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하재열은 내 평글에 이와 같은 자신의 의견을 보내왔다.
평자의 읽기와 작가의 의도가 다를 수도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나는 작가의 개인사로 읽었고, 작가는 바깥 세상을 바라보면서 쓴 글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의 글을 보자.
“제 글은 여러 소재를 다루었지만, 지금껏 가장 관심을 둔 지향점은 불안한 세상과 불의의 세상에 대한 말 걸기입니다.
혼자의 말 걸기로 세상이 바뀔리야 없지만, 독백이 될지언정, 그래도 작가로서 현실 사회 문제에 참여문학이라는 깃발의 말을 내지르고자 했습니다.
'권두언 부분과 작품 목련은 달을 이고'도 이러한 지향점으로 쓴 글입니다.
권두언의 밥그릇은 제 개인의 밥그릇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의 밥그릇을 뜻하려 했습니다.
제가 공직자로서 현직 때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은 늘 억눌려 왔습니다. 글은 쓰고 싶은데 공직 윤리와 사회문제 사이에서 흔들리며 쓰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바른 말이라며 말을 걸다가 손해만 보았지요. 밥그릇 놓인 자리의 말을 잘 할 줄 몰랐던 일입니다. 저를 걱정하며 바른 말 좀 하지말라고 했던 분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적당히 달라붙는 말이라도 했다면 승진도 ,더 좋은 자리도 맡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세상이 버겁다는 것은 제 개인의 삶뿐이 아니고 시대가 처한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작가로서의 걱정과 염려입니다. 이 상황에 돌팔매 같은 말로 대들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적극적으로 대들지는 못하지만 소극적이 아닌 세상을 관조하며 끓는 가슴이라도 내보이고 싶었습니다.
제가 퇴직 후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재직 때 억눌렸던 심사를 펼치고 싶은 것이 큰 이유였습니다.
'목련은 달을 이고'도 그냥 봄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말 바람'은 제 개인을 폄훼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작품을 쓸 당시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복의 미사일 도발과 북핵 위기가 높아지고 말이 험악해질 때입니다. 국내의 정치권도 이념에 따라
말의 공방이 어지러울 때였습니다. 말 바람은 이러한 북쪽의 말, 남쪽 정치의 말을 뜻합니다. 목련으로 봄을 이야기 했지만, 봄에 가려진 우리 삶의 위기를 말하려 한 작품입니다.
'세종대왕님 가라사대', '휴전선의 봄, 그 고무줄 놀이'와 같은 몇 작품에서도 현실 비판적인 입장을 썼습니다만 짧은 글 솜씨로 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학장님 제 의견은 저의 의견으로만 참고하시고 글은 그대로 하셔도 동의 합니다.”
그가 2011년에 쓴 초기 작품을 읽으면서, 그의 수필세계로 여행해보기로 하자.
대게의 노래
하재열
강구로 바람을 쐬러 갔다. 바다가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탁 트인 수평선을 바라볼 때의 안온함, 외경의 두근거림, 영원의 품속 같은 것이 그리울 때가 있다.
더 가까운 바다를 두고도 구태여 강구로 간 까닭은 대게란 놈이 있어서이다. 갈매기 떼가 배 위에 너울거리는 포구에 바람은 아직 차지만 아지랑이가 엷은 춤을 춘다. 부둣가의 조붓한 도로 양쪽으로 식당이 선을 뵈듯 줄을 섰다. 색색으로 내걸린 간판이 정분 낼 봄 색시처럼 치장을 했다. 같은 게 요리이겠건만 저마다 다른 맛이라도 내는 별난 게라도 있는 양 손님 끌기에 법석이다.
활처첨 휘어들어간 포구 안쪽 부두의 위판장이 북적댄다. 마침 배에서 갓 내려놓은 게가 팔려나고 있었다. 어부가 한 주머니 채워 떠나버린 게의 저세상 갈 간이역이다. 경매꾼들의 기이한 손놀림과 걸쭉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실려 장마당을 달군다. 토해내듯 쏟는 말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니 숫제 외국어다. 열병하는 병정처럼 바닥에 눕혀 놓은 게들이 게거품을 물고 바둥댄다. 포박당한 채 치켜든 집게발은 결사 항전의 몸짓이다. 막 입항한 배에서도 꾸무럭대는 게를 가득 담은 상자들이 연신 쏟아져 내린다.
영덕대게란 이름값에 끌려 먼 길에도 찾기는 하지만, 포구를 떠날 때는 뭔가 아쉽다. 게 맛의 뒤끝이 뿌듯한데도 먹성이 차지를 않아 마음 한쪽이 빈다. 제대로 골라 먹지 못한 것 같은 미련에 끌린다. 또한 값에 비해 후딱 먹어 치워버리는 짧은 시간의 입맛이 허하고, 도회 사람의 찌든 마음을 다독일 바닷소리가 방 안의 사람 소리에 묻혀버리는 것이 더 아쉽다.
초입에서 소란스럽던 번듯한 식당을 지나쳤다. 바다도 내다보며 여유로울 수 있을 테지만, 낚시를 놓은 것 같은 말짓이 미덥지 못하다. 바닷물로 질척이는 왁자지껄한 부둣가 난전이 좋다. 좌판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구경하다 흥정하는 재미는 더 좋다. 계급장처럼 주름살 깊게 새긴 아주머니가 좋은 놈이라며 집어 든 게를 상자에 내던지며 뱉는 거친 숨소리와 막말들이 내 무딘 가슴을 뛰게 한다. 온통 꿈틀거리는 생명의 떨림이다. 대게 상자를 식당으로 끌고 가는 일꾼 총각 뒤를 사람들 어깨에 부딪히면서 입맛 다시며 따라가는 것도 살맛나게 한다.
난전의 길 안쪽으로 허술하지만 때 묻은 속정 같은 식당들이 덕지덕지 붙었다. 호객하듯 문 앞마다 내걸린 솥에서는 하얀 김이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온다. 사람이 게의 숨을 거두는 곳이요, 게가 바다를 그리워하며 하직하는 곳이다. 낯선 말투와 게살 냄새가 뒤섞이며 방 안을 휘감는다. 단숨에 삶겨져 상에 올라온 게를 해체하며 가위질해주는 식당 아줌마의 손놀림이 야만스럽게 날렵하다. 귀이개 같은 작은 쇠스랑으로 게다리를 게걸스럽게 파 제치며 속살을 꺼내고 있는 나도 아내도 그렇다. 제법 먹은 만큼의 양이 될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껍데기만 수북이 쌓인다. 머리통에 붙은 점박이 눈알만 살아 있는 듯 형해의 몰골로 째려본다.
먹고 나면 뭔가 아쉽고 허접한 것은 바로 이 생경한 거슬림을 털어버리지 못해서일까? 먹는 멋을 쫓아내는 수술실 도구와 같은 가위나 쇠스랑도 그렇지만, 순간의 맛으로 그냥 배만 채우는 멋쩍고 단순한 조리법 때문이기도 하리라. 상을 둘러싸고 앉아 쌓이는 껍데기를 곁눈질하며 게살을 파고, 남의 상에 쌓인 껍데기를 힐끗거리기도 하는 모습이 야릇하다. 웬지 시간을 거슬러 까마득한 원시 때 사람들의 환영을 보는 것 같다.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에워싸고 돌칼로 찍어대며 배를 채우는 거무튀튀한 얼굴을 떠올린다. 여기가 그 자리였을까?
부둣가 좌판의 퍼덕대는 소리에 다시 빨려든다. 비릿한 갯바람이 파도를 타며 밀려온다. 생명을 잉태한 바다, 그 원초의 냄새를 내 몸속 시원의 감각이 아득한 고향으로 받아들인 건지 푸근하다. 바다는 원래 야만의 세상이었다. 햇살에, 바람에, 천둥소리에, 파도 소리에 사람은 벌거벗은 채였다. 거칠었던 본성이 긴 세월 문화라는 그릇에, 사람답게 라는 말의 그물에 길던 까닭으로 후벼파는 쇠스랑 짓을 거북스럽게 느낀다는 생각을 한다. 경매장에는 그 많던 게들이 다 팔려나가고 떨어져 나간 게 다리 몇 개가 습한 바닥에 나뒹군다.
약삭빠른 장사꾼으로 시끄럽다. 씨앗 대게를 잡아 오거나 대게도 아닌 걸 들여와 제 욕심만 차리니 대게의 이름값을 깎아 먹는다고 야단들이다. 하지만 어쩌랴. 파도를 헤쳐 가며 사는 일이 원래 그렇다면야. 그래도 포구의 바다는 뭇 생을 품어 살리며 여전히 출렁대리라. 게살 파먹는 거슬림을 감추는 멋과 맛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 태초에 바다로부터 천생으로 떠안은 대게의 맛 밑천을 알지 못하는 내 아둔함인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더한 즐거움과 추억을 담아 갈 것 아니겠는가.
한 마리 거대한 대게 조형물이 포구의 다리 위에 걸터앉았다. 홀로 외롭다. 내 본래의 몫도 모르고 너희 인간이 웬 먹는 타령이냐며 부라리는 몸짓이다. 갑자기 봄 하늘이 꿈처럼 몽롱해진다. 게의 혼령들인가. 식탁 위에서 형형하게 날 노려보았던 게 눈이 무리로 번득이면 덮쳐온다. 맛 값을 내놓으란다. 조형물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게 육신의 껍질로 하늘 높이 탑을 쌓아 이 시대 게걸스러운 신원시인에게 잡아먹힌 넋을 달랜다. 방마다 쇠스랑 들고 웃어 젖히던 얼굴들도 만들어 세운다. 옛날 패총을 만들던 사람들의 거무튀튀한 알몸의 그 원시 얼굴로.
차라리, 차라리 여기서는 문명의 족쇄에 붙잡힌 입맛과 체면을 던지고 야만의 게 맛에 신들려 하는 것이 본래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쇠스랑에 땟물 맨손이면 어쩌랴. 하여, 강구는 원시인의 구역이다. 바다 밑 대게의 아득한 노래가 울리는 곳이다.
뱃전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를 타고 강구의 춘심이 춤을 춘다. 바다는 야생의 터이고, 포구의 부두엔 치열한 삶이 요동친다. 겉 세상의 덫에 걸린 내 일상을 내던지고 파도의 거친 숨결 더듬는다. 이것이 좋아 나는 바다를 찾는다.
(2011. 3)
60대로 접어들 때 쯤에 쓴 수필이다. 일반적으로 수필작가들이 초기에 쓴 작품의 소재는 거의가 유년 시절, 고향 그리고 어머니이다. 하재열의 수필 ‘대게의 노래’는 소재가 전혀 다르다. 유년 시절도, 고향도, 어머니도 등장하지 않는 이 수필을 예문으로 가져온 이유라면, 이 수필에서 하재열 수필의 전형적인 양식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현장을 사진 찍듯이 묘사한다. 너무 세세히 묘사함으로 독자들은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소설에서는 흔하게 표현하는 기법이다. 하재열의 수필에서 곧잘 나타나는 구조이고, 이런 문장 형식이 그의 초기 수필에서 곧잘 나타난다.
하재열의 수필세계를 말하면서 그의 수필 ‘대게 이야기’를 말하는 이유는, 이 작품에서 그가 다룬 수필의 소재며, 구성하는 요소들이 그의 수필에서 일관된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간으로는 현재의 자기이다. 자기의 주변이 소재가 된다. 소재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틈틈이 자신의 사유 세계를 펼친다. ‘대게 이야기’를 분석해 보자.
영덕 강구의 바닷가로 나들이를 떠난 이유라면, 무엇보다도 대게라는 먹거리를 찾아간다. 바다가 주는 심리적인 느낌을 이야기하였지만, 그건 형식적인 이야기일 뿐이라는 느낌이다. 수필이 진행하면서 그러한 내용은 더 이상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게가 식당의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마치 영사기로 찍듯이 파노라마처럼 펼친다. 바닷가에 난전처럼 펼쳐진 식당 이야기며------.
바닷가 좌판에서 대게가 퍼덕대는 소리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좌판에서 게를 파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사유세계는 펼쳐지지 않는다. 그들의 강인한 삶을 찬미하지도 않고, 밑바닥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강구 바닷가의 풍광을 사진으로 찍어서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하는 형식의 글이다. 하재열 수필의 이런 형식은 이후의 수필에도 거의 변화가 없다.
그가 펼치는 사유세계라면, 대게에게서 살을 발라먹는 일이 마치 원시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굳이 그의 사유세계를 짚어본다면 원시인처럼 대게의 살을 발가먹는 행위야말로 우리의 본래의 얼굴이 아닌가, 하는 정도이다. 그는 가족과 함께 떠난 나들이에서, 확 트인 바다 앞에서 왜 원시인을 떠올렸을까. 도시를 탈출하고 싶은 바람을 원시인을 비유하여 표현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말하자면, 하재열의 수필에는 사회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글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비판을 하든, 긍정을 하든 그건 독자의 몫이라는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도시 생활에서 피로감을 표현하였다. 이 또한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임으로 독자의 공감도 얻으리라.
이 수필은 하재열의 수필 중에는 초기 수필이다. 그 이후의 수필에도 이런 기조가 이어진다. 이런 것을 그의 수필세계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그는 자신의 수필에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을 기본처럼 지키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비판적인 내용보다는 그냥 관찰자의 입장에서 표현하였다.
하재열의 수필에는 감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회고조의 수필 대신에, 오늘의 내 주변에서 소재를 구하는 것이 많다. 지금 소개하려는 수필도 이런 종류의 수필이다. 이 작품도 그의 초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산책하면서, 자기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을 소재로 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펼쳐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글의 소재를 구할 때는 무언가 머릿속을 스쳐가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작가는 경험한 사실을 보여줄 뿐 작가가 직접 의미내용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보여주는 것만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수필세계를 펼쳐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