 전통을 보존합니다. 그 전통 중의 하나가 복음 선포와 부합되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전통입니다.
전례 거행의 모든 표징은 그리스도께 관한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와 성인들의 성화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성화상들은 그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구원에 계속 참여하는 “구름처럼 많은 증인들”(히브12,1)을 보여 주며, 우리는 특히 성사 거행 안에서 이들과 결합됩니다. 우리 신앙은 이러한 성화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마침내 “하느님의 모습을 닮도록’(로마8,29; 1요한3,2 참조) 변화된 인간과 천사들을 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완전히 하나가 된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오는 성당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려면 문지방을 넘어야 하는데, 이는 죄로 상처 입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부름 받은 새 생명의 세계로 넘어감을 상징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이 아버지의 집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아버지께서는 그 곳에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묵시21,4 참조). 그러므로 성당은 문이 활짝 열려 있어 누구든지 환영하는,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의 집이기도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이 확립될까요?
개인과 공동체 두 가지 측면에서 수련이 필요합니다.
I.공동체적인 수련 :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집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4,24) 드리는 신약의 예배는 어느 한 특정 장소에만 매이지 않습니다. 온 땅은 거룩하며, 사람의 자녀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신자들이 한 장소에 모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적인 집” 으로 세워지도록 모인 “산 돌”(1베드2,5) 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생수가 솟아 나오는 영적인 성전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성전”(2코린6,16)입니다.
이러한 성전에서 드리는 미사를 통해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 하나의 빵, 하나의 백성” 이라는 의식이 형성됩니다.
II.개인적인 수련 : 기도와 정화를 동물성, 인간성, 신성의 차원에서 하도록 하며, 이는 개인적인 수련이며 영적인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동물성으로는 생존욕구 입니다.
어려서부터 사춘기가 끝나는 20살 까지는 스스로 집을 나가서 세상에서 어떻게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는지를 배우게 해야 합니다.
극도의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에너지와 능력을 최대한 끌어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경제적 독립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성으로,
사랑 소속의 욕구, 힘 성취 욕구, 자유의 욕구 그리고 즐거움의 욕구 입니다.
이 가운데 한 가지 이상이 충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병이 들 수 있습니다.
신성으로,
동물성의 생존욕구가 천상적 영원한 생명으로,
인간성의 사랑 소속의 욕구, 힘 성취 욕구, 자유의 욕구 그리고 즐거움의 욕구를,
천상적 사랑과 섭리와 죄로부터의 자유와 영원한 기쁨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정화와 기도를 통한 완덕으로 가도록 도와주면 됩니다.
1.능동
1)묵상기도
(1)기도 : 성서를 2번~10번 읽고 눈을 감고 영화처럼 바라보되 성령께 의탁하여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만나고 대화합니다.
30초~1분 의식마저 내려놓고 무념무상으로 침묵합니다.
(2)정화: 기도 중에 만난 예수님과 생활 안에서 함께 생활합니다.
아이들은 감성이 예민합니다.
성서를 읽고 잠시 눈을 감게하고 상상하게 하면 예수님을 쉽게 만납니다. 거룩함에 대한 갈망이 아이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2)단순기도
(1)정화
지성으로 눈 앞의 사물에 예수성심 계심을 믿고,
기억을 마음으로 내려놓고서 예수성심과 일치하려는 소망을 갖고
의지로 사랑자체이신 예수성심께 기억들을 봉헌합니다.
(2)기도
30초~1분 동안 의식을 내려 놓고, 무념무상으로 머뭅니다.
상처입은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단순기도와 정화가 효과적 입니다.
2.주부적 관상기도
1)정화:
더 이상 봉헌할 기억이 없으면 몸을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내 머리는 예수님 머리,
내 심장은 예수님의 심장,
내 손은 예수님의 손,
내 발은 예수님의 발이라 여기며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2)기도 :
30초~1분 동안 의식을 내려놓고, 무념무상으로 머문 후 몸 속에 숨어있다가 올라오는 무의식을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성적인 욕망에 떨어져 고민하는 어른이나 자녀들 모두 효과적인 정화와 기도입니다,
농은 홍유한 선생님의 칠극 수련중에 몸에 해당하는 탐식과 음욕의 수련에도 좋습니다. 그 이외의 칠죄종은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예수성심께 뛰어들고, 의식마저 내려놓고 무념무상으로 예수성심 안에 머물면 효과적 입니다.
<Luke1,57-66.80>
57 When the time arrived for Elizabeth to have her child she gave birth to a son.
58 Her neighbors and relatives heard that the Lord had shown his great mercy toward her, and they rejoiced with her.
59 When they came on the eighth day to circumcise the child, they were going to call him Zechariah after his father,
60 but his mother said in reply, "No. He will be called John."
61 But they answered her, "There is no one among your relatives who has this name."
62 So they made signs, asking his father what he wished him to be called.
63 He asked for a tablet and wrote, "John is his name," and all were amazed.
64 Immediately his mouth was opened, his tongue freed, and he spoke blessing God.
65 Then fear came upon all their neighbors, and all these matters were discussed throughout the hill country of Judea.
66 All who heard these things took them to heart, saying, "What, then, will this child be?" For surely the hand of the Lord was with him.
80 The child grew and became strong in spirit, and he was in the desert until the day of his manifestation to Isr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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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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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닥치는 큰 재앙이 그들이
원래 자유롭고 하나이던 존재였다는
기억을 되살립니다.
시련의 시간은 백성들을 안팎에서
억압하는 것이 전복되고
새로운 자유의 시대가 시작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LET US DREAM 렛 어스 드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 오스틴 아이버레이/김주현 옮김,(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p.229)/
국민은
여럿이 모여
하나됨을 이룹니다.
‘백성’이란 용어, 즉 국민은 언어에 따라 대조적이면서도 함축된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에 이용되고, 당파 정치에 끊임없이 시달린 ‘백성’ 이라는 말은 전체주의나 계급투쟁의 색채를 띨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백성’ 이란 말은 포퓰리즘의 배타적인 수사에서 교묘하게 이용됩니다. 따라서 내가 ‘백성’을 어떤 뜻에서 사용하는지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백성은 국가와 같은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국가라는 실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country는 지리적인 실체이고, 국민 국가nation-state는 법적인 뼈대를 기초로 한 실체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경계와 구조는 변할(LET US DREAM 렛 어스 드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 오스틴 아이버레이/김주현 옮김,(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p.230)/
수 있습니다. 지리적 국가는 전쟁으로 영토를 빼앗기고 재건될 수 있고, 국민 국가는 법적인 위기를 겪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일부라는 감정이 상실되면, 그것은 회복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 상실은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며, 마음을 교류하는 우리 능력을 약화시킵니다.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준이 희미해지면, 하나의 백성으로 함께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는 능력도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하나의 백성이라는 감정은 형성될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투쟁과 역경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백성은 언제나 통합의 열매입니다. 마음의 교류가 전제된 것이 백성이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것, 즉 부분보다 더 큰 전체가 백성입니다. 백성 사이에도 커다란 의견 충돌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목표를 공유하며 함께 걷고, 그렇게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백성은 관행에 따라 집단으로 모이고, 조직화됩니다. 또 경험과 희망을 함께 나누고, 공통된 운명의 부름을 듣습니다.
(LET US DREAM 렛 어스 드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 오스틴 아이버레이/김주현 옮김,(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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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전례를 ‘하느님의 봉사’ 라고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례는 무엇보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봉사’를 뜻하며, 그다음으로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봉사’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거룩한 표징들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선물하였고, 그로써 우리도 아무런 조건 없이 그분에게 우리 자신을 선물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1145-1192]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0-11)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4-45)
예수님은 말씀과 성사에 현존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전례에 함께 계신 것입니다. 이 점이 모든 전례의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속성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다음 자리에 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고, 그로써 우리도 그분에게 우리 삶의 정신적 희생을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주시어 우리도 당신에게 우리 자신을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이른바 백지 수표를 끊어 드립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우리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던 우리의 삶에는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되며, 하느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당신 삶을 사실 수 있게 됩니다.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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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어떻게 거행하는가?
표징과 상징들
->1145 성사의 거행은 표징과 상징으로 짜여 있다.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교육 방법에 따라 창조 사업과 인류 문화에 근거를 두고 있는 표징과 상징의 의미는 구약의 사건들 안에서 점차적으로 드러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에서 충만하게 계시된다.
->1146 인간 세상의 표징. 인간의 삶에서 표징과 상징은 매우(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63)/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육체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물리적인 표징과 상징을 통해서 영적인 실재를 표현하고 인식한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나 몸짓, 동작을 통한 표징과 상징이 필요하다.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1147 하느님께서는 가시적 피조물을 통해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지성을 갖추고 있는 인간은 자신에게 나타나는 물질적인 우주에서 창조주의 흔적을 읽어 낸다(지혜13,1; 로마1,19-20; 사도14,17 참조). 빛과 어둠, 바람과 불, 물과 대지, 나무와 열매들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해 주며, 그분의 위대하심과 가까이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1148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이러한 피조물들은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이 표현되는 수단이며, 동시에 하느님께 경배드리는 인간의 행위를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사회 생활을 위한 표징과 상징도 마찬가지이다. 씻고, 기름 바르고, 빵을 떼고, 잔을 나누는 행위들은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며 창조주께 대한 인간의 감사를 표현할 수 있다.
->1149 인류의 주요 종교들은 때때로 종교 의식의 이러한 우주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인상적으로 보여 준다. 교회 전례는 피조물과 인간 문화의 여러 요소들을 전제로 하며, 그것들을 통합하고 성화시킨다. 이 때 교회의 전례는 그 요소들을 은총의 표징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의 표징으로 승화시킨다.
->1150 계약의 표징. 선택된 백성은 그들의 전례 생활을 특징짓는 특수한 표징과 상징들을 하느님께 받았다. 이것들은 이제(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64)/
우주 운행의 주기나 사회 활동에 대한 단순한 기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약의 표징이며, 당신 백성을 위해 행하신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의 상징이다. 구약의 이 전례적 표징들을 들어 보면, 할례, 왕과 사제에 대한 도유와 축성, 안수, 희생 제사, 그리고 특히 파스카 등이 있다. 교회는 이러한 표징들 안에서 신약의 성사들의 예표를 본다.
->1151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표징. 주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는 중에 종종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고자 피조물을 표징으로 이용하신다(루카8,10 참조). 예수님께서는 물질적인 표징이나 상징적 행위로 병을 고쳐 주시거나 당신의 설교를 부각시키신다(요한9,6; 마르7,33-35; 8,22-25 참조).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사건과 표징들, 특히 출애굽과 파스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신다(루카9,31; 22,7-20 참조). 그분 자신이 바로 이 모든 표징들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1152 성사의 표징. 성령 강림날부터 성령께서는 교회의 성사적 표징을 통하여 성화 활동을 하신다. 교회의 성사들은 물질 세계와 사회 생활의 풍부한 모든 표징과 상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화하고 수용한다. 그뿐 아니라, 구약의 예표와 형상들을 완성하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상징하고 실제로 현존하게 하며, 하늘의 영광을 예시하고 미리 누리게 한다.
언어와 행위
->1153 성사 거행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만나는 것이며, 이 만남은 행위와 언어를 통하여 대화로 표현된다. 상징적인 행위 자체가 이미 언어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좋은 땅에서 열매 맺(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65)/
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이에 대한 신앙의 응답이 이 행위들에 따라 나와야 하고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전례 행위는 하느님의 말씀이 표현하는 것을 드러낸다. 곧 무상으로 먼저 베푸시는 하느님의 주도와 하느님 백성의 신앙의 응답을 동시에 의미한다.
->1154 말씀 전례는 성사 거행의 필수 부분이다. 신자들의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는, 말씀의 책(전례 성서), 말씀에 대한 존경(행렬, 향, 촛불),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독서대),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성서 봉독, 말씀 선포의 연장인 사제의 강론, 회중의 응답(환호송, 화답송, 호칭 기도, 신앙고백) 등 하느님 말씀의 표징들이 부각되어야 한다.
->1155 표징과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전례적인 말씀과 행위는 그것들이 가리키는 바를 실현한다는 면에서도 분리될 수 없다. 성령께서는 신앙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하실 뿐 아니라, 성사를 통해서 말씀으로 사랑하시는 성자께서 성취하신 성부의 업적을 현존하게 하고 나누어 주신다.
노래와 음악
->1156 “온 교회의 음악 전통은, 다른 예술 표현들 가운데에서 매우 뛰어난, 그 가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보고이다. 그것은 특히 말씀이 결부된 거룩한 노래로서 성대한 전례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전례 헌장, 112항). 흔히 악기로 반주되는 영감을 받은 시편의 가사와 노래는 구약의 전례 거행과 이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전통을 지속 발전시켜(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66)/
왔다. “성시와 찬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에페5,19)(콜로3,16-17 참조). “성가는 두 배의 기도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상해’, 72, 1: CCL 39, 986(PL 36, 914) 참조)
->1157 노래와 음악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주요 기준에 따라 “전례 행위와 더욱 밀접히 결합되면 될수록 더더욱”(전례 헌장, 112항) 깊은 의미를 지닌 표징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 기준들은 기도의 아름다운 표현, 예정된 시간에 이루어지는 회중 전원의 일치된 참여, 전례 거행의 장엄함 등이다. 이처럼 노래와 음악은 하느님의 영광과 신자들의 성화라고 라는 전례적 언어와 행위의 궁극 목적에 이바지한다.(전례 헌장, 112항 참조)
성당에 울려 퍼지는 찬미가와 송가와 감미로운 노래들을 듣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요! 그 노래들은 제 귀로 흘러들어 제 가슴에 진리를 퍼뜨렸습니다. 저는 신심의 약동으로 고양되었으며,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눈물은 유익한 눈물이었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 9, 6, 14: CCL 27, 141(PL 32, 769-770))
->1158 이 표징(성가, 음악, 언어, 행위) 들의 조화는 전례를 거행하는 하느님 백성 고유의 풍부한 문화로 표현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욱 의미있고, 풍요로운 것이 된다(전례 헌장, 119항 참조). 그러므로 교회의 규범에 따라, “거룩한 신심 행사들에서 그리고 바로 전례 행위 안에서 신자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수 있도록, 대중 성가를 적극 장려하여야 한다.”(전례 헌장, 118항). 그렇지만 “성가에 붙여진 가사는 가톨릭 교리에 부합하여야 하며, 주로 성서와 전례의 샘에서 길(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67)/
어 올려야 한다.”(전례 헌장, 121항)
성화상
->1159 성화와 전례에 쓰이는 성화상(icon)은 주로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다.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하느님을 성화상(聖畫象)으로 표현할 수 없었으나,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성화상의 새로운 ‘경륜’이 열렸다.
전에는 육신도 형체도 갖지 않으신 하느님을 결코 그림으로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시어 사람들 가운데 사신 이후로 이제는 내가 본 하느님을 그릴 수 있습니다…..가려지지 않은 그 얼굴에서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성화상 강론’, 1, 16: PTS 17, 89, 92(PG 94, 1245와 1248))
->1160 그리스도교의 성화상은 성서가 언어로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형상으로 옮긴다. 형상과 언어는 서로를 분명하게 해준다.
신앙을 간결하게 고백하기 위해서, 우리는 글이나 글 아닌 것으로 변함없이 전해진 교회의 모든 전통을 보존한다. 그 전통 중의 하나가 복음 선포와 부합되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전통이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외향적으로가 아니라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가 보기에 이러한 그림들을 유용하고 유익한 것이다. 서로를 밝혀 주는 형상과 언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서로 그 의미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 Terminus: COD 135)
->1161 전례 거행의 모든 표징은 그리스도께 관한 것이다. 천주의 성모와 성인들의 성화상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성화상들은 그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 구원에 계속 참여하는 “구름처럼 많은 증인들”(히브12,1)을(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68)/
보여 주며, 우리는 특히 성사 거행 안에서 이들과 결합된다. 우리 신앙은 이러한 성화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마침내 “하느님의 모습을 닮도록’(로마8,29; 1요한3,2 참조) 변화된 인간과 천사들을 본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완전히 하나가 된 모습니다.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우리 교부들의 가르침과 가톨릭 교회의 전승에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확실하고도 명확하게 결정한다.(교회의 전승은 바로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의 전승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림으로 그려졌거나, 모자이크로 만들어졌거나 또는 다른 적절한 재료로 만들어진 유서 깊고 거룩한 그림들과, 귀중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상은 하느님의 성당과 제기들과 제의에, 벽과 화판에, 집안과 거리에 모셔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나, 순결하신 우리 주 천주 성모의 성화상이나 거룩한 천사들과 모든 성인들의 성화상도 마찬가지이다.(제2차 니케아 공의회, ‘성화상에 관한 정의’, DS 600)
->1162 “성화상의 아름다움과 색채는 나의 기도를 고무시킵니다. 전원 풍경이 나의 마음을 자극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처럼 성화상을 보는 것은 내 눈을 즐겁게 하는 축제와 같습니다.”(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성화상 강론’, 1, 47: PTS 17, 151(PG 94, 1268)). 성화상을 보는 일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과 전례의 찬미가와 합쳐져, 전례 거행의 표징들과 조화를 이룬다. 그리하여 전례가 기념하는 신비가 마음 속에 기억되고, 나아가 신자들의 새로운 생활로 표현된다.
III.언제 거행되는가?
전례 시기
->1163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한 해의 흐름을 통하여 지정(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69)/
된 날들에 하느님이신 자기 신랑의 구원 활동을 거룩한 기억으로 경축하는 것을 자기 임무라고 여긴다. 주간마다 주일이라고 불린 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또 일 년에 한 번 주님의 복된 수난과 함께 이 부활 축제를 가장 장엄하게 지낸다. 한 해를 주기로 하여, 강생과 성탄에서부터 승천, 성령 강림날까지, 또 복된 희망을 품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까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펼친다. 이렇게 구속의 신비들을 기억하며, 자기 주님의 풍요로운 힘과 공로가 모든 시기에 어떻게든 현존하도록 그 보고를 신자들에게 열어, 신자들이 거기에 다가가 구원의 은총으로 충만해지도록 한다.”(전례 헌장, 102항)
->1164 하느님 백성은 모세의 율법 시대부터 파스카를 기점으로 해서 정해진 날에 지내는 축일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구세주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기념하고, 그분께 감사 드리며, 그 기억을 영구히 간직하고 새로운 세대들이 여기에 맞추어 행동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이미 단 한 번에 영원히 성취된 그리스도의 파스카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이 파스카의 완성 사이에 위치한 교회의 시대에, 정해진 날에 거행되는 전례에는 그리스도 신비의 새로움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1165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념하는 기도 중에 두드러지는 단어 하나는 바로 “오늘!” 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마태6,11 참조) 성령의 초대를(히브3,7-4,11; 시편94(95),7 참조)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이 ‘오늘’ 에 들어오도록 초대하시며, 이는 바로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이끌어가시는 예수님의 파스카의 ‘시간’ 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70)/
생명이 모든 존재 위에 펼쳐졌고, 모두에게 큰 빛이 가득 찼습니다. 태양 중의 태양이신 분이 우주를 덮으시고, 새벽볕보다 먼저, 천체들보다 먼저 계시는 분, 영원하시고 무한하시며 위대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존재 위에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 길고도 영원히 저물지 않는 빛의 하루가 주어지니 그것이 바로 신비한 파스카입니다.(로마의 위(僞) 히폴리토, ‘파스카론’, 1, 1-2: Studia patristica mediolanensia 15, 230-232(PG 59, 755))
주님의 날
->1166 “교회는, 사도 전승에 따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 그 기원을 둔 파스카 신비를 여덟째 날마다 경축한다. 그 날은 당연히 주님의 날 또는 주일이라고 불린다.”(전례 헌장, 106항).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은 창조의 첫째 날을 기념하는 ‘주간 첫날’ 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대안식일의 ‘휴식’ 다음에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시편117[118],24), “저물지 않는 날” 을(비잔틴 전례, 부활 대축일 아침기도, Oda 9, 마침기도: pentekostarion(로마 1884), 11면 참조) 시작하시는 ‘여덟째 날’ 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당신 잔치에 초대하신 모든 신자들의 공동체가 부활하신 주님을 여기에서 만나게 되므로, ‘주님의 만찬’이 이 날의 중심이다.(요한21,12; 루카24,30 참조)
주님의 날,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그리스도인들의 날이 바로 우리의 날입니다. 이 때문에 이 날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날 주님께서 승리하셔서 성부께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이 날을 태양의 날(일요일) 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도 기꺼이 이 날을 태양의 날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세상의 빛이 떠올랐고, 오늘 우리를 치유하는 빛을 비추는 정의의 태양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성 예로니모, ‘부활 주일 강론’: CCL 78, 550(PL 30, 218-219)(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71)/
->1167 주일은 전례 모임을 위해 가장 좋은 날이다. 이 날 신자들은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례에 참여하고, 주님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과 영광을 기념하며, ‘우리를 다시 낳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 주신’ 하느님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전례 헌장, 106항)
(그리스도님,) 당신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부활 주일에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을 묵상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되다 주일이여, 이 날 만물의 창조가 시작되었으며…..세상이 구원되고….인류가 새롭게 되기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로다. 이 날 하늘과 땅이 기뻐하였으며, 온 우주에 빛이 가득 찼도다. 복되다 주일이여, 이 날 낙원의 문이 열려, 아담과 추방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그리고 들어가게 되엇도다.”(‘안티오키아의 시리아 성무일도’, 제6권(모술 1886), 193b면)
전례 주년
->1168 빛의 근원이신 파스카 성삼일에서 시작하여 부활의 새로운 시기는 전례 주년 전체를 찬란히 비춘다. 이 근원을 중심으로,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점차 옮겨감으로써 한 해는 전례를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전례 주년은 참으로 “주님의 은총의 해”이다(루카4,19 참조). 구원 경륜은 시간의 틀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그 구원 경륜이 예수님의 파스카와 성령의 파견으로 완성된 뒤에 역사의 종말이 ‘미리 맛봄’ 으로 실현되었고, 하느님 나라가 우리 시간 안으로 들어왔다.
->1169 그렇기 때문에 부활절은 단순히 여러 축일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마치 성체성사가 성사 중의 성사(큰 성사)인 것처럼, ‘축일 중의 축일’, ‘대축일 중의 대축일’ 이다. 성 아타나시오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72)/
동방 교회가 성주간을 “대주간” 이라고 부르듯이 이 날을 “대주일”(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 ‘축일 서간’, 1(329), 10: PG 26, 1366) 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쳐이기신 부활의 신비는 모든 것이 그분께 굴복할 때까지 그 힘찬 능력으로 우리의 낡은 시대를 새롭게 한다.
->1170 니케아 공의회(325년) 에서 모든 교회들은 춘분 후 만월(니산월 14일) 뒤에 오는 주일에 그리스도교의 부활절을 지내기로 합의했다. 니산월 14일을 계산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부활절 날짜는 항상 같지는 않다. 그래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는 다시 주님의 부활절을 같은 날에 지내기 위해 합의점을 찾고 있는 중이다.
->1171 전례 주년은 파스카라는 단 하나의 신비가 지닌 다양한 측면이 전개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 구원의 시작을 기념하고 우리에게 파스카 신비의 첫 열매를 전해 주는, 강생의 신비가 중심이 되는 축일들(주님 탄생 예고, 예수 성탄, 주님 공현) 의 주기(週期) 도 그러한다.
전례 주년의 성인 축일
->1172 “그리스도 신비의 이 연례 주기를 지내는 동안, 거룩한 교회는 당신 아드님의 구원 활동과 풀릴 수 없는 유대로 결합되어 있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마리아를 특별한 사랑으로 공경한다. 그분 안에서 교회는 구원의 뛰어난 열매를 경탄하고 찬양하며, 이를테면 그 지순한 표상 안에서 자신이 온전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열망하는 모습을 기쁨으로 바라본다.”(전례 헌장, 103항)
->1173 교회가 전례 주년 안에서 순교자들과 다른 성인들을 기념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받고 함께 영광을 받은 성인들 안에서 파스카 신비를 선포하며,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그들의 모범을 신(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73)/
자들에게 보여 주고, 그들의 공로로 하느님의 은혜를 간청하여 받는다.”(전례 헌장, 104항. 108항, 111항 참조)
시간전례(성무일도)
->1174 우리가 성찬례에서 특히 주일 집회에서 거행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인 강생과 파스카의 신비는, 시간전례 곧 “성무일도”의(전례 헌장, 제4항, 83-101항 참조) 거행을 통하여 매일의 시간에 스며들어 그 시간을 변화시킨다. “늘 기도하라.” 고(1테살5,17; 에페6,18 참조) 하는 사도의 권고에 따라 충실하게 거행하는 이 성무일도(聖務日禱) 는 “낮과 밤의 모든 흐름이 하느님 찬미를 통하여 성화되도록 이루어져 있다.”(전례 헌장, 84항). 이것은 “교회의 공적 기도”(전례 헌장, 98항) 인데, 이로써 신자들(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은 세례받은 사람들의 왕다운 사제직을 수행한다. 교회가 ‘공인한 형식으로’ 거행하는 시간전례는 “참으로 자기 신랑에게 이야기하는 신부의 목소리이며, 또한 당신 몸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기도이다.”(전례 헌장, 84항)
->1175 시간전례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기도가 되어야만 한다. 이 전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저 사제 임무를 바로 당신 교회를 통하여 수행하신다.”(전례 헌장, 83항). 모든 신자는 교회 안에서 저마다 자신의 고유한 위치와 생활의 처지에 따라 여기에 참여한다. 사제들은 사목직을 구행하는 사람으로서 기도와 말씀의 봉사에 충실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기 때문에,(전례 헌장, 86항, 96항; 사제 생활 교령, 5항 참조) 남녀 수도자들은 자기 봉헌생활의 은사에 따라,(전례 헌장, 98항 참조), 성무일도를 바치며, 모든 신자들도 가능한 한 성무일도를 바쳐야 한다. “영혼의 목자들은 주일과 대(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74)/
축일에 주요 시간경 특히 저녁기도를 성당에서 합동으로 바치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또한 평신도들도 사제들과 함께, 또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아니면 각기 혼자서 성무일도를 바치도록 권장한다.”(전례 헌장, 100항)
->1176 시간전례의 거행은 목소리와 기도하는 마음의 조화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전례와 성서 특히 시편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출 것”(전례 헌장, 90항) 을 요구한다.
->1177 여러 시간경의 ‘찬미가’ 는 시편 기도를 교회의 절기에 맞추어 하루 중의 시간이나 전례 시기나 기념하는 축일의 상징적 의미를 표현한다. 그뿐 아니라, 시간경마다 읽는 하느님 말씀(성경소구와, 이어지는 응송 또는 화답송: troparia) 과 어떤 시간경(독서기도) 에서 읽는 교부들과 영성가들의 글은 기념하는 신비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일깨우고, 시편들에 대한 이해를 도와 주며, 침묵 기도를 준비시켜 준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기도가 되게 하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는 이렇게 해서 전례 거행 안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1178 성찬례 거행의 연장인 시간전례는 하느님 백성의 여러가지 신심 행위들, 특히 성체 조배와 공경을 배제하지 않으며, 그러한 보완적인 신심 행위를 장려한다.
IV.어디에서 거행하는가?
->1179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4,24) 드리는 신약의 예배는 어느 한 특정 장소에만 매이지 않는다. 온 땅은 거룩하며, 사람의 자녀들에게 맡겨졌다. 신자들이 한 장소에 모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적인 집” 으로 세워지도록 모인 “산 돌”(1베드2,5) 이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생수가(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75)/
솟아 나오는 영적인 성전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성전”(2코린6,16)이다.
->1180 종교 자유가 방해받지 않을 때(종교 자유 선언, 4항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한 건물을 짓는다.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은 단순히 신자들이 모이는 장소일 뿐 아니라, 그 지역에 살아 있는 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여 하나가 된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교회를 의미하고 드러내 보인다.
->1181 “기도의 집은 성찬례가 거행되고, 성체가 보존되어 있으며, 신자들이 모이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제단에서 봉헌되신 우리 구세주이신 하느님 아들의 현존을 공경하며 신자들이 도움과 위로를 받는 곳이므로, 아름다워야 하고 기도와 장엄한 성사에 알맞아야 한다.”(사제 생활 교령, 5항. 전례 헌장, 122-127항 참조). 이 ‘하느님의 집’ 을 이루는 표징들이 지닌 진실과 조화는 그 곳에 계시면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전례 헌장, 7항 참조)
->1182 신약의 제단은 주님의 십자가이며(히브13,10 참조), 그 곳으로부터 파스카 신비의 성사들이 흘러 나온다. 성당의 중심인 제단 위에서 십자가의 제사가 성사의 표징을 통하여 재현된다. 제단은 하느님의 백성이 초대되는 주님의 식탁이기도 하다(‘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 259항, 표준판(바티칸 1970), 75면 참조). 동방의 일부 전례 전통에서는 제단이 무덤을 상징하기도 한다(그리스도 참으로 돌아가셨고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1183 감실은 “최대의 존경심으로 성당 안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바오로 6세, 회칙 ‘신앙의 신비’, 66항: AAS 57(1965), 771면) 설치되어야 한다. 성체를 모시는 감실의 고귀한 외양과 그 위치와 안정성은(전례 헌장, 128항 참조) 제단에서 이루어진 성체성사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는 주님께 드리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76)/
경배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도유는 성령 부여의 인호에 대한 성사적 표징이므로, 축성 성유는 전통적으로 성소의 안전한 곳에 정중하게 보관한다. 그 곳에 예비신자 성유와 병자 성유를 함께 보관할 수 있다.
->1184 주교의 좌석(cathedra) 이나 사제석은 “모임을 주재하고 기도를 지도하는 이의 직무를 드러내야 한다.”(‘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 271항, 표준판(바티칸 1970), 77면)
독서대(ambo). “하느님 말씀의 존엄성은, 성당 안에서 말씀의 선포에 도움이 되고, 말씀 전례가 진행되는 동안 신자들의 주의를 자연스럽게 끌 수 있는 장소를 요구한다.”(‘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 272항, 표준판(바티칸 1970), 77면)
->1185 하느님 백성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형성된다. 그러므로 성당에는 세례성사를 베풀기 위한 장소(세례대) 가 있어야 하며, 세례 서약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장소(세례수 보관소)가 있어야 한다.
세례 생활의 갱신은 회개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성당은 회개를 표현하고 용서를 받기에 적합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회개하는 사람들을 영접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
또한 성당은 더없이 위대한 성찬례의 기도를 연장하고 내면화하는 묵상과 침묵 기도를 바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1186 끝으로 성당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려면 문지방을 넘어야 하는데, 이는 죄로 상처 입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부름 받은 새 생명의 세계로 넘어감을 상징한다. 하느님 백성은 이 아버지의 집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아버지께서는 그 곳에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묵시21,4). 그러므로 성당은 문이 활짝 열려 있어 누구든지 환영하는,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의 집이기도 하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77)/
간추림
->1187 전례는 온전한 그리스도, 곧 머리와 몸이 하는 일이다. 우리의 대사제께서는 천상 전례 중에 천주의 성모와 사도들과 모든 성인과 이미 하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무리와 더불어 이 전례를 항상 거행하고 계신다.
->1188 전례를 거행하는 모든 회중은 각기 자신의 임무에 따라 ‘전례 거행자’ 들이 된다. 세례 사제직은 그리스도 신비체 전체의 사제직이다. 그러나 어떤 신자들은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기 위하여 성품성사로 서품된다.
->1189 전례의 거행에는 창조(빛, 물, 불)와, 인간 생활(씻음, 기름 바름, 빵을 나눔)과, 구원의 역사(파스카 예식) 등에 관계되는 표징과 상징들이 포함된다. 신앙의 세계로 들어와 성령의 힘을 받은 이러한 우주의 요소들과 인간적인 예식들과 하느님을 기념하는 행위들은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화 행위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1190 말씀 전례는 전례 거행의 필수적 부분이다. 전례 거행의 의미는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신앙의 응답으로 표현된다.
->1191 노래와 음악은 전례 행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을 선용하는 기준은 기도의 아름다운 표현, 회중의 참여와 전례 거행의 신성한 특성이 있다.
->1192 성당과 집에 있는 성화상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고 기르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사업에 관한 성화상을 통하여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 그분을 흠숭하는 것이다. 우리는 천주의 성모와 천사와 성인들의 성화상을 통하여 성화상이 나타내(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78)/
는 바로 그분들을 공경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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