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뱁티스트의 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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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밥티스트 비젼(Anabaptist Vision)
Harold S. Bender 씀
아나밥티스트 비젼에는 세 가지 중요한 강조점이 있다. 그것은 첫째, 기독교 본질의 새로운 개념화인 제자도(descipleship), 둘째, 교회의 새로운 개념화인 형제됨(brotherhood), 셋째, 사랑과 무저항의 새로운 윤리이다.
I.
아나밥티스트 비젼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기독교 본질의 개념화인 제자도였다. 이 개념은 각 믿는이와 공동체의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본을 따르는 양식으로 형성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아나밥티스트(재침례교도)는 새로 태어남, 거룩, 사랑을 삶의 변화의 문제로 보다는 지적인 문제, 교리적 신조의 문제 또는 주관적인 "체험"의 문제로 보는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내적 체험은 반드시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회개는 반드시 행실의 새로움으로 "증거되어야" 했다. 초기 스위스 형제단이 자신들에 대해 설명하도록 요청을 받았을 때, 그들의 증거의 요지(要旨)는 "눈에 보여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나밥티스트 저자들이 즐겨 강조했던 제자도의 언약 안에서 자신들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의 주님되심(Lordship) 아래로 가져왔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그들의 초점은 루터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인간의 모든 행위에 적용하여, 모든 인간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고수했던 그리스도인을 가리는 참된 시금석은 제자도였다. 아나밥티스트들이 즐겨 쓴 말은 개혁주의자들이 즐겨썼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following)" 것이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상징인 침례(밥티슴)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언약"이자 그리스도께로의 완전한 헌신의 서약이었으며, 단지 체험의 상징이 아니었다. 실로 아나밥티스트들은 믿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을 사용하여 합당한 삶을 살았다. 그들에게 신학은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제자도에 대한 완전한 표준을 선언하였을 뿐 아니라, 같은 시대의 사람들과 심지어 그들의 적들의 눈에 비친 그들의 삶은 일반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이었다는 사실이 자료에 의해 충분히 증거되고 있다. 초기 스위스 개혁자들과 남부 독일 개혁자들은 이러한 아나밥티스트의 업적과 사람의 마음을 끄는 권능을 예민하게 감지했다. 쯔빙글리는 이 사실을 가장 잘 알았으며, 불링거(Bullinger), 카피토(Capito), 바디안(Vadian)과 그밖의 많은 사람들도 아나밥티스트 형제들이 매우 진지하고 헌신적이며 유능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자신들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이 개혁자들이 세운 국가 교회 체제(State Church System)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으며, 더욱이 전체 사회 질서를 변화시킬지도 모를 급진적인(radical) 사항들을 요구하였기 때문에(譯者 註 : 흔히 "급진적인"로 번역되는 radical은 영어의 뿌리, 본질, 핵심을 의미하는 라틴어 radix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믿는이와 관련한 radical은 기독교의 뿌리이자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것입니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이 운동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아나밥티스트들을 가증스러운 위선자라고 공언하였다. 예를 들면, 불링거는 아나밥티스트들을 "하나님의 교회의 악마같은 적이며 파괴자"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명백하게 드러난 아나밥티스트들의 탁월한 삶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쯔빙글리는 스위스 형제단을 반대하는 그의 마지막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이 아나밥티스트들의 삶과 행위를 조사하면, 처음에는 그것이 흠잡을 데가 없으며, 경건하고, 겸손하며, 사람의 마음을 끌고, 참으로 이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비판적인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삶이 뛰어나다고 말할 것이다."
아나밥티스트들에 대하여 증오에 찬 비난의 글을 썼던 불링거 자신도 초기 스위스 형제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나밥티스트들과 연합한 자들은 아나밥티스트 사역자들에 의해 재침례와 회개와 생명의 새로움으로 인도된 후, 저들의 교회에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매우 영적인 행실을 가장한 삶을 살 것이다. 그들은 시기, 교만, 신성모덕, 음란한 대화, 세상의 부도덕, 음주, 폭식을 비난한다. 한마디로 그들의 위선은 극도에 이르며,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불링거는 일찍이 그의 저서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마치 살아있는 성인 처럼 따른다"고 탄식하였다(1531년). 세인트 갈(St. Gall)의 개혁주의자인 바디안은 "경건하고 존경할만한 성향을 가진 자들은 누구나 다 아나밥티슴(재침례)에 호의를 가졌고, 쉽게 빠져들어갔다"라고 증거했다. 스트라스부르크의 개혁자인 카피토는 1517년에 스위스 형제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대부분의 아나밥티스트들에게는 눈에 띄는 경건과 헌신과 어떠한 불성실한 점도 전혀 찾을 수 없는 진정한 열심이 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떠한 세상의 이득을 얻고자 추방, 고문, 말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을 견디어 낸단 말인가? 하나님 앞에서 증거하건대 그들이 결코 지혜의 부족으로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관하여 무관심한 것이 아니며, 신성한 동기에 의해서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532년 베른(Berne) 주(州)의 한 설교자는 베른 의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우리를 비롯하여 우리와 연합한 모든 교회보다 훨씬 더 경건한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들 가운데 만연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
아펜젤 출신의 개혁주의 연대기 작가 Walter Klaser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대부분의 아나밥티스트들은 처음에는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공포하는데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자들이었다."
로마카톨릭 신학자인 Franz Agricola는 1582년에 출간한 저서 "아나밥티스트들의 가공할 오류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존하는 이단 종파 가운데서 외관상으로 아나밥티스트보다 더 겸손하거나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종파는 없다. 외관상으로 드러나는 일반적인 삶에서 그들은 흠잡을 데가 없다. 그들 가운데에서는 어떠한 거짓말, 속임수, 맹세, 싸움, 거친 말, 과음, 외모의 치장, 등을 발견할 수 없으며, 누구든지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겸손, 인내, 올바름, 정연, 정직, 절제, 곧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
1585년에 베른 의회에서 발행한 스위스 형제단에 대한 지시에는 개혁주의 교회의 설교자들과 교인들 가운데 무례한 죄와 악행이 만연하다고 기술하면서, 부언하여 "이러한 상태를 초래한 가장 큰 이유는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경건한 백성들이 스위스 형제단과 연합하기 위하여 교회의 관습을 위반하고 교회를 저버리는데 있다"라고 말했다.
아나밥티스트들의 특성을 가장 잘 기술한 글 중의 하나는 1531년에 세바스챤 프랑크가 쓴 글이다. 그는 비록 아나밥티스트의 적대자였지만, 객관적이고 동정적인 증거자인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쉽게 자신들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을 얻었다....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가진 많은 신실한 자들이 그들에게 이끌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사랑, 믿음, 십자가 만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가혹한 고난을 겪으며 그들은 시종 겸손과 인내를 보였다. 그들은 하나됨과 사랑의 증거로서 서로 빵을 나누었다. 그들은 신실하게 서로를 도왔으며, 서로를 형제로 불렀다.....그들은 박해를 받는 동안 시종 인내하며 겸손하게 순교자로 죽었다."
아나밥티스트들의 업적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추가로 확증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지역에서 일관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던 자들이 아나밥티스트 이단이라는 혐의를 받는 위험에 처해졌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카스파르 스벵크펠트는 자기 입장에 대해 표명하기를 "지금 진실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들이 전 지역에서 모두 아나밥티스트라고 불리듯이, 설교자들과 다른 이들이 지금 나를 아나밥티스트라고 고소하며 헐뜯고 있다." 불링거 자신도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하였다.
"실제로는 아나밥티스트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육욕과 천박함을 단호하게 배제하며, 죄와 악행을 비난하는 자들을 성급한 사람들이 아나밥티스트들이라고 불렀다."
흔히 Taufer-Akten 이라 불리는 아나밥티스트들에 관한 자료를 모아 놓은 세 권으로 된 유명한 전집의 세 번째 책에는 이에 대한 수많은 예들을 수록하고 있다. 1562년에 비텐베르그에서 Caspar Zachen 이라는 사람이 아나밥티스트라는 죄명으로 고소되었으나, 그에 관한 재판 기록에는 그가 다른 이와 사이좋게 지낼 수 없는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며, 맹세하고 저주하는 죄를 범할 뿐 아니라 무기를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아나밥티스트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1570년에 비텐베르그에서 Vohringen 출신의 Hans Jager 라는 사람은 본래 저주하지 않으며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나밥티스트라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Ⅱ
아나밥티스트 비젼의 두 번째 주요 요소로서, 생명의 새로움이라는 주요한 원칙에 의해 교회에 관한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졌으며 기독교에 적용되었다. 이 개념의 본질적 핵심은 참된 회개에 기초하여 거룩한 삶과 제자도의 자발적인 헌신을 수반하는 교회의 지체됨이었다. 이 비젼은 법과 힘에 의해 의무적으로 출생에서 무덤까지 전 주민을 대형 교회의 교인으로 만드는 중세의 개념을 계속 유지하고 있던 개혁주의자들의 교회 개념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유아 세례에 대한 아나밥티스트들의 반대 입장은 반드시 교회의 새로운 개념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유아 세례는 아나밥티스트들이 국가 교회를 거부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이유에 대한 상징에 불과했다. 어떻게 유아가 기독교의 참된 의미를 아는 지식에 기초하여 헌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상상컨대 유아들이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는 있지만 (아나밥티스트들은 이 점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만), 그들의 삶을 서약함으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응답할 수 없다. 그러한 유아 세례는 무의미할 뿐 아니라, 실제로 기독교의 본질과 교회 안에서 지체됨을 참되게 이해하는데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 오직 성인이 되어 받는 침례만이 이성적인 삶의 헌신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이 계시하는 최고의 표준적인 삶을 살기로 서약한 헌신되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몸된 교회의 개념에 관한 필연적인 결론은 세상으로부터 교회의 분리를 고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적인 삶의 방식을 닮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사회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원칙을 실행하는 것을 허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는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서 세상적인 방식을 실행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따라서 유일한 길은 분리, 곧 그리스도의 길이 실행될 수 있는 곳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으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리의 원칙에 관하여 메노 시몬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복음적인 성경기록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교회는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교리에서, 삶에서, 경배에서 세상과 분리된 사람들이라고 가르친다"
1532년 Zofingen에서 벌어진 대논쟁에서 스위스 형제단의 대표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며 그리스도의 본성을 본받는다. 만약 교회가 세상과 일치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정할 수 없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세상과의 불일치의 원칙은 단지 제자도의 적극적인 요건에 대한 소극적인 표현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세상"이라고 불렀던, 같은 시대의 사회 질서에 대한 심판을 상징한다는 의미이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세속 사회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세상과의 불일치라는 개념의 필연적 결과는 교회가 겪는 고난이었다. 진지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애쓰는 자에게 세상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나밥티스트들은 반대를 예상했다. 그들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겪게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취했다. 그러나 또한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그분의 격려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취했다. 1524년에 그레벨(Conrad Grabe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그리스도인 믿는이들은 늑대들 가운데 있는 양이며, 도살당할 양이다. 그들은 고난, 곤고, 환란, 박해, 고통,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불로 시험을 받아야 하며, 육체의 죽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대적을 죽은 것으로 처리함으로 영원한 안식처인 선조의 나라에 도달해야 한다"
스위스 바젤(Basel)의 교수인 Earnest Staehelin은 이렇게 말한다.
"아나밥티슴(재침례)은 삶과 실행에서 초대 교회를 따르려는 진지한 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분의 주장과 연합한 자는 필연적으로 세상의 반대를 접하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그대로 간직해 왔다."
아마도 아나밥티스트들이 그같이 분명하게 교회와 세상 사이의 대립을 알게 된 것은 박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박해는 그들이 유럽의 기독교에서 실행되고 있는, 이름만 그리스도인(sub-Christian)인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세상을 본받았거나 또는 형편이 더 나을 때까지 믿음의 실행을 보류하고 David Joris 처럼 위선적 행위를 하였더라면 박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굴의 용기와 변함없는 정직으로 믿음의 삶을 살았고, 현존하는 세상 질서를 무시하는 길을 택하였으며, 그 결과를 감수했다.
교회에 관한 아나밥티스트 비젼의 근본은 교회 지체들 간의 참된 형제됨(Brotherhood)과 사랑의 지속적인 실행이었다. 이 원칙은 단지 경건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진실로 서로 돕는 영으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소유를 나누는 실제적인 실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528년에 순교한 스위스 형제단의 한스 레오폴드(Hans Leopold)는 형제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것을 알았을 경우, 교회의 지체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의무라고 믿는다"
1535년에 순교한 스위스 형제단의 하인리히 사일러(Heinrich Seil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자기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는 단지 청지기일 뿐이다"
초기 후터파의 책에는 스위스 형제단이 침례 받기를 원하는 자에게 던지는 질문 중에 하나가 "기꺼이 이 세상의 재물을 전부 드려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섬기고자 하는가"라고 기술하고 있다. 1557년에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스위스 형제단이 침례를 베푸는 것을 방문한 한 프로테스탄트는 증거하기를 그들은 침례를 받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경우, 기꺼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드려서 형제들을 섬기고자 하는가?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어떠한 궁핍한 지체도 빠짐없이 채워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말했다. 형제들을 신랄하게 적대한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모든 믿는이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의 동기로, 필요한 경우, 자기 소유를 전부 드려서 궁핍한 형제에게 생활 필수품을 공급하는 의무를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이러한 완전한 형제애와 청지기 직분의 원칙을 단지 이론적으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행하였다. 1526년에 후터파 형제단은 개인 재산의 소유를 전적으로 거부하고, 그리스도인이 재산을 공유하는 완전한 형태를 삶의 방식으로 취하였으며, 그 실행을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후터파는 개인의 재산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가장 큰 적이 된다고 믿었다. 16세기와 17세기의 역사에서 고무시키는 이야기 중 하나는 후터파가 재산을 완전히 공유하는 삶의 방식을 성공적으로 실행하였다는 것이다.
Ⅲ
아나밥티스트 비젼에서 세 번째 주요 요소는 모든 인간 관계에 적용한 사랑과 무저항의 윤리였다. 형제들은 이 윤리를 전쟁, 다툼, 폭력,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는 의미로 이해했다. 1524년에 콘라드 그레벨(Conrad Grabe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완전히 끝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검을 사용하거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옛 언약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하나님께서는 복음과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검으로 지키시지 않으신다. 따라서 그들도 자신들을 검으로 방어해서는 안 된다."
1544년에 남부 독일의 지도자 필그람 마르펙(Pilgram Marpeck)은 마태복음 5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 육체적, 세상적, 육적인 싸움과 투쟁과 전쟁은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곧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키셨으며,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따라야 할 양식으로 주신....이 법을 통하여 폐지되고 소멸되었다"
1545년에 후터파의 지도자인 피터 리데만(Peter Riedemann)은 다음과 같이 썼다.
"화평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왕국, 곧 그분의 교회를 세우셨으며, 자신의 피로 사셨다. 이 왕국 안에서 세상에 속한 전쟁은 모두 끝났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전쟁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복수를 위하여 검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1550년에 네델란드의 메모 시몬스(Menno Simons)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다시 태어난(거듭난) 자는 전쟁에 나가서는 안 되며 싸움에 참여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검을 부셔서 쟁기를 만들고, 창을 부셔서 가지치는 낫을 만든 화평의 자녀들이다. 따라서 전쟁에 관해 전혀 모른다.... 우리는 철로 만든 창과 검을 인간의 피와 돼지의 피를 동일하게 여기는 자들에게 맡긴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초기 아나밥티스트 형제단과 그들의 후손들이 철저히 믿고 단호히 실행했던 이러한 무저항주의 또는 성경적 평화주의의 원칙에서, 아나밥티스트들은 시대를 앞서간 창조적인 인도자들이었다. 그들은 퀘이커교도보다 125년을 앞서 무저항주의를 실행하였다. 또한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모두 국가 정책의 방편으로 전쟁을 승인할 뿐 아니라 종교적인 갈등에 사용하던 때에 아나밥티스트들은 이 원칙을 고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때로 피터 첼시키(Peter Chelcicky)와 같은 초기의 대언자들이 유사한 견해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원칙을 계속해서 실행하지 못했다.
아나밥티스트들의 비젼을 조사해 보면 두 가지 초점이 확실해진다. 첫 번째 초점은 기독교의 본질적 특성과 관련된다. 기독교는 주로 의식적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인가(로마 카톨릭주의)? 기독교는 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내적 체험을 누리는 것인가(루터주의)? 아니면 무엇보다도 제자도를 통한 삶의 변화인가(아나밥티슴)? 아나밥티스트들은 의식주의자도, 신비주의자도 경건주의자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나 그리스도인의 방식을 살고자 헌신하는 모든 자들에게 신성한 원칙 위에서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것이 없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초점은 교회와 관련된다. 아나밥티스트들에게 교회는 제도도 (로마카톨릭주의), 신성한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도(루터주의), 혹은 개인의 경건을 위한 수단도 아니었다(경건주의).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이 충만이 표현되어져야 하는 사랑의 형제됨이었다.
아나밥티스트 비젼은 개혁시대에 존재했던 주요한 네 그룹, 곧 카톨릭교도, 칼빈주의자, 루터교도, 아나밥티스트의 사회적 윤리를 비교함으로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카톨릭교도와 칼빈주의자는 비슷하게 세상에 대하여 낙관적이었으며, 세상을 구속할 수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비록 이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였지만, 전체 사회 질서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을 수 있으며 기독교화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교도와 아나밥티스트는 세상에 대해 비관적이었으며, 전체 사회질서의 기독교화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사회 질서에 대한 이들 두 그룹의 결과적인 태도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루터교도는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의 질서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세상과 타협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으로서 세상의 악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전장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하여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오직 그의 개인적인 체험 안에서만 그리스도인답게 참되게 살 수 있다. 아나밥티스트는 이러한 견해를 전적으로 거부했다. 악과 어떠한 타협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영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실행을 거스리는 기존 사회 질서에 어떠한 행위로도 참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세속적인 체제를 떠나서, 교회의 형제됨의 교제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각 개인이 회심하여 세상에서 교회로 옮겨짐으로 그리스도인의 질서가 확장되는 것만이 사회 질서를 기독교화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아나밥티스트는 실재적이었다. 긴 안목으로 미래를 바라볼 때 아나밥티스트는 인류의 대부분이 그와 같은 높은 이상을 가진 형제됨으로 들어갈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 기나긴 고통스러운 대립이 있을 것을 예상했다. 그는 결코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때를 기대하지 않았다. 교회는 항상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파멸에 이르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드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그 길이 비좁아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였다(눅 9:23)(마 7:13,14). 만약 이 예상이 너무 낙담스러운 것 같다고 말한다면, 아나밥티스트는 형제됨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과 기쁨으로 충분히 충만한 것이라고 응답할 것이다.
아나밥티스트 비젼은 인간 사회를 다시 세우기 위한 상세한 청사진이 아니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의 한 가운데 세우려고 하신다고 믿었기에 즉시 행하고자 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산상수훈이나 또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그 밖의 다른 비젼이 하늘에 속한 비젼이라는 것이 단지 마지막 심판 날까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긴장가운데서 지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분께서 가르치신 바를 실행해야 하며, 그분께서 걸으셨던 곳에서 그분의 은혜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다고 믿는 바이다."