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잎의 女子 1 / 오규원 (1941~2007)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한 잎의 女子 2 / 오규원 (1941~2007)
-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 않는
전차다.
나는 사랑했네, 한 女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女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女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女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女子, 라면이 먹고 싶다는 女子,
꿀빵이 먹고 싶다는 女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女子, 손발이 찬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女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女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女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女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女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女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女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女子,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女子, 더러 멍청해지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女子.
한 잎의 女子 3 / 오규원 (1941~2007)
-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 같은 女子, 그레뉼 같은
女子, 모카골드 같은 女子, 창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가 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女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女子, 줄거리가 복잡한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 잎 클로버 같은
女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女子.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女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女子, 바람에는 눕는 女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女子. 창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서
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女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주지 않는 女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女子인
女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 1978년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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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있어 여자는 신비스러운 존재입니다.
화자는 남자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로서의 여자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으로서의 여자, 질서의 축으로서의 여자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알쏭달쏭한 ‘언어’의 정의를
각각의 시 마지막 연에 부제로 대롱대롱 내다 걸었습니다.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다.
-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 않는 전차다.
-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하지만 여전히 애매모호함은 가시지 않습니다.
여자의 신비성을 언어가 가지는 은유와 막막함에 견주어 표현
하고자 한 셈이지요. 한 두 마디로 쉽게 정의되지 않는 ‘여자’와
은유의 세계인 ‘언어’를 병치시켜 놓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3편의 시가 각각 독립된 시로 읽히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앞 뒤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푸레나무는 나무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그 물이, 물빛이
푸르스름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세 편의 시에는
모두 마지막 연에 물푸레나무 혹은 나뭇잎이 등장합니다.
제목으로 정한 ‘한 잎의 여자’와 은밀하게 내통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 물푸레나무에 매달린 쬐그만 한 잎을 반복하여 화자가
사랑했던 여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지극히 단순한
언어인 ‘女子’를 반복함으로써 묘한 운율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물푸레나무를 푸르게 물들이고 있는 '쬐그만' 잎처럼
대롱대롱 언어의 처마 끝에 매달려 뭇 남자들의 가슴을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있는 겁니다. 쉽게 정의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여자,
남자에게 가장 멀고도 가까운 존재로서의 여자가 저리 푸르게
매달려 있는 것이지요.
/ 양현근 시인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오규원
2007. 1. 21 세브란스병원 병실에서
시인이 흐려져가는 의식을 잡고 사랑하는 제자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마지막으로 남긴 詩입니다.
시인은 의식이 남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시를 썼다.
폐질환으로 타계한 오규원 시인(1941~2007)이 병상에서
제목이 없는 4행시 한 편을 남겼다.
오 시인이 가르쳤던 서울예대 문창과 출신 문인들은 4일
“지난 1월21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이던 선생님이
손톱으로 마지막 시를 쓰셨다”고 전했다. 당시 의식을 잃기
직전상태였던 오 시인은 간병 중이던 제자 시인 이원씨의
손바닥을 찾았다. 그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손톱으로 제자의
손바닥에 시를 한 자 한 자 새겼다. “선생님은 처음 3행을 썼다가
한참 시간을 들인 뒤 마지막 한 행을 썼다”고 제자는 전했다.
스승의 빈소에 모인 제자들은 “마지막 시구는 2연의 첫 행일지도
모르지만, 4행을 한 편의 시로 편집하자”고 뜻을 모았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고 쓴 시인의 장례식은 5일 오후 2시
강화도 전등사에서 수목장으로 진행된다. 제자인 이창기 시인은
“선생님께서 의식을 잃기 전까지 유골을 화장해달라고만
말씀하셨는데, 수목장은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유족들이 결정한
것”이라며 “선생님의 시가 마치 사후의 일까지 내다보신 것
같다”고 말했다.
오규원 시인은 한국 시단에서 언어 탐구의 거목이었다.
초기시에서부터 ‘추상의 나뭇가지에 살고 있는 언어’(시 ‘몇 개의
현상’ 부분)를 탐구했던 그는 결국 나무 아래 묻혀 영면을 취한다.
그는 ‘사랑의 기교’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등의 시집과
‘현실과 극기’ 등의 시론집을 통해 시적 언어의 투명성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서 독특한 시세계를 일궜다.
또한 서울예대 문창과 교수(1982~2002)를 지내면서 수많은
제자 문인들을 키웠다. 80년대 이후 시단에 진출한 양선희
박형준 윤희상 장석남 함민복 이병률씨 등 젊은 시인들을 지도
했을 뿐 아니라 소설가 신경숙 하성란 조경란 강인숙 천운영씨
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규원 시인은 말년에 만성폐쇄성
폐질환이란 희귀병을 앓으면서 큰 고통을 겪었다.
반딧불이가 살 정도로 공기가 맑은 경기도 양평의 전원주택에
칩거하던 그는 지난 2005년 9번째이자 마지막 개인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를 펴내면서 ‘날(生)이미지
시’를 제창했다. “존재의 현상 그 자체를 언어화 하자는 것”
이라고 ‘날 이미지 시’론을 설명했던 그는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사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자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