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산행기는 몇년전 히말라야 산행 중 가장 힘들었고,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쿰부히말라야 산행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는
칼라파타르(5,550m)에 올랐던 기록입니다.
2009년은 나에겐 아주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중요한 한 해가 되었다. 지리산 무박 종주, 설악산 공룡능선 무박종주, 말레이지아의 코타키나발루(4,095m) 정상 등정, 미국의 그랜드캐년에 버금간다고 하는 중국 태항산의 깊은 계곡 산행과 함께 금년 초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산행과 이번의 쿰부히말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칼라파타르 트레킹,
정말 가슴 찡한 감동의 순간들이었다.
산꾼은 산을 향한 짝사랑으로 산을 오르는 자신만의 귀중한 신앙을 간직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산을 향한 산쟁이의 마음에는 무아(無我)와 망아(忘我)가 있고, 언제나 산과의 혼연일체 하나가 되어, 어떤 물질적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 오직 산이 있어 산에서 희열을 추구하는 자신의 소중한 종교에 푹 빠진 순박한 사람들이다.
77년 고 고상돈님에 의하여 우리나라도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국가의 대열에서게 된
그 시절부터 아니 박영석 등 3명이나 히말라야 14좌 완등국이 되면서 나의 산사랑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때는 “네팔” “카투만두” “희말라야” 등 그런 지명은 사진과 글로써만 접 할 수 있는 먼 이국의 풍광, 나로서는 감히 접근과 상상이 불가능한 생경(生硬)한 동화의 나라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동화의 나라가 나에게 현실로 닥아 왔습니다. 내가 꿈꾸고, 내가 가고팠던 그곳으로 나를 초대 한 것이다. 푸르고 푸른 히말라야 하늘에 하얗게 겹쳐진 만년설산의 고봉, “눈이 머무는 보금자리”라는 뜻의 히말라야, 그 푸른 하늘 아래에 눈의 보금자리 희말라야의 능선을 걷는 꿈으로, 초대에 응한 그 시간부터 내 몸은 히말라야를 향한 열병을 앓기 시작하였다. 오직 그곳에 가야만 치유가 가능한 아무 약도 없는 그런 열병을 앓기 시작하였다.
타임머신을 타고 반세기 전 과거로 날아가봤다.
히말라야 그곳은 1950년대, 나의 어린 시절 그때와 똑 같았다. 너무나 똑 같았다.
흘린 코가 묻어있는 어린아이의 얼굴, 때로 찌든 옷들, 맨발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 사탕과 초크렛을 위한 손 벌림,
양지쪽에서 머리의 이를 잡고 있는 모습들, 50년전 우리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들의 순박하고 천진난만한 눈동자에는 아름다운 영혼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우리를 능가하는 행복지수를 그들이 소유하고 있음을 분명히 우리 일행 모두는 느낄 수 있었다.
타이트한 일정이었지만, 여러 가지 행운으로 목적한 일정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고산증세로 체력의 고갈로 함께한 일행 12명중 7명만이 전 구간을 트레킹하고
칼라파타르를 등정 할 수 있었다. 신의 땅 히말은 아무리 철저히 준비하여도 신들이 허락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하늘 향한 땅 끝이었다.
끝을 향한 발걸음이 가벼울리는 없었다. 무겁고 숨찬 고통의 시간이었다.
2009년 11월 20일, 인천국제공항 3층, 대한항공 체크인 카운터 앞이다. 혜초여행사에서
나온 이명열 대리가 참여자 12명의 탑승수속을 도와주며, 일행에게 다이아막스(Diamox)
여덟 알씩을 나눠준다. 이뇨제인 다이아막스는 고산병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공인된 유일한 약이란다.
의사 처방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약인데, 이처럼 쉽게 얻을 수 있다니, 참으로 고맙다.
12월 4일까지, 15일간 일정의 쿰부 히말 트래킹이 비로소 시작되는 느낌이다.
비용은 혜초여행사에 지불한 참가비 2,550,000원, 네팔 비자비용 $25, 현지 스텝 팁 120$ 등 약 3백만원 정도이다.
바로 옆의 안나푸르나 행 모임에는 여자들도 눈에 뜨이는데 우리 일행에는 여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모두 중늙은이들 뿐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단원 12명 중, 70세 노인을 포함한 60세 이상이 6명,
50대가 5명, 40대가 1명인데. 말레이 키나바루는 기본이고, 킬리만자로, 일본 북 알프스 등
해외 트래킹을 두루 섭렵한 베테랑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들 소신껏 개별 신청을 하고, 고소병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은근히 위축이 되는 느낌이다. 15일 동안, 동거동락하며 정이 든 분들을의 모습을 담아둔다.
김도권, 70세. 키리만자로에 오른 경험이 있는 용인노인복지회 거물인사에다 월남참전용사이다.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위해 1주일 동안 체재 연장을 한 철각. 2012년 3월 안명길님과 둘이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와 랑탕히말을 25일간 트레킹하였단다.
안명길 68세, 똑딱이 카메라로 여행 앨범만든다고 열심히 촬영 외국어도 제법 잘하고 유식하고 빠르진 않지만 쉬지않고 뚜벅뚜벅. 3년 후 김도권님과 단 둘이서 랑탕 트레킹
김보일, 68세, 현직 학원원장. ‘마누카’라는 18세 네팔 아가씨를 고용, 배낭을 지게하고, 자신은 맨몸으로 유유히 로얄 트래킹을 즐긴 경상도 사나이. 출국 전 초상집에서 걸린 감기로 내내 고생을 하더니, 끝날 무렵에는 설사로 애를 먹으면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마누카’에게 하루 일당 $10외에, 남체 바자르에서 모자에서부터 치마까지 새 옷, 일습을 사 입혀 한국 남성의 따듯한 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본인(최영락), 68세, 이미 안나푸르나 지역을 섭렵한 경험이 있고, 커다란 DSLR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작품 사진 만들기에 노력하였다.
장창환, 62세, 충청도 아산의 건각. 실버그룹에 속하면서도 항상 1시간 이상 진행속도가 빠르다. 일행 중 몇 안 되는 주당 중의 한명. 하산 시 나의 좋은 술벗이 되다.
추장호, 61세, 블랙커피와 샘 미겔 맥주를 즐길 줄 아는 멋쟁이 수지 신사. 실버구릅의 막내로 전체 분위기를 리드 한다. 백두대간을 하고, 국내 곳곳을 도보 여행한 베테랑. 입술이 부르텄는데도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위해 1주일동안 체재연장을 한 의지의 사나이 이다.
강춘협, 55세, 트레킹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없는 달변의 분위기 메이커. 항상 모임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트로치, 지사제 등 비상약을 공급하여 고생하는 대원들을 도와우었다.
김연수, 55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열열한 지지자. 완월동 집창촌 이야기로 아침부터 대원들의 배꼽을 잡게 하는 부산 사나이. 거금의 소지자로, 김도권 씨의 안나푸르나 트래킹 소요비용 $1,000을 서슴없이 빌려준다. 거친 듯하지만, 내면은 무척 부드러운 친구다.
오석민, 50세, 현직 뱅커. 휴가를 내어 히말라야를 답사한다. 어렵게 찾은 히말라야! 그 의미는 무언가로 고민하는 학구파. 사슴처럼 잘 빠진 몸매, 혼자서 외로게 온 중국계 호주 아가씨가 반한 모양이다. 루크라에서의 쫑 파티에서 그 아가씨로부터 커다란 케익을 선물로
받았다.
장영동, 50세, 민통선의 사이비 심마니. 자연 속애서 약초도 캐고, 나물도 뜯는 말 없는
사나이다. 맑은 물에서 사는 물고기를 재료로 한 어죽이 전문이라며 늙은이들을 초대한다. 서울에서 가져온 소주병을 들고, 제일 먼저 실버그룹 테이블을 찾아온 기특한 젊은이다.
유일하게 오석민 장영동 두 사람만 친구사이로 같이 참가 신청을 했고 나머지는 모두 개별 신청하여 공항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이이다.
최맹규, 50세, 현직 은행지점장, 고락셉에 가기 전 심한 두통으로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대한민국의 두통약, 게보린 한 알로 이를 거뜬히 극복하고, EBC, 칼라파타르를 거쳐, 야크 길로 하산하는 저력을 보인 사나이. 스스러움이 없이 반잔만 더 달라고 술잔을 내 밀 줄도 아는 순수파다. 목하 네팔의 경제개발 방안 모색 중.
정성원, 45세. 스스로 총무 직을 떠맡고, 궂은일을 자청한다. 향초에 민감하여 먹는 것이 까다로운 광주의 귀공자다. 앞으로 다시 만나는 자리 마련도. 이 양반 손에 달렸겠다. 기대가 크다.
제1일(2009.11.21)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1,400m)에서 쿰부히말 산행 기점인 루크라(Lukra, 2,840m)까지는
국내선 비행기로 이동하고, 거기서부터 트레킹을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루크라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05:00모닝콜이 울리고, 05:30 로비에 집결하여 우리 일행 12명은 카투만두 국내선 공항으로 이동했다.
공항 밖 어둠 속에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체크인을 기다리는 행렬이다. 행렬을 따라 비행기 표를 보여주고 공항 안으로 들어서자 낯익은 구형 삼성TV가 있는 체크인 카운터 앞에서 보안체크 차례를 기다리다가 차례가 오자, 검색요원이 배낭을 열라고 하더니 안의 물건을 샅샅이 훑어보며, 내용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대답이 늦으면, 두말없이 내용물을 홀랑 까뒤집어 확인한다. 서로가 피곤한 작업이다. 이어 몸 수색과정을 거친 후 사람들이 가득한 탑승구 대기실로 들어섰다.
어제 만난 가이드(셀파) 옹추 대장을 비롯한 직원이 우리 일행을 한 군데로 모으더니 호텔에서 가져온 도시락과 음요수를 나누어 주었다. 크로와상 1개, 샌드위치 한 덩어리, 삶은 계란, 사과 등 아침식사로 손색이 없는 도시락으로 아침 식사를 때우고. 17인승 프로펠러
경비행기에 올랐다.
금발의 서양인 조종사와 얼굴이 작고 선이 간결한 젊은 항법사. 그리고 고혹적인 눈매에 화려한 사리를 입은 여자 스튜어디스, 그리고 우리 일행 12명에 가이드 2명. 그리고 2명의 독일인 승객이 탑승했다.
“나마스테”라고 스튜어디스와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에 오르는데 트랩이 출렁거려 중신잡기가 쉽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 스튜어디스는 쟁반에 사탕과 귀마개용 솜을 나누어주었다.
‘귀마개? 비행기 소음이 장난이 아닌가보다’
프로펠러가 돌기 시작하자 소음은 곧 굉음으로 바뀌고 귀가 멍멍해졌다.
비행기의 조종석과 승객석은 커튼 하나로 구분되어 있지만 항상 열려있어 조종사와 항법사의 모든 행동과 계기판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5DⅡ 카메라를 가지고 갔더니 대원들이 히말라야 설산이 잘보이는 왼쪽 조종사
바로 뒷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여 카투만두를 벗어나자 눈이 덮이지 않은 산은 꼭대기까지 다락밭이 개발되어 집과 축사가 보이고 길들이 실핏줄같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실뱀처럼 구부구불 흐르는 강물이 보였다.
고통스런 굉음에서 벗어날 즈음 인쪽으로 멀리 설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 덮인 하말라야의 풍광은 그야말로 끝없이 연속되는 雪國의 파노라마였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산등성이에 하얀 눈은 덮어쓴 채 폭을 알 수 없는 병풍속 그림처럼 장엄하게 펼쳐진 히말라야...... 한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규모에 전율마져 느껴졌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진을 찍으며 풍광을 즐기다 보니 비행기는 쿰부히말의 깊은 협곡으로 들어서자 멀리 두드코시강의 가파른 벼랑위로 산중 요새같은 루크라가 보인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본 루크라 비행장은 평지가 아니라 산악지형을 이용한 경사면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착륙은 오르막 방향으로, 이륙은 내리막으로 내달리게 되어 있어 짧은 활주로이지만 이착륙이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가장 히말라야다운 인공물. 산중 비행장의 백미’ 내가 본 루크라 비행장의 첫 느낌은 이랬다.
08:30분경 루크라 공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비행장 바로 옆에 있는 Numbur호텔로 안내되어 우리와 함께할 산악가이드 옹추대장을 비롯한 파샹, 다와 등 셀파 3명과 포터 5명 주방장을 비롯한 치킨보이 11명 등 19명의 스텝들과 인사를 하였다.
우리 가이드 대장 옹추는 에베레스트를 5번이나 등정한 쿰부히말의 베테랑 가이로서 카투만두에서 개인 사업도 하고있는 부유층에 속한다고 한다. 셀파족들의 이름 중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태어난 요일별로 이름을 짓는데, 월요일은 ‘다와’ 하요일은 ‘밍마’ 수요일은 ‘락파’ 목요일은 ‘푸르마’ 금요일은 ‘파샹’ 토요일은 ‘펨바’ 일요일은 ‘니마’라고 이름을 짓는다고 한다.
우리 대원은 12명으로 40대1명, 50대5명, 60대 이상 6명이었스며 전원이 남성들로만 구성되어있고, 2명을 제외하고는 10명이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사이였다.
이렇게 우리 트레킹 팀은 트레커 12명에 가이드를 비롯한 스텝 19명, 그리고 포터를 도와줄 좁기오 4마리로 구성되어있다. 좁기오는 숫 야크와 암소 사이의 교배종으로 산속에서 생필품이나 트레커들의 짐을 날라 주는 아주 유용한 동물로 쿰부히말 쪽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오늘은 기상상태가 좋아 쉴새없이 비행기가 뜨고 내리면서, 이착륙할 때마다 찢어질 듯한 굉음이 들리다가도 금방 깊은 산중의 고요함으로 변하는 루크라 비행장, 비행기는 흔하지만
자동차는 고사하고 자전거를 비롯한 바퀴달린 것은 찾아볼 수 없는 곳, 그렇게 루크라는 묘한 특수성을 가진 산중 마을이었다.
고글을 쓰긴 했지만 히말라야의 햇빛은 가히 경이로왔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햇빛이 더욱 강해질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햇빛이 강하게 내리 쬘 때는 등산용 T셔츠를 입고 있는데도 피부가 따끔거렸다.
따가운 햇빛 아래서지만 공글하(Gonglha : 5813m) 산에서 뻗어 내려온 장엄한 좌우 능선이 루크라를 병풍처럼 감싸안고 있었고, 가파른 경사면에 위태롭게 서 있는 초르텐(불탑)과 타르초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을 쳐다보면 저렇게 높고 가파른 곳까지 올라가서 백탑을 쌓고 타르초를 매어두었을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마도 믿음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호텔 야외 정원에서 네팔 전통차?인 ‘짜이(밀크티)’를 들면서 1시간쯤 휴식을 취한 후
우리 일행은 오늘의 목적지 팍딩을 향해 출발했다.
해발 2,840m 루크라에서 2,610m에 위치한 팍팅으로 향하려면 시장 골목을 지나야 했다. 시장은 제법 큰 규모로 비디오방도 보이고, 은행, 당구장, 노래방, 레스토랑, 빵집, 찜질방, 등산용품점 그리고 길가의 야바위, 노름하는 장면도 눈에 들어왔다.
시장골목은 60m정도 이어졌고, 시장이 끝난는 마을 끝에는 루크라의 경계를 알리는 아취가 서 있었다. 거기에 'Welcom'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고, 아취 바로 아래에는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등정한 셀파족의 전설적인 여성 산악인 ‘파샹 라무’의 흉상이 있었고,
그를 추모하는 아취 경계문(National luminary passang lhamu memorial gate)이 이승과 해탈의 세계로 이어주는 不二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팍딩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로 우리에게는 고산 적응을 위한 훌륭한 트레킹 코스가 되었다. 팍딩 코스는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깔아놓은 돌길과 흙길로 이어졌고, 길가의 대부분의 집들은 돌로 지어져 있었다. 그래서 집의 외형은 아주 중후하고 튼튼하지만 집안은 침침한 것이 흠이었다. 시멘트 같은 접착 자재 없이 석재를 벽돌처럼 다듬어 차곡차곡 쌓아올림 집 구조 대문에 창문을 조그맣게 낼 수밖에 없어 낮에도 집안이 어두웠다. 이곳에서는 가장 구하기 쉬운 건축자재가 돌이기 때문에 인공물들은 거의가 돌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우리 대원들은 채프롱 마을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우리 일행보다 먼저 도착한 주방장을 비롯한 치킨보이 팀들이 준비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공수해 온 각종 식재료(된장, 고추장, 김, 김치, 젖갈, 쌀, 라면, 등)와 현지에서 조달한 것으로 현지인들을 훈련시켜 우리 입맛에 맞는 한식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산행기간 내내 메뉴를 바꿔가면서 한식을 제공해 주어서 먹거리 문제로 신경 써 본적이 없었다.
우리 대원들이 점심식사를 한 채프롱 롯지 벽에는 한국산악연맹에서 2007년에 주관한 실버팀 에베레스트 등정 사진과 함께 ‘인생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글귀가 우리 60대 이상 대원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얼마 지나가다가 문득 친근한 나무 조각상을 만났다. 언듯 보기에도 모양이 우리의 장승과 비슷해서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역시! 한국 장승이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라고 한글로 써놓은 이 장승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마침 그곳은 살짝 가파른 오르막으로 숨이 차기도 한 터라 잠깐 휴식을 가졌다. 장승의 위치가 초보 트레커들에겐 쉬어갈 빌미를 주는 절묘한 위치에 있는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도고시곤 마을을 지나자 첫 출렁다리인 다도고시콜라 부릿지(Dhado Koshi Khola Bridge)가 나타났다. 출렁다리는 아주 길고 가축들도 교행할 수 있는 정도의 폭이었다.
다리를 건너자 길옆으로 산스크리트어로 ‘옴마니반메홈’이라고 새겨진 바위 ‘마니월‘과 경판 돌무더기인 ’마니스톤‘이 나타났다. 이곳에서는 마니스톤을 만나면 왼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그 행위는 자연스레 경전을 읽고 지나가는 동작이 되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오른쪽으로 돌게되면 그때가지 벌어놓은 복을 몽땅 까먹게 된다고 한다. 그말을 듣고는 모두들 열심히 좌측통행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길가에 만들어 놓은 라마 회전 종인 ’마니차‘도 심심찮게 보였다. ’마니차를 보면 돌려라 시계방향으로......‘. 그렇게 이곳은 어딜가나 산스크리어트어로 된 경문을 만날 수 있다. 종교가 생활이고 생활이 종교가 되는 이곳이 쿰부히말라야이다.
팍딩이 가까워지면서 길옆으로 ‘우윳빛 강’이라는 뜻을 가진 ‘두드코시 강’의 역동적인 급류가 나타났다. 파란 코발트 빛 물에 우유를 조금 풀어놓은 것 같은 쿰부히말의 빙하가 녹아 흐르는 강물은 격류가 되어 물소리도 요란하게 힘차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팍딩 롯지 바로 앞의 두드코시 강을 건너는 출렁다리를 건넘으로써 오늘의 산행은 알단락이 되었다.
여장을 풀고 간당하게 샤워를 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행들 중 몇 명은 여유를 부리고 늦게 샤워를 했는데, 샤워 도중에 그만 더운 물이 떨어져서 찬물로 얼굴과 몸에 묻은 비누를 닦아내느라 고생을 했다고 한다. 히말라야라고 무작정 비스따리(천천히)를 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치토(빨리)가 필요하기도 한 모양이다.
팍딩의 하룻밤은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식당 난로가 꺼지기가 무섭게 모두들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오늘부터 잠자리에 들기전에 각자 휴대한 등산용 물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 침낭속에 넣고 자야 한다. 이곳 롯지에는 난방시설이 없기 때문에 매일 밤 체온 유지를 위해 어김없이 드거운 물통을 애인처럼 껴안고 자야했다.
제2일(2009.11.22)
팍딩에서의 아침 샤워는 생략했다. 게으름이나 늦잠 때문이 아니라 단지 더운 물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밤에 침낭 보온병으로 껴안고 잤던 물병은 미적지근해져 있었다. 그 물로 얼굴만 닦고 양치질을 할 정도밖에 안되었다. 이렇게 트레킹기간 ‘고양이 세수’가 시작되었다. 세수를 마치고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젖히자 어디선가 ‘와~’하는 탄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와보니 눈 덮인 봉우리가 아침 노을에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환상적인 모습은 황금 눈 빛 때문일까? 아침부터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메고 정원에 나와 오늘 산행 출정차비를 마치고 서있는 모습에서 우리 대원들 모두의 얼굴이 조금씩 부어 있었다. 얼굴이 부은 것은 추운 곳에서 제대로 잠을 못자고 피곤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기압 탓도 큰 것 같았다.
우리 대원들은 롯지 뒤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오늘의 목적지인 ‘셀파의 본고장’ 남체를 향했다. 오늘은 해발 2,610m에서 3,440m까지 고도를 높이는 구간으로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고소증세를 느끼는 3,000m를 넘기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무사히 통과하느냐 여부가 쿰부히말 트레킹 성공여부를 결정짓는 첫 관문인 셈이다.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고소증세를 느끼면 무리하지 말고 다시 내려가 적응한 뒤에 다시 올라오는 것이 유일한 약이란다.
그 곳은 남체바잘로 불리는 곳으로 해발 3,440m에 있는 산중마을이다. 바잘(시장)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이 커다란 시장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분위기상으로는 선뜻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기에 3,440m 높이의 첩첩산중에 거대한 시장이 있다는 것일까. 아침 공기는 냉냉했고, 하늘은 진한 파랑색을 띠고 있었다. 파란 하늘이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다.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자외선이 예사롭지 않으리라는 경험 때문이다.
남체로 가는 길은 순탄했다. 두드코시강 왼쪽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했고,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갈 때마다 올망졸망한 마을이 나타났다. 그 마을을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모두들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 구경도 하고 고산 적응도 하려는 듯 걸음이 한층 느려졌다. 그래도 걸음을 옮기면 숨이 차오르는 것은 여전했다. 루크라에서의 첫 오르막처럼 뒤통수 쪽에서 무엇인가 빨아드리는 듯한 서늘한 느낌이 다시 느껴졌다.
이 등산로는 좁기오를 위시하여 아시아 유럽등의 동서양 여러 인종들이 뒤섞여 올라갔다.
고도가 올라갈 수록 길가에 움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에베레스트를 올라가는 이 척박한 계곡안에서도 빈부는 여전히 존재했다. 이 열악한 계곡안에서도 돌집으로 반듯하게 지은 집이 있는가 하면, 대나무나 나무줄기 또는 잎으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움막도 있었다. 때마침 움막에서 피부가 아주 검은 젊은 여자가 젖먹이 아이를 안고 나와 움막앞에 앉아 있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그 여인의 얼굴빛은 검고 거칠었지만 표정은 오히려 밝고 여유로와 보였다. 이곳에서도 빈부의 격차는 존재하지만 그들에게서 비교적 공평한 것이 있다면 행복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듯하게 지어 놓은 집에 사는 사람이나 움막에 사는 사람이나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들 밝아보였다.
그녀의 움막 옆으로는 대나무 닭장이 보이고, 벌레를 쪼고 있는 닭과 기둥에 매어놓은 염소도 보였다. 움막 뒤에서 새끼 돼지 한 마리가 집지키는 강아지처럼 걸어나와 먹이를 찾고 있었다. 돌돌말아올린 꼬리를 쉴새없이 흔들어 대며 주둥이로 풀뿌리를 뒤져 벌레를 잡아먹는 돼지를 보다보니, 문득 이 돼지가 집돼지인지 멧돼지인지 모호해졌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방목해서 키우는 집돼지란다. 때마침 개구쟁이들이 돼지 뒤를 따라다니면서 꼬리를 잡아당기며 장난치고 깔깔거리고 있다. 돼지가 우리에게는 단순히 ‘식탁 위의 먹거리’이겠지만, 이곳 아이들에게는 즐거움을 공유하는 친구이자 장남감 같은 존재였다.
마을에는 계곡의 낙차를 이용해 전기를 만들고, 분지에 위치한 마을에서는 태양열로 전기를 만들어 쓴다. 그러나 생산량이 충분치 않아 집안은 항상 어둡고 밤이 되어도 아주 희미한 전등만 켤 수 있다. 그래서 트레킹 내내 전기 부족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전기 부족은 고도가 올라갈수록 심해지는데, 카메라 밧데리 충전비가 할증되고(처음에는 1불이더니 올라갈수록 2불, 3불을 받는다), 그나마도 충전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올라가다보면 높이가 100~200m 정도 되는 실 폭포가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대부분 水量이 많지 않아 기늘고 길게 떨어지는 탓에 장엄한 느낌은 떨어지지만 높이만큼은 단연 압권인 폭포들이다. 이곳에서는 산이면 산, 계곡이면 계곡, 폭포면 폭포..., 어느 것 하나 시원시원하지 않은것이 없었다. 그래서 길을 걷다보면 ‘아! 역시 이래서 히말라야구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잠깐의 달콤한 휴식을 끝내고 전나무가 촘촘히 서 있는 숲길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오르다보니 어느 순간엔가 숲 사이로 새하얀 설산이 보였다.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높이와 산세가 느껴지는 산. 그 그산은 ‘황금의 문’이라는 뜻을 가진 탐세르쿠(Thamserku,6,608m)
였다. 이 산은 지금까지 보아온 쿰부히말의 풍광 중에서는 단연 뛰어난 산이었다. 한때는 한국 원정대들도 자주 오르내렸다고 하여 그런지 친근감이 느껴지는 산이다. 키아사르 빙하를 품고 있는 탐세르쿠를 더 잘 보기 위해 시야가 넓은 곳에 앉아 사진을 찍으며 하산길에도 지금처럼 장엄하고 아름다워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화려하고 장엄한 산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첫사랑의 간절한 기억처럼 탐세르쿠의 기억을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을 것 같았다.
밴카(Benkar,2,905m)라는 마을에서 한 차례 길다란 출렁다리를 건너 꽤나 큰 마을인
몬조(Monjo,2,840m)라는 마을에 들어섰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두드코시 강의 코발트 빛 급류는 눈과 빙하가 녹아 내린 물이어서인지 더욱 더 몸과 마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몬조마을을 비스듬히 올라서자 빨간 지붕의 사가르마타국립공원 사무소 건물이 나타났다.
이 곳에는 입산을 하기 위해 올라온 트레커나 원정대들이 입산 수속을 밟느라 대기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지불하는 우리 일행의 입산료는 1인당 1000루피(16,000원정도)이고 만약에에베레스트를 정복하려면 입산료가 50,000불이라고 한다.
입산수속을 마치고 뒷문을 나서자 돌계단 내리막이다. 꽤 긴 내리막이었고, 그 옆으로는 ‘옴마니반메홈‘을 산스트리어트어로 새겨놓은 글들이 암벽을 따라 줄줄이 이어졌다.
에베레스트에 가까이 왔으니 이에 관한 몇가지 기록을 살펴보았다.
‘에베레스트’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최초로 에베레스트 측량에 성공한 ‘Everest’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인도의 측량국장 ‘앤드류 워’가 ‘Mount, Everest’로 명명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외에도 네팔은 ‘샤가르마타’(Sagarmatha), 티벹은 ‘초모랑마’
(Chomolangma)라 부르고 중국 이름은 ‘쿼모랑마’(Qomolangma)이다. 네팔 사람 중에는 ‘에베레스트’라 부르는데 자존심 상해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에베레스트 도전이 시작된 것은 1921년 영국등반대가 정찰을 시작한 이래 계속 정상도전에 실패하다가 공식적으로는 1953년 5월 29일 11시 30분에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
(Edmund Hillary)경과 네팔인 ‘텐징 노르게이 셀파’(Tenzing Norgay Sherpa)가 정상에 인간의 족적을 남긴 뒤 20세기 동안에 600여명이 등정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1924년에 실종되었던 ‘말로리’의 시신이 1999년 5월 3일 발견되면서 혹시 ‘말로리’가 정상정복에 최초로 성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공식기록이 뒤집힐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우리 나라는 1977년 9월 15일에 김영도 대장이 이끄는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고상돈 대원이 정상을 밟았다. 이는 한국인으로써는 최초로 이룬 쾌거로써 ‘에베레스트 등정 8번째 국가가 되었고 개인으로써는 14번째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600여명이 등정성공의 기쁨을 누리는 동안에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은 얼마나 많을 것이며 유명을 달리하고 뼈를 묻은 사람은 또 얼마나 될지,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추모비(Memorial)를 보면서 숙연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우리 대원들은 조르살레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식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요리팀의 한국 요리 솜시는 정말 훌륭했다. 물론 매번 다른 메뉴의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도 맛이 제대로 났다. 오늘 점심은 비빔국수와 계란국, 소시지 구이로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조르살fp의 햇빛은 팍딩보다 좀더 사납게 피부로 파고들었다. 강렬하게 파고드는 햇빛이 부담스러워 차양 지붕이 있는 선룸 안으로 들어갔다. 선룸 벽면은 유리로 되어 있어서 히말라야의 설산을 바라보면서 비빔국수를 먹는 맛! 힘이 불끈 솟았다.
유럽 등 서양의 트레커들처럼 뙤약볕 아래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고 햇빛을 피해 실내에서 점심을 먹는 우리들은 ‘온실속에서 자라는 화초’같은 존재였다. 이곳 쿰부히말라야에서 우리의 존재감이란 이렇게 유하고 작은 것이 현실이었다.
오후에 우리가 가야할 길은 만만치 않은 코스였다. 지금까지는 올망졸망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걸어왔지만, 자금부터 남체(Namche barzar, 3,440m)까지는 오르막의 연속이다. 고도 차이가 커서 자칫 고산병이 올 수도 있는 코스였다. 조르살레에서 남체까지의 표고 차는 700m나 된다. 개다가 지도상의 빽빽한 등고선으로 볼 때 그 경사도 만만찮아 보였다.
점심을 먹고 또 다시 출렁다리를 지나 자갈이 밟히는 너덜과 암반으로 이어진 두드코시 강 오른쪽을 따라 굽이굽이 오르다가 라자부릿지(Laja bridge)를 만났다. 이 출렁다리는 쿰부히말 트레킹에서 만나는 출렁다리 중 단연 백미였다. 강물로부터 높이가 60여 미터도 넘을 것 같은 높다란 허공에 있는 이 출렁다리는 주변의 풍광과 어우러져 존재 그 자체가 압권이었다. 이곳은 ‘보테코시강’과 ‘두드코시강’이 합쳐지는 곳인데, 라자부릿지는 두드코시 강 쪽의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설치된 다리이다. 또한 이 다리에 매어둔 수많은 형형색색의
타르초 경문 때문이다. 협곡에 바람이 불면 타르쵸의 오색깃발이 일제히 펄럭이면서 부처님 말씀을 허공에 뿌리는 것 또한 장관을 이루었다.
다리를 건너자 사람 하나가 간신히 오늘내릴 수 있는 10여미터의 내리막을 거쳐 계속 오르막의 연속이 시작되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지고, 쉬는 시간이 점점 잦아지고 길어졌다. 나는 주역에 나오는 行神文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오르막을 올라갔다. 주역의 縮地法이라고 하는 아래의 행신문은 이번 트레킹에서 고산증을 예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익혀둔 것이 두고두고 고마웠다.
天一 地二 天三 地四 天五 地六 天七 地八 天九 地十이니
天數ㅣ 五오 地數ㅣ 五ㅣ니 五位相得하며 而各有合하니
天數ㅣ 二十有五ㅣ오 地數ㅣ 三十이라.
凡天地之數ㅣ 五十有五ㅣ니 此ㅣ 所以成變化하며 而行鬼神也ㅣ라.
특히 우리 일행중 68세의 안명길대원은 급경사가 나타나면 옆사람도 다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만큼 복식호흡을 하면서 고산증에 대비하여 거뜬히 트레킹을 마쳤고, 같은 나이의 김보일대원은 일당 10弗씩에 ‘마누카’라고 하는 네팔 아가씨를 고용하여 짐(배낭)을 모두 맡기고 맨몸으로 거뜬히 트레킹을 소화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우리 일행중 실버팀(60세 이상)은 나이가 많은 고령인데도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가지고 누구하나 낙오되지 않고 쿰부히말 트레킹를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면 산더미같은 짐을 진 포터나 치긴보이들은 슬리퍼를 신은 새카만 맨발로 성큼성큼 경쾌하게 우리들 옆을 지나가기도 하고, 뎅그렁뎅그렁 워낭 소리를 내며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좁기오도 지나갔다. 좁기오는 보면볼수록 히말라야의 賢者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 느릿느릿한 걸음, 스피드가 미덕처럼 되어 있는 우리에게는 좁기오는 느림의 미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 느림의 미학으로 행복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 소걸음이 천리를 간다고 하였던가? 느리지만 꾸준한 걸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위력은 더 해갔다.
이럭게 ‘비스따리 비스따리(천천히)’......하고 주문을 외워본다.
지그재그로 나 있는 길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가뜩이나 호흡이 어려워 여간 고역스럽지 않은데, 지그재그 끝은 도대체 어디까지 있는 것인지, 아무리 위를 쳐다보아도 종잡을 수가 없다. 얼마나 올라왔을까? 어디선가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위쪽 숲 사이로 사람들이 어른거렸다. 그 곳은 벤치용 돌담이 있는 휴식 공간이었다. 그곳의 위치 때문일까, 남체를 오르는 사람들은 그곳을 그냥 지나는 법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남체를 오르는 오르막은 힘에 벅찬 코스였다. 그렇게 휴식공간의 반가움은 오르막의 고통과 정확히 비례했다. 돌 벤치가 전부인 휴식처이지만 그곳에는 과일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고장의 특산품 과일인지 낯설기도 했지만, 생김새도 못생기고 맛도 시금털털하고 씨가 입안에서 한 웅쿰씩 씹혀서 씨를 뱉어내느라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그 휴게소에서는 과일을 사 먹으며 쉬기도 하고 용변을 보러 숲속으로 잠깐씩 사라지기도 했다.
오르막이 더해질수록 남체에 진짜 시장이 있을까?하는 의문도 더해갔다. 정말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산길의 연속이었다. 숨이 턱밑에서 깔딱깔딱거릴 무렵 오르막이 조금 완만해지는가 싶더니 앞쪽으로 음료수를 파는 가게가 보였다. 그곳에는 먼저 온 서양 트레커들이 나무 가지로 엮어 만든 나무 벤치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호흡과 체온을 고르고 있었다. 이렇게 힘들 때 가게를 만난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모르긴 해도 남체마을 영역에 들어왔다는 확실한 증표일 가능성이 크기 대문이었다.
벤치에 앉자 몸이 지치는 느낌이 들었다. 휴식도 필요했고, 체력을 보충할 먹을거리도 필요한 순간이었다. 배낭을 뒤져 초코렛을 꺼내어 나도 먹도 우리 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지치고 배고플 때 먹는 초코렛 하나...지친 몸을 순식간에 회복시켰고, 이에 힘 입어 다시 남체를 향할 수 있었다. 배낭 속에는 초코렛, 사탕, 연양갱, 초코파이 등 간식거리를 항상 휴대하고 다녀야 했다.
그나저나 ‘남체바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의문은 언덕의 왼쪽을 돌아가자 풀렸다.
언덕을 돌아가자 경사면으로 집들이 빼곡한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체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언덕을 오르면 오를수록 오른쪽의 언덕뒤에서 연이어 나타나는 마을. 도대체 어디까지가 마을일까? 1~5층짜리의 건물이 100여채도 넘어 보이는 롯지가 부채꼴로 층층이 줄지어 있었다. 마을의 규모는 루크라보다 훨씬 컸고, 마추피츄처럼 산자락에 숨어있다가 우리 일행을 화들짝 놀라게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또 다른 불이문 같은 문을 통해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불탑인 초르텐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었다. 초르텐은 정방형의 모양인데, 상단부에 입과 귀가 없는 부처가 그려져 있었다. 그곳에 그려진 커다란 두 눈은 이방인을 환영하는 듯 하기도 하고,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경고의 눈빛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남체에서는 지난 30여년동안 강력 범죄가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있는 초르텐과 타르초를 보면 문득 엣날 우리나라 시골 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당과 당나무(神木)에 쳐놓은 금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묵을 롯지에 가기 위해 좁을 골목길을 지나게 되는데, 골목길 좌우에는 기념품,
등산용품 등을 파는 상가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골목길에서 오른쪽 언덕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면 계단식 돌길을 올라야 했다. 계단을 오르자 머리가 묵직해졌다. 목적지에 다 왔다는 안도감?에서 성급하게 오르막을 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아차! 싶어 속도를 줄여
주역 행신문에 호흡을 맞춰 걸음을 옮기니 훨씬 나아졌다.
“최선생님 정말 힘드네요. 앞으로가 더 걱정입니다.”
“김원장님만 힘든게 아니고 다들 힘들겁니다. 말은 안해도 다들 똑같으니까요”
“최선생 대단하십니다. 배낭에다가 무거운 카메라까지, 원만하면 짐을 포터에게 맡기시지 요”
“앞으로 더 어려운 길을 만나면 배낭은 맡기고 카메라만 메고 갈까봅니다.”
나는 똑닥이 카메라가 아니라 ‘캐논 5DⅡ’ DSLR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하는 말이었다.
“오늘 올라오면서 ‘정말 잘 왔다’는 생각과 ‘뭣하러 이 고생을 하면서 왔을까’하는 부정적 인 생각을 반복하면서 올라왔습니다.”
“그게 트레킹의 묘미일지도 모릅니다. 인생도 기쁨과 슬품이 수도없이 교차하지 않습니 까. 기쁨만 있거나 슬픔만 있다면 그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습니까?”
룸메이트 김보일원장은 서울에서 학원을 운영하면서 백두대간을 두차례나 했고 국내산은 거의 다 섭렵한 원로 산악인이다. 히말라야는 처음이란다.
남체마을 위쪽은 롯지가 빽곡하게 들어서 있고, 중간 조금 아래쪽에 상설시장이 있었다.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시장은 제법 규모가 큰 편으로 주로 기념품 가게가 많았고, 그 다음은 지도 파는 가게, 등산 장비 및 등산복 파는 가게, 맥주집, 빵집, 환전소, 댄스홀까지, 그야말로 야생의 세계에서 만난 문명세계 같았다.
이곳 남체시장의 등산복들을 보면 몽땅 다 노스페이스 제품들의 전시장 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 좁은 시장골목에서도 좁기오가 우선 통행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좁기오가 뎅그렁거리는 워낭과 커다란 뿔을 끄덕이며 지나가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가장자리로 비켜서야 했다. 골목길에가 배설물을 흘리고 가면 그것 또한 피해야 했다. 남체부터는 좁기오 똥도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땔감을 구하기가 어려워 좁기오나 야크의 똥을 말렸다가 연료로 쓰기 때문에 이놈의 똥은 똥값이 아니었다. 이 골목에는 야크나 좁기오 뿐만 아니라 더러는 염소 떼가 지나가는데 이것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느릿느릿하고 근엄한 표정의 시골 노인같은 야크와 도시의 중년같이 세련된 좁기오에 비해 염소데는 총총걸음으로 까불까불 부산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인생을 달관한 존재같은 야크나 좁기오에 비해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개구쟁이 같았다. 이렇게 사람과 가축이 함께 누비고 다니는 좁은 골목길의 풍경은 고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봄직한 장면인데, 이런 고풍스러움이 남체에서는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한편 남체바자르에는 사람과 동물이 서로 뒤엉키면서도 마치 고도의 통행기술을 발휘하듯 전혀 부대낌없이 제각각 제 갈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남체는 인간적인 논리보다는 동물적인 감각이 더 필요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묵을 롯지는 시장통 조금 위쪽에 언덕에 있었다. 3층자리 롯지는 언덕의 경사면에 위치한 탓으로 아래 정문으로 들어가면 3층으로 올라가야 하고, 옆문으로 들어가면 2층으로 들어가는 전형적인 산악 형 건물 구조였다. 롯지 안으로 들어가면 어둡고 외형에 비해 허술했다. 나무판자로 된 바닥에서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몸무게 때문인지 판자 바닥이 흔들거려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웠다.
우리 일행은 3층에 방을 잡았다. 2층에 방이 있다면 3층방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다 들리기 때문에 전혀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방에 들어서자 우선 옷을 벗어 옷걸이용 못에다 옷을 걸다가 ‘흐윽’하고 웃음이 나왔다.
벽에 박아놓은 대여섯개의 못이 악보의 음게처럼 크기나 높이가 제각각이었다. 이제야 이곳이 고산지대이고, 건축자재가 귀한 곳이란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룸메이트 김보일 대원이 몸이 찜찜하다며 샤워를 하러갔다.
‘샤워, 머리감기, 술마시기......’ 이것이 고산병하고는 친구들인데... 괜찮으려는지?
고산병 예방규칙에는 분명 샤워하지 마라, 머리 감지마라, 술 마시지 마라, 물을 많이 먹어라 등등 가이드로부터 수없이 들어온 말이고, 더우기 히말라야에는 처음으로 온 분인데...
그분의 샤워가 왠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분은 우리 방이 있는 3층 통로 맨 끝에 만들어 놓은 창고같은 샤워장에서 샤워를 했다.
무슨 샤워를 그리 오래하는지 30분 정도 지나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별로 개운한 표정이 아니었다. 하도 물이 조금씩 나오고 물이 미지근하여 오히려 춥기까지 했다면서 벗어놓은 옷을 주섬주섬 도로 챙겨 입는다.
히말라야에 와서 가장 괴로운 시간이 저녁 식사가 끝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게 있어서 밤이란 휴식과 행복의 시간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어둠에 대해서 원초적인 공포?에 떨고 있는 원시인처럼 밤이 두려워졌다. 이곳의 밤은 열악한 전력 사정으로 실내 조명이 어두워 딱히 할 일도 없고 쉴곳도 없고, 저녁식사가 끝나면 야크똥 난로가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 꽃을 피우다가 난로가 꺼지면 각자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침낭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난방은 전혀 안되고 영하로 떨어진 실내는 몹시 추웠다. 옷을 다 입은데다가 오리털 다운자켓까지 껴입고는 침낭속에 들어가 머리 끝까지 지퍼를 올리고 최대한 체온유지에 힘써야 했다. 어두운 밤 옆방에서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 침실에서 침낭속에 들어가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잠은 오지 않고... 이런 불면의 밤에 또 다른 고통은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이었다. 고산증을 예방하려고 비아그라, 다이나막스 등의 약을 먹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을 많이 먹어야 한다. 특히 다니아막스는 이뇨작용을 일으켜 물을 많이 먹게 만든다. 그렇잖아도 기압이 낮아지면서 소변이 잦아지는데 물까지 많이 먹게되니 밤중에 화장실 자주 들락거리게 된다. 마루바닥이 판자로 되어있어 삐걱거리는데다. 옆방이나 복도를 오고가는 인기척이 다 들리는 곳에서 화장실 오고가는 소리, 용변보는 소리...도대체 조용히 잠을 잘 수가 없다. 침낭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몸을 반듯하게 누워서 오지 않는 잠을 청해야만 했다. 덕택에 전부터 외우려고 했던 불경중 반야심경을 다 외울 수 있게 된것이 소득이라면 큰 소득이 되었다.
다음에 히말라야에 오게되면 침낭을 대여받아 사용하지 말고 내 체격에 맞는 큼지막한 것으로 구입해야겠다고 다짐을 하여본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한 번으로 끝내는 분들은 거의 없다. 고산경험으로 힘들었던 분들도 다시 오게된다. 히말라야는 애프터를 신청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현재를 돌아보는 걷기 여행이기 때문이다.
힘든 트레킹을 마치고 나면 히말라야의 고요한 소리가 그리워진다. 만년 설산의 빙하가 녹아내려 흐르는 강물소리를 듣는다.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소리가 정겹기 때문이다.
3일차(남체-캉주마)
밤새 들락날락하다가 새벽녘에 잠이들었다. 잠결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비몽사몽간에 룸메이트가 문을 열어주자 키친보이들이 모닝티를 가져왔다. 차가운 방안 공기탓으로 따듯한 레몬 티의 느낌이 좋았다. 컵 손잡이의 금속마저도 따듯한 촉감에 부드럽게 느껴졌다. 따듯한 모닝티 한잔에 밤새 뒤척이던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오늘 일정은 고산 적응을 위해 오전 한나절 남체에서 휴식을 취하는 날이다.
남체 뒷산에 올라 주변 경관을 감상하거나, 남체 시장을 둘러보거나, 아니면 롯지에 남아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시간이다.
모닝티 한잔을 마시고 방의 커튼을 젖히자 여명속에 한양 설산 콩데가 나타났다. 여덟팔자 지붕처럼 웅장하면서도 칼날같이 경쾌한 하얀 능선이 길게 이어진 모습이다. 방안 침대에 누워서 창문을 통해 건너편 콩데의 웅대한 자태는 마치 창문이라는 낡은 액자 속에 담겨진 사진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부랴부랴 삼각대와 카메라를 챙겨들고 혼자서 뒷산 전망대에 올랐다. 아직 어둠이 깔려있는 골목길을 돌아 나오자 언덕 정상이 빤히 보이는데 생각보다는 거리가 좀 멀었다. 고도가 점점 올라가자 발 아래로 남체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위에서 내려다본 남체마을은 부채골 같기도 하고 태극문양 같기도 했다. 남체마을 건너편에는 하dis 설산 콩데가 보이고, 언덕을 2/3쯤 올라 남체마을을 등지고 바라보니 탐세르크의 설경이 코앞에 바싹 다가왔다. 때마침 아침 시간이라 탐세르크는 역광을 받아 정상부의 만년설이 진한 푸른색으로 빛났다.
8부능선쯤 올랐을 때 언덕 위로 눈 덮인 봉우리의 끝부분이 살짝 나타났다. 점점 제 몸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봉우리는 하얀 눈을 덮어쓴 채 꽤나 경쾌하고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냈다. 바로 이 산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3개의 봉우리 중 하나라는 아마다불람(Amadablam : 6,856m)이다.
세계3대 미봉이라... 우선 이 곳 쿰부히말에 있는 아마다불람과 안나푸르나 지역에 있는
마차푸차레(Machapuchare : 6,993m), 그리고 유럽 알프스에 있는 마테호른(Mattehorn : 4,478m)이다. 아마다블람은 ‘어머니의 보석상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안나푸르나 지역에 있는 마차푸차레는 ‘물고기의 꼬리’라는 뜻으로 네팔인들이 신성시 여기는 산으로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등정하지 못한 처녀봉이란다. 마테호른은 독일어로 알프스 초원(Matte)에 솟은 뿔 같은 봉우리(Horn)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는 2009년 2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레킹때에 마차푸차레를 촬영한 바 있고, 2010년8월 유럽 알프스 트레킹 때에 마테호른을 다녀온 바 있다.
아마다블람을 처음 볼 때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앞으로 며칠간은 아마다블람 밑자락을 돌면서 트레킹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봉우리를 끼고 산을 탄다는 생각만 해도 행복하였다.
아마다블람은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주봉의 높이는 해발 6,814m이고, 그보다 낮은 서쪽 봉우리가 6,170m이다. 쿰부지역의 중심지인 쿰중이나 페리체를 지나
투클라에서 로부체로 넘어가는 언덕에서 바라보면 이 두 봉우리가 확연히 구분된다.
아마다블람은 티베트에에서는 ‘아마’는 어머니라는 듯이고, ‘다블람’은 티베트 불교도들이 부적이나 비상약을 넣어 불단에 모셔두는 구리 ‘상자’인데, 정면에 약사여래불로 추청되는 부처님 탱화를 이 상자에 모시는 것이 보통이란다.
두 봉우리 중 낮은 봉우리인 6,170m봉 서북쪽 수직 암벽을 자세히 보면 거기 연화좌에 가부좌로 앉아 있는 부처님 모습이 어려있다. 최소한 500m 높이로 어려있는 이 좌불은 사람이 새긴 것이 아니라 수억만년간의 풍화작용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일 것이다.
만일 이 수직 암벽의 좌불을 마애불로 분류한다면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가장 커다란 마애불일 것이다.
몇 년전 쿰부히말 순례에 나섰전 우리나라의 월정스님이 투클라 언덕에 이르러 아마다블람의 수직 암벽에 현현한 좌불을 우러러 절하고 합장하면서 ‘불국정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생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내게하는 곳으로는 이만한 곳을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런 불국정토에 사는 이곳 사람들은 정작 먹고사는 데 급급한 나머지 보배중에 보배를 잊고 사는 것을 아쉬워 했다고 한다.
남체마을 뒷산 언덕 정상에 서니 군부대 막사가 있어 그 안에 들어가도 괜찮은지 몰라 망설이다가 전망이 좋은 곳으로 올라가 삼각대를 설치하고 둘러보았다. 그 곳에서 탐세르크와‘말안장’이라는 뜻의 캉데가(Kangtega : 6,685m), 아마다블람, 로체, 구름이 걷힐 대마다 살작살짝 암봉을 내미는 에베레스트, 그리고 눕체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진짜 오늘 아침은 사전에 이런 경치에 대한 정보가 없이 여명에 빛나는 콩데를 보고나서 별로 기대하지 않고 남체 뒷산에 올라왔는데 정말 안보았으면 후회 엄청 했을것이다.
빛이 좋은 아침일찍 이렇게 멋있고 웅장한 경치를 보고나니 어제 밤 잠도 제대로 못자고 뒤척이며 고생했던 생각은 씻은듯이 가시고 이렇게 멋진 풍광을 만끽하고 아침식사를 위해 내려갈 수 있어 한결 마음이 즐거웠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이런 극적인 반전이 있어 묘미가 더해지는지 모르겠다.
올라올 때에는 잘 몰랐는데 남체로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경사가 심했다. 마주 보이는 건너편의 눈 덮인 콩데 모습은 건장한 청년의 골격을 가졌다. 보디빌더의 잘 발달된 승모근과 삼각근처럼 좌우로 힘차게 펼쳐진 콩데를 바라보다가 그 산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남체 마을을 바라봤다. 그 모습은 언뜻 ‘쿰부 히말라야를 숨 쉬게하는 거대한 허파’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롯지의 창문들이 폐포처럼 빼곡하게 들어찬 모습이 가히 예술적이다. 쿰부 히말라야의 모든 길은 남체로 통한다. 그래서 남체는 쿰부히말의 허파이자 심장이다. 남체를 중심으로 혈관처럼 퍼져나간 산길들을 통해 쿰부의 삶이 서로 교환되고 있는 것이다.
‘교통의 요지 남체...’ 바퀴달린 것이라고는 자전거 한 대도 없는 이곳이 쿰부 히말라야의 교통의 요지라고 생각하니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론 이해가 되질 않았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수많은 인파와 차량들로 가득한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 보다도 이곳 남체의 땅값이 더 비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보다 지리산 중산리의 땅값이 더 비싼 격인데, 오늘도 이곳에서는 롯지를 짓느라 공사가 한창이다.
오늘 아침식사는 북어 해장국에 쌀밥으로 간단하게 때운 우리 일행은 내가 식전에 올랐던
남체마을 뒷산에 올라 아마다블람, 롯체, 에베레스트, 눕체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삼삼오오 각자가 1시간여 사진촬영과 휴식을 한 후 남체 시장으로 내려갔다.
시장은 롯지와 붙어있어 말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대문만 나서면 바로 시장 골목이었다.
이 곳의 일반 물품은 가투만두보다 비싸고, 티베트에서 야크 등에 싣고 넘어오는 물건은 카투만두보다 싸다고 한다.
아침식사 후 삼삼오오 나누어 자연스럽게 남체 시장을 둘러보았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은 하나같이 얼굴은 쌔까맣고 어리칼은 헝클어져 정말 초췌하고 꾀죄죄한 모습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산지역에다가 습도는 거의 없는 건조한 날씨에 땀은 거의 나지 않고, 물은 너무 차서 손만 씻어도 시릴정도이니 목욕·샤워는 거의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보니 그들 가까이 다가가면 심한 몸냄새가 나서 쉽사리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하긴 우리도 오늘이 4일째인데 샤워는 엄두도 못내고 머리도 감지 말라기에 그 수칙을 철저히 지켜왔다. 체온을 빼앗기는 것이 고산병에 걸리는 지름길이라고 하여 물티슈로 얼굴을 닦는 정도로 세면을 대신해왔다. 아마 하산하여 카투만두에나 가야 몸을 한 꺼풀 벗기는 목욕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오전 11시경 이른 점심을 들고는 12시경 이곳 남체에서 세 가지 기억을 가지고 떠난다.
하나는 창문 밖의 콩데 풍광과, 다른 하나는 야크 똥에 대한 기억, 그리고 기압의 변화로
봉지 속에 든 모든 물건이 빵빵해진다는 물리적 변화. 그 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1회용 커피 봉지도 막대 풍선처럼 빵빵해지고, 과자 봉지도 쿠션처럼 터질듯이 빵빵해지는 것이었다. 그런 팽창현상은 사람 얼굴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내 룸메이트 김보일님의 얼굴이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고 볼에 밀려 입이 조그마해진 모습이 ‘복어’를 연상케 하였다.
우리 일행은 자외선에 대비하여 선크림과 입술 립크림을 듬뿍 바르고, 눈을 보호하기 위해 고글도 쓰고, 목에는 다용도 스카프로 단단히 무장을 하였다. 룸메이크 김보일님은 엄청난 양의 선크림을 바른다. 아마 저 선크림의 흔적이 없어지려면 저녁나절은 되어야 할 것 같다. 일본 기생들처럼 하양게 얼굴 화장을 한 김보일님을 바라보고 모두들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롯지에는 거울이 없어 정작 자신의 얼굴은 볼 수가 없다. 그로 인해서 우슴거리가 심심찮게 발생하기도 한다.
롯지를 나서서 아침에 올라갔던 남체마을 뒷산 중턱을 지나 캉주마(3,560m)로 향하는 길은 잡풀과 키 작은 관목들이 듬성듬성 있는 거의 오르내리막이 없는 평지나 다름없는 산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은 우리나라 산길과는 사뭇 달랐다. 히말라야의 높은 산 6,7부 능선에 가파른 경사면을 후벼 파듯 만들어 낸 길이기 때문에 왼쪽은 벼랑처럼 깎아지른 가풀막이고, 오른 쪽은 낭떨어지 같은 사면이 협곡 아래 두드코시 강으로 이어졌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산 허리를 한 구비를 돌 대마다 전망이 시원하게 트이는 곳이는 티베트식 불탑인 초르텐이 있었다. 우리는 초르텐을 만날 때마다 아마다블람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모두들 이곳 초르텐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것은 초르텐이 있는 곳은 예외없이 전망이 좋고 휴식을 취하기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는 다른 팀 또는 다른 나라, 다른 인종, 심지어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까지 서로 아무 거림낌없이 사진을 찍어주며 함께 웃고 즐긴다. 그 모습에서 내가 떠 올린 말은 ‘쿰부히말라야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곳 쿰부에 들어온 사람은 본인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서서히 쿰부인이 되어갔다. 마치 다양한 야채를 믹서기로 갈아서 동질의 야채죽으로 만들어 버리듯이 히마라야의 공기, 사람, 풍광은 거대한 내츄럴 믹서기가 되어 그곳의 사람들을 쿰부히말라야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인종과 언어와 국가를 초월한 새로운 인종 ‘쿰부히말라야인’.....
이렇게 히말라야는 인간의 존재감을 가볍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것 같다. 이것이 히말라야가 인간에게 주는 또 하나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한시적으로나마 인간 융합이 가능한 곳이 쿰부히말라야인 것이다.
여기서 캉주마까지는 평탄한 길로 이어져 있다. 오전 고소 휴식을 취하기도 하여 모두들 마음이 편안해진 건지 걸음도 설렁설렁, 이곳저곳에 카메라도 들이대며 상춘객처럼 즐겁게 걷는다. 이제는 쿰부히말에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무섭게 뿔을 치켜세우고 걸어오는 좁기오 떼를 만나도 서둘러 피하지 않게 되고, 설령 어쩌다가 내 몸 쪽으로 뿔을 들이밀어도 나를 떠받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오후3시경 우리일행은 캉주마(3,560m) 롯지에 도착했다. 3시간여 산 허리를 굽이굽이 돌면서 그 장엄한 설산에 매료되었다.
캉주마는 전망이 뛰어난 휴게소이다. 전망좋은 롯지 두 채와 벼랑위에 지어놓은 빵 파는 레스토랑 하나가 전부인 곳이지만 아마다블람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며, 남체를 떠나서 처음 만나는 휴게소인 탓에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좁기오떼가 지나가면서 일으키는 먼지가 상당한 공해로 작용하지만 오늘 오후도 날씨는 여전히 쾌청했다.
소박하고 촌스럽고? 까무잡잡한 롯지 여주인의 소리없는 미소를 받으며 2층 전망좋은 방에는 어느새 포터들에 의하서 카고백이 도착해 있었다.
여기 캉주마의 백미는 역시 아마다블람 전경이었다. 우리는 여기를 떠날 때까지 아마다블람의 진수를 마음껏 맛보기로 했다. 그래서 짐을 대충 정리하고는 카메라를 들고 아마다블람의 자태를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둠이 서서히 다가오자 그렇게 쾌청했던 날씨는 온데간데없고 엄청난 구름떼가 몰려와 히말라야의 모든 설산들을 덮어버렸다. 할 일 없어진 우리 일행은 식당으로 집합 야크똥 난로가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잡담들이 오갔다. 이런 시간에는 구성지게 입담 좋은 사람의 인기가 최고다. 오늘의 주인공은 서울에서 구의원을 역임한 김연수님의 집장촌 얘기가 단연 좌중의 귀와 눈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