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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6 논산지구 탑정호 은진미륵 나들이
조동화는 중학친구 4명이서 탑정호부근의 “붕어마을”이 붕어찜을 잘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붕어찜을 먹기위하여 승용차로 익산을 10:00출발,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날씨에 충남 논산의 탑정호를 답사하고, 145m의 고정산 정상을 산책중 정상부근의 바위에 세겨진 “마애불”을 구경하고, 중식은 1인당 19,000원 붕어찜으로 하였으며, 귀로길에 관촉사에 들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상 “은진미륵”을 탐방하였다.
은진미륵은 높이가 18m로 거대한 석불이다.
은진미륵은 60년전 조동화가 국교6학년때 부여 고란사 수학여행시 들렸던 장소로 추억이 기억나는 유적지다.
웬 세월이 빨리 흘러 갔을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저녁이 지나고 나면 아침이 찾아오고, 그날이 그날 세월은 도둑놈이여.
하루하루가 흘러가다보니 홍안의 시절 모습은 간데없고 황혼의 계절이 되었수다.
70을 넘어 노년기에 접어든 친구들아!
내말 들어봐.
나이들어보니 마트에 들어가 휘졌고 다녀보면 별로 살것이 없지.
내말 틀렸는가.
건강이 제일 큰 재산이여.
황혼의 노년기 70이 넘어가 보니 건강이 제일이여.
친구들이여!
여가와 건강하고 행복해야지요.
"9988234" 라는 말이 있다.
플어보면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만 앓다가 죽자. 이런 뜻이여.
인생 만사 새옹지마와 같다.
살다가 보면 어려운 상황과 행복한 일들이 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럴 때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되새길 일이다.
세월을 붙잡을수도 없고 원망할수도 없고 그러네요.
현명하게 "이또한 지나가리라" 위안 삼으며 2024 기쁘게 맞이해야지요.
12/13 익산팔봉에서는 일가족 4명 40대 부부와 중학생 아들 초등학생 딸이 숨진 집단 자살사건이 발생했네요.
내용을 살펴보니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업이 않되여 대출이자 통지서가 날라와 갚을 능력이 없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네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빛독촉에 시달려 우리주변에서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는데 안타갑고 애석하기 그지 없네요.
우리한국사회 출산율 0.6%인 나라의 현실, 공사현장 힘든일은 전부 외국인이 하고 있으며, 시골의 일손도 외국인이 없으면 농사도 지을수 없는 나라로 변했다니 대한민국의 참담한 현실입니다.
조동화의 벗님들!
시간은 쉼없이 흘러 2023년이 시작되더니 15일만 지나면 2024년의 새해가 밝아온다.
금년한해도 잘 마무리 하시고, 2024년 갑진년(용띠해)을 셀레이는 마음으로 맞이해야겠네요.
어떻게 사는삶이 잘사는 삶일까?
인생무상 화무십일홍 그려려니 긍정적으로 살면 되야.
덧없고 부질없는 삶의 여로에서 좋은일 많이 많이 하시고 그려려니 즐거운 시간 됩시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되찾을 수 없는게 세월이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후회 없이 잘 살아야 하지요.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건강관리 잘하시고 행복합시다.
감사합니다.
조동화가 서 있는곳이 60년전 국교6학년때 수학여행중 들렸던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이다.
은진미륵불은 동양에서 제일 크다고 소문난 불상으로 높이가 18m라고 한다.
<145m의 작은산 탑정호 고정산 기슭의 정상부근에 있는 “마애불”로 바위에 세겨져 있다.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고정산 정상의 남쪽 바위면에 얕은 선으로 새긴 높이 3.5m의 불상이다.>
▼논산 영사암(論山 永思庵)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위치한 '영사암'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9호 지정되었다. '영사암'은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광산부원군 김국광과 좌참찬을 지낸 김점광 형제가 아버지 김철산이 돌아가신 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1475년에 세운 사당이다.
영사암을 세울 당시 사당을 오래 보존하고 지킨 목적으로 승려를 두어 독경도 하고 제사도 지낼 수 있는 암자와 수호사를 겸하여 세웠다. 처음에는 26칸이었으나 수차례 증개축을 거쳐 지금은 4칸만이 남았고, 지금의 건물은 1875년(고종12)에 고쳐 지은 것이며, 현재는 광산 김씨의 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토종 붕어찜 전문점 탑정호 근처 “붕어마을”이다.
이곳 탑정호 붕어마을 식당은 천혜의 경관이 좋은곳으로 탑정호가 한눈에 들어오고 음식을 먹을수 있는 장소로 붕어찜 맛이 좋고 눈이 즐거웠다.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 인지 붕어찜을 먹으러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디다.
붕어찜에는 시레기가 많이 들어가고 무우도 들어가 맛이 좋아 밥을 한그릇 뚝딱하였다.
☞관촉사 대광명전 주련 설명
佛身充滿於法界(불심충만어법계) 부처님의 몸은 온 세상에 충만하여
普現一切衆生前(보현일제중생전) 일체 중생 앞에 널리 나누시니
隨緣赴感靡不周(수연부감미부주) 인연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니
而恒處叉菩提座(이항처차보리좌) 항상 그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로다.
양옆으로 한글로 한문 주련을 알기쉽게 풀어 놓았다.
우주법계에 항상 하시는 부처님
모든 중생들에게 회현을 나누시여
인연따라 감응하여 가피내리시나
큰 지혜 광명의 자리 떠남이 없으시네.
☞관촉사 미륵전 주련 설명
無爲心內起悲心(무위심내기비심) 일없는 마음속에 자비심 일으키고
無相光中有相身(무상광중유상신) 모양 없는 광명 속에서 모습을 보이시네
欲識慈顔眞境界(욕식자안진경계) 부처님(자비로운 모습)의 참된 경지 알고 싶은가?
落花啼鳥一般春(낙화제조일반춘) 꽃 지고 새우는 봄소식이네.
* 無爲心 함이 없다는 것은 무연(無緣)자비의 불보살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허공보다 넓고 큰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위하여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시고
* 모양없는 지혜광명 속에서 모습을 나투시네(중생의 근기(눈 높이)에 따라 화현을 나투심)
* 慈顔 자비로운 얼굴은 부처님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 마지막 구절은 禪的인 표현으로 불보살님의 한량없는 신통묘용을 표현한 것으로, 이 소식을 바로 알면 우리 모두 부처님일세. 봄인데 꽃이 지는 이치가 무엇일까? ---
▼아래의 사진은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공식명칭은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이다.
고려 광종 때 반야산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 아낙이 다가갔더니 큰 바위가 땅에서 튀어나왔다. 신령한 돌이라 여겨 조정은 불상을 만들기로 하였다. 광종 21년(970)에 혜명(慧明)대사가 석공 100명과 공사를 시작하여 37년이 지난 목종 9년(1006)에 돌을 다 다듬었지만, 너무 커서 합칠 방법을 찾질 못하였다. 혜명대사가 고민에 빠진 어느날 동자 두 명이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 불상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동자들은 평지에 불상의 아랫부분을 먼저 세운 다음 그 주변에 모래를 높이 쌓아 불상의 가운뎃부분을 위로 밀어 올리고, 다시 그 주변에 모래를 높이 쌓아 불상의 윗부분을 밀어 올리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훗날 이 마을은 모래 사다리라는 뜻으로 사제촌이라고 불렸다.
국사 교과서나 옛 학술지 등에서 '못생겼다'며 꽤나 폄하를 당했던 불상이다. 앞서 통일신라의 불상들이 사실적이고 근엄함을 강조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고려의 불상들이 상대적으로 조형미, 균형미 등 부족한 면모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이 은진미륵이 자주 꼽혔기 때문이다.[3] 심지어 미술사학자 김원용은 '3등신에, 미련하게 생긴 얼굴, 불상이라기보다는 그냥 돌기둥, 신라의 전통을 잃어버린 한국 최악의 졸작'이라는 박한 평가까지 내릴 정도였다.[4] 하지만 후에 와서는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스타일로 재평가받았고, 이러한 점이 부각되면서 기존의 보물에서 2018년 4월 20일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나무위키===
관촉사 사적비
관촉사 사적비는 관촉사의 상징인 은진미륵 및 정문과 법당의 조성 경위를 밝히고 있는 사적비로서, 1743년(영조 19) 승려 각혜와 속인으로 구성된 불량계원(佛粮契員) 다수가 참여하여 세운 비이다. 관촉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인 마곡사의 말사로 963년(광종 19) 혜명(慧明)이 창건하였다.
관촉사 사적비는 화강암으로 변이 115㎝인 대석 위에 80×57㎝ 크기의 방형 비좌를 마련하였고,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은 높이 133㎝, 폭 60.5㎝, 두께 30.5㎝의 크기로 측면에 ‘관촉사사적비명’이라 새겨져 있다. 우진각 지붕 모양의 옥개석은 80×97㎝ 크기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금석문] 관촉사 사적비에는, “968년(광종 19) 사제촌의 여자가 반야산 서북쪽 모퉁이에서 고사리를 채취하고 있는데, 홀연 동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가보니 큰 돌이 땅 속에서 솟아나오고 있었다. 괴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사위에게 말하니, 사위가 곧 현감에게 고하였다. 관에서는 조사와 함께 회의를 통하여 “이는 반드시 불상을 만들 징조다.”라는 결론을 얻고 사신을 팔로에 보내어 공사를 맡을 사람과 부처상을 만들 사람을 구하여 혜명이 천거되었다. 조정에서는 공장인 100여 명을 선발하여 968년(광종 19)에 일을 시작해서 무릇 37년이나 경과한 1006년(목종 9)에 만들어졌으며, 불상의 몸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중국의 승려 지안이 이를 보고 쫓아와서 ‘광명이 동시에 서로 응한다’라고 하여 관촉사라 하였다.”는 은진미륵과 관촉사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성기록은 ‘관촉사사적비(灌燭寺事跡碑)’에 남아 있다. 이 비는 1743년(영조 19)에 건립되었다. ‘관촉사사적비’의 기록은 조선시대 작성된 것이지만 그 내용은 사실적이며 구체적이다. 특히 석조미륵보살입상의 건립 공사를 970년(광종 21) 시작하였다는 내용과 불상의 실측치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며 불상을 조성하는 과정의 애로사항과 이를 해결하는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관촉사사적비’의 글자 수는 총 1,159자이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관촉사사적비(灌燭寺事跡碑)
옛날을 상고하니 고려 광종(光宗) 19년 기사년(969년)에 사제촌(沙梯村)의 여인이 반약산(盤藥山) 서북쪽 골짜기에서 고사리를 캐는데 홀연히 어린아이의 소리가 들려서 이윽고 나아가 보니 땅속에서 커다란 바위가 솟아 나오는 것이었다. 마음에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돌아와서 그 사위에게 말을 하니 사위가 곧바로 관아에 고하고 관아는 조사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백관에게 명하니 회의를 하니 아뢰기를 “이는 필시 불상을 만들라는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의원(尙醫院)에 명하여 팔도에 사신을 보내 널리 불상을 만드는 장인을 구하게 하였다. 승 혜명(慧明)이 추천에 응하고 조정은 장인 백여명을 골라서 경오년(970년)에 일을 시작하여 병오년(1006년)에 일을 끝마치니 무릇 37년이 걸렸다.
불상이 이미 완공된 후 도량(道場)에 모시려고 하여 마침내 천여 명이 힘을 합쳐 옮겼는데 머리부분이 연산(連山)땅 남촌 이십 리에 도착하자 그로 인해 마을의 이름을 우두(牛頭)라고 하였다. 혜명(慧明)스님이 비록 불상은 완성하였으나 세우지를 못하여 걱정하고 있었다. 마침 사제(沙梯)마을에 도착하자 두 명의 동자가 진흙으로 삼동불상(三同佛像)을 만들며 놀고 있었는데 평지에 먼저 그 몸체를 세우고 모래흙을 쌓은 뒤 그 가운데에 다음을 세워 다시 이처럼 하니 마침내 그 마지막 부분도 세우는 것이었다. 혜명이 주의 깊게 보고는 크게 깨닫고 기뻐하였다. 돌아와서 그 규칙과 같이 하여 이에 그 불상을 세웠으니 동자는 바로 문수(文殊)보살과 보현(普賢)보살이 현신(現身)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불상의 신장은 55척 5촌, 둘레는 30척이고 귀의 길이가 9척, 눈썹사이가 6척이며 입의 지름은 3척 5촌, 화광(火光)이 5척이다. 관의 높이는 8척이니 큰 덮개는 넓이가 11척이고 작은 덮개는 6척 5촌이다. 작은 금불은 3척 5촌이고 연화(蓮花)의 가지는 11척인데 혹은 황금을 칠하고 혹은 붉은 구리로 장식하였다.
이에 사방에 풍문이 퍼져 만 백성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공경히 예불하는 사람이 마치 시장과도 같았으므로 그 앞에 흐르는 냇물을 이름하여 시진(市津 : 시장나루터)라고 하였다. 세우기를 마친 뒤에 하늘에서 큰 비가 쏟아져 불상을 씻어 주었고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하게 서려 100일을 지속하였다.
미간에 있는 옥호(玉毫 : 부처의 미간에 있는 흰 털)의 광채는 온 천지를 환하게 비추었으니 중국의 스님 지안(智眼)이 하늘의 기운을 살피고는 그 빛을 따라와서 예를 올리고는 “가주(嘉州)에 큰 불상이 있어 역시 동쪽을 향해 서 있는데 광명이 같은 때에 서로 응하였다.”라고 하여 관촉(灌燭)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이후로 상서로운 기운이 때때로 불상에서 나와 곧바로 허공을 꿰뚫어 온 세상 밖으로 가니 승려의 무리나 온 나라의 귀하고 천한 무리들이나 공경하여 받들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옛날 당나라에 난리가 나서 적병들이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이 불상이 갈개 삿갓을 쓴 스님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자 사람들이 수심이 얕은 것으로 알고 물속에 뛰어들었다가 빠져 죽은 자가 반이 넘었다. 당나라 장수가 칼로 그 삿갓을 내려쳐 잘랐는데 불상위의 관도 저절로 부서져 그 표식이 완연하니 그 국가를 위하는 성심을 알 수 있다. 국가가 태평하면 온 몸이 빛나고 윤택하며 상서로운 기운이 서리고 재앙과 난리가 있으면 온 몸에서 땀을 흘리고 손에 쥔 꽃에 색이 없어지는데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축문을 올려 재앙을 없애고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기를 공경히 도모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풍속은 정성을 다하여 존경하여 높이면 하늘의 음덕이 없을 수 없어 만 가지 일을 기도드리면 그 원하는 바에 각각 부응하니 이 또한 보응(報應 :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것, 선악의 인과관계)하는 밝은 효험인 것이다.
고적에 대한 기록이 많이 없어져서 다 알기는 어려우나 정문(正門)과 법당은 처음에 홍무(洪武) 19년 병인년(1386년)에 지어졌고 만력(萬曆) 9년 신사년(1581년)에 거사(居士) 백지(白只)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강희(康熙) 13년 갑인년(1674년)에 지능(智能)스님이 개수하였고 옹정(雍正) 13년 을묘년(1735년)에 성능(性能)스님이 개수하였는데 서담(徐潭)과 박신(朴信)등이 철망을 세웠다고 한다.
불상의 회칠은 신총(信摠)스님이 전에 축대를 쌓았는데 흙과 돌이 섞여 있는 까닭에 저절로 무너져서 지극히 밝아야 할 도량이 곧 더러운 장소가 되어 버리니 고을의 노인들이 그 파괴되는 것을 개탄하며 화주(化主 : 인가에 다니면서 법연을 맺어주는 스님)가 되어 건륭(乾隆) 경신년(1740년)에 석축을 고쳐 세우고 겸하여 상과 탁자도 또한 모두 새롭게 했다고 한다. 이에 명(銘)한다.
그 높이 우뚝하며, 네모난 관 위엄 있구나.
삼층으로 연결되고 여섯 장(丈)을 더하였네.
모든 부처의 종주요, 만 가지 불상 중의 특이함이라.
신령스러운 효험이 드러나 은밀히 감응하여 어긋나지 않네.
기도를 드리면 틀림이 없고 원하는 대로 따르지 않음이 없도다.
조용히 조화의 힘을 도모하여 묵묵히 신령스러운 힘을 다하는구나.
해와 달이 함께 밝고 천지의 덕이 합하니
사방에서 소식을 듣고 만 백성 구름처럼 모이네.
온 재산을 기울여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니
촛불과 등잔은 휘황찬란하고 지전(紙錢)이 쌓였구나.
우리나라에 은혜를 베풀고 우리 어리석은 백성을 돌보아 주시네.
웅장한 자태, 빼어난 모습.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유일하리.
아! 아름답도다, 불상이여, 세상과 함께 영원하라.
숭정기원후 두 번째 계해년(영조 19, 1743년)에 안동 권륜(權倫)은 글을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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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간(開刋) 승각혜(覺慧)·서상건(徐相健)·나필재(羅必縡)
서울에 거주하는 교서관창준(校書舘唱准) 이동번(李東蕃)
일을 맡은 석수(石手)이을산(李乙山)·김산석(金山碩)
별좌(別座) 승묘휘(妙輝)
『灌燭寺事蹟銘』
稽古高麗光宗之十九年己巳沙梯村女採蕨于盤藥山西北隅忽聞有童子聲俄而進見則有大」
石從地中聳出心驚恠之歸言其女壻壻卽告于本縣自官覈秦上達命百官會議啓曰此必作梵」
相之兆也令尙醫院遣使入路敷求掌工人成梵相者僧慧明應擧朝廷擢工匠百餘人始事於庚」
午訖功於丙午凡三十七年也尊像旣具欲安道場遂千餘人並力齊運而先頭至連山地南村二」
十里因名其村曰牛頭也慧明雖成神相而方以未立爲慮適到沙梯有一雙童子戱造泥土爲三」
同佛像卽平地而先立其本積沙土而次立其中又如是而竟立其末慧明熟視大悟欣然還來一」
如其規乃立厥像盖童子卽文殊普賢化爲指敎云佛像身長五十五尺五寸圍三十尺耳長九尺」
眉間六尺口角三尺五寸火光五尺冠高八尺大盖方廣十一尺小盖六尺五寸小金佛三尺五寸」
蓮花枚十一尺或塗黃金或飭紫金於是乎四方風聞萬姓雲集敬禮者如市故名其前流曰市津」
也立畢天雨大注洗滌體像瑞氣盤欝至三七日眉間玉毫之光照曜乾坤內中國僧智眼望氣從」
來而禮之曰嘉州有大像亦東向而立光明同時相應云名以觀燭也自是之後祥瑞之氣時從梵」
相出直透半空外八表緇素之徒一邦貴賤之輩無不敬奉焉者昔在唐亂賊兵至鴨綠江此像化」
爲蘆笠僧蹇衣渡江衆知其淺驅入水中溺死者過半矣唐將以釰擊之斷其笠子而所戴盖冠自」
爾破缺其標宛然可知其爲國之誠國家太平則滿身光潤瑞氣盤空凶亂則遍體汗流手花無色」
朝廷遣官祝辭曰敬設消災國泰民安云云自古風俗盡誠尊崇無不陰隲禱其萬事則各隨其願」
此亦報應之明效也古蹟所記多有破落難以悉解正門法堂初設於洪武十九年丙寅重修於萬」
曆九年辛巳居土白只康熙十三年甲寅僧智能改修雍正十三年乙卯僧性能改修徐潭朴信等」
所造鐵網云耳佛像塗灰則僧信摠在前城築雜以土石自爲頹落至明道場便作糞穢之所邑底」
老人慨然於破壞之獘爲化主乾隆庚申改築石堞兼於床卓亦皆一新云爾 銘曰長身屹屹方」
冠峨峨層三而連丈六之加千佛之宗萬像之特靈效所著冥應靡忒有禱莫違無願不從潜運化」
權黙輸神工日月明竝天地德合四方風聞萬姓雲集傾財破産竭誠殫力燈燭煇煌紙錢堆積惠」
我邦家恤我愚蒙傑然之姿卓爾之容前古所無後今唯有於休尊像與世同久 崇禎後再癸亥」
安東權倫書 佛粮契員韓忠信方以光朴泰亨金斗發曹懿相徐有昌全億碩金漢億金儉出吳」
尙均全義英吳尙寬金泰得尹貴敏廉處謙徐斗七柳春起姜渭三柳以龍宋世謙金聖臣韓翼信」
李夏榮鄭尙紀孔汝義金夢慶金德臣文應天千載老方成矩徐就達李震蕃鄭厚必李夏茂出身」
韓世逸李得新韓泰善鄭時載寡韓氏梁龍起方漢齡金海滿成無作金寬聖梁引公曹萬鼎城卓」
主論執事折衝韓忠信看役曹懿相引勸曹漢相朴泰亨全億碩中軍曹燕相閑良方世矩曹應昌」
方成矩僧斗性僧泰日化主金錫哲僧慧兼大施主嘉善金斗發金儉山副護軍韓後信嘉義大夫」
鄭光碩折衝林震埰折衝鄭尙紀其妻梁氏折衝朴承業折衝成壽萬折衝曹漢佑折衝李廷郁朝」
奉大夫別提裵以載折衝裵弼載折衝姜尙文朴泰柳春起高萬秋 開刋僧覺慧徐相健羅必」
京居校書舘唱准李東蕃縡石手李乙山金山碩別」
座僧妙輝」
☞관촉사 사적비(1988년 한글로 해석한 사적비 설치)
밝음에서 밝음으로 이어지는 촛불 빛 그 불빛은 우리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점화되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구원의 빛이다. 그것은 보살행의 오십 육억 칠천만년의 세월을 두고 진실로 오래인 기다림 속에서 기사굴산의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용화세계의 미륵부처님에게 이어지는 거룩한 빛이다. 그리하여 빛이 빛으로 이어지는 그 촛불 빛을 우러러 옛날의 어느 스님은 관촉이라 이름 하였는지도 모른다.
논산은 놀뫼라는 고을로 공주 부여 익산 김제 등으로 이어지는 백제문화권으로 특히 이 지역에 미륵신앙이 크게 일어났던 곳이다. 공주의 수원사 미륵선화의 화랑이야기 백제 무왕의 익산 미륵사 이야기 김제 금산사의 진표율사 미륵장륙상 등 불상 유적 설화로 보아 확실히 알 수 있다.
동양 최대의 불상을 봉안한 동방승지의 제일가람인 이 절의 유래와 연혁을 조선 영조 19년 계해에 건립된 우 사적비를 근거로 살피 건데 고려 광종 19년 기사에 사제촌의 한 여인이 반야산 서북쪽에서 고사리를 꺾고 있던 중 홀연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가서 보니 큰 돌이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여인은 너무 놀라고 괴이하여 집으로 돌아가서 그 사위에게 알렸다. 사위는 곧 관가에 알리고 관은 사실을 조사하여 조정에 알렸다.
임금과 조정대신은 여러 날 회의를 거듭한 후 이는 필시 불상을 조성할 징조라 하여 그 상호가 원만하고 신이로우며 백성마다 대 복전의 샘이 될 지혜와 복덕과 자비를 구족한 일체성취의 성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는 나라가 수목처럼 자라 번영을 약속하고 뿌리 깊은 샘물처럼 국운상승과 만백성의 안녕을 이루고자하는 간절한 호국안민의 발원이었다. 불사의 총책임자는 고승 혜명대사였다. 스님은 전국의 명 석공 백여 명과 같이 경오 년에 일을 시작 병오 년에 완성하니 기간이 37년 걸렸다.
상 동체를 천여 명의 장사로 운반케 하니 그 선두가 연산 땅 남쪽 이십 리에 이르렀음으로 인하여 마을을 쇠머리라 하였다. 비록 조각을 끝냈으니 불상을 세울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근심하던 중 하루는 사제마을을 지나는 길에 두 동자가 불상놀이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동자는 진흙으로 세 동체를 만들어 평지에 맨 밑 부분을 세우고 주위를 흙과 모래로 쌓아 올린 다음 중간동체를 둥글리어 세운 후 다시 평지를 만들어 마지막 상 동체를 올려 세우는 것이었다. 스님은 크게 깨달아 일을 끝내니 두 동자는 문수보현보살의 화현이었다.
불상의 신장은 오십 오 척 오촌, 몸 둘레가 삼십 척, 귀 길이가 구척, 눈썹 사이가 육 척, 입 길이는 삼 척 오촌, 화광이 오 척, 갓 높이가 팔 척, 갓의 큰 도래가 각각 십일 척, 작은 도래가 각각 육척 오촌, 연꽃 대궁이 십일 척이며 황금으로 도금하고 혹은 자금으로 장식하였다.
이로부터 사방에 소문이 나서 여러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경배하는 자가 시장거리와 같아 그 앞 냇물을 시진이라 하였다. 성상을 완성한 끝에 큰 비가 내려 존상은 맑고 고운 오묘한 구원의 청정 상으로 영원한 원만을 갖추었으며 상서로운 기운이 37일 동안이나 주위에 서리고 눈썹 사이에 옥호의 빛이 온 누리에 비추었다.
그 빛을 따라서 찾아 온 중국의 지안스님이 불전에 예경하고 이르기를 중국의 가주 땅에 큰 불상이 있는데 동쪽을 향하여 서 있으며 그 광채가 때를 같이하여 서로 응하니 이로부터 관촉이라 이름 하였으며 서기가 반공중에 뻗치고 감돌아 서리어 전국팔도 승속귀천 할 것 없이 모두가 예배하였다.
옛날 중국 오랑캐의 난리 때에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다. 미륵이 변신하여 삿갓 쓴 스님이 옷을 걷고 강을 건너므로 적병이 강물이 얕은 줄 알고 달려들어 빠져죽은 자가 반이 넘었다. 적병의 장수가 분함을 참지 못하여 그 스님을 칼로 치니 겨우 그 쓴 삿갓의 한 조각이 끊어졌다. 때마침 불상의 갓이 스스로 깨어진 표시가 완연하니 가히 호국의 불상임을 증명하였다.
나라가 태평하면 온 몸에 광채가 나서 공중에 가득하고 나라가 흉란하면 온 몸에 땀이 흐르고 손에 가진 꽃이 색채를 잃었다. 나라에서는 축원을 고하여 아뢰기를 삼가 재앙을 없애주시도록 정성을 드리오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케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다.
사찰에 보존된 문화재는 보물 제218호인 석조미륵보살입상, 보물 제232호인 석등, 유형문화재 제53호 배례석과 오층석탑이 있다. 건물은 1965년에 세운 충령각, 1974년에 세운 삼성각 범종루와 1983년에 세운 일주문, 천왕문이 있으며, 주거 요사는 입상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정묘년의 대홍수 때에 전면 개수하였다. 법당은 홍무 19년 병인년에 처음 건립하였고, 만력9년 신사에 백지거사가 중수하였으며, 강희 15년(1674) 갑인에 지능화상이 개수하였고 옹정 13년(1735) 을묘에 성능스님이 수리하였다. 건륭 경신(1800)에 이 지방 노인들이 스스로 동참 화주자가 되어 상과 탁자를 일신 정비하고 주변 돌담을 쌓아 신성한 도량으로 면모를 갖추었다.
절 입구 공원 수목은 이 고장 실업인 이용구 회장이 헌수하고 사적비 또한 그 부인인 오차득 보살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자녀들의 지극한 효성으로 웅천오석에 관촉사 사적을 한글로 새겨 길이 후세에 전하게 되니 이 어찌 미륵세존의 용화 도량을 장엄하는 수승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반야산 푸른 솔숲 우뚝 솟은 미륵보살
얼굴에 비친 모습 거룩하신 모습이여
대자비 영겁에 걸쳐 복덕지혜 베푸소서.
황산벌 넓은 들에 메아리치는 범종소리
손 모아 큰 서원을 가슴마다 아로새겨
모두들 용화세계로 만나지게 하소서
불기2532(1988) 무진년 사월 초파일
계룡산인 용봉 이재복 글 짓고
하동후인 서강 정덕채 글씨 쓰고
주지 태관 박찬문 빗돌 세우다
<조동화가 서 있는곳은 윤장대이다.
찾아오는 사람마다 윤장대를 돌리기에 나도 돌려보며 소원을 빌어보았다.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윤장대를 세운 이유는 부처님 법이 사방에 널리 퍼지라는 의미와 우리나라에 지세를 고르게 해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 들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 이에 관촉사에서는 사찰을 찾아오는 많은 분들이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고, 희망하는 소원이 하루속히 성취되도록 하기 위하여 발원문을 작성한 후 윤장대 안에 넣고 돌리도록 성물을 조성하였다.>
☛논산 탑정호:
1941년 착공하여 1944년에 준공했으며 면적 6.36㎢, 제방길이 573m, 높이 17m이다.
탑정호는 전국에서 일곱 번째, 충남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로서 경관이 수려하며 취수탑 3개 양수장 수력발전소등이 있다. 둘레가 24㎞에 달하며 저수지수문은 6개이다.
탑정호출렁다리는 2020.10.15. 준공했으며, 길이는 600m(폭 2.2m) 높이 50m 수용인원 5,000명으로 동양최대이다.
탑정호관광은 하루일정으로 나들이 하기 좋은 장소로 추천하고 싶다.
북문 주변에 작은 야산 대명산(181.2m)이 있어 산책하기도 좋으며 둘레길이 잘 조성되여 있어 걷기도 좋은 장소이다.
탑정호에서는 2021.4.15. 0:30쯤 건양대생 남녀 선후배가 시험이 끝나고 렌터카를 빌려 운전하다가 애석하게도 운전미숙으로 차와 함께 추락한 5명(남학생2명 여학생3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논산 관촉사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반야산(般若山)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고려 광종 19년(968년)에 승려 혜명(慧明)이 광종의 명으로 창건하였다.
이 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상이자,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고도 부르는 국보 제323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다.
설화에 따르면 은진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캐던 한 여인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어 그곳으로 가보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광종이 승려 혜명(慧明)에게 그곳으로 가서 바위를 불상으로 조성하라는 명을 내리자, 혜명은 기술자들을 데리고 가서 970년부터 1007년까지 37년간 불사를 치른 끝에 불상을 완성했다.
나중에 이 불상을 보기 위해 찾아온 중국의 고승 지안(智眼)이 불상의 백호를 보고 마치 촛불(燭)을 보는 것(灌)같이 미륵이 빛난다고 하며 관촉사(灌燭寺)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관촉사 경내에는 불상외에도 석등(보물 제232호), 석탑, 석문, 배례석 외에 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법당은 고려 우왕 때(1386년) 처음으로 건립되었으나 조선 선조 14년(1581)에 중수되었고, 다시 현종 15년(1674년)에 개수되었다.
===나무위키===
은진미륵(恩津彌勒)
은진미륵(恩津彌勒)은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사(灌燭寺)에 있는 거대한 석불이다.
은진미륵의 공식 이름은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이다. 은진면에 있어 ‘은진미륵’으로 불린다. 화강암으로 만든 불상은 높이가 18.12m(폭 9.9m)로 국내에서 가장 크다. 은진 미륵은 몸통·팔 등 7개 돌조각으로 만들었다. 전체 무게는 부피와 재질 등을 고려해 계산하면 377t쯤 된다는 게 관촉사측의 설명이다.
은진미륵이 세워진 것은 1006년이다. 고려 말 승려 무외(無畏)가 쓴 ‘용화회소(龍華會)’와 조선 시대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고려 문인 이색(李穡·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 등에 기록이 나온다. 고려 광종(949∼975)의 명에 따라 승려 조각장 혜명(慧命)이 만들기 시작해 37년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당시는 거중기 같은 장비가 없었는데 어떻게 거대한 불상을 올렸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은진미륵 바로 앞에 있는 미륵전(법당) 벽을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미륵전엔 은진미륵 조성 과정을 묘사한 4개의 벽화가 있다. 그림 내용은 이렇다. 혜명스님이 돌덩이를 쌓을 방법을 찾아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동자 스님들이 냇가에서 놀고 있었다. 동자스님은 돌 하나를 세워놓고 돌 위와 주변을 흙으로 덮은 뒤 다른 돌을 그 위로 끌어올리는 놀이를 했다. 혜명 스님은 이 장면을 보고 “바로 이거다”라며 무릎을 쳤다. 그는 이 놀이에 착안해 흙을 쌓고 불상 조각을 차례로 올리는 방식으로 은진미륵을 세웠다고 한다.
은진미륵은 좌우로 빗은 머릿결 위로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불상의 머리에 얹는 관)을 썼고 두 손으로 청동제 꽃을 들고 있다. 널찍하고 명료한 이목구비는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논산신풍리 마애불
높이 3.50m. 197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마애불은 고정산(高井山)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10여m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의 남벽에 선각(線刻 : 선으로 새김)되어 있다.
이 곳은 원래 영사암(永思庵)이 있었던 곳으로 최근까지도 마애불의 앞쪽으로 법당이 있었다고 한다. 불상의 얼굴은 넓적한 사각형이지만, 친근감 넘치는 소박한 모습이다.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높이 솟아 있다. 미간에는 백호(白毫 :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의 흔적이 남아 있다.
눈은 반타원형으로 길게 반개하였으며 안면 중앙의 코가 넓적하고 입은 얼굴에 비해 매우 작은 편이다. 기름한 귀가 어깨까지 길게 늘어지고 어깨와 거의 맞붙은 비대한 목에는 삼도(三道)가 가늘게 음각되었다. 친밀하면서도 다소 서투른 조각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는 부처의 얼굴은 선각에 가깝게 얕게 조각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의 표현을 보여 준다.
두 손은 앞가슴에서 모아 마주 잡은 모습을 하고 있다. 어깨가 유달리 좁고 일직선에 가까운 체구를 이루고 있다. 착의 형식은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으로 암면이 고르지 못하고 군데군데 탈락되어 명확하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옷주름 선을 보여 준다. 옷자락의 흐름으로 보아 입상으로 생각되며, 목덜미에서부터 V자형 옷주름이 잔잔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는 보주형(寶舟形)의 두·신광(頭·身光 :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몸에서 나오는 빛)으로 구성되어 있다.
꼭대기의 치졸한 3구의 화불(化佛)로 두광을 대신하였다. 신광 또한 가는 음각선으로 불꽃무늬를 빼곡하게 새겼는데 몸통과 마찬가지로 조각 기법이 둔중하고도 어색하다. 불상의 조성 연대는 다소 세련미가 떨어지는 조각 수법과 간략화된 착의 형태, 토속적인 안면 표현에서 고려 중엽경으로 추정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동화가 국교6학년때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답사후 부여 고란사 수학여행시 고란사 뒤 낙화암 정자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이다.
당시 남학생 2반 여행생 2반으로 총 남자140명 여자 140명으로
여자 남자 따로 따로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남학생 숫자가 총 60여명만 사진을 찍은걸 상상해보니 80여명은 수학여행에 참가하지 못했구먼.
당시 어려운 농촌 생활상을 였볼수 있소이다.
부여의 기억은 낙화생이 길거리에 널려 있어 낙화생을 사서 먹어보았지.
낙화생을 실끄러미로 뀌어서 “낙화생사시오” 하며 농부들이 여관을 돌며 팔던 그시절의 추억이 생각이 스쳐 지나가 더듬어 보았소이다.
백마강 모래사장이 넓어 부여에서는 낙화생을 많이 재배했던 시절이었다.
그시절은 땅콩을 낙화생이라고 했다네.
인생의 의미
우리는 흔히 왜 사느냐고
인생의 의미를 묻습니다.
그러나 삶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은 의미를 갖고 사는게 아니라
그냥 사는 겁니다.
삶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그러면 또 하나의 굴레만 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길가에 피어 있는
한 포기 풀꽃입니다.
길가에 풀꽃처럼 그냥 살면 됩니다.
"나는 특별한 존재다. 나는 특별해야 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자신의 하루 하루 삶에 만족 못하고
늘 초조하고 불안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알면
특별한 존재가 되고,
특별한 존재라고 잘못 알고 있으면
어리석은 중생이 되는 겁니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길가에 피어 있는 한 포기 풀꽃같은
존재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인생이 그대로 자유롭습니다.
내가 남보다 잘 나고 싶고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인생이 피곤한 겁니다.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고
행복을 바란다면
마음을 가볍게 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스스로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삶이 별게 아닌 줄 알면
도리어 삶이 위대해 집니다.
- 출처 : 벨루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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