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2013년 12월 08일
☞ 산행날씨: 맑음
☞ 참석인원: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댓재-황장산-1,105봉-1,069봉-1,062봉-준경묘 갈림길-큰재
1,059봉-귀네미마을 갈림길-자암재-헬기장-환선봉(지각산)-예수원 갈림길
덕항산-새목이-구부시령-1,055봉-1,017봉-997봉-한내령-951봉-푯대봉
☞ 소 재 지: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미로면, 신기면, 도계읍
태백시 조탄동 하사미동, 상사미동, 창죽동
요즘 얼치기 불교신자이기는 하지만 창피해서 얼굴을 못들겠다.
일련에 스님들이 하는 행태... 시정잡배 보다도 못하는 짓거리 뭐라고 해야할까?
일반사람들이 있는 연수원에서 술판 벌리고 노래하는 저급한 행동
그렇게 술먹고 노래하고 시정잡배보다도 못한 짓거리 하고 싶거든
파계하고 환속을 하여 맘대로 하던지... 왜 먹물 옷입고 부처님을 욕보이게 하는가?
2000년을 도도하게 이어온 한국불교 욕먹이지 말고 중노릇 제대로 좀하소.
그리고 스님들 앞에서 온갖 아부를 떠는 덜떨어진 반푼이 불자들
스님들한테 돈 갖다주지마소...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수행해도 모자랄 판에.
돈과 권력 그건 스님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아닌가요.
정말 창피한 짓거리 하지말고... 당신네들 때문에 처절하게 수행.참선하는
고승.대덕 욕먹이지 말고..성직자들이 돈 맛을 알면 이 사회는 희망이 없소
제발 중노릇 제대로 하던지 아니면 때려 치우던지 참으로 한심하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와 고도표
서울서 삼척가는 고속버스표
지난 10월 2주에 불알친구인 바람친구 아들 결혼식이 일요일이라 빠진
백두대간 댓재에서 피재구간을 땜빵을 갈려고하니 괜스레 마음이 바빠진다.
오늘 오전에 결혼식 한군데 들렸다가 부지런히 2번째 결혼식장인
동료산꾼 원일님의 아드님 결혼식에 참석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잔무를 정리한 다음에 서둘러 베낭을 메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경부고속터미널(19:00)
경부고속터미널에서 19시발 삼척행 고속버스에 오른다.
횡성휴게소(20:20)
횡성휴게소에서 내려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다닌 탓에 내일 산에서
먹을것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 휴게소 편의점에서 우유 하나, 커피
쥬스 하나를 사서 베낭에 넣고 다시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진다.
삼척고속버스 터미널(22:50)
횡성 휴게소부터 잠에 빠졌다가 잠에서 깨니 버스는 강릉을 지나
옥계를 통과하고 있고 잠시 후 동해에 들려 손님을 내려놓고
삼척버스 터미널에 도착을 하여 버스에서 내린다.
터미널을 빠져나와 지나가는 사람에게 찜질방 위치를 이곳에서 20분
이상을 가야 한다기에 택시를 타니 요금은 기본(2,800원)이다.
택시기사에게 내일 아침 05시에 댓재를 가야하니 와달라고 예약을 하고 찜질방을 향한다.
삼척온천 찜질방(23:10~05:00)
삼척온천 찜질방은 웨딩센터, 호텔, 찜질방이 같이 있는데
시설은 상당히 좋은 편이지만 물은 그리 좋은편이 아니다.
원래 이곳은 레미콘 공장이었는데 지하수를 파다가 더운 물이
나오는 바람에 온천으로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찜질방에 들어가서 입장료(9,000원)를 주고 락커 키를 받아서
샤워를 하고 잠을 자기위해 찜질방으로 올라가니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들은 많이 있는데 벌써부터 코고는 사람들이 많아
이곳저곳을 찾다가 조용한 곳이 있어서 거기서 매트를 깔고 잠을 청한다.
3시간 정도를 맛있게 잠을 잤나... 그런데 50대 초반의 여인이
나를 보더니 ‘아저씨 여기서 있으면 어떡하냐면서 빨리 나가라고’ 한다.
아줌마 아무데서나 자면되지 당신 자리도 아닌데 시비냐고 하니까.
이곳은 여성 수면실이란다... 난 찜질방에 여성 수면실이 있다는걸
처음 알았다... 대한민국 남자들 참으로 불쌍하다.
갈수록 위축되는 설 곳없는 남자들의 세계... 이게 대한민국 남자들의 실상이다.
아줌마에게 쫓겨나와(?) 다른 곳에서 잠을 청하려니 한번 깬 잠이
다시 오질않아 1시간을 뒤척이다가 04시에 욕탕에 들어가 몸을
따뜻하게 한 다음에 면도와 샤워를 하고 베낭을 챙겨 05시에 나오니 예약한
택시가 기다린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삼척에서 유일하게 24시간
영업하는 해장국집에 들려 식사를 하는 사이에 택시는 대기를 한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다음에 다시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댓재로 향한다.
택시를 타고 30여분을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가니 댓재에 도착한다.
택시 요금이 대기 요금을 포함하여 22,700원이 나오는데 택시 기사가
고양이 쥐 생각하듯이 30,000원만 달라고 한다.
처음엔 미터기 요금대로 달라고 해놓곤 무슨 소리냐고 하니까
25,000원만 달라고 한다... 더 이상 시비하기 싫어서 25,000원
주고 택시에서 내리니 기온은 -3도를 가리키는데 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부는지 체감온도는 -10도는 되는것 같은 느낌이다.
댓재(810m:06:20)
두타산과 덕항산을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에 있는 댓재는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을
연결하는 고개로 예로부터 삼척지방에서 하장,정선을 거쳐 서울로 가는 주요 고갯길이었다.
꼬불 꼬불 급경사의 15km에 이르는 도로를 차로 오르는데도 현기증이 날만큼
위험한 해발 810m의 고갯길이다. 대나무가 많다는 뜻에서 유래된 댓재는 일명
죽현(竹峴), 죽치령(竹峙련嶺)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은 4,5km 이르는 댓재옛길이
복원되어 또다른 산행길의 멋을 더해준다.
1984년 10월 지금의 도로가 개통되기까지는 영동(강릉지방)과 영서(원주지방)를
넘나들던 옛 고갯길로서 보행자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택시에서 내려 잠깐동안 장비를 점검하고 산행을 준비하는 사이에 손가락이
빠져나갈 것 같은 추위가 엄습해오고 바람이 어찌나 센지 몸을 가누기가 힘이든다.
서둘러 해드렌턴을 켜고 자켓을 하나 더 입고 산행을 시작한다.
댓재 표지석 뒤에 있는 詩
정일남 시인은 삼척시 미로면 출신이라서 미로에서 하장으로 넘는 댓재의 시가 의미 있다.
댓재 이정목
황장산(黃腸山:1059m:06:25)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과 미로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황장목을 쓰기위해 왕실에서 일체의 벌목과 개간을 금하는
봉산(封山)으로 정하면서 부터 황장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왕실의 관곽(棺槨)재와 궁궐 건축에 쓰일 황장목(黃腸木)을
확보하기 위해 지정한 황장봉산(黃腸封山)이라는 보통명사가 ‘황장산’(黃腸山)으로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이곳 강원도 삼척의 黃腸山은 산림청 선정 100명산인 문경의 황장산과 同名異山인데,
이름의 유래가 옛날에 황장목이라는 질 좋은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점과 함께
현재에는 황장목은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점까지도 공통점이 있지만,
문경의 황장산이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릴 만큼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는 반면에
이곳 삼척의 황장산은 북쪽의 두타산과 남쪽의 덕항산이라는 두 곳의 100대 명산
사이에 낀 그저 평범하고 순하기 이를 데 없는 산봉우리라는 점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질좋은 소나무를 적송 또는 금강송이라 하는데 이들은 주로 강원도나
경북 북부지방에서 자라며 잔가지가 적고 곧게 자라서 중요한 목재로 활용하였다.
그런데 한때 이런 적송(赤松)이 외지로 반출되는 집산지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춘양역이었기에 춘양목이라는 별칭이 있다.
그런 적송이 오래되어 300년 이상 고목이 되면 속에 송진이 배어들어 누렇게 되므로
황장목(黃腸木)이라 하며 잘 썩지않아 적송중에서도 적송중에서도 최고로 질이좋은
소나무로 분류되었고 황장목이 생산되는 산을 황장산(黃腸山)이라 불렀다.
댓재에서 15분만에 황장산에 도착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허전하다.
자세히 보니 헤드렌턴에 신경쓰고 바람이 너무 불어 옷에 달린 모자위에
다시 쓴 모자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렀다고 어둠속에 찾아 나설수도
없고하여 옷에 달린 모자로 바람을 피하며 정상에 도착을 한다.
황장산 정상 이정목
황장산 정상 주위에는 어둠속이라곤 하지만 황장목(黃腸木)은 눈을 씻고봐도
보이지 않아 이름이 무색하다. 능선 좌측 아래의 삼척시내 야경만이 찬란하다.
조선지도 삼척편
삼척시 지도(위키백과 인용)
삼척(三陟)의 지명유래
삼척은 신라 때는 올곧은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는 실직(悉直)에서 꼭 지켜야만
할 땅이라는 북진(北鎭)으로 바뀌더니 고려 때는 오름의 땅이라는 척주(陟州)
그리고 따로 보배로운 땅이라는 진주(眞州)라고 하는 곳이더니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숫자 三이 들어간 세 가지 오름4)의 땅 삼척(三陟)이라 하는 곳이다.
이곳은 한때 군(郡)의 넓이나 인구, 세수(稅收)규모가 남한에서 최고였다.
지금의 태백시와 동해시의 남부 북평 지역이 모두 삼척에 속했다.
남평이라 하지 않고 북평이라 함은 삼척을 기준으로 ‘뒤뜰’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짐작을 해보면 강릉이 ‘하슬라’로, 삼척이 ‘실직’으로, 두 지역은 국경도시로 북진과 남진을
시도하기 위한 동해안 전초기지로 서로 경쟁관계였음을 생각할 수 있다.
실제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를 나타내는 화강암으로 된 1.5M 높이 정도의 지줏돌이
부곡동 승지골에 가면 보인다. 향로봉과 송이고개로 이어지는 구릉에는 고구려 군사가
매복하고 평릉과 부곡에는 신라군사가 매복하여 국경충돌이 자주 벌어진 곳이다.
근처에 위치한 사문치라는 고개도 삼국통일 후 김유신이 死門峙에서 士文峙로
개명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삼척은 묵은 한 왕조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왕조가 창업의 꿈을 키운 예사로운 땅이 아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의 외향이기 때문이다.
목조의 아버지 이양무의 묘인 준경묘와 어머니 이씨의 묘인 영경묘가 삼척에 있다.
전주지방 호족이었던 이안사가 기생 한 명을 두고 산성별감과 다투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몸을 숨겨 찾아온 첩첩산중인 삼척시 미로면 할기리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부친상을 당해
묘자리를 찾던 중 “여기다 소 백 마리를 잡아 개토제(開土祭)를 올리고 금으로 관(棺)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면 5대 후에 창업할 귀한 인물이 나올 명당이다”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
고승의 말을 따라 백 마리의 소 대신에 하얀 소[白牛]와 금관 대신에 금빛 나는
마른 귀리 짚으로 관을 만들어 묻었다는 무덤이 이른바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 2년(1393년)에는 현에서
부(나중에 삼척도호부)로 행정구역의 격이 승격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고려왕조가 마직을 고한 비운의 땅이기도 하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부자가 1차 원주에서 2차 간성을 거쳐 다시 이곳으로 3차로 유배된 곳인데
반역을 도모한다는 죄를 뒤집어 씌어 사형을 집행한 ‘살해재’가 ‘싸리재’ 또는 ‘사래재’가 있는 곳이다.
또 삼척은 우리민족의 억눌린 기상이 펼쳐진 곳이다.
동안거사 이승휴(動安居士 1224-1300)에 의해 두타산 천은사에서 고려 충렬왕 13(1287년)에
칠언시(七言詩)로 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완성한 곳이기 때문이다.
삼척의 역사적 인물로는 독도를 정벌한 신라의 장수인 이사부와
신라시대 고승인 자장율사가 있고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몬주익의 영웅으로 불린 황 영조가 이 지역 출신이다
황장산 정상 삼각점(△삼척440 / 2005복구)
황장산 정상에서 유순한 안부 길을 걷는다.
이번 구간은 거리는 26km가 넘는 만만찮은 산길이지만 강원도의
산답지 않게 참으로 유순하고 편한 길이긴 하지만 먼 거리에다가 새벽
4시정도에는 출발해야 되는데 날씨도 춥고 나홀로 산행이라 어둠을
피해 늦은 6시가 넘어 출발을 하였기에 서둘러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조금을 지나니 산죽지대가 잠깐 나오다가 낙엽길을 만난다.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동해바다 쪽은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06:45)
위험한 구간은 로프로 설치해놨다.
일출이 시작되려나보다 (06:50)
지대가 높은 산이라 그런지 해도 빨리 뜨는 느낌이다
1,105봉(06:53)
정상에는 ←황장산 1.5km →큰재 2.9km의 이정표가 있다.
1,069봉(07:10)
정상에는 3등 삼각점과 ←황장산 2.5km →큰재1.9km 이정표가 있다.
아무도 찾지않아 낙엽속에 묻혀있는 1,159봉 삼각점
1,159봉 삼각점(△ 삼척310 / 2005재설)
날이 밝으면서 삼척의 산그리메가 보이기 시작하고...
준경묘 갈림길(07:15)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 성계의 5대조이며 목조의 아버지인 양무장군의 묘이다.
조선개국을 합리화한 용비어천가 첫장에 등장 하는(목조.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
중에서 목조 이안사는 전주에 살았다가 전주 산성별감과 기생을
사이에 두고 다투어 사이가 나빠 처가인 강원도 삼척으로 피해 왔다
목조 이안사는 부친이 죽자 이곳에서 장사 지냈고 모친이죽자 동산리에 장사 지냈다
그후 별감이 다시 삼척 으로 부임 한다기에 함경도로 이주 해 여진에서 벼슬을 했다 한다
고종 광무 3년(1899)에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건축하였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산자수려한 곳이다.
이 곳의 낙락장송인 황장목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으로 양친을 안장한 뒤, 5대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에서 4㎞ 떨어진 곳에 목조의 어머니 이씨의 묘인 영경묘(강원도 기념물 제43호)가 있다.
준경묘(濬慶墓:강원도 기념물 제43호)
준경묘에 얽힌 조선의 개국 설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왔는데,
삼척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양무장군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묘 자리를 찾고 있던 중 산 속에서 한 도승이 동자승에게 하는 애기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이 곳에서 장사를 지내면 5대 안에 한 나라를 개국하는 그런 인물이 태어날 것이다.
그럴려면 반드시 개토제(開土祭)때 100마리 소를 제물로 바쳐야 하고,
금으로 만든 관을 사용해야 한다"
이에 목조는 궁리 끝에 100마리의 소(百牛)는 흰 소(白牛)로 대신하고,
금으로 만든 관(金棺)은 황금빛이나는 귀릿짚으로 대체했다.
그렇게 해서 예언대로 이성계가 태어나게 됐다는 이야기다.
백우(百牛)를 흰소(白牛)로 대신하여 천년 갈 조선이 5백년만 유지 됐다고도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이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조선왕조의 수명이 500년이였다고도 한다.
준경묘의 풍수지리 - 백우금관형(百牛金棺形)
100마리의 소를 잡아 피를 뿌리고, 금으로 관을 만들라는 도승의 말에 따라,
근처에서 흰색 소 즉, 白牛로 百마리 소를 대신하고,귀리의 짚이 황금빛이라
귀리짚을 금으로 만든 관으로 대신해서 안장했다는 전설로
우리나라 최고의 묘자리라는 풍수지리 이론가들의 평이라고 한다.
좌청룡 우백호에 좌우로 수로가 있고 습지며 좌우 물길이 시야 끝에서 합쳐지고,
앞에는 낮은 산이 펼쳐 있고 최고의 우리나라 소나무(황장목) 숲이 넓게 펼쳐진,
명당 중의 명당 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고 한다. (사진.글 - 펌)
일출(07:28)
해뜨기 직전이 가장 춥다고 했던가 카메라 셧터를 누르려고 장갑을 벗는데
손가락이 빠져 나가는 것은 느낌이 들 정도로 손이 시리다.
1,062봉(07:30)
1,062봉 이정표
1,062봉에서 큰재 내려가는 길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풍력발전기가 나온다.
4년전 북진길서는 없었던 시설물이다... 4년만에 다시걷는 대간길 자꾸만 생소하다.
구름사이로 해는 벌써 많이 올라와버렸다
내리막 능선길을 내려오니 저 아래 큰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큰재(07:40)
삼척시 하장면 속암리 에서 동쪽의 귀네미 골로 넘어 가는 고개로써
대치재 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4년전 북진길 때는 보이지 않던
풍력발전기 때문인지 포장도로가 새로 신설되어 있다.
풍력발전단지가 새로 생기면서 대간길이 많이 변형되었다.
예전의 등로는 폐쇄되어 부득히 임도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큰재에서 바라본 삼척시 하장면 속암리로 가는 길
임도에서 바라본 지나온 1,062봉의 모습
예전의 대간길은 풍력발전단지에 빼앗기고 포장된 임도로 걸어간다.
해가 뜨면서 바람도 조금 잦아들고 기온이 올라가는지 그리 춥지는 않다.
번천국유임도(07:48)
임도를 따라서 편한길을 걸어간다.
댓재에서 너무 늦게 출발을 하였고 나홀로하는 독립군 산행이라 부지런히
걷는다 아니 길이 좋은 곳에는 뛰다시피 한다... 내가 왜이리 사는지 ㅋㅋㅋ
번천국유임도 길에서 만난 안내판
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포스트 삼아 걷는다.
고랭지 채소밭가에는 멋진 나무 한그루가 있다.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는 봉우리 올라가는 길은 눈이 무릎까지 빠진다.
물탱크 봉우리(07:55)
수몰지구 이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귀네미마을 고랭지 채소밭
1985년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에 광동댐이 만들어 지면서 광동리-조탄리-숙암리에
살던 37가구 주민들이 이주하여 집단으로 마을을 형성한 곳이
고랭지 배추가 주산물인 귀네미마을이다.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산골로 이주하여 일군 민초들의 역경을 극복한 질긴 삶의 현장이다.
그들은 팍팍하고 가파른 산비알을 개간하여 전국 제일의 고랭지 배추밭을 일구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에게는 천혜의 행운도 따랐다고 한다.
그들이 성공하기까지는 자연조건도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습기를 함유한 안개 상습지역이고 바람까지 거센 지역이라
고랭지 채소를 경작하기에는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이란다.
큰재를 1.1km를 지나왔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는 좌측 능선을 따라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가야할 능선의 궤적
내리막길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로 쓰이는 구상나무를 많이 식재해놨다.
출하 시기를 놓쳤는지 아님 가격이 맞지않아 포기했는지는
몰라도 밭에서 버려진 고랭지 배추들이 많이 보인다.
등로를 내려서니 포장된 농로가 나오고...
이정표를 따라서 대간길을 이어간다.
귀네미골 고랭지 채소밭
넓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진 고랭지 채소밭이다.
능선에 올라서면 건너편 산사면 일대까지 귀네미골 35만평의
고랭지채소밭이 펼쳐져서 장관을 이루는 이 귀네미골(牛耳谷)은 삼척시 하장면의
광동댐을 만들 때 수몰지구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켜 정착시킨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거주민들은 고랭지 채소 재배가 생계를 유지하는 방편이지만 고랭지 채소밭은
현대판 화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연 훼손 및 환경 오염을 가져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고도 대간꾼을 대간을 훼손하는 주범으로 꼽는 산림청의 태도가 못 마땅하다.
이정표(08:03)
이정표를 지나니 귀네미 마을로 이어지는 포장농로가
나오고 대간길은 농로를 버리고 좌측 숲으로 접어든다.
가야할 대간길의 궤적
숲에서 내려와 포장농로를 10m 정도 걸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눈이 많이 쌓여있고 바람이 다시 세차게 부니 상당히 춥다.
등로에서 바라본 귀네미(牛耳谷) 마을
태백시 하사미동 귀네미마을의 유래는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형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