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발상지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무장읍성) #1
<전북 고창군 주요명소 지도>
2022.9.17(토) 불갑산, 선운산 산행 및 고창 명사십리해변에서 해넘이 감상이 끝나고 고창군청 인근 탑모텔에서 1박후
9.18(일) 오전 6시 30분경 학원관광농원 청보리밭 투어를 위하여 출발한다.
학원관광농원 가는 도중에 무장읍성을 들린다.
오전 6시 50분경 무장읍성 방문자센터 옆쪽에 주차한후 약30분간 무장읍성을 둘러본다.
"동학농민혁명군의 무장읍성 진격로" 안내판.
고창 무장읍성은 1417년 무장진의 병마사에 마을을 다스리는 기능을 주어
무장진 병마사 김노가 쌓은 길이 약 1.2km의 평지성입니다.
무장읍성의 무장은 고려시대까지 무송(茂松)과 장사(長沙)의 두 고을이었던 곳을
조선시대 왜구 방어 목적으로 1417년(태종 17) 두 고을 첫자를 따서 무장이라 하고
성과 관아를 새로 마련하였다고 한다.
사적 제346호. 지정면적 182,596㎡.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서 장정과 승려 2만수천명이 동원되어 둘레 1,470척(尺), 높이 7척의 성벽을 쌓고,
성 위에 높이 1척짜리 여장(女墻 : 성위에 낮게 쌓은 담) 471개를 만들고,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남문과 동·북문을 세웠다.
성벽 밖으로는 둘레 2,127척의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파서 견고히 하고,
병마사가 현감을 겸직하는 진(鎭)을 베풀었던 곳이다.
이후 성은 더욱 넓혀 축조되었던 듯하니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둘레가 2,639척이라 하였다.
성안에는 뱀의 두 눈처럼 생긴 지형에 두 곳의 샘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읍성은 사두봉(蛇頭峰)이라 부르는, 남북으로 기다란 구릉을 중심으로 하여
평원을 마름모꼴에 가깝게 네모지게 성벽이 감싸고 있다.
둘레가 대략 1.2km이고 성벽은 바깥의 돌이 흙 속에 묻힌 채 높이 1∼2m로 확연하게 남아 있다.
해자는 너비 4m, 길이 574m가 남아 있다.
성에는 남문인 진무루(鎭茂樓)가 있으며, 성안에는 옛 고을의 풍모를 알 수 있는 객사와 동헌이 있는데,
객사는 송사관(松沙館)이라 하여 옛 무송·장사의 끝자를 따서 이름지었다.
성안에는 조선시대의 각종 건물터와 사직단·여단(厲壇)·성황단 등의 터전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이 성은 1991년 2월 21일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데
성의 둘레는 약 1,400m, 넓이는 144,949.4m²(43,847평)이다.
성내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그동안 흙으로만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이 성이 공사 때에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났었는데
성곽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 해 2월부터 5월까지 만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한편 1894년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은 이곳 무장읍성에서 맨 처음 봉기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성 주위를 둘러싼 물길인 해자는 폭 4m, 길이 574m 정도로 그 흔적만 남아있다.
무장읍성의 남문인 진무루(鎭茂樓)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인 무장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동문 터도 잘 보존되어 있다.
진무루(남문) 쪽의 성벽
성 안쪽에서 본 진무루와 성곽
읍성의 남문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층누문(二層樓門)으로 건평 4평이다.
광해군 4년(1612)에 고쳐지었으며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쳤다 하고, 1984년에 크게 중창되었다.
고창 무장객사 "송사관"《전북 유형문화재 제 34호》
무장객사(茂長客舍: 전북 유형문화재 제34호) 전경
<2019년 녹두꽃, 녹두전 드라마 영화 촬영장소>
읍취루 앞에 조성된 연못
객사 우측에 있는 읍취루(揖翠樓)
동학혁명 무장기포지인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복원사업의 하나로 축조되었다.
당시 주민 생활상을 살피고 민정 시찰 용도로 활용한 읍취루는 한식목조 2층 누각 68여㎡ 규모로 조성되었다.
읍취루는 예를 갖추며 금조를 만나는 곳이라 하여
업무를 보았다기 보단 외부인을 맞이하여 환담하며 화합을 갖는 공간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