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로 발전하라는 마을 - 성남1리 일신동
현재의 日新洞이란 지명에는 사연이 있다. 원래는 성남리가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면서 1988년에 8개 마을로 분리되었다. 이 마을은 후청마을에서 分里되었다. 분리 되면서 마을 이름을 정하게 되었는데 장터거리, 시장통이라는 지금까지의 이름을 버리고 ‘성남리 일번지’라는 뜻인 城一洞으로 주민들은 하자고 했으나 읍사무소에서는 특정인의 이름이 생각난다 하여 무시하였다. 그리고는 주민들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한다.
日新洞의 의미는 날로 발전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 마을의 입향조나 입향연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현재의 마을회관은 分里되면서 주민들의 모금으로 1988년에 건립되었다. 이 마을의 구역은 무안신협과 파크랜드부터 서울약국 매일시장을 거쳐 불무제 다리까지이다. 매일시장은 하천이 복개되어 이루어졌는데 낙지골목처럼 하천이 있었던 곳을 경계로 한쪽은 성남1리이고 맞은편은 성남2리에 해당된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5일 시장을 포함한 주조장도 있었고 방앗간 도살장까지 있었다. 하천 건너에 있었던 도살장은 현재의 동남호텔로 옮겼다가 청계면 서호리로 이전했으나 현재는 운영을 않고 있다. 이 마을에 있는 기관으로는 목포수협무안지소만 있을 뿐이다.
이 마을 주변에는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무안읍성이 있었다. 이 성은 조선조 세종12년(1430년)에 현재의 성남리 성동리를 경계로 쌓은 것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둘레가 473보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2700척, 높이 15척으로 성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약사사 앞의 성동제에서 흐르는 물과 만창 상사지 등에서 내려오는 물이 개천을 이루어 성을 싸고 돌면서 자연스레 해자(垓字 - 성 둘레에 도랑처럼 판 못)를 이뤘다고 한다.
읍성에는 남문, 서문, 동문 등 세 개의 문이 있었으며 성 안에 시장이 형성되어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성을 해체하면서 성안의 토지가 개인들에게 매도되었고 광-목간 도로공사저수지 신축 등에도 성의 석축을 이용하여 길을 닦아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는 성내아파트 뒤와 성남리 2구 이양호씨댁 뒤편을 비롯하여 곳곳에 성축이 남아있을 뿐이다. 남문이 목포철물점 주변에 있었는데 ‘남밖’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후청동을 말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남밖은 후청동과 분리된 일신동을 말해야 한다.
1770년대부터 문헌에 보이는 무안의 시장은 무안邑城 內인 현재 무안읍사무소 앞에서 형성되어 일제강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해방이후 1948년 무렵에 현재의 불무제 아래인 시장통으로 옮긴 것이다. 시장통은 조선시대 읍성의 해자였던 하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되었으며 주민들은 장터거리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수용을 못하자 1981년 현재의 와동 장터로 옮겼다. 하지만 이 장터도 시장의 현대화란 미명하에 곧 옮길 예정이다.
국도 1호선이 지나가
마을 옆으로 흘렀던 하천은 성동제와 만창 치가리들 상사지 등 무안읍 각지에서 나오는 물이 모여 흐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물의 흐름이 逆水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형상이다. 몇 년 전에 이 하천이 복개되어 현재는 주차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천이 복개되기 전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세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불무교(佛舞橋)다. 1985년 11월에 확장 개축하였다. 수문통에는 고기가 많아 주변사람들이 혜택을 보았다.
이 마을에는 쪼빡샘(금영노래방 주변. 바가지로 물을 떠서 마실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근래까지 남아있었으나 1985년 소도읍 가꾸기 때 없어졌다. 이 샘은 깨끗하고 맛이 좋았으며 물의 양이 많아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었다.
해방 이후 외지 사람들이 무안에 오면 농협군지부의 자리에 있었던 월성식당의 삶은 돼지고기를 좋아하였는데 이 우물을 가지고 요리하였기 때문에 맛이 좋았다고 한다. 이 물은 서울약국 뒤 엘지 전자 옆으로 조그만 개울을 이루며 불무제 하천까지 흘렀는데 지금은 복개가 되어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성동저수지에서 흐르는 물이 버스터미널 뒤 낙지골목을 지나 현재 매일시장 터를 거쳐서 불무교까지 개울을 이루고 흘렀는데 1970년대에 복개하여 도로와 상가로 활용하고 있다.
예전에 국도 1호선이 마을을 지나갔다. 현재 군청 앞 - 단골마트 - 현대오토바이 - 덕신이발관 - 읍사무소 - 서울약국 - 옥천식당 - 무안교회 길로 이어지는 길이다. 현재 서울약국 앞 농약가게가 있는 자리가 버스정류장이었으며 당시에는 전남여객 한 회사의 버스만 다녔다.
이 마을에는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된 당산나무가 있었다. 하천 가에 있는 이 나무의 둘레는 285센티미터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전에 군청의 동의를 얻어 이 나무를 베어버렸다. 고사되어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무제 근처의 하천을 아랫내라 하였다. 웃내는 성동제 위의 구시래 부근을 말한다. 웃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있는 사람들이었고 아랫내는 서민들이 이용하였다. 예전의 시장통에 해당되는 영역이 모두 군유지이다. 현재도 군유지에 해당되는데 주민들은 재산권 행사 등을 위해 분할 및 이전을 요구하고 있으나 군에서는 아직까지 대답이 없다고 한다.
마을 재산이 많은 부자 마을 - 성남2리 후청
후청 마을은 무안읍 성남2리에 있는 마을이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읍내면 候廳里로 1912년의 자료부터는 외읍면 帿廳里로 나온다. 마을 이름에 대한 유래는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지만 候廳이란 한자의 풀이를 본다면 성 밖에서 손님들을 접대했던 관청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일제강점기 때의 한자인 帿廳을 통해서 보면 예전에 병기고가 있었던 곳이어서 붙인 지명이 아닌가 추정해본다.
무안읍성이 축조되면서 ‘남문밖’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 월두회집, 삼성전자가 있는 자리에 석장승 4개, 대추나무로 만들어진 목장승 2개 그리고 5-6개의 선정비가 길 가에 세워져 있어서 장승백이라고 불렀다. 또한 장승백이 길옆에는 두 칸짜리의 동각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가기도 했다.
장승백이에 세워져 있던 두 쌍의 석장승(동방대장군, 서방대장군으로 음각되어 있음) 중 한 쌍은 무안군청 앞에 버려져 있다가 현재는 체육공원의 충혼탑 앞으로 옮겨 우리 지역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혼들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쌍에 대해서는 존재 여부에 대하여 의견이 엇갈린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는 원래 석장승이 한 쌍밖에 없었다고 하나 1986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한 ‘무안의 문화유적’이란 책에는 이곳에 있던 두 쌍의 석장승 중 한 쌍이 서울 정동에 있는 미국대사관저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재가 지역 주민의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의 문화재가 서울로 밀반출 되어 부자집의 정원에 조형물로 서 있는 약사사의 5층탑과 약사사 뒤 남산공원에 있었던 거북이 상은 이미 우리 기억 속에 사라진지가 오래 되었다.
이 마을에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당산제가 있다.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에게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지역공동체 의례로 당산굿·동제(洞祭)·당제(堂祭)라고도 한다. 제일(祭日)은 매년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이루어지는데 제관은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산가(産家)·상가(喪家) 등의 출입을 금하고, 궂은 음식을 피하며 목욕재계를 하는 등 근신한다. 또한 제장(祭場) 주변은 청결히 하고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놓아 부정을 막는다. 이러한 제사에 사용되었던 각종 제구(祭具)들은 창고를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었다. 당제를 모시는 곳은 예전 재향군인회 사무실이 있었던 곳의 뒤에 있는 공터이다. 이곳에는 사무실 주변으로 당산나무 세 그루가 서 있는데 뒤에 있는 두 그루의 당목 아래에서 지낸다.
제를 모시는 당묘 자리에는 두 군데의 제단이 있는데 큰 제단에서는 당제의 원래 목적인 마을의 평안과 화합을 위해서이고 다른 작은 무덤의 제단은 후손이 없는 할머니를 위한 제사이다. 이 할머니의 무덤은 특별한 사연을 안고 있다. 할머니는 평생을 홀로 살았는데 죽으면서 유언으로 자신의 전 재산이었던 밭 세마지기를 마을에 기증하면서 뒷일을 부탁하여 그 유지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밭과 묘 터가 무안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학교부지로 편입돼 보상을 받고 옮겨서 현재는 중사지 앞의 산에 모셔졌다.
1972년 2월까지는 꾸준히 당제가 지속되었는데 이후 지내지 못했었다. 그러자 마을의 젊은이들이 이유 없이 변을 당하자 마을 어른들 사이에서 당제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 여기고 다시 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재산이 많은 부자마을이다.
장승제도 지냈었다. 장승제는 당산제를 지낸 후 마을 입구 장승백이의 돌장승에게 가 간소한 제물을 차려 놓고 부녀자들은 합장을 하거나, 양손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무녀나 당골 애비도 축원을 하고 마을 사람들은 수시로 액맥이, 질병퇴치를 위해서 밤에 무녀를 불러다가 떡시루, 참기름 불, 밥, 국 한 그릇, 사과, 배, 명태, 폐백천을 차리고 북과 꽹과리로 거릿제를 겸해 소지(燒紙)를 올리고 동서남북 사방에 제물을 던지며 축원을 했다 한다.
이러한 마을의 행사를 위하여 주민들의 계미(契米)를 모아 만든 향약계인 후청계가 조선 영조17년(1741년)에 조직되었다. 원래 이 계에서 발행된 계첩에는 당제 지낼 때 읽는 규약만이 아니라 축문과 진설도 등이 그려져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현재 남아 있는 계책은 겉표지가 ‘목포부외읍면후청동계안’으로 대정 원년(191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원본과는 많이 다르다. 여기에는 제1장 총칙, 제2장 계원이 준수할 사항, 제3장 임원 직무, 제4장 출자 저금 식리 및 지출 방법, 제5장 총회와 임시회 까지만 나와 있고 뒷장은 없었다.
당제를 지내는 곳에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마을종이 수십 년 역사를 묵묵히 바라보며 세워져 있다. 구리로 만들어진 종은 요즘처럼 마이크 시설이 있기 전 마을의 대소사를 알리는 일종의 통신시설이었다. 얼마 전까지 종을 보호하는 양철 덮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마을에는 공동자산으로 많은 땅과 복지회관 등이 있다. 또한 주민들을 위한 상여(喪輿)가 백제고등학교 진입로 좌측에 범산골의 한 창고에 보존되어 있다. 각각 2층과 3층으로 이루어진 상여인데 3층 상여는 당제를 지내는 곳에 세워진 불망비의 주인인 정준회씨가 기증한 것으로 마을에서 마을기금 조성에 유익하게 쓰였다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관리가 허술하여 보존 상태가 아주 좋지 않다.
후청마을의 역사에 세 명의 걸출한 인물이 나타난다. 한 명은 정일영씨다.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을 소유했던 사람으로 아버지가 정준회다. 이 집은 나중에 김두천씨에게로 넘어가 베 짜는 공장으로 운영되었다. 서울에서 시계방 운영으로 큰돈을 벌었던 김두천씨는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무안으로 내려와서 베 짜는 공장을 운영하며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낙선 후유증으로 197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던 공장은 망하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이후 이 집은 몽탄 사람 최병영씨에게로 넘어갔다.
두 번째 사람은 양길영이다. 이 사람은 현재 시민약국이 있는 자리에서부터 서울시계포가 자리한 곳까지 땅을 소유했는데 그곳에서 제재소를 운영하였던 사람이다. 부자였고 씀씀이가 좋았다고 한다.
세 번째는 조약방 조규종씨다. 정일영씨 집 옆에서 조그맣게 한약방을 운영했으나 매일 들어오는 현금은 500만원이 훨씬 넘었다고 한다. 조규종씨는 원래 경찰이었다. 경찰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운영하였는데 잘 되자 바로 그만 두었다. 할아버지가 한의원을 운영했던 적이 있어서 한약 조제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산부인과 전문으로 애기를 낳지 못하는 전국의 어머니들이 찾아왔다. 얼마나 사람들이 몰렸던지 며칠을 기다려야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규종씨는 초기에는 무척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돈을 벌자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등 지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이 마을에는 새마을금고와 사찰인 무상사가 들어있다. 또한 각종 가게와 모텔 식당 한의원 내과 학원 등이 들어서 있어 무안읍에서 가장 번화한 마을이기도 하다. 일부 낙지골목도 영역에 속한다. 1931년에 세워진 ‘정준회시혜불망비’가 후청광장에 세워져 있다.
萬戶가 들어서 번창하게 될 마을 - 성남3리 萬昌
만창은 성남3리에 속하며 앞으로 萬戶가 들어설 정도로 번창하게 될 것이라는 지명 유래를 갖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유래지에는 ‘남문 밖 남쪽에 있는 마을로 선조 때 만호창이 있었던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만호창이 있었다는 소리를 처음 듣는다고 했다. 또한 기록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마을에는 원래 신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살고 있지 않다.
이 마을의 입향조라 할 수 있는 姓氏는 200여 년 전에 자리 잡은 현풍곽씨, 나주오씨, 광산김씨 등 세 성씨이다. 마을유래지에는 300여 년 전에 이 세 성씨들이 자리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주민들이 문화의 연속성을 갖고 살기 시작한 것은 200여년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지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이 마을이 보이지 않고 1912년의 자료에 외읍면 萬昌리, 1917년엔 외읍면 성남리 萬昌리로 나온다. 이 마을에는 백제고 무안고 초당대 미륵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광주 - 목포 간 국도 1호선이 마을 가운데로 지나가고 있어 동강 난 마을의 형태이다. 마을 아래로는 예전의 국도 1호선 도로가 남아 있다.
이 마을의 경계는 전신전화국 앞길에서 범산골 그리고 아뜨리움 아파트까지이며 무안고와 무안교회를 포함하여 물맞이고랑까지 연결된다. 미륵사 백제고 초당대 초당요양병원 등이 영역에 속한다. 마을이 넓다보니 열두 고랑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마을 경로당이 두 군데나 있다. 마을 이장은 세대수가 많다보니 주민들의 의견을 취합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 한다.
현재의 만창 마을은 지명의 유래처럼 만호가 들어설 정도로 번창하고 있다. 우선 1979년도에 실시된 취락구조사업으로 주거환경을 개선하였다. 또한 백제고와 초당대가 들어서면서 젊음이 넘치는 마을을 만들더니 인재의 요람인 무안고가 얼마 전에 들어서면서 명실상부한 학사촌이 되었다. 예전에는 별다른 소득원이 없어 가정경제에 대단히 어려움을 겪었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학교들이 들어서면서 마을 상권이 살아나고 학생들을 수용할 방이 부족하자 양파저장고로 사용하던 창고마저 방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젊은 학생들이 많다보니 부작용도 많다. 특히 남녀 간의 애정표현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대는 대학생들의 행위는 주민들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그럼에도 학사촌의 형성은 마을 전체에 활기를 넣어주고 있다.
초당대학교가 들어 선 자리를 동학골이라 하는데 초당대학 관계자들은 童學골이라 한다. 즉 아이들이 학문을 배울 수 있는 배움의 골짜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東學골로 써야 한다. 왜냐하면 이곳은 19세기 말 이 땅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던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을 뒤흔들 때 무안의 동학군들이 훈련을 하고 죽창을 만들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 마을의 노인들도 대체로 동학군들이 활동했던 골짜기로 알고 있었다. 초당대에서 미륵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서낭골(성황골)이라 한다.
백제고등학교 옆에 있는 골짜기가 범산골이다. 호랑이 모양을 한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런데 예전 범바위 주변에 숲이 없을 때는 이 마을의 개들이 남아나지 못했다고 한다. 개들이 살지 못하고 죽거나 도망 가 버린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바위 주변에 숲이 들어서고 마을에서 범바위가 보이지 않자 그때부터 마을의 개들이 잘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맞이 고랑이 있어
미륵사는 1472년에 세워진 비구니 사찰이다. 하지만 500여년 동안 돌보는 이 없이 버려져 있다가 근래에 들어서 다시 중창의 기회를 맞은 사찰이기도 하다. 이 사찰에는 우리 지역에서는 드물게 비로자나불상이 있었던 곳이다. 주민들은 이 불상을 남악사로 가져갔다고 한다. 단지 좌대만 미륵사에 있다고 한다.
미륵사 아래에는 물맞이 고랑이라 부르는 선랑폭포가 있다. 예전에는 여름철이 되면 이곳 물맞이고랑에 물 맞으러 가는 아낙네들로 마을 앞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물맞이고랑의 물을 맞으면 관절염을 비롯한 신경통에 특효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농번기를 보낸 영광 함평 등 곳곳의 아녀자들이 물 맞으러 오기 때문이다. 특히 물을 맞을 때는 부정을 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어서 물 맞는 날에 뱀을 보거나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으며 아무리 멀리서 왔다 하더라도 물을 맞지 않고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이 고랑은 연징산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들어낸 폭포다. 무안읍의 상수원인 성암제 위의 계곡을 선랑계곡이라고 하는데 장엄한 물줄기 뿐 아니라 선랑계곡과 가까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량이 많아 주민들이 물맞이를 하면서 선랑폭포 대신 물맞이골로 불려지고 있다. 예전에 이곳은 기도처로도 이용 되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죽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무안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는 마을이다. 1919년 3월 19일 무안 장날 이 마을 강지석(만창리)을 포함한 김한근(상사지) 박용규(성내리) 등 24명이 중심이 되어 남산 조산등(현재 충혼탑이 있는 자리)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준비한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누어주며 장터로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했던 것이다. 만창리 독립만세 운동 또는 무안만세운동으로도 부르는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전남에서 최초로 일어난 운동이기도 하며 불의에 맞서 싸웠던 동학의 정신을 계승한 독립운동이었다.
마을에 대아농산이 있다. 70년대 후반 이 마을 주민이 마늘 파동을 이용해 부를 축적해 세운 저장창고이다. 한때는 이 창고가 주민들에게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마을 앞 무안고등학교 아래를 치가리라고 한다. 지금은 없지만 예전에 폭이 5미터 정도에 상당한 길이의 방죽이 있었다. 주민들은 그곳에서 조개도 잡고 우렁과 고기를 잡기도 했다. ‘치’는 ‘키’의 사투리로 곡식을 고르는 기구이다. 방죽의 모습이 마치 치를 닮은 것처럼 보인다 해서 치가리라 했다.
붉은 고개를 안고 있는 마을 - 성남4리 큰골[大谷]
대곡 마을은 우데미 아래데미로 이루어졌으며 농업기술센타와 실버요양원을 경계로 청천교까지 영역에 해당된다. 무안읍에서 초당대를 지나 목포 방면으로 1㎞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행정구역명은 무안읍 성남4리 대곡이다. 원래는 하나의 마을이었는데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이 지나가면서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졌다.
마을의 원래 이름은 승달산의 맥을 이어 연징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에 큰 마을이 있다 해서 大洞이라 했었다. 그런데 소화 2년(1927년)에 일본인들이 청계에서 무안으로 들어오는 다리 공사를 할 때 일본식 이름인 대곡(大谷)으로 바꿔 부른 것이 지금의 마을 이름이 되었다. 문헌으로 봐도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1912년의 자료에는 외읍면 大洞內리, 1917년의 자료에도 외읍면 大洞內리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지금과 같이 무안읍 성남리 대곡으로 나온다.
마을의 형성은 마을유래지에는 ‘김해김씨 金贊植이 임진왜란 때 이 지역으로 피란을 와,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주민들은 기록과는 다르게 이씨, 김씨, 송씨 등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하는데 누가 먼저 들어왔는지 언제 들어왔는지 이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으며 확인할 자료도 없다.
이 마을은 우리 지역 불교 전래에 관심을 끌만한 지명이 있다. 마을 뒷산에 중봉(스님봉)과 바랑(바라)봉 목탁바위가 그것이다. 그리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중봉에서 내려온 스님이 마을을 향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부르는 ‘나매미’라는 지명이 있으며 옆 마을인 청천리 앞 들판도 불교와 관련이 있는 지명인 ‘나분들’이 있다.
특히 이 마을의 위쪽에는 미륵사라는 절이 있다. 기록상으로 이 절은 1472년 12월에 창건한 것으로 되었으나 이 터에서 발견된 비로자나불 불상과 승달산 기슭에 있었던 총지사의 설립 과정을 보면 창건 시기를 통일신라시대까지 추정할 수가 있어 보인다. 현재 이 불상은 남악사에 있다.
뿐만 아니라 목포대학교에서 발간한 ‘무안군의 문화유적’을 보면 이곳 사찰 주변에서 청자 파편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주민들은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사찰로 여길 수 있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단지 사찰 터로 여겨지는 곳에 부처님 석상과 아기 부처님 대여섯 기가 널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야 현재의 미륵사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와 관련된 인연 때문인지 이 마을에서는 두 명의 스님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 이 지역에는 동학과 관련된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이른바 붉은 고개 또는 붉은 잔등이 그것이다. 현재 무안고와 무안교회 부근으로 동학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피를 흘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고막원 전투가 실패로 끝나자 동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피할 곳을 찾아 섬으로 가는 길이었다. 토벌대들이 미리 붉은 고개 주변에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다가 보이는 대로 학살했던 현장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던지 핏물이 강을 이뤘다고 한다. 또한 동학 혁명 때 이곳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즉 집강소가 있었던 청천리와 관아(官衙)가 있었던 무안읍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예전에는 한낮에도 이 고개를 넘을 때면 몸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붉은고개의 아픔이 있어
새마을 사업이 한참 시작이 될 때 이 마을에서는 미이라가 발견된 적이 있었다. 현재 농촌지도소가 있는 주변을 ‘방애미재’라 하는데 방애미재 앞에서 광주 - 목포간 도로 공사 중 발견된 것이다. 이곳에는 밀양 박씨 문중의 커다란 묘가 있었는데 그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깨끗하게 원형이 보존된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이른바 물 명당에 해당된 묘 터로 수맥 때문에 수백년이 지났는 데도 시신을 감쌌던 옷이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신도 탈골이 되지 않아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즈음에 그런 시신이 발견되었다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귀중한 자료로 관리되었을 텐데, 당시에는 유물과 유적을 포함한 각종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희박한 상태여서 시신은 그대로 화장을 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시체에서 나온 물[屍水]은 약효가 있다하여 이 마을 주민들 뿐 아니라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다투어서 물을 퍼갔다고 한다. 실지로 마을 사람들 중에 폐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이 물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심지어는 주민들이 그 물을 팔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무덤에서 나온 각종 부장품은 찾을 수가 없었고 송판으로 된 관은 농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 무덤의 후손은 무덤이 파헤쳐진 후에 계속해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 집안이 굉장히 어려워졌다고 한다.
마을 위에는 선랑폭포가 있다. 물맞이고랑으로 불려 지기도 한다. 지금은 대대적으로 주변이 정비되어 산림욕장으로 변하면서 군민들을 위한 산책과 휴식공간으로 꾸며지고 있지만 한때는 이곳에서 무속(巫俗)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60년대에는 추석 때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난장을 열었던 곳이다. 또 고랑 위에는 60년대 70년대 소를 키웠던 목장이 있었던 곳이다.
마을의 왼쪽에는 청계면 청천리와 경계를 이루는 시루봉(증봉)이 있으며 조금 더 가면 옥녀봉이 있다. 옥녀봉 밑에는 일제강점기에 계곡을 막아 만들어진 대곡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안에는 주민들이 즐겨 찾았던 넓적한 평상바위가 물에 잠겨 있다고 한다. 시루봉 정상에는 일본인들이 이 산 주변에서 인물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쇠말뚝을 박은 자국이 있다고 하는데 확인할 수가 없다.
지금은 축구장이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 예비군 훈련장이 있었던 골짜기 주변을 삼바실 고랑이라 한다. 옛날은 물론이지만 근대에 들어서도 주민들이 그 고랑에서 산삼을 캐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지로 이 마을 주민 중 한사람이 그곳에서 삼을 캐서 먹고 그 자리에서 잠들었다 깨어난 적도 있었다. 그 주민은 장수했다.
목포대학교 자료에 따르면 마을에 두 군데의 지석묘 군이 있다. 모두 5개의 고인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윗등이란 지명이 있다. 창녕조씨 묘로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곳에는 얼마 전까지 조상단지(위패 등을 모셔놓은 함)가 있어 마을 노인들이 치성을 드렸던 곳이다. 현재는 수풀이 우거졌으며 큰 바위를 포함하여 12 개의 바위가 놓여 있다.
마을에서 대곡저수지로 가는 길 가에 바위가 하나 있다. 일명 ‘독바위’라 부르는 것인데 수명바위이기도 하다. 주민 중 김석암이란 사람의 사주가 단명으로 나타나자 그의 부모는 바위에 이름을 팔기로 했다. 해서 그 바위는 석암씨의 이름을 따 독바위가 되고 석암씨는 91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실지로 사주상 단명으로 나타나면 절이나 바위에 이름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주민 중에 한 사람은 그 바위에 치성을 드려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주민들 대부분이 홀로 된 할머니들이 많다. 왜 유독 이 마을만 홀로 된 할머니가 많냐고 묻자 1호선 공사 때문에 그런다고 했다. 즉 국도 1호선 공사 때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혈맥을 잘라버려서 남자들이 오래 못산다고 하는 것이다.
농촌지도소 주변을 수랑골이라 했으며 호남전력 주변을 송구장터로 부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한 사람의 피해도 없었다.
무안읍에서 가장 크지만 마을회관이 없는 마을 - 성남5리 산성마을
산성마을은 20여 년 전에 성남2리 후청 마을에서 분리 되었다. 성남5리가 차지하는 영역은 무안읍에서 제일 넓고 세대수가 500여세대로 가장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산성이란 지명의 유래는 무안읍의 조산인 남산에 성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 남산에 있었던 성은 산근산석성 공수산성 또는 남산산성으로 불려지는데 백제시대부터 있어왔던 성이다. 현재 남산 팔각정에 이르는 정상 부분에 석축이 남아있으며 山頂을 중심으로 곳곳에 석축이 잔존해 있다.
산성마을의 영역은 실로 넓다. 약사사 앞 수정아델리움에서 무안읍교회 농산물품질관리원 원불교무안교당 현충탑 선거관리사무소 남악사 광산김씨 사당인 숭현사 새로 건축하고 있는 무안의료보험조합 길 건너서 전신전화국 은광교회 승달맨션 금정아파트 공무원아파트 성남아파트 우체국 경찰서 통일교 등의 기관과 건물이 들어서 있다.
원래 산성마을은 예전 무안읍 교회가 있었던 골짜기이다. 오른쪽으로 매듭산이 있고 왼쪽으로는 국악원이 있었던 마을인데 매우 가난했던 마을이었다. 10여 가구의 집들이 있었는데 지금도 몇 가구가 살고 있으며 가정환경이 어렵다.
예전에는 성남2리와 5리의 경계인 버스공용터미널에서 낙지골목을 지나 무안교회로 빠지는 길이 국도 1호선이었다. 그때는 경찰서 정문이 지금의 후문이었다. 그러다 새롭게 광주 - 목포간 국도 1호선이 지나가면서 舊 길이 되어버렸다. 경찰서나 우체국은 한국전쟁 이후에 무안초등학교 부근에서 옮겨온 것이다.
현충탑 아래 주차장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신사가 있었던 곳이다. 주민들이 신사당이라 부르는 이곳은 일본인들이 아주 성스럽게 여겼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공원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차장 위에는 무안전역에 흩어져 있던 각종 선정비 공덕비 등을 모아두었다. 또한 신사당 옆에 정일영씨 2층집이 있었다. 현재 경찰서 건너 주차장 터인데 한때는 무안국악원이 들어섰던 곳이다. 현충탑 맞은편에는 활을 쏘는 숭덕정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현충탑 입구에는 두 기의 석장승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후청동 마을 장승거리에 있었던 동방대장군 서방대장군의 장승을 옮겨온 것이다.
숭현사를 지나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남악사는 1942년 정정보씨의 선몽에 의해서 건축된 사찰이다. 어느날 정종보씨가 꿈을 꾸는데 땅에 부처가 묻혀 있어 갑갑하다며 꺼내 달라고 하기에 그 꿈대로 땅 속을 파보니 부처가 누워 있었다. 급하게 꺼내서 지금의 남악사를 짓고 봉안하고 있다. 불상은 석조비로자나불로 목과 신체 부분이 떨어진 상태였으나 현재는 시멘트로 접합하여 普光殿에 봉안하고 있다. 원래 이 석불은 초당대 뒤에 있는 미륵사에 있던 것으로 정종보씨가 이 사찰을 짓고 옮겨 봉안하고 있으며 기단부만 미륵사에 남아 있다. 현재 남악사에는 보광전과 요사채등의 건물만 남아있다.
월천정사가 있었다
현재 무안읍 교회가 있는 자리는 원래 동산병원이 있던 자리이다. 그 교회 앞에 나주 정씨들의 ‘월천사지유허비’가 남아있다. 월천사는 월탄 정기수와 월봉 정황수 형제를 배향했던 사당이다. 임진왜란의 치욕적인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형제가 의병장이 되어 왜구를 토벌했던 충신들이다. 형제는 무안읍 월천리에서 태어나 일찍이 우계 성 혼 선생에게서 수학하였다. 월봉은 일찍부터 무예를 배워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형제는 의병을 모집하여 임란에 참여하였다. 이후 이충무공의 부름을 받아 한산도 해전과 당포전 등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월천사는 1868년에 훼철되어 복원이 안 되고 있다. 지금은 유허비만 무안읍 성동리에 서 있다.
마을이 넓은 데도 경로당이 없다. 수많은 기관과 500세대가 넘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도 노인과 주민들이 쉴 수 있는 마을회관이 없는 것이다. 이유를 이장에게 물어봤더니 주민들의 의견을 모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민들 대부분 토박이가 아닌 외지인들이다 보니 함께 모이기가 대단히 어렵고 의견도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또한 후청 마을의 그늘이 너무 커 지금도 주민들은 후청 마을에 속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해서 마을회관 건립에 대한 의견을 모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실지로 무안읍의 행정구역을 보면 마을간 편차가 너무 크다. 같은 성남리인데도 하마동은 구역이 조그맣지만 산성마을이나 만창마을은 너무 넓어 행정의 비효율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공무원 아파트 앞에 1982년에 세운 정암장석진공덕비가 있다. 정암은 몽탄면 출신으로 광주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