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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壬戌 : 도기 14, 단기 4255, 서기 1922)년 원조에 상제님께서 명절 치성을 올리시고 세배를 받으신 다음,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 "지난 일 년간 그대들의 정성으로 도세(道勢)가 융흥(隆興)하였음을 치하하노라. 그러나 호사(好事)에는 마(魔)가 많은 법이니 금년에도 더욱 도를 위하여 힘쓰되 머지않아 '현무 음해도수(玄武 陰害度數)'가 있으리라. 그대들은 각별히 조심하여 도업(道業)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 하시니라. 임원들은 음해도수라는 말씀에 불길한 예감이 들어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였으나 도를 위하여 순명(殉命)할 것을 다짐한 임원으로서 오직 상제님만을 믿고 도령(道令)에 복종하리라는 결의를 다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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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진경에 실려있는 壬戌 년 첫 단락인데, 도주께서는 < 壬戌 = 玄武 陰害度數> 로 이야기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 玄武) '陰害'(度數) 는 아래의 음해로 보인다.
(아래)
40. 어느 날 상제께서 교운을 굳건히 하시고자 도통에 관한 말씀이 계셨도다. “지난 날에는 도통이 나지 아니 하였으므로 도가에서 도통에 힘을 기울였으나 음해를 이기지 못하여 성사를 이룩하지 못했도다. 금후에는 도통이 나므로 음해하려는 자가 도리어 해를 입으리라”고 하셨도다.
1) 壬戌 을 보는 도주님의 시각과 다른 시각이 존재하고 있어서 이 글을 올리게 되었는데 다른 시각은 아래와 같다.
(다른 시각)
손병희 1922. 5. 19. 사망 후 안운산은 1922. 9. 6 태어났는데, 손병희 사망에 맞춰 6월생이라고 주장하지만, 제가 확인해본 결과 양력 9월 6일 맞습니다.
삼초를 맡은 의암이 중심이지 육갑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즉, "삼초 끝"은 바로 "의암의 죽음"을 말합니다.
통령이라 칭한 의암의 사망 후 대인, 즉 사실상 박성구처럼 왕노릇한 안세찬을 지칭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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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를 따르는 곳에서 '임술' 에 관하여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아래 구절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에 현혹되면 <병신육갑한다> 는 소리를 들어 마땅하다.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되는지를 이야기하는 글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따라서 나도 그 이유를 이야기할 필요를 못 느낀다. 다만 <병신육갑> 을 예를 들 수 있는 간지가 '임술' 이라고는 단정지어서 이야기할 수는 있다. ......................쩝
(아래)
31. 상제께서 二十三일 오전에 여러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제 때가 바쁘니라. 너희들 가운데 임술생(壬戌生)으로서 누이나 딸이 있거든 수부(首婦)로 내세우라. 형렬이 “수부로서 저의 딸을 세우겠나이다”고 아뢰이니 말씀하시기를 “세수시키고 빤 옷으로 갈아 입혀서 데려 오라” 하셨도다. 형렬이 명하신 대로 하여 딸을 상제 앞에 데려 오니라. 상제께서 종도들로 하여금 약장을 방 한가운데 옮겨 놓게 하시고 그의 딸에게 약장을 세 번 돌고 그 옆에 서게 하고 경석에게 “대시 태조 출세제왕 장상 방백 수령 창생점고 후비소(大時太祖出世帝王將相方伯守令蒼生點考后妃所)를 쓰라 이르시니라. 경석이 받아 쓸 제 비(妃)를 비(妣)로 잘못 쓴지라. 상제께서 그 쓴 종이를 불사르고 다시 쓰게 하여 그것을 약장에 붙이게 하고 “이것이 예식이니 너희들이 증인이니라”고 말씀을 끝내고 그의 딸을 돌려 보내시니라. 상제께서 경석에게 그 글을 거둬 불사르게 하셨도다.
2) 이제 임술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태극진경을 통해 알아보면 될 듯 싶다.
(태극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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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壬戌 : 도기 14, 단기 4255, 서기 1922)년 원조에 상제님께서 명절 치성을 올리시고 세배를 받으신 다음,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 "지난 일 년간 그대들의 정성으로 도세(道勢)가 융흥(隆興)하였음을 치하하노라. 그러나 호사(好事)에는 마(魔)가 많은 법이니 금년에도 더욱 도를 위하여 힘쓰되 머지않아 '현무 음해도수(玄武 陰害度數)'가 있으리라. 그대들은 각별히 조심하여 도업(道業)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 하시니라. 임원들은 음해도수라는 말씀에 불길한 예감이 들어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였으나 도를 위하여 순명(殉命)할 것을 다짐한 임원으로서 오직 상제님만을 믿고 도령(道令)에 복종하리라는 결의를 다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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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보름 치성 후에 이상우에게 하명하시기를 "너는 강열수(姜悅秀)를 데리고 보령지방(保寧地方)으로 나가서 도가를 순방하며 포덕과 교화에 힘쓰되, 열수의 행동을 잘 살펴서 내게 보고하라." 하시니라. 열수는 진주 사람으로 지모와 학식이 있고 음양술(陰陽術)에 능하더니 입도 후에는 수완을 발휘하여 임원들의 신임을 받았으나, 그 성질이 간교(奸巧)하여 반복이 심하고 재리(財利)를 탐하는 위인이므로 상우는 상제님께서 이를 아시고 이와 같이 하명하심으로 생각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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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가 열수를 데리고 보령으로 가는 도중 군산에서 유숙할 때, 열수가 "전주에 가서 동지를 만나야 할 일이 있으니 3일간의 말미를 달라." 하므로 상우는 말리다 못하여 보내고 그곳 도가를 순방하며 열수를 기다리니라. 약속한 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음으로 의심이 나서 그곳 도인 김윤성(金潤成)을 상제님께 보내어 "열수의 행동이 수상할뿐더러 기약한 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사오니 더욱 의심스럽나이다." 하고 상고하니 "3일 내로 그가 오지 않으면 너라도 돌아오라." 하고 교시(敎示)를 내리시니라. 상우는 다시 기다렸으나 오지 않음으로 24일 통사동으로 돌아오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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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에 상제님께서 우수절후치성(雨水節候致誠)을 입절 시각인 술(戌)시 초에 올리시니 참례원은 도장 내외분을 위시하여 선덕 부인, 숭정부인과 이정두 권영수 등 임원과 김정우(金正雨) 등 도인 몇 명이고 다른 임원들은 지방 순회에 나갔으므로 도합 10명에 불과하니라. 이날 초저녁에 숭정부인께서 치성에 모실 법수(法水)를 길어 오기 위하여 재실 앞 샘에 나가시니 주변 소나무 숲속에서 인기척이 났으며 형언할 수 없는 살기를 느끼시니라. 치성 후에 일동이 음복(飮福)을 마치자 이상하게 졸음이 심하여 모두 각자의 침실에서 곤히 잠들었는데 자정경에 20여 명의 폭도(暴徒)로부터 습격을 당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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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들은 저마다 복면을 하고 곤봉을 들었는데 10여 명은 담 밖에서 재실을 포위하고, 10여 명은 대문 안으로 들어와서 횃불로 온 집안을 밝히며 "꼼짝하면 모두 죽인다." 하고 고함치니라. 그중 몇 명은 문간방으로 들어가 정두 정우 등 자던 사람들을 안마당으로 끌어내어 밧줄로 묶어 놓고, 몇 명은 재실 큰방으로 침입하여 "도주 여기 있다." 하고 외치면서 주무시는 도장을 상제님으로 잘못 알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내리치니 그 자리에서 혼절하시니라. 또 몇 명은 건넌방으로 침입하여 선덕 부인과 숭정부인을 안마당으로 끌어내어 밧줄로 묶고 머리채를 함께 잡아매므로 숭정부인께서 "이놈들아, 강도라면 돈이나 빼앗아 가지, 사람은 왜 해치느냐?" 하고 외치면서 대항하시다가 그들의 곤봉에 맞아 한동안 실신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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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상제님께서는 미리 실내의 중요 물품을 가방에 넣어 놓고 공부하시다가 폭도들이 들이닥치자, 가방 하나만을 들고 대청에서 가족과 도인들의 안위(安危)를 살피시고 계셨으나, 폭도들은 바로 그 앞에서도 알아보지 못하니라. 마침 정두가 알아보고 밧줄을 풀며 일어나서 "도주님, 빨리 피하소서." 하며 상제님을 호위하려고 대청으로 뛰어들 즈음, 폭도들이 비로소 알아보고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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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대문 쪽으로 출어하심을 본 정두가 급히 뒤따랐으나 이내 보이지 않으시고, 폭도들만 좌우에서 달려들므로 날래게 피하여 황새마을까지 뛰어가서 이 사실을 서산공께 알리니라. 숭덕부인께서도 폭도들이 상제님을 추격함을 보시고 뒤따랐으나 보이지 않아 찾지 못하시고 언덕 너머 아랫동네로 뛰어가시며 "영모재에 강도 들었다." 하고 외치시며 황새마을 본댁으로 돌아가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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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들은 상제님께서 나가심을 보고 추격할 때, 대문까지는 보였으나 그 후로는 볼 수 없었으며 담 밖을 포위하던 10여 명의 폭도들도 모두 보지 못하니라. 이에 다시 들어와서 공부실을 샅샅이 뒤져 상제님께서 미리 문갑 속에 남겨 놓으신 약간의 돈과 상좌에 모셨던 증산 상제님의 성체를 모시고 도망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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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폭도들이 도망간 후에 환어하셔서 선덕 부인과 함께 공부실을 살피시니 성체와 돈은 없어졌고, 증산 상제님의 좌수성골(左手聖骨)만 남아 있으므로 "천지도래일장중(天地都來一掌中)"의 뜻을 되새기시며 정중히 수습하여 간수하시니 선덕 부인께서는 비통하여 우시니라. 상제님께서 안마당에는 상한 사람이 없음을 살피신 다음, 큰방으로 임어하시니 도장께서 그때까지 혼절 중이시니라. 상제님께서 일으키시니 그제야 깨어나셨으나 오른 손목에 심한 골절상을 입으셨으므로 "소자로 인하여 이렇게 혹독한 변을 당하셨으니 불효막급(不孝莫及) 이옵나이다." 하시며 애통하여 눈물을 흘리시니라. 날이 밝는 즉시 원평 병원으로 모셔서 입원, 치료받게 하셨으나 달포가 지나도 완치되지 않으셔서, 다시 전주 도립병원으로 옮겨 모시고 치료에 정성을 다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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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산공께서는 정두로부터 급보를 받으시고 황새마을 청년 도인 수십 명을 동원해 시급히 통사동에 이르셨으나, 폭도들이 도망한 후이므로 교대로 파수 보게 하시다가 날이 밝은 후에 돌려보내시니라. 도장께서는 입원 중에도 아우들과 함께 상제님의 신변을 염려하셔서 당분간 거처를 옮기시도록 간곡히 권유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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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숙부들의 권유에 따라 황새마을로 거동하셔서 며칠 동안을 본댁과 조송제(趙松濟)의 집으로 옮겨가며 유어(留御) 하시는데, 폭도들은 매일 2.3명씩 작당하여 형사로 가장하고 통사동과 황새마을을 번갈아 뒤를 밟으니라. 하루는 그들이 상제님께서 본댁에 행재하심을 탐지(探知)하고 들어가면 송제의 집에, 또 송제의 집으로 찾아가면 본댁에 행재하셔서 그들은 집요하게 추적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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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상우는 군산에서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김정우를 만나니, 그는 열수의 친구이고 도인으로 행세하며 절후치성에 참례한 자로서 상우에게 "열수가 김제에서 기다린다" 하여 함께 가니라. 열수가 상우를 보자 "너로 인하여 대사를 망쳤으니 너를 죽이겠다." 하며 포악하게 대들므로 상우도 약속을 어긴 사실을 들어 대항하니 싸움이 벌어지니라. 이때 정우가 중간에서 "지난 일은 막론하고 앞일이나 함께 잘하자." 하며 서로 화해시키므로 상우는 그들의 음모를 탐지할 속셈으로 거짓 화해하고 그들의 심복이 되기로 약속하니, 그들은 그제야 상우에게 음모의 경위와 계략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여 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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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에 의하면 열수는 그동안 모교단의 임원이던 문남룡(文南龍)의 꾀임에 빠져 남룡의 주동으로 비밀리에 폭도들을 규합하여, 상제님께서 모신 증산 상제님의 성체와 둔궤를 비롯한 도장기금을 강탈하기로 모의하니라. 이에 열수는 도중(道中)의 정보를 제공하고 탈취한 돈은 남룡과 반으로 나누기로 하되, 거사일은 우수절로 정하고 미리 정우를 치성참례원으로 가장, 잠입시켜 전수에 몽혼약(曚昏藥)을 몰래 타는 등 치밀한 음모를 추진하니라. 그런데 상우가 이 사실을 상제님께 서신으로 보고하여 상제님께서 둔궤와 기금을 미리 숨기셨으므로 이번에는 증산 상제님의 성체와 도장영건기금의 극히 적은 액수 밖에는 강탈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오직 상우의 탓이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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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들은 상우에게 "지금도 계속 증산 상제님의 좌수성골을 위시하여 기금 전부와 둔궤를 강탈하고자 심복들을 형사로 가장시켜 사방으로 도주(道主)를 찾는 중이나, 이제는 네가 통사동으로 돌아가 도주의 소재를 탐지하여 알려 주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비밀보장을 위하여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하고 위협하니라. 상우가 둔궤는 조주일이 가져간 사실을 말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고 더욱 협박하므로, 부득이 거짓 동의하고 열수와 함께 25일 통사동으로 돌아오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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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번에 폭도들이 사용한 곤봉은 인가목(人架木)으로 만든 것인데, 그 나무는 본래 증산 상제님께서 재세시에 태인 도창현을 순행하시다가 단장을 길가에 꽂으시며 "이 단장목은 인가목이라. 이 나무가 살아나서 후일 곤봉감이 되면 반드시 인명피해가 있으리라." 하시더니 그 후에 과연 그 인가목이 살아나서 크게 자라자, 모교단에서는 "인명피해가 있으리라." 하신 말씀을 "필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잘못 믿고 더욱 번식시켜 많은 곤봉을 만들어 보관하던 것이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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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와 열수가 돌아오매 통사동에서는 이러한 사정도 모르고 반기면서 강도사건을 설명하려 하므로 상우가 은밀히 그 내막을 알려 상제님의 행방을 극비에 붙이도록 단속하니라. 열수는 가족들을 거짓으로 위안하더니 며칠 뒤에 상우에게 약간의 쓸 돈을 주며 약속이행을 다짐받고 다시 김제로 돌아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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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가 황새마을로 가서 상제님께 배알하고 제가 불민(不敏)하여 수난 당하심을 사죄하니 말씀하시기를 "도수임을 어찌하랴? 도시 천운이나 성사(成事)가 재인(在人)임도 잊지 말라." 하시니라. 상우가 다시 열수의 배신 경위와 음모 계략을 상세히 보고하고 당분간 이어하시도록 상신하니 서산공도 동조하시므로 상제님께서는 수년 전에 만주에서 대전으로 이사한 빙택(聘宅)으로 이어(移御)하셔서 공부하기로 결정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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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에도 형사를 가장한 자들이 다시 통사동 재실로 들어와서 방바닥과 천장 주방 광의 구석구석과 모든 그릇을 뒤져보고 마당 곳곳을 파헤치더니 가족들의 몸수색까지 하고자 하니라. 참다 못하신 숭정부인께서 "너희들이 정말 형사라면 강도 잡을 생각은 않고, 도리어 강도 당한 집에 와서 이리 행패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고 호되게 꾸짖으시니 그제야 그들이 돌아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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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숭정부인께서는 상제님께서 맡기신 기금을 넣은 전대(錢袋)를 허리에 차셨는데, 마루 앞에 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는 동안 전대끈이 풀어져서 아래로 흘러내려 발등에 떨어지므로 이를 발로 마루 밑에 밀어 넣으셨다가 그들이 돌아간 후에 다시 거두시며 "도적의 무리가 어찌 감히 하늘의 뜻을 거역하리오?" 하시니 듣는 이가 모두 숙연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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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대전으로 행행하실 때 시종과 안내자도 없이 홀로 큰길을 버리고 좁은 길로 거동하시더니 산길은 험하고 날이 저문 데다 갈증마저 심하시니라.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이 지치셔서 길가에 앉아 쉬시는데 뜻밖에 쉬기 전에는 보지 못하신 인가가 옆에 있으므로 주인을 찾으시매 약초 캐는 일을 생업으로 한다는 노인 내외가 처음 뵙는 상제님께 과분하리만큼 융숭히 대접하니라. 하룻밤을 편히 쉬시며 위안을 받으셨으므로 사례금을 주셨으나 끝내 받지 않음으로 "반시지반(半匙之飯)도 은공이어늘 이 또한 도심(道心)이로다." 하시고 다시 출어하셔서 무사히 대전 빙택에 임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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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에 상제님께서 빙택에서 공부하시다가 집 앞에 거동하시자 그때까지 추적하던 열수 등 폭도들에게 발각되셔서 그들의 소굴인 대전 본동(本洞) 중앙여관으로 임어하게 되시니라. 그들은 상제님께 "좌수성골과 둔궤 그리고 도장기금을 내놓지 않으면 죽인다." 하고 협박하므로 "둔궤는 조주일이 가져갔고 성골과 금품은 너희들이 모두 강탈하고서 무슨 적반하장(賊反荷杖)이냐?" 하시며 대응하시니 언쟁이 벌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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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쟁으로 여관이 시끄럽게 되고, 그 내용이 수상하므로 여관주인이 경찰에 고발하여 긴급 출동한 형사대에 의하여 상제님께서도 그들 일당 10여 명과 함께 대전경찰서로 연행되시니라. 조사 결과 상제님께서는 피해자이심이 판명되어 빙택으로 환어하시고 폭도들은 김제경찰서의 조회에서 강도 · 상해 등 죄목으로 수배중임이 탄로나서 구속, 기소되어 실형을 언도받았는데 열수와 정우는 대전형무소에서 옥사하고, 남룡 등 몇 명은 7년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였으나 모두 패가망신(敗家亡身)하니, 이로써 폭도들의 만행은 근절되었으며 도중에서는 이를 "현무 · 음해도수(玄武陰害度數)"라 일컬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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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빙택에서는 상제님께서 말씀도 없이 출어하신 후 소식이 없음으로 심히 궁금하여 황새마을 본댁으로 사람을 보내니, 본댁에서는 그의 말을 듣고 당황하니라. 마침 이때 열수가 상우에게 보낸 서신을 보니 "지금 도주와 함께 대전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으니 속히 와서 수습하여 달라." 하는 내용인지라, 비로소 사유를 알고 당일로 서산공과 상우가 대전으로 가니 상제님께서는 이미 환어하신 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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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며칠 후 정읍경찰서에서 대전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신변 보호를 위하여 파송한 요원의 호위를 받으시며 위풍당당하게 황새마을로 환어하시니라. 이때 황새마을에서는 폭도들의 만행을 우려하여 달포 전에 통사동 공부처를 비우고 가족들이 모두 합솔하여 있던 중이며 동네에서는 축하연을 베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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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3월 중순에 새로 공부처를 물색하시더니 한양 도인 박돌영(朴乭榮)의 주선으로 마포 도화동(桃花洞)에 전셋집 한 채를 얻어 공부설석하시니라. 먼저 도장 내외분과 숭정부인을 이사하게 하시고 며칠 후에 시종들을 거느리고 행행하셔서 백일공부에 임어하시며 포덕을 독려하시니 한양의 명사 다수가 입도하여 포덕에 힘썼으며 그중에서도 이기창(李基昌) 노병선(盧炳先) 김윤진(金允珍) 등의 공적이 현저하게 많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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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포덕이 날로 늘고 도인들의 내왕이 빈번하여 도화동 공부처가 협소하므로 가족들은 그대로 두시고 윤 5월 그믐에 돈암동(敦岩洞)에 큰 집을 얻어 설석하셔서 제2차 백일공부에 들어가시니라. 이 기간에 낮에는 공부실에서 수도하시고, 밤에는 후원에 새로 축조한 단 위에서 도수를 보시니라. 단 가운데 높이 세운 깃대에는 태극 팔괘의 기를 달고 동서남북 사방에 각 12개의 작은 깃대를 세워서 세계 각국의 만국기를 하나씩 단 다음, 중앙과 사방의 깃대를 서로 노끈으로 잡아매게 하심은 안면도 단도수에서와 같이 하시니라. 단에 임어하실 때마다 안개가 일어 아무도 단 위의 상제님과 세워 놓은 깃대를 볼 수 없었으며, 당시 경도(京都 : 서울)의 사람들 사이에 난세(亂世)에 대도인(大道人)이 출현하셨다는 소문이 자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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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추석 며칠 전에 상제님께서 상우에게 하명하시기를 "지난 정월에 내가 대전으로 갈 때 후대하여 준 산중의 노부부를 찾아가서 은공을 사례하라." 하시며 그 위치를 자세히 하교하시므로 찾아갔으나 그곳에는 집도 노부부도 없으니라. 헛걸음하고 돌아와서 결과를 보고하니 미소하시며 "그 일은 마음으로 전하였으니 그로써 되었느니라. 다만 너희는 삼재(三才) 오행(五行) 우주만물의 무한한 은덕 속에 사는 고마움을 알고 보은(報恩)을 명심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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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에 다시 적선동(積善洞)에 큰 집을 얻어 제3차 백일공부를 하시고 (이하 계해년 이야기가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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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wDArpOdys8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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