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위로가 필요한 당신에게(막6:45-52)
2024.6.30,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몇 년 전 조선일보에서 전국 20-50대 남녀 1073명에게 “행복”이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2018.1.15). 그 결과 “지난 1년간 행복한 척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전체 61.98%(665명)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어서 “지난 한 달간 몇 번이나 행복하다고 느꼈나?”라는 질문에는 “매일 행복하다”는 5.22%에 불과했고, 1-5번이 45.29%, “행복한 적 없다”가 26.19% 심지어 “매일 불행하다”는 대답이 7.2%였다.
이 조사를 분석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김석호 교수 등에 따르면, 행복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감정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는 것처럼 똑같은 행복을 추구하는 집단적인 행복집착의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적인 능력 또는 점수나 최고의 대학합격 여부를 행복의 기준으로 간주하고, 이런 것들이 없으면 자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준들에 맞추려다 보니까, 삶이 피곤해지고, 마음이 우울해 지기 쉽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어떤가? 성경은 행복의 기준을 소유에 두지 말고, 관계에 둘 것을 강조하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관계의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둘째는 사람(가족, 이웃 등)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수직관계가 형통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평안이 넘쳐서, 사람사이의 수평관계도 형통하게 된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사랑(수직관계), 이웃 사랑(수평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참된 평안과 행복을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힘써야 한다. 세상적인 것들을 기준으로 한 행복감은 진짜가 아니고, 허상일 뿐이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 그렇기에 비록 우리들이 험한 파도 같은 세상에서 힘겹게 살고 있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로인해서 사람과의 관계에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어지고,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위해 주님은 이 순간에도 찾아오셔서 사랑의 손으로 우리의 마음을 노크하신다. 우리는 다만 이러한 주님의 성품을 믿고, 마음을 열면 된다. 이것이 이 시간에 강조하고 싶은 핵심이다.
오늘 설교의 본문은 오병이어 기적이 있었던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란, 예수님께서 한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고, 남아서 거둬들인 것만 열 두 바구니가 되게 하셨던 기적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던 날 밤에 주님은 제자들을 배에 태워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 벳새다로 보내시고, 당신은 홀로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가셨다(막6:45-46).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막 6:45-46)
주님은 아무리 피곤해도 기도하시면서 회복과 충전의 시간을 가지셨다. 주님께도 회복과 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면, 우리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서 참된 회복과 충전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레크레이션(Re-Creation, 재창조)의 방법이다.
그런데 그 시간에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한 복판에서 풍랑을 만났다. 갈릴리 호수는 지형상 늦은 밤이나 새벽에는 큰 바람이 불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저었다(눅6: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막6:48)
생각해 보면, 깊은 밤에 갈릴리 호수의 한 복판에서 힘겹게 노를 젓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2023년 11월에 통계청에서 발표한 우리나라 국민들의 소득과 지출비용을 보면, 교육비 부담으로 인해서 17세 때 인생최대의 적자를 낸다(동아일보,2023.1129). 그 후 늦어진 취업으로 인해서 27세에 처음으로 수입이 지출을 앞서기 시작해서, 43세에 가장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은퇴와 관련된 61세를 전후에서 다시 수입보다 지출이 앞서면서 적자인생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 그래프를 언뜻 보면, 30-50세 때 소득이 소비를 앞서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소득이 자녀들의 교육비 쪽으로 대부분 집중되면서, 여전히 적자인생이다. 더구나 61세 이후는 수입이 줄면서 고령화와 함께 더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학생은 학생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어른은 어른들대로 힘겹게 삶의 노를 젓고 있다.
이것은 신자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갈릴리 호수에서 풍랑을 만난 것은 불신자들이 아니고, 제자들이다. 그렇기에 신자에게도 어려움이 오는 것을 신앙생활 잘못해서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들 중에 온전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바닷가에서 목회를 하다보니까, 가끔 “우리교회 00는 00동네의 일꾼이여”, “00는 바지락 캐는 일에 선수고, 00는 꽃게 다듬는 일에 선수여”라는 종류의 말을 듣는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마음 한 편으로 안쓰럽고, 무겁기까지 한다. 삶의 짐 중에 가장 무거운 짐은 자식의 짐 같다. 자식농사가 가장 어렵다. 자식은 부모에게 주신 평생의 숙제이자 짐이며, 눈물과 보람이기도 하다. 요즘은 결혼한 자녀들을 A/S까지 해줘야 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처럼 힘겹게 노를 젓는 제자들에게 찾아온 희망의 반전이 있었다. 그것은 주님은 이미 멀리서도 다 보고 계셨다는 것이다(막6:48).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막6:48)
주님은 산에 있었지만, 마음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 아기들이 집안을 기어 다니면, 부모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기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래서 아기에게 위험이 닥치면 순식간에 달려가서 아이를 붙잡는다. 주님도 그러하셨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를 중단하고 급히 바다 위로 걸어가셨다(48절). 그 과정에 베드로가 물에 빠졌던 일도 있었다.
전에는 이 부분을 묵상할 때, 주로 바다 위로 걸어오신 신적인 능력과 물에 빠진 베드로의 믿음 상태에 주로 초점을 맞췄었다. 그런데 이번에 오늘 설교를 위해서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주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깨달음이 있었다. 그것은 주님이 물 위를 걸어오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이다. 주님은 왜 파도치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셨을까? 오늘 본문에 보면, 이때의 시간이 밤 사경 쯤(오전2-6시)이라고 했다. 쉽게 말하면, 이 시간에는 타고 갈 배가 없다. 배를 구할 시간도 없다. 그래서 물 위로 급히 걸어오신 것이다.
결국, 주님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물위를 걸으신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불붙는 사랑 때문에 물 위를 걸어가신 것이다. 이 점에 오늘 힘겹게 삶의 노를 젓고 있는 우리들에게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여기서 깨달을 수 있다. “아하, 내가 믿는 예수님은, 배가 없으면, 걸어서라도 나에게 오시는 주님이시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 환란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주님, 이 순간에도 나를 향해 물 위를 걸어오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의 성품에 우리의 눈이 열리게 하소서!)
그런데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유령인줄 알고 소리쳤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제자들이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오병이어의 기적을 까맣게 잊었기 때문인 것을 지적했다(막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엄청난 기적까지도 기억을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사실은 우리(나)의 모습이다. 우리들은 주님의 은혜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기억은커녕 두더지처럼 땅만 파면서 위를 보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시험에 드는 것은 하나님이 기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은혜)을 쉽게 잊어 버려서가 아닌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연약함이며, 불신앙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과 눈물과 수고로움을 다 보고 계실 뿐만 아니라 나를 구하기 위해서 배가 없으면, 물 위를 걸어서라도 오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러한 주님의 성품을 잊지 말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한다. 성경 최대의 약속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 = 임마누엘)는 약속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그러므로 이러한 변함없는 주님의 성품을 잊지 말자. 힘들수록 믿음으로 십자가를 더 단단히 붙잡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