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列國志 제62회
중이(重耳)가 성을 나간 지 반나절이 지난 후에야 적후(翟侯)는 비로소 그 사실을 알고, 노자를 주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쫓아가지 못했다.
流落夷邦十二年 타국에서 유랑한 지 십이 년
困龍伏蟄未升天 곤경에 처한 용은 엎드린 채 승천하지 못했는데
豆箕何事相煎急 콩대는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볶아대는가?
道路於今又播遷 또 다시 머나먼 길을 떠나야만 하네.
[삼국지에 보면, 위나라 문제 조비(조조의 아들)가 아우 조식을 꺼려하여 일곱 걸음 동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처형하겠다고 하자, 조식이 즉석에서 이런 시를 지었다.
煮豆燃豆萁 콩을 볶으려 콩대로 불을 지피니
豆在釜中泣 콩은 가마솥에서 우는구나.
本是同根生 본래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건만
相煎何太急 어찌 이리 급하게도 볶아대는가?
여기서 ‘자두연기(煮豆燃萁)’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는데, 콩을 볶기 위해 콩대를 태운다는 뜻으로, 곧 형제가 서로 싸우는 것을 이르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고 조식이 지은 이 시를 ‘칠보시(七步詩)’라고 한다.]
한편, 진혜공(晉惠公)은 원래 발제(勃鞮)에게 사흘 내로 출발하라고 했는데, 발제는 어떻게 그 다음 날 바로 출발했을까? 발제는 원래 일개 내시로서 오로지 부지런함으로써 군주의 총애를 얻은 자였다. 예전에 헌공(獻公)이 그를 포성으로 보내 중이를 잡아오라고 했었는데, 중이는 놓치고 겨우 중이의 소맷자락만 잘라 가지고 돌아왔었다.
그래서 발제는 필시 중이가 자신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번에 혜공의 명을 받자, 중이를 죽이면 혜공에게 공을 세우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근심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얼른 역사 몇 명을 규합하여 빨리 적나라로 달려가, 중이가 방비하기 전에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연로한 국구가 두 번이나 소식을 전해 음모를 누설하여, 발제가 적나라에 당도하여 중이의 소식을 탐문했을 때에는 중이는 이미 멀리 떠난 뒤였다. 적후는 중이를 위해 모든 관문과 나루터에 명을 내려, 왕래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검문하게 하였다.
발제는 晉나라에서는 군주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시였지만, 지금 중이를 죽이러 와서는 자객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철저한 검문에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발제는 적나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와 혜공에게 복명하였다. 혜공도 달리 방법이 없어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
한편, 공자 중이는 제나라로 가기 위해 먼저 위나라를 거쳐야만 했다.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멀리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중이가 적나라 국경을 벗어나 가는 도중의 곤궁함과 고생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 위나라 국경에 당도하니, 관문을 지키는 관리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물었다. 조쇠(趙衰)가 말했다.
“우리 주군은 晉나라 공자 중이인데, 난을 피하여 외국으로 나왔습니다. 이제 제나라로 가고자 상국(上國)의 길을 빌리려고 합니다.”
관리는 관문을 열고 중이 일행을 일단 받아들인 다음, 衛侯에게 보고하였다.
상경(上卿) 영속(寧速)이 중이를 도성으로 맞아들이자고 하자, 위문공(衛文公)이 말했다.
[제45회에, 석기자(石祁子)와 영속은 위나라의 국정을 맡고 있었는데, 둘 다 현신(賢臣)이라고 하였다. 위문공(훼)은 위혜공(衛惠公)의 이복형인 석(碩)이 선강(宣姜)과 정을 통해 낳은 아들이다. 혜공의 아들 의공(懿公)이 학만 좋아하다가 북적의 침략을 받고 죽은 후, 석기자와 영속이 제환공의 도움을 받아 문공을 군위에 옹립하였다. 제46회에, 제환공이 초구에 성을 쌓아 주고 위나라의 도성으로 삼게 했었다.]
“과인이 초구(楚丘) 땅에 나라를 세운 이래로 晉나라의 힘을 조금도 빌린 적이 없었소. 衛와 晉이 비록 동성(同姓)이라고는 하나, 아직 동맹을 맺지는 않았소. 게다가 망명하는 사람을 어찌 쉽게 통과시켜 줄 수 있겠소? 만약 그들을 맞이한다면 반드시 연회도 열고 재물도 주어야 할 테니 비용이 많이 들 것이오. 차라리 내쫓는 것이 나을 것이오.”
위문공은 수문장에게 분부하여, 중이를 도성으로 들이지 말라고 하였다.
중이 일행은 성 바깥으로 돌아서 걸어갔다. 위주(魏犨)와 전힐(顛頡)이 말했다.
“衛侯 훼(燬)가 무례하니, 공자께서는 성문 앞에 가서 그를 꾸짖으십시오.”
[위주와 전힐은 용맹한 장수들이다. 제54회에, 중이가 적나라로 망명했을 때, 위주는 적나라의 원조를 받아 晉나라 도성으로 쳐들어가자고 주장했었다.]
조쇠가 말했다.
“교룡(蛟龍)도 세력을 잃으면 지렁이와 다름없습니다. 공자께서는 참으십시오. 쓸데없이 타인의 무례를 꾸짖을 필요 없습니다.”
위주와 전힐이 다시 말했다.
“저들이 이미 주인의 예를 다하지 않았으니, 마을을 약탈하여 조석 끼니나마 해결합시다. 저들도 우리를 나무라지는 못할 것입니다.”
중이가 말했다.
“약탈하는 자를 곧 도적이라 합니다. 내 차라리 굶주림을 참을지언정 어찌 도적이 하는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중이 일행은 아침밥도 먹지 못한 채 배고픔을 참고서 계속 걸어갔다. 정오가 지나서 오록(五鹿)이란 곳에 당도했는데, 농부들이 밭두렁 위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중이는 호언(狐偃)에게, 그들에게 가서 먹을 것을 구해 보라고 하였다.
한 농부가 호언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시는 객들이십니까?”
호언이 말했다.
“우리는 晉나라의 객으로, 저 수레 위에 앉아 있는 분이 우리 주군입니다. 갈 길은 먼데 양식이 없으니, 밥 한 그릇만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농부가 웃으며 말했다.
“당당한 남자들이 스스로 벌어먹지 않고 어찌 우리더러 밥을 달라고 하시오? 우리는 시골 농부들이라 배불리 먹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어찌 남에게 줄 남는 밥이 있겠소?”
“그러면 밥그릇이라도 하나 주십시오.”
농부가 흙 한 덩어리를 주며 희롱하여 말했다.
“이 흙으로 그릇을 만드시오!”
위주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촌놈들이 어찌 감히 우리를 모욕하느냐!”
위주는 농부의 밥그릇을 빼앗아 땅에 내던져 깨뜨려 버렸다. 중이 역시 크게 노하여 채찍을 들어 그들을 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호언이 급히 말리며 말했다.
“밥을 얻기는 쉬우나 흙을 얻기는 어려우니, 토지는 곧 나라의 기반입니다. 하늘이 농부들의 손을 빌어 공자에게 토지를 주시려 함이니, 이는 공자께서 나라를 얻을 징조입니다. 어찌 화를 내십니까? 공자께서는 수레에서 내려 저들에게 절을 하고 흙을 받으십시오.”
중이는 호언의 말에 따라 수레에서 내려 농부에게 절하고 흙을 받았다. 농부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모여 비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로다!”
후인이 시를 읊었다.
土地應為國本基 토지는 마땅히 나라의 기반이라
皇天假手慰艱危 황천이 농부의 손을 빌어 어려움을 위로했네.
高明子犯窺先兆 고명한 자범(子犯; 호언)은 그 조짐을 미리 알았건만
田野愚民反笑癡 어리석은 농부들은 도리어 어리석다 비웃었네.
[중이는 과연 오록 땅을 얻게 될까?]
중이 일행은 다시 10여 리를 갔는데, 이제 너무 배가 고파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중이는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호모(狐毛)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호모가 말했다.
“자여(子餘; 조쇠)가 호찬(壺餐)을 가지고 뒤따라오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호찬’은 물에 만 밥이다.]
위주가 말했다.
“비록 호찬이 있다 하더라도 자여 한 사람이 먹기에도 부족한데, 남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사리를 뜯어서 삶아 먹었지만, 중이는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때 개자추(介子推)가 고깃국 한 그릇을 바쳤다. 중이는 맛있게 먹고 나서 물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고기를 얻을 수 있었소?”
개자추가 말했다.
“그것은 신의 허벅지살입니다. 신이 듣건대, ‘효자는 자기 몸을 죽여 부모를 봉양하고, 충신은 자기 몸을 죽여 주군을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공자께서 굶고 계시므로, 신이 허벅지살을 베어 공자의 배를 채워 드린 것입니다.”
[엽기적이다! 삼국사기에, 신라 경덕왕 때 향득(向德)이란 사람은, 흉년이 들어 그 아버지가 거의 굶어 죽게 되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봉양했다고 하였다. 삼국지에, 유비가 형주에서 난을 피해 산중으로 도망쳤는데, 어떤 사냥꾼이 자신의 아내를 죽여 고깃국을 끓여 유비를 대접한 얘기도 있다. 옛날사람들은 부모나 군주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강조했기 때문에, 이런 얘기들이 전해진다.]
중이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망명객이 그대에게 너무 신세를 지는구려. 장차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개자추가 말했다.
“신은 다만 공자께서 하루빨리 晉나라로 돌아가셔서 신들의 고굉지의(股肱之義)가 성취되도록 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신이 어찌 보답을 바라겠습니까?”
[‘고굉(股肱)’은 ‘팔다리’이니, 팔다리처럼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하를 ‘고굉지신(股肱之臣)’이라 한다. ‘고굉지의’는 고굉지신의 의리이다.]
염선(髯仙)이 시를 지어 찬탄하였다.
孝子重歸全 효자는 제 몸을 보전하는 것이 중하나
虧體謂親辱 몸을 상하게 함은 부모를 욕되게 함이라.
嗟嗟介子推 아아, 개자추여!
割股充君腹 허벅지살을 베어 주군의 배를 채웠구나.
委質稱股肱 제 몸을 맡겼으니 고굉(股肱)이라 칭하고
腹心同禍福 몸과 마음으로 화복(禍福)을 같이 했도다.
豈不念親遺 어찌 부모가 물려준 몸을 생각지 않았으랴만
忠孝難兼局 충과 효를 동시에 이루기가 어려웠도다.
彼哉私身家 제 몸만을 아낄 줄 아는 자들아
何以食君祿 어떻게 주군의 녹을 먹을 수 있느냐?
잠시 뒤에 조쇠가 도착했다. 여러 사람들이 왜 늦었느냐고 묻자, 조쇠가 대답했다.
“가시에 찔려 발을 다쳐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소.”
조쇠는 대바구니 속에서 호찬을 꺼내어 중이에게 바쳤다. 중이가 말했다.
“자여도 배가 고플 텐데, 왜 먹지 않았소?”
“아무리 배가 고프다 한들, 어찌 감히 주군을 저버리고 혼자 먹을 수 있겠습니까?”
호모가 위주를 보고 놀려댔다.
“이 호찬이 만약 그대 손에 있었더라면, 벌써 뱃속에 들어가 소화되었을 거요.”
위주는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중이는 호찬을 조쇠에게 주었다. 조쇠는 거기다 물을 타서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이를 본 중이는 탄복하였다.
이처럼 중이 일행은 구걸을 하면서 때로는 얻어먹고 때로는 굶으면서 마침내 제나라에 도착했다.
제환공(齊桓公)은 평소에 중이의 어진 명성을 들어왔기 때문에, 중이가 관문에 당도한 것을 알고 즉시 사람을 보내 중이 일행을 교외에서 영접하여 공관에 들게 하였다. 환공은 연회를 베풀어 중이 일행을 환대하였다. 연회 중에 환공이 중이에게 물었다.
“공자는 가족을 데리고 왔소?”
중이가 대답했다.
“망명객이 제 한 몸도 지키기 어려운데, 어찌 가족을 데리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과인은 하룻밤만 혼자 자도 마치 1년이나 되는 듯하오. 공자는 타향으로 떠다니는 몸이라 시중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 테니, 과인이 공자를 위해 한번 생각해 보겠소.”
환공은 친족 중에서 미녀를 골라 중이의 시중을 들게 하고, 수레 20승을 내주어 중이 일행은 모두 수레를 타고 다닐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곡식과 고기를 매일 공급해 주었다. 중이는 크게 기뻐하며 찬탄하였다.
“齊侯가 현사(賢士)를 좋아하고 선비를 예우한다는 말을 들어 왔는데, 이제 보니 그것이 참말이로다. 그러니 그가 패업을 성취한 것도 마땅한 일이로다!”
그때가 주양왕(周襄王) 8년, 제환공 42년이었다.
제환공은 지난해부터 포숙아(鮑叔牙)에게 정사를 맡기고, 관중(管仲)의 유언에 따라 수초(豎刁)·역아(易牙)·개방(開方)을 쫓아냈다.
[제58회에, 관중은 역아·수초·개방을 쫓아내라고 환공에게 유언하였다. 제59회에, 포숙아는 역아·수초·개방을 쫓아내는 조건으로 정사를 맡았다.]
그 후로 환공은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고 밤엔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다. 농담을 하는 일도 없었고, 웃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장위희(長衛姬)가 환공에게 말했다.
[장위희는 현재 제환공의 첫째 부인이다.]
“주군께서는 수초 등을 쫓아내신 이후로, 정사도 돌보지 않으시고 용안(龍顔)도 날마다 수척해지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좌우에 주군의 마음을 헤아리는 신하가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왜 그들을 다시 부르지 않으십니까?”
환공이 말했다.
“과인도 그 세 사람을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쫓아낸 자들을 어찌 다시 불러들이겠소? 포숙아의 뜻을 거스를까 염려되오.”
“포숙아라고 해서 좌우에 시중드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주군께서는 연로하신데, 어찌 스스로 이렇게 고통을 겪고 계십니까? 단지 요리를 할 사람이 필요하다 하시고, 먼저 역아를 부르십시오. 그리하면 개방과 수초도 자연히 따라서 들어올 것입니다.”
환공은 그 말에 따라 역아를 불러들여 요리를 하게 하였다. 그러자 포숙아가 간했다.
“주군께서는 중부(仲父)의 유언을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그들을 다시 불러들이십니까?”
환공이 말했다.
“이 세 사람은 과인에게 필요한 사람들이며, 결코 나라에 해를 끼칠 사람들은 아니오. 중부의 말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소.”
마침내 환공은 포숙아의 말을 듣지 않고 수초와 개방까지 불러들여 복직시켰다. 포숙아는 울분이 치밀어 마침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이로부터 제나라는 허물어지지 시작했다.
첫댓글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것을 제환공은
왜 몰랐던가.
진심으로 내마음을 전달하연
고쳐지는것을 ㅋ
내용이 가끔 마음이 찡 하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